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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야담 03

by 토페 posted Sep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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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Crown Prince Yul>












 세상이 뒤집어져도 해는 뜬다. 어슴푸레 동이 텄다.


 윤기가 나무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곁에는 비단천에 칭칭 둘러싸인, 천을 감싼 인영이 누워있었다. 소중한 보물이라도 다루듯 윤기가 조심스레 모포를 끌어내렸다. 하얗고 말간 얼굴이 꼭 죽은 사람의 것 같았다. 손가락을 코 아래로 뻗어 숨을 확인했다.



“…….”



 멀쩡히 달려있는 숨을 확인했음에도 창백한 안색에 안심이 되질 않는다. 윤기가 허리를 숙여 지민의 환부를 다시금 확인했다. 대충 저잣거리에서 주운 비단 천으로 질끈 묶고 산에서 찾은 약초를 대충 얹어놓아 지혈이 되긴 했다.


 지민의 가슴팍에 귀를 댄다. 쿵쿵. 그 박동을 안정제 삼아 지민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옮긴다. 새근거리는 숨이 느껴진다. 이렇게 보면 꼭 자고 있는 것만 같았다. 늘 혈색 있던 뺨이 차갑게 식어있다는 것만 빼면.


 윤기가 지민의 뺨을 함부로 어루만졌다. 커다란 손 안에 작은 얼굴은 폭 담긴다. 손길이 희한하게도 익숙하다. 감히 노비주제에 양반의 신체를 함부로 만지다니, 들켰다면 매질을 면치 못했을 일이거늘. 윤기는 이미 많이 해본 일인 것처럼 올망졸망한 이목구비를 손으로 문질러본다. 낮은 저음으로 주술이라도 걸 듯 지민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민아. 버텨라. 꼭 살아서 내게 와라.”



 새근거리는 숨을 뱉은 도톰한 입술까지 쓸어보다가, 결국 주먹을 꽉 쥐며 손을 떼어낸다. 윤기는 다시금 일어나 지민을 등에 업었다. 나무 사이를 지나 더더욱 깊숙한 숲 속으로 발을 옮겼다.


 울창한 숲으로 끊임없이 올라가는 발걸음은 아는 길을 걷는 듯했다. 죄다 똑같이 생긴 높다란 나무를 지나고 지나니 마지막에 등장한 건 동굴이다. 냇가가 시작되는 곳으로 넓지 않게 물이 동굴 앞에 고여있었다.



“여기를 너와 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어릴 적 지민과 처음 만난 곳. 이 동굴이 왠지 모르게 생각이 났다. 당장 둘만 있을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아무래도 어릴 적의 기억 탓일지도 모르겠다.


 지민을 업은 채 윤기가 물가를 건넌다. 찰박거리는 물이 발 밑에서 부서진다. 깊지 않은 동굴 안에 들어가 그곳에 지민을 내려두었다. 그러나 습기 때문인지 바닥이 조금 축축하다. 윤기는 그 옆에 누워 지민을 끌어안았다. 온기를 나눠주기 위해. 아니, 사실은 제가 살기 위해. 이 따뜻한 체온이 있어야만 자신의 불안이 사라질 테니.


 둘만 남은 세상에서 윤기는 지민을 감싼 팔에 꽉 힘을 주었다.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잠이 그제서야 조금씩 몰려왔다.








야담夜談









 백정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다.



“저 백정새끼, 또 여기 보이네. 퉤. 너 내가 장사 안 되니까 여기 얼씬거리지 말라고 했지!”



 포목상인이 어린 소년을 향해 윽박을 지른다. 소년은 다소 건방지게 한쪽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귀를 후비적거린다. 10살치고는 굉장히 불량한 시정잡배 같은 태도였다. 민윤기가 바닥에 침을 퉤 뱉는다. 포목상인은 눈깔을 부릅뜨며 버럭 외쳤다.



“이 천한 백정 놈이!”

“고기나 옷이나. 그게 그거지.”

“아니, 이 개념 없는 놈이 하는 말 좀 보게!”



 아주 두들겨 패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마. 포목상인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다가오자 윤기가 길가 반대편을 눈짓했다.



“객이 오는데요?”

“너, 이 자식, 아,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이 놈은 무시하면 됩니다. 어떤 물건 찾으러 오셨습니까요?”



 굽신거리는 포목상을 보며 윤기는 마른 체구로 그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포목상이 보지 못하는 사이 윤기의 품에는 천이 하나 들려있었다. 잽싸고 날랜 움직임에 아무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것은 포목상이 지난번 떼어먹은 고기 값이다. 이런 인간들이 차고 넘치는데 왜 자신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지, 윤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윤기는 사람을 싫어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아무도 저를 사람 취급하질 않고 짐승으로 대하니 똑같이 사람들이 혐오스러웠다. 툭하면 얻어맞고 손찌검 당해 땅바닥을 구르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환멸이 났지만 어찌하겠는가. 애초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죄다. 10살이라는 나이에 벌써 윤기는 포기하는 삶에 순응했다.



“윤기 너 이 녀석, 어디 갔었어! 오늘 박대감 집에 가야 한다고 내 귓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건만!”



 집으로 돌아가니 우락부락한 사내가 윤기의 등짝을 퍽퍽 두들겼다. 아버지였다.



“그렇게 늦지도 않았어.”

“안 늦긴! 어서, 어서 거 짐 챙겨라.”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백정의 일이 대물림 된다. 윤기는 익숙하게 돼지를 잡을 도구들을 챙겼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길을 떠나며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윤기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박대감이 누구야. 이 마을에서 제일로! 제일로 높은 분 아니냐. 그곳에서 특별히 우리한테 맡아달라고 했단다. 백정이라도 다 같은 백정이 아니라 이 말이지 암. 내 작업 실력이 좀 좋아? 고기라는 것이, 그냥 발라낸다고 다 같은 고기가 아니다 이 말이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지! 그걸 알아보신 게야. 응? 그 높은 분이, 또 보는 눈도 있으시단 말이지. 인품도 세상세상 바르고 그런 양반나리를 내 또 본 적이 없다. 윤기야 너도 이번에 가서 잘 보여야 되니 열심히 해라. 알아듣겄나.”



 알아듣긴커녕 민윤기는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박대감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 모르겠다만 양반이 백정을 대우해준다니. 퍽이나. 윤기가 속으로 비웃었다. 차라리 물고기가 글을 뗐다는 게 더 그럴싸하다. 평민도 멸시하는 백정일진데, 양반이 볼 땐 한낱 오물에 불과할 거다. 말하는 쓰레기 정도. 오물이 다 같은 오물일 뿐이지 뭐가 다르겠나.


 윤기는 어서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산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숲에서는 모든 게 자유롭고 평등하다. 짐승들 앞에서만큼은 마음을 놓아도 됐다. 아무래도 같은 짐승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연습중인 토끼사냥이나 더 하고 싶었다.


 그 사이 대궐 같은 박대감의 집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가장 큰 기와집을 고르라면 바로 이 집일 것이다. 대문 앞에 있던 노비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네가 오늘 작업을 맡은 놈이냐?”

“예예, 그렇습니다.”

“따라와라.”



 노비는 뒷마당으로 길을 안내했다. 윤기는 아버지가 돼지를 받고 이리저리 작업을 구상하는 동안 뒤에 빠져있었다. 지난 번 놓친 토끼굴 위치가 바뀌지 않았어야 할 텐데. 이리가 이미 잡아먹은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나 할 때였다.



“와아! 날개가 움직여! 덕대야, 보았어? 난다! 날갯짓을 했어!”



 꺄르륵.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가 담벼락을 넘어 들린다. 시냇가에서 들었던 물소리보다 깨끗하다.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윤기의 귀를 간지럽게 했다. 그 목소리는 여지껏 윤기가 들은 그 어느 목소리보다 행복해 보였다. 짜증만 섞인 저잣거리 사람들의 목소리도 아니고, 마냥 시끄러운 또래 아이들의 목소리도 아니고.



“까동이도 이제 날 수 있겠지? 곧 완전히 다 나을 거 같아. 그렇지, 덕대야.”

“아이고 고놈 죽을 뻔 하더니만 용케 살았네.”

“참말 다행이다.”



 도란도란 아주 신이 났다. 호기심이 인다. 목소리도 이렇게 고운데,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윤기는 저도 모르게 담벼락으로 다가가 높이 뛰어 끝을 붙잡고 매달렸다. 고개를 빼 담벼락 너머를 확인했다.


 고운 분홍색의 비단옷을 입고 있는 아이다. 계집아이인가? 덩치가 아주 조그마한 걸 보니 저보다도 어린 듯했다. 그러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뒷모습으로 돌아서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연신 덕대라는 노비에게 행복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댔다.



“까동이 너 조금만 더 힘내. 그럼 다시 멋지게 하늘을 날 수 있을 거야.”



 까동이가 뭔가 했더니 웬 까치다. 까치는 다친 건지 날개에 하얀 천을 감고 있었다. 아이는 그 까치가 마냥 기특하다는 듯 연신 꿀타래 같은 목소리로 칭찬을 해주었다. 까동이 네가 다시 하늘을 날면 무척 멋질 거야.



“덕대야 우리 감 어디 있지? 까동이한테 주자. 먹으면 더 힘이 날 거다.”

“예예, 소인이 찾아 가져오겠습니다.”



 노비가 아이로부터 멀어진다. 아이의 뒤통수가 참 동그랗다. 윤기는 힘이 빠지는 팔에 더욱 힘을 줘 담벼락에 매달렸다. 돌아선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예끼! 이놈아! 너 지금 뭣하고 있냐!”



 담벼락에 매달려있던 윤기가 뜯겨 뒤로 주르륵 내려갔다. 아버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버지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윤기를 꾸짖었다.



“이놈아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냐. 양반네 집안은 훔쳐보는 게 아니다. 아무도 없어 천만 다행이지. 걸렸다간 모가지가 무사할 듯 싶으냐?”



 아버지가 윤기의 등을 퍽퍽 쳤다. 윤기는 얌전히 등을 내주며 인상을 썼다. 알았다고요. 안 봅니다. 안 봐요. 여기 와서 돼지 잡는 거나 도와라. 아버지의 말에 돼지를 줄에 묶었다. 돼지를 기절시키고 도끼질을 한다. 피가 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윤기는 일말의 호기심도 같이 죽였다. 그래. 백정이 양반댁 궁금해해서 뭐하게. 고기로 남은 돼지를 보며 윤기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됐지. 이제 갈 거다.”

“거참. 알았다, 알았어. 이거만 더 끝나면 보내주마.”



 윤기는 미련 없이 대감집 문을 넘어섰다.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을 터일 테니.







***







 마을의 산은 제법 큰 축에 속했다. 높다란 나무들이 복잡하게 우거져 있어, 다 큰 어른들조차 쉽지 않아하는 산이었다. 작고 날쌘 몸놀림으로 민윤기는 그 산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지리를 꿰뚫고 있었다. 놓친 토끼굴을 확인하니 이미 토끼는 그 집을 버리고 떠나있었다. 쯧. 윤기가 혀를 찼다. 그럴 만도 하다. 박대감 집에 잘 보여야 한다고 아버지한테 붙들려 벌써 산에 오지 못한 지 일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굴을 찾아야겠네. 판단을 내린 윤기는 점점 더 산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꽤나 깊은 곳에 위치한 동굴 쪽으로 당도했다. 수풀에 가려진 곳으로 어지간한 사람들은 보기 힘든 곳이다. 민윤기만의 비밀장소다. 잠시 쉬기도 할 겸. 윤기가 동굴을 향해 가려고 할 때였다.


 부스럭. 방금 지나온 풀숲이 커다랗게 움직인다. 윤기가 멈칫했다. 저 정도로 풀숲이 움직일 정도라면 커다란 짐승이다. 분명 커다란 산짐승들이 없는 길로 다니고 있었는데 왜. 긴장하여 제 손으로 만든 활을 꽉 쥐었다. 여차하면 쏠 요량이다. 그리고 한참을 부스럭거린 풀숲이 무언가를 토해냈다. 무언가는 네 발로 기어 나왔다.



“흐잉, 아! 아파아….”



 웬 사내아이다. 포실한 뺨의 사내아이는 분내가 날 것처럼 생겼다. 말간 눈망울에 유달리 뽀얗다. 저렇게 하이얀 건 눈뿐이 못 봤다. 어쩌면 왕에게만 진상되는 귀한 타락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그만큼 사내아이는 윤기가 본 사람 중 제일 귀해 보였다. 맥이 빠진 윤기가 활 시위를 내렸다. 흐윽. 우는 소리를 내던 사내아이도 마찬가지로 윤기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사람!”



 살았다! 그 목소리에 윤기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담벼락 너머로 들리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 애는 계집아이였다. 비단옷을 입은 애들은 이런 거구나. 윤기는 그리 생각했다.



“잘 되었다! 반갑다. 나는 지민이라 한다. 내가 여기서 길을 잃었는데 너는 여기 길을 아는…어, 어? 어디 가는 거야?”

“사냥감이 아니네.”

“뭐?”



 지민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황당한 얼굴을 했다. 사냥감…? 아니, 저기! 윤기는 지민이 부르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바삐 발걸음을 놀렸다. 세상에 저런 무례한! 지민이 발간 뺨을 경악하며 붙잡았다.



“사람을 만났는데 무시하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 그건 아주 못된 행동이다!”

“응. 그래. 난 원래 못 됐다.”



 윤기가 손을 휘적거리며 멀어진다. 지민의 눈에 당황이 어룽거린다. 사람은 늘 갈고 닦아 바른 본성을 따라가야 한다고 스승님이 하셨는데, 저 인간은 도통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게 뭐지. 올바른 양반의 정석 박지민 도련님은 8살 인생 동안 평생 이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다른 때라면 훈계하며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겠지만. 당장 저 사람을 놓치면 끝이었다. 이 평생 봐도 모를 병법서 같은 숲 속에 혼자 남겨져선 안 된다. 그럼 그야말로 비극적인 일이 되는 거다. 지민이 벌떡 일어나 황급히 윤기를 따라붙었다.



“너 이 길을 아는 거지? 잘 됐어. 나를 좀 도와줘. 부탁할게. 내가 숲을 여기까지 들어온 적이 처음이라 길을 잃고 말았다. 나를 좀 도와주련?”

“굉장히 시끄럽네.”

“무, 무어라? 시, 시끄럽….”



 이런 막돼먹은 말은 처음이라 지민이 다시금 충격에 빠졌다. 윤기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 말했다. 지민을 더욱 혼란으로 빠뜨릴 무례함으로.



“야.”

“야…?”

“네가 여기 들어와서 길을 잃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네가 잃었으니 네 길은 네가 찾아. 한 시가 바쁜 사람 괴롭히지 말고. 그 정도도 못하면 숲에 왜 들어온 거냐? 뭐 그럼 네 모자란 머리를 탓해야지.”



 곱게 양반가 안에서만 자라고, 저잣거리도 노비들과 같이 이동한 지민에겐 서책에서조차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시정잡배 말투였다. 모, 모자란 머리? 스승님한테 영재가 따로 없다는 말을 들은 내게 모자라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윤기는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듯 지민을 휙 피해 지나간다. 지민이 눈가를 뾰족하게 뜨고 다시금 윤기의 앞길을 막아 선다. 당당하게 팔도 척 허리춤에 올렸다.



“그런 몹쓸 말은 사람에게 쓰면 아니 된다! 너! 나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큰 일이 날 거다!”

“네가 뭔데.”

“내가!”



 지민이 배를 당당하게 내밀었다.



“내가 바로!”



 그리고 그 순간 글짓기 수업을 내팽개치고 산으로 몰래 도망 온 과거가 떠올랐다. 만약 그 사실을 이 아이가 알고 그대로 집으로 데려다 줬다간. 어머니의 차디 찬 얼굴이 눈에 훤하다.



“내가….”

“…….”

“내가, 그러니까 내가….”

“그래서 뭔데.”

“…난 지미닌데….”



 모, 못들은 걸루 해라…. 민망함에 지민의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윤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매를 틀어 올리며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비단옷이며 곱게 자란 어투며 어디 잘 사는 상인 집안의 자제인가 보다 싶었다. 양반, 그것도 이런 또래 아이가 노비도 없이 숲을 들어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래. 알았다. 이제 나 따라오지 말아라.”

“기, 기다려다오! 잠시만!”



 보폭 크게 멀어지는 윤기를 지민이 허둥지둥 뒤쫓는다. 멀어지는 등에 다급해진 나머지 지민은 튀어나온 나무 뿌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어, 앗!”



 지민이 한 바퀴 데구르르 굴러 넘어진다. 윤기가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니 지민이 엎어진 채 낑낑대며 그대로 누워있었다. 험난한 산길에 익숙하지 못한 도련님은 일어나는 것조차 쉽게 하지 못했다. 윤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지민을 바라보더니 하아, 한숨을 크게 쉬었다. 대체 이 거슬리는 찹쌀떡은 뭐란 말인가. 눈도 못 뜬 강아지 같은 게 왜 이 산에 온 거야.


 지민은 꿋꿋하게 다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아얏. 그러나 넘어지면서 잘못 된 건지 발목이 시큰거리며 아팠다. 이제 저 사람을 따라잡을 수도 없겠다. 이대로 산에 혼자 꼼짝없이 남겨지는 건가. 눈물이 핑 돌았다. 다 제 탓이 맞다. 무례한 소리이긴 했지만 저 자의 말도 틀린 게 없다. 덕대도 없이 토끼를 만나겠다고 산에 들어온 스스로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그런데 단숨에 떠날 줄 알았던 무례한 자가 오히려 반대로 지민에게 성큼 다가왔다.



“야.”



 지민이 울망한 눈으로 윤기를 올려다본다.



“걸을 수 있냐. 산에선 한눈 팔고 그러면 안 돼.”



 윤기는 지민의 발목을 만져보더니 눈살을 좁혔다. 그러더니 대뜸 지민의 앞에서 돌아선다. 윤기의 등이 내밀어진다.



“엎혀라.”

“…어, 어?”

“어두워지면 위험해서 못 내려가. 여기 호랑이 나온다.”

“호, 호랑이?! 그럼 잡아 먹혀…?”

“그래. 너 같은 건 한 입에 잡아 먹힌다. 근데 뭐. 넌 딱 봐도 맛없게 생겨가지고 잘 안 먹긴 할 거 같, 억.”



 지민이 후다닥 황급히 윤기의 등에 업힌다. 팔로 윤기의 목을 꼭 감쌌다. 발발 떨리는 손을 느낀 윤기가 스스로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겁 많기는. 웃기는 애다. 윤기는 지민을 업고도 자리에서 거뜬하게 일어났다. 산을 헤집으며 돌아다니고, 무거운 생고기까지 나르는 민윤기에게 이 정도 가벼운 무게쯤은 별 것 아니었다.



“우리 빨리 가자. 나는 그렇다 쳐도 같이 있으면 너도 위험한 게 아니냐? 나를 안 먹고 호랑이가 널 먹으면 어찌해.”

“그것도 그렇네.”



 이 애는 뭘까. 그냥 한 번 해본 말인데 민윤기의 말을 철썩 같이 믿는다. 곱게 자란 꽃 같다. 그런데 의외로 그게 재미있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새로운 기분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뭘 안다고, 이 냄새 나는 백정 새끼. 처음 만난 사람에게 듣는 말이 그런 게 아니라 평범한 대화라니, 이런 경험은 손에 꼽는다. 제 또래 중에서는 아예 처음이었다.


 윤기는 고대하던 토끼사냥을 접은 채 지민을 업고 산을 내려가는 것을 택했다. 윤기 등에 업힌 지민이 쫑알쫑알 말을 걸어왔다.



“고마워. 날 이렇게 도와줘서. 아까 나보고 머리가 모자, 큼큼, 아무튼! 그 말들은 용서해줄게.”

“그래. 용서해줘서 고맙다.”

“그런데 너 산을 진짜 잘 아나 보구나? 나는 여기 와서 도통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죄다 왔던 길이 왔던 길이고…눈이 빠지는 줄 알았어. 매일 오는 거야?”

“매일은 아니고 가끔 틈날 때마다. 꽉 잡아라. 빨리 내려갈 거니까.”

“응!”



 윤기가 바위를 밟고 땅을 밟으며 발걸음을 재게 놀린다. 지민이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와아!



“너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빨리 다닐 수 있다니! 나는 하늘을 나는 줄 알았어. 정말정말 멋지다.”



 윤기가 지민을 업은 게 아니라면 반짝이는 눈망울을 마주할 수 있었을 터였다. 윤기는 뒷목이 새삼 간지러웠다. 칭찬도 처음이다. 정말 하늘에서 똑 떨어진 것만 같은 건 이 애다. 뭔 사내아이가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잘 하나. 등에 업힌 체온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업은 탓인지 더워진다. 윤기는 괜히 툭툭거렸다.



“야 형님이라고 불러라. 쬐깐한 게.”

“쬐, 쬐깐? 난 작은 게 아니다! 아직 크고 있는 중인 거야. 아버지가 내게 그러셨다. 그리고 너도 그렇게 큰 키는 아니면서 나한테 그리 부르면 안 된다.”

“너 몇 살인데.”

“너는?”

“10살.”

“…나, 나보다 많네.”

“내가 형님이네.”



 사실상 백정은 형님이라는 말을 평민으로부터도 들을 수 없다. 그리 부르라 했다간 아버지 말대로 모가지가 뎅강 잘려나갈 거다. 그러나 왠지 윤기는 이 숲에서는, 이 산에서는 그게 될 것 같다고 여겼다. 지민은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다가, 통통한 입술을 달싹였다.



“형님….”



 그러더니 윤기의 등에 얼굴을 폭 묻었다. 따끈따끈한 온도에 부지런히 움직이던 윤기의 발이 멈칫했다. 지민은 쑥스러운 듯, 기대감에 차 윤기의 등에 대고 말했다.



“나는 혼자라 평생 형님을 가져본 적이 없어. 매일 혼자 놀아서 형님이랑 같이 노는 게 소원이었어. 그래서 언제나 부르는 게 꿈이었는데….”

“…….”

“내 형님 해줄 거야?”



 그저 저잣거리에서는 흔하게 쓰이는 말인데. 그렇게 부술 수도 있는 기대감이다. 그러나 윤기는 평소대로 무자비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등에 있는 묵직한 무게감이 지나치게 따뜻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뒷목에 닿아오는 살랑거리는 숨결이 간지러웠거나. 윤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참말?”



 끄덕끄덕. 지민이 활짝 웃으며 윤기의 목을 더욱 끌어안는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담벼락 너머 들었던, 그 꿀타래 같은 음이 윤기의 귓가에 대놓고 박힌다.



“형님! 이제 내 형님 해주기로 약조한 거야.”

“어.”

“형님 이름은 뭐야?”

“…민윤기.”

“형님! 윤기 형님!”



 지민이 신이 나 발을 동동 흔들었다. 야 무거워. 넘어지니까 흔들지 마. 윤기는 괜히 면박을 주었다. 발바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민은 알았다고 하더니 내내 윤기의 이름을 말해주며 좋아했다.



“형님, 윤기 형님. 우리는 이제 떼어낼 수 없는 사이가 된 거여요. 우리 아버지가 호형호제하는 사이는 그런 거라 했습니다. 아우는 형님한테 예를 갖춰야 한다고 했어요.”



 그 순간 민윤기는 어쩌면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어느덧 저잣거리에 도착했다. 지민이 무언가를 보고 급히 저잣거리 어귀에서 내려달라 한다. 내려준 윤기에게 지민이 대뜸 손을 꼭 잡아온다. 얼기설기 찢긴 윤기의 옷과 달리 지민의 옷은 귀한 비단이다. 윤기는 그게 꼭 저잣거리 이야기책에서나 전해져 내려오는 날개옷 같았다. 무릉도원에서나 입는 그런 옷.



“형님 다음에 꼭 또 보는 거예요.”



 지민이 속달거리더니 손을 빼내 흔들며 멀어진다. 윤기는 물끄러미 지민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토끼 따위는 민윤기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