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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04:57

[슈짐] 야담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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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Load to Carry>









 윤기는 미친 듯이 달려 대감집에 도착했다. 잔치가 막 끝난 건지 하나 둘 사람들이 문턱을 넘고 있었다. 아 오늘 아주 좋았네. 박대감 장손이 언제 이렇게 훌륭히 자랐는지. 세월 참 금방 지나가지 않나. 허허실실 웃는 그들의 사이를 윤기는 비집고 들어갔다. 양반들이 혀를 끌끌 찼다. 저저.



“잡놈이 저리 경박스럽게 뛰어다니고.”

“오늘이 잔칫날이라 넘어가는 줄 알아라. 어딜 감히 양반 앞길을.”



 그들은 혀를 차며 문 밖으로 향했다. 수많은 비단옷이 윤기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도련님! 목청이 터져라 외치며 박대감이 머무는 사랑채로 달렸다. 그 꼴을 발견한 향소가 기겁하며 윤기를 붙잡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아직 다른 양반님들 계신 거 안 보여?”

“도련님은, 도련님은 어디 계시냐?”

“그걸 네가 묻니? 도련님이 어디 계시긴. 아까 네가 그 지랄을 하고 홀랑 사라…, 응? 근데 너 왜 안색이 창백하….”

“어여 말해라. 시간이 없다. 도련님 지금 어디 계시냐?”



 윽박지르듯 외치는 모습에 향소가 움찔 떨었다. 향소는 이 정도로 다급한 윤기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너 왜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구니.



“도련님께선 좀 전에 덕대와 저잣거리로 나가셨어. 너 찾겠다고 아까 가셨는데 이제 도착했을 거다. 그런데 너랑은 만나지 못한 모양이네.”

“뭐? 저잣거리?”



 윤기가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욕지기를 거칠게 내뱉었다. 다시 심장이 쾅쾅 뛰었다. 흡사 공포였다. 혹시라도 지민이 물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발 밑이 푹 꺼지는 것만 같았다. 향소가 덩달아 초조해진다. 매사 심드렁한 민윤기가 이렇게까지 날뛰니 일이 나도 보통 일이 난 게 아닌 듯했다. 뭔데 그래.



“도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거니?”

“도망가라. 묻지 말고 무조건 도망가. 대감어른들께도 다 알려. 모두들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 가능한 멀리 떠나.”

“갑자기 그게 무슨 호랑이 풀 뜯어먹는 소리야. 방금 도련님 혼인 잔치를 했는데 어찌 떠나.”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그런 말을 올리면 경을 친다. 천한 네까짓 게 이 좋은 날을 망치냐며 매를 맞을 게 뻔했다. 질겁하는 향소를 윤기가 어깨 단단히 붙들었다.



“도망가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 내가 직접 봤다.”

“뭐? 그게 무슨,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니?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먹어.”

“자세히 이야기 할 시간이 없다. 난 도련님을 찾으러 갈 테니 넌 가거라. 무조건 대감어른께도 알려드려.”

“무슨 말인지 모르, 윤기야!”



 윤기는 대감집 문턱을 넘어 다시 뛰쳐나갔다. 저잣거리로. 그 아수라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온통 지민이 눈에 어른거렸다. 자신을 부르려다 차마 못 부른 그 말간 얼굴이.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 그게 자신이 사는 이유다. 숨이 턱 끝에 차오를 때까지 뜀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뒤에 남은 향소는 몇 번 더 윤기를 부르다 고개를 저었다. 저게 도련님 혼사에 술이라도 취한 건가.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니. 그런 무슨 끔찍한 말을. 마을에서는 여태 험악한 사건도 일어난 적이 없다. 지민의 아버지인 박대감의 눈치를 보며 양반들도 몸을 사리는 편이었다. 말이 안 된다. 향소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윤기가 그런 끔찍한 농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못내 불안했다. 



“아이 참. 미치겠네.”



 향소가 울상을 지었다. 만약 그 말이 거짓이라면 매질을 면치 못할 것이다. 높은 양반 어르신들의 잔치를 훼방 놓았으니 아무리 인품 좋은 박대감이라도 화가 날 거다. 심지어 내일은 박대감이 아끼는, 중요한 장손의 혼인식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 재수없는 말을 했다간 안 그래도 당할 매질, 아예 걷지 못할 만큼 맞을 게 뻔했다. 그래도 윤기가 거짓부렁을 할 애는 아닌데. 도련님 일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 진심인 아이인데. 발을 동동 구르던 향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모르겠다. 그게 사실이라면. 만약 사람이 정말 사람을 먹는다면. 일단 살고 봐야지.



“대감어르신!”



 향소는 사랑채를 향해 뛰었다.






***






 저잣거리는 아직도 불이 훤했다. 지민이 갓을 푹 눌러 쓴 채 사람들 사이를 속속 빠져나간다. 그 뒤를 여기저기 어깨를 부딪히며 걷는 덕대가 안절부절 한다.



“도련님 이러다 대감마님께 들키기라도 하면 경을 칠 겁니다. 윤기 이 놈은 제가 찾아볼 터이니 도련님은 얼른 들어가십쇼. 내일이 혼인식이지 않습니까. 신부를 생각하셔야지요.”

“괜찮아. 너무 걱정 말아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구 설령 들켜도 내 아버지께 잘 일러드릴 테니 덕대 너는 벌을 받지 않을 거다.”



 지민이 안심시키듯 덕대를 달랬다. 덕대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고작 제가 벌 때문에 이러겠습니까. 내일 혼인에 문제라도 생겼다간 저는 물론이고 모두 목숨이 끽! 아이고. 그러나 덕대는 이미 귀를 닫은 지민을 보며 체념한 채 그 뒤를 따랐다. 온화한 도련님은 가끔 고집을 부리면 끝이 없다. 그래. 이 고집은 박대감도 꺾지 못한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랬다. 특히 가여운 것들을 봤을 때 그러하다.


 언제였더라. 한 번은 감나무 아래 까치가 떨어진 적이 있었다. 어린 도련님은 그것을 보자마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까치를 품에 끌어안고 덕대를 향해 울며 뛰어왔다. 덕대야, 이 아이가 아프다. 어서 낫게 해주고 싶다. 고작 까치 하나도 생명이라고, 고작 8살 아이가 열 시간이 넘도록 그 까치 앞에 꼼짝 않고 앉아 깨어나길 기다렸다. 일어났어! 살았구나! 기특하다며 까치의 동그란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쓰다듬어주고 물까지 줬다. 지민은 그렇게 가여운 것들을 보면 하나 둘씩 대감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까치, 다람쥐, 강아지, 그리고 부모를 잃은 백정의 아들까지.


 덕대는 새삼 박대감의 심정이 이해됐다. 그러니 백정의 아들을 노비로라도 받아주었지. 작은 생물 하나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 목숨 앞에서는.


 저잣거리를 빠르게 살피며 걷던 지민이 걱정스런 어투로 말했다.



“혹 윤기가 여태 산에 있는 건 아니겠지.”

“어휴 설마요. 산이 어두워지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는 윤기 그놈이 제일 잘 압니다. 냉큼 내려왔을 겁니다요. 그리고 위험한 일이 퍽이나 있을라구. 걱정일랑 붙들어 매도 됩니다. 윤기 고 녀석 사냥실력이라면 도련님도 알지 않습니까. 박대감님도 사냥 갈 때마다 윤기를 챙겨가시지 않습니까. 요 저잣거리 주변이나 두리번거리고 있겠지요.”

“그렇지?”

“암요. 그런데 대체 뭐에 뿔이 나서 이리 방자하게 구는지….”



 덕대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주 도련님이 아껴주니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던지 해야지.



“그러지말어. 힘들어서 그렇지. 나를 따라 고향을 떠나게 되니 마음이 복잡할 거야.”

“아이구 도련님, 도련님이 매번 이리 조용히 봐주시니 윤기 그 놈이 계속….”

“아아악! 살려주시오, 살려…!”



 그 순간 몇몇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지민과 덕대의 옆으로 정신 없이 달려나갔다. 그들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보였다. 응? 지민이 갓을 조금 올리며 사람들이 뛰어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인파만 보일 뿐,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뭔 일이 났나 봅니다요. 산에서 호랑이라도 내려왔나. 왜들 이리 난리람. 이보쇼.”



 덕대가 지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의 어깨를 붙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저기 뭐가 있길래 다들 이리 질겁을 하고 뛰어옵니까?”

“도망가야 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왜 도망을 가야 하는 거요? 자세히 설명해보시오.”

“이거 놓으시오!”



 더 묻기도 전에 창백하게 질린 사람은 그대로 덕대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가버렸다. 지민이 의아하게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란의 근원지 쪽을 본다. 쫓아오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허어 참. 덕대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대체 뭐라고 이 소란이란 말입니까.



“소인이 한번 가보겠습니다.”



 겁이 없는 덕대가 앞으로 나가려는 찰나 지민이 덕대를 붙잡았다.



“아니다 덕대야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구나. 사람들을 따라 피해야 할 거 같다.”



 지민은 감이 좋은 편이었다. 어쩐지 저 끝에서 다가오는 것이 한낱 산짐승은 아닌 것 같았다. 고작 짐승 한 마리에 사람들이 이 만큼이나 혼비백산하여 달려올 리 없다.



“우리도 가자.”



 지민이 방향을 틀어 도망가는 사람들 틈에 낀다. 그리고 그때, 정신없이 달려오던 사람이 지민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며 나자빠진다. 지민 역시 크게 휘청거리며 흙바닥으로 넘어졌다. 도련니임! 덕대가 황급히 지민의 곁으로 달려온다. 그리고는 여전히 바닥을 구르고 있는 상대방의 멱살을 틀어쥔다.



“네 놈은 눈이 없는 게냐! 감히 우리 도련님을!”

“사, 사람이, 제, 제기랄! 이거 놔!”

“아니 이 놈이 미쳤나. 양반을 치고 지나가는 건 사형감이….”

“내, 내 사죄하리라. 다음에 사죄 할 테니 일단 이거부터 놓으시오! 놔!”



 완전히 겁에 질려 사리분간이 되지 않는 듯했다. 이놈이 감히. 덕대가 멱살을 붙잡고 그대로 주르륵 끌어올린다. 지민이 덕대를 저지했다.



“덕대야 나는 괜찮아. 놔주거라.”

“그치만 도련님…!”

“다치지도 않았어. 어서 놔라.”



 지민이 차분하게 타일렀다. 덕대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손에 조금 힘을 푼다. 그 순간 멱살이 잡혔던 사람이 사람들이 뛰어오는 방향을 보더니, 무언가를 보고 사색이 되었다. 으,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덕대의 손을 쳐내고 다시 넘어질 듯 바닥을 기며 기어코 도망간다. 지민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발견한 건.



“…사람?”



 같은 사람이다. 덕대도 지민이 보는 방향을 주시했다. 사람이 무서워서 지금 도망치는 겁니까? 허이구야. 다들 호들갑은. 지민이 눈가를 가늘게 떴다.



“아니야, 덕대야. 저 뒤에 오는 사람들…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이는구나.”

“으음, 도련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비틀거리는 거 같기도 하고…죄다 술에 취한 거마냥 저게 뭔.”

“살, 살려, 커허억!”



 뛰어오던 여인이 뒤에서 쫓아오던 사람이 덮쳤다. 지민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보시오! 이게 무슨 짓이오! 여인을 덮친 사람이 단숨에 어깨를 물어뜯는다. 살점이 뜯기고 피가 튀었다. 충격적인 장면에 뛰쳐나간 지민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허으윽. 여인이 물 밖으로 끌려 나온 생선처럼 몸부림쳤다. 이내 여자의 숨이 끊긴다. 사람을 파먹던 사람이 고개를 들어 지민을 본다. 온통 피범벅이다. 흰자위가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피가 튄 두 눈이 짐승같이 붉다.


 키에엑!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울음소리를 냈다. 마치 매우 굶주린 야생의 짐승 같았다. 아니면 괴물이라 부르나. 달리 부를 말이 없는 형체였다. 괴물은 지민을 향해 뛰쳐 든다.



“도련님!”



 덕대가 몸을 날려 지민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을 쳐냈다. 괴이는 덕대로 목표를 바꿔 다시 달려들었다. 크엑! 커다란 덕대의 몸이 속절없이 땅바닥으로 무너졌다. 지민이 화들짝 놀랐다. 덕대가 힘으로 밀리는 경우는 여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덕대야!”

“이 미친 놈이 술을 처먹었으면 곱게 처먹지, 이게 뭔…! 으아악!”



 달려든 사람이 덕대의 살을 물어뜯으려 한다. 덕대는 머리를 붙잡아 밀어냈다. 크아악, 크악. 입질을 하던 사람이 결국 덕대의 손을 물었다. 이 육시랄 놈이! 그러나 그 힘 좋은 덕대가 아무리 달라붙은 사람을 떨쳐내려 해도 사람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덕대에게 달라붙었다. 지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헤집고 달려나간 난리통에 가판대에서 떨어진 나무 막대 같은 것들이 보였다. 냉큼 그것을 들고 덕대의 위에 있는 사람인지 모를 것을 때렸다. 캬아악! 찢어지는 괴성을 낸 괴물이 지민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 틈에 덕대가 일어나 괴물을 반대편으로 집어 던졌다.



“헉, 허억, 아니 이 놈 힘이 장사네.”

“덕대야 괜찮니?”

“예, 좀 물린 것 말고는….”

“살려줘어억! 으아악!”



 어느새 뒤쫓아온 괴물 무리가 사람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사냥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움직임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먹히고 있었다. 덕대와 지민을 향해서도 우루루 달려온다. 덕대가 그 앞을 막았다.



“도련님 어서 도망가십시오!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덕대야, 안 된다! 어서 지금이라도 같이 도망, 윽!”



 지민이 덕대를 붙잡아 이끄는 사이, 다른 괴물이 지민을 향해 달려왔다. 도련님! 덕대가 지민을 크게 부른다. 그러나 그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또 다른 괴물들이 달려들었다. 지민은 간신히 위로 올라탄 괴물의 목을 나무조각으로 밀어냈다. 도무지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힘이었다. 그리고 괴물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손에 일시적으로 힘이 빠질 뻔했다.


 맙소사. 방금 전 목이 뜯겨 죽은 여인이다. 그 여인이 다시 살아나 괴물처럼 변했다. 괴물이 괴성을 지르는 탓에 축축한 침이 지민의 얼굴 위로 툭툭 떨어졌다. 역겨웠다. 지민은 이를 질끈 악 물고 여인을 몸 위에서 떨쳐냈다.



“헉, 헉 덕대야! 어서…!”

“도, 도련님, 도망, 가십…커억…!”



 이미 세 마리가 덕대에게 달라붙어있었다. 안 돼. 지민이 구해주려 다가간 찰나, 방금 치워낸 여인 괴물이 끈질기게 지민을 덮쳐왔다. 그어어어. 하얀 점막질이 씌워진 듯 동공이 희끄무레했다.



“큭!”



 지민이 가판대 위로 쓰러지듯 넘어진다. 넘어지며 나무의 뾰족한 부분이 지민의 다리를 찔렀다.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입안에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흐윽. 그러나 통증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다시 여인이 달려들었다. 지민이 눈을 질끈 감으며 쥐고 있던 나무토막의 뾰족한 부분으로 여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러나 괴물은 심장이 뚫렸음에도 사지를 꿈틀거리며 지민을 위협했다. 키에에!


 이것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던 게 아니다. 괴물로부터 도망친 거다. 죽여도 또 살아나며 인육을 탐하는 괴물. 지민이 제 다리에서 번져 나오는 핏자국을 봤다.


 여기서 죽을 순 없는데. 아직 윤기한테 해주지 못한 말들이 많은데. 이대로 허무하게 갈 수는 없는데. 얼굴 한 번 못보고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 분명 날 걱정할 텐데. 정신이 흐릿해지며 손에서 힘이 다해 빠져나간다. 익숙한 목소리가 지민의 귓가에 꽂혔다.



“박지민!”



 지민은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안다. 이렇게 지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리고 부름과 동시에, 괴물의 머리통이 깨부숴지듯 날아간다. 훌륭한 명중이었다. 마침내 괴물이 지민의 위에서 축 늘어졌다.


 지민은 가물거리는 시야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말을 탄 윤기가 검을 들고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이미 핏자국이 몸에 가득했다. 급하게 내린 윤기가 제 곁으로 다가온다.



“괜찮은 거냐. 안 다쳤어?”

“윤기 형님….”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도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나온 순간부터 현실이 아닌 것 같긴 하다. 만약 자신이 이미 괴물에게 잡아 먹혀 괴물이 된 거라면. 아니면 피를 많이 쏟아 죽었던 거라면. 윤기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러니까….


 지민이 윤기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그러나 이미 피를 많이 쏟아 시야가 가물거린다. 입술을 질끈 깨문 하얀 얼굴을 마지막으로 지민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윤기가 주먹을 꽉 쥐었다. 지민을 붙잡은 손에 피가 한 가득 묻어 나온다. 빌어처먹을.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숨이 미약하게 코끝에 걸린 지민을 확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게 꽉 끌어안았다.


 지민아. 내 널 꼭 살릴 거다. 이대로 눈 감게 두지 않을 거다. 나를 나락에 처박았으면 이유라도 알려줘야지. 너 혼자 이리 떠나면 안 되지.



“내 널 나락에서라도 건져 올릴 거다.”



 그르륵. 괴물이 된 덕대가 끊기기 직전인 팔을 덜렁거리며 일어난다. 윤기는 메마른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미 여기도 나락인 거 같지만. 윤기가 검을 쥐고 지민을 끌어안은 채 말에 올라탔다. 결코 보내지 않을 것이다. 아직 너한테 해야 할 말이 가득하다.


 윤기는 말을 몰며 칼을 휘둘렀다. 달빛이 핏빛을 비췄다. 온통 거리가 피로 낭자했다. 만월이 뜬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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