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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잭팟 07

by 토페 posted Aug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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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Deborah Ocean>






 적자생존. 민윤기의 인생은 그 단어로 정의된다. 태어날 때부터 경쟁상대는 빼곡했다.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 낳은 세 명의 자식, 셋째 부인이 낳은 한 명의 자식. 희대의 난봉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매스컴을 들락거린 민윤기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도 쓰레기 같은 잣대를 들이댔다. 가장 뛰어난 한 놈. 그 놈에게 모든 걸 물려줄 거다. 그리하여 시작됐다. 배다른 형제들의 서로를 물고 뜯고 죽이는 한 편의 영화가.


 별 짓을 다했다. 둘째 형의 대가리를 술병으로도 깨봤고, 첫째 형의 불륜 소식을 매스컴에 일부러 뿌려도 봤고, 그 외 다른 형제들의 예비용으로 마약 사건 사고 파파라치 사진을 서랍에 차곡차곡 보관했다. 만나자마자 웃는 얼굴로 쌍욕을 박는 건 기본이다. 반쪽이지만 그래도 나랑 같은 피를 나눴는데 대가리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나. 가서 뇌 검사 한 번 쫙 돌려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 형한테 욕 먹어도 실실 웃으면서 할 말은 다 했다. 형님, 그걸 이제야 안 거면 지능이 문제인 거 같은데요. 축하해요. 검사 안 해도 되겠네. 명품 수트만 몸에 걸쳤다 뿐이지 하는 짓은 동네 깡패새끼 같았다.


 그런 민윤기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었다. 바로 어머니다. 출산 이후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몸이 완전히 망가져 침대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 어머니. 그녀만이 민윤기에게 애정이라고 불릴만한 것을 주었다.



“저 왔어요, 어머니.”



 그 작은 애정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윤기는 간병인도 물리고 꼬박꼬박 어머니의 병상 곁을 지켰다. 윤기 왔니.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윤기에게 떠나라고 했다. 여기 있어서 뭐하니. 가서 아버지 옆에서 도와드려야지. 다른 형제들이랑도 사이 좋게 지내고. 동생들이니까 윤기 네가 양보 좀 많이 하고 그래. 바로 전 막냇동생의 마약 스캔들을 언론에 터뜨리고 온 민윤기가 그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고개 끄덕끄덕거렸다. 네. 동생들이랑 친하게 지내야죠. 어머니는 어머니 건강만 챙기세요.


 인간은 이뤄지지 않을 소원을 알면서도 계속 빈다. 민윤기는 간절히 바랐다. 이 적자생존에서 낙오자가 되어도 좋다. 어머니만 침대에서 일어난다면. 계속 제 곁에 있어준다면. 그러나 너무 못돼 처먹은 삶을 살아서 그럴까? 어머니의 건강은 순식간에 악화됐다. 하얗던 얼굴은 시체마냥 창백했으며 기침에서 피가 섞여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병세를 슬퍼하는 이는 오로지 민윤기 뿐이었으므로, 일상을 평소처럼 굴러간다. 윤기는 아버지의 호출을 받았다. 일말의 기대를 했다. 그래도 정실부인으로 있는 그녀인데. 신경을 조금 써주는 건가.



“네가 갈 일이 있다. 투자자들이 흔들리고 있어. 그대로 밀어야 돼. 네가 가서 단단히 약속을 받아와라. 그들한테 신뢰를 줘. 당장 내일 떠나거라.”

“내일부터 말입니까?”

“그래.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게냐?”

“…어머니께서 부쩍 건강이 악화되셨습니다.”

“그래서 못 간다는 거냐?”

“…….”

“그럼 됐다. 세드니를 보내마. 나가봐라.”



 부인의 병세에 단 한 치도 관심 없는 매정한 인간이다. 그는 감정이라도 하듯 혀를 차며 다른 형제의 이름을 올렸다. 이번은 특히 호텔 확장에 있어 중요한 기회다.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순간이다.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갈등 끝에 민윤기는 현재의 자리를 택했다. 그리고 그대로 뉴욕으로 날아갔다. 매일같이 투자자들을 만나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비위를 맞추며 술에 찌든지 5일즈음 됐을까. 술병에 찌들어 일어난 아침 민윤기는 병원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민윤기는 바로 다음날 투자자와의 만남을 내팽개치고 라스베가스로 비행기를 띄웠다.


 장례식장에 바로 도착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민윤기는 모친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 정말 개패듯 처맞았다. 네가 제정신인 새끼야? 그대로 투자자를 두고 튀어나와? 네가 책임 질 거야? 이 한심한 새끼! 덜떨어진 새끼! 어머니의 관 앞에서 넝마가 됐고, 모든 인물들은 처맞는 민윤기를 방관하기만 했다. 아니면 조금 웃었으려나.


 민윤기만이 묘 앞에 덜렁 혼자 남았다. 씨발.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줌의 가루로 변한 어머니 앞에서 오열했다. 내가 지켜야 할 건 이게 유일했는데. 스스로를 저주했다. 한심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더 이상 이 지옥에서 버틸 이유가 없다. 그는 그대로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어머니의 고향으로 향했다. 바로 한국으로. 핸드폰에서는 비서로부터 쉬지 않고 연락이 왔으나 모조리 씹었다. 어차피 돌아갈 곳은 없기에.


 삶에 그 어떤 목표의식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등신 같은 반쪽 짜리 피가 내 몸에도 존나게 많이 흐르긴 흐르나 봐. 그러니 이 모양 이 꼴이지. 스스로를 자조하며 윤기는 도로를 걸었다. 발걸음이 비틀거린다.



“아 죄, 죄송합니다아….”



 그러다 누군가와 푹 부딪혔다. 부딪힌 순간 옷에 손이 달라붙은 느낌도 났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전부 다 내던질 생각이었다. 그렇게 모조리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증발할 생각이었는데.



“어때요? 경찰서로 갈래요, 아니면 병원으로 갈래요?”



 웬 쪼그마한 애가 와서 캉캉 짖어댔다. 지갑 훔친 사실을 털리더니 주춤하고는, 이내 다시금 따라와서 캉캉거렸다. 니가 뭔데. 떼어냈으나 끝내 따라와서 귀찮게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그냥 따라갔다. 길바닥에서 마주친 흔한 인간한테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관심 쏟는 이유가 궁금하고 약간은 황당해서. 그리고 그 황당한 애는 민윤기를 더 황당하게 만들었다.



“저어…교통비가 없어서 그런데요. 혹시 만원만…아니, 2만원만….”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언제 짖었냐는 듯 눈치를 보며 낑낑거렸다. 태어난 이례로 남이 이렇게 웃겨본 적은 처음이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고 잿더미같이 많았던 원망과 분노들을 그때만큼은 잊게 됐다.


 민윤기는 말간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의 감각이 외친다. 간혹 살다 보면 이 순간을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때가 민윤기는 어머니의 임종 직전 출장이다. 가지 말아야 한다는 감을 안 믿고 따라갔다가 그런 결말을 맞이했다. 그러니 이번엔 놓칠 수 없다.



“안 준다고 안 했는데.”



 절벽에 선 순간 새로운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숨통이 트였다. 민윤기는 그 바람을 꽉 쥐었다. 살고 싶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 민윤기를 주저앉혔으나 다시 살린 것도 사랑이다. 박지민은 민윤기의 새로운 전부가 되었다. 새로 얻은 기회는 이전보다 더해서, 유일하게 자신에게만 베풀어지는 애정과 관심이라서 그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지. 이것은 내 것이다. 민윤기의 세상은 박지민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와 드디어 찾았다!”



 윤기와 한 집으로 합치며 지민이 박스를 뒤적이다가 폴짝폴짝 뛰었다. 웬 티켓이다. 그게 뭔데. 다가온 윤기에게 지민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설명했다.



“예전에 가족들이랑 처음 놀이공원 갔을 때 끊은 티켓이에요. 부모님이랑 마지막으로 놀러 간 거예요.”



 지민으로부터 상세한 가족사를 들은 적은 없다. 술을 마시거나 은근슬쩍 듣는 이야기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지민은 감회에 찬 눈으로 그 티켓을 바라보더니, 곧 윤기를 보며 말했다. 우리 놀이공원 갈까요? 그날 그대로 두 사람은 이삿짐도 버려두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윤기는 활짝 웃는 지민과 머리띠를 맞추고 손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왁왁 비명 지르는 지민을 실컷 놀리기도 했다. 똑같이 복수하겠다며 귀신의 집으로 민윤기를 이끌고 간 지민이 오히려 눈물을 후두둑 흘리며 돌아 나왔다. 이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으면, 말을 해줬어야지, 어어엉. 함뿍 우는 지민의 축축한 볼을 닦아주다가 지민이 복수라며 윤기의 손가락을 앙 물었다. 통통한 입술에 물린 제 손을 본 순간 민윤기는 곧장 아이들의 꿈의 동산 놀이공원을 나와 어른들의 꿈의 동산 모텔로 향했다.



“너 아무데서나 울지 마. 내 앞에서만 울어. 알았어? 씨발 다른 새끼들도 다 좆 세우면 어떡해.”

“제발 그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형만한 변태가 없어요.”



 지민은 질색하면서도 윤기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았다. 그리고 민윤기가 붙잡아 세 판을 뛰고 난 뒤, 따뜻한 품에 늘어지듯 안겨 조금은 멋쩍고 쑥스럽게 고백했다.



“이상하게 놀이공원 다녀오니까 형이랑도 가족이 된 거 같아요.”



 가족. 그 단어에 대해 좋은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민윤기는 지민이 한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그래. 나쁘지 않은 말이네. 어차피 박지민 말이라면 죽는다고 해도 축복이라 믿을 테니 아무렴 좋다. 네가 주는 애정이 담긴 단어라면 나는 다 좋아.


 점점 특별하게 자라는 사이 속에서, 지민이 과거의 인연을 찾았다. 그녀는 지민의 유모다. 윤기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박지민 역시 저와 비슷했다. 언제나 받지 못하고 싹둑 잘려버린 가족 사이에서의 애정을 갈구했다. 그것을 줄 수 있는 인물이 지금이라도 나타났으니 축복이나 마찬가지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선했으며 사랑이 많은 인물이었다. 여전히 지민을 아꼈으며, 심지어는 박지민이 사랑하는 민윤기까지 아껴주었다. 단순히 박지민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말이다. 민윤기도 할 수 있는 한 유모를 존중했다. 집안일과 관련해서 질문을 하고, 요리도 배웠으며, 심지어는 병원으로 그녀를 태워주는 일까지 자처했다. 민윤기는 점점 창백해져만 가는 유모의 얼굴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부디 제 바람이 이뤄지길. 지민이 슬퍼하는 일이 늦춰지길 바랐다.


 그리고 항상 세상은 잔혹하게도 이 시점에서 가혹해진다.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는 게 생길 때.



[아버지께서 건강이 위독하십니다.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합니다. 찾아와보시는 게…다른 형제 분들께서도 기다리십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튄 아들도 자식새끼는 자식새끼라고 연락이 왔다. 연락을 모조리 받지 않으니 어떻게 알아낸 건지 막노동을 뛰고 있는 공사판까지 사람이 찾아왔다.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별 일 아니라고 설명한 뒤 정장까지 입고 찾아온 아버지의 사람을 물렸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죽는다고? 아프다고? 그 강철같던 인간이? 어머니가 죽을 때조차 눈 하나 깜짝 안 한 그 인간이 아플 수 있는 사람이었어?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자식들끼리 서로 치부를 들춰내고 싸워도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자부심 넘치던 이기적인 인간이 죽을 수도 있단다. 민윤기에게 그 지옥을 선사한 장본인이.


 갑작스러운 통보는 민윤기에게 싱숭생숭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마지막 남은 혈육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 그가 죽는다면 과거와는 완전히 연결고리가 끊길 테다. 이전의 민윤기는 한 톨도 남지 않고 사라지는 거다. 박수를 쳐도 모자랄 판에 웃기게도 조금 속이 복잡했다. 어머니를 추억할 사람이 이제는 나 말고 아무도 없어지는군. 조금 씁쓸했던 것 같다.


 윤기는 지민에게 연락하지 않고 그날 조금 늦은 귀가를 했다. 평소처럼 표정은 말짱하게 유지했다. 거실에서 기다리던 지민이 졸린 눈을 하고 다가오더니 윤기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형 혹시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회식이 조금 있었어.”



 민윤기는 그저 잔잔히 웃었다. 어차피 나는 너밖에 없어. 모든 것이 끊겨도 박지민 너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과거는 놓아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가끔, 한 쪽이 놔도 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과거의 망령은 민윤기를 끝없이 덮쳤다.


 쾅-!


 커다란 트럭이 그대로 윤기의 차를 들이박았다. 범퍼가 파열되며 차가 완전히 찌그러진다. 지민의 유모를 모시고 병원에 온 날이었다. 유모가 진료를 받는 사이, 그날따라 두통이 유독 심해 약국을 들리기 위해 잠깐 차 밖으로 나온 때였다. 약국에서 받은 봉투를 들고 민윤기는 멍하니 서있었다. 트럭기사는 밖에 있는 윤기를 발견하자마자 욕설을 내뱉더니 그대로 내려 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경찰이 그를 좇았다. 윤기가 정신을 차린 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순간이다. 풀썩 주저앉은 지민의 유모는 표백제라도 마신 것처럼 온통 하얗게 질려있었다.


 사건의 배후는 민윤기의 첫째 형이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니 오지에 혼자 있는 민윤기는 갈아버리려고 한 거다. 만에 하나 혹시라도 있을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민윤기는 과거와 연을 끊으면서 그 새끼를 죽이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 술병으로 대가리를 칠 게 아니라 목을 그었어야 했는데.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민의 유모가 조심스럽게 윤기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둘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윤기는 끄덕였다. 지민에게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부숴졌다고 둘러대는 데에 그녀의 말도 중요하게 작용했으니 말을 맞춰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민윤기는 두고두고 생각한다. 그때, 나가지 않았더라면 조금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유모는 망설이면서도 침착한 어조로 서두를 뗐다.



“이런 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제가 지금부터 할 말이 쉽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어떤….”

“우리 도련님과 헤어져주시면 안 되나요?”

“…….”

“정말 천 번도 넘게 고민했어요. 우리 도련님이 윤기 씨를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압니다. 윤기 씨도요. 그래서 어려운 부탁이라는 걸 알아요.”

“…….”

“그런데 도저히…도저히 안 되겠어요. 많이 위험한 상황인 거지요? 윤기 씨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도련님까지 잃을 순 없어요….”



 그녀의 꼭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차 사고로 이미 모시던 지민의 부모를 잃은 그녀다. 거의 트라우마였다. 그녀는 창백한 입술로 말했다.



“저는 압니다. 저한테 남은 삶이 짧다는 걸. 어떻게든 지민 도련님을 지키고 싶어요. 이게 제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 같습니다….”

“…….”

“부디 제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줄 수 있겠어요?”

“…….”

“부탁합니다.”



 그녀는 정중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아. 민윤기는 탄식한다. 박지민이 사랑하는 마지막 남은 가족. 그 가족의 부탁. 유언으로까지 널 걱정하며, 이렇게까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있는가. 민윤기는 차마 주제넘을 수 없다. 그녀의 말이 맞다. 과거의 잔재가 남은 민윤기는 언제든 박지민에게 위협이 된다. 아마 그녀는 지민이 걱정되어 편하게 눈조차 감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처럼.



“…시간을 잠시만 주시겠어요?”

“…….”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언이라고 하진 마시고 오래오래 지민이 곁에 계셔주세요.”



 너만은 그런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나처럼 한심하게 썩어가는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윤기는 남은 삶과 지민을 바라보았다. 이미 박지민을 제 숨처럼 여기는 민윤기는 지민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가차없이 스스로를 내버렸다.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건 박지민 하나이므로.



“잠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가게 오픈하면 시간도 많이 없을 텐데.”



 제주도는 어때. 민윤기는 가게 답사라는 명목을 핑계로 지민을 이끌었다. 푸른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지민을 수도 없이 눈에 새겼다. 찬란한 햇빛이 부서지는 바다 앞에서 맑게 웃는 지민은 민윤기의 인생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필름이다. 평생 꺼내보고 추억할 명작. 그날 밤 지민을 안으며 끝없이 속삭였다. 내가 사는 이유는 너야. 사랑을 말하는 건 늘 지민이었는데, 그날은 민윤기의 입에서 사랑이 쏟아져 나왔다.


 기다리진 마. 네 삶을 살고 있어. 그러면, 나중에 내가 다시 찾아올게. 모든 게 괜찮아질 때. 온전히 안전한 둥지에 널 앉힐 수 있는 그때. 잠든 지민을 보석 다루듯 아끼며 윤기는 다짐했다. 반드시 다시 되찾아올 거니까.


 가장 확실하게 정을 뗄 수 있는 방법. 박지민이 민윤기를 찾고 기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민윤기는 그렇게 돈을 들고 떠났다. 잔인하리만큼 아주 매정하게. 뒤를 돌아보면 금방 제 삶의 전부인 지민에게 돌아오고 싶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