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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잭팟 02

by 토페 posted Jul 3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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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NYC Larceny - Daniel Pemberton>







 이건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진짜 민윤기다. 지민은 순식간에 과거의 한 때로 돌아갔다. 습한 열기가 쏟아지던 그 밤으로. 사랑 하나에 모든 것을 내던지던 그 때로.



“안 받으십니까?”



 민윤기가 손을 더 내민다. 아. 멍청히 서있던 지민은 그제야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커프스 버튼을 받았다. 얼굴 가죽을 쓰고 있어 천만 다행이었다. 없었다면 둘도 없이 멍청한 표정이 그대로 다 보였을 거다.


 흠? 윤기가 멀뚱히 서있는 지민을 본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입은 달싹거리기만 하고 제 역할을 못했다. 여전히 정신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머물러있었다. 화면에선 그렇게 바뀌었다 생각했는데, 바뀐 건 스타일밖에 없다. 방부제를 들이부은 것처럼 그때 그대로였다. 한창 연애했던 그 순간의 민윤기.


 그때였다. 태형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지민아 왜 무슨 일이야.]



 느슨하게 풀린 머릿속 나사가 조여진다. 미쳤어? 박지민아. 구애인에 한 눈 팔고 있을 때야? 뉴욕뱅크 금고보다 좋은 걸 털러 왔는데.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네요. 감사합니다.”



 직업 정신을 발휘했다. 만나면 지갑은 물론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리는 박지민으로. 금세 쉐브론 얼굴에 어울리는 훈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등을 돌리며 멀어지는 행동까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 순간 윤기가 지민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얼굴이 낯이 많이 익은데.”

“음, 그런가요? 저는 아쉽게도 기억에 없습니다. 인터뷰를 몇 번 하긴 했는데, 아마 그걸 보신 게 아닐지.”

“이것저것 챙겨보기는 합니다만.”



 윤기는 쉐브론과의 거리를 좁혔다. 지민이 흠칫했으나 윤기가 더욱 빨랐다.



“없던 인연이라면 지금부터 만들어보고 싶은데.”



 커다란 손이 지민의 허리를 감싸 쥐더니,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 위에 올라온다. 오소소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이 미친 새끼.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욕이 찼다.


 그러나 다행인 점이라면 박지민이 어마어마한 프로 정신을 지니고 있단 점이다. 막대한 정신적 피해와 다르게 쉐브론의 탈을 쓴 몸은 차분했다. 굳어오는 안면근육을 움직여 신사적인 미소를 유지했다.



“이거…곤란하게 됐습니다. 허허. 이것도 와이프가 준 선물인지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좋은 인연이 됐겠군요.”

“전 가벼운 쪽도 괜찮습니다만.”



 남은 정이란 정은 탈탈 털어주는 발언이었다. 못 본 사이 지랑 20살 넘게 차이 나는 사람한테까지 플러팅을 거는 변태로 발전했는데, 심지어 개념까지 없다. 아주 씹새끼가 됐구나. 이 개자식아.



“하하…이 나이에 그런 제안을 들으니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군요. 그렇지만 아래에서 와이프가 기다립니다.”



 지민은 생각과 달리 차분하고 매너 있는 동작으로 윤기의 손을 허리춤에서 떼어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만나지요. 그리고 짧은 인사와 함께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동했다. 스르르 닫히는 문 사이로 민윤기가 보인다. 민윤기는 가볍고도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는 인연이 되길 빕니다.”



 이어 완전히 문이 닫힌다.







***







 먹고 살기 존나 힘들다. 시대를 관통하는 문장 중 이보다 적합한 게 있을까. 이제 막 성인이 성인이 된 박지민은 누구보다 뼈저리게 그 문장을 겪고 있었다. 먹고 살기 진짜, 진짜로 존나게 힘들었다.


 돈은 돈을 부르고, 빚은 빚을 부른다. 지민은 우와 감탄이 나올 만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씨발이라는 감탄이 나올 만큼 아찔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부모님의 사업이 망하며 사채업자들이 등장한 이후부터 모든 게 망가지기 시작했다. 가족 동반자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 그런 타이틀을 얻으며 지민은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곱게 자란 도련님은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통사고 났을 때 나도 같이 죽었지. 부모님의 보험으로 받은 돈은 전부 사채 빚을 갚는데 쓰였다. 죄다 빨간 딱지가 붙은 집은 집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라 보호소가 두 번째 집이 되었다. 그러나 인생의 쓴맛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사설 보호소의 원장을 지원금을 횡령했고 틈만 나면 애들을 두들겨 팼다. 지민은 그곳에서 두 번째로 많이 맞은 인물이었다. 첫 번째는 김태형이란 애였다.


 우리 떠나자. 지민은 태형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보호소를 떠나는 날, 원장의 금고를 털다 야구배트로 원장의 다리를 뿌갰다. 으아악.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는 원장은 척추를 맞아 미꾸라지처럼 팔딱였다. 그 모습을 보며 지민은 자신의 인생이 막장 중의 막장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망할 일이 있을까? 아무래도 없을 것 같다.


 쫄쫄 주린 배를 부여잡길 며칠 째. 길에서 비명횡사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무렵. 사람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다. 태형이 먼저 그 길을 뚫어왔다. 지민아 너도 작업하는 거 배워볼래? 주렁주렁 훔쳐온 지갑을 탈탈 털어내며 태형은 기술직을 제안했다. 이것도 다아, 요령이 있어. 별로 어렵지 않아. 내가 도와줄게.


 태형이 제시한 방법은 이랬다. 길 다니다 가장 멍청해 보이고 맹한 사람으로 골라. 가능하면 술 취한 놈이 제일 좋아. 부딪히면서 지갑만 슥삭. 오키? 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태형은 실전이 되면 다 알 거라며 지민을 내보냈다. 똑같이 뇌가 청순한 박지민은 태형의 말에 수긍하며 해가 떨어지기 직전부터 길을 어슬렁거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아….”



 모자를 푹 눌러쓴 지민이 어깨를 툭 부딪혔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으나, 타깃은 지민을 의식조차 안 했다.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비틀거릴 뿐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검은 자켓을 입은 남자는 흡사 지민을 유령처럼 대했다.


 첫 작업에 꼭 나쁜 짓을 저지른 것마냥 가슴이 콩닥거렸다. 물론 나쁜 짓이 맞긴 했지만. 곱게 자란 도련님 특성이 아직 남아 양심을 온전히 버리지 못한 지민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맹한 타깃은 도로 위로 홀린 듯 걸어가고 있었다. 어라…? 뭐야 저거.



“저기요! 차 와요! 위험해요!”



 빠앙 클락션이 길게 울렸다. 남자는 돌진하는 차를 피할 생각이 없는 듯 도로에 우뚝 섰다. 저 미친. 지민은 그 장면을 보자마자 발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튀어나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남자를 밀쳐 같이 바닥을 굴렀다.



“아니, 미쳤어요? 이봐요. 괜찮….”

“씨이발 돌았어!? 왜 갑자기 길에서 지랄이야! 죽으려면 혼자 알아서 죽으라고!”



 창문을 내린 운전자가 살벌하게 욕을 지껄였다. 퉤. 침을 뱉더니 다시 출발한다. 아니, 왜 나까지…. 아니. 이거 뺑소니 낼 뻔 한 거 아냐? 저렇게 그냥 가도 되는 거야?



“사람 죽일 뻔 했는데 무슨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이!”



 번호 외울 거다. 지민은 눈가를 좁히며 빠르게 멀어지는 차의 번호판을 주시했다. 오구육….



“큭….”



 아래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에 아, 하며 지민이 남자를 깔아뭉개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상처 안 났어요? 아니 저 씹새끼가…여기 CCTV 찍혔을 텐데. 요새 밤길이 어두워서 길 조심해서 걸어 다녀야 돼요. 걸을 수 있겠어요?”



 지민이 남자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비쩍 말랐으나 제법 무게가 있어 지민도 같이 휘청거렸다. 남자는 지민의 손을 바로 탁 매섭게 뿌리쳤다. 지민을 보는 표정이 차갑다.



“신경 꺼.”

“네?”

“신경끄고 네 갈 길 가라고.”



 지민이 벙 쪘다. 아니 살려줬더니 이 뭔.



“저기요. 그쪽 방금 죽을 뻔 한 거 제가 살려준 거예요. 그거 알고 있어요?”



 남자는 지민을 무시하고 그대로 걸어나간다. 다리를 절뚝거린다. 지민은 남자의 바지 사이로 뚝뚝 흐르는 피를 발견했다. 피, 피! 그대로 쪼르르 남자를 따라갔다.



“엄청 다친 거 같은데 이거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으아. 어떡해요?”

“꺼지라고.”

“지금 상처 났잖아요! 제가 그 차주 번호도 외웠어요. 택시 불러드릴….”



 지민이 다시 남자를 부축하듯 붙들었다. 남자가 지민을 거칠게 밀어냈다. 으앗. 그렇게 강한 힘이 아니었는데도 지민이 풀썩 넘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툭, 지민의 품에서 검은 지갑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좆됐다. 지민이 당황스럽게 눈을 바쁘게 깜빡거리며 지갑과 윤기를 번갈아 바라봤다. 수만 개의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 게…아, 하하…여기 있네…왜지…?”

“…….”

“아까 넘어질 때 떨어졌었나…..”



 엎어진 자세 그대로 지민이 눈알만 빙글빙글 굴렸다. 뒤통수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진다. 지민은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에 껌처럼 붙고 싶었다. 괜히 오지랖을 부려서. 사람 구해줬더니 경찰서를 가게 생겼네. 이대로 튈까. 고민하는데, 남자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그대로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민 따위는 볼 일 아니라는 듯.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저, 저기요?”



 지민이 지갑을 주워 급하게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게 목적이면 귀찮게 하지 말고 가지고 꺼져.”

“모, 목적이 아니라 그냥…!”



 뒤따라온 지민이 또 붙잡았다. 남자는 이번에 떼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지민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악에 받친 눈이다. 금방이라도 죽여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자신을 내버려두라는, 지독히도 이 삶이 힘겹다는 눈빛. 지민의 손에서 저도 모르게 힘이 빠진다. 연결고리가 사라지자마자 그는 지민을 뒤로한 채 다리를 질질 끌고 간다. 노예처럼 거대한 추가 발목에 걸려있는 듯했다.


 얼결에 합법적으로 얻은 첫 수확. 이대로 돌아가면 김태형한테 잔뜩 뽐낼 수도 있을 텐데. 박지민 코가 석자고 제 인생 하나 돌보기도 벅찬데.


 그러나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눈빛을 알고 있는 탓이다. 절벽에 몰려본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챌 수 있나 보다. 지민은 손에 들린 지갑을 꼭 쥐었다. 그대로 수확물을 얻고 남자의 말대로 사라지는 대신 다시 남자한테 다가갔다. 마주 본 남자의 얼굴에는 작은 생채기가 나있었다. 넘어질 때 구르면서 생긴 듯 하다.



“병원 같이 가요.”

“꺼지라고 했는데 안 들려?”

“들었는데요? 그런데 그대로 안 할 거예요. 이대로 경찰서 가서 제가 그쪽 지갑 훔쳤다고 자수할 거예요. 그럼 강제로 당신도 소환조사 받아야 될 걸요? 빨리 죽고 싶어요? 그럼 제 말대로 하고 죽어요. 병원은 가서 한 번 치료 받으면 되지만 경찰서는 여러 번 들락거려야 되는데, 그게 더 귀찮아질 거 같지 않아요?



 지민이 와다다 쏟아냈다. 어떤 강력한 의지가 보인다. 남자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지민을 본다. 지민은 지갑을 열었다. 우수수 꽂힌 지폐 다발을 무시하고 뒤적거려 신분증을 꺼냈다.



“민윤기 씨?”

“…….”

“어때요? 경찰서로 갈래요, 아니면 병원으로 갈래요?”



 민윤기는 당당하게 제 앞에 떡 버티고 선 작은 체구를 응시했다. 이만큼 황당한 경우가 없다. 그렇게 주지도 않은 힘에 밀려나 풀썩 엎어지더니 지금은 더없이 강력해 보인다.



“대답이 없으시네. 제 뜻대로 안 한다는 거죠? 어차피 저 양아치 도둑놈이고 이미 인생 망해서 범죄 경력 하나 더 추가돼봤자 티도 안 나요. 그럼 경찰서로….”



 지민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윤기가 지민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병원으로 가. 지민은 잘 선택하셨다며 택시를 잡고 병원으로 안내했다. 물론 택시비와 치료비는 전부 다 민윤기의 지갑 속에서 나왔다. 지민은 택시를 잡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까지 굳이 대화를 보태지 않았다. 네, 네. 제가 보호자예요. 박지민이요. 민윤기는 접수처에서 자신의 보호자라고 덥석 선언하는 지민을 흘끔 본 뒤, 역시 침묵 속에서 진료를 받았다.


 인대가 나갔네요. 붕대를 감아주며 의사는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 지민은 들었냐는 듯 윤기에게 눈짓했다. 민윤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꼭 남의 다리 대하듯 군다. 병원에서 나와 지민이 윤기에게 지갑을 내민다.



“자요.”

“왜 줘?”

“그쪽 거잖아요.”

“…….”

“병원 같이 왔으니까 이제 그쪽 말대로 더 신경 안 쓸게요. 알아서 살아요.”



 수많은 지폐 다발이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목숨을 포기하려고 했던 사람 것까지 탐내고 싶진 않다. 무엇보다 찝찝하잖아. 지민은 꾸벅 인사한 뒤 민윤기로부터 빠르게 멀어졌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순간 깨달았다. 이 구역에서 심야버스는 운행하지 않는다는 걸. 꼼짝없이 3시간은 걸어야 태형과 사는 원룸에 도착하게 생겼다.



“…….”



 태형이 걱정할 텐데. 안 그래도 첫 작업이라고 신경 쓰고 있을 게 뻔했다. 지민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하지? 그 순간, 방금 본 지폐다발이 머리를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간다. 내가 그래도 생명은 구해줬는데…. 쿨하게 인연은 여기까지라며 멀어졌지만. 그래도 집에는 가야지….


 지민은 쭈뼛거리며 윤기가 서있었던 병원 입구로 다시 돌아갔다. 거기서 방금 전까지 주의하라는 의사의 당부를 받은 환자는 담배를 뻑뻑 피고 있었다. 윤기가 뭐냐는 눈빛으로 돌아온 지민을 본다. 쪽팔려서 머리카락까지 직각으로 설 것 같았지만, 지민은 발개지는 볼로 꾸역꾸역 말했다.



“저어…교통비가 없어서 그런데요. 혹시 만원만…아니, 2만원만….”



 지민은 빤히 제 얼굴에 닿는 윤기의 시선에 그대로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이렇게까지 살면서 창피했던 적이 많이 없는데. 하.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픽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실소한다.



“너 대체 뭐냐?”

“…….”

“또 훔치게?”

“…훔치는 거 아닌데요?”

“이게 훔치는 게 아니면 뭐야.”

“그냥 음, 구걸이죠….”



 지민이 웅얼거렸다. 도둑질은 그쪽이 처음이었는데….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윤기는 담배를 툭 떨구고 비벼 껐다.



“안 줄 거면 말아요.”

“안 준다고 안 했는데.”



 윤기가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배고픈데. 식당 먼저 가자. 네가 안내해. 밥 먹고 돈 줄게.”

“…식당이요?”

“어.”

“그런데요. 왜 반말하세요?”

“네가 나보다 많아 보이진 않는데. 네가 많아?”

“아뇨, 그건 아닌데…그래도 처음 만난 사이고.”

“그럼 됐지. 도둑이 원래 예의 같은 거 많이 따지나? 내가 그 직종은 많이 본 적이 없어서.”

“…아직 도둑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처음 만났다. 도둑과 첫 타깃으로. 생명을 던지려는 사람과 생명의 은인으로. 절벽 끝에 선 사람과 사람 사이로. 각자 삶에서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망망대해 같은 상황에서.







***





 구애인을 재회한 흔적은 작업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지민은 숙달된 프로의 몸놀림으로 환풍구를 타고 올라가 밧줄을 몸에 묶고 내려왔다. 관리실 카메라엔 녹화된 화면이 재생되고 있을 터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보석을 손에 쥐고 다시 환풍구로 올라왔다.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린 덕분인지 작업은 아주 매끄럽고 수월했다.



“목표물 확보 완료.”



 사자의 눈물이라는 거창한 호칭을 이름으로 삼은 보석은 그 만큼이나 영롱한 광채를 자랑했다. 지민은 보석을 품 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대로 호텔 직원으로 변장한 헬퍼에게 스쳐 지나가며 보석을 넘기면 끝난다. 보석은 헬퍼가 직원 전용 창구로 은밀하게 빠져 나와 가지고 올 테다.


 방금 전까지 날렵하게 보석을 턴 지민은 금세 쉐브론의 흉내를 내며 호텔 복도를 걸었다. 헬퍼와는 다시 샤라가 있는 룸으로 가며 스쳐 지나갈 것이다. 고지가 멀지 않다. 정해진 루트대로 지민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한 때 사랑했던 씹새끼야. 과거까지 몽땅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어지게 만든 네 재능에 경의를 표한다. 조용해지자마자 머릿속에서 리플레이 되는 민윤기의 모습에 지민은 이를 악 물었다. 쉐브론이 아닌 걸 눈치 챘나 싶다가도, 철저히 얼굴 가죽을 붙이고 있으니 눈치 채지 못할 거다. 지민은 인정하기로 했다. 민윤기에게 뒤통수 맞은 순간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박지민 안의 어딘가는 민윤기를 놓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한심했다. 지민은 윤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고 결심했다. 목소리, 얼굴, 손, 그리고 함께 했던 추억까지. 과거의 미련은 과거에 둘 거다. 자신이 사랑했던 인간은 고작 이 정도의 인간이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다. 지민은 긴 심호흡을 했다. 잘 있어라 개자식아. 물론 엿먹어서 잘 있진 못할 테지만.


 사자의 눈물을 팔아 얻은 돈으로 이번엔 다른 나라를 가는 거다. 유럽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스위스에 있는 그림 같은 풍경도 보고, 이탈리아에 가서 파스타도 만드는 법도 배워보고. 아니면 부촌에 커다란 수영장 딸린 집 하나 사놓고. 샵에 들려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숨 쉬기도 버거울 만큼 값비싼 명품들을 사고 끝내주는 파티에 가서 즐기는 거다.


 지민은 미련과 과거, 추억, 그 모든 것을 이곳에 영영 묻어두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쿵-!


 엘리베이터에 커다란 진동이 울리며 정지한다. 뭐야. 이건 작전에 없는 일인데. 지민이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일이 꼬여가고 있나. 확인이 필요할 듯 했다.






***






 태형은 씨씨티비 화면 안으로 보이는 지민의 얼굴에 혀를 찼다. 괜찮을 리가 없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해야 한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금방금방 튀어나오던 박지민은 정작 스스로에게 엄했다. 김태형이 조금만 눈물을 보여도 튀어나와 왜 그러냐며 누가 괴롭힌 거냐 물으면서 본인의 눈물은 숨겼다. 때문에 태형도 지민에게 신경을 많이 쏟다 보니 지민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그런 못된 말미잘처럼 생긴 게 뭐가 좋다고. 태형이 에휴 한숨을 쉬었다. 박지민이 처음에 민윤기를 데리고 올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얼굴이 영 쎄했단 말이지.


 태태. 나 불법적인 일은 안 하기로 했어. 떳떳하게 살겠다며 민윤기와 같이 살아 보겠다고 희망에 들떴던 박지민은 민윤기의 통수 엔딩으로 몇 달을 폐인처럼 살았다.



“이 기회에 민윤기도 반성 좀 하겠지.”



 태형은 노트북으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헬퍼에게 사인을 보냈다. 슬슬 출발하면 됩니다.



“…응?”



 헬퍼로부터 돌아오는 답이 없다. 지민을 주시하던 캠을 돌려 다른 쪽의 CCTV를 확인했다. 홀에서 직원인 척 돌아다니던 헬퍼의 모습이 잡히질 않는다. 태형은 급한 손동작으로 다른 팀원들이 있는 화면까지 확인했다.



“샤라? 샤라?”



 답은 없으며, 모조리 전부 화면에서 사라져있었다. 등으로 서늘한 감각이 타고 내려온다. 이 업을 하다 보면 느끼는 감각들이 있다. 뭔가 지금 좃됐다, 하는 감각. 태형은 급히 지민이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어리둥절하게 CCTV 쪽을 바라보고 있는 지민이 보인다. 태형이 다급한 어조로 통신을 보낸다.



“지민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퍽. 시원하게 뒤통수를 후려치는 소음이 들린다. 그대로 태형의 머리가 풀썩 노트북에 처박힌다. 깔끔한 기절이다. 태형의 머리를 갈긴 인물은 범행도구를 그대로 바닥에 떨구고는 긴 금발을 쓸어 넘겼다. 그녀는 기절한 태형의 다리를 툭툭 치며 마지막 확인까지 한 뒤 손을 탁 털었다.



“미안해 자기. 나도 먹고 살아야 해서.”



 어차피 우리 그렇게 의리는 없는 사이였잖아? 이 바닥이 그래. 서로서로 이해해주고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구. 샤라는 기절한 태형의 사진을 찍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첨부된 메시지는 이렇다. 일 끝났어. 남은 잔금 보내. 상대로부터 답장은 빨랐다. 은행 어플에서 오는 알림이다. 천문학적인 금액이 그녀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그대로 태형을 뒤로하고 나오려던 샤라는 문득 노트북 화면에 아직 떠있는 CCTV를 보았다. 방금 전 생긴 자신의 남편 쉐브론이 그곳에 있었다. 어쩌다 그런 원한을 사서. 그녀는 지민을 향해서도 짧은 작별인사를 했다. 운명이 참 가혹해.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가장 좋은 친구. 샤라는 흥얼거리며 유유히 호텔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았다.






***







 지민이 이어셋을 툭툭 쳤다. 태태? 뭐야. 김태형?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태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방송이었다. 아아. 투숙객 분들께 알립니다.



[호텔에 무단 강도들이 침입하는 비상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대기중인 경비원들이 신속히 움직이고 있으니, 투숙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을 위해 안내를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현재 저희 호텔에는….]



 설마 저 무단강도라는 게 우리를 말하는 걸까? 태형아? 우리 털린 거니? 혹시 이거 꿈일까? 아무리 말을 걸어도 이어셋에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



 지민은 하아, 한숨을 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오늘 작업을 하면 안 됐던 것 같다. 운세가 이렇게 최악인 날이 없다. 개 같은 구남친 재회에, 작업까지 말아먹는 날이라니. 박지민 인생에서 이렇게 나쁜 날을 또 찾기는 힘들 거다.


 아직 완전히 망한 건 아니지. 지민은 급히 살아나갈 방법을 모색했다. 잡히지 않는다면 그 도둑질은 성공한 도둑질이 되는 거다. 엘리베이터의 3층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연락이 없는 걸 보면 헬퍼고, 김태형이고 전부 다 알아서 살 길을 찾아 튀고 있는 중일 거다. 가능한 빨리 먼저 튀는 게 붙잡힐 확률이 적다.


 띵, 엘리베이터의 경쾌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태연한 척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지민은 그대로 다시금 유턴하여 엘리베이터로 들어왔다. 닫힘 버튼을 연타하여 그대로 문을 닫았다.


 씨발.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이미 경찰이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미 층 곳곳에 검은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쫙 깔려있다는 거다. 진퇴양난이었다. 이걸 어떻게 벗어나야 되지? 지민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본다. 그 타이밍에 이상하게 아까 제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던 민윤기의 손이 떠올랐다.



“…….”



 쉽게 호텔에 들락날락하며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일반인이라면 피할만한 사람. 지민은 한 가지 신분을 생각해냈다.



“개새끼가 고마울 때도 있네.”



 지민은 어이없는 한숨을 쉬며 바로 쉐브론의 얼굴 가죽을 뜯어냈다. 렌트보이를 하기에는 민윤기처럼 싸이코 취향이 아닌 이상 이 쪽이 더 잘 먹히겠지.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고 숨을 흡 한계까지 참았다.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오르며 눈물이 맺힌다. 푸하. 숨을 토한 지민이 연이어 바지춤을 잡았다가, 멈칫거렸다. 여기서 한발 빼기에는 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신 그대로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흐흥. 가벼운 눈웃음을 만들어내자 거울 속에는 방금 전 거사를 치른 듯, 나른해 보이는 분위기의 남자가 서있었다.


 지민은 만족했다. 누군가의 침대를 전전하며 돌아다닐, 골목길에서나 환영 받을 차림이다. 탈출하려면 뭔들 못할까. 심호흡을 한번 한 뒤, 곧장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렀다.



“투숙객 여러분께서는 신속히 안내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이쪽을 통해 밖으로 향하는 출입은 전면 통제하며 차근차근 한 분씩 관리하에….”



 지민은 입구 쪽으로 줄을 서있는 투숙객 무리에 몰래 끼어 섰다. 다음. 그리고 다음. 마침내 지민의 차례가 왔다. 경찰은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그 안에 쉐브론의 얼굴이 동동 떠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의 얼굴까지 그대로 박혀있었다.



“잠시만 멈춰 주십시오. 투숙하는 방 번호가 어떻게 되십니까?”

“투숙이요? 저는 투숙이 필요 없는데에…같이 잠까지 자는 건 값이 비싼 편이라. 그래서 별로 선호하는 사람이 없어요.”



 지민은 취한 것처럼 말꼬리를 늘렸다. 눈웃음까지 치니 경찰은 알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싸구려 남창을 보듯 경멸까지 담긴다. 이때가 기회다. 지민이 백치 같은 말투로 연기에 박차를 가했다.



“저는 그냐앙, 잠깐 제 손님을 만나러 온 것 뿐인데 무서운 강도들이 들어왔다고 해서 놀라가지구….”



 지민이 몸을 베베 꼬았다. 경찰이 썩은 표정을 했다. 곁에 서 있던 호텔 직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그냥 패스하라는 듯 손짓한다. 그러나 직원은 단호했다. 한 분이라도 대충 넘어가지 말라는 마스터의 특별 지시가 있었어요. 직원이 지민에게 손을 뻗는다.



“잠시 수색하겠습니다.”

“제 몸이요?”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팔을 교차해 가슴팍을 가렸다. 옷 안쪽에 넣어놓은 보석의 양감이 느껴진다.



“그거는 좀 곤란할 것 같아요. 저는 아시다시피 몸이 재산이라서….”



 지민이 흘끔 셔츠 깃을 더욱 벌려 보여주었다. 뽀얀 맨살이 드러난다. 큼. 경찰이 헛기침을 했다. 직원은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참 교육을 잘 받았다.



“호텔 관리차원에서 하는 일입니다. 잠시만 양해해주시면 감사 드리겠습니다. 그대로 서계시면 됩니다.”

“…그래요?”



 씨발, 씨발.



“조심조심 다뤄주셔야 돼요.”



 지민은 살살 눈웃음을 쳤다.



“이래 봬도 비싸거든요.”



 지민은 자신에게 뻗어오는 직원의 손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여기서 튀어야 되나? 이미 이 작전은 망한 것 같았다. 쓰러지는 연기라도 해? 잠시 보석만 어떻게 하면. 찰나의 순간 이곳과 입구의 거리를 계산하고, 뒤로 튀어서 다른 층으로 도망갈 확률까지 계산해 보았다. 그러나 경찰의 품에 꽂혀있는 총을 발견하고는 계획을 접었다.


 그래도 이렇게 허무하게 잡힐 수는 없는데. 감옥에서 평생 썩히는 거나, 여기서 총에 맞나. 그게 그거다. 이미 죽은 삶이다. 지민이 숨을 들이마시며 튀어나가려 발에 힘을 준 때였다.



“어디 갔나 했더니. 왜 여기 있는 거야? 내가 룸넘버까지 알려줬는데.”



 낮은 음성과 함께 뒤에서 튀어나온 팔이 지민의 어깨를 감쌌다. 놀라 숨을 삼킨 지민이 얕게 파득 떨었다. 익숙한 목소리다.



“한참 찾았어.”



 입술 끝을 말아 올린 채 민윤기는 속삭이듯 말했다. 어깨를 감싼 커다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지민은 그대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민윤기에게 본 모습으로 들켰다는 사실도, 그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채 그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보기만했다. 민윤기는 지민이 매우 예뻐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물씬 호감인 티를 내며. 호텔리어가 당황하여 말했다.



“마, 마스터 이 분은….”

“아아.”



 윤기는 소유권을 주장하듯 어깨에 올려진 손을 미끄러뜨려 허리로 내렸다. 힘을 주어 지민을 더욱 자신의 옆으로 끌어 당겼다. 더없이 친밀해 보이다 못해 은밀한 관계처럼 보였다.



“제 손님입니다.”

“아….”



 벙 찐 호텔리어는 말을 찾지 못했다. 난데없이 등장한 마스터와 알고 보니 마스터가 부른 렌트보이. 이 무슨 해괴한 조합이란 말인가.



“오는 도중에 사건이 생겨서 제 손님이 길을 잃은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될 게 있습니까?”



 호텔리어의 안색이 조금 굳는다. 그는 급히 손을 휘저었다. 호텔을 계승한 차기 권력자에게 잘못 찍혔다가는 인생 끝이다. 아, 아닙니다! 마스터께서 부른 손님인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윤기는 사과를 받더니 고개를 돌려 지민을 돌아본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여태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지민에게 여 보란 듯 말을 붙였다.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는데. 어떻게 할까? 용서해줄래? 많이 무서웠지, 우리 고양이.”



 이 미친 새끼가. 지민은 제게 닿아오는 경찰, 호텔리어, 그리고 이 상황을 궁금해하는 다른 투숙객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샐샐 웃으며 윤기의 품에 머리를 비볐다. 차라리 시야를 차단해서 안 보고 이 상황에서 녹아버리고만 싶었다.



“…으응, 괜찮아요.”

“그럼 이만 갈까? 우리 고양이는 어땠어? 많이 보고 싶었어?”



 지민은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웃는 얼굴로 대신했다. 그럼, 그럼. 알지. 나도 많이 보고 싶었지. 윤기는 말하며 지민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그리고는 호텔리어에게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색에 힘써주길 바랍니다.”

“예!”



 호텔리어와 경찰이 윤기에게 깍듯이 대한다. 지민을 대할 때와는 다른 태도였다. 윤기는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사랑스러운 연인을 대하듯 여전히 지민의 허리를 껴안은 채 지민만을 바라보았다. 빨리 둘만 있고 싶네.


 그 의견에는 지민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바라던 바다. 어서 둘만 남고 싶다, 죽여버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