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윤기는 처음 알았다. 세상에 말하는 강아지도 있다는 걸. 개소리를 난발하는 진상 고객들 말고 진짜로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꼬리 흔들며 왕왕거리는 새끼 강아지.
“누가 가서 웨이팅 세팅하고 와.”
“네! 제가 할게요!”
“여기 청소 조금 더 깨끗이 하자.”
“네! 잠시만요, 그것도 제가!”
“여기 새우 손질….”
“네네네! 가요! 으차.”
가게 반대편에서 테이블을 닦던 지민이 윤기의 목소리에 반응해 듣고 쪼르르 달려온다. 이거 하면 되는 거죠? 지민이 눈에 힘을 주고 새우를 까고 있었다. 조그만 손으로 열심히 집중하느라 톡 튀어나온 입술이 유난히 돋보인다. 윤기는
잠깐 그에 시선을 뒀다가, 영 찝찝한 표정으로 툭 뱉었다.
“너 뭐냐?”
“네? 뭐가요?”
“뭐 잘못했어? 바닥 청소하다가
껍질 날려먹었어? 아니면 뭐 접시 깨뜨렸냐? 왜 갑자기 정신
차린 사람처럼 굴어.”
“제가 언제 사고를 쳤어요? 저는
항상! 셰프님을 생각하며 노력하는, 이번 달 우수사원 후보예요.”
지민이 뿌듯하게 가슴팍을 열었다. 우수사원이야 늘 정국이 받았었는데, 지민이 테이블을 종횡무진하며 손님들을 향해 꼬리를 흔든 뒤로는 지민의 것이 되었다. 윤기는 그런 지민을 보며 입을 닫았다. 사고를 언제 치긴. 매일 쳤지. 화장실 청소를 맡겼더니 지가 비 맞은 생쥐마냥 쫄딱
젖어서 낑낑거리는 박지민을 구조한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세면대 청소하라고 했더니 대체 어떻게 거기서
전신 샤워를 할 수 있는 건지. 뿐이랴. 박지민이 깬 접시와
컵만 모아도 벌써 유리궁전을 지었다.
집히는 단서와 물증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윤기는 입을 다물고
뒷목을 긁적였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민윤기의 전매특허 막말을 다물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럼 뭐. 알아서 하고. 그거 잘 까라. 껍질 손 다치지 않게.”
네에. 지민이 윤기를 흘끔거리며 눈꼬리를 샐샐 휘었다. 말랑해 보이는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이태리 식당을 조명 백 개는
쏘는 아이돌 무대 스테이지로 둔갑시키는 예쁜 웃음이었다. 새우를 마이크쯤으로 여기며 윤기에게 작정하고
끼를 부린다.
“제가 진짜 예쁘게, 최선을
다 해서 깔 거예요.”
옆에서 다른 식재료를 손질하던 직원이 손을 헛짚었다. 아니 웬 주방에
아이돌 직캠 실황이…새우 엔딩요정이. 웃기긴 한데 사람을 묘하게 홀리는 매력에 시선을 계속 던지게 된다. 그를 윤기만 눈치챘다. 윤기에게 온통 정신이 팔린 지민은 모르고.
“어, 그래. 열심히 해. 너는 뭐해. 오픈
시간에 멍 때리고 앉아있을 정신이 있어? 손이 잘 쉬네. 왜
뭐 다쳤어? 요양원이야? 놀지 말고 홀이나 닦아.”
“어, 어? 네? 저요?”
윤기는 직원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가 홀에 풀어주었다. 아니, 저 당근 칼도 못 놨는데. 잔말 말고 시키는 거 해. 당근칼을 뺏어 든 윤기는 직원을 기어코 주방에서 멀리 떼어놓았다. 정국을
포함해 다른 직원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 받으며 윤기를 이상하게 봤다. 그 시선을 의식한 윤기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오픈 준비 언제 다 하려고. 오늘따라
너네 손이 왜 이렇게 느려. 빨리빨리 해라.”
보조셰프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말한다. 예? 준비 아직 시작한지 5분도 안 됐는데요? 테이블을 닦던 정국도 항의했다. 이제 수건 빨아왔는데요. 윤기에게 어이없다는 듯 박히는 시선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서로
눈길까지 주고 받는다. 민윤기 왜 저러냐. 집에 우환 있나. 윤기는 지민의 앞과 달리 아주 뻔뻔한 얼굴로 지시했다. 준비하다
보면 시간 후딱 간다고 했어, 안 했어, 임마. 빨리 더 움직여.
잔소리를 폭발적으로 낸 그 후, 정작 본인은 밖으로 잠시 자리를 피했다. 묘하게 귓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웃을 때 원래 그렇게
웃나. 얼굴로 돈 벌어먹고 살려면 아무래도 그 정도는 해야지. 흔하게
흘리는 웃음 중 한 종류일 뿐이다. 윤기는 애써 그렇게 분석했다. 박지민도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우수사원을 땄다고.
그러니 사방팔방 죄다 홀려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까지 뺏는 거다.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꽉 막혀오며 답답했다. 민윤기는 이건 농땡이를 치는 직원에 대한 괘씸함으로 정의했다. 아무래도 정확하게 공지를 해야지 싶다. 사내연애 금지. 그렇게 생각하며 윤기는 순식간에 벌개졌던 귓가를 갈무리하고 가게 안을 향했다.
***
지민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사람이 눈치가 그렇게 죽을 수 있나. 물론 세상만사 관심 없는 마시멜로처럼 생기긴 했지만. 플러팅이란
플러팅은 죄다 퍼부었는데도, 눈만 마주치면 피하기 바쁜 민윤기를 보면서 지민은 지금의 작전을 다시 점검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유투브로는 이미 수많은 것을 훑었다. 짝남을 꼬시는 방법,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 짝사랑 필승법. 이상하게 카테고리에 ‘남미새’로 분류되어 있는 컨텐츠였는데, 이런 걸 죄다 훑었는데도 영 도움이 안 된다. 힝. 자주 웃어주면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민은 윤기에게 너 눈이 왜 이렇게
떨리냐, 마그네슘 부족이야? 이야기까지 듣고 난 후 참고용
북마크에 저장해놓은 모든 영상을 죄다 제거했다.
난공불락의 성. 그야말로 그건 민윤기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넘어온 사람이 없었는데. 지민이 조금만
다가가 호감을 보여도, 아니 대부분의 인간이라면 지민을 좋아하다 못해 먼저 다가와 호감을 보였으니 애초
다가갈 필요조차 없었다. 때문에 난생처음 먼저 플러팅을 시도해본 지민은 길이 막히자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지민이 형 오늘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휴식시간 정국이 지민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를 빼 앉았다.
“오늘 같이 끝나고 고기 먹으러 갈 수 있어요? 얼굴 보니 고기 한입 먹고 그만 먹겠다고 할 거 같은데.”
“아냐. 먹을 수 있어.”
정국이 지민을 의심스레 바라봤다. 지난 번에도 그러고 소주만 마셨으면서. 보나베띠에 근무한 이후, 정국과는 친해져서 꽤나 연락을 주고 받는
편이었다. 모르는 일들을 이것저것 물어보고 정국이 첫 알바생으로 윤기와 함께 한 시간이 그나마 기니
윤기에 관해 물어보기 좋았다. 윤기 형이요? 그 형은 혼자
하는 걸 워낙 좋아해서 모르겠는데. 물론 정국이 윤기와 여태 대화 한 시간을 다 합산하면 한 시간도
안 될 거라 주장하는 바람에 얻은 소득은 크게 없었다.
“정국아 넌 좋아하는 게 생기면 어떻게 가져?”
“좋아하는 거요? 사 먹는데. 만들어먹기도 하지만 귀찮아서 역시 사 먹는 게 편하죠. 고깃집 이번에
내가 가자고 한 곳도 진짜 맛있는 곳인데.”
“아니, 그거 말고 사람
말이야.”
“뭐요. 사람이요!?”
정국이 큰 눈을 댕그랗게 뜨고 크게 외친다. 그 외침에 다른 쪽 의자에
길게 누워있던 여자 스태프가 일어나 관심을 보인다. 뭐야. 뭔
일인데. 아니 지민이 형이 좋아하는 건 어떻게 가지냐고 해서. 뭐어? 지민이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혜주가 세상이 무너진 것마냥 슬퍼했다.
“이 지독한 식당에서 지민이 널 보는 게 내 삶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식당은 계속 나올 거예요!”
“누군가의 임자가 되면 마음껏 좋아하는 건 좀 양심에 죄책감이 들어. 이 누나 그렇게 도덕 없는 사람 아니다.”
이어 혜주는 뭐가 문제냐는 듯 쉽게 말했다. 근데 지민이 네가 그런
고민을 왜 해.
“술 한 번 같이 먹고. 눈빛으로
이야기만 해도 훌렁훌렁 넘어오지. 우리 천사 아기 강아지가 바라보는데 어떤 미친 사람이 안 돼요, 꺼져요라고 하겠어. 그건 싸이코 패스야.”
이렇게 귀여운데! 혜주가 지민의 뺨을 톡톡 가볍게 두들겼다. 보나베띠 식구들과 제법 친해진 지민은 까칠하게 쳐내는 인플루언서의 모습대신 손 탄 순한 시골 강아지마냥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지민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술 한
번 같이 먹고. 은근한 눈빛을 보내면서 민윤기를 꼬신다. 정국과
고기를 먹을 때 듣자 하니 윤기는 술을 좋아한다고도 들었다. 생각보다 그거 괜찮겠는데? 가능성 높아 보이는데.
“고마워요 누나!”
지민이 활짝 웃었다. 우리 식당에는 오렌지가 필요 없다. 지민이가 비타민이야. 혜주가 귀엽다며 지민의 머리칼에 한번 더 손을
뻗은 때였다.
“박지민, 소스 만드는
법 알려준 거 안 까먹었어? 테스트 해봐야지. 쉬는 시간
끝나기 전에 복습시킬 거니까 와서 서봐.”
어느 샌가 나타난 윤기가 잽싸게 다가와 지민만 쏙 빼냈다. 보통 쉬는
시간에는 조금이라도 더 쉬겠다며 2층으로 사라지는 윤기였기에, 혜주는
의외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쉬는 시간 끝나기 1분
전에나 칼같이 내려오던 양반이 여기 갑자기 왜…? 정국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구가 쪼개져도 쉬는 시간은 지킨다고 한 사람인데.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의심 없는 지민만이 윤기를 총총 따라간다. 머릿속으로
불손한 마음을 가득 품은 채.
***
휴가를 앞둔 지 얼마 안 된 날이었다. 민윤기의 폰에 전화가 울렸다. 김남준. 요리에 막 관심을 가진 시점, 같은 주방에서 일했을 때 만난 놈이다. 윤기는 전화를 받았다. 하하, 강녕하시지요 형님. 제가
마침 요번에 좋은 와인을 손에 넣었는데 따악, 윤기 형님이 생각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좋은 걸 혼자 마실 수는 없으니 우리 사랑하는 형님께….
“뭔데. 용건만 말해.”
[형님 살려주세요.]
“안 돼.”
[아니 뭔지는 들어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의리가 있지.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주세요 형님.]
“그래 말만 해봐라. 듣고
거절할 테니까.”
남준이 설명하는 요지는 이랬다. 단체예약이 하나 들어왔는데 그 예약이
무척이나 중요한 예약이란다. 재벌가에서 특별히 준비한 자리라 하나하나 신경 써 달라고 각별히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코스메뉴에 정성을 쏟고 있는 사이, 남준의
보조셰프가 어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을 했단다.
[제발 그날 형님이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거 망하면 저 가게 문 닫아야 돼요. 제바알.]
남준이 흑흑 눈물 찍는 소리를 냈다. 어지간하면 일손 벌리지 않는
놈이 이 정도로 말할 정도면 정말 중요한 예약이긴 한가보다. 요새는 인스타 감성이니 뭐니 하는 걸로
젊은 층들은 호텔 대신 유명한 개인 레스토랑을 빌리기도 했다.
“그날 날짜 찍어서 보내.”
[형님 사랑합니다!]
“어 그건 버려.”
나중에 크게 대접하겠다는 남준의 말을 흘려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휴가에는
일과 거리를 두기로 마음 먹었건만. 그날 남준을 도우려면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게 됐다. 레시피는 물론이고 속도를 위해서는 남준의 주방에 미리 방문해 맞춰야 할 게 많다. 벌써부터 짬을 내서 살펴야 할 게 산더미다.
그때였다. 누군가 윤기의 등을 뒤에서 콕콕 찔렀다. 정말 새가 부리로 쪼듯 콕콕.
“셰프님 이번 휴가 때 시간 있으세요?”
남준과 전화하면서도 주방을 마감하던 손이 단숨에 멈춘다. 지민이 몸을
베베 꼬고 있었다. 이미 한껏 기대를 드러내고 있는 눈망울이 여간 투명한 게 아니다. 윤기는 눈동자를 한 바퀴 스르륵 굴렸다. 남준이 문자로 추가 연락을
보내는지 폰이 웅웅 진동을 울린다. 씹고 주머니에 폰을 쑤셔 박았다.
“뭐. 없진 않지. 왜.”
“리조또로 메뉴 개발을 해본 게 있는데, 셰프님이 한번 맛 봐주셨으면 좋겠어서….”
“네가? 개발을 했다고?”
“네.”
소화제 준비해놔야겠네. 해열제랑.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했나 보네. 언제
올 건데?”
“근데요. 여기 말구…저희
집에서 하면 안 돼요?”
“너네 집?”
지민이 어쩐지 윤이 나는 눈동자로 바쁘게 끄덕거린다. 항상 보나베띠에서
모든 요리를 했기에, 희한한 제안이었다. 다른 말로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단 뜻이다. 윤기가 말없이 지민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민이
움찔 반응하며 묻지도 않았는데 줄줄 이유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메뉴를 개발한 곳이 집이라 아무래도 집에서 해야 더 요리가 잘 될
것 같구.”
지민은 그 외에도 여덟 가지의 이유를 덧붙였다. 새로 산 마요네즈가
곧 상할 것 같아서 빨리 써야 한다는 둥, 집에 새 냄비를 샀는데 잘 산 건지 테스트를 받고 싶다는
둥. 쓸모는 없지만 급해 보이는 이유들이었다.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듣던 윤기가 고개를 끄덕인다. 지민의 눈빛이 기대로 넘실거릴 때.
“그냥 가게로 나와. 어차피
알려주긴 그게 더 편해.”
“아니 그건 괜찮은데.”
“메뉴 평가 받는다며?”
지민이 답답한 듯 입술을 오물거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데
차마 할 수 없나 보다. 그 곤란한 모습에 윤기는 스미는 웃음을 눌러 참으며 덧붙였다. 이유 열 개만 더 말하면 가볼게. 열 개나? 지민이 끙 거리더니 하나하나 짧뚱한 손가락을 꼽으며 센다. 주방기구
새로 산 게 있는데 그것도 한 번 봐주셨으면 좋겠구. 그건 기각. 왜요? 어차피 너 다 태우잖아. 결국 지민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윤기를
흘긋거렸다.
“아잇 셰프님 그냥 가자고 하면 쫌 가면 안 돼요?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어쭈.”
삐진 강아지가 됐다. 아님 병아리거나. 불퉁해진 얼굴이 꽤 귀엽다. 결국 참아왔던 윤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화났나 보네.”
커다란 손이 지민의 턱을 간지럽히듯 긁는다.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튄다.
“가, 갑자기 뭐예요.”
당황하더니 순식간에 윤기로부터 두 발 멀어진다. 허공에 윤기의 손만
덩그러니 남는다. 깜짝 놀랐잖아요. 지민의 목 부분이 발긋하게
달아오른다. 윤기는 허공에 뜬 손을 내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순식간에 언짢음이 민윤기의 감정을 지배했다. 걔네가 하는 건 되고
내가 하는 건 왜 도망 가는 거지? 누가 만져도 손이 타서 가만히 있던 지민은 윤기의 접촉만 피했다. 손님들 테이블에 가서도 방긋방긋 잘 웃기만 하더니. 윤기는 왜인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차오르는 불쾌감에 휩쓸렸다.
“그래. 그럼 너네 집에서
해.”
“정말요?”
순식간에 밝아진 지민이 활짝 웃는다. 어. 이제 주방 마감해야 되니까 가라. 네! 어서 가서 마저 청소할게요! 지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윤기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주방을 빠져나갔다. 강아지 꼬리가 살랑거리는 듯했다. 남은 윤기만이 오히려 더 그 뒷모습을 삼키듯 노려보았다. 달라붙는
다른 사람이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
이번 준비는 실패하지 않겠다. 지민은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민윤기
포획 프로젝트의 종점이 될 날을 간택했다. 위스키와 와인, 소주를
종류 불문한 채 궤짝으로 사서 집에 마련했다. 여기서 민윤기가 좋아하는 거 하나는 있겠지. 자고로 유능한 사냥꾼을 덫을 잘 쳐야 된다. 모든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 사냥감을 불렀다.
“주방 깔끔하네.”
그야 며칠을 닦고 쓸었다. 며칠 동안 급하게 리조또를 연습하면서 폭탄
떨어진 것 같은 현장을 치우느라 고생을 꽤나 했다. 윤기는 지민의 집이 제법 신기했다. 인플루언서라고 하니 보안이 삼엄한 집에 살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황량한 오피스텔에 살았다.
“요리라는 걸 해먹긴 해?”
“그럼요! 셰프님은 여기
앉아만 계세요.”
지민이 요리를 시작하겠답시고 식탁 의자를 빼 안내했다. 윤기는 앉는
대신 지민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그러고 요리한다고?”
“네. 왜요?”
“…어, 해 봐.”
지민이 꽁지깃을 자랑하는 제비마냥 쫙 빼 입은 수트의 팔을 걷어붙였다. 한껏
꾸며 뒤로 넘긴 머리는 주방이 아니라 시상식에 어울린다. 총총 부산스레 돌아다니며 준비까지 하니 둥지를
만들 준비를 하는 제비 같기도 하고. 이거 영 그른 거 같은데.
윤기는 자연스레 일어나 지민을 툭툭 쳐서 비키게 만들더니 시범을 보여준다며 조언을 쏟아냈다. 팬 돌릴 때는 그렇게 돌리는 게 아니고. 불 조절은 기본적으로 약불로
해. 못하면 이렇게 하는 게 사는 길이야.
“다 했다! 어때요?”
재료준비 박지민. 재료 다듬기 민윤기. 스테이크 굽기 민윤기. 간 맞추기 민윤기. 그렇게 민윤기의 지분 70퍼센트가 들어간 리조또가 완성됐다. 맛있네. 윤기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 만들었어. 다 컸네. 그
말에 지민이 애교살이 볼록 솟아오를 정도로 웃었다. 모든 요리를 다 한 민윤기는 얌전히 지민의 말대로
테이블에 먼저 앉았다. 나르는 건 혼자 하게 둬야지.
그러나 문제는 거기 있었다. 민윤기의 눈에 조금이라도 들어보자 입은
박지민의 명품 셋업은 신상이었고, 전세계에서 300벌 한정으로
나온 옷은 명성에 비해 옷감이 굉장히 뻣뻣했다. 찬장에 놓은 와인잔을 꺼내려 지민이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와인잔을 쥐었다고 생각한 순간, 미끄러진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대리석으로 된 조리대에 부딪혀 순식간에 와장창 소음이 발생했다.
“박지민!”
민윤기가 벌떡 일어나 달려온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조각은 보이지도
않는 것마냥. 윤기는 무슨 대형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마냥 지민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괜찮아? 안 다쳤어? 봐봐. 손.”
심각하게 지민의 손을 잡고 주물럭거린다. 저는 괜찮은데. 뭐가 괜찮아. 유리조각은 미세해서 잘 봐야 돼. 윤기는 꼼꼼하게 지민의 손을 확인한 뒤에야 간신히 놓아주었다. 무사한
걸 확인하니 뒤의 상황이 보인다. 유리조각이 기껏 만들어놓은 요리 위로 흩뿌려졌다. 심지어 떨어지면서 리조또가 지민의 옷에도 튀었다. 정말 새끼 손톱만큼.
“화상 아냐? 봐봐.”
“이거 두꺼워서 괜찮은데.”
윤기가 확인하려 지민의 셔츠 단추를 푼다. 뽀얀 속살이 검은 셔츠
안으로 빼꼼 드러난다. 하필 검은색이라 살이 유독 뽀얗게 보인다. 꼭
우유로 만든 빵 같았다. 윤기의 손이 멈춘다. 지민은 셔츠가
벌어진 채로 윤기를 올려다만 보고 있었다. 깜빡깜빡. 거침없이
열던 손이 멈칫했다. 정적이 그들의 머리 위로 아주 짧게 스치고 지나간다. 윤기가 헛기침을 했다. 다행이네.
괜찮네.
“가서 씻어. 내가 치울
테니까.”
윤기는 혹시라도 지민이 유리조각을 집을까 아예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지민의
시선이 리조또에 닿는다. 유리조각이 잔뜩 흩뿌려진 요리는 먹었다간 응급실에 실려갈 판이었다. 윤기는 얼른 가라고 재촉하며 유리조각을 쓸어 담았다. 지민이 울상을
지었다. 아. 죄다 망했다.
“빨리 다녀올게요….”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지민이 사라지며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까지
미친 듯이 청소기처럼 주방을 치우던 민윤기의 손이 뚝 멎었다.
씨발. 뭐지? 민윤기의
머릿속에야말로 유리조각이 흩뿌려지며 쿡쿡 쑤신다. 지민의 말간 얼굴과 그 밑에 있던 뽀얀 가슴팍. 그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 되어 민윤기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미친
거 아닌가. 유리가 깨져 다칠 수도 있는 판에 그 모습만이 민윤기 안의 잠재된 무언가를 계속 건드렸다.
민윤기는 타인에게 무심했다. 수상했다고 치켜 세워주며 들러붙는 인간도
귀찮았고, 거만한 새끼라고 욕하는 인간도 귀찮았다. 유학
길에서 몇 없는 동양인으로 온갖 소문에 시달렸더니 사람 자체에 질려버렸다. 때문에 민윤기는 요리 말고
인생에서 가까이 한 것이 없었다. 그게 사람이든, 감정이든. 가까이 옆에 두고 탐구해볼 마음도, 소비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박지민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든단 말인가.
난생 처음 봤다. 동경이, 뭐
그딴 게 이렇게 반짝거릴 수도 있는 건가? 불쑥 튀어나와 민윤기의 주방을 이곳 저곳 헤집고 돌아다니더니
기어코 머리까지 헤집는다. 셰프님은 마시멜로우 같아요. 하얗고
따뜻해요. 샐샐 웃으며 누구도 한 적 없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하길래 신기하다 여겼고, 어딜 가도 자신만을 꼿꼿이 바라보며 졸졸 따라다니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귀여워 보이더니 그 쥐방울만한 게 야해 보였다. 하. 윤기가 어이없는 한숨을 쉬었다. 민윤기 대가리 빻았네. 이 나이 먹고 욕구불만 뭐 그런 거냐.
윤기는 불손한 생각들을 밀어내기 위해 혼신의 걸레질을 했다. 애국가
외우듯 남준이 보내준 레시피를 다시금 줄줄 외우며 리조또를 버리고 뒷정리를 마무리했을 즈음이었다. 간신히
마음이 가라앉았는데.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요. 그런데
당장 빠르게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샤워가운을 입은 지민이 등장했다. 샤워 후라 그런지 볼이 발그스름했다. 올렸던 머리는 축 내려가 앞머리가 이마에서 살랑거린다. 뽀얀 얼굴이며
아까 보인 가슴팍이 다시 윤기에게 인사한다. 민윤기는 다시 한번 목구멍에 걸려 나온 욕설을 짓이겼다. 씹…. 박지민의 망해버린 플랜이 오히려 더 효과가 좋았다.
반면 지민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다. 풀세팅으로 꾸민 모습도 날아가고. 분위기 잡을 요리도 날아가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 오늘은 포기다.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다짐하며 집에서 빨리 먹을
수 있는 메뉴 따위나 샤워하며 생각했다.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라면 먹고 갈래요?”
“…….”
“저 라면은 진짜 잘 끓여요! 좋아해서
많이 먹었더니 그건 완벽해졌어요.”
“…….”
“셰프님?”
“아니 괜찮아. 안 먹어도
돼. 영화나 보자.”
“그래도 배고프지 않아요?”
“안 배고파.”
윤기는 지민을 질질 끓어 쇼파로 데려갔다. 진짠데. 지민이 힝 하더니 이내 과자를 들고 윤기의 옆에 붙어 앉았다. 영화
뭐 볼 건데. 윤기가 물었다. 지민이 채널을 몇 번 돌리더니, 생각났다는 듯 아! 외쳤다.
“저 셰프님 나갔던 국제대회 유투브로 찾아봤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봐.”
“찾으니까 나오던데요?”
한국에서는 크게 주목 받지 못해 그 어느 방송사에서도 촬영은 오지 않았다. 간단한
인터뷰 자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심지어 이전 대회 기록도 오래된 자료가 삭제되어있을 터였다. 찾기 어려웠을 텐데. 그 말에 지민은 다시금 샐샐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웃었다. 에이, 하나도 안 어려웠어요.
지민이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윤기를 본다. 이 눈이었다. 민윤기를 뒤흔드는 이 눈빛. 인내심이란 인내심을 다 긁어 모아 참았으나
이어지는 지민의 말이 윤기의 가느다란 신경줄을 끊었다.
“셰프님한테 관심 많으니까 괜찮던데요?”
달달한 향이 난다. 바디워시 향인지,
아니면 이게 박지민한테서 나는 체향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민윤기가 맡아본 그 어느 향신료보다
달고 자극적이었다. 윤기는 제 옆에 달라붙어 앉은 지민 쪽으로 허리를 기울였다. 말갛기만 하던 지민의 눈이 크게 뜨인다.
“나한테 관심이 많으면.”
윤기 특유의 저음이 확인사살 하듯 지민을 옭아맨다.
“어떻게 많은지 물어봐도 돼?”
단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속도감에 지민이 어버버거리며 입을 떼지 못했다. 어, 아? 응? 삐그덕거리는
로봇마냥 변해버린다. 민윤기는 한 번 밟은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여태
눈치 없는 행위는 그저 연기였던 것만 같다. 지민이 당황해도 멈추지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뼈대 굵은 몸에 지민이 뒤로 기울어지며 가운 사이가 스르륵 벌어진다.
민윤기는 확정했다. 이건 단순히 신경 쓰이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관심 같은데. 내 착각은 아닌 거 같고.”
“…….”
“나도 이제 너한테 관심 많은 거 같아.”
윤기의 숨결이 지민에게 다가온다. 지민은 당황하여 굳어있었으나, 결코 윤기를 피하지 않았다. 바로 입술이 맞물린다. 흠칫 떤 지민이 입을 열지도 못하고 움찔거린다. 윤기는 잠깐 입술을
가까이 붙인 상태에서 조금 물리고는, 아직까지도 깜빡거리고 있는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키스하는 것도 강습해줘야 되나.”
“…이거 꿈 아닌, 진짜로
셰프님, 응.”
윤기의 혀가 지민의 입안으로 파고 들었다. 커다란 손이 지민의 눈을
감겨준다. 따뜻한 암전에 둘러 쌓이자 지민은 그대로 손을 뻗어 윤기의 목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