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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지구 마지막 날 03

by 토페 posted Sep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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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윤기 인생에서 그렇게 황당한 순간이 없었다. 돌아왔을 때 보인 텅 빈 침대. 이게 씨발, 진짜인가? 그는 눈을 의심했다. 천하의 민윤기가 먹튀를 당했다. .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화를 넘어 헛웃음이 나왔다. 침대에서는 세상 강아지처럼 좋다고 들러붙어놓고 눈 뜨자마자 홀랑 도망을 쳐? 낑낑대며 제 품을 찾아 기어들어와 그 안에서 안정을 찾던 주제에. 괘씸함에 뜨끈하게 열이 받았다.

 

 윤기는 혹시나 싶어 호텔룸을 뒤져 보았다. 자신이 누군지 안다면, 재벌가 자식 침대에 냉큼 뛰어들어 몸 바친 사람이라면 무언가 고리를 남겼을 터다. 그러나 연락처를 남긴 쪽지는커녕 머리카락조차 찾을 수 없었다. 상대방은 먼지 하나 안 남기고 거짓말처럼 그대로 방에서 증발했다. 정말 말 그대로 증발.

 

 그렇게는 못 두지. 지난 밤 황홀하게 맡은, 제 취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페로몬 향이며 품에 안았던 체온을 윤기는 놔줄 수 없었다. 오메가와 엮이면 구토부터 하던 민윤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진 황홀함이었다.

 

 그는 이로 혀를 작게 씹으며 그대로 친우를 찾았다. 의도 뻔한 선물이라 굳이 마음에 든다고 하고 싶진 않았었다. 남에게 밑지지 않고 혼자 유유자적 사는 것. 그게 민윤기가 가진 모토였다. 그러나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선물이다. 철도 계약건이야 그냥 던져줘야지. 수백억짜리 계약 정도는 쉽게 적선할 수 있었다.

 

 의서가 윤기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작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자발적으로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 민윤기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민윤기는 짧은 안부인사 같은 건 다 집어치우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말 그다웠다.


 

네가 그때 부른 애 누구야.”

? 내가 뭘 불러.”

그때 파티에서. 선물.”

선물?”

 


 의서가 뭔 헛소리를 하냐는 듯 윤기를 본다.


 

와인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야? 그거 뭐냐고?”

?”

선물 궁금하다는 거 아니야? 뭐야.”

네가 넣어놓은 오메가.”

? 내가 넣어놓은 와인 이름은 오메가가 아닌데? 야 그거 존나 비싼 거야. 아니 잠깐만, 설마 네가 말하는 게 진짜 오메가야? 민윤기 네가?”

 


 의서가 마찬가지로 헛소리를 했다. 전혀 모르는 태도였다. 그녀는 대신 경악을 했다. 세상이 미쳤네. 민윤기가 오메가한테 관심을 다 가지고. 주접 떠는 의서에 볼 일 끝났다고 당장 자리 떠났을 민윤기는 그대로 굳은 채 앉아있었다.

 

 당황한 탓이다. 넣어놓은 선물이 아니라면, 그럼 제 방에 굴러 들어온 그 감귤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의서는 미묘하게 변해가는 윤기의 표정을 보고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 네가 진짜 오메가한테 관심을 다 가지고. 지구가 뒤집어졌나. 누구야. 누군데?”

간다.”

 


 당연히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오메가의 흔적이 사라진다. 물음표를 가득 채운 감귤이 민윤기의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민윤기는 그대로 곧장 그날 파티에 온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호텔의 부실한 관리에 혀를 찼다. 얼마나 관리를 형편없이 하면 같은 룸을 줘? 장사 접고 싶어 돌았나.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그는 초대 받은 사람 명단 속 얼굴들을 쭉 훑어봤다. 별 볼일 없는 집안 자식이겠거니 했다. 그날 처음 왔고, 민윤기의 침대에 뛰어든 걸 거다.

 

 그러나 명단 마지막까지도 그날 본 감귤은 등장하지 않았다.


 

.”

 


 감귤에 물음표가 하나 더 찍힌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포기했겠지만 독종 민윤기는 그렇지 않았다. 불법루트도 거침없이 써먹었다.


 

그 날 호텔 CCTV 받아와.”

 


 관리실장을 시켜 복도 CCTV를 돌렸다. 그곳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얻었다. . 어이없는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호텔리어였어?”

 


 이러니 못 찾았지. 윤기의 방으로 직원이 들어간다. 그리고 문이 닫혀 한참을 나오지 않고, 그대로 민윤기가 들어가는 장면이 찍혀있었다.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는 이제 윤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그날 일한 직원 중 오메가인 직원의 리스트를 받아왔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직원들의 얼굴 중에서 감귤은 없었다.


 

오메가인 직원이 이게 전부라고?”

. 정직원 중 이 만큼이 전부라고 합니다. 단기 아르바이트 생들은 전부 베타만 뽑았기 때문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 얜 누구야. 직원도 아니고 손님도 아닌 애가 당당하게 룸을 드나들고. 문은 왜 처 달아놓은 거야? 어차피 아무나 다 통과시키는데. 이럴 거면 강도한테도 그냥 열쇠 주지 그래.”

 


 관리실장은 점점 까칠하게 변해가는 윤기의 표정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 윤기는 마른 세수를 했다. 기가 막혔다. 하늘로 날아갔나 땅으로 꺼졌나 감귤은 정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마치 그 날은 윤기의 꿈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위장한 스파이 뭐 그런 건가. 그럼 연락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스파이면 정보 훔치고 협박을 해야지 왜 가만히 있냐고. 근무태만인 감귤을 탓하며 윤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 괘씸한 감귤. 다시 만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근지근 씹어 먹고 싶었다.

 

 그러나 사라진 감귤의 행방보다 어이없는 건, 바로 제 자신이었다. 고작 하룻밤 보낸 오메가 따위 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민윤기는 어떻게든 다시 한 번이라도 보려고 안달 내며 평생 애지중지 키워온 집 나간 강아지 찾듯 찾고 있었다. 오메가라면 귀찮아하며 딱 잡아떼던 민윤기 인생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감귤을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헤매고 있을 무렵, 민윤기는 자신이 왜 그렇게 감귤에 눈이 돌아 찾는지 원인을 알게 되었다. 정말 황당한 방식으로.


 

아무래도 다시 한 번 정확한 검사를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주치의는 보기 드물게 쩔쩔 맸다. 요새 들어 부쩍 심해진 두통에 검진이나 하러 온 차였다. 윤기는 미간을 좁히며 툭 말했다.


 

뭡니까.”

도련님께서 보이는 증상이…페로몬 각인인 것 같습니다.”

 


 그냥 각인도 아니고 페로몬 각인. 이미 굳어진 윤기의 얼굴이 더욱 흉흉하게 변한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붙였다.


 

간혹 보이는 증상으로, 형질인들 사이에서는 페로몬이 상대방에게 매우 잘 들어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극히 드문 일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연결될 경우 상대의 페로몬을 계속 찾게 됩니다. 마치 각인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진짜 각인은 아니라 중독 증세를 보이는 것 외에는 괜찮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미친 일만 가득 일어나고 있다. 팔짱을 낀 채 하, 어이없는 헛숨을 내쉰 윤기는 그제서야 납득했다. 감귤이 안 잊혀지는 이유가 각인 때문이라니. 그 페로몬 각인이라는 것엔 얼굴도 포함되어 있나. 윤기는 제 밑에서 발간 얼굴로 매달려오던 뽀얀 얼굴을 되새김질 했다. 그러나 주치의에게 묻기는 영 꺼려져 말을 아꼈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상대도 나를 원하는 건가?”

그건, 음…. 확신할 수 없습니다. 페로몬 각인 종류에도 역시 일방적 각인도 똑같이 있는 터라…도련님께선 극우성이시니 증상이 다른 형질인들보다 강할 것 같습니다.”

 


 감귤이 제 발로 다시 굴러들어올 가능성은 없다. 좆 같은 상황이다. 주치의는 점점 싸늘하게 굳는 윤기의 인상을 보고 냉큼 발을 뺐다.


 

…약을 드릴 테니 꾸준히 복용하시면 증상이 완화되실 겁니다.”

 


 민윤기는 한 순간에 병자 신세가 됐다. 그것도 상사병이라 일컬어지는 일방적 각인에 걸려. 씨발.

 

 그러나 황당한 일은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그 진단을 기점으로, 정말 몸이 미쳤는지 사이클 주기까지 망가지기 시작했다.

 

 러트가 뜬금없이 시작됐다. 그것도 미팅을 이동하는 차량 안, 도로 한복판에서. 심지어 이례 없이 격한 러트였다. 러트 사이클 억제제를 입에 미친 듯이 털어 넣고 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개처럼 시트를 쥐어뜯고 혀를 짓씹던 윤기는 깊은 좆같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태블릿은 바닥에 부서져있었고 시트를 긁은 손톱은 부러져있었다. 차 안은 난리가 나있었다. 단추 끝까지 채워 잠갔던 명품 수트는 찢어져 너덜거린다. 숫제 짐승새끼가 따로 없었다.

 

 민윤기의 러트 소식은 친지 일가들에게도 퍼졌다. 덕분에 그대로 본가로 불려와 껄끄럽기 짝이 없는 식사자리에 참여했다. 밖에 내버렸던 손자한테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이 많으셨다고. 하긴 극우성 알파로 발현한 순간부터 챙겨주긴 했다. 그들은 형질에 대해 끔찍하게 집착했으니까. 민윤기도 그를 알고 제 형질을 이용해 먹으며 재벌가 후계자 자리를 꿰찼으니,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요새 몸이 안 좋다고 들었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중후한 톤으로 입을 뗐다. 기업 총수인 조부였다. 그 누구보다도 형질과 씨에 집착하는 이였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몸은 미리미리 챙겨야지. 센터라도 한 번 가봐라. 대일이가 하지 않으냐.”

그래. 윤기야 한 번 와서 검사라도 받아봐라.”

 


 대병원을 운영하는 회장의 셋째 아들이 거들었다. 회장에게 잘 보이려고 스스로 팔도 자를 놈이었다. 윤기는 대충 예의 바르게 웃으며 찾아간다는 말을 남겼다. 좆같은 혈연들과 말싸움하고 있을 시간도 아깝다. 감귤을 찾는 게 더 중요했다.

 

 사실, 실제로도 센터의 역할이 그에게 필요했다. 주치의는 이런 식으로 억제제를 털어먹으며 계속 러트를 보내다간 완전히 몸이 망가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귀찮은 센터, 특히 가서 오메가들과 페로몬을 섞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듯했지만 민윤기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이나 우성 알파의 러트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민윤기는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으르렁거렸다.


 

미친 거야? 당장 내보내.”

 


 사탕껍질 같은 향의 페로몬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거부감에 헛구역질까지 나온다. 옆에서 경호하던 가드가 급히 오메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윤기는 늘상 달고 사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마를 꾹 눌렀다. 감귤과 몸을 맞대고 난 이후 다른 페로몬들이 더욱 역겨웠다. 과거에는 우성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그나마 괜찮은 축에 속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평생 좆같은 페로몬 속에서 살다 뒤질 운명이 된 거다. 감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센터에서는 난감함을 표했다. 우성이 어디 길가에 널린 핫도그도 아니고. 애초 센터에서 일을 하는 사람 수조차 열이 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난감함을 표하든 말든 그것은 민윤기가 알 바 아니었다. 재벌가의 후계자로 점쳐지는 싸가지 없는 도련님의 비위를 맞추는 건 아랫사람들의 역할이었다. 윤기는 센터가 발을 동동 구르며 계속해서 구해오는 오메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특실에 시간 맞춰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는 거다.


 

윤기야 오느라 수고 많았다.”

 


 그런 넓고 깊은 은혜도 모르고 왜 이 새끼가 여기서 나올까. 윤기는 프라이빗 룸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 형을 보며 기분이 더욱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얼굴 들이밀 때 안 들이밀 때를 구분할 줄을 모른다. 이러니 키우라고 물려준 회사를 다 말아먹고 이 병원 하나만 간신히 남아있는 거다.


 

요새도 고생이 많지. 차트 봤는데 페로몬 불안정 수치 심각하더라.”

글쎄요. 워낙 달고 살아서 잘 모르겠는데요.”

 


 성의 없이 대꾸하며 윤기는 대충 마련된 쇼파에 털썩 누워 고개를 뒤로 젖히며 뻐근한 목을 주물럭거렸다. 누가 상석에 있는지 모를 태도다. 그럼에도 윤기의 혈연은 하하, 웃는 얼굴로 굽신거렸다.


 

그럼 다행이구나. 할아버지께서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셔. 나한테도 꾸준히 연락해서 네 상태를 물어보시는 구나.”

그래요?”

그래! 조만간 식사자리에도 다시 모여서….”

하아, 형님.”

 


 윤기가 눈썹 뼈 쪽을 한 손으로 머리 아프다는 듯 꾹꾹 눌렀다.


 

형님 생각해서 하나 말해줄게요. 나 타고 어떻게든 할아버지 눈에 들어서 올라가려는 거 알겠는데, 빈 그릇 아무리 핥아도 뭐 안 나와요. 이미 말아 드신 게 몇 개인데 또 재료를 구합니까. 배 안 불러요? 오늘내일 하는 영감님 그만 괴롭히고 스스로 살 길을 찾아보세요. 병원이나 멀쩡하게 가지고 있어요. 이거마저 말아 드시면 그땐 영감님이 형님 피로 수영을 할 거니까.”

, 너 이 자식이…!”

그만 시끄럽게 하고 나가세요. 내가 때려 치고 나가면 영감님이랑은 이제 무슨 수로 연락하려고.”

 


 그의 형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나 민윤기의 말이 죄다 맞았다. 보험사 하나 키워보라고 던져줬더니 대차게 말아먹고 그때 골프채로 후드려 맞은 자국이 아직도 몸 곳곳에 남아있었다. 형질도 평범한 베타라 그에게는 이후의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썩어가는 얼굴로 결국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에 굴복했다.


 

윤기 네가 많이 피곤하구나. 그래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할아버지한테 꼭 연락 드리고.”

 


 윤기는 돌아서는 형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서야 쇼파에 완전히 몸을 뉘였을 뿐이다.


 

…….”

 


 찾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아직도 감귤을 찾고 있지만 영 진척은 없었다. 신데렐라를 찾는 왕자의 심정이 이러했나. 유리구두를 신겨주겠다고 해도 도망가버린 귤 향의 신데렐라. 얼척이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대체 언제쯤이면 기억 속 귤 향이 옅어지려나. 생각하며 윤기가 신음했다. 호텔을 다시 처음부터 추적해서 뒤지는 거다. 호텔 투숙객 전체 명단, 모든 직원 명단, 하다못해 가족까지, 거기에 길거리 CCTV마저 싹 다 긁어서. 불법으로 점철된 계획을 세우며 윤기는 약을 대충 목구멍으로 넘겼다. 차라리 이 약이 기억을 지워주는 약이었으면 싶다. 이 지독한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그때였다. 문이 다시 덜컥 열린다. 아이큐 모자란 형이 또 찾아왔나 싶은데, 이번엔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도우미 역할을 맡게 된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센터에서 오늘은 새로운 우성 오메가를 찾았다는 소식을 말해주었다는 걸 윤기는 그제서야 기억해냈다. 목소리는 제일 맑네. 남성 오메가인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여태 센터에서 본 오메가들 중 가장 자신의 취향이었다. 어찌됐거나 앞으로 향을 맡으면 또 신경성 두통이 밀려올 거다. 다른 알파들이라면 황홀해할 오메가의 페로몬에 윤기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더군다나 형의 얼굴을 본 뒤라 더더욱 오늘은 이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됐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그 말을 내뱉으려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매칭률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남성 오메가가 간발의 차로 한 발 더 빨랐다. 서서히 오메가의 향이 느껴진다. 예민한 미간을 좁히며 코를 틀어막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윤기의 표정에 다른 변화가 생긴다.

 

 은은하게 퍼지는 새큼하고 단 시트러스. 민윤기의 기억 속에만 있는 그 향.

 

 윤기는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착각인가. 같은 계열을 가진 오메가인가. 저도 모르게 일어나 향을 내는 오메가에게로 단숨에 가까이 다가갔다. 천 하나만을 사이에 놓고 건너편의 오메가가 흠칫하는 모양새가 얼추 보인다.

 


좀 더 풀어보세요.”

 


 믿을 수 없다는 마음 반,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이성 반. 그리고 정말 만에 하나 하고 기대하는 마음 1퍼센트. 윤기는 상대를 재촉하고 싶었다. 목구멍이 뜨겁다. 그리고 은은하게 퍼졌던 시트러스 위로 오메가가 조금 더 푼 페로몬 향이 끼얹어진다.

 

 폭포수처럼 감귤 향이 윤기를 감싸 안았다. 마치 그때처럼. 처음 본 순간 홀린 듯 다가가게 만든 그 순간처럼. 우성 알파의 모든 감각이 외친다. 그 애다. 홀랑 떠나버린 그 감귤.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소름이 돋았다. 몇 개월이나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다. 무어라 건너편에서 외치는 말소리들은 들리지도 않았다. 환희가 윤기를 감쌌다. 윤기는 더는 참지 못하고 천을 휙 젖혔다.

 

 그리고 마주한 오밀조밀하고 뽀얀 얼굴. 민윤기 기억 속에서 어두운 조명아래 흐트러져 발갛게 물들었던 얼굴과는 또 달랐다. 그러나 분위기만 다를 뿐, 모든 게 같았다.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통통한 입술까지. 이 사람이다. 이 아이가 맞다. 윤기는 단숨에 확신했다.

 

 그런데 어째 멀쩡한 조명 아래에서 만나니. 윤기는 저도 모르게 하, 헛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어린 애였어?”

 


 많이 봐줘야 고등학생처럼 생겼는데. 그러나 센터에 미성년자가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 대학생인가? 윤기는 지민을 눈에 박을 듯 응시했다. 그렇게 찾아 다닌 감귤이 이딴 센터에 있다는 것이 어이없는데, 벙 찐 표정으로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하는 애라니. 아무렴 어차피 상관 없다.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피가 돌았다.


 

드디어 찾았네.”

 


 감귤이 다시 윤기에게로 굴러 들어왔다. 그것도 제 발로. 감귤은 튀어나온 고객에 자못 놀라고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금방 정신을 붙잡았다.


 

, 그럼 담당자 분을 모셔오겠습니다…! 페로몬 조절이 미숙하다 보니, 아무래도 선생님과 같이 오는 게 고객님께도 좋을 것 같아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나 감귤은 모든 걸 다 잊은 듯했다. 지민이 엉거주춤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인다. 이 와중에 예의가 바르다. 참나. 침대 위에서의 지민만 기억하고 있는 윤기는 새삼 다른 모습에 지민을 다시금 위아래로 쭉 훑었다. 나쁘진 않았다.

 


가긴 어딜 갑니까.”

, ?”

다시 앉아요.”

 


 윤기가 의자를 턱짓하며 자신도 앞에 앉았다.


 

이름.”

이름…? 아, 아 !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마침내 얻은 그 이름을 윤기는 입안에서 한번 굴려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지민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본격적으로 감귤에 관해 파악할 때다. 말간 얼굴이 다소 긴장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이게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가.

 

 지민은 그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눈을 빙그르르 굴리더니 침을 꼴깍 삼켰다. 남자의 영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담당자를 불러 사과한다고 넘어가는 수준이 아닌 것인가? 커튼을 치워버린 것도 어떤 새끼인지 얼굴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지민의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첫 출근에서 잘리는 것만은 안 된다. 지민이 눈꼬리를 추욱 내렸다. 어지간한 사람이 보면 동정심이 물씬 일어날 표정이었다.


 

, 제가 절대로 일부러 그런 게 아니구요…아직 페로몬을 다루는 게 미숙해서요. 기분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합….”

나 몰라요?”

?”

 


 지민이 멀뚱히 윤기를 보다 황급히 끄덕였다.


 

저희 센터 최고의 VIP고객님이라고 사전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다른 거요? , 음 다른 거라면 그게….”

 


 예민하다는 말로 잘 포장한, 그러니까 재수없다는 말을 선배로부터 듣긴 했다. 그러나 그건 말할 수 없는 사항이라 지민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고객님과 관련된 사전정보는 비밀에 부쳐져서요….”

 


 혹시 유명한 연예인인가? 살기 바빠 인터넷에 둔한 지민은 요새 트렌드를 전혀 몰랐다. 어떤 배우가 유명한지, 어떤 아이돌이 나오는지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도인과 똑같은 지식수준이었다. 지민은 윤기의 얼굴을 조심조심 뜯어보았다. 생김새로 봐서는 연예인이 맞기도 한 거 같다. 하얀 얼굴에 어딘지 나른하면서도 예민한 분위기는 일반 사람과는 언뜻 달라 보였다. 혹시 모르시는 게 불쾌하셨다면 앞으로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지민이 눈치를 살피며 그런 말이라도 덧붙이려는데.

 

 어떤 향이 지민의 코끝에 맺혔다. 마치 비 냄새 같았다. 우거진 숲에 한바탕 폭우가 내린 뒤 나는 것만 같은 냄새. 시원하면서도 동시에 묵직했다. 녹음이 주는 푸르름에서 싸한 향이 난다. 살면서 맡아본 향 중 가장 강렬하며, 좋은 향이었다.

 

 향이 갑자기 왜…. 아직 형질인의 세계에 익숙지 않은 지민이 당황하다가, 이내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페로몬이다. 바로 눈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것이다.

 

 지민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페로몬은 형질인 사이에서 단순히 성적 의미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성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중요한 장치이긴 하지만, 감정표현을 전하는 데에도 종종 사용되곤 했다. 기쁠 때, 슬플 때, 또는 분노할 때. 은근한 의미를 실어 상대에게 전하는 또 다른 수단의 종류였다. 오죽하면 형질인끼리 다툴 때 페로몬으로만 상대를 제압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민은 발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 모든 감정의 사인을 모른다. 그냥 좋은 향인데…. 이게 짜증인 건가? 짜증을 이렇게 좋게 내…? 형질인의 세상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진짜 모르네.”

 


 윤기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재미있네. 지민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의문을 표하기도 전, 윤기가 말을 이었다.


 

오늘 처음 일한다고 했나?”

네, 네…!”

그럼 지금 곤란한 상황이겠네요. 내가 매니저라도 불러서 말하면?”

 


 지민의 동공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청소년도 하는 페로몬 조절을 못하는 형질인이라. 도우미를 대체 무슨 조건으로 뽑는 건지 센터에 물어보고 싶네요. 신원보장조차 됐는지 의심스러운 수준입니다. 이 정도라면 지민 씨 가르친 담당자부터 관련 사람들까지 죄다 책임을 물어야겠는데. 병원장을 바로 만나는 게 일 처리에 효과적이겠군요. 그렇죠?”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툭툭 무시무시한 말들을 나열했다. 지민의 안색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아무리 첫 날이라고 해도 그 정도 사고를 치면 커버가 안 될 텐데. 그렇지만 실수한 건 맞고. 궁지에 몰린 쥐처럼 지민이 안절부절 못하다 어깨를 축 떨군다. 윤기는 그런 지민의 표정을 보며 마지막에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렸다. 가느다랗게 접힌 눈이 꼭 덫을 놓는 뱀 같았다.


 

그렇지만, 특별히 비밀로 넘겨줄게요. 지민 씨가 페로몬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미숙 형질인이라는 거.”

 


 지민이 멈칫하며 고개를 살포시 조금 들어올린다. 순한 눈망울이 놀라 있다. 윤기는 확신을 주듯 끄덕이며 자비를 베푸는 양 관대하게 말했다. 근사한 미소와 함께.


 

내가 이제 막 일 시작한 사회초년생을 짓밟을 정도로 무자비한 사람은 아니라 특별히 배려해주는 거예요.”

…저, 정말요?”

그럼요.”

 


 진짜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면서도 점차 지민의 표정이 밝아진다. 윤기는 그런 지민을 보며 빙긋 웃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요?”

어려운 건 아니고.”

 


 윤기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케어는 나랑만 해요.”

윤기…씨만요?”

지민 씨 페로몬과 제 페로몬 상성이 좋군요. 여기 와서 이런 건 처음인데. 어차피 지민 씨 입장에서도 그게 좋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한테도 이런 실수하며 위기를 겪느니 그게 낫죠. 들킬까 봐 염려돼서 제안하는 겁니다.”

아…그렇지만 그건 센터에서 정해주시는 거라….”

그런 문제는 제가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윤기의 말이 맞다. 이미 한 번을 망쳤는데 다른 사람과 만나서 또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키면 센터에서도 난감할 것이다. 결국 실직으로 이어지겠지. 그렇지만….

 

 지민이 흘끔 윤기를 보았다. 근사해 보이는 알파는 여태 지민이 경험해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형질인으로 처음 만난 알파. 돈 때문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삶을 살았던 지민은 순하게 누구든 잘 믿는 성정에서 처음 보는 사람은 경계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얽히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러나 머릿속에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와 동생의 얼굴이 아른아른 스쳐 지나간다. 자신이 없어지면 무너지는 집안의 생계. 형질이 변화되며 다 끊겨버린 수입원. 빚을 독촉하는 빚쟁이들. 앞으로도 지민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혼자 해결해야만 한다.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지민은 허리를 냉큼 반으로 접어가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너무 그렇게 격식 차리지 않아도 돼요. 감사는 오히려 내가 해야지.”

 


 윤기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 흡사 왕이라도 알현한 거처럼 허리를 조금 핀 지민이 조심스레 윤기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핏줄이 유독 불거진 커다란 손에 지민의 손이 쏙 들어간다. 윤기의 시선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입꼬리가 작게 들썩인다. 이것도 작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긴장하고 있는 지민의 귀에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윤기는 꼭 잡지 표지에 나올법한, 매너 좋은 알파의 표본으로 꼽힐 만큼 우아하게 말했다.


 

자주 봅시다. 잘 부탁해요.”

 


 지민을 바라보는 윤기의 미소가 만족스럽게 진해진다. 잔잔하게 남아있는 윤기의 페로몬의 배열이 조금 뒤바뀐다. 폭우가 내렸다면 잔잔한 소나기가 내린 숲으로. 조금 더 맑고 청량해진다. 그러나 지민은 그 또한 눈치채지 못한 채 생글 작게 미소 짓는 윤기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이건 새로운 아르바이트라고,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