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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시간은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송영호텔의 이사를 맡고 있는 고모가 친근하게 말했다. 앞으로는 더 자주 들리렴, 윤기야. 이렇게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 민윤기 역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젓가락질하며 웃고 이야기 나눴다. 요리가 무척 맛있네요. 배워가야겠습니다. 배워가긴 뭘. 자주 와. 매번 같이 먹으면 더 좋잖니. 맞은 편의 민서욱은 그 대화에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치떴지만 조용히 음식만 입으로 옮겨갔다.


 화기애애한 식사 이후 기다리는 건 협상이었다. 본가의 서재는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가 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큰 아버지의 짐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주인을 해먹겠다는 거다. 서재를 훑는 윤기의 시선에 큰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딱히 많이 변한 건 없을 게다.”

“아버지가 사용하셨을 땐 자주 오던 곳이 아니어서요. 밝아지고 좋네요.”



 윤기는 흘리듯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서재의 구석구석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곳에서, 어떻게든 눈에 들고 싶어 얼쩡거렸던 과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낡고 지친 감상일 뿐이다. 윤기는 큰 아버지의 맞은 편에 앉았다.



“큰 아버지께 잘 어울립니다.”

“고맙구나. 요새 바이오 주가가 무척이나 뛰었던데. 역시 윤기 네가 보는 눈이 있다.”

“제가 하는 게 뭐 있겠습니까. 다 직원들이 하는 거죠.”



 찻잔으로 쪼르륵 차가 쏟아진다. 공손히 차를 받은 윤기는 짧게 인사했다. 향이 좋네요.



“그럼 이제 바로 본론으로 이야기 해볼까요?”



 윤기가 대뜸 치고 들어왔다. 큰 아버지는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여기까지 온다고 한 걸 보면 뭔가 하겠거니 생각은 했는데…역시 돌려 말하는 법이 없구나.”

“시간낭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요. 안 그래도 바쁜 사회잖아요.”



 윤기는 예의상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윤기의 큰 아버지는 민윤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렸을 적에는 세상 천지 전부 다 적으로 삼아 발톱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다니더니 이제는 숨기는 법을 배워 천천히 사람의 숨통을 조였다. 어린 게 벌써 상대하기 까다롭고 성가셨다. 이 모습을 보면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게 누워있는 제 동생과 똑같았다. 그 누가 핏줄이 안 섞였단 말을 할 수 있으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다음 송영의 회장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입니다.”



 서재의 기류가 일순 정지한다. 윤기는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였지 않나요.”

“…윤기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사안이 사안인 만큼 큰 아버지의 기세는 묵직했다. 재벌로 태어나 온갖 권리와 체면을 누리고 산 사람에겐 범인이 풍길 수 없는 기운이 있었다. 민윤기는 다리를 꼰 채 차분히 이야기했다.



“너무 경계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드리는 조건은 큰 아버지께 더도 없을 이로운 조건이니까요.”



 그럼 대화를 해볼까요. 윤기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기울이며 짧게 목을 축였다.


 대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윤기의 파격적인 조건 제시 후, 큰 아버지는 연신 침묵을 유지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떠보듯 윤기를 봤다. 진심이냐. 예. 윤기의 큰 아버지는 진심으로 윤기를 다시 평가했다. 뛰어난 사업가이자 협상가이거나, 아니면 미친놈이거나.



“…정말 그거면 된다는 거냐.”

“예. 더 큰 욕심은 없습니다.”



 큰 아버지는 심중을 파악하듯 윤기의 얼굴을 관찰했다. 뭘 해도 따분하다는 듯 삶에 큰 의욕이 없어 보이는 얼굴은 여전하다.



“그럼 이야기는 충분히 다 한 것 같으니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시간 내느라 애썼다.”

“애쓰긴요.”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 매무새를 정리하는 윤기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큰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데 윤기 너, 요새 엔터 쪽에도 관심이 있는 거냐.”



 윤기의 동작이 잠깐 멈칫한다. 그는 흘려가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큰 관심은 없습니다. 재미있나 미끼 정도만 던져본 건데요, 뭘.”

“그렇구나.”



 자금 출처도 파악하기 어려운 돈을 움직였는데, 어느새 큰 아버지의 손에 소식이 들어 있다. 윤기는 웃는 낯으로 생각했다.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경고 하나 날린 거다. 허튼 생각하지 말라는. 이래서 이 집안 사람들을 좋아할 수가 없다. 교묘한 인간. 윤기는 어디까지 이 인간이 손을 뻗쳐놓았을지 가늠하며, 어떻게 잘라낼지 고민했다. 그와 동시에,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고모부.







***







 해외 특설무대 음악방송은 하루의 여유가 있었다. 지민은 멤버들과 시간을 빼 컨텐츠 촬영용으로 드넓은 푸르른 들판에 도착했다. 수록곡 무대를 찍을 장소였다. 퇴폐적이고 섹시한 느낌을 살린 타이틀과 달리 수록곡은 상큼하고 청량했다. 반바지와 볼캡을 쓴 지민은 평소보다 배는 어려 보였다. 지민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안무를 출 때마다 레몬향이 공기 중에 팍 퍼지는 듯 했다. 방긋방긋 웃으며 큰 동작으로 브이 포즈를 날렸다.



“컷! 잠시만 쉬었다 갈게요~! 식사 시간!”



 감독이 외친다. 몇 십 번이나 같은 안무를 반복해서 뛴 멤버들이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땀을 흘린 정국이 대뜸 지민에게 뛰었다.



“지민이 혀엉!”

“응?”



 정국이 돌진해서 달려오더니 냅다 지민의 허리를 잡고 들어버렸다. 야, 어흑, 정국아, 형, 죽을. 말도 잇지 못하고 낑낑거리니 지나가던 하준이 쯧쯧 혀를 찼다. 박지민 죽일 생각이냐? 전정국 체력 반만 나한테 왔으면 좋겠다.



“형, 형 여기 근처에 바다 있다는 거 알았어요?”

“뭐?! 진짜?”

“거기에 테마파크도 작게 있대요!”

“와 재미있겠다. 뭐 있어? 잠깐 갈 시간 있나?”

“이것 저것 있다는데, 거기 바이킹이 진짜 재미있대요. 완전 타고 싶죠.”



 바이킹…? 반짝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지민이 멈칫했다. 악몽이 떠올랐다. 윤기와 타서 죽을 뻔했던 그날. 정확히는 자신 혼자.



“왜요? 너무 기대돼서 그래요?”

“정국아 그건….”

“설마 저 혼자 보낼 거예요?”

“…왜 혼자야?”

“의성이 형은 안 간다고 했고 이담이 형은 숙소에서 잔대요. 그리고 하준이 형이랑은 가면 재미 없어요.”



 뭐 인마? 뒤에서 듣고 있던 하준이 한 마디 한다. 지민이 갈등했다. 어지간하면 같이 가고 싶긴 했으나, 그날의 악몽이 너무나 크게 남아 있었다.



“정국아 형은 응, 원래 쫌 고소 공포증이….”

“…정말 절 혼자 보낼 거예요?”



 정국이 충격적이라는 듯 동그란 눈에 실망이 담긴다. 영락 없이 당근 뺏긴 토끼 같았다. 유독 정국에게 약한 지민이 냉큼 손을 휘저었다. 우리 막내가 가고 싶다는데.



“어떻게 널 혼자 보내! 그 위험한 곳에. 절대 안 되지. 형이 같이 가줄게. 그래. 바이킹, 뭐 괜찮지. 같이 가자.”

“아싸.”



 지민이 형 짱. 정국이 휘파람을 불며 해결 됐다는 듯 밥을 먹으러 뛰어간다. 가서 죽기야 하겠어. 지민은 다시 활기찬 정국의 뒷모습을 보며 위안했다. 그래. 막내가 활발하면 됐지.


 지민은 정국과 같이 바로 밥을 먹으러 가는 대신 폰을 흘끔 쳐다봤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윤기에게 연락했는데, 답이 없다. 바쁘신가…. 시간을 확인하니 한국은 이제 저녁이 됐을 시간이다. 보고 싶은데. 아직까지도 윤기의 사진 한 장 없는 지민은 입술을 작게 삐죽거렸다.



“야 박지민! 빨리 와. 밥 식는다.”

“앗, 네에!”



 지민이 하준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윤기에게는 조금 뒤 다시 연락해봐야겠다.







 테마파크는 작았으나 옹골차게 꾸며져 있었다. 인원은 결국 셋이 도착했다. 정국과 지민, 그리고 하준이었다. 하준이 형 분명히 옆에서 골골대면 놓고 갈 거예요. 골골대긴 날아다닌다, 이놈아. 정국의 엄포에 하준이 비웃었다. 둘 사이에서 지민은 정국의 옷에 핫도그 소스가 떨어질까 걱정했다. 정국아 그거 묻히면 안 지워져. 의성이 형이 죽이려고 할 거야. 괜찮아요.


 그들은 사이 좋게 테마파크 안을 거닐며 구경하다가, 첫 번째로 정국이 기대해마지 않는 바이킹을 탔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했다. 하준이 골골거리는 게 아니라 지민이 탈 땐 두발이었지만 내릴 땐 네 발로 기어 나와 끙끙거렸다.



“지민이 형 괜찮아요? 형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는 줄 몰랐어요.”

“…여기 바이킹은 사람이 타라고 만든 게 맞을까? 그냥 저승으로 보내는 배가 아닐까?”

“야야 지민아 물 마셔라.”



 오히려 하준이 멀쩡했다. 하준은 지민의 뒷목을 주무르며 물통을 입에 꽂아 넣었다. 으우. 앞이 빙글빙글 도는 지민이 힘겹게 받아 마셨다. 지민이 울렁거리는 속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내려오니까 이제 쫌 괜찮은 거 같아. 형이랑 정국이 다녀와요.”

“괜찮겠냐? 힘들면 숙소 가는 택시 불러주고.”

“괜찮아요.”

“형 그럼 같이 갈까요? 저 더 안 타도 되는데….”

“뭘 안 타긴 안 타. 여기까지 왔는데. 괜찮아. 저 바닷가나 조금 보고 있을게요. 둘이 다녀와요.”



 지민이 손을 흔들었다. 형 그래두. 머뭇거리는 정국에 지민이 등을 떠밀었다. 진짜 괜찮다니까? 하준이 지민에게 폰을 흔들었다. 너도 애 아니니까 몸 상태는 스스로 알겠지. 뭔 일 있으면 전화해라. 지민은 야심 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게 놀다 와요. 정국은 뒤를 연신 돌아보다가 하준의 손에 끌려 놀이기구 쪽으로 멀어졌다. 마지막까지 방긋 웃던 지민은 그들이 사라진 뒤에야 깊은 숨을 토해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내 인생에 다시는 바이킹은 없다.”



 차라리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하겠어…. 중얼거리며 지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폰을 열었다. 아직도 윤기로부터 온 답은 없었다. 아무래도 일정이 있으신 모양이다. 생각하며 지민은 폰을 넣고 앉은 곳에서 다리를 흔들었다. 그럼 이제 뭐하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문득 테마파크 바깥 쪽에 있는 바닷가가 눈에 들어온다. 에메랄드 빛 바다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아까 했던 말대로 걸어도 좋을 것 같다. 지민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다는 너무 예뻤다. 투명한 바다 아래 자갈이 파도에 밀려 흐른다. 햇살이 유난히 맑게 내리쬐어 그런지 바다에 비친 빛이 반짝거렸다. 지민은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찬찬히 모래사장을 걸었다. 선선한 바람과 스며오는 바다 내음에 걷다 보니 속도 괜찮아졌다. 가만히 모래 사장에 서서 발목 앞까지 닿아오는 파도를 본다.


 지민의 머릿속에 뭉게뭉게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아! 지민은 바로 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스스로 향해 비췄다.



“잘 보여요?”



 지민이 손을 흔들며 활짝 눈이 부시게 웃는다. 그 모습을 카메라가 빼곡히 담아냈다.







***







 거대한 성 같은 집에서 나와 윤기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삭막하고 컴컴한 집안. 윤기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쓰러지듯 쇼파에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아. 폐부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한숨과 함께 더는 참지 못하고 협탁을 뒤졌다.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아스피린을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본가에 들리기 싫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곳만 갔다 오면 지긋지긋한 두통에 늘 시달려야만 했으니까.



“…….”



 윤기야, 왔니. 그 집의 마당에서 정갈한 옷을 입고 자신을 다정하게 맞아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 활짝 웃으며 안기면 어머니에게선 말린 쑥 같은 향이 났다. 그 향이 좋아 친구들과 노는 것도 포기하고 집으로 곧장 돌아와 폭 안기곤 했다. 엄마 저 오늘 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웠어요. 바로 악보를 쳤더니 선생님이 저보고 천재래요. 그랬니? 우리 윤기 똑똑하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다정한 손길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이 손길이라면 아버지가 아무리 자신을 무관심하게 대해도 상관 없다고 여겼었다.


 민윤기의 인생은 5살을 기점으로 손바닥 뒤집듯 뒤바뀌었다. 엄마와 단 둘이 살던, 곰팡이 가득하던 집은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집으로 바뀌었고, 사진으로조차 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만났다. 네가 윤기구나. 아버지는 다소 무뚝뚝했다. 지하 셋방을 꾸준하게 들락거렸던 남자는 알고 보니 아버지였으며, 알고 보니 이 커다란 대궐의 황제였다. 민윤기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설렜다. 새로 생긴 가족이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이라니.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그는 영화에나 나오는 영웅 같았다.


 그러나 영화에서 행복한 기간이 짧은 것처럼 민윤기의 행복도 오래가진 못했다. 그 날은 거실이 유난히 소란스러운 날이었다. 민씨 집안 핏줄도 아닌 애를, 피 한 방울 안 섞인 애한테 송영을 물려준다고요? 할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세요? 새로운 조카가 생겼다며 상냥하게 맞이해줬던 고모가 말했다. 시끄럽다. 나는 이미 전권을 기석이에게 맡겼다. 그건 그 애가 정할 일이야.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서 그딴 말 언급하지 마라. 누구 씨인지 몰라도 기석이가 데려왔으면 그 아는 이미 기석이 자식이다. 알아 들었나들. 할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집안 망신스럽게 계속 떠들지 말란 말이다!


 계단 옆에 몰래 숨어서 듣던 민윤기는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왜 아무리 숙제를 열심히 해도, 받아쓰기 백 점을 맞아가도 아버지가 무뚝뚝했는지, 이 집안 사람들이 종종 자신을 차디 찬 눈으로 쳐다 봤는지.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자신에겐 엄마가 있었으니까. 침실에 찾아가면 우리 윤기 왔니, 하고 따뜻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윤기의 키가 어머니의 허리를 조금 웃돌 즈음, 어머니는 더 이상 민윤기를 쓰다듬어줄 수 없게 됐다. 허연 병실에 산소호흡기를 끼고 누워 간신히 생명을 부지했다. 무시무시한 기계들이 엄마의 몸에 가득 달려있었다. 그 이후로는 윤기가 어머니의 뺨을 매만졌다. 그러나 따뜻했던 온기는 점차 식어만 갔고, 결국 윤기는 완전히 차게 식은 그녀의 품에 매달려 울었다. 엄마, 안돼요. 엄마, 일어나세요.


 아이는 버팀목을 잃었다. 머뭇거리던 윤기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 집에 데려온, 유일하게 자신을 자식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일 테니까. 그러나 그는 외면했다. 여전히 냉정하고 차가웠으며 단 한 번도 윤기를 다정하게 안아주지도, 달래주지도 않았다. 사랑했던 여인이 남긴 흔적을 그는 방치했다.


 민윤기는 그에게 그것만 배웠다. 마음을 꽁꽁 싸매고 얼려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 법.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하고 냉정하게 쳐내는 법.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던 민윤기는 청소년기가 되자마자 짐짝처럼 치워졌다. 해외에 있는 기숙학교로.


 멍하니 과거를 상기하던 윤기는 쓰러지듯 쇼파에 웅크리고 누웠다. 적막이 그를 감싼다. 이제 와서 쓸모 없는 감상들일 뿐이다. 두통이나 가라앉았으면 싶다. 그때였다.


 띵! 알람이 온다.


 윤기는 인상을 쓰며 그대로 무시했다.


 띵!


 그는 또 무시했다.


 띵! 띵!



“…….”



 회사에서 온 연락이라면 친히 죽여줄 의향이 있었다. 윤기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폰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환한 빛이 팟 켜진다.



[쪼꼬미]



 화면에 박힌 글자에 윤기는 주저 없이 연락을 확인했다. 또 무슨 연락을 보냈으려나. 연상연하 커플의 좋은 점, 연하는 이런 맛에 만난다 따위의 글을 박지민은 최근에 보내놓았었다. 메시지는 꽤 쌓여있었다.



[저 도착했어요!]

[여기 너무 더워요ㅠㅠ]

[윤기 형 뭐해요?]



 아래로 쭉 내리니 영상이 하나 있었다. 애교 영상인가. 새로 연습했다는 그것? 시간이 제법 길다. 얼마나 대단한 연습을 했길래. 피식 웃음이 샌 윤기는 영상을 클릭했다. 영상은 에메랄드 빛의 바다로 시작한다. 쏴아아. 밀려오는 파도를 찍더니, 화면은 빙글 돌아가 지민의 얼굴을 비춘다.



‘잘 보여요?’



 윤기 형! 말갛게 활짝 웃는 얼굴은 메이크업이 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스케줄을 끝내고 놀러 나온 건가. 곧 자연광에 눈이 부신지 인상이 조금 찡그려진다. 이게 잘 찍히나. 으아, 햇빛이 너무 세서 잘 안 보여요. 에이 잘 나오나 안 나오나 모르겠다. 쫑알거린 지민이 이어 조잘조잘 떠들었다.



‘여기 무대 찍으러 왔다가 우연히 온 곳이거든요? 바다 너무너무 예쁘죠. 이거 보니까 형 생각이 나서 보여주려고 켰어요.’



 바다를 보여준다더니 자기 얼굴이 나오는 게 반이다. 지민은 히이, 웃었다. 그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윤기는 마음에 들었다. 바다보다 박지민을 보는 게 더 즐겁긴 했다. 그러다 지민이 조금 고심하더니 입술을 쭉 빼고 말한다.



‘형 근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바로 연락하라고 해놓구선 답이 없어서….’



 형이 이렇게 나 퇴짜 놓는 거 예전 빼고 처음인 것 같아요. 지민은 화면이 윤기라도 되는 것마냥 똑바로 마주쳤다.



‘형이 너무 보고 싶어요.’



 숨소리마저 죽은 듯 조용한 윤기의 방 안에 지민의 맑은 목소리가 울린다.



‘이렇게 보고 싶은데 이건 분명 사랑이에요. 전 형을 진짜 진짜 좋아하나 봐요.’



 동경이 이럴 리가 없잖아요? 지민이 확신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인다. 그리고는 호기롭게 외쳤다.



‘꼭 형이 나랑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형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자신 있어요! 내만 믿으면 된다, 융기!’



 지민이 마지막에는 장난스럽게 외쳤다. 그리고는 민망한지 볼을 긁적였다. 어제 비행기 타면서 본 영화에 막 이렇게 박력 있게 고백하더라구요. 근데 내가 하니까 조금 어색한 것 같네. 지민은 큼, 목을 가다듬더니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바다도 보여줬으니까 이만 저는 가볼게요! 슬슬 멤버들이 찾고 있을 거 같아서…사실 지금 놀이기구 타러 왔는데 바이킹 탔다가 혼자 빠진 거거든요. 윤기 형도 조심해요. 해외에서 타는 바이킹도 한국에서 타는 거처럼 무서워요.



‘안녀엉. 이거 보면 연락 줘야 해요. 알았죠?’



 지민이 다시 웃으며 손을 흔든다. 영상은 그를 끝으로 암전됐다.



“…….”



 민윤기는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지민이 영상으로 선사해준, 바닷가에 내리쬐는 햇빛이 윤기에게 퍼진 것만 같았다. 환히 웃어주는 얼굴이 잔상처럼 남는다. 그는 쓰러지듯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지겹던 두통이 사라져있었다.


 네가 자꾸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하니. 윤기는 긴 한숨을 쉬며 영상 속 지민과 눈을 맞췄다. 이렇게나 따스한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희미해서, 제 것이 아니라고만 생각해서 밀어냈었다. 틈 없이 밀려 들어온, 말랑한 애정이 윤기를 감싼다. 그 안에서 윤기는 반항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내가 널 원해도….


 끊임없이 두들기며 노크하는 햇살에 얼음이 완전히 무장해제 된다. 윤기는 문득 처음, 지민과 만난 아주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어느 날, 덥고 습한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 지민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던 그때부터.











?
  • ?
    noah 2022.12.28 05:22 SECRET

    "비밀글입니다."

  • ?
    하얀백설탕 2022.12.28 20:19
    말랑한 애정에 독자마음 도 말랑말랑 ㅠㅠ
    삭막하고 모노톤인 윤기의 세상을 하루빨리 구원해주면 좋겠어요
  • ?
    2023.01.07 13:09
    아이고 윤기야 우리 윤기야 우리 윤기야 아아악 우리 윤기.. 짠해서 어떡해요 어린 윤기한테 달려가서 꼬옥 안아주고 싶어요 우리 이쁜이... 우리 윤기도 지민이처럼 따뜻한 말랑이일 때가 있었는데... 너무 슬퍼요 우리 아기 윤기.. 아무 생각도 안 들게 맛있는 거 잔뜩 차려주고 따뜻한 전기장판에 자장가 불러주면서 재워주고 싶어요 우리 이쁜이 우리 말랑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메마른 윤기의 삶에 무지갯빛 지민이가 뛰어든 이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전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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