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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CLOUDS>








 고개를 휘저어 잠을 털어낸 지민이 그를 반겼다. 오히려 고양이들이 슈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고개를 휙 피했고, 인간이 폴짝폴짝 뛰며 가까이 다가왔다. 고양이 귀와 꼬리가 지민에게 달려 있었다면 세차게 흔들렸을 거다.



“잘 다녀왔어요?”



 많이 늦어서 혹시라도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했어요. 숲은 어땠어요? 춥죠. 말투 끝이 전부 다 동그랗고 다정하다. 지민은 정말로 슈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쇼파에 구겨져 누워 기다렸더니 허리가 무척이나 아팠는데, 드디어 무료한 기다림에서 해방됐다. 슈가에게는 생경한 여러 안부 인사를 묻던 지민은 문득 그의 상태가 다른 때와 다르게 느껴졌다. 뭐지? 뭔가 빳빳하게 굳어진 나무토막 같은….



“슈가,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왜 더 창백…세상에.”



 지민이 기겁했다. 슈가로부터 냉기가 폴폴 올라오고 있었다. 얼음 감옥에 천 년은 갇혔다 간신히 탈출한 사람마냥 꽁꽁 얼어있다. 지민이 헐레벌떡 안고 있던 고양이를 내려놓고 급히 슈가의 손을 양 손으로 붙잡았다.



"괜찮아요? 손 움직일 수 있어요? 어떡해."



 넘어지면 손 깨지는 거 아니에요!? 언젠가 무도회에서 만져보았던 얼음 조각작품을 떠올리며 지민이 냉기를 분산시키듯 슈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지민의 작은 손에 비해 슈가의 손은 무척이나 커다래서, 지민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의 손을 매만졌다. 작은 손이 닿는 곳마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도가 퍼져나간다. 슈가의 안색을 살핀 지민이 더더욱 심각한 표정을 했다. 여전히 돌 같은데.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혹시요. 입도 얼었어요?”

“…….”

“어, 어떡하지….”



 지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란이 동상과 관해 말해준 것들이 떠올랐다. 심각하게는 언 부위가 썩어 들어갑니다. 그럼 결국에는 잘라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안되겠어요. 이쪽으로 와요.”



 지민이 슈가를 벽난로 쪽으로 이끌었다. 슈가는 힘이 약한 손길에도 쉽게 이끌려주었다. 꼭 홀린 것마냥. 고양이들이 흘끔 슈가의 눈치를 보며 종종 그들의 뒤를 따랐다.



“괜찮아요? 이제 좀 따뜻하죠?”

“…….”

“아직도 아니에요?”



 헝. 지민의 표정이 난감한 빛으로 물들었다. 곧 죽을 것처럼 하얀 얼굴색은 어떻게 해도 따뜻해 보이지 않았다. 진짜 입이 얼었나 봐. 입은 못 잘라내는 거 아닌가? 안절부절 못하던 지민이 냉큼 양팔을 벌리고 슈가에게 다가섰다.



“이렇게 하면 더 빨리 따뜻해질 거예요! 저 계속 집에 벽난로 앞에 있어서 엄청 따뜻….”



 덥석 안으려는 순간 여태 가만히 있던 슈가가 쏙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응? 지민이 어리둥절하게 슈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해야 빨리 따뜻해지는데. 마침내 슈가가 입을 뗐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었다.



“멀쩡합니다.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포옹은 더더욱 필요 없고요.”

“그렇지만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요? 제가 수상한 의도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사람끼리 붙어있으면 빨리 따뜻해져서….”

“전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춥잖아요.”



 하얗게 질려서 지금 금방이라도 툭 치면 쓰러질 거 같은데…. 비쩍 마른 몸이며, 핏기 없는 혈색이며. 지민의 눈에 슈가는 당장이라도 지켜줘야 할 연약한 대상으로 보였다. 슈가는 무미건조하게 생각했다. 왕자는 아무래도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눈으로 둘러싸인 괴물 숲을 지배하는 자신이 그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추위 같은 건 타지 않습니다. 전 괴물이니까요.”



 지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져 당황으로 물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지민이 말을 잃는 순간, 어색한 침묵이 찾아 들어왔다. 어음, 어…. 지민이 더듬더듬 말했다.



“춥지 않다니 다행이에요….”



 지민은 무슨 말을 더 꺼내려는 듯 말꼬리를 빙빙 돌렸다. 다행이긴 한데, 음, 그런데 슈가 방금 한 말은, 음…. 슈가가 지민의 말을 끊어냈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합니까? 날 만나려고 하고 기다리고 신경 쓰고.”

“…네?”

“당신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 줄 겁니다. 비위 같은 건 맞추지 않아도 돼요.”

“…….”

“괴물이랑 같이 어울려주는 적선은 필요 없습니다.”



 지민이 눈을 여러 차례 끔뻑거렸다. 아. 말을 잃은 듯한 모습에 슈가는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했다.



“…늦게까지 깨어있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쉬세요.”



 슈가가 먼저 발걸음을 돌려 지민으로부터 멀어졌다. 언제나 선을 그어놓는 그 뒷모습. 혼자 덩그러니 벽난로 앞에 남은 지민은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지민의 품에 있던 장작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지민이 슈가를 향해 달렸다. 괴물이 도망가고 인간이 뒤쫓는 이상한 형태였다. 작은 손이 검은 로브를 황급히 낚아챘다.



“걱정돼서 그랬어요.”



 창틀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이 단호한 얼굴을 비췄다.



“단 한번도 슈가를 괴물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지민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는 살짝 망설이는 듯하더니 다시금 말을 꺼냈다.



“슈가가 저랑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거 알아요. 그래서 더 다가가고 싶은 거였어요. 비위 맞추고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슈가가 좋아서….”



 슈가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타인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스스로 입 밖으로 꺼냈더니 마음이 더 쓰렸다. 누구나 다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왕자는 평생 처음 하는 발언이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주는 건 걱정도 싫은 건가. 지민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절 안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래도 걱정 정도는….”



 어느새 푹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는 사이, 슈가가 고개만 뒤로 돌려 지민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지민이 눈을 마주치니 슈가의 눈동자가 아래로 좀 더 내려간다. 지민이 꽉 잡고 있는 로브였다.



“아….”



 손을 놓으니 로브의 잡은 부분에 주름이 가득했다.



“조, 조금 구겨졌네요.”



 이게, 그렇게 꽉 안 잡았던 거 같은데…미안해요. 어색해진 지민이 민망한 얼굴로 로브를 만지작거렸다. 하필 더 없어 보이게 이럴 때….


 슈가는 시선의 위치를 변경했다. 지민의 옆얼굴이다. 밖에 나가자마자 한끼 식사로 전락할 위치의 생명체가 해주는 걱정.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더니, 이내 지민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로브를 툭툭 털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아….”

“옷은 어떻게 돼도 상관 없습니다.”



 슈가는 로브를 잡은 지민의 손도 자신으로부터 떨어뜨려놓았다.



“싫어하진 않습니다.”



 그랬다면 이 저택에 이미 당신은 없었겠죠. 지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시하고 가거나, 아니면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말이나 나올 줄 알았었다. 예상외의 기쁜 소식에 너무 놀라 정신까지 멀어진다. 지민이 말을 못하고 있는 사이, 슈가는 예의 바르게 인사까지 건넸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필요한 대화는 다 끝낸 듯 다시금 멀어졌다. 덩그러니 남은 지민의 주변으로 고양이들이 옹기종기 다가온다. 멀어지는 등을 보던 지민이 외쳤다.



“슈가!”



 슈가가 발걸음을 멈춘다. 뒤는 돌아봐주지 않는데, 또 기다려는 준다. 정말 여태 저 안 싫어했어요? 앞으로 이렇게 더 기다려도 돼요? 그런 말들이 입안에 차올라 왔지만 지민은 한 가지 말만 골라냈다.



“어, 음…잘 자요!”



 슈가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인사하듯 작게 끄덕였다. 지민의 광대가 작게 볼록 올라왔다.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발걸음 위로도 달빛이 떨어진다. 지민 역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내일이 더 기다려지는 밤이었다.






***





 따사로운 햇빛까지 쏟아지는 아침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넓디 넓은 침대에 파묻히듯 잠든 인간 하나, 그리고 그 주변에 나란히 누워있는 고양이 셋. 그림 같은 풍경에서 인간 하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지민은 아, 하고는 창 밖을 확인했다. 시계가 없는 이곳에선 대충 해가 뜬 걸로 파악했다. 지금은 꽤나 밝게 떠있으니까….



“안돼!”



 지민이 벌컥 비명을 질렀다. 이 시간이면 벌써 슈가가 나가버렸을 터다. 미쳤어, 왜 지금 일어난 거지. 어제 하루 종일 저택을 뛰어다니며 뭐라도 해본다고 체력을 썼더니 이 꼴이 났다.


 지민이 허겁지겁 구르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반동에 잘 자던 고양이들이 하나 둘 눈을 떠 기지개를 켠다. 냐앙. 바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양이들을 가볍게 쓰다듬어준 다음, 지민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잠옷 차림 그대로 질주했다. 하인들이 봤다면 비명을 질렀을 처참한 거지꼴이었다. 하아, 하아. 어깨를 들썩이며 계단 손잡이를 잡은 채 홀을 내려다봤다.



“아….”



 역시나 숨막히게 조용하다. 지민이 입술을 쭉 내밀며 한숨을 쉬었다.



“다 끝이야….”



 지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싫어한다고는 안 했지만 굳이 좋아한다고도 하지 않았지…. 냉정하게 따지면 귀찮게 생각하는 정도인 것 같다. 생각해보니 어제 주방을 불태워먹었다고도 말 못했는데…그건 어떻게 말하지? 아예 다시 모습을 숨겨 버리는 건 아니겠지. 끝없이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미련이 남아 문 쪽에서 시선을 못 떼고 있는 그때였다.



“뭐가 끝입니까.”

“으아악!”



 예상 못한 기척에 작은 몸이 비틀거리며 계단에서 휘청거렸다. 어어, 억! 질끈 눈을 감는데, 단단한 팔이 튀어나와 얇은 허리를 낚아채 붙잡는다. 지민이 안정적으로 다시금 두 발을 땅에 디뎠다. 자신을 붙잡아준 이의 얼굴을 확인한 지민이 놀라서 외쳤다. 슈가!



“이, 있어요!? 왜 여기 있어요? 안 갔어요? 왜 안 갔어요?”

“가야 됩니까. 어제는 가지 말라고 막더니…변덕이 심하군요. 왕족이란.”

“그게 아니라, 아니…진짜 여기 있는 거예요? 저 안 피해요?”

“피해 다니지 않았습니다만. 왕자님께서 원한다면 다시….”

“아뇨! 가지 마요!”



 떠날까 지민이 냉큼 슈가의 손을 붙들었다. 슈가의 시선이 물끄러미 연결된 손에 닿자, 지민이 아, 하고는 놓아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만….



“오늘 같이 있는 거 맞죠?”

“딱히 같이 있는다기 보단.”



 슈가는 지민의 휑한 잠옷차림을 보고는 손가락을 휙 움직였다.



“저택에서 할 일이 있어서 머무는 겁니다.”



 아무렴 의도가 어찌됐든 상관 없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지민이 밝은 강아지로 돌아왔다. 어쨌든 안 가는 거네요! 너무 좋아요! 슈가는 눈꼬리까지 환하게 웃어 접는 지민을 잠깐 바라보더니,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럼 전 일 볼 테니, 그쪽도 알아서 움직이세요. 아까처럼 손 가게 넘어지는 행동은 하지 마시고.”

“저 안 넘어져요. 방금 전에는 놀라서 그런 거구. 원래 차분한 성격이에요.”



 차분한 성격이라 치기에는 쳐놓은 사고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슈가는 굳이 말을 더 얹지 않았다. 어디로 갈 거예요? 밥 먹는 거예요? 지민이 친근하게 말을 붙일 무렵, 허공에서 날아온 옷이 지민의 발치에 툭 떨어졌다. 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슈가가 던져준 옷이었다. 아 맞다. 배시시 웃으며 옷을 걸친 지민이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선물로 주신 건데…자꾸 까먹네.”

“차분한 성격이라 그런가 봅니다.”



 큼큼, 지민이 헛기침을 했다. 귀가 살짝 발갛게 변했지만 굴하지 않고 꿋꿋했다. 아무래도 그렇죠.



“오늘은 무슨 일 하시는 거예요?”

“서재에 갑니다.”



 지민이 발을 뚝 멈췄다. 슈가는 그럼에도 기다려주는 것 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동공이 확장된 지민이 냉큼 다시 슈가의 곁에 따라붙었다.



“서재가 있어요? 돌아다닐 때 단 한번도 못 봤었는데.”

“보통 남이 집을 헤집고 다닐 때 사적인 공간을 드러내놓진 않죠.”

“아…사적인 공간, 그렇죠, 중요하죠. 저도 같이 가도 돼요?”



 슈가가 지민을 흘끔 바라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기대감이 빼곡히 차있었다. 지민이 간절한 눈동자로 덧붙였다.



“방해 안 할게요.”

“…….”

“귀찮게도 안하고 죽은 것처럼 조용히 있을게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면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저 머리는 꽤 좋은데. 왕궁에 있을 때 무역하는 쪽도 공부했었고. 쓸만하실 거예요. 지민은 체면 따위는 있는지도 모르게 버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주장했다. 흡사 귀족 저택에 고용을 원하는 일꾼 같았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슈가는 상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지민의 입가가 함박 벌어진다. 감정표현을 숨기는 법을 모르는 것마냥 얼굴 전체에 기쁘다 쓰여있었다. 평소 왕과 왕비가 예뻐해 마지않는 사랑스러운 웃음이다. 그 모습을 몇 초간 바라본 슈가가 은근슬쩍 시선을 돌려버렸다.



“방해하면 내쫓을 겁니다.”

“그럴 리가요!”



 숨도 안 쉬고 있을게요. 지민이 과장되게 말하며 헤헤 웃었다. 숨은 쉬세요. 그날 처음으로 나란히 걷는 발걸음 소리가 저택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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