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UP: Married Life>
지민이 그리는 미래는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혼자서 쓸쓸하게 밥 먹던 날들은 안녕!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망치기 바쁠 외모의 저택 주인을 대상으로 같이 하고 싶은 일들을 쭉 떠올렸다. 오순도순 밥 먹으면서 대화하기, 산책하면서 눈발자국 새기기, 눈싸움 하기. 상상만으로도 들뜬 지민은 슈가를 보자마자 꼬리치는 강아지처럼 달려갔다. 거의 계단을 구르듯 두 칸 세 칸 뛰었다.
“슈가! 잘 잤어요?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더 따뜻한 것 같아요.”
“눈은 어제보다 더 많이 내렸습니다만.”
창 밖을 보니 눈이 더욱 가득 내려있었다. 꼭 나무꾼이 성의없이 잘라놓은 나무토막 같은 대답이었다. 수도에서 이런 사교성을 가진 귀족이라면 도태되고도 남는다. 지민은 그럼에도 생글생글 웃었다.
“이제 슈가랑 같이 있어서 따뜻한가 봐요.”
이번에는 침묵이 돌아온다. 지민은 그것 역시 크게 상관치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왕자가 평소 표현하는 흔한 인사말 중 하나였을 뿐이다. 같이 먹어서 더 맛있는 것 같아요, 같이 이야기해서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등. 물론 편안히 여기고, 호감을 가진 사람들 한정으로.
“아침 같이 먹어요!”
“이미 먹었습니다.”
“벌써요?”
밖은 이제 막 동이 터오고 있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바로 달려왔는데…. 식사는 다음에 하지 뭐. 지민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그와 함께 할 나날들이 많을 테니.
“그럼 조금 이따 같이 산책해요.”
“괴물 숲으로 말입니까?”
“어 음…그 괴물들 말인데요. 정말로 한대라도 맞으면 죽나요?”
“예.”
“아…힘들겠네요….”
그럼 여기 정원이라두…. 아쉬움에 덧붙여보던 지민은 반응 없는 슈가에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산책은 어쩔 수 없겠네요. 머리를 굴려보던 지민이 아, 하며 밝은 표정으로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아! 저 여기 집이 궁금했어요. 다 돌아다녀보기는 했는데 너무 넓어서…소개해주면 안돼요?”
처음 떨어진 때 이후로 대충 저택을 돌아보기는 했으나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가령 저택의 주인만이 알고 있는 숨겨진 공간이라거나, 탑에서 보이는 광활한 숲이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 건지. 호기심 높은 지민은 이 저택에 관해 더욱 알고 싶었다. 겸사겸사 저택의 주인까지도. 그러나 슈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곤란하군요. 지금은 밖에 나가봐야 합니다.”
“아…돌아와서도 괜찮아요! 몇 시에 와요?”
“늦습니다.”
슈가는 잔뜩 기대하는 지민의 얼굴을 보고는 덧붙였다. 아주. 그래도 지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내일은요?”
“내일도 나갑니다.”
“어 그럼 모레는요?”
“그날도요.”
“쉬는 날은! 쉬는 날은 어때요?”
“하루 종일 자야 됩니다.”
“하루 종일….”
어디선가 이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되새겨보니 어울리기 싫은 귀족들이 사교적인 만남을 요청했을 때 자신이 쓰던 대답이다. 제가 몸이 좀 좋지 않아서요. 오늘은 일이 많이 밀렸네요. 아 다음 날이요? 그날은 아플 것 같은데…. 그 황당한 대답을 들었을 귀족의 심정을 지민은 지금 이해했다. 아. 차라리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게 낫구나.
아직 이 저택이 주인은 아직 자신이 시간을 보낼 만큼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어음, 많이 힘드신가 봐요…. 눈치껏 지민이 말을 줄였다. 옅은 실망감이 느껴지는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죠, 그럼. 그에 침묵하던 슈가는 뒷목을 어색하게 한번 쓸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그 특유의 나른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능력을 계속해서 쓰다 보면 몸에 무리가 와서 그렇습니다.”
“정말요?”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당신을 속여봤자 도움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뻣뻣하고 분위기를 악화시키는 대답이건만 오히려 그래서 신뢰가 간다. 다시금 지민이 투명한 눈동자로 기대를 빛냈다.
“그럼 괜찮은 날, 그날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돼요?”
지민이 꿈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열심히 쉴 때 도와드릴게요! 슈가는 막상 지민이 다가오자 시선을 휙 피하며 대꾸했다. 그런 날이 있다면 그러죠.
“이만 가보겠습니다.”
슈가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지민이 당연하다는 듯 문까지 따라 나와 그를 배웅했다. 으, 나오니까 춥네요. 옷은 따뜻하게 입었어요? 정작 걱정하는 지민의 얇은 잠옷차림이 열린 문 틈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속절없이 나부낀다. 슈가의 눈길이 얇게 드러난 희고 가는 목에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잘 다녀와요.”
지민이 달랑달랑 손을 흔들었다. 예. 슈가는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 뒤 저택을 나섰다. 멀어지는 등을 보며 지민이 외쳤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빨리 와요!”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는 뒤를 돌아 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나갔다. 머지않아 숲으로 사라진 형체가 아예 지민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지민과 발을 맞춰 걸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날랜 속도였다.
으, 추워. 지민은 문을 닫았다. 방으로 돌아가서 외투라도 걸치고 와야겠다. 생각하며 발걸음을 떼는데, 발 아래에 무언가 푹신한 게 걸린다.
“…어? 이게 왜….”
짐승의 털로 만들어진 로브다. 분명 방금 전까지 텅 빈 바닥이었는데. 고개를 갸웃하던 지민은 이내 방금 거절만 하다 사라진 누군가를 떠올렸다. 아담한 광대가 볼록 튀어나왔다. 그는 허리를 굽혀 하얀 털의 외투를 주워 걸쳐 입었다. 자신의 예감은 맞았다. 사이즈가 꼭 맞는 외투는 아주 따뜻했다. 티 안내고 사라진 누군가의 깊숙한 속마음처럼.
지민은 쇼파에 반듯이 앉아 고민했다. 뭘 하지? 생에 이렇게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지내본 적은 처음이다. 바른 생활 틀에서 단 한번도 벗어나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가슴 한 켠에 죄책감이 몰려들어왔다. 고양이나 강아지도 이보다는 더 열심히 살 텐데…. 세금만 뜯어내면서 팽팽 노는 악덕 귀족들과 다를 게 뭔데.
지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양피지와 펜을 찾아 가지고 왔다. 그런 쓰레기들과는 달라야지. 뭐라도 해서 슈가를 돕는 거다. 꼭 자신이 필요한 이유를 증명해 보일 것이다. 지민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펜대를 돌렸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저택 안에서 할 수 있는 목록을 쭉 작성해보았다.
첫 번째는 저택 청소. 지민은 이 관문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팔과 다리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처음부터 난관이 컸다.
“마법 종류에 청소도 있나…?”
동화 속 악역처럼 무시무시한 능력만 쓰던 그에게 알고 보니 청소 요정의 능력도 있는 걸까? 어떻게 먼지가 단 한 개도 없을 수 있지. 고귀한 손으로 수건을 집어 든 보람도 없이 지민은 윤이 나는 복도 위에서 헛손질만 가득히 했다. 전등도, 하다못해 장신구까지 어제 사온 것처럼 깨끗했다. 닦아도 티가 전혀 안 난다. 지민은 안타깝게도 큰 소득 없이 첫 번째 목록을 지웠다. 그래도 아직 두 개나 남았다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다음 목표는 정원 가꾸기였다. 지민은 저택을 뒤지고 뒤진 끝에 키친에서 커다란 가위 하나를 발견했다. 이 정도면 크기면 가지를 칠 정도는 될 거다. 왕궁 뜰에서 가끔 보았던 정원 관리하는 시종을 떠올리며 방법을 되새김질했다. 그러나 도착한 순간 지민은 말을 잃은 채 첫 번째보다 더 멍하니 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무들이 지민의 키보다 세 배는 컸다. 팔을 뻗으면 닿기는커녕 아득히 높아 꼭대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럼 잔디라도….
“…….”
눈이 가득 쌓인 잔디는 있는지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지민은 괜히 시려오는 손을 비비며 가위를 들고 얌전히 저택으로 향했다. 쓸데없는 도전은 하지 않고 바로 포기하는 게 현명한 거니까.
“괜찮아! 아직 한 개 남았잖아.”
다소 비장한 표정의 지민이 키친으로 입장했다. 마지막은 요리다. 이건 반드시 해야 돼. 지민은 평생 식탁에 올라왔던 메뉴를 떠올리며 그 중 자신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메뉴들을 골라보았다.
“…….”
세금 정리하고 무역 상품을 정리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정도로 자신이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만약 이 저택에 슈가가 없었다면 진작 죽었겠지. 그 전에 절벽에서 떨어져 시신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겠지만. 지민은 우선 재료 창고로 발길을 옮겼다. 재료를 보다 보면 떠오르는 게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설마 만들 수 있는 메뉴가 그렇게 많은데 하나 없겠어.
창고는 저택의 크기에 비해 작았으나, 요리하는데 필요한 것들은 전부 갖추고 있었다. 지민은 그 안에서 생선과 감자를 발견했다. 생선은 굽기만 하면 되지 않나? 감자도 스튜는 물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지민의 눈이 반짝였다. 괜찮은 해답인 듯했다.
“오면 감탄하겠지?”
지민은 그 하얀 얼굴이 감동에 젖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운 차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자세한 과정의 생각 따위 없이 직관적으로 요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생선은 바로 불판에 올렸고 냄비에 물을 붓고 바로 끓였다. 요리를 시작한지 약 3분이 지났을 즈음, 점차 의심이 피어 올라왔다. 껍질만 벗기려고 하는데 하얀 살이 다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상한 건가.”
지민이 작은 손으로 감자를 거의 짓이기듯 주물럭거렸다. 북부에서 자라는 감자는 특별히 껍질이 강한 건가? 집중하던 그는 뒤에서 홀로 익어가다 못해 죽어가고 있는 생선구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이상하게 탁해진 공기에 코를 킁킁거렸다.
“뭐가 이렇게…헉, 부, 불!”
지민이 깎던 감자를 냅다 던졌다. 물! 물! 외치며 그릇에 담아 끼얹었으나 이미 불은 꽤나 커져있었다. 허둥지둥 여러 번 더 끼얹었으나 불은 더 활활 타올랐다.
“이게, 켁!”
점점 매캐하게 올라오는 기침이 나왔다. 호흡기를 틀어막은 채 눈물까지 찔끔 났다. 밖으로 빠져 나가야 하는 수준이 되었어도 지민은 주방에 들러붙어 물그릇을 놓지 않았다. 저택을 태워먹을 순 없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안돼! 지켜야 되는데…! 잿빛 연기에 감싸여 정신이 흐려지기 바로 그 직전.
냉기가 지민의 피부에 닿아왔다. 얼음이 불이 번지는 자리 위에 솟아올랐다. 지민이 호흡기를 가리며 감았던 눈을 찬찬히 떴다.
“…켁, 슈가?”
항상 자신이 위험할 때마다 나타났으니 이번에도 그인 줄 알았다. 그러나 키친에 지민 외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슈가? 슈가예요? 부르며 지민이 천천히 불이 났던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생물체를 발견했다. 지민이 입을 크게 벌렸다.
“…고양이?”
한 마리도 아닌 세 마리. 새하얀 털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들이 다가온 지민을 보고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해 방황했다. 덩치를 보니 품에 쏙 안길 크기의 작은 새끼들이다.
“대체 어디에서….”
여태 지민이 이곳에서 목격한 바로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인형인가? 인형만큼 예쁘게 생기긴 했다. 놀라워서 빤히 보고 있자니 고양이들이 꼬물꼬물 움직여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뺐다. 이제라도 도망가려는 듯이.
그에 무릎을 굽혀 앉은 지민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아기들아. 다정한 목소리에 안절부절 못하던 고양이들이 지민을 살그머니 올려다보았다. 일제히 쪼르르 올려다보는 눈동자들이 동그랗다. 지민이 작게 미소 지었다.
“너희는 누구야. 어디서 왔어?”
고양이들이 흘끔흘끔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괜찮아.”
지민이 안심시키듯 말하며 고양이 한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경계심이 많아 보이던 고양이는 지민의 손이 닿자마자 움찔하더니 곧 차츰차츰 지민의 손 쪽으로 다가왔다. 지민이 고양이를 안아 들어올렸다. 긴장으로 빳빳했던 고양이의 꼬리가 어느새 살랑거렸다. 계속해서 만져주는 손길에 귀까지 쫑긋 솟아오르더니, 골골거린다. 그리고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손 좋아.]
지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은 저 하나고 분명 앞에는 고양이들인데. 착각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확신시켜주듯 목소리가 한번 더 울렸다.
[왕자님 보고 싶었어!]
“고, 고양이가 말을….”
당황한 인간이 말을 더듬는 한편, 고양이는 언어를 또박또박 구사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완전히 경계가 풀린 건지 행복한 미소까지 지으며 냥냥거렸다. 한 마리가 그러자 바닥에 있던 두 마리도 지민의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와 무릎 위로 올라왔다. 냥냥. 두 마리도 말을 걸어왔다.
[왕자님이랑 만나고 싶었어!]
[왕자님이랑 만나서 너무 좋아.]
멍하니 그들을 보던 지민은 문득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 생각했다. 분명 한번은 들어본 듯한…. 마침내 지민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절벽에서 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이다.
“너희였어?”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고양이들은 반짝이는 눈망울로 지민의 곁에 붙어 냥냥 울었다. 그저 지민이 좋아죽겠다는 듯이.
“너희들이 날 살려준 거야?”
고양이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세 마리가 말했다.
[왕자님 지켜야 해.]
[왕자님 약해.]
“나 그렇게 안 약….”
[왕자님 약해.]
[약해.]
아기고양이들은 단호했다. 그러면서도 지민의 곁에 붙어와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려왔다. 나름대로 왕국에서 손 꼽히는 검술실력을 가진 지민은 억울했지만 귀여운 모습에 그조차 까먹었다. 그랬어? 날 지켜준 거야? 아이 예뻐.
“아기들, 잠깐만 나가 있자. 여기 청소해야 돼.”
한참이나 고양이를 어루만져주던 지민이 고양이 세 마리를 안아 들었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겠지만 먼저 난장판이 된 키친은 치워야만 했다. 여기 잠시 들어가 있어. 커다란 바구니를 찾아 그 안에 고양이들을 넣었다. 그러자 고양이들이 고개를 쭉 빼고 지민이 하는 행동을 구경한다. 바다처럼 맑고 푸른 눈이 궁금증을 담고 깜빡거린다.
“하아….”
요리는커녕. 지민이 한숨을 쉬며 걸레를 집어 들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러자 고양이들이 그를 관찰하더니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냥. 한 마리가 주장하듯 짧게 울었다.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바구니 안에서 날래게 튀어나왔다. 곧장 지민의 곁에 다가온다.
“안돼. 청소하느라 위험하단 말이야.”
바구니가 꽤 높았는데 어떻게 나온 거야. 지민이 다시금 고양이를 품에 안아드려는 때. 고양이의 푸른 눈이 빛났다. 빛은 슈가의 손에서 넘실거리던 그것과 비슷했다.
어디선가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지민은 다음 순간, 저택에 숨겨져 있던 청소 요정의 정체를 찾아냈다. 고양이의 푸른 눈길을 받자, 지민이 쥐고 있던 걸레가 스스로 살아있는 것마냥 움직이며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세상에….”
다른 고양이들도 튀어나오더니 청소도구 근처에 다가갔다. 빗자루가 움직이고, 깨졌던 접시들이 날아오른다. 고양이 세 명이 나서니 청소는 순식간에 끝났다. 고양이들은 다시금 지민에게 옹기종기 다가와 앞에 앉았다. 꼭 칭찬해달라는 듯. 지민이 중얼거렸다. 너네 정말 강하구나….
슈가가 저택을 나가 관리하는 일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했다. 인간들이 숲을 찾지 못하도록 쳐놓은 결계를 확인하거나, 괴물들이 넘어오는 자신의 영역을 정리하거나. 영역을 전부 다 둘러보니 이상은 없었다. 원래도 숲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영역으로 달려온 미친 종족은 없는 편이었지만, 먹을 것이 적은 이 기간에는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뭐 평소에도 오거나 말거나 신경 안 썼지만 저택 내에 스치기만 해도 죽을 생명체가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슈가는 커다란 침엽수 꼭대기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숲 전체를 돌며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컴컴한 밤이었다. 쏟아질 것처럼 많은 별들과 휘영청 뜬 달을 보고 있자니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는 듯 착각이 일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
그는 부정부터 했다. 사람의 한 면밖에 못 보는 단순한 왕자야 진짜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누가 이 밤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겠는가. 더군다나 상대는 힘든 일 따위 하나도 모르고 자란 왕자다. 기다리다 지쳐 방으로 들어가 자고 있겠지. 기대는 처음부터 죽여놔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실망하는 일이 없을 테니. 생각하며 나무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슈가는 더 이상 지민에게 정을 주지 않기로 했다. 떠나면 어차피 다시는 못 볼 사람이니, 이 생활에 그가 더욱 깊숙이 파고 드는 건 막아야 한다. 그는 이별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질리도록 겪어봤으니. 그것을 간신히 이겨내고 만든 것이 지금의 고요한 삶이 아닌가. 물론 이게 죽은 건지 산 건지 분간할 수조차 없을 만큼 지루하고 따분하긴 했지만. 최대한 작은 접촉으로 이 만남을 마무리할 요량이었다.
정원에서 본 저택은 불이 꺼져있었다. 자신의 예상대로다. 내일이면 왕자는 또 민망해하는 얼굴로 나오겠지. 뻔했다. 왕자 곁에 붙여놓은 시종들이 아무 소식도 전해주지 않는 걸 보면 오늘은 조용히 있는 모양이다.
“…….”
지민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늘상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을 저택이, 그러니까 항상 뼈가 으스러지게 추웠던 저택이 의아하게도 다른 때보다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정말 사람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가 어둠 속에서 발을 뗄 때였다.
“으응…슈가?”
어조는 부드럽고 나른했다. 슈가는 멈칫하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한 손에 램프를 든 지민이 반쯤은 잠에 감긴 눈으로 서있었다. 다른 손에는 하얀 고양이, 즉 지민을 감시하라 붙여놓은 자신의 시종을 안은 채. 나머지 시종, 고양이 두 마리는 발치에서 그를 쫄쫄 따라오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떠나기 전 자신이 바닥에 날려놓은 하얀 외투가 둘러져 있었다.
“어서 와요.”
다행이에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잠들 뻔 했어요. 한밤중이라 조금 잠긴 목소리는 달빛이 스며든 것처럼 나직했다. 슈가는 그 순간 이상하게 공기가 조금 더 포근하고 따뜻해진 것 같다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