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잡화점의 비밀>
고롱고롱 가슴팍이 규칙적으로 올라왔다가 내려앉았다. 지민은 폭신한 침대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이불 안으로 조금 더 파고 들었다. 너무 따뜻하고 안락해서 일어나기 싫었다. 어차피 잠시 뒤면 란이 들어올 테니, 지민은 가능한 한 더욱 열심히 게으름을 만끽했다.
“…….”
지민은 문득 이상함을 감지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왕자의 아침은 늘 부산스럽다. 란이 들어와 잠을 깨우고, 일어나면 다른 시종들이 달려와 준비를 시작한다. 세수를 하고 있으면 다른 쪽에서는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고 하나의 인형이 되어 시종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헝클어진 모습에서 왕자의 모습이 되어 아버지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간단한 산책과 함께 첫째 형님이 맡긴 업무를 처리하고 가족들과 조찬 시간을 가진다. 한 마디로 모든 시간에 적막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뜨기 싫은 얇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
곧이어 지민의 까만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지민은 이불까지 차버리며 벌떡 일어났다. 작게 지민의 입이 벌어졌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지민은 당황했다. 난생 처음 보는 방이었다. 침대 옆에는 의자와 물수건이 놓여있었다.
“…란? 어디 있어?”
익숙한 이름을 불렀으나 답은 없었다. 지민은 당혹감이 서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은 어지간한 귀족이 사는 곳보다 좋았다. 장식품은 하나같이 고풍스러웠으며, 수도에 있는 경매에 나온다면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살만한 그림, 금으로 장식된 촛대도 있었다. 심지어는 첫째 형님이 그렇게나 가지고 싶어했던 화가의 그림도 걸려있었다. 형이 저 그림 구한다고 온 왕국을 뒤졌었는데.
“란?”
란이 날 돌봐준 게 아닌가? 지민이 이불에서 빠져 나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일어서려는 순간 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힘이 풀려 바닥에 형편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뭐지? 다리가 왜…. 꼭 오래 누워있던 것처럼 힘이 없다.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다시 일어나려는데, 일순 잊고 있던 기억이 화약 터지듯 머릿속 가득히 밀려들어왔다. 굴러 떨어지는 바위, 그리고 추락하는 마차와 끔찍한 비명들.
“히끅.”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올라왔다. 나 주, 죽, 근데 왜 살아서, 어어? 지민은 더듬더듬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삶을 주장하듯 펄떡거리며 뛰고 있었다.
“사, 살아있….”
그곳에서 어떻게? 절대로 살 수 없는 높이였는데…. 시체조차 산산조각이 나서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의아해 하면서도 지민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끙끙거리며 일어났다. 아무래도 자신을 살려준 이를 찾아야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했다. 절름거리며 고급스러운 소재를 사용한 문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저택은 복도도 넓고 컸다. 이 정도면 수도에서도 부유한 귀족이나 갖출 수 있는 규모였다. 지민은 벽을 짚어가며 길게 이어진 복도를 쭉 따라 걸었다. 다행히도 걷다 보니 원래 생활했던 때처럼 다리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걷는 도중,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소름 돋을 만큼 인기척이 없다.
“…어…누구 안 계신가요? 저기요?”
이 정도의 크기라면 저택을 관리하는 시종들이 분명 있어야만 했다. 복도에는 지민의 목소리만 넓게 퍼질 뿐이었다. 지민은 작게 어깨를 떨며 몸을 움츠렸다. 이상하게도 공기가 점점 더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추워….”
매일이 따뜻한 왕궁에서는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추위다. 그럼에도 의지와 끈기를 지닌 왕자 박지민은 멈추지 않고 복도를 쭉 따라 내려갔다. 끝에는 계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발자국씩 조심조심 내려가니 개미 한 마리조차 없는 커다란 홀이 그를 맞이해주었다. 마찬가지로 그곳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지민이 목청껏 외쳤다.
“아무도 없나요!”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공기만 더 차가워졌다. 으 왜 이렇게 춥지. 손까지 시려서 주먹을 꼭 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이미 죽어서 사후 세계에 오고 그런 건 아니….
그때, 지민의 시야에 창문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창문 밖에 펼쳐진 하얀 풍경이.
설마. 한발 두발 천천히 창문에 가까이 다가간 지민은 밖을 확인하자마자 다급히 문을 찾아 나섰다. 홀과 연결된 커다란 문은 저택의 입구다. 점점 다가갈수록 한기가 느껴진다. 지민은 그도 느끼지 못한 채 문을 열어젖혔다.
하아, 뿌연 입김이 지민의 입가에서 자욱이 퍼졌다. 지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눈이다….”
모든 게 하얗다. 나무도, 정원으로 보이는 길도 모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펼쳐진 정원 앞의 나무에는 눈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누군가 섬세하게 마법으로 빚어놓은 것만 같았다. 지민은 그 풍경의 마법에 영혼을 빼앗긴 것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동화에나 나올,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천천히 눈밭 위로 발을 내밀었다. 아. 지민이 살짝 움찔했다.
“…진짜 차가워.”
그리고 폭신해…. 한발자국씩 걸어나가자 하얀 바탕에 발자국이 찍혔다. 모든 상황도 잊은 채 그게 신기해 발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문득 지민은 환해지는 머리맡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떠오른 태양이 저택을 둘러 싼 나무 위로 촘촘히 햇빛을 뿌렸다. 눈 조각들이 투명하게 빛났다. 꼭 이곳에 온 걸 환영해주는 것처럼 예쁘게 반짝거렸다.
“아….”
지민은 넋이 나간 감탄사를 흘렸다. 누가 눈이 있는 곳을 얼어버린 죽은 땅이라 했을까. 그것은 이것을 보지 못한 사람의 주장이 분명하다. 찬바람에 발개진 볼로 지민은 한참이나 그곳에 서있었다. 상황도 잠시 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에 홀려서.
***
감상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또한 삶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눈 내린 풍경에 영혼을 뺏겨 있던 지민은 현재 침대에 앉아 폭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미치겠네.”
이 커다란 저택에 단 한 명도, 사람은커녕 그 어떤 생명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3일내내 목이 터져라 외치며 저택을 돌아다녀보았지만 쥐 죽은 듯 조용할 뿐이었다. 침대 옆에 놓여있던 의자와 물수건을 보면 누군가 제 옆에 붙어있었다는 게 분명한데, 이제는 그것도 착각인가 싶다.
지민이 저택에서 발견한 건 몇 가지가 전부였다. 매일 아침 다이닝룸에 놓여있는 음식들과 방에 채워지는 장작들. 그리고 옷장에 걸려있는 옷가지들. 인기척도 없이 마련되어있는 것들을 볼 때마다 지민은 공포로 떨어진 심장을 간신히 붙들어두었다. 어떤 날은 누가 대체 이런 일을 하는지 다이닝룸에서 밤새 버틸 요량으로 들어갔는데, 어느 순간부터 식탁에 엎어져 자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쏟아지는 졸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왕궁에서 형님의 업무를 도와 몇 날을 버텨가며 밤을 새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울상을 지었다. 혹시 진짜 내가 죽은 게 아닐까. 어쩌면 뮬의 국민들이 믿는 대로 사후세계에 온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벌을 받는 쪽으로. 이토록 외롭고 커다란 저택에 혼자 덜렁 남겨지다니. 나름대로 모범을 보이는 왕족으로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가진 지민으로서는 마음이 미어지는 일이었다.
“…….”
꼬르륵. 배에서는 음식을 달라는 요청이 울렸다. 며칠 내내 먹을 기분이 들지 않아 다이닝룸에 차려진 음식을 먹지 않았었다. 지민은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로브를 어깨에 둘렀다. 지금은 또 신기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과일이나 물이라도 한잔 마셔야 잠에 들 수 있을 듯싶었다.
복도는 컴컴했다. 램프로 불을 밝히며 지민은 천천히 복도를 걸어나갔다. 오늘 아침 다이닝룸에는 유령저택에서 만든 파이가 놓여져 있었는데…. 지민이 좋아하는 달콤한 맛의 사과파이였다. 한 조각은 먹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걷던 도중이었다.
“…어?”
발을 멈춘 지민이 눈을 크게 떴다. 복도 끝에 누군가의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은 꺾인 복도 뒤편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림자였다. 창문에 들이비치는 작은 달빛에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의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머리 부분에 산양처럼 커다란 뿔이 두 개 달려있었다.
혹시 굶은 지 오래되어 헛것이 보이는 건가? 의아했으나 지민은 그가 필요했다. 이 저택에 자신 외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꼭 만나야만 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대체 자신은 어떻게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 살아있긴 한 건지. 그 의문들을 알아야 된다. 지민이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거기, 누구 있는 거죠?”
그림자가 움찔한다. 살아있다. 지민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드디어! 당신도 이곳에 저처럼 온 건….”
그러나 지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쿵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건지 커다란 발소리가 들렸다.
“아니, 왜 도망을, 저기요!”
지민이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이봐요! 왜 도망을 가는 거예요! 발걸음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지민은 정신 없이 따라 올라갔다. 그림자의 주인은 거침없이 저택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작정인 듯 질주했다.
대체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체력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림자 주인의 속도는 지민보다 월등했다. 일반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검술이며 무술을 배워온 지민이 이렇게 현저히 뒤떨어질 리가 없었다. 안돼. 이대로라면 놓칠지도 모른다. 다급해진 지민이 속도를 높였다.
“저는 위험한 사람이, 헉, 아니에요! 저기요! 잠깐만 기다려주, 앗!”
발이 엉키고 말았다. 램프를 놓친 지민이 헛발을 딛고 휘청거리며 넘어진다. 아 안돼. 세상이 빙글 돌아가는 시야를 마지막으로 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저택은 계단이 아주 가파르다. 게다가 그림자 주인을 따라 정신 없이 쫓아 올라왔으니 구르면 다리든 머리든 하나는 다칠 게 분명한 높이였다.
공중에 붕 뜬 지민이 바닥에 구르려던 그 순간, 동시에 쿠구궁 커다란 소음이 울렸다. 지민은 예측했던 통증 중 그 어느 것도 느끼지 않았다. 무언가 자신을 받치고 있는 듯한 그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지민은 자신을 받아준 정체를 확인했다. 바닥에서부터 얼음이 솟아있었다. 얼음은 받침대마냥 안전하게 지민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마, 마법?”
지민이 입을 떡 벌렸다. 마법은 이미 아주 오래 전, 뮬 왕국이 세워졌을 즈음 사라졌다고 이미 역사서에 나와있었다. 꿈인가. 저도 모르게 얼음에 손을 올려보았다. 차갑다. 실제 존재하는 것이다. 넋을 놓고 있길 잠깐, 쫓고 있던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안돼…!”
지민은 얼음에서 벌떡 일어나 넘어졌던 램프를 챙겨 들고 다시금 계단을 올랐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는 탑 꼭대기에 도달해서야 멈추었다.
“하아, 하아….”
지민은 탑 꼭대기를 둘러보았다. 좁은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림자 주인은 거짓말같이 증발해버렸다. 원래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테라스로 이어지는 듯한 뚫린 공간을 통해 찬 바람이 불어 들어와 지민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지민은 그 공간을 통해 밖으로 나가보았다. 난간의 풍경으로 숲과 정원이 아래 깔려있었다. 아득히 높다.
“방금은 대체….”
얼음, 그리고 소리도 없이 사라진 그림자의 주인.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는 지민의 뒤로 로브가 찬 바람에 펄럭거렸다.
***
아침의 다이닝룸은 햇살이 내려앉아 밝다. 식탁에 앉은 지민은 차려진 음식들이 사람이라도 되는 것마냥 노려보았다. 이 음식도 그 사람이 만든 걸까? 예쁘게 플레이팅 된 고기스튜와 사과파이는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여태 외면하며 침만 꼴깍 삼키던 지민이 파이를 입에 밀어 넣었다. 어제 살려준 걸 보면 먹어도 죽진 않겠지.
“와.”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했다. 끝내주게 맛있었다. 사과는 신선하고 달콤하며 파이는 적절히 달았다.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조차 이런 맛은 나지 않았다. 왕궁 요리사가 해준 요리는 전부 다 쓰레기였던 거야. 나는 쓰레기를 매일 먹었던 건가 봐. 허겁지겁 지민이 파이를 입에 밀어 넣었다.
식사를 마친 지민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부른 배를 두들겼다. 그리고 약간의 휴식을 가진 다음 쇼파에 앉아 고민했다.
우선 그 그림자의 주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나 며칠을 더 밤에 복도로 빠져 나와 걸어 다녀도 그 사람을 다시 볼 순 없었다. 상대는 겁을 먹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불편한 건지 더욱 경계심을 갖고 저택에 숨은 게 분명했다. 솟아났던 얼음조차 녹아버렸으니 흔적조차 남지 않아 찾는 건 불가능했다. 매일 밤 끈질기게 뒤쫓는 수 밖에는.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뭐지? 쉬는 날 없이 왕궁에서 일했던 왕자는 어딘지 모를 곳에 떨어진 와중에도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음.”
생각해보니 그림자를 쫓아 저택의 탑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주변으로 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을 탐색해놓는다면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언젠가 해서도 여행의 기본은 정보 수집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좋아.”
주변을 둘러보자. 판단을 내린 지민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처음으로 저택 밖을 향했다.
숲은 높다란 침엽수들로 가득했다. 고개를 들어올려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의 나무들이었다. 지민은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집으며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나아갔다.
뮬에 이런 숲이 있었나. 수업에서 배웠던 뮬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되짚어보았다. 남부는 울창하고 푸르고 넓은 잎의 나무들이 자라는 반면 북부는 잎이 뾰족한 침엽수들이 자란다고 했다. 바닥 가득 쌓인 눈과 숲으로 지민은 이곳을 북부로 추측했다. 북부 어딘가에 떨어진 것 같긴 한데…. 얼결에 유배지에 잘 도착하긴 잘 도착했다.
“하아.”
한참을 나무를 따라 쭉 걷던 지민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 저택으로부터 꽤나 멀리 걸어왔다. 그럼에도 숲은 끝없는 눈밭과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걸어가야 뭐가 보일까. 아무래도 잠시 휴식을 가지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지민은 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기대 앉아 쉰 다음 다시 출발해야겠다. 끙차. 다가가 앉아 등을 기대려는 찰나였다.
번뜩. 나무의 가운데에 틈이 벌어지더니 눈이 생겼다. 빙그르르 굴러가는 동공이 정확히 지민을 응시했다.
“…….”
사람은 흔히 상식에서 벗어나는 광경을 보면 사고가 멈추고 만다. 지민은 앉으려던 자세 그대로 멍청히 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맞나? 역시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죽은 건가? 아니면 시각 기관이 다친 건가? 아니면 지능이라거나. 멀뚱멀뚱 보고 있는 사이 쿠구궁 땅이 진동했다.
앗. 지민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무의 뿌리가 땅에서부터 빠져 나와 마치 촉수처럼 흔들거렸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뿌리를 보며 지민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품 안의 단검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늦어있었다. 나무가 커다란 뿌리들을 휘두르며 지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주변을 틀어막았다.
“안, 웁!”
나무의 뿌리가 지민의 얼굴을 감싸며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지민이 강력히 반항하며 나무의 뿌리를 쥐어뜯듯 긁었다. 안돼. 이대로라면 숨이…. 점점 눈앞이 흐릿해진다고 느낄 때쯤이었다.
“멈춰라.”
낮은 저음과 함께 바닥에서 얼음이 솟아올랐다. 칼처럼 날카롭게 자란 얼음은 지민이 묶여있던 나뭇가지의 뿌리를 끊어냈다. 키익!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 막혔던 숨이 트인 지민이 거친 기침을 터뜨렸다. 하아, 하아 호흡하며 눈 바닥에 형편없이 엎드려있는 지민의 앞에 검은 신발이 나타났다. 지민은 목을 양손으로 감싼 채 천천히 위쪽을 바라보았다.
탄 듯한 회색 빛의 머리카락과 검은 눈. 그리고 산양의 것과 비슷한 뿔이 남자의 머리 위에 달려있었다. 그림자에 달려있던 바로 그 뿔. 지민이 나직이 신음했다. 그 자다. 남자는 지민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한 쪽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바라보았고, 한쪽은 가볍게 상대방을 전체적으로 슥 훑어보았다. 뿌리에 졸려 목에 남겨진 붉은 자국을 확인한 남자의 시선이 얕게 구겨졌다.
키이익! 나무가 항의하듯 비명을 질렀다. 남자의 시선이 나무를 향해 움직인다.
“내가 데려온 인간이다. 물러가라.”
키익! 나무는 뿌리를 더욱 높게 들고 휘둘렀다. 남자는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보더니 무던한 어조로 말했다.
“뜻에 따르지 않는다는 거냐?”
남자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에 나무의 뿌리가 크게 움찔거렸다. 허둥지둥 뿌리를 거두는 게 지민은 어쩐지 나무가 겁을 먹었다고 느꼈다. 아니나다를까 잠시 땅이 작게 진동하더니 나무의 뿌리가 다시금 땅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다. 갈라져있던 틈이 닫히며 눈이 사라지고 나무는 평범하게 변했다. 지민이 방금 상황을 보고도 믿지 못해 눈만 깜빡거렸다. 지민의 머리 위로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계속 누워계실 셈입니까?”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예의 바른 지민이 놀란 상태에서도 주섬주섬 일어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구, 구해주신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지민을 잠깐 바라보더니, 인사도 받지 않은 채 등을 훽 돌려 걸어나갔다. 남자의 검은 로브가 찰랑거린다. 구해준 사람치고는 다소 매정한 반응이었다. 아니, 오히려 얼음장처럼 찼다. 따라오라거나 괜찮냐는 어떤 말도 없었다. 지민이 헐레벌떡 남자의 뒤를 쫓았다.
“잠깐만요!”
“…….”
“지난 번에 복도에서 만났었죠, 우리.”
남자는 답이 없었다. 앞으로만 걸어나갈 뿐이다. 키는 엇비슷한데 남자의 보폭은 지민보다 컸다. 발목까지 쌓인 눈 때문에 한발 한발이 느린 지민과 다르게 남자는 눈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건지 걸음이 매우 빨랐다. 뭐, 뭐지. 이것도 마법인가? 당황한 지민이 남자를 부르며 다급히 쫓았다.
“그런데 조금만 천천히 가주실…! 앗!”
헛발질을 하며 지민이 눈밭에 넘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 어느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들었던 그 목소리들. 인간을 데려가자! 슈가가 아주 슬퍼할 거야. 얼음이 깨질지도 몰라.
그 사이 지민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올리니 앞서나갔던 남자가 돌아와 미간을 살짝 모은 채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따지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같은 일거리를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걷지 못하는 겁니까?”
“아뇨! 걱정 마세요. 잠깐 넘어진 것뿐이에요.”
지민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전혀 염려할 필요 없다는 듯 작게 웃으며 붙잡아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이렇게 넘어져 있을 때면 누군가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주었기 때문이다. 시합을 할 땐 둘째 공주가, 일이 많아 피곤해서 쓰러져 있을 땐 란이. 그러나 남자는 물끄러미 지민의 손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지민은 의심 없이 계속해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사람의 선의를 기대하는 눈망울이 순수했다. 남자는 머뭇거리더니 결국 지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고마워요. 지민이 샐샐 눈을 휘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슈가….”
“…….”
“맞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이 작게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란 왕자는 남자의 머리에 달린 뿔과 힘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본다면 경기를 일으킬만한 것들이 전혀 보이 않는 것마냥 손을 잡은 채 환하게 방긋 웃었다. 감동과 기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아주 밝게. 드디어 만났다. 지민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꼭 보고 싶었어요.”
만나서 기뻐요, 슈가. 저는 뮬 왕국의 네 번째 왕자, 박지민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