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Akashi-san no Th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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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뜰 가운데, 잘 차려 입은 남자 한 명이 연단으로 올라와 인사했다.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 몇몇이 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대부분이 뚱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랬다. 이 모임은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이 모여 한데 연극을 관람해야 한다는, 선왕의 시대부터 새로 생긴 쓸데없는 문화였다. 그 가운데 맨 앞 중앙에 앉은 아이만이 하얀 뺨에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사회자를 올려다보았다. 박수도 가장 열심히 쳤다.
사회자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얼음괴물’입니다.”
제목을 듣자마자 좌중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얼음괴물이라면 이미 지난번에 연극으로 봤고, 지지난번에 연극으로도 봤다. 뮬 왕국의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설 속 이야기였다. 또 저 내용이야. 지긋지긋해. 대놓고 눈을 감는 아이들, 하품을 해대는 아이들에도 사회자는 꿋꿋이 연극을 진행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욕심 많은 공작이 살고 있었습니다. 공작은 욕심이 많아 영지민들을 괴롭히며 부를 축적하고 있었지요.”
사회자의 말에 맞춰 좋은 옷을 빼어 입은 뚱뚱한 배우와 비쩍 마른 배우들 몇이 무대에 등장했다. 공작 역할의 배우는 평민 역할의 배우들을 발로 찼다.
“세금을 왜 못 낸다는 거야? 더 쥐어짜내! 쥐어짜내라고!”
귀족 아이들 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퀴벌레 같이 게으르고 멍청한 영지민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 쓰레기 발언에 몇몇의 고개가 그들을 향해 돌아갔지만, 사회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극을 진행했다.
“호화로운 성에서 살던 공작은 어느 날 영지민들로부터 신비한 책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 책은 바로 금서. 그 안에는 현재 사라진, 금지된 흑마법들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공작은 흑마법에 흥미를 느끼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재료들을 모으게 됩니다.”
사회자의 목소리는 법전을 읽는 것마냥 모든 톤이 똑같았다. 누가 들어도 대충 해치우고 싶은 자의 억양이었다. 실제로 사회자는 대충 해치우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나름 남작의 신분인데, 보모 역할 따위나 하고 있다니. 나오는 한숨을 참으면서 읽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재료는 천년삼의 뿌리, 늑대의 피에서 점차 겉잡을 수 없이 커져나갔습니다. 인간까지요. 공작은 몰래 지하감옥에 갇힌 죄수들로 흑마법을 시행했습니다. 결과는 실패의 연속이었죠. 죄수들을 모두 쓸 때까지도 ‘그 마법’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공작은 세금을 못 낸 영지민들을 몰래 납치해 재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연국의 내용은 흐름대로 흘러갔다. 공작이 성에 틀어박혀 미쳐있다는 소식을 들은 왕은 그를 조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다. 공작은 아무 일도 없는 척 위장해보지만, 결국 금서를 들키고 말아 왕의 부름으로부터 도망을 치게 된다. 도망치며 유일하게 공작이 챙겨간 짐은 흑마법서 한 권뿐. 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작을 처형할 사람으로 왕자를 보낸다.
“너의 죗값을 물어라!”
칼을 들고 갑옷을 입은 배우가 올라와 열연을 펼쳤다. 공작 역할의 배우는 금서를 꽉 끌어안고 큭큭거리며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마법은 완성되었다. 너희는 내가 만든 생물에게 갈가리 찢겨 멸망할 것이다. 크하하!”
“크윽!”
배우는 곧 왕자의 칼에 맞아 준비해놓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질질 사람들에게 끌려나가는 배우를 보며 놀라는 아이는 없었다.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연극에 완전히 몰입해있는 맨 앞의 아이 한 명만 빼고. 아이는 유일하게 탄식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안돼…!
“왕자가 공작을 처단하여 사라진 뒤, 어둠이 자리잡은 그곳. 무언가가 등장하여 공작의 피가 뿌려진 자리로 다가왔습니다.”
사회자의 멘트에 연단으로 파란 피부의 어린 소년이 누더기 옷을 입고 나왔다. 물감으로 칠한 건지 군데군데 대기하다 벗겨져 살색 피부가 드러났다.
“아버지…! 제가 반드시 녀석들에게 복수를 하겠습니다!”
소년이 흑흑 울며 슬퍼하고 분노했다. 잠시 후 얼음 가시, 미리 준비해놓은 듯한 특수 효과 고드름들이 소년의 주변에서 뾰족하게 올라왔다. 사회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지문을 읽었다.
“괴물소년은 왕자에게 복수를 꿈꾸며 훈련합니다. 훈련은….”
그때쯤 여기저기서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아이들이 참다못해 외쳐댔다.
“우우 재미없어!”
“악당이랑 언제 싸워?”
“시시해. 나가서 사냥이나 하는 게 더 재미있겠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지루해도 대부분 참던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로 우루루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당황했다. 관객들이 모두 사라지는, 그야말로 최악의 엔딩이 될 위기였다. 사회자는 왕궁 관리인 쪽을 확인했다. 미묘하게 얼굴이 찌푸려져 있었다. 이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갔다간…. 사회자의 목울대가 꿀렁 울렸다.
사회자는 냅다 외쳤다.
“…그렇게 10년후!”
10년후? 아이들이 나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일단 관심을 잡는 건 성공했다. 사회자는 열심히, 일정한 톤으로만 읽던 지문을 최선을 다해 박진감 넘치게 읽었다.
“얼음괴물이 수련을 하여 돌아왔다!”
그에 소년 연극배우가 난감하게 사회자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곧 눈치껏 무대 아래로 내려가고 파란 피부로 칠한, 괴상한 얼음 조각들을 단 성인 배우가 등장했다. 사회자는 뻔뻔하게 진행했다.
“마법의 힘을 찾아 엄청난 힘이 생기고 말았는데!”
…그걸 어떻게 표현하라고요. 배우는 황당하게 사회자를 돌아보았다. 연출 문제로 그런 효과는 없었다. 사회자는 어떻게든 해결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괴물은 급히 되는대로 바닥에 떨어져있는 나무칼을 집어 들었다.
“이 검은…전설의 마법 검…! 크하하! 힘이 솟아난다! 뭐든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용사 따위 부숴주마!”
마법의 검? 저런 내용도 있어? 괜찮은 거 같은데? 엉성한 연기와 개연성 안 맞는 스토리에도 파격적인 변화 때문인지 아이들은 흥미를 보이며 다시 앞으로 모여들었다. 유일하게 앉아서 꾸준히 보고 있던 맨 앞의 아이만 고개를 갸웃했다.
사회자는 만족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관객들에게 먹히는 부분을 찾아내니 이후는 쉬웠다. 그렇게 이야기는 아이들이 흥미를 끌만한 온갖 요소를 긁어 모아 파국으로 흘러갔다. 성 하나도 부숴버릴 만큼 미친 듯이 강해진 얼음괴물, 그리고 갑자기 검술 하나로 바다도 가를 만큼 강해진 왕자. 어찌됐거나 결말은 모든 동화와 똑같이 끝났다. 얼음괴물을 무찌른 왕자가 왕궁에 평화를 되찾아주었다는 이야기.
“…그리하여 모두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아이들의 반응은 어느 때보다 열렬했다.
“재미있다!”
“또 보고 싶어!”
관객은 만족했고, 사회자도 만족했다. 배우들도 결과가 좋으니 일단 만족했다. 모두가 만족한 연극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출입구로 빠져나갔다. 가장 성공적인 연극이 마무리 될 즈음.
가운데서 유일하게 집중하여 보던 아이가 일어나 졸졸 사회자에게 다가왔다. 아이는 뺨이 통통하고 발그레했다. 누가 봐도 사랑을 받고 자란 티가 났다. 사회자는 허리를 굽혀가며 인사했다.
“지민 왕자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극은 재미있게 보셨는지요.”
“네!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저….”
왕자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사회자를 올려다보며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물었다.
“용사가 얼음괴물을 바다에 봉인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얼음괴물이 나중에 살아날 수도 있을까요?”
사회자는 멈칫했다. 그도 모른다. 한 순간에 지어낸 막장 스토리였으니. 원래 전설에서 얼음괴물은 죽고 사라진다. 게다가 그는 처음부터 이런 미신 따위 믿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있을 리가. 그러나 기대감에 반짝거리는 왕자의 시선에 사회자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냥 아무 소리나 해서 돌려 보내기엔 아이의 신분이 그를 협박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왕자님. 얼음괴물은 그 이후 바다에서 빠져 나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주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답니다. 벽으로 커다란 얼음을 세운 성에 말이죠. 그 성은 누구도 드나들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는 곳이랍니다.”
“정말요? 그럼 얼음괴물이 너무 불쌍한데….”
지민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잘못은 공작이 했다. 그에 반해 얼음괴물은 지민이 볼 때 다소 외양이 흉측할 뿐, 잘못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도 죽고,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데, 거기에 더해 영영 혼자 살아야 하다니. 너무나도 가여웠다. 생김새와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 지민의 시선에서 얼음괴물은 가련한 희생양이었다.
사회자는 껄껄 웃었다. 왕과 왕비가 사랑해 마지않는 막내왕자는 감정이 넘쳐났다. 사회자 역시 어른의 입장에서도 지루한 티를 팍팍 내며 앉아있는 아이들보다 이렇게 순수한 물음을 던지는 아이가 좋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얼음괴물은 흉측할 뿐만 아니라 훈련하며 여러 사람들을 해친 아주 아주 무섭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끔찍한 악당이랍니다. 벌을 받아도 모자라요.”
“벌을….”
“예. 그 무시무시한 얼음 괴물이 언제든 다시 왕국으로 쳐들어 올 수 있으니 왕자님께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훌륭한 왕실의 일원이 되셔야 합니다.”
왕자는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사회자가 흐뭇하게 왕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 왕국의 미래가 아주 밝다는 생각을 하며.
***
뮬은 태평성대를 널리 이룬 왕국으로, 제국이라는 호칭을 달지 않았지만 대륙에서는 꽤나 큰 권력을 쥔 강국이다. 첫 번째는 넘치는 재력이요, 두 번째는 지리 덕분이었다. 전쟁시대에 가운데서 물자역할을 하며 돈을 벌어들였고, 땅은 어디든 비옥하여 늘 먹고 살기 좋았다. 왕과 왕비는 인품이 좋아 백성들 사이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그런 왕과 왕비가 유난을 떨며 아끼는 아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막내 왕자 박지민이다.
“어머니!”
지민이 봄볕에 소풍 나온 강아지마냥 쫑쫑 왕비에게 달려갔다. 예절 선생이 본다면 체통은 어디 팔아먹고 그리 뛰느냐 또 한바탕 잔소리를 흘릴 법도 했지만, 오늘은 모든 게 용인되는 날이었다. 바로 왕비의 탄신일이기 때문이다.
“왕자. 천천히 오세요. 그러다 다칠라.”
“어머니 축하 드려요.”
도착해서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린 지민이 선물을 내밀었다. 시종을 시키지도 않고 직접 품에 소중히 꼭 끌어안고 가져온 것이다. 이미 왕비의 뒤에는 수많은 금은보화가 쌓여 있었지만, 그녀는 지민을 보기만 해도 가장 기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지민은 그녀의 가장 큰 보물 중 하나였다.
“이번에는 뭘 준비했길래 이렇게 야단입니까.”
“어서 풀어보세요. 어머니께 딱 어울릴 선물로 준비했답니다.”
선물은 작은 상자에 담겨있었다. 왕비는 겉을 보기만 해도 작게 미소 지었다. 조금은 엉성하게 끈이 묶여있는 것이 직접 한 듯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보석이 정성껏 세공 된 반지가 들어있었다. 극도로 화려한 것은 선호하지 않으나 품위가 서린 장신구를 좋아하는 왕비의 취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어머, 너무 예쁩니다. 또 이번에도 손수 준비한 건가요.”
“예! 제가 직접 그려서 만든 것이에요.”
반지는 꽃의 줄기 형태를 닮아있었다. 가운데에 박힌 보라색 보석이 은은한 빛을 더해 왕비의 은발과 더 없이 잘 어울렸다. 왕비는 감탄하며 반지를 손에 끼워 넣었다.
“물론이지요. 어디, 잘 어울립니까?”
“예! 어머니는 어떤걸 해도 잘 어울리시지만 제가 드린 선물이 다른 것들보다 더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왕자만큼 나를 곱게 봐주는 사람도 세상에 없을 겁니다.”
“아니어요. 궁 안에 있는 모두가 그리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마음에 들어 해주시니 무척이나 기쁩니다.”
지민이 사뭇 쑥스럽다는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성년이 넘었음에도 소년의 티가 났다.
아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왕비는 지민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왕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지민의 형제들까지 모두 이런 성격이 아니다. 한 마디로 퍽퍽하고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전형적인 왕족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거다. 그 사이에서 말할 때마다 어디선가 봄바람이 나부끼는 것만 같은 막내왕자라니. 왕비는 당장이라도 어렸을 적처럼 지민의 볼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준비했으면 또 몇 날 며칠을 제대로 자지 못 한 게 아닙니까.”
“아니에요. 이번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일주일정도 걸렸습니다.”
왕비가 슬쩍 눈짓을 돌려 지민의 시종인 란을 바라보았다. 란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왕자님께서는 만드시느라 한 달간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었습니다.”
“…아.”
지민이 란을 홱 돌아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건 란의 뒤통수뿐. 돌연 배신을 당한 지민이 허둥지둥 손을 휘저었다.
“일주일 같은! 한 달이었습니다. 틈틈이 잠도 자서 건강도 해치지 않았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스승님들과도 열심히 수업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스승님과 군주학을 다 뗐는걸요. 그리고 사교모임에도 꾸준히 나갔고….”
“그리했다 하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왕자를 믿어요.”
왕비의 허락에 지민이 다시 샐샐 눈을 휘었다. 왕비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보며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전했다.
“내일은 무도회에 여러 나라에서 온 손님들과 귀족들이 오니 몸가짐을 조심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안 그래도 란이 최고로 좋은 의상을 준비해놓았어요.”
“우리 왕자야 뭘 입어도 빛이 나니 그건 걱정 안 합니다.”
“어머니…그 말을 형들과 누나가 들으면 웃을 거예요….”
왕비가 기분 좋게 호호 웃었다. 이만 준비해야 하니 쉬세요. 그럼 내일 인사 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지민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란을 불러 떠났다. 돌아가면서 퉁퉁 튀어나온 부리 같은 입술로 란을 향해 무어라 무어라 말을 하는 걸 보니, 어째 그걸 있는 그대로 다 사실되게 말할 수 있느냐 따지는 모양이다. 시녀 한 명이 다가와 왕비에게 물었다.
“왕자님의 선물을 넣어놓을까요?”
“아니. 그대로 하겠네.”
“예, 왕비전하.”
사랑하는 막내가 준 선물을 여기저기 자랑하고픈 마음이 컸다. 왕비는 바랐다. 이대로 지민이 자신들의 보호 아래에서 무사히 있었으면 좋겠다고.
***
무도회는 뮬의 왕궁 기둥을 뿌리 채 뽑아 열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지민은 무도회의 가운데서 톡톡히 왕실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그 역할을 할 인물이 지민밖에 없긴 했다. 첫째 왕자는 왕세자의 자리에서 여러 외교대관들과 외교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둘째 공주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가 없어 사교계를 포기한 것으로 유명했고, 셋째 왕자는 귀족 영애들과 수 차례 염문설을 뿌리고 다녀 곳곳에 적이 많았으므로, 밝고 다정한 성품의 지민만이 여느 귀족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었다.
“넌 그렇게 웃으면 안 피곤하냐?”
셋째 왕자 해서가 몰래 귀족들 틈을 빠져 나온 지민에게 대단하다는 듯 말을 걸었다. 온 종일 귀족들 사이에서 사교계의 꽃 역할을 하던 테라스에서 쉬던 지민은 해서를 보고는 반겼다. 유달리 까만 눈동자에 고개를 휙 돌릴 때 살랑거리는 앞머리가 꼭 들뜬 강아지 같다.
“형! 왔네? 율리 영애한테 뺨 맞은 지 얼마 안 됐는데 괜찮아? 저쪽에 와있으시던데.”
“어, 상기시켜줘서 고맙다, 동생아. 나 같은 건 잊고 새로운 사랑 찾으셨으니 괜찮으실 테니 굳이 굳이 안 말해줘도 돼.”
“응? 한 달도 안 됐는데?”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인마. 느낌이 오면 오는 대로 가는 거지. 하…그래 성인들의 세계를 네가 뭘 알겠니.”
어리다, 어려. 해서가 혀를 쯧쯧 찼다. 지민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해 봤자 형이랑 나랑 4살차이밖에 안 나거든. 그리고 말투 어머니가 들으면 기겁하실 텐데, 언제 고칠 거야.”
“그거 아니. 형이랑 누나한테서도 안 듣는 잔소리 너한테 다 듣는다, 요놈아. 내 말투가 싫냐, 싫어? 엉?”
“악.”
길거리 한량처럼 해서가 지민의 볼을 꾹 잡고 늘렸다. 아프으! 지민이 발음을 뭉개가며 반항하자 해서는 킥킥 웃으며 볼이 빨개질 때쯤 놓아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란이 슬쩍 둘에게 다가왔다.
“…해서 왕자님, 아무리 두 분께서 우애가 좋다곤 하나 무도회입니다. 보는 눈이 있을 지도 모르니 조심하시는 편이….”
“어, 그래. 너도 있었냐, 란? 하도 존재감이 종잇장 같아서 몰라봤네. 여전하구나 재미없는 거는.”
“내 시종한테 뭐라고 하지마. 형도 재미 없거든.”
또 까분다. 해서가 픽 웃으며 지민의 머리를 쓱쓱 헤집듯 쓰다듬었다. 지민은 반항하는 대신 익숙하게 손길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종종 형들이나 누나가 쓰다듬거나 귀엽게 톡톡 두들겨주는 적이 많아 접촉에 거부감이 없는 편이었다. 손 잘 탄 작은 동물처럼. 해서는 그런 지민을 보며 말했다.
“무도회 끝나고 형이랑 놀러 갈래?”
“형 또 나갈 거야?”
해서는 종종 왕궁을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니곤 했다. 왕족이라면 무릇 법도가 있는데, 해서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돌아다녔다. 워낙 제멋대로 행동하다 보니 귀족들이며 왕과 왕비도 어느 정도 포기했다. 그럼에도 무역정세와 사교계는 완벽하게 꿰고 있어 그 누구도 그의 능력에 대해선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지민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정말 나도 같이 가도 돼?”
“뭐, 안 될 이유가 있나. 성인도 됐고. 여태 궁 안에서만 갇혀 살았는데.”
“그렇지만 어머니랑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거 같은데….”
“나랑 같이 가는데 걱정하실 게 뭐가 있어. 내가 우리 막내 왕자님 모시고 가는 거지.”
지민은 단 한번도 궁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첫째 왕자나 둘째 공주나 무역지로 갈 때 동행한 적이 전부였다. 그 짧은 외출조차도 아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답답한 왕궁을 벗어 나 드넓게 펼쳐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기분이란. 고민하는 지민의 얼굴을 본 해서가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이번엔 북부로 갈 거야. 너 눈 보고 싶다며.”
북부는 늘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뮬에서 유일하게 눈이 내리는 곳이었다. 수많은 설산과 설원이 펼쳐진 곳으로, 라탄 왕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다. 태어나 단 한번도 눈을 보지 못한 지민이 무척이나 가고 싶어 하든 곳임을 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반응이 온다. 지민이 난간에서 뛰어내릴 것처럼 팔짝 뛰었다.
“정말!? 북부로? 정말?”
“그럼 가짜겠냐. 아우 어린애 상대하려니까 힘 딸리네.”
해서가 답답한 듯 보타이를 느슨하게 끌렀다. 이미 지민의 눈에 별이 초롱초롱 박혀있었다. 뭐, 넘어왔군.
“생각해보라고. 난 술 가지러 갔다 온다.”
해서는 손을 흔들며 테라스에서 벗어났다. 지민은 해서의 제안이 믿기지 않아 난간을 꽉 부여잡았다. 북부로 가서 눈을 보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눈을 보는 것은 지민의 어린 시절부터 쭉 이어진 꿈이었다. 하얗고 차갑고, 누우면 침대처럼 푹신하다는. 연극에서 툭하면 등장했던 것들이라, 지민도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란이 지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실 겁니까?”
“가고 싶어….”
“그렇다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민이 란을 바라보았다.
“그럼 란도 따라가야 할 텐데, 어머니랑 가족들을 못 보잖아. 괜찮겠어?”
“제 주인은 이미 왕자님입니다.”
란은 크게 괘념치 말라는 위로를 더했다. 란의 대답까지 합해지니 지민의 마음은 이미 북부로 붕 떠버렸다. 형을 따라갔다가 잠깐 돌아오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어머니와 아버지께는 잘 설명 드리면 될 거 같았다.
그때, 누군가 란과 지민이 있는 발코니로 찾아 들어왔다. 해서는 아니었다.
“여기 있었군. 한참을 찾았다, 뮬의 왕자.”
푸른 머리에 금색 눈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는 지민이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였다. 남자의 눈과 머리 색은 뮬의 국민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특색이었다. 누구…? 아리송한 지민의 눈에 남자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서역 제도의 셋째 황자 루슬란 아르키슈다.”
“…아 황자님.”
지민이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뮬 왕국의 넷째 왕자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먼 곳에서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적당히 웃으며 건네는 지민의 인사말에 아르키슈는 지민을 탐색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은은한 미소를 흘렸다.
“잠깐 따로 둘만 이야기하고 싶은데, 가능한가?”
지민이 눈만 깜빡였다. 굳이? 쓸데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는 이웃나라의 황자였다. 서역 제도는 최근 뮬 왕국과 무역을 시작한 나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어제도 어머니에게 당부의 말을 들었지 않는가. 지민의 행동은 뮬을 대표한다. 무역 상대국에겐 언제나 친절하게. 지민이 활짝 웃었다.
“네, 안 될 이유야 없죠.”
“그럼 가지.”
지민이 황자를 따라 나서며 란까지 뒤를 이어 따라나갔다. 그를 본 황자가 잠시 발을 멈추었다.
“아. 그 시종은 빼고.”
“네?”
란이 미미하게 미간을 모았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서 시종을 빼라는 이야기를 하는 자라니. 점점 더 수상했다. 죄송하지만… 란이 아르키슈를 향해 경계태세를 갖추며 운을 떼자, 냉큼 알아차린 지민이 란을 달랬다.
“다녀올게. 금방 올 거야.”
“하지만 왕자님….”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있어, 알잖아.”
지민이 신뢰감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란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 믿지? 그런 뜻이다. 란이 머뭇거렸다. 지민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이다. 실상 지민이 관련된 일에서 여태 문제가 일어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만큼 지민은 똑똑하고, 현명한 왕자였으니까.
“네 그럼…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란은 인사하며 멀어지는 지민과 아르키슈의 뒷모습을 봤다. 상식적으로도 큰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귀족들이 국가 주요 귀빈들이 다 있는 이 왕궁 안에서.
머지않아 와인 잔을 든 해서가 돌아왔다. 해서는 란만 남아있는 발코니를 보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란은 지민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사냥개 같은 시종이었다. 왕과 왕비가 지민을 위해 손수 고른, 거기에 더해 지민과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동무이자 호위였다. 해서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너만 남아있어?”
“왕자님께서는 손님이 오셔서 잠깐 대화를 하러 가셨습니다.”
“…널 떼놓고?”
지민이? 해서는 구린 냄새를 맡았다. 귀족 가문에 있는 자제들이 그렇게 만남을 신청해도 철벽같이 거절하던 애가 박지민인데. 아무나 다 사람 좋다고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철저하게 선을 그을 줄 아는 애였다.
“어떤 손님?”
“서역 제도의 셋째 황자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뭐? 아 젠장.”
해서는 이마를 짚었다. 왜 비린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나. 뮬에서 가장 난봉꾼이 해서로 알려져 있다면, 셋째 황자는 제국에서 가장 난봉꾼으로 알려진 자였다. 그는 해서보다 더했다. 해서가 그저 자유분방하게 성애적 감정을 누리고 다녔다면, 황자는 해서는 안 되는 모든 일을 다 저지르고 다녔다. 이미 황자는 여러 추문을 달고 있었다. 예를 들어 평민들의 아내를 강제로 탐하려고 했단 추문.
아마 왕과 왕비의 품에 둘러싸여 더러운 소문 쪽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 동생은 의심이 없었을 터다. 뮬도 아닌 제국 황자의 소문까지는 란도 마찬가지로 모르는 게 당연했다.
“미치겠네. 어디로 갔어?”
란은 심각해진 해서의 표정을 보자마자 혀를 살짝 짓씹었다. 아. 실수했구나. 그나마 다행인 건 란이 그들이 사라지는 곳이 어디인지 마지막까지 주시했단 점이다.
“…동궁 쪽으로 가셨습니다.”
“장소부터, 아주, 씨발.”
동궁의 뜰은 나무들과 풀숲이 많았다. 무도회를 벗어난 귀족들이 은밀한 행위를 하기 위하여 주로 찾는 곳이었다. 해서는 와인 잔까지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정신 없이 뛰었다. 그 뒤를 란이 좇아 뛰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적당히 해야지, 왜 계속 만지고, 어? 제국에서는 대체 뭘 가르치길래 이따위로.”
“살, 살려…컥!”
지민이 황자를 지근지근 밟고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얻어 터진 건지 황자의 이마에선 피가 터져 있었다. 이마뿐이랴. 다른 곳도 형편 없이 구타당한 듯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지민은 흥, 비웃으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황자의 등을 꾹 밟고 올라섰다. 작은 어깨가 씩씩거리며 분노로 파들파들 떨렸다. 무도회에서 봄 내음을 물씬 풍기던 왕자는 사라지고 뱀같이 서늘한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디를 가. 너 아직 덜 처맞았어. 나한테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이랬지, 너. 넌 오늘 여기서 살아서 못 가. 제국의 황자라면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 망정. 눈 떠, 안 떠?”
괜히 핏줄이 이어진 게 아닌 듯 시정잡배 같은 말투도 지민은 잘 구사했다. 해서는 그 황자새끼를 내가 죽여버린다며 뛰어올 때와 달리 차분히 팔짱을 꼈다. 란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눈빛을 띄웠다. 해서가 생각했다. 음, 다행이긴 한데 망하긴 망했군.
***
왕족이 모두 모여 앉은 막내 왕자의 궁.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왕과 둘째 공주는 사람 하나쯤은 당장이라도 파묻을 기세였으며, 왕비는 지민을 걱정하였고, 첫째 왕자는 한숨을 진득하게 쉬고, 셋째 왕자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민은 그 가운데에 끼어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강제로 침대에 뉘여 조금이라도 나올라치면 누구 한 명이 말했다.
“아직 충격이 클 텐데 거기서 쉬렴.”
사실상 황자를 두들겨 팬 주먹과 발 빼고는 아무데도 아프지 않았지만 지민은 분위기를 살피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여기 있을게요….
가장 먼저 왕이 말했다.
“황자는 언제쯤 깨어나지?”
“아마 3일내로 깨어나실 것이옵니다.”
의사가 말했다. 성군이라고 칭송 받는 왕은 유례없이 싸늘한 얼굴이었다. 그렇군. 그 정도라면 충분히 순서를 정할 수 있겠어. 그 말을 들은 의원이 얼굴에 작게 의문을 표했다. 순서…? 그러나 다음에 나온 말에 의원은 놀라 의료기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고문실에는 내가 먼저 들어가마.”
“제가 첫 번째로 들어갈게요. 아버지는 그간 고문실을 많이 안 찾으셨잖아요. 무르실 거예요.”
둘째 공주가 말을 받았다. 안 그래도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이는 얼굴의 공주는 다가가기만 해도 손끝이 얼 것처럼 더 시려 보였다. 의원은 덜덜 떨었다.
공주는 왕의 자식들 중 고문실을 유일하게 제 방처럼 들락날락하는 이였다. 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묻히고 나온 그녀는 의원에게 종종 명령하곤 했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만 고쳐놔. 의원은 고문실 안으로 들어가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꾹 눌러 담았다. 죄수는 그저 덩어리의 한 형태로 축 늘어져 있었다. 이게 사람이었나 싶다. 감정 없어 보이는 공주는 사 형제 중 제일 무서운 왕족이었다.
“공주, 어차피 내가 다 가르쳐준 것들이 아니냐. 이 아비를 믿어라.”
“…그럼 잘 조절 부탁 드릴게요. 고통을 느낄 의식이 남아 있어야 해요.”
의원은 꿈꿨다. 그저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만 싶다…. 그때 의원을 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세자인 첫째 왕자였다.
“지민아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침대에 누워 눈치만 보던 지민이 살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런 일을 만든 것 자체가 죄송스러워 눈치만 보고 있던 터였는데, 간신히 발언권이 생겼다. 첫째 왕자의 말에 공주와 왕이 그를 잠시 쏘아보았다. 알아서 잘 죽일 건데 왜 그러냐는 뜻이 담겨있었다. 심성 약한 지민이라면 죽이라고까지는 안 할 것을 알기에 그런다. 첫째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뭐, 죽이고 싶은 방법이 있으면 자유롭게 설명해도 되고. 그대로 해줄 거야.”
“그래 맞다. 어떻게 하고 싶니, 지민아.”
손만 꼭 부여잡고 있던 왕비도 입을 뗐다. 지민이 모두의 시선을 받아내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괜찮으니 편하게 말해보세요, 왕자.”
왕비가 부드럽게 일렀다. 지민이 그에 조금 자신감을 얻어 말했다.
“저를 왕궁 밖으로 멀리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뭐? 그게 무슨 말이니. 네가 왜 추방을 당해.”
왕이 믿기지 못한다는 듯 되물었다. 둘째 공주는 첫째 왕자를 쏘아보았다. 이럴 줄 알고 저런 말을 한 게 분명하다. 첫째는 감성적인 그들과 달리 나라의 안위를 제일 먼저 신경 쓰곤 했으니까.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거예요.”
지민의 의견도 일리는 있었다. 제국의 황제도 주변의 시선을 생각해 황자를 피떡이 될 때까지 쥐어 패놓은 왕자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처지였다. 거기에 더해 실상 목격자는 지민의 측근뿐이라 황자의 잘못을 증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눈을 뜬 황자가 아니라 우기면 그만인 것이다. 나라간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지민의 의견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왕비가 단호히 말했다.
“네게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단다. 그런 이유라면 당장 제국과는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어머니! 사실 그것 뿐만은 아니고….”
지민이 이불을 잠시 꾸욱 쥐었다. 그리고는 용기를 냈다.
“저…사실 왕궁 밖을 한번 혼자 나가보고 싶었어요.”
“…지민이 네가?”
첫째가 놀랐다는 듯 말했다. 성년이 되자마자 궁 밖으로 뛰쳐나가다시피 유람을 갔던 형제들과 달리 지민은 궁에 얌전히 붙어 있었으니까.
“형과 누나처럼 왕국을 제 발로 직접 다녀보고 더욱 사랑하고 싶어요. 어머니랑 아버지께, 그리고 형과 누나한테도 도움이 되고 싶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왕자, 이런 큰 일을 겪었는데 지금처럼 충격을 받은 몸 상태로는 무리가 아니겠느냐.”
왕이 염려했다. 그러나 왕비는 잠시 생각하듯 지민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언제까지나 품에 끼고 있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지민의 눈은 결심을 담은 듯 결연했으며 반짝반짝 의지로 빛이 났다. 그저 충동적인 바람이 아닌 것이다. 마냥 어리다고 여긴 막내는 똑바로 제 몫을 해낼 사람으로 크고 있었다. 왕비가 지민의 뺨을 보드랍게 쓸었다.
“그런 결심이라면 좋습니다.”
“…비!”
왕이 끄응 침음을 내쉬었다. 그는 사랑하는 왕비를 이기지 못했다. 여전히 걱정이 많은 눈으로 지민을 바라보면서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좋다. 허가하마. 어디로 가길 원하는 것이냐.”
“감사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지민이 활짝 웃었다. 일이 잘 풀릴 수 있을 것 같단 확신이 들었다.
“바로 북부입니다.”
“뭐!? 야…!”
계속 닥치고 있던 해서가 펄쩍 뛰었다. 저게 북부가 어떤 곳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나 둘째 공주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 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잠깐 눈을 떼 사건을 막지 못한 죄인은 말이 사라지는 법. 왕도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큼…북부는 뮬에서도 위험한 곳인데 처음인 왕자가 가기에는….”
“좋습니다. 다녀오세요.”
“…비….”
왕이 허망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왕비는 지민의 눈을 단단히 마주보며 확실히 말했다.
“이 어미에게 꼭 약속해주세요. 반드시 무사히, 건강하게 돌아오겠다고. 알겠습니까?”
“네! 어머니.”
지민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 약속을 지켜서 돌아올게요.
***
여행길, 아니 유배길은 단출했다. 지민과 시종 란, 그리고 짐꾼들이 전부였다. 떠나기 전 왕족들은 유별난 작별식을 올렸다. 궁 안에서 왕비는 포옹 한 번으로 끝냈지만, 왕은 지민에게 반드시 3일에 한번씩은 꼭 편지를 써야 한다는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떠나는 마차 앞에서 왕세자는 훌륭히 돌아오면 네 시야가 달라져 있을 거란 덕담을 했고, 둘째 공주는 지민에게 작은 단도를 내밀었다.
“네 몸을 지켜야 할 때 써.”
“응, 고마워 누나.”
“하아…이럴 줄 알았으면 널 더 수련시켰어야 했는데.”
“아냐, 누나. 지금도 충분해. 누나 덕분에 황자가 그랬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었어.”
지민이 또랑또랑 대답했다. 가족 중에서도 감정 표현이 가장 적은 그녀는 지민을 다정히 끌어안아주었다. 몸 조심하고. 언제라도 힘들면 돌아와. 안겨 있던 지민은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해서 형님은?”
“…아마도 집무실? 업무에 빠져서 못 나올 거야.”
첫째가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 지민이 짧게 탄식했다. 분명 아버지께서 던져놓은 일 더미에 치여있을 터였다. 지민이 해오던 업무까지 해서의 앞으로 몽땅 밀려났으니. 충분히 이해 갔다. 그래도 지금 안 보면 오래 못 보는데…. 지민이 아쉬운 눈을 했으나 곧 앞에 선 누나와 형을 신경 써 밝게 웃어 보였다. 떠나는 길이 밝아야 그들도 안심을 할 것이다.
“잘 다녀올게!”
지민이 마차에 올라탔다. 란도 남은 왕족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다음 마차에 같이 올라탔다. 마침내 북부로 향하는 그들이 여정이 시작되었다.
북부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열흘 내내 마차를 타고 산까지 넘어야 했다. 지금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북부로 넘어가는 마지막 길이다. 지민이 숨을 크게 들썩이며 청량하게 웃었다.
“여기만 넘어가면 드디어 북부네.”
“왕자님 계속 그렇게 계시면 감기에 걸립니다. 점점 날이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수도와 똑같이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란이 담요를 가져와 지민에게 둘러주었다. 지민이 고맙다며 작게 웃었다. 유배길에 오른 순간부터 눈이 휘어 펴질 줄 몰랐다. 그 모습이 기꺼운 란이 작게 웃음을 담아 물었다. 주인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란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응!”
어렸을 때부터 간직한 꿈이 이뤄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동화 속 용사들처럼, 또는 모험가처럼. 새로운 땅에 가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설렜다.
“도착하면 눈이 있겠지?”
“예. 거기 있는 거라곤 눈밖에 없습니다. 진짜 유배지…입니다.”
덕분에 제국에선 말 그대로 완전히 유배로 믿었다. 뮬이 제국의 힘에 눌려 그런 선택을 했다고. 무역과 다른 것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황제는 은근한 사죄의 표시로 비싼 값에 뮬의 특산품을 거래했다.
지민이 마차 창문에 기대며 꿈결 가득한 눈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북부의 산을 바라보았다.
“궁금해.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눈을 본 적이 없어. 엄청 차갑고 하얗다던데. 책에서 읽으니깐 설탕 같데.”
감상적인 왕자 앞에서 란은 말을 줄였다. 란은 북부에서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딱 한번뿐이지만 어릴 적 지민의 시종이 되기 전, 아버지를 따라 경계선을 감시하러 왔었다. 시 같은 표현은커녕, 하얀 설산에서 뼈가 시리도록 추운 기억뿐이었다. 앞이 아예 보이지 않을 만큼 휘몰아치던 눈보라 속에서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란은 기대 가득한 지민을 배려하여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도착하시면 바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북부의 날씨는 왕자님이 상상하시는 그 이상으로 춥습니다.”
“응, 알았어.”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마차의 창문을 쿵쿵 두드렸다. 다소 급한 표정의 길잡이였다.
“왕자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길잡이는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가리켰다.
“이 정도까지 날씨가 나빴던 적이 없는데…이대로 가다간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마을에 들러 정비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리해라.”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지가 코앞이었지만 지민은 욕심까지 부리며 자기주장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길잡이가 외쳤다.
“마차를 돌려라!”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쿠구궁. 노란 섬광은 산 위로 쭉 내리 꽂혔다. 그와 동시에 마차가 돌연 누가 집고 흔드는 것마냥 흔들렸다.
“악!”
“왕자님!”
지민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머리가 부딪힌 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란이 황급히 지민을 부축했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왕자님은 이 안에 계시는….”
“아니. 내가 직접 갈게.”
지민이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산사태다!”
“피해!”
“왕자님을 지켜라!”
히이잉, 말들이 투레질을 했고 온갖 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짐꾼들 몇이 지민을 향해 튀어왔다.
지민은 그날 처음 깨달았다. 그것들이 얼마나 소용 없는 몸짓이며,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해질 수 있는지.
손쓸 새도 없이 커다란 돌들이 우르르 산을 타고 굴러 내려왔다. 지민은 어이없게도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속설을 이해했다. 산사태가 왜 신이 내리는 형벌이라 불렸는지. 란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왕자님!!!!”
란이 지민을 감싸려 손을 뻗은 순간, 거대한 돌들이 왕자 일행을 덮쳤다. 란의 위로 거대한 바위가 굴러 떨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아. 이대로라면 란은 죽는다. 지민이 란을 강하게 절벽 안쪽으로 밀쳐냈다. 란이 밀려난 자리에 바위가 떨어지며 부서진 조각이 지민의 이마를 찍었다.
“아!”
쿵. 동시에 산줄기를 따라 이어져있던 길들이 무너져 내리며 끊겼다. 마차와 말, 그리고 짐꾼들이 상관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지민의 작은 몸 역시 허공을 가르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민은 아릿하게 정신이 멀어졌다. 나는 이렇게 죽는 건가?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했던 어머니의 약속, 그리고 가족들의 얼굴, 자라며 쌓아온 추억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갔다. 삶을 기록한 하나의 책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아…해서 형은 마지막에 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그때, 멀어지는 정신 사이로 아릿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대화 내용은 아주 또렷했다.
[데려갈까? 데려갈까?]
[안 데려가면 죽고 말 거야!]
[그럼 슈가가 아주 슬퍼할 거야. 얼음이 깨질지도 몰라! 데려가자!]
[데려가자! 인간을 데려가자!]
이건 죽기 전에 인간이 듣는 환청인가. 전설에서도 들은 적은 없는데. 그런 쓸데 없는 생각이 마지막으로 들었다.
이윽고 숨이 멎을 듯한 암전이었다.
***
산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처참했다. 끊긴 길만 휑하니 남아 온 길이 다 흙으로 헤집어져 있었다. 작은 돌멩이들이 여파를 전하듯 툭툭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 길 앞에 선 일행은 황망함에 말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그 일행 사이에서 로브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미친 듯이 끊긴 길을 향해 뛰쳐나갔다. 누군가 마찬가지로 뛰쳐나와 남자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해서님! 참으십시오! 이대로 내려가셨다간 죽습니다!”
“놔! 내 동생이 지금!”
“아직 모르는 게 아닙니까. 지민님께서 이 길을 지나간 다음 산사태가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해서님, 안 됩니다!”
해서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털썩 엎어졌다. 해서의 시종이 해서를 일으키려 하였지만, 해서는 거부한 채 땅에 이마를 박았다. 시종의 말은 해서를 위로하기 위한 항변에 불과했다. 해서는 알고 있었다. 지민의 마차가 이 길을 올라갔을 때의 시간과 산사태의 울림이 일어난 시간이 일치한다는 것을.
가슴이 쥐 뜯기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만큼. 그 무엇으로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적 통증이 그를 휩쌌다. 해서는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피가 터져 나왔지만 시종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지켜보는 이가 더욱 힘들만큼 해서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해서의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해서 형님! 맑게 웃던 지민의 모습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대로 잃을 순 없다.
“…아래로 가서 찾는다.”
시체를 보기 전까진 지민이 죽었다고, 그는 믿지 않기로 했다. 분명히 영특한 자신의 동생은 어떤 수를 써서도 살아있을 거다.
“산의 지리에 익숙한 일꾼들을 고용해와라.”
해서는 다시 발을 딛고 일어섰다. 그의 눈이 절벽 아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죽었다면 살려내서라도 데려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