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 하도윤은 윤기를 뜯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매니저는 아니었다. 눈썰미가 꽤나 좋은 편인데, 이 남성이 타인을 섬세하게 돌볼 타입이 아닌 건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내리
깔아보는 듯한 시선이며, 묵직한 분위기는 결코 그쪽이 아니다.
“…매니저 분은 아니신 거 같은데.
실례지만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건 그쪽이 알 바 없다고 보는데.
일어나, 박지민.”
지민은 윤기의 목소리에도 뒷좌석에 뻗은 채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애를
대체 얼마나 먹였길래. 윤기의 인상이 더욱 험악하게 구겨진다. 하도윤이
지민에게 닿는 윤기의 시선을 차단하듯 그 앞을 가로 막아 섰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말씀한다고 하셔도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분한테 공인을 맡길 수 없으니까요.”
하도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증거도 없이 맨몸으로
찾아온 윤기에게 맡기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논리적으로 평화롭게 정리하려 했다. 민윤기가 다음 말을 내뱉기 전까진.
“술 취해서 몸도 못 가누는 애 질질 끌고 가는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들의 분위기가 빙하기마냥 급격히 하강했다. 순식간에 납치범으로 몰린
하도윤은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다. 난데없이 등장해서 고압적으로 구는 태도부터, 이 남자는 명백히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 연습생 때조차 소속사
이곳 저곳에서 모셔가려고 안달을 냈으니,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하등생물 취급은 어디서도 받아본 적이
없다. 상대가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야. 하도윤은 착실하게
쓰고 있던 친절한 연예인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납치? 어이가 없네요. 그러는 본인이야말로 술 취해서 몸도 못 가누는 연예인 데리고 가서 뭐 하시려고요.”
윤기의 눈이 가늘어진다. 커다란 액션을 취하는 행위도 없는데,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게 꼭 뱀 같았다. 일이 커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도윤이 먼저 피했다.
“더는 할 말 없습니다. 제
매니저 부를 테니 그쪽과 연락하세요.”
두 사람 간의 서늘한 신경전이 절정에 치달은 순간. 뒷좌석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더워….”
지민이 눈 못 뜬 새끼강아지마냥 낑낑거린다. 답답한 듯 옷을 쥐 뜯었으나, 오늘 춤 컨텐츠 녹화를 위해 입고 온 스포티한 맨투맨 티는 전혀 벗겨질 기미가 없었다. 왜 안 벗겨지지. 눈을 뜨는 것조차 귀찮은지 지민이 연신 단추를
푸르듯 헛손질을 했다. 결국 열이 받았는지 으이씨, 하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박지민.”
저승같이 무거운 저음의 음성이 지민을 불렀다. 윤기였다. 하도윤은 아차, 싶었다. 막무가내로
지민을 데려갈까 싶어 급히 끼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지민이 한층 더 빨랐다. 윤기를 발견하자마자 부루퉁했던 얼굴이 헤실헤실 반갑게 펴진다.
“부사장니임…!”
하도윤이 어정쩡하게 굳었다. 길도 못 걸을 정도로 사물 분간도 못하던
지민이 윤기를 보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지민이 윤기에게 다가가고 싶은 건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윤기가 하도윤의 어깨를 밀치며 지민의 앞으로 다가왔다. 지민이
냉큼 윤기에게 안아달라는 듯 양손을 뻗었다. 부사장니임, 부사장님…. 윤기가 목을 조금 숙이자마자 지민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렸다.
“어떻게 왔어요? 저 오늘
춤 엄청 잘 췄는데…칭찬해주실 거죠. 저요, 부사장님 생각해서
진짜로 열심히이….”
애교부리며 윤기의 목덜미에 얼굴을 폭 묻고 비빈다.
“그거 알아요? 부사장님한테서
시원한 냄새가 나요. 겨울에 오는 눈 같아요. 신기해요. 저 눈 진짜 좋아해요. 그래서 부사장님 많이 보고 싶었는데….”
“알았으니까 다리에 힘줘.”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계속요? 내일도 같이 있으면 좋겠어요. 맨날 맨날. 안 헤어지면 좋겠어요.”
지민이 윤기를 보자마자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듯 옹알거렸다. 윤기는
동그란 뒤통수를 커다란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히이. 지민이
좋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이어지는 동작들이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도윤은 그 광경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
사이에 그가 파고들 수 있는 틈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리와.”
윤기가 지민을 붙잡아 품에 낀다. 그는 하도윤을 바라보더니 여전히
짙은 경멸을 담은 눈으로 경고했다.
“주제 넘게 나서지 말았어야지.”
윤기가 지민을 얻은 채 하도윤을 옆을 스쳐 지나간다. 하도윤은 굴욕적인
기분에 주먹만 꽉 쥔 채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올 블랙의 남자에게 매달린 지민은 결국 하도윤의
벤이 아닌, 민윤기의 차에 실려 회식 장소를 떠났다.
***
민윤기는 인생에서 단 한번도 해보지 않은 짓을 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달이 깊은 새벽 술에 취한 누군가를 직접 수발 들며 챙기는 것. 편의점에 들려 숙취 해소제와 소화제, 건강차 같은 것들을 사서 나르는 것. 술에 취해 달라붙는 인간을
타이르며 손수 안전벨트까지 채워주는 것. 부사장님, 부사장님, 저 두고 갈 거예요? 아니죠? 저는
같이 있고 싶어요. 어, 그래, 놔볼래. 그래야 채우지. 안
두고 가. 안 놓으면 두고 갈 거니까 얌전히 놔. 지민은
살짝 불안해하더니 윤기가 어깨를 두들겨주는 동작에 고개를 끄덕이며 놓아주었다.
차는 도로를 달려 찬 바람이 부는 어느 공터 주차장에 정차했다. 늦은
새벽 시간이라 주변은 한산했다. 윤기는 숙취 해소 음료를 까서 지민에게 내밀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이게 뭐예요? 저 주시는
거예요?”
취한 상태로도 고맙다며 방싯방싯 웃는 얼굴이 어린 아이 같았다. 의심
없이 받아 마신다. 그러나 곧 순한 인상은 와그작 일그러졌다. 욱. 지민이 입을 틀어막았다. 원망의 눈길이 윤기를 향한다. 윤기는 묵묵히 손짓했다. 더 마셔.
지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거 너무 써요….”
“소주는 그렇게 마셔댔으면서 이건 쓰니.”
“으우, 너무 쓴데에…마시기
싫은데….”
아직도 술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민이 혀 짧아진 말투로 투정을 부렸다. 민윤기는 무표정하게 되풀이했다.
“다 마셔. 안 그럼 너
버리고 간다.”
네…. 풀이 죽은 지민이 눈을 질끈 감더니 음료를 원 샷으로 들이부었다. 온 얼굴이 구겨진 지민이 파르르 떨고 있으니, 윤기가 이어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까서 지민에게 들이밀었다.
“아.”
“흐으….”
지민이 뭘 주는지도 모르면서 눈을 꾹 감고서도 순하게 입을 벌렸다. 아아. 막대사탕이었다. 입안에 단맛이 확 퍼진다. 지민이 반짝 눈을 떴다. 이제 안 써요! 금방 좋다고 또 헤실헤실 웃는다. 원래도 쉬웠던 웃음은 헤프게 넘쳤다.
반대로 윤기의 마음은 심란해진다. 휘어지는 박지민의 눈웃음을 보니
더욱 그랬다. 내내 이 상태로 술자리에 앉아있었겠지. 미미한
짜증이 들끓듯 속에서 요동친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내내
불편하게 얹혀있던 마음이 허리를 붙잡힌 채 맥없이 딸려가던 지민을 본 순간 폭발하듯 터져버렸다. 당장
지민을 끌고 간 놈을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지민이 수줍게 털어놨던 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새끼가 잘못되면 박지민이 울 텐데. 덕분에 민윤기는 오도가도
못한 채 그의 인생에서 몇 없는 큰 아량을 베풀었다. 깨기만 해봐, 아주.
윤기가 창문을 반쯤 열었다. 찬바람이 차 안을 통과하니 지민이 움찔거렸다.
“부사장님, 저 추웅데….”
“일부러 연 거야.”
사탕을 물어 지민의 발음이 더욱 뭉개졌다. 윤기는 아예 지민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창문 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민은 매정한 윤기의 반응에 눈썹을
축 떨궜다. 오늘따라 윤기의 반응이 차갑다. 계속해서 바라보면
스쳐 지나가듯 눈을 맞춰주셨는데. 맨날 다정하셨는데.
“부사장님.”
“…….”
“부사장니임….”
“술 깨고 이야기해. 말
걸지마.”
윤기는 머릿속을 식히느라 바빴다. 속에서 치받는 것을 내리누르며 어떻게
하도윤을 향한 박지민의 마음을 잘라놓을까 고민이 이어졌다. 붙은 광고부터 다 끊고. 루머 몇 개 적당히 풀어서 이미지 망쳐놓고. 박지민한테는 따로 사람을
하나 붙여놓을까, 그런 고민을 할 때였다. 작은 손이 운전석으로
넘어오더니 값비싼 수트 자락을 꾹 쥐고 당겼다.
“뭐.”
그새를 잠시 가만히 못 있는군. 한숨을 쉰 윤기가 그제야 지민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멈칫했다. 섭섭함이 쌓여 울망거리는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왜, 왜 못되게 말해요….”
“…….”
“전 부사장님이 좋은데…부사장님이랑 예쁜 이야기만 나누고 싶은데….”
“…….”
“부사장님이 절 예뻐 해주시면 좋겠어요….”
오 맙소사. 박지민의 직업이 아이돌인 탓일까. 지민은 사람을 홀리는 고백을 잘했다. 한 연예인을 망치기 위해 교활하게
굴러가던 민윤기의 머릿속도 정지시켰다.
“네? 그렇게 해주시면
안돼요?”
윤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만 쥐었다 폈다 했다. 술만 깨면
혼낼 생각이었는데. 아직 그딴 새끼랑 어울리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고, 접으란 말도 못했는데. 윤기가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옷자락을 잡은 작은 손이 힘을 줘 윤기를 당긴다.
“…알았어.”
졌다. 윤기가 백기를 흔들었다. 지민이
활짝 웃는다. 뭘 웃어, 웃기는. 윤기가 핀잔 아닌 핀잔을 주며 긴 한숨을 쉬었다.
“대체 널 어쩌면 좋냐.”
“안아주면 돼요.”
“…먹인 약은 효과가 없는 거야? 술
언제 깨니, 응?”
환불 받아야겠어. 토해내. 윤기가
지민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지민이 그걸 보고 눈을 휘휘 굴리더니 대뜸 씨익 웃는다. 그러더니 이번엔 운전석으로 손이 아니라 다른 게 넘어왔다. 윤기가
드물게 당황했다.
“잠깐, 너 지금….”
지민이 기어코 좁은 운전석을 파고들며 윤기의 위로 올라왔다. 박지민. 내려가, 안 가? 싫어요, 같이 있을 거예요. 지민은 비켜나긴커녕 더욱 달라붙으며 아예 목에
얼굴을 문댔다. 주인한테 애정표시를 하는 작은 동물처럼. 간지러운
숨결이 목에 달라붙는다. 흐흥.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윤기의
귓가에 들러붙는다. 지민을 몇 번 떼어내려던 윤기는 결국 포기한 채 좌석을 뒤로 조금 눕혔다.
“이제 아주 멋대로 하지.”
“네!”
“대답하지 마.”
지민은 날카로운 말에도 히히 웃으며 사탕을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사탕의
단 딸기 향이 윤기의 코끝을 스친다. 윤기는 문득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 회식에서 온갖 냄새에 다 찌들어왔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따끈하고
달지. 애 체온 때문인가. 희한하다는 생각에 윤기는 팔을
들어 지민의 등을 감싸보려다 그만두었다. 유야무야 넘어가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너 앞으로 밖에서 술 마시면 혼난다.”
“…….”
“이건 왜 대답 안 해.”
“…왜요?”
“이 새끼 저 새끼 눈 돌아가서 너 끌고 가려고 하는데 내가 먹게
두겠니.”
지민이 끌어안고 있던 윤기의 목을 놓고 일어나 앉았다. 환하게 열린
눈이 의아하다는 듯 반박한다.
“도윤이 형이요?”
형? 그새 호칭까지 텄다. 형은
무슨. 윤기가 비웃었다.
“걔랑 어울리지 마. 조만간
매장될 거니까. 엮여서 좋을 거 없어.”
“…도윤이 형이 왜요? 도윤이
형 그런 사람 아니에요…엄청 오늘 착했는데….”
도윤을 감싸는 지민의 말이 안정됐던 윤기의 기분을 깬다.
“넌 뭘 보고 착하다고 하는 거야.
밥 사줘서? 밥 사주면 다 착한 사람이야?”
“그런 게 아니라….”
부사장님도 그렇고, 그냥 알 수 있는 건데…. 지민이 뒷말을 흐렸다. 윤기가 헛웃음을 짓고는 결국 직설적으로 쏘아붙였다.
“어디 좋아할 게 없어서 술 먹이고 강제로 데려가려는 새끼를 좋아하니. 그 새끼는 안돼.”
지민이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눈을 여러 차례 깜빡거렸다. 윤기와
이야기하면서 반쯤 술이 깼다. 놀라 아까 전 상황이 그런 일이 아니라는 해명도 못했다.
“…저 도윤이 형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거짓말 안 통해. 누구한테
배워먹었어, 이런 건.”
차 안 분위기는 무섭도록 냉각됐다. 지민은 저를 냉정하게 쏘아보는
윤기의 시선이 억울했다. 지민이 다시금 외쳤다.
“진짜예요! 거짓말 아니에요!”
“네가 연애하는 거 안 막아. 대신
다른 놈으로 알아봐.”
“다른, 사람이요…?”
“어.”
“…제 감정도, 연애도
부사장님한테는 그저 관리해야 할 대상이에요?”
윤기와 지민의 시선이 맞부딪힌다. 지민이 입술을 꾹 물었다.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윤기였다.
“…아무튼 걘 안돼.”
그 말을 끝으로 윤기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지민에게 손짓했다.
“내려가. 술 깼나 보네.”
데려다 줄게. 말하며 윤기가 지민을 밀어낸다. 지민은 윤기가 너무나도 야속했다. 접어야지, 접어야지 하면서도 끝내 품고 있던 마음이 상처 받았다. 바늘로 콕콕
쑤셔지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겪는 사랑은 처음으로 아린 슬픔까지 겪게 했다. 서글픔으로 지민의 턱에 주름이 진다. 그러나 곧 서글픔은 또 용기로
바뀌어 지민을 부채질했다. 이렇게 억울할 수는 없다.
“저 좋아하는 다른 사람 있어요. 진짜예요.”
진심은 한번 비집고 나오니 순식간에 흘러나왔다. 아직 반정도 남아있는
술 기운의 탓도 있었다. 지민은 저질렀다.
“부사장님 좋아해요.”
온 진심을 담은 까만 눈이 윤기를 곧게 올려다본다. 지민은 그대로
다시 윤기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증명하듯 입술이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