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Philippe Brun & Django Reinhardt - Bouncin' Around >
여러분 오늘 잘 지냈어요? 하준과 정국, 그리고 지민이 라이브 방송을 켰다. 연습실 바닥과 같은, 늘 보이던 배경이 아니니 거기 어디냐는 덧글이 빗발쳤다. 아 여기 새로운 숙소예요. 저랑 지민이 형이 룸메이트! 정국이 방긋 웃으며 소개했다. 하준이 형은 혼자 써요. 이담이 형이랑 의성이 형이 룸메이트. 이제 저는 가사도 쓰고 작업을 해야할 게 많아서 혼자 쓰게…. 맞아요. 하준이 형 성격 때문에 혼자 쓰는 거예요. 정국이 냉큼 끼어들어 하준의 말을 잘랐다. 아이구, 우리 막내 기특하네. 하준이 입만 웃고 눈은 웃지 않은 채 정국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넵, 다른 덧글 읽어보겠습니다. 정국이 하준을 피해 읽었다.
“지민 오빠 나 26살인데 결혼하자.”
“…스물 여섯이요? 그런데 제가 왜 오빠예요?”
“미래에서 오신 분이야. 거기선 네가 28살이야. 오빠 맞지.”
하준이 다음 덧글을 읽었다. 손 하트 해줘요. 네, 하트. 끝말잇기 게임 해주면 안돼요. 네, 지금은 좀 힘들 거 같아요. ENG PLZ. 정국아 한 팔로 물구나무 보여줄 수 있어요? 뒤에 뭐 있어요. 별 이상한 단어와 문장이 난무하는 덧글창 사이에서, 지민은 튀어나온 나이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딴 생각을 하나 했다. 26살에도 내 팬이 많나? 그럼 9살 차이도…?
“지민이 형. 왜 귤 껍질을 먹고 있어요?”
“…엉?”
지민은 귤을 입에 앙 문채 어벙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사과마냥 으적으적 먹어대니 과즙이 통통한 입술을 타고 주르륵 흐른다. 옷 앞부분이 다 젖고 손이 축축하다. 라이브에 그 모습이 그대로 송출되었다.
“…네, 여러분. 귤 껍질이 몸에 좋은 거 아시죠.”
지민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슬그머니 입에 물었던 귤을 놓았다. 그날 찍힌 영상은 레전드가 되어 팬들의 계정을 떠다녔다. 귤 먹방 걔, 낑깡요정 등의 이름으로. SNS에서 캡처된 장면을 본 지민은 책상에 엎어져 콩콩 두들겼다. 아 망했어. 멋있는 모습만 보여줘야 하는데에. 정국이 위로 아닌 위로로 지민을 달랬다. 괜찮아요. 형은 이렇게 해도 아이큐 꼴등 안 나오잖아요. 내가 나왔지. 고마워 막내야….
지민의 일상은 감정을 자각한 이후 사정없이 망가졌다. 밥 먹다가도 숟갈을 든 채 멈췄고, 갑자기 한숨을 푹푹 쉬며 침울해 했다가 미친 사람처럼 허허 웃기도 했다. 연습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춤을 추는데도 민윤기 생각이 드문드문 들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망가뜨리는 거라면 왜 그 누구도 경고를 해주지 않았는가. 애먼 원망까지 들기 직전이었다.
지민은 연습실에 쓰러지듯 누워 고민했다. 내 첫사랑이 이뤄질 가능성….
“…….”
바닥에 머리를 꿍 박았다. 상대가 부사장님? 볼 때마다 어린애 취급을 하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보겠는가. 만날 때마다 밥만 한 가득 먹이고 놀이방 어린이 다루듯 구는 윤기의 태도를 떠올려보았다. 차라리 다시 데뷔를 한번 더 하는 게 가능성 있지 않을까.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지민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끊임없이 윤기에게 날려대던 문자도 멈추고 말았다. 포기해야 하나? 하지만 부사장님은 내 팬이라고 했는데. 가능성이 작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아련한 첫사랑에 빠진 소년 모드로 갈팡질팡하던 때였다.
똑똑, 연습실 문을 누군가 노크한다. 네에. 지민이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매니저였다.
“정국이 밥 먹으러 간다는데 왜 같이 안 갔어?”
“아 저 별로 배가 안 고파서요.”
그리구 관리도 좀 해야 돼요. 지민이 배를 문질러 보였다. 매니저는 뱃가죽밖에 남지 않은 마른 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거기서 더 뺄 살이 어디 있어. 먹어도 돼, 지민아.”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형.”
지민의 이상 증세는 매니저의 눈에도 들어왔다. 삼시세끼 챙겨 먹이고 스케줄을 같이하며 붙어 다니다 보니 모를 수가 없다. 지금도 저렇게 넋을 빼고 있던 걸. 큼, 헛기침을 하며 매니저가 슬쩍 떠보았다.
“요새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뭐 작은 거라도 괜찮으니까…형은 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말이야.”
“고민이요? 딱히 없는데.”
“그래? 그럼 뭐…언제든 괜찮으니까 생기면 형한테 말해줘.”
지민이 슬쩍 눈치를 살핀다. 매니저는 평상시에도 이런 종류의 멘탈 관리를 해주곤 했다. 옳다구나. 매니저가 이어 냉큼 낚시바늘을 던졌다. 부담 가질 필요는 저언혀! 없고. 알지 형은 항상 지민이 네 편인 거. 편하게 해, 편하게. 알죠. 형이 얼마나 저희를 열심히 돌봐주시는데…. 결국 지민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제가 아니구 친구 이야기인데요.”
“친구?”
“네, 음악방송에서 인사한 친구예요.”
“그 친구 뭐.”
다행히 매니저는 순순히 믿는 듯싶었다. 지민은 잠깐 숨을 길게 쉬었다.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는 연기가 필요하다. 가능한 평범한 얼굴로, 정말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 친구가 자기보다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을 좋아한대요.”
“몇 살이나 많은데.”
“한…9살?”
“뭐?!”
시작부터 반응이 안 좋다. 매니저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방송에서 만난 거면 같은 아이돌 친구 아니야?
“허 참. 꽃다운 나이인데 뭐가 모자라서. 상대는 누군데. 방송 선배?”
“선배는 아니래요.”
부사장님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재벌? 스폰서라고는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되고. 사실 스폰이라는 말도 이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돈 많은 후원자. 더 순화하면 잘생긴 남팬…. 지민은 되는대로 떠올리다 대충 얼버무렸다.
“회사래요.”
“회사? 설마 소속사? 프로듀서?”
“아뇨. 임원 쪽에 가깝다고….”
“미쳤네, 미쳤어.”
매니저가 팔짝 뛰었다. 회사 임원이? 손을 뻗쳐? 아이돌이라면 안 좋은 기회로 빠질 기회가 많았다. 예쁘고 어리다는 이유로 접근하는 덜 떨어진 새끼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 그걸 연예계의 풍파로부터 지켜주진 못할망정 본인? 완전히 쓰레기다.
“당장 헤어지라고 해! 회사 임워언? 그런 회사는 싹 다 망해버려야 해. 환멸이 난다, 환멸이 나. 그런 놈들 때문에 이 업계가 더럽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나는 거야.”
대체 어디 소속사래. 신고해버릴까 보다. 분노하는 매니저에 지민이 흘끔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추가했다.
“친구 말로는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라고 하던 걸요.”
“뭐가 안 나빠. 사지멀쩡한 회사 임원이 9살 어린 애를 데리고 놀고 있는데. 아이돌 생활 응원해주진 못할 망정 오히려 앞길을 가로막고 앉아있네.”
“어…활동도 도와주신다던데…엄청 다정하게 대해주신다고….”
“당연히 앞에서는 좋은 척, 착한 척 다 하겠지. 쓰레기가 대놓고 얼굴에 ‘나 쓰레기예요’ 써붙이고 다니겠어. 그게 바로 세뇌야, 세뇌. 정상인은 애초에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애랑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렇게 어린애한테 껄떡거리는 건 그 나이대 무리에서 하급이라 그래. 아무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매니저는 이미 어디 불륜 프로그램 사연이라도 보는 것마냥 혀를 쯧쯧 찼다. 아주 몹쓸 놈이야. 지민은 더 이상의 실드를 펼치지 못했다. 나이차이가 그만큼 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윤기는 순진한 아이돌을 꼬신 죽일 놈이 되어있었다. 매니저가 혹시나 염려했다.
“아직 만나는 건 아니지?”
“…네.”
“천만다행이네. 친구한테 당장 전해. 어지간하면! 마음 바로 접으라고. 만약 그렇게 만나잖아? 그럼 무조건 나이 어린 사람이 손해 보는 거야. 그 아름다운 청춘에 늙은 사람을 왜 만나니. 인생 망치는 지름길이야.”
“인생까지 망치는 걸까요…?”
“당연하지! 완전히 망치냐, 반만 망치냐의 차이야.”
괜히 이상한 놈 만나면 인생이 피곤해진다. 매니저가 호언장담을 했다. 나중에 그 사람보다 훨씬 잘난 사람 만날 거야. 고마워요 형. 고민 들어줘서. 친구한테 잘 전해 줄게요…. 매니저는 텐션이 더 다운된 지민이 안쓰러웠다. 친구가 이상한 길로 들어서고 있으니 착한 지민의 성격에 당연히 신경이 쓰이겠지 싶다. 그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지민이 너 앞으로 하나 연락이 왔는데.”
“연락이요?”
“하도윤씨한테서 왔어.”
“…선배님께서요?”
매니저는 들어온 요청을 설명했다. 작업 하나를 같이 하고 싶다고 하던데. 채널에 올리는 컨텐츠인데 같이 춤 추는 거라네. 지민은 먼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좀 놀랐다. 당연히 스쳐 지나가는 말일 줄 알았다. 하도윤과 함께 출연하고 싶은 사람 수만 세도 어느 소행성을 꽉 채우고도 남을 거다. 아마 지민의 차례는 보이지도 않을 거다.
“어떻게 할래?”
물어볼 이유가 있나. 그룹 이름을 알리는 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해야죠.
***
민윤기는 썩은 얼굴로 기르는 아이돌의 생활패턴 보고서를 들었다. 오늘 저녁 먹지 않음. 전날 저녁 먹지 않음. 점심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활동기간은 좀 더 남지 않았습니까. 비서가 냉큼 대답했다. 이미 엔터사 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뉴위크의 스케줄을 줄줄 꿰고 있었다. 네. 아직은 컨셉 회의 기간이라 꽤 기간이 남았습니다만. 지민씨 개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윤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펜을 딸깍였다. 그는 이내 책상 위에 올려둔 폰을 노려보았다. 지민의 연락으로 매번 바쁘게 반짝이던 화면이 조용했다. 화보 촬영 날만 해도 넋을 빼고 있었지, 상태가 나쁘진 않았는데 돌연 그의 아이돌이 의기소침하게 변해버렸다. 이제와 다시 무서워서 벌벌 떠는 건 아닐 테고. 어차피 박지민은 긴장으로 가득 찼던 첫만남을 빼곤 그를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스케줄이 많나. 윤기는 손에 들어와있는 지민의 스케줄 표를 점검했다. 컴백 준비에 돌입하면서 외부 스케줄은 대거 빠져있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결국 무표정한 새하얀 얼굴에 미묘한 언짢음이 생겼다. 그는 호출한 비서에게 새로운 일 더미를 던져주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박지민이랑 스케줄 잡아보세요.
일정은 빠르게 잡혔다. 늘 그렇듯 룸 형식의 식당이었다. 아주 값비싼 레스토랑으로 몇 달 전에나 예약을 잡아야만 하는 곳이었다. 지민은 어린 왕자처럼 별 같은 미소와 함께 반짝 웃으며 등장했다. 부사장님! 이제는 사복을 입어도 아이돌 티가 났다. 끝없는 관리 덕분이다. 윤기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길 안 잃고 잘 왔네.”
“…놀리시는 거죠.”
“이제 알았어?”
지민이 입술을 부 내밀고 샐쭉 눈을 흘기더니 이젠 미약하게나마 반박했다.
“저도 이제 다 컸고, 부사장님이 이렇게 하실 때 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요.”
윤기는 작은 얼굴에 옹골차게 들어찬 이목구비가 억울하다며 열심히 움직이는 과정을 구경했다. 이 반응 때문에 놀리고 싶어진다는 걸 지민은 아직도 혼자 모른다. 그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져 그는 작게 웃었다. 그래, 알았어. 일단 먹고 싶은 거 시키지. 굶어 죽기 직전이야.
메뉴는 늘 그랬든 익숙하게 윤기가 주문했고, 지민은 말똥말똥한 얼굴로 그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두 사람의 앞으로 정갈한 한 상이 등장했다. 커틀러리로 스테이크를 썰며 윤기가 예고장도 없이 바로 직구로 질문했다.
“요새 뭐 때문에 그래.”
“네? 저요?”
지민이 포크를 물고 우물거렸다. 앞뒤로 문장을 자세히 추가해주는 선행을 보여주면 참 좋으련만, 당연하게도 윤기는 그러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민의 표정이 순진무구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넋을 빼고 다닌다며. 밥도 잘 안 먹고. 방송 중에도 넋을 빼고 귤도 통째로 씹어먹고 있던데.”
아…그걸 보셨구나. 그 수치스러운 방송만큼은 윤기가 모르길 빌었는데. 지민이 눈을 도로록 굴리기 시작한다.
“그건 그냥 라이브에 있는 흔한 실수….”
뭐든 다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윤기의 시선이 지민을 쿡 찌른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절대 넘어가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끙. 거짓말은 어차피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연기에는 재능도 없고. 지민이 결국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요. 부사장님은 아이돌이 연애하는 거…어떻게 생각하세요?”
“…연애?”
윤기가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던 손짓을 멈췄다. 완전히 다른 방향의 주제였다. 기껏해야 안무 연습이 잘 되지 않아요, 다음 컴백이 긴장돼요 같은 문제라고 그는 추측했었다. 잔뜩 긴장한 지민이 작은 손으로 포크를 꼭 쥔다.
“왜. 너네 그룹 멤버들이 연애라도 한대?”
“아뇨. 멤버들이 아니라….”
지민이 뒷말을 흐렸다. 윤기는 짧게 침묵했다. 주제가 예상을 벗어나다 못해 윤기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흘끔거리는 지민의 시선이 주체가 누군지 알려준다. 박지민과 연애. 그는 아예 커틀러리를 내려놓았다. 심판 판정이라도 기다리듯 얼어있는 지민을 보고는, 무던한 어조로 말했다.
“뭐 할 수도 있지. 일만 똑바로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다행이다. 지민의 안색이 눈에 띠게 맑아진다. 윤기는 묵묵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툭 물었다.
“상대는 누군데.”
“상대요? 그건….”
지민이 우물쭈물거린다. 귓볼이 조금 발갛게 물들더니,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영락 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았다. 그것도 이제 막 열매를 맺은 풋사랑. 발갛게 익은 복숭앗빛 뺨이 소년답게 풋풋했다.
“아무리 부사장님이라도 말하기 쪼끔…그래요.”
허. 윤기는 기가 찼다. 그새 일주일 사이에? 어떤 놈이랑 눈이 맞고 온 거지? 윤기는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지민과 관련된 보고를 머릿속으로 헤집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스케줄. 거기에 추가된 거라고는. 그는 며칠 전 대형기획사에서 지민을 찾는다는 비서의 말을 기억해냈다. 웬 콜라보. 뜬금없는 제안이라 영 석연치 않았지만, 외부 작업이 지민에게 문제가 될 부분은 없기에 수락했던 기억이 있다. 그 건은 자르지 말고 진행하세요.
지민은 윤기의 무덤덤한 반응에 힘을 얻은 건지 질문을 하나 더 날려왔다.
“그럼 혹시…부사장님은 나이차이 나는 건 괜찮으세요?”
“그건 왜.”
“네? 아니 뭐.”
지민이 눈을 휘휘 굴렸다. 윤기는 대략적으로 들었던 하도윤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지민보다 많다는 것만 생각날 뿐이다. 어쩐지 그의 기분이 침전되어만 간다. 지민이 멈췄던 말을 이었다.
“나이 차이가 굳이…상관 있나 싶어서요.”
“그래서 5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5살이 뭐예요. 저는 15살도 상관 없어요.”
겁도 없는 지민의 발언에 아예 윤기는 말없이 지민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얘가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그러나 지민은 흘끔흘끔 윤기의 눈치를 보면서도 물러나긴커녕 불에 기름 들이붓는 멘트들을 날려댔다.
“음…10살? 아니면 9살도….”
지민이 윤기를 눈짓했다. 9살도 괜찮아요. 그러나 이미 윤기의 귀에 지민의 뒷말은 삭제처리 되어 들리지 않았다. 15살은 그저 기가 막혔는데, 차차 내려오며 괜찮다고 하는 걸 보니 진심인가보다. 윤기가 팔짱을 낀 채 헛웃음을 뱉었다.
“이게 진짜 막 나가네. 15살 많은 놈이 널 진심으로 아껴줄 거 같아? 그냥 어떻게 해보려는 속 시커먼 새끼들이지.”
“…그래도 그건 사람마다 다른 거잖아요.”
평소라면 죄송해요, 하고 물러났을 지민이 팽팽히 맞서왔다. 단호한 윤기의 시선에도 꾸역꾸역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또래 중에 이상한 사람 만나는 거보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 좋은 사람 만나는 게 나은 거 같아요.”
“나이 많은 놈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무슨 수로 알게.”
거기서는 지민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렇게 걱정해주는 걸 보면 부사장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현실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실토 했다간 이대로 끌려 나가 영영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지민이 대답을 못하니 윤기가 그것 봐라, 하는 식으로 냉정히 쏘아붙였다.
“이게 동화인 줄 알아? 무슨 동화 속 왕자라도 만났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딴 거 없어. 너한테 뭐 하나라도 뜯어내고 싶은 새끼지.”
지민이 입술을 삐죽였다.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던 테이블은 이제 냉기가 감돌았다. 윤기는 스스로 뱉어 놓고 미간이 지끈거렸다. 쓸데없이 어린 애한테 과민반응이나 했다. 상태 케어한다고 불러내놓고는 더 진창에 처박아 버리다니.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하나. 달래는 법은 애초 모른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테이블을 톡톡 두들긴다. 그 사이, 지민이 다시금 입을 뗐다. 근데요, 하고.
“그래도 이미 만났어요.”
여기. 지민이 테이블에 올려둔 윤기의 손을 콕 찔러왔다.
“왕자는 아니어도 호박 마차로 바꿔주는 요정은.”
배시시 작게 웃는다. 눈웃음이 말랑하게 반달을 그리니, 눈 밑살이 통통하게 오른다. 갓 쪄 나온 떡 같은 웃음이었다.
“제 요정님.”
윤기의 손을 콕콕 건드리는 손이 작다. 어떻게 보면 지민의 말은 어느 정도 맞다. 민윤기가 망돌 박지민을 끌어올려 입히고, 먹이고, 가꿔 놓긴 했다.
윤기는 지민의 손이 닿은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도련님 소리와 송영의 황태자 소리는 들어봤어도 요정이라니. 그것도 요정 대모 같은. 어이가 없기도 한데, 맞은 편에서 애교 있게 웃는 얼굴을 보니 목구멍에 걸린 까칠한 말들이 안 나온다. 얼음 같은 말을 쏘아내도 따뜻하고 무해한 말로 답변해오는데, 감히 무어라 할 수 있으랴. 그런 점에서 박지민은 민윤기의 말문을 막는 재주를 타고 났다.
더군다나 윤기의 말문을 막는 포인트는 하나 더 있었다. 애교 가득한 얼굴이 심각하게 귀엽다. 열 받았던 대화는 넘어간 채,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요정이면 왕자는 얼마나 대단한데.”
“제가 왕자 할게요!”
지민이 해맑게 외쳤다. 요정과 왕자. 윤기와 자신을 가리키며 말한다. 참나. 윤기의 협소한 반응에도 지민은 지지 않았다.
“원래 동화에서도 요정이랑 왕자는 대놓고 안 만나잖아요.”
동화 비하인드에서나 만날 거 아니에요? 우리도 맨날 몰래 만나니까…그리고 부사장님은 하얘서 진짜 요정 같아요! 윤기는 머리를 한번 털 듯 흔들었다. 이대로 넘어가려는 걸 안다. 대형 폭탄 같은 화제를 던져놓고 마무리하려는 속셈인 걸 알지만.
“밥이나 마저 먹어.”
결국 넘어간다. 윤기는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스테이크를 써는 지민을 가만 놔두었다. 그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간다. 어떤 새끼가 됐든, 지켜주면 그만이다. 마치 지민의 말대로 요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