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무슨 상황이냐면 자신이 취급 주의 대상인 것마냥 냄비에 담겨 있는 상황을. 하얗고 작은 털뭉치는 민윤기의 냄비에 갇혀있었다. 냄비는 라면을 끓일 때나 쓰는 용도였다. 어떻게 나처럼 멋지고 예쁘고 귀여운 고양이를 냄비 안에 처박아둘 수가? 난감한 얼굴의 남성이 자신을 들어올릴 때까지만 해도 이 꼴이 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냐앙!
대화로 하자. 날 꺼내라 인간아. 듣고 있어? 듣고 있냐구. 지민이 냄비 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댔다. 안 들리나? 대체 이 뚜껑은 왜 안 열리는 거야? 박지민이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울어대는 한편, 민윤기의 사정도 좋진 못했다. 야 인마. 가만히 좀 있어 봐. 그는 패닉이었다. 대체 어디서 고양이가 내 가방에 탑승한 거지?
민윤기는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 공사장에 갔을 때 가방은 탈의실 안에 벗어두었다. 왜 갈수록 마르냐며 사탕이라도 먹으라고 챙겨준 최씨 덕분에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가방은 텅 비어있었다. 대중교통 안에서는 계속 들고 다녔으니 그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호텔뿐이다.
“…….”
생각해보니 탈의실에서 나올 때 가방이 조금 더 묵직했던 것 같다. 대체 5성급 호텔에 고양이가 어떻게 돌아다닌 거지. 심지어 탈의실로? 윤기는 어이가 없었다. 억울하게 사라진 일당 대신 고양이를 받아오다니. 이 무슨. 인과관계를 굴려본 그는 당장 호텔에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여전히 들썩거리는 뚜껑을 힘을 줘 누르고 있으니, 잠시 후 관계자가 전화를 받았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예식장 아르바이트 했던 사람입니다.”
[아 네, 무슨 일로 전화셨을까요?]
“퇴근하고 가방을 확인해봤더니 고양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호텔에서 온 모양입니다.”
[…네?]
직원은 이해하지 못했다. 고양이…가요? 저희 호텔에서요? 윤기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직원에게 나름대로 길게 풀어 설명했다. 예,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나왔는데요. 집에 들어오니 가방에 고양이가 들어와있습니다. 탈의실에서 들어왔어요. 약간의 침묵 뒤. 직원이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상냥한 목소리에서 이미 수백 명의 진상을 맞이하며 쌓은 노련미가 발산됐다.
[아~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안 믿으시는 거 같은데 진짜입니다.”
[제가 왜 믿지 않겠어요. 당연히 믿습니다. 다만 저희 호텔 규정상 반려동물은 동행이 불가능해서요. 아쉽지만 가방에 있었다던 고양이는 호텔이 아닌 다른 곳에서 고객님 가방에 탑승한 게 아닐까 합니다.]
“정말 호텔에서 올라탄 게 맞습니다.”
[길거리에 있던 고양이가 아닐까요?]
윤기는 잠시 봤던 지민의 외양을 떠올렸다. 아주 잘 가꿔진 털과 초롱초롱한 눈망울. 때깔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척 보기에도 누군가 애지중지 돌보는 고양이 같았다. 호텔까지 데려올 정도면 오히려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돌보는 고양이 맞습니다. 호텔에 데려온 손님 중 한 분이겠죠.”
[…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전화는 시끄럽게 이어졌다. 지민은 잠시 울던 목소리를 삼키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작아 매끄럽지는 않아도 몇몇 단어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민윤기? 호텔? 가방? 뚝뚝 끊긴 단어를 연결한 끝에 지민은 한 가지 사실을 조합해냈다. 술에 대차게 취한 자신이 이 남성, 정확히는 민윤기라는 이름을 가진 일면식 하나 없는 남자의 가방에 올라탔다는 것.
-냥….
망했다…. 지민은 망연자실하게 털썩 냄비 안에서 엎어졌다. 매니저 형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매니저를 떠올리며 지민은 폭신한 분홍색 발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때렸다. 미쳤어, 미쳤어. 그 놈의 술이 문제다. 새끼고양이가 일렁이는 눈으로 반성했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으리. 내가 또 마시면 개다.
우선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지민은 민윤기의 집에서 탈출할 방법을 고민해보았다. 당연히 폰은 없으니 매니저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고,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지민은 윤기의 옷과 소정의 돈을 훔쳐 밖으로 나선 다음 매니저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좋아.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결연에 찬 눈으로 지민이 냄비뚜껑을 노려보았다. 열리기만 하면 최선의 애교를 부려 혼을 쏙 빼놓고 새벽에 탈출한다.
“CCTV도 확인이 안 된다니, 대체 그럼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딱딱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화를 낸다. 어쩐지 전화가 잘 풀려가지 않는 듯했다. 이내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남자가 하아, 한숨을 쉬는 게 들린다. 내가 그렇게 쉬고 싶다…. 고양이가 울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냄비 한쪽이 빼꼼 열린다. 냥? 지민이 틈으로 졸졸 쫓아가 올려다보았다. 윤기와 아기고양이의 눈이 마주쳤다.
-냐앙~
지민이 과도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귀를 쫑긋거렸다. 인간, 이렇게 귀여운 날 봐라. 어서 꺼내주고 싶지? SNS에 올라가면 조회수가 폭발할 귀여운 고양이 영상으로 길이 남을 장면이었다. 윤기는 그 장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
드륵. 다시금 뚜껑을 닫았다.
-…냑?
도로 컴컴한 어둠에 갇힌 지민이 벙 쪘다. 지금, 지금 날 보고 다시 닫은 거야? 밖에서 민윤기가 미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오…너 어디서 왔냐.”
그 말 이후 밖은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남자가 무언가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지민의 감정은 널을 뛰기 시작했다. 단 한번도 이상형 아이돌을 뽑으면 빠진 적이 없는 내가, 아무리 사고를 쳐도 네 고양이 모습 한 번만 보면 용서할 거 같단 소리를 들은 내가, 작년 데이트하고 싶은 아이돌 1위, 연말을 함께 보내고 싶은 아이돌 1위, 최고 직캠 조회수 1억에 빛내는 이 내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충격은 새로운 감정을 불러왔다. 바로 괘씸함이었다. 어디 이 재수 없는 인간의 얼굴을 봐야겠다.
고양이 밥, 물. 밖에서 몇몇 단어들이 추가적으로 들려왔으나 분노에 싸인 지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열기만 해봐라. 집요하게 냄비 뚜껑을 노려보고 있으니. 마침내 뚜껑이 열리고 환한 빛이 들어왔다.
-냐앙!!
지민이 펄쩍 뛰어나갔다. 그러나 지민은 계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냄비가 올려져 있는 위치였다. 지민은 몸이 붕 떠오른 것과 동시에, 낮은 거실바닥이 아닌 주방 조리대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높이는 지민과 같은 고양이, 즉 아직 술이 반쯤 깼고 평소 인간의 모습으로 생활하여 수인 습성이 아주 낮은 고양이에게는 사망 선언과도 같은 위치였다.
이대로 추락하면 끝이다. 최소 다리나 팔 하나는 부러질 거다. 머리부터 박는 순간 그 뒤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지민이 비명을 질렀다.
-냐, 냥!
안돼! 눈을 질끈 감고 다가올 통증을 예측하며 바짝 몸을 말았다. 지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커다란 손이 급하게 튀어나왔다. 커다랗고 유독 핏줄이 툭툭 불거진 손이 작은 새끼고양이를 받쳤다. 양손을 모으니 지민의 고양이 모습이 빠듯하게 차올 정도였다. 윤기는 그대로 복실한 털뭉치를 받친 손을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괜찮냐?”
고양이로 변해 한껏 예민해진 코에 윤기의 향이 밀려온다. 인간은 고유한 체향을 가지고 있는데, 윤기의 것은 묵직하면서도 포근했다. 낮은 음성과 자신의 몸을 받치는 따뜻한 온기에 지민이 감았던 눈을 찬찬히 열었다. 마르고 하얀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다르게 눈에는 난감한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무슨 고양이가 이렇게 순발력이 없지?
“…….”
-…….
지민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새끼고양이의 가슴팍이 옅게 오르락내리락한다. 묘하게 나른하면서도 냉정해 보이는 얼굴은 소속사에서 찾고 있는 아티스트에 적합했다. 신인개발팀이 봤다면 미친 듯이 쫓아가 어떻게든 명함을 내밀어 오디션을 보게 했을 얼굴이다. 윤기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더니 지민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빳빳하게 굳은 고양이를 톡톡 건드린다.
“왜 말을 안 하지? 야.”
-…….
“너무 놀랐나? 괜찮냐.”
윤기가 허리를 굽혀 지민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정신 차려봐라, 야. 말하며 후, 작은 입김을 분다. 윤기의 향이 몰려온다. 지민은 그 순간 심장이 발 밑으로 쿵 떨어졌다. 맥박이 귀 뒤에서 쿵쿵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아까의 충격은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새로운 충격이 지민을 휩싼다. 머리가 멍하고 신체가 통제 불능이 된 것처럼 움직일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고양아.”
아까는 잘 울더니 왜 이래. 미묘하게 눈가를 좁힌 윤기가 손을 뗀다. 안되겠군. 무언가를 하려는지 손길이 지민으로부터 떨어진다. 지민이 급하게 윤기의 손가락을 놓치기 싫다는 듯 졸졸 쫓아갔다. 윤기가 멈칫했다. 뭔지를 모르겠네. 중얼거린 그는 지민을 들어 다시금 냄비 안에 넣어놓았다. 냄비의 쓰임새는 이제 고양이 울타리가 되었다.
“잠시만 있어봐라.”
뭔가를 폰으로 검색한 윤기가 멀어진다. 지민은 울지도 못했다. 술에 아직도 취해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수인화를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고장 난 것처럼 심장이 콩닥거리고 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윤기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뭔가를 찾더니 그것을 들고 다시 다가왔다. 수건이었다. 윤기는 다짜고짜 수건을 지민의 위로 씌웠다.
-…냥!
지민이 팔짝 뛰었다. 안돼! 얼굴 안 보여! 이걸 왜 씌운 거야! 윤기는 꼼지락거리는 지민을 붙잡았다. 야, 야. 가만히 있어. 또 떨어지고 싶어?
“고양이들은 까만 걸 좋아한다는 게 얘는 왜.”
야. 잠깐, 잠깐. 윤기가 결국 깽깽거리는 지민을 이기지 못하고 수건을 벗겨주었다. 냐앙! 지민이 푸하 숨을 쉬며 윤기를 말똥말똥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이게 왜 얌전해졌지? 냄비에 가둬둘 때만 해도 냥냥거리고, 열자마자 튀어나와서 사고가날 뻔한 고양이는 수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인터넷을 보니 길고양이들은 사나운 경우가 많다던데, 역시 이 녀석은 호텔에서 손님이 데려온 거다. 호텔과 싸운 채 끝이 난 전화를 상기하며 윤기는 턱을 긁적거렸다. 그래도 얌전하니 다행이군. 생각하며 고양이를 감싸듯 수건을 둘러주었다. 고깃집 오픈 기념 이벤트로 받은 수건에 둘러싸인 작은 고양이는 머리만 내밀고 있게 됐다.
윤기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고민하다가, 손가락 하나를 뻗어 머리 사이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고롱고롱 숨쉬는 작은 고양이는 얌전하게 윤기의 손길을 허락했다. 손에 닿는 보드라운 털의 감촉이 어색하다. 누군가의 애정을 가득 받아서인지 무척이나 부드럽다. 윤기는 생전 처음 만져보는 따끈하고 말랑한 온기에서 어색하게 손을 뗐다. 큼. 괜히 헛기침을 했다.
“…착하네.”
고양이의 귀가 쫑긋 선다. 어딘가 눈이 조금 더 초롱초롱해진 것 같은 게…. 고양이가 야행성이라더니 맞는 말인가 보다. 윤기는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새벽이다. 내일 새벽부터 일을 나가야 하니, 지금 바로 자야만 했다. 서서히 몰려오는 피로로 몸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주인을 찾아주거나, 이 고양이를 어떻게 할지는 일어난 뒤 정해야 할 듯싶다.
“…….”
그대로 바닥에 요를 깔고 드러누우려던 윤기는 고양이를 보며 고민했다. 저렇게 놔두기는 좀. 고민 끝에 그는 고양이를 챙겨 침구 옆으로 데려왔다.
“대체 주인 놔두고 여기는 왜 왔냐.”
고양이는 윤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간 눈으로 바라보았다. 윤기는 지민을 옆에 내려두었다가, 약간의 갈등을 거쳐 냄비를 다시 가져왔다. 이렇게 작은데 혹시라도 자다 밟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고양이를 냄비에 담고 머리맡에 놓았다.
“거기서 얌전히 울지 말고 자라.”
-냥
아까까지만 해도 입을 꾹 닫고 있던 고양이가 대답처럼 운다. 조금 신기했다. 말을 알아 듣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렴. 한낱 짐승이 알아듣겠어. 윤기는 오늘 하루 감당 못할 사건들을 겪은 몸을 위해 이만 잠자리에 누웠다.
이 쥐구멍 같은 단칸방에 고양이라니. 아마 저 고양이는 민윤기가 가진 어떤 것보다 비싼 몸값을 가지고 있을 터다. 진창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려고. 피곤을 느끼며 윤기는 눈을 감았다. 부디 더 불행할 일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날 밤. 냄비에서 슬쩍 빠져 나온 고양이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잠든 윤기의 곁에 다가왔다. 잠든 얼굴을 내려보는 고양이의 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도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드디어 찾은 거 같다. 내 로맨스 연기력을 책임질 감정을. 두근거리는 가슴과 함께 고양이는 새벽 내내 윤기의 곁을 지켰다. 아무래도 바로 돌아가야 할 계획은 수정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