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The Rhythmic Eight - Umtcha, Umtcha, Da Da Da>
아이돌 커뮤니티에 새로운 뉴위크의 티저가 떴다. 반응은 뜨거웠다. 얘네 누구야? 미쳤네. 감성 뭐야. 소속사 직원 다 갈림? 한 명씩 새로운 컨셉의 짤막한 비디오가 올라올 때마다 사람들은 애네가 그 망한 코스프레 그룹이 맞냐며 눈을 의심했다. 하이틴 청량의 교과서 같은 그룹이 그 찐따 코스프레돌이었다고? 가슴이 웅장해진다. 뜨거운 인터넷 반응에 따라 소속사는 차례대로 기깔나는 컨셉의 사진과 영상을 풀어댔다.
그 결과 컴백은 성공적이었다. 티저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기대감은 타이틀 뮤비가 공개된 순간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듯한 저택과 푸르른 숲을 드나들며 잠 못자고 찍은 보람이 있었다.
ㄴ 로판 황태자님들이 이렇게 한국에서 아이돌 해도 되는 거임? 지금 나 빙의한 여주인공 됐다.
ㄴ 컨셉 돌았다. 청량 로판이라니ㅠㅠㅠㅠㅠ
ㄴ 얘네 누구임? 어떻게 이런 애들이 여태 못 뜸?
ㄴ 얘네 걔네잖아 메이크 콘서트에 개뜬금없이 나온 애들. 와 개미쳤다
ㄴ 하준 여보 오늘 제 데뷔탕트가 있는 날이에요.
ㄴ 가운데 까만머리 쟤 누구야? 입술 두꺼운 애
뮤비의 모든 장면이 조각조각 잘려 온갖 SNS를 휘젓고 실시간 트렌트를 장악했다. 앨범 공개 날. 지민은 멤버들과 안무 연습 촬영장에 둘러앉아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제발 뜨게 해주세요. 멤버 중 그 누구도 믿는 신도 없으면서 열심히 빌었다. 신은 됐고 누구 믿을만한 사람이라도 없어? 중간에 하준이 제안했다. 문득 하얀 얼굴의 스폰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냥…하다 보면 누군가는 듣지 않을까요? 지민의 제안에 멤버들은 아무나 절을 받으라며 연습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정상적인 제사 덕분인지 기적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타이틀곡은 발매와 동시에 20위권에 안착했다. 미쳤다. 지민이 입을 떡 벌리며 차트 순위권을 다시 확인했다. 이거 진짜 우리 곡 맞아요? 우리 노래 나오는 거 맞는 거예요? 멤버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느라 안무 연습영상 촬영이 중단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타이틀곡의 순위는 점점 오르더니, 염원을 달성했다. 마침내 10위 안에 들은 거다. 새벽에도 벌떡 일어나 순위를 체크한 지민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이불 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실신하듯 잠든 정국을 빼고 모든 멤버들이 각자의 잠자리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눈부신 결과물이었다.
팬싸인회도 다시 시작됐다. 한 사람이 또 열 번 오는 건가? 지민은 텅 비다 못해 조기종료 했던 마지막 팬싸인회를 상기했다. 오빠. 해체해도 오빠는 계속 좋아할 거예요. 가수 꼭 해주세요. 울먹거리던 팬과 같이 울먹이며 끝났었다. 그리고 그 팬은 6개월뒤 다른 가수를 좋아하게 됐다며 사진을 올려놨었다. 당시에는 많이 서글펐었지…. 이제는 아련해진 추억을 덮고 지민은 새로운 팬싸인회에 입장했다.
“지민아아!!”
팬싸인회를 꽉 채운 머릿수를 보며 지민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여러분 이거 진짜예요…? 울컥한 지민이 촉촉히 젖은 눈망울로 마이크를 양손으로 꼭 쥔 채 말했다. 어떻게 해. 복숭아가 말하네. 팬들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지민을 몽땅 담아냈다. 이후 그 사진은 눈물 젖은 복숭아, 우는데 너무 귀여워서 죄책감 들게 하는 짤, 개저씨 만드는 짤로 유명해진다. 전설로 남는 짤 생성의 시작이었다.
초반에 눈물을 글썽였던 지민은 그 뒤로 이어진 팬싸인회 내내 방긋방긋 웃었다. 팬들로부터 예쁜 말을 듣는 게 너무 좋았다. 지민아 널 본 순간 나 너무 행복해졌어. 이거 고양이 머리띠 쓰고 하트 한번만 해주면 안돼요? 태도 바른 아이돌은 진심을 담뿍 담아 응했다. 나두 널 만나게 돼서 너무 좋아, 고마워요. 하트 이거 이렇게 하면 돼요? 팬들이 가리키는 카메라 방향으로 눈웃음을 샐샐 쳤다. 내내 행복한 팬싸인회는 팬들이 지르는 진심 섞인 비명과 웃음소리들과 함께 끝이 났다.
팬싸인회 다음은 라디오였다. 디제이가 말했다.
“지민씨 이번에 가운데 흑발 춤선 예쁜 걔로 화제가 됐어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단 너무 영광이구요. 예쁘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럼 카메라로 한번 보여줘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준이 능청스레 끼어들었다. 다른 멤버들도 한번 보여달라며 부추겼다. 아 지금 여기서요? 당황하던 지민은 이내 곧장 일어나 안무를 짧게 선보였다. 쑥스럽고 민망한 얼굴에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잇, 너무 부끄러워요. 부끄럽다면서 카메라를 흘끔 본다. 해당 라디오 짤은 팬들이 피토하며 쓰러지겠다고 성토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 오빠 이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이 험한 세상 바깥에 내놓고 다닐 수 있나요. 지민 숨겨.
그 이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스페셜 클립 영상 촬영, 랜덤 플레이 댄스 촬영, 자체 예능 촬영, 뮤직비디오 리액션 촬영. 빙글빙글 돌아가는 아이돌의 스케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면시간 또한 줄어들었다. 30시간을 못 잤을 땐 머리가 멍한 기분이었고, 40시간을 돌파했을 땐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눈 뜬 채 서서 잠들기도 했다.
의성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인터뷰를 하면서도 웃었다. 하하 요단강 건너고 있지만 기쁩니다. 아주 기뻐요. 지민도 퀭한 얼굴이지만 동의했다. 그토록 꿈에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니 너무나도 행복했다. 무대를 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사랑하는 멤버들과도 계속 붙어있을 수 있게 됐고, 빚더미에 허덕거리던 사장님도 요새는 진심으로 웃고 다녔다. 지민을 괴롭히던 악몽 같던 현실이 모두 무지개 빛 꽃밭으로 변했다.
모든 스케줄은 컴백한지 3주가 지나니 그때야 잠잠해졌다. 매니저가 탈진하듯 숙소에 쓰러진 멤버들을 보며 기특해했다.
“얘들아 너무 수고했어.”
아무도 대답이 없다. 이미 좀비 상태구나. 매니저는 어제 제주도에서 스페셜 무대를 뛰고 온 멤버들을 이해했다. 그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기쁜 소식이 있다!
“앞으로 3일은 스케줄 비어있으니까 푹 쉬면 돼.”
“…진짜 죽기 전에 쉬게 해주시네요.”
하준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영영 쉴 뻔 했어요. 매니저는 허허 웃으며 그게 성공의 증거라고 푹 쉬라는 말과 함께 볼 일이 있다고 숙소를 나섰다.
“지민이 형! 형은 뭐할 거예요?”
정국이 우다다 지민에게 다가왔다.
“부산 갈 거예요? 갈 거면 나랑 같이 가. 나도 부모님 만나러 가려고요.”
“난 글쎄…그냥 숙소에 있을 거 같아. 부모님이 여행가셔서.”
3일전 부모님과 통화했을 때, 딱 이번 주에 부부 동반여행 모임이 잡혀있다고 하셨었다. 아빠가 가서 우리 아들 투표해달라고 하고 올게. 최소 30표는 얻어오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떠났다.
“그럼 우리 집에 같이 갈래요?”
정국이 제안했다. 지민은 정국의 부모님과도 친했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몇 번이나 인사를 드리며 새로운 아들과 마찬가지로 지민을 대해주곤 했다. 그럴까? 사람과 만나는 일을 좋아하는 지민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머릿속에 하얀 피부의 어떤 사람이 순간적으로 비집고 들어온 탓이다. 지켜보고 있을게. 낮은 음성이 되새김질 된다. 그와 동시에 지민의 귓가가 조금 발갛게 푹 익는다. 그를 못 본 정국은 당연하다는 듯 폰을 열었다.
“갈 거죠? 엄마한테 형도 간다고 할게요.”
“잠깐만!”
왜요. 정국이 뭐냐는 듯 본다. 지민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난 이번에 숙소에 있을게. 너 혼자 다녀와. 안부 전해드리구!”
“진짜요? 같이 안 가고?”
“응.”
“괜찮겠어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하준이 형도 같이 숙소에 있는데.”
“그러니까 괜찮냐고 한 건데.”
“뭐라고 인마?”
얌전히 죽은 듯 누워서 폰을 뒤적거리던 하준이 눈을 치켜 떴다. 앗 실수. 정국이 순한 눈망울로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빨리 짐 챙겨야겠당. 부산 가서 삼겹살 먹어야지. 그 사이에서 지민은 어쩐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폰을 열어보았다. 어떤 연락을 무척이나 기다리며.
***
멤버들이 3명이나 빠진 숙소는 조용했다. 지민은 혼자 떠드는 편이 아니었고, 하준 역시 쉴 때는 말을 하지 않는 주의였다. 쉴 때는 시체처럼. 그것이 그의 모토였다. 두 사람이 마주 할 때는 식사를 할 때가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애초 지민의 신경은 온통 오지 않고 있는 연락에 몽땅 쏠려 있어, 하준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쉬는 날이 이제 내일이면 끝나는데…. 아직까지도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없다. 지민은 걱정이 되었다. 꼭 윤기를 보고 싶었다. 폰을 흘끔 쳐다보았으나 여전히 잠잠하다.
“하….”
지민이 아쉬운 숨을 내뱉으며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번에도 민윤기와 관련된 생각이었다. 부사장님은 왜 나한테 잘해주실까? 아무리 고민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스폰이라하면 오고 가는 게 있어야 하는데, 민윤기는 정말로 자신에게 바라는 게 없어 보였다. 세상에는 그런 호의도 있는 걸까? 무조건적으로 애정을 퍼부어주는.
하준은 한숨을 폭폭 내쉬고 있는 지민을 확인했다. 어디서 상사병이라도 걸려온 꼬라지다. 참지 않는 성격대로 대놓고 질문했다.
“뭐 연애하냐?”
“네!?”
지민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식겁했다.
“무,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그래요 형.”
“근데 얼굴 꼴이 왜 그래.”
“제 얼굴이요…? 평범한 거 같은데….”
“어. 곧 승천할 것처럼 허연 게 평범하네.”
배고파서 그런가 봐요. 그럼 다행이고. 지민이 눈을 피하며 부엌으로 자리를 내뺐다. 재벌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멤버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들키면 난리가 날 터였다. 형 라면 드실래요? 다행히도 하준은 크게 관심이 없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3개 끓여라. 지민이 다 끓인 라면 그릇을 들고 숙소 거실로 날랐다.
지민은 젓가락질을 하면서 흘끔 하준을 보았다. 하준은 남 일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직구로 쏘는 개차반 성격 덕분에 걸린 여러 시비에서 살아남느라 기가 세기도 했다. 그래도 형이니까. 지민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질문했다.
“형 세상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는 걸까요?”
“갑자기 그게 뭔 헛소리야.”
“아니 별 건 아니구 그냥 궁금해서. 어제 영화 보는데 나오더라구요.”
“드디어 네가 작곡에 관심을 가지는 거냐?”
라면을 입에 밀어 넣은 하준이 흐뭇한 표정을 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진실을 실토할 수 없는 지민이 우물쭈물 끄덕였다. 그런 편이죠. 하준이 단순하게 말했다.
“그건 보통 부모자식간에 나타나는 사랑이지.”
“…부모님….”
지민은 윤기와 여행 가신 부모님을 같은 선상에 놓아보았다. 먹고 싶은 게 뭔지 물어보고 밥을 사주고…. 그러나 시선 한번 제대로 안 주는 무표정을 보아하니 결코 안 어울린다.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니라고?”
하준이 미간을 좁혔다. 대체 뭔 영화를 본 거야. 지민이 냉큼 눈치껏 덧붙였다.
“그냥 밥도 같이 먹고 하고 싶은 것도 같이 해주고….”
“혹시 강아지랑 인간의 우정 이야기?”
“…농담 재미없어요.”
지민이 하준을 흘겨보았다. 저렇게 봐도 데미지가 없다. 하준이 더 말해보라는 듯 라면 국물을 떠먹으며 손짓했다.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 도와주고…. 하준은 영 감이 안 잡히는지 같은 말만 반복했다. 진짜 동물 키우는 거랑 비슷한데. 나도 미국에 있는 우리 콜리한테 그렇게 해. 콜리가 누구냐면 하준의 가족이 기르는 커다란 개다. 말라뮤트. 대체 그게 무슨 영화냐고 질문까지 나올 무렵 지민이 아, 하고는 덧붙였다.
“나이차이가 조금 나요. 9살.”
하준이 짜게 식었다. 야 그걸 제일 먼저 말했어야지.
“육아네, 그냥.”
“…육아요?”
“너도 전정국한테 사족 못쓰잖아. 막내라고.”
난 또 뭐라고. 흥미가 사라진 하준은 대화 끝났다는 듯 폰까지 켰다. 트위터에서 이번 활동에 관한 팬들의 반응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반면 지민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제가요?
“그냥 정국이 어리니까 조금 더 신경 써준 거 말고는 없는데요.”
“그게 육아지.”
넌 진짜 아무 생각도 없이 전정국을 그렇게 챙긴 거냐. 하준이 기막혀했다. 어디 밥이라도 먹으면 전정국 더 먹을 거냐고 매운 거 얼마나 할 거냐고 밥 숟가락까지 직접 떠먹여줄 거 같은 놈이 무슨 소리야. 뿐이냐? 지방 촬영이라도 가면 전정국한테 옷 따뜻한 거 챙겼냐고 체크까지 하잖아 너. 지민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건 정국이가 추우면 제 옷 줘야 되니까….”
“그니까 네 옷을 왜 주냐고. 사이즈도 안 맞는구만. 전정국이 무슨 애도 아니고.”
“그야! 정국이 아직 어리잖아요.”
“어리긴. 너랑 꼴랑 두 살 차이다.”
덩치도 훨씬 더 크구만. 하준이 젓가락도 내려놓았다.
“그 영화 주인공도 너랑 똑같은 마음일 거다. 그리고 9살 차이? 무조건이야. 그 나이차이에 연애할 것도 아니고. 육아다, 육아.”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놔둬. 하준이 관심을 아예 폰으로 돌린다. 지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하준이 형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정국이? 그냥 아기지. 그래서 잘해주게 된다. 그럼 부사장님 눈에 난…. 지민은 내내 어린 취급을 하던 윤기의 말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때, 지민의 폰이 징징거리며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장님이다.
[지민아 비서님한테 연락이 왔어.]
으아아! 지민이 함성을 지르며 로켓 튀듯 발딱 일어난다. 뭐야. 뭔 일이야. 하준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상사병이었냐는 듯 행복하게 활짝 웃고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행복을 다 모아온 것만 같은 햇살 미소다.
“진짜 잠을 하도 못 잤더니 미친 거냐, 지민아.”
“아 놀랐죠. 미안해요 형. 저 사장님한테 연락 왔는데, 내일 어디 좀 나갔다 올게요!”
신이 나 방방 들떠 옷이 걸려있는 방으로 휙 사라진다. 하준은 혀를 내둘렀다. 쟤도 정상은 아니야. 그래도 한숨 쉬며 숙소 구속에 푹 처박혀있는 것보단 낫지 싶다. 그는 다시금 손바닥만한 화면으로 관심을 옮겼다.
***
송영호텔의 스위트룸. 그곳에서 윤기를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모셔온 주비서는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이돌을 부르는 날에는 늘 그렇듯 빠른 퇴근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행복한 마음으로 들어온 게 불과 30분전이다. 왜 신은 그의 행운을 도와주지 않는가. 오늘 꽤나 괜찮았던 윤기의 기분은 호텔에 들어온 지 10분만에 와장창 구겨지고 말았다. 다름 아닌 그의 친척에 의해서.
서욱이 곧 한국으로 돌아올 거다.
윤기에게 전화를 건 큰아버지가 말했다. 민서욱은 민윤기의 사촌이다. 주비서도 알고 있는 이였다. 윤기와 비슷한 또래로 늘 비교대상이 되는 사이였다. 복잡한 재벌 가정문제에 한낱 서민인 주비서가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만, 만나면 으르렁거리며 물어뜯는 사이라는 건 눈 감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전화가 왔을 때 위아래 보이는 것이 없는 민윤기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그의 큰아버지까지 물어뜯었다. 아 그래요. 용케 한국에는 약이 없는데 돌아오네요. 버릇을 고쳤나 봅니다. 축하파티라도 열으셔야겠어요. 초대해주시면 참석은 하겠습니다. 안 본지 4년이 넘었는데. 얼굴을 까먹을 지경이라서요. 이것을 답변으로 큰아버지는 사촌 형한테 질투하는 못난 놈이라 윤기를 비난했고, 전화는 개차반이 된 채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찾아온 이 침묵. 주비서는 살려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슬쩍 눈치를 보며 윤기에게 물었다.
“…지민군과의 만남은 취소할까요?”
이대로 그 어린 아이돌과 만나면 그 아이돌은 무슨 죄라고. 충성심을 다해 모시는 상사지만 입에 돋친 가시를 본 적이 어디 한두 번이랴. 아이돌의 사정도 갸륵했으며, 스트레스 받았을 때 윤기의 성향을 알고 있는 탓에 질문했다. 집에 박혀 위장이 타 들어갈 것만 같은 양주와 위스키를 따 목숨이 줄어들 만큼 들이붓는 것이 그의 해소 방식이었다.
“이미 오고 있을 텐데. 놔두세요.”
“네, 알겠습니다.”
망했군. 주비서는 아이돌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불쌍한 아이돌이 하나 희생되겠구나. 맨 아래로 처박힌 그의 상사의 위로 어두컴컴한 기운이 잔뜩 몰려있었다. 올 블랙의 검은 수트와 예민한 표정이 합쳐지니 살벌하게까지 보인다. 10년을 본 주비서도 이때만큼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조기퇴근도 흔치 않게 시켜주고 보너스까지 뿌리는 상사이긴 하지만, 기분 나쁜 민윤기는 건드는 것이 아니다.
그 때 마침내 호텔 문이 열렸다. 희생양이 왔다. 주비서는 호랑이굴로 들어온 사람을 확인했다. 후드티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걸쳐 얼굴 반이 사라진 아이돌은 무척이나 체구가 작았다. 저런 어린 애가…. 곧 있으면 험악한 분위기에 발발 떨며 눈물을 흘리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안타까워 혀만 차고 있을 때였다.
“부사장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별빛 쏟아지듯 지민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마스크를 써 빼꼼 드러난 눈이 가느다랗게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주인 찾은 나비마냥 팔랑팔랑 윤기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냉큼 옆자리에 앉는다.
“저 오늘만 목 빠지게 기다렸어요.”
한시라도 빨리 부사장님 만나고 싶어서…. 지민이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더니 화면을 윤기에게 내밀었다. 어둠의 신같이 생긴 검은 수트의 남자는 얌전히 지민이 보여주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저 9위까지 했어요! 다 부사장님 덕분이에요.”
강아지가 주인 만나 칭찬 해달라고 꼬리를 흔드는 것 같았다. 저게 지금 무슨. 주비서는 그 광경을 보며 경악했다. 그러나 진짜 경악할만한 거리는 그 뒤에 있었다. 그의 상사는 지민과 눈을 맞추고 멈칫하더니, 시선을 슥 옆으로 돌려 피했다. 이어 날카로운 말도, 시끄러우니 꺼지라는 말도, 귀찮다는 말도 아닌 다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열심히 했네.”
그런데 좀 떨어지지? 너무 붙었어. 윤기가 덧붙인다. 앗. 뿌듯하게 웃던 지민은 멋쩍게 엉덩이를 뒤로 약간 물렸다. 그럼에도 윤기의 곁이 좋다는 듯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대상을 보듯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이럴 수가. 주비서는 두 눈을 부릅 떴다.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다. 아이돌은 눈이 없어 보이고, 저기 있는 사람이 정녕 민윤기가 맞는 건지도 헷갈린다. 정신까지 어지러워 석상처럼 굳은 주비서에게 윤기가 말했다.
“이만 퇴근하세요.”
“…네.”
주비서는 꾸벅 인사를 했다. 지민이 주비서를 발견하곤 이제야 존재를 알아차린 건지, 급하게 인사한다. 어어, 죄송해요. 안녕히 가세요! 주비서는 예의 바른 아이돌에게 마주 인사를 한 다음 호텔방을 나왔다.
“…….”
이상해, 뭔가 이상해. 이 세상은 잘못되었어. 주비서는 중얼중얼거리며 혼이 빠진 채 호텔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