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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어슴푸레 뜬 새벽. 검은색만 가득한 방 안에서 한 인영이 움직였다. 가운마저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그는 일어나 기계처럼 움직였다.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하고 나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정렬되어있는 명품 브랜드의 옷은 여느 편집샵의 매장과 닮아있었다. 사람 온기라고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서 민윤기는 유령처럼 사락거리는 옷 소리만 내며 수트를 착용했다. 유령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민윤기라는 인간의 감정이 어느 정도 무뎌진 부분에서 통하는 부분은 있겠다. 누구나 궁금해 마지않는 재벌가 도련님의 하루는 시작부터 적막 그 자체였다.


 민윤기는 모든 하루가, 아니 태어났을 때조차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무료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던 때는 즐거웠을 지도 모르겠지만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깊은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살아왔다. 아버지는 윤기에게 관심을 끊었고, 부모의 관심에서 빗겨난 아이에 친족들은 밥그릇을 뺏어먹기 위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주식 그 하나 조금 더 뺏겠다고 어린 아이를 가족모임이라는 처형식에 불러다 놓고 괴롭혀댔다. 물론 그 사이에서 민윤기는 무뚝뚝하고 뚱한 얼굴로 끝까지 방어했다. 그래 봤자 당신들 손에 떨어지는 몫은 없을 거예요. 이만 가도 됩니까. 배고픈데. 친족들은 고작 열 몇 살 어린아이에게 독종새끼라는 평을 내리며 경쟁자로 대했다. 당연히 그 사이에서 아버지라는 인간이 아무런 방어기제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민윤기는 혼자 남아 견디며 돈을 부모 삼아 컸다. 슬픈 일이 있으면 돈으로 위로했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방탕한 삶을 즐기며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하고는 돈으로 뒤처리를 했다. 폭행사건에 가담해도, 불법 약물이 있는 파티를 즐겨도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돈은 편리하고 조용한 부모였다. 아쉽게도 부모였지만 기쁜 일은 같이 즐겨주지 않았다. 애초 기쁜 일은 뭐. 언제 있었는지도 기억이 흐릿했다. 그리고 쓰레기 같은 재벌무리와 어울리며 관심을 갈구하던 사춘기도 지나니, 남은 건 심심함과 단조로움에 찌들은 삶뿐이었다.


 사람은 모든 감정이 소진되면 텅 비어버린다. 민윤기는 깨달았다. 이 톱니바퀴 같은 무료한 삶에서 자신은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깨질 것 같은 두통과 수면부족, 외로움, 그런 것들로 가득 채워진 삶에서.


 윤기는 그날도 평상시처럼 회사에 출근하고, 주주들을 만나고, 개발부의 발표시연회를 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으로 날아온 연락 하나 덕분에 기분은 바닥으로 더할 나위 없이 추락했다.


 회장님께서 건강이 악화되셨습니다. 방문하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아버지를 담당하는 병원 의사였다. 이 양반은 늘 눈치가 없군. 평생 한번도 찾아가지 않은 핏줄에게 꼬박꼬박 소식을 보내온다. 비웃은 윤기는 메시지를 무시한 채 대기하고 있던 슈퍼카에 올라탔다. 비서가 옆에서 태블릿을 휙휙 넘기며 오늘 일정과 관련된 사안들을 읊었다.



“조찬 이후 프로젝트 시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감찰과 관련하여 대주주들 사이에서 말이 조금 있습니다만.”

“시끄러운 게 한번 돌 때도 됐죠. 일정 잡으세요.”



 윤기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딴 회사 망해버려도 상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윤기의 위치는 부사장이었지만, 대외적으로 회장아들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송영의 도련님. 다음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 될 테니 회장이 몸져누운 지금 윤기가 그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비서는 윤기의 불성실한 태도에도 능숙하게 업무와 관련한 명령들을 받아 적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비서가 깍듯이 윤기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태블릿은 커다란 손에 올라오니 핸드폰으로 변한 것마냥 크기가 작아 보였다. 화면 안에는 어떤 영상이 하나 재생되고 있었다. 대충 시트에 기대 누워있던 윤기가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주인공은 요새 그의 삶에 굴러들어온 작은 흥미거리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쫄아서 눈치를 보다가도 갑자기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골 때리는 꼬마. 흥미거리는 온몸을 불사르며 안무연습을 하고 있었다. 빠른 비트의 음악이 끝나자 헥헥거리며 숨을 가다듬는다. 옆에서 안무를 구경하던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오 지민이 열심히 연습했네. 영상 잘 찍혔다.]

[어제 정국이랑 같이 밤 늦게까지 연습했어요!]

[그런데 요새 몸이 좀 좋아진 거 같다? 선이 더 예뻐졌는데?]

[정말요!? 이거 보세요. 저 곧 있으면 복근 생길 거 같지 않아요?]



 지민이 대뜸 배를 까 보였다. 선생이 대충 눈을 굴리며 그래 보인다고 대답해주자 팔짝거리며 좋아한다. 다른 멤버가 다가와 예의상 해주신 거야, 하고 타박을 하니 진짜 보인다며 자세히 보라고 멤버에게도 배를 들이밀었다. 복근 보이지 않아요? 여기 선 갔는데. 그쵸, 그쵸. 연습 영상은 질색하며 떠나는 멤버를 끝으로 선생이 카메라로 다가오면서 종료됐다. 별 걸 다 열심히 하고 있네. 생각하며 윤기는 그 모습에서 사람이 좋아 여기저기 쏘다니는 강아지를 연상했다. 늘 머리가 붕 떠있는 게 닮은 거 같기도.


 윤기는 영상을 다시 재생시키고는, 지민이 안무를 실수 없이 다 끝내고 활짝 웃는 장면에서 재생을 멈추었다. 눈 밑이 볼록 솟아올라와 있는 게 꼭 행복해하는 찐빵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공연장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는 울어서 불어터진 찐빵이었다.



“…….”



 박지민이라는 애는 신기했다. 바닥에서 솟았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민윤기의 인생에 뜬금없이 끼어들었다. 덕분에 사춘기 시절에도 안 해봤던 후원을 지금 하고 있다. 제 결정을 떠올리면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하긴. 첫만남부터 기가 막힌 애였지. 윤기는 짧게 과거를 회상했다.


 그리고 스폰이라는 형태로 만나게 된 박지민은 길거리에 버려진 새끼동물 같았다. 회사에서 매정하다는 평이 주를 이루는 윤기의 눈에도 발발 떠는 몸은 가련했다. 비쩍 마른 애가 세상에 얼마나 휩쓸리고 부딪혔는지 무서워하는 상대한테도 제발 한번만 도와달라며 엉엉 운다. 동정심이 바닥까지 메마른 사람이 봐도 박지민을 안쓰러워 했을 거다. 성냥팔이 소녀도 아니고 뭔. 숨을 헐떡거리는 게 죽기 직전이었다.


 윤기는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썩어 넘쳐나는 돈을 박지민에게 부었다. 어차피 박지민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도와주었으니 수지타산은 어느 정도 맞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흘려가는 인연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



 만나고 싶어요! 노래 불러드릴게요. 볼을 연하게 물들이며 박지민은 그런 말을 주절거렸다. 두 번째 만남 때도 박지민은 시원하게 민윤기의 뒤통수를 날렸다.


 발칙한 꼬맹이. 박지민을 예상하며 그려놓았던 관계에는 없던 말을 들어서 그런지 윤기는 그 이후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기막힌 기분이 들고는 했다. 뭐 이건 진짜 버려진 동물 키우는 것도 아니고. 한번 도와줬더니 주인처럼 따른다. 심지어는 애정 어린 손길 하나 주지 않았는데도. 그래도 그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무해한 것을 꺼리는 인간은 없으므로. 


 윤기는 여전히 화면 안에서 맑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다가, 입을 뗐다. 한 비서. 윤기의 부름에 비서가 대답했다. 네.



“박지민이랑 만남 다시 잡아요.”



 비서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비서에게 거부 권한은 없기에 수긍했다. 예, 소속사에 연락해서 빠르게 잡겠습니다.








 만남은 빠르게 잡혔다. 그러나 윤기는 머지않아 지민을 다시 부른 것을 조금 후회했다. 그런 꼬마나 만나서 또 뭘 한다고. 스스로가 황당했다. 베이비시터나 하고 앉아있을 게 뻔한데. 나이가 몇 인데 그런 꼬마애랑 또 어울리고 있나. 그렇다고 이제와 무를 수도 없었다. 사실 취소한다는 말 한마디면 가능하긴 하지만, 귀찮은 부분이 더 컸다.


 그래. 적당히 구경하다 가야지. 윤기는 큰 기대감 없이 장소에 도착했다. 빳빳하게 굳은 어린애를 놀려먹거나 괴롭히는 취미는 없으니 빨리 사라져주는 게 좋겠지. 물론 박지민이 가끔가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긴 했다. 그러나 어린 애는 어린 애일 뿐이다. 그날은 무대에 오랜만에 다시 올라가 벅차 자신을 향해 아무 이야기나 던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윤기가 다리를 꼰 채 테이블에 앉아있길 잠깐. 레스토랑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룸의 문이 열리고 직원이 인사한다. 마침내 뒤이어 들어오는 아이돌을 발견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었다. 룸 안으로 입장한 지민은 레몬을 형상화 해놓은 듯 노란 빵모자에 노란 기운이 도는 체크무늬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림동화책에서 튀어나온 오리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전신으로 ‘저는 아이돌이에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민이 총총 윤기의 근처로 빠르게 다가왔다. 아담한 광대가 봉긋 솟아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별을 박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망울이 온 가득 윤기를 담았다.













 지민은 아침부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거의 밤부터 뜬눈으로 지새웠다. 어떤 말을 하지? 스폰서에게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저희 컴백한대요! 저 연습도 많이 했고, 몸도 예쁘게 만들고 있어요. 그 생각들을 나열하다 보니, 지민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방학숙제 해왔다고 검사 맡는 청소년도 아니고…이상한 거 같은데. 갈등하고 있다 보니 앞자리에서 사장이 지민을 불러왔다. 지민아 내 말 듣고 있니? 아…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됐다. 어쩐지 사장의 표정이 불안하게 변했지만, 당장 윤기와의 만남을 앞둔 지민은 다행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민이 오매불망 만나고 싶었던 윤기를 보자마자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곧잘 쏟아냈다.



“다시 못 뵐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불러주셔서 너무 좋아요. 부사장님 다시 엄청 만나고 싶었는데….”



 사실 그때 이후로 다시 안 불러주실 줄 알았거든요. 다시 만난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윤기는 멀뚱히 그를 보다 의자를 고갯짓으로 까딱 가리켰다.



“알았으니까 여기 좀 앉지 그래? 목 꺾이겠는데.”

“아, 네!”



 그들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색으로 도배된 인물과 노란 병아리. 만난 것만으로도 좋은 지민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솔직하게 배시시 웃었다. 윤기의 머리 위로 좋은 사람 인증마크가 딱 붙어있는 것 같았다. 그 시선도 피한 윤기가 물잔을 기울이며 던지듯 이야기했다.



“코스로 시켰으니까 기다리면 나올 거야.”



 윤기는 그 뒤로 지민에게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인사는 건넸으니 오늘 부르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민은 윤기를 기다렸다. 테이블이 침묵에 잡아 먹히니, 지민이 살그머니 눈치를 보며 말문을 텄다.



“저…저희 컴백할 수 있게 됐어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열심히 할게요. 부사장님이 도와주신 덕분이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내 덕분 아니고. 네가 노력해서 가능한 거야.”



 윤기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성의 없게 했다. 돈은 썩어나도록 많으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런 인사 듣고 싶어서 너 부른 것도 아니고. 지민은 사뭇 당황했다. 그래, 열심히 수고해라.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어어. 눈을 굴리다가 지민이 급히 다음 화제를 꺼냈다.



“새로 오신 직원 분들도 너무너무 잘해주시고 좋아요…!”

“그러라고 돈 준거니까.”



 잘 못하면 잘라야지. 대화는 또 사망했다. 꺼내는 이야기마다 족족 망해서 지민은 준비해왔던 말을 반은 잊어먹었다. 컴백까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데 왜 관심이 없어 보이시지? 멤버들도 잠까지 줄여가며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삭제하기로 했다. 그렇게 어색한 공기를 살려준 건 레스토랑의 직원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세팅 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예쁘게 플레이트 된 음식들을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입거리인 이름 모를 음식들이 줄줄이 나오고,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을 때마다 직원은 설명을 곁들였다. 영어가 군데군데 섞여있어서 지민은 말을 다 이해하지도 못했다. 국제요리경연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쉐프라는 것도 지민에겐 벅찬 정보였다. 이, 이것도 먹는 건가? 맛있다는 말이겠지? 데코레이팅 된 풀은 아무리 봐도 잡초 같았다. 그 와중에도 지민이 착실히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반응하는 한편, 윤기는 아무런 제스쳐도 없으며 직원을 보지도 않았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직원은 빠르게 일을 마치고 나갔다. 직원들이 먹는 순서를 소개해주었으나, 지민의 머릿속에 남은 건 없었다. 어떻게 먹는 거지…? 지난 번 한식당과 마찬가지로 눈 돌아가게 비쌀 음식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윤기는 익숙하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지민이 흘끔 윤기를 보고는 그를 따라 식사하기 시작했다. 고기를 집으면 고기. 야채를 집으면 야채.



“그냥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돼.”



 눈 한번 안 마주쳤는데 들켰다. 네에. 머쓱해진 지민이 볼을 긁적이니 윤기가 한 마디 덧붙여주었다.



“식단관리 한다며. 오늘은 너 먹고 싶은 거만 골라먹어.”

“어? 그걸 부사장님이 어떻게….”

“여기 스폰서로 너랑 같이 밥 먹고 앉아있으니까 알겠지.”



 윤기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그러나 그 사소하고 작은 관심 어린 멘트에 지민은 조금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부사장님은 관심이 없으신 게 아니었어. 지민이 배시시 웃었다. 윤기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호감 가득한 시선에도 철벽 같이 말했다.



“웃을 시간에 젓가락부터 드는 건 어때? 다 식는데.”

“네!”



 지민이 젓가락을 들었다. 가장 먼저 네잎클로버가 올려진 버섯 위의 고기를 집었다. 모르는 음식은 지민이 몰랐던 맛의 세계를 새로 선사해주었다. 와. 너무 맛있어요. 감동받은 지민의 젓가락질이 빨라진다. 모든 음식들이 맛있었다. 한입크기라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분주히 지민이 젓가락질을 놀리는 한편, 윤기는 어느새 팔짱을 낀 채 지민이 먹는 모습만을 구경했다.



“더 시키면 되니까 먹고 싶은 대로 먹어.”



 지민이 그 말에 젓가락을 든 채로 뚝 멈춰선 윤기를 보았다. 작은 감동이 어려있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지민이 입을 열려는 찰나, 윤기가 가로 막았다.



“인사 받을 생각 없다고 아까 말했어.”



 아. 지민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젓가락질에 집중한다. 지민은 요리하는 요리사가 보면 흐뭇해 마지않을 만큼 열심히 먹었다. 윤기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단순한 머리로 어떻게 연예인을 한단 거야, 이 꼬마는. 어이는 없는데 같잖고 웃겼다.


 그 사이 레스토랑 코스는 끝이 나 마지막 디저트가 나왔다. 이번에는 지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 먹은 게 제가 평생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그래 보여. 지난 번에는 새모이만큼 먹더니.”

“아 그때는….”



 지민이 머뭇거렸다. 그날은 얹힐뻔했다. 잘 풀렸지만 숙소에 도착해서 속이 좋지 않아 소화제까지 마셨었다. 윤기가 알만하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됐으니까 먹어.”



 지민이 어설프게 웃으며 미니 스푼을 들었다. 초코타르트 푸딩은 역시나 입이 사르르 녹을 만큼 달고 맛있었다. 눈이 번쩍 뜨여 한참이나 먹던 지민은 문득 스푼을 들지 않은 윤기를 보았다.



“부사장님은 안 드세요?”

“단 거 별로 안 좋아해. 어차피 거의 다 먹었잖아.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아.”



 지민의 스푼이 점점 느려진다. 곧 있으면 또 작별이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가시겠지…그럼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점점 근심 서리는 눈이 꼭 출근하는 주인을 아쉬워하는 고양이 같았다. 온 얼굴에 감정이 다 쓰여있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윤기가 얕게 픽 웃으며 장난처럼 물었다.



“왜. 이번에도 더 보고 싶어?”



 순간 패이는 입가 미소에 지민이 움찔했다. 너무 예뻤다. 여태 살면서 지민은 정국이나 이담이 웃는 모습이 이 지구상에서 제일 예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은 인생을 너무 짧게 살았던 것이다. 세상에는 웃는 게 이렇게나 예쁜 사람도 있구나. 활짝 웃으면 얼마나 더 예쁠까. 지민이 멍하니 보고만 있자니 윤기가 예상했다는 듯 슬슬 자리를 정리했다.



“그래. 속마음에 없는 이야기는 예의상 꺼내지 않아도 돼. 사회생활 팁으로 배워둬. 기사 붙여줄게. 숙소로 바로 보내줄….”

“아니요!”



 윤기의 말을 덥석 끊었다. 헉. 순간 놀란 지민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너무 건방져 보였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윤기를 붙잡는 게 먼저였다.



“저…전 부사장님 더 보고 싶어요.”

“…….”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솔직한 박지민은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른다. 오히려 유도했던 윤기가 정지했다. 그는 혀로 입안을 굴렸다. 이렇게나 솔직하게 쏟아지는 감정은 낯설다. 거기에 더해 직선으로 쏟아져오는 시선에 윤기가 고개를 살짝 모로 꺾으며 피했다.



“그래 그럼.”



 지민이 해사하게 웃었다. 눈꼬리가 힘차게 반달이 되어 휜다. 시선을 피한 와중에, 윤기는 잠깐 눈만 흘끔 돌려 그 미소를 눈에 담았다.



“그래서 뭐 하고 싶은데.”

“어 음….”



 지민이 작은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하고 싶은 일. 막상 윤기가 물으니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대에 서는 것, 다시 컴백을 하는 것, 팬싸인회에서 팬들을 만나는 것 밖에 없었다. 여유시간이 생겨도 스스로 무언가 하고 싶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없어?”

“아, 그건 아닌데….”



 없다고 하면 윤기가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정국이 최근 영화관을 가고 싶다 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 영화 짱 재미있다는데. 신나서 보여주던 포스터에 그렇구나,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여줬었다.



“어, 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 있긴 했는데요.”

“영화?”

“네!”



 지민이 급하게 폰을 뒤적거렸다. 최근 상영 스케줄로 들어가서 젤 위에 있는 아무 영화나 들이밀었다. 이거요! 윤기가 포스터를 확인했다. 액션영화다. 그러나 위의 구석에 붙어있는 딱지에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민과 영화 포스터를 번갈아 가며 보던 그가 말했다.



“19세미만관람불가인데.”

“…네?”



 폰을 확인한 지민이 영화를 확인했다. 아. 선정성과 폭력성이 매우 높다고 되어있었다. 추천순으로 올라와있는 덧글에는 무서워서 중간에 팝콘으로 축제를 했단 사람이 있었다. 이런 잔인한 거는 안 좋아하시는 건가? 냉큼 지민이 다른 영화를 내밀었다. 바로 어제 개봉한 영화였다. 멜로 장르의 외국 영화였다.



“그럼 이건 어때요?”



 영화 줄거리는 읽지도 않은 윤기가 관람가를 확인했다. 15세이상관람가.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괜찮겠네.”



 됐다. 더 같이 있을 수 있다. 그 사실이 좋아 헤헤 웃는 지민을 윤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스캔했다. 어딘가 불편한 안색이 깃든다. 그리고는 어느 판단을 마친 건지 툭 뱉었다.



“호텔부터 들려야겠네.”

“호…텔이요?”

“어.”



 지민이 푸딩이 아닌 접시에 스푼을 박았다. 쨍. 청아한 음이 울린다. 재킷을 고쳐 입은 윤기가 지민에게 시선을 두었다. 하얗고 조그만 뺨에 연한 홍조가 떠올라있었다. 놀란 참새마냥 지민이 더듬더듬거렸다.



“호텔이면 영화는 바, 밤에 보러 가는….”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불안한 시선처리와 윤기를 흘끔거리는 동작에서 급격한 긴장이 느껴진다. 갑자기 고장 난 지민이 삐걱거리며 이런저런 말을 해댔다.



“저, 저, 전 좋아요. 영화는 안 봐도 괜찮을 거 같아요. 다음에 따로 혼자 보면 되니까….”

“뭐?”



 이건 뭔 신박한 헛소리인가 재던 윤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 이내 배배 꼬이고 있는 지민의 손가락을 보고 금방 눈치챘다. 하. 그는 어이가 증발하다 못해 활활 타버렸다. 윤기가 기가 찬 어조로 지적했다.



“쬐끄만 게 저번부터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이상한 생각이나 해대네.”

“네, 네? 제가 이상한 생각을요? 아, 안 했는….”



 윤기가 빤히 지민을 주시했다.



“…죄송해요.”



 도둑이제 발 저린 지민이 실토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윤기는 혀를 쯧쯧 찼다.



“내가 지난 번에 말했던 거 같은데. 나는 그런 변태 취향 없다고.”

“…그런…?”

“어린애랑 침대 뒹구는 거.”



 지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먼저 음흉한 사람답지 않게 순진한 반응이었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점점 달아오르더니 귀 끝까지 빨개진다. 불타는 병아리가 됐다. 이러면서 뭘 자꾸 덤비길 덤벼. 발랑 까진 것처럼 굴면서 세상 어수룩하다. 어이가 더 없어진 윤기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네가 아무리 무명이라도 그러고 가면 다 이상하게 봐. 유치원생 데리고 나온 삼촌 꼴은 되고 싶지 않거든.”



 아. 깨달은 지민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슈퍼 아이돌처럼 꾸며달라고 했으니, 이 복장을 입고 거리를 헤집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갔다간 촬영하나 봐, 유투브 찍나 봐 같은 소리만 한 가득 들을 거다.



“이만 일어나지.”

“네…!”



 윤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민이 그 뒤로 쫑쫑 따라붙었다. 앞에 선 룸의 문을 밀려던 순간, 그는 까먹을 뻔 했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앗. 부딪힐 뻔한 지민이 움찔했다. 하마터면 윤기의 뒤통수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덕분에 거리는 그들이 만난 이례로 가장 가까웠다. 예민해 보이는, 그러나 어딘가 나른해 보이기도 하는 하얀 얼굴에 지민이 숨을 참았다. 윤기는 가까운 지민이 전혀 상관없는지 제 할말만 던졌다.



“한번만 더 그런 생각해봐. 혼나.”

“…….”

“대답 안 해?”

“…안 할게요.”



 그래야지. 원하는 답을 얻고 윤기는 쌩하니 밖으로 나섰다. 지민은 어쩐지 콩콩 뛰는 심장을 잠시간 부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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