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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다마고치 아이돌 04

by 토페 posted Jul 1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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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의 무대는 데뷔곡으로 선택되었다. 그나마 반응이 제일 좋았던 곡이었기 때문이다.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을 들은 데뷔곡이 스피커에서 웅장하게 흘러나왔다. 지민은 숨을 쉬는 법조차 까먹은 채 동작을 쏟아냈다. 무슨 정신으로 안무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연습실에 처박혀 수없이 반복해 몸에 새겨진 동작들이 알아서 흘러나왔다. 노래를 어떻게 했는지, 표정을 어떻게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대를 표현하는 짧은 3분동안 기억이 잘려 증발했다.



“하아, 하아.”



 마지막 비트를 끝으로 음악이 끝났을 때. 지민은 거친 호흡을 몰아 쉬며 넓디 넓은 공연장을 훑었다. 응원봉들이 반짝였다. 당연하게도 뉴위크의 것이 아닌 후반부에 있을 인기 아이돌 그룹 팬덤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민은 벅찼다. 별들을 밟고 우주 한 가운데 서있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살아 숨쉬는 것만 같았다.



“네 너무너무 멋진 무대 잘 봤습니다. 다음 무대는요.”



 MC들이 다음 안내 멘트를 했다. 내려오세요! 스태프들이 안쪽에서 하는 손짓했다. 빨리 들어와요. 빨리. 스태프들의 사인을 알아들은 이담이 박힌 것처럼 서있는 멤버들을 하나씩 수거했다. 가야 돼. 마이크를 수거하는 스태프들의 좋지 않은 시선이 콕콕 박혔다. 하여간. 지민이 꾸벅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웬 무명 아이돌이 여기에 왔는지. 쟤네 뭐야.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들은 느끼지도 못했다. 아직 진정되지 않아 거친 숨을 가다듬으면서 지민은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아직도 뭔가 붕 떠있는 것 같다. 진짜 무대를 한 건가? 1년만에…멤버들과 다 같이…. 멤버들을 돌아보니 모두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정국이 작게 울먹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민이 헐레벌떡 튀어나갔다.



“정국아! 울어!?”

“아 아니거든요.”

“뭐? 정국이 운다고?”



 하준이 냉큼 다가왔다. 와 진짜 우네. 너 진짜 막내구나. 정국이 하준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억. 하준이 한대 맞은 팔을 부여잡는 사이, 지민이 정국의 얼굴을 제 손으로 덮어 문질러주었다. 정국이 더욱 훌쩍거렸다.



“하나도, 안, 우는데, 형이 이렇게, 하니까, 엉? 눈물이 나는 거라고요.”



 지민이 정국을 끌어안고 토닥거려주었다. 지민의 눈가에도 조금의 눈물이 고였다. 그 사이 의성이 눈물을 줄줄 매달고 다가와 지민과 정국을 둘로 끌어안았다. 너네가아, 너무, 흐윽, 대견하다아. 야 너네도 빨리 해. 이담이 다가와 힘을 꽉 주어 그들을 감쌌고, 마지막으로 이런 걸 뭘 하냐며 하준이 다가와 같이 끌어안았다. 마지막으로 아래서 멤버들을 기다리던 사장이 눈물을 흩뿌리며 뛰어왔다.



“내 새끼들! 너무 멋졌다. 진짜 최고다.”



 감동적인 무드를 연출하기도 잠시, 정국이 얼마 지나지 않아 포옹을 전부 다 끊어버렸다. 비켜요. 더워! 땀냄새 나! 씩씩거리며 멤버들을 모두 다 거칠게 쳐낸 정국이 지민만큼은 가볍게 툭 밀어냈다. 막내랍시고 유난히 물고 빨며 돌본 지민의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의성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이제 바로 가면 돼요?”

“어어, 그래. 차 대기시켜놓을게.”



 멤버들은 대기실로 이동했다. 대기실로 이동하며 수고하셨다고 말하는 멤버들의 표정은 근 1년간 가장 밝아 보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길 잠깐. 지민은 그들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앞서 걷던 사장이 뒤를 돌아 다시 다가왔다.



“왜. 뭐 놓고 온 거 있니?”



 지민이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혹시 잠깐 다녀와도 돼요?”

“응? 다녀와? 어디를?”

“…VIP실이요.”



 무대를 시작하기 전에 떠올린 하얀 얼굴은 무대가 끝나니 또 떠올랐다. 지금 당장 그를 만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야 할 것만 같았다. 무언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조금은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음. 사장이 난감하다는 듯 턱을 긁적이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민아 네 마음은 이해한다지만.



“아까 갔더니 못 들어가게 막아서 힘들 거야. 게다가 보는 눈도….”

“그냥 다녀와보기만 할게요. 혹시 모르잖아요.”

“쉽지 않을 텐데….”

“정말 잠깐도 안 될까요?”



 지민이 반짝거리는 눈빛을 사장에게 보냈다. 사장이 끄응, 고뇌의 신음을 흘렸다. 황금빛 별이 쏟아져 나오는 거 같다. 마지못해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문 앞에서 막혀 실패할 터였다. 게다가 보는 눈이 있다해도 안타깝지만 지민이 누군지 못 알아볼 가능성이 더 컸다.



“빠르게 다녀와야 된다. 알겠니?”

“네! 잠깐만 다녀올게요!”



 지민이 급히 대기실과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 빠르게 다녀올 테니까 걱정 마세요. VIP실을 향하는 발걸음이 놓칠세라 날랬다.










 공연장은 무척이나 컸다. 지민은 공연장 내부의 길을 빙빙 돌아가며 VIP실을 찾았다. 혹시 가는 길 아시나요? 지나가는 스태프를 붙잡고 물어보니, 스태프는 의아한 얼굴로 지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구지? 이런 아이돌이 있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스태프는 곧 친절하게 저쪽 방향으로 가면 된다 일러주었다. 감사합니다! 지민은 또 허리를 바짝 접어 인사했다.


 진짜 크다. 지민은 헥헥거리며 2층까지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무대 대기실과 VIP실 통로가 연결되어 있어 다행히도 관객들의 눈에는 비춰지지 않았다. 애초 모르는 그룹의 오프닝 무대 다음으로 등장한 인기 디제이의 공연에 관객들은 푹 빠져있었다. 복도 멀리서부터 VIP실을 찾던 지민이 마침내 밝게 웃었다. 저기구나. 경호원들 몇이 그 앞을 버티고 서있었다.


 지민이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수고하고 계십니다. 저 여기 안에 계신 분을 만나러 왔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저는 아이돌 그룹 뉴위크에 있는 지민이라고 합니다!”



 지민이 또박또박 인사했다. 경호원은 스태프처럼 지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가 오늘 전달받은 부분은 VIP를 경호하는 부분이었다. 참여 가수 리스트를 외울 필요가 없었다. 애초 이곳에 출연하는 가수들이라면 어느 정도 유명한 사람들이라 알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앞의 아이돌은 아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룹 이름도 처음 듣는다. 뉴위크?



“안됩니다.”



 경호원이 딱 잘라 말했다. 외부인은 출입금지다. 가수가 다가와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처음이지만, 어쨌거나 명단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 아주 잠깐도 안 될까요?”

“불가능합니다. 외부인은 출입금지입니다.”



 사장님이 못 들어가셨다고 했더니. 바로 막혔다. 두 번의 거절을 당한 지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고민했다. 어, 음.



“그럼…혹시 안에 계신 분께 말만이라도 전해주시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지민이 발을 동동 굴렀다. 한번만 부탁 드릴게요. 경호원은 슬슬 짜증이 났다. 아까는 웬 사장이라는 인간이 와서 만날 수 있냐고 묻더니, 이번에는 듣도 보도 못한 아이돌이 와서 절절거리고 있다. 명단에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부탁해도 안돼요. 경호원이 지민을 위아래로 걸리적거리는 물건 보듯 훑었다.



“일반인이 허락 없이 쉽게 만날 수 있는 분들이 아니라고요.”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이라 칭했다. 한 마디로 너 같이 급 안 되는 놈들은 안 된다, 라는 의미다. 아…. 지민이 메이크업이 되어있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아무리 부탁해도 소용 없겠구나. 게다가 시간도 없었다. 아무리 사장이 둘러댄다고 해도 늦게 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멤버들이 제 행방을 물어볼 터였다.



“네…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민이 기가 죽어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VIP실의 문이 덜컥 열렸다. 그리고 지민이 그토록 기다렸던 하얀 얼굴의 주인이 등장했다. 지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부사장님!”

“뭐야.”



 윤기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얘가 왜 여기 있지? 경호원이 식겁했다. 하필 이 상황에 나와도 송영의 왕자가 나왔다. 그는 급히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난동을 부려서…죄송합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네? 제가 언제 난동을…, 아!”



 경호원이 무식하게 지민의 팔뚝을 잡아채 끌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윤기가 재빨리 경호원의 팔을 붙잡아 막았다. 경호원이 흠칫했다. 키도 작고 말랐는데, 잡은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윤기가 경호원의 팔을 툭 쳐냈다.



“그쪽 업체는 지침으로 손님에게 무력 쓰는 법부터 배웁니까?”

“그, 그게….”



 윤기의 서늘한 눈빛에 경호원이 당황했다. 손님? 명단에도 없고 심지어 이런 무명 아이돌이 어떻게 손님이 된단 말인가. 어떻게 둘이 아는 사이일 수 있지? 불쾌해 보이는 재벌에게 경호원이 냉큼 허리를 굽혔다.



“죄, 죄송합니다!”

“허리를 왜 나한테 숙입니까.”



 윤기의 말에 경호원이 쩔쩔 매며 급히 지민 쪽으로도 인사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괘, 괜찮습니다. 명단에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지민이 손을 휘저었다. 윤기가 그를 못 마땅하게 노려보는 찰나, 지민이 윤기의 옷자락을 급히 붙잡았다.



“부사장님!”



 윤기가 지민을 보았다. 덜어낸 메이크업과 잘 꾸며진 의상은 청량음료 CF에나 등장하는 소년 같았다. 그러나 표정은 조금 초조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만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손님이 원한다는데 얼마든지.”



 경호는 필요 없으니 따라오지 마세요. 윤기가 경호원 보란 듯 대답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지민이 그 뒤를 총총 따라 나섰다.





 윤기는 공연장 복도 비상구를 열고 적당히 멈춰 섰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로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이 정도면 눈에 띄지 않겠지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와 하얗고 솜사탕같이 입은 소년이 같이 있는 장면은 목격되어봤자 의아한 시선만 받을 게 뻔했다.



“여기까지 쫓아서 올라올 정도면 엄청 대단한 이야기인가 본데. 빨리 해봐. 중요한 시간 쪼개서 온 거니까.”

“네? 아 그런 건 아닌데….”



 지민은 막상 윤기를 만나니 머뭇거리게 됐다. 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윤기는 어려웠다.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갈 때까지 간 생각에 정신을 놓고 마구 달려들었을 뿐. 성숙한 어른 같은 그 분위기가 무언가 어렵게 보였다. 지민이 우물쭈물 거리고 있으니, 가만히 기다리던 윤기가 멈칫하며 미간을 좁혔다.



“울었어?”

“네?”



 눈가가 묘하게 붉었다. 누가 봐도 메이크업의 효과는 아니었다. 윤기가 지민을 붙잡아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가만히 있어. 자세히 얼굴을 들이대며 확인까지 한다. 지민이 저도 모르게 움찔 떨며 조금 긴장했다. 윤기로부터 향수 냄새가 났다. 무거우면서도 뭔가 탄 듯한 향이 그의 저음과 잘 어울렸다.



“울었네.”



 그의 표정이 다시금 굳었다.



“아까 그 새끼들이 그런 거니?”

“절대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무대를 하고 내려와서, 너무 기뻐서….”



 지민이 퍼덕거리며 황급히 부정했다. 그에 차갑던 윤기의 표정이 다시 뚱하니 바뀌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어이없는 듯 보였다.



“인생 끝났다고도 울고 좋아도 울고. 맨날 우네.”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다. 심지어 펑펑 울었던 때는 데뷔했던 때가 마지막이었다. 더 주장하고 싶었으나, 최근 일을 따져보니 눈물을 많이 쏟긴 했다. 지민이 그간의 일을 되새김질하며 민망함에 말을 못하고 있자니, 윤기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원래 애들은 울면서 크니까.”



 지민은 조금 황당하기까지 한 기분이 됐다. 같은 그룹에 있는 의성도 지민을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부르지만 이렇게까지 어린 취급은 안 했다. 혹시 아직도 오해를 하고 계신가. 지민이 작게 반박했다.



“저…계속 오해하고 계시는 게 있는데요. 저 성인입니다.”

“알아. 조사해보니까 그렇더군.”



 알아봤다는 말도 아니고 조사라는 이상한 단어가 들어가 있었지만 지민은 신경쓰지 못했다.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뭐야. 말은 맞다 해주는데 딱히 믿는 모양새는 아니다. 알면서도 이런 취급이라니. 지민은 할 말이 많았지만 목구멍으로 꾹 밀어 담았다. 이 관계에서 갑은 스폰을 해주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뭔데.”



 윤기가 할 테면 해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딱히 큰 기대는 없는 모습이었다. 아. 지민은 냉큼 허리가 땅에 닿을 만큼 접어 숙였다. 가능하다면 머리까지 바닥에 박을 기세였다.



“감사합니다!”



 복도에 우렁차게 목소리가 울렸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절대 후회하시지 않게 꼭, 꼭 최고가 될게요.”

“…….”

“그리고 이렇게 다시 기회를 주셔서, 정말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오늘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지민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윤기는 폭 수그린 지민의 동그란 뒷머리를 내려다봤다. 얼핏 보이는 하얀 목이 가늘었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체구는 얇기 짝이 없는데 패기만큼은 단단했다. 뭐 보람은 있네. 키워보려는 게 용케 예의도 알고. 나쁘지 않았다. 그는 단순하게 감상을 끝냈다.



“오늘뿐만 아니고 네 인생엔 잊을 수 없는 날들이 많이 올 거야.”



 내가 손댔으니까. 뒷말을 굳이 꺼내지 않은 윤기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쟀다. 앞의 아이돌을 띄워주거나 위로를 할 마음은 없었다.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와 사회적 지위라면 망한 아이돌쯤, 적당히 띄우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 윤기는 담백하게 이어 말했다.



“잘해봐.”

“…….”

“네 목소리 좋던데.”



 춤도 잘 추고. 칭찬마저도 흘려 보내듯 단순했다. 미사여구도 없는 칭찬에 지민이 놀라 허리를 폈다. 낮은 목소리며, 전혀 칭찬하는 태도가 아닌데 말은 칭찬이다. 냉정한 사람이라 못 박아놨던 사람으로부터 받은 의외의 칭찬에 도톰한 입술이 어벙하게 벌어졌다. 방금 칭찬 받은 거야, 나…?


 지민은 그런 무조건적인 믿음이 실린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부모님조차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조심스럽게 다른 길은 어떠냐 물어봤었다. 그룹이 망했을 때도 사장님이며 멤버들이며 다들 믿어준다고는 했지만, 약간의 불안감이 남은 채 지민을 대했다.



“할말은 이게 전부야?”

“아….”

“전부인가 보군.”



 윤기가 시계를 들여다본다. 떠나려는 자세였다. 만나기는 어려운데 헤어짐은 빠르다. 아니나다를까 윤기는 첫 만남과 마찬가지로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은 채 발걸음을 뗐다. 아! 지민이 다시 허둥지둥 윤기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그…!”



 그러나 막상 얼굴을 보자 멈칫거린다. 용감했다가, 또 쫄았다가. 윤기가 하,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빨리 해. 네가 낭비하는 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거 같아서 말해주는데, 나 그렇게 뜸 들이는 거 싫어해.”

“그, 그럼 다시 또 만날 수 있어요?”



 헉. 윤기의 재촉에 지민이 빠르게 랩이라도 뱉듯 말해버렸다. 그리고는 방금 본인이 내던진 말에 스스로 놀랐다. 세상에. 나 지금 또 만나자고 한 건가? 이런 콘서트까지 공연할 수 있게 해주신 대단한 분한테? 그러나 막상 윤기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니 충동적으로 붙잡고 싶었다. 윤기는 놀라서 굳은 지민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마냥 보다가 픽 웃었다.



“왜. 다시 만나고 싶어?”

“…….”

“애쓸 필요 없어. 굳이 안 봐도 스폰 해줄 거야.”



 안 봐도 해주는 스폰…? 세상에 이런 스폰도 있나…? 무언가 이상한 것 같다. 지민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윤기가 문고리를 잡았다. 금방 떠날 것 같았다. 안돼. 지금 가면 아예 다시는 못 만날 거다. 급박해진 지민이 솔직하게 냉큼 지금 느끼는 생각 그대로 말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저…! 만나고 싶어요!”



 막상 말하고나니 지민은 이상한 점을 또 한번 찾아냈다. 스폰서가 부를 때 나가는 게 스폰 받는 사람 아닌가…? 스폰 받는 사람이 보고 싶다고 막 찾아가도 되는 건가? 너무 건방졌나 싶다. 심지어 윤기 쪽에선 그간 아무 연락도 없었다. 이 자리도 자신이 억지로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려 생긴 것이다. 지민이 슬쩍 덧붙였다.



“그런데, 어, 부사장님은 안 그러실 수도 있으니까, 전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부사장님이 원할 때 불러주세요…!”

“…….”

“불러주시면 노, 노래 해드릴게요…!”



 오디션이라도 보는 것마냥 어필하는 지민의 뺨이 살짝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딘가 쑥스러웠다.



“제 목소리 좋다고 하셨으니까….”



 부끄러워서 발가락이 꼬이는 것만 같았다. 지민은 상기된 얼굴로도 꼿꼿이 윤기와 시선을 맞췄다. 환한 무대의상을 입고 발그레한 모습의 아이돌은 금방이라도 카메라로 담고 싶을 만큼 풋풋했다.  윤기는 잠시 말 없이 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하얀 얼굴은 견고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무반응인 윤기에 지민이 이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떠올릴 쯤 진동음이 들렸다. 윤기가 주머니에서 폰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났네.”

“아…가셔야 돼요?”

“넌.”

“저요? 전…아!”



 맞다. 여유롭던 지민이 펄떡 뛰었다. 망했다. 잠깐만 간다고 하고 나왔는데. 경호원과 실랑이를 했고, 윤기와 같이 멀리 걸어오면서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야단이다. 이쯤이면 멤버들이 찾으며 사장님을 들쑤시고 있을 지도 몰랐다. 걸리면 이 상황을 둘러댈 방법이 없었다. 지민이 윤기에게 급히 꾸벅 인사했다.



“저, 저 일정이 있어서! 죄송하지만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지민이 부랴부랴 복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윤기가 황당하게 팔랑팔랑 바람처럼 사라지는 아이돌을 바라보았다. 하얀 옷으로 바쁘다며 사라지는 게 꼭 앨리스에 나오는 시계토끼 같기도 했다.


 허.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이렇게 내팽개치듯 등돌리고 뛰쳐나가는 건 그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윤기를 오래 곁에서 보필해온 비서가 봤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애라서 그런가….”



 윤기가 혀를 내둘렀다. 약간의 기막힘과 어이없음이 느껴지는 표정이었으나, 신기하게 불쾌함은 없었다.


 윤기는 다시금 진동이 오는 전화를 확인했다. 비서가 급하게 찾고 있는 듯했다. 잡혀있던 스케줄을 취소했더니 이해는 간다. 한참 만에야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비서가 우는 소리를 하며 윤기에게 매달렸다.



[사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시간이 많이 늦춰졌습니다. 급하게 연락 드리는데 도저히 닿질 않아서….]

“지금 갑니다. 공연이 이제 막 다 끝나서.”



 메인 공연이 한참이나 남은 콘서트를 끝났다고 단언한 그를 본다면 수많은 가수들이 피눈물을 흘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윤기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머릿속으로는 경호업체를 바꾸라는 명령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