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가상으로 만든 부족사회 시대를 배경으로 슈짐
삐이. 매가 들판을 가로질렀다. 활공하는 매 아래 움막들이 초원 위 줄지어 늘어서 있다. 가늘어진 동공으로 들판 곳곳을 살핀 매가 마침내 땅으로 내려와 커다란 나무에 착지한다. 삐이이. 꼭 누구라도 부르는 것마냥 울음소리를 내자, 몇몇 사람들이 달려와 매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무리 중 한 명이 튀어나와 매를 천으로 감싸주었다. 매를 덮은 천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머지않아 그 자리엔 작은 사내 한 명 서있었다. 무리에서 마중 나온 이들보다도 덩치가 왜소했지만, 사내는 부족에서 유명했다. 선대 족장이 거둬온 불쌍한 매 수인. 그리고 늑대 부족인 랑족에서 손꼽히는 전사로.
사내,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을 망토처럼 둘러 입었다. 들판에서 생활하는 다른 랑족들과 달리 유독 하얀 피부가 천과 잘 어울렸다. 지민이 말했다.
“어서 아파발께 안내해주세요.”
“그건 곤란합니다. 아파발은 현재 선대 아파발과 함께 계십니다.”
지민을 맞이한 전사는 단호했다. 부족을 다스리는 족장, 아파발은 아무 때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랑족은 특히나 권위 의식이 높은 부족이었다. 한낱 정찰 역할을 맡고 있는 지민이라면 아파발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반나절이던, 하루가 지나던 그것이 부족의 법칙이었다. 지민이 싸늘히 말했다.
“내일 전투에서 모든 랑족 전사의 시체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안내해주세요.”
“…….”
“부탁입니다.”
전사는 흔들리는 눈을 했다. 다른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정찰에서 어떤 것을 보았기에. 흔들리는 그들의 눈에 지민이 덧붙였다.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그럼 이리로.”
전사가 지민의 앞으로 앞장섰다. 지민은 급한 발걸음으로 좇았다. 한시가 급하다.
아파발의 움막은 랑족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했다. 귀하다는 범의 가죽이 입구에서부터 깔려있었으며, 건장한 체격의 전사 둘이 그 앞을 지키고 서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전사 둘이 지민을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같이 고개를 까딱인 지민이 문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사 둘이 창으로 지민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민이 미간을 찡그렸다.
“급한 일이라 아파발을 봬야 합니다.”
“기다리십시오. 안에는 선대 아파발께서도 계십니다. 아무리 아파발의 총애를 받는 지민님이라고 하여도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지민은 전사를 설득했다. 정말 급한 일입니다. 정찰과 관련된 일이에요. 그러나 전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겠군요.”
지민이 강제로 막아선 창을 뚫고 발걸음을 옮겼다. 전사들이 몸으로 지민의 앞길을 방해했다. 놓으십시오! 아파발! 아파발! 지민이 목소리를 높이길 잠시, 입구의 천막이 걷히고 반라의 사내가 짜증 가득한 안색으로 등장했다.
“왜 이리 소란스러워?”
“아파발!”
지민이 밝게 외쳤다. 아파발은 혀를 차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현재 랑족을 이끄는 아파발은 부족에서 이길 자가 없는 뛰어난 전사였다. 외견도 부족에서 손꼽힐 만큼 빛이 났다. 햇볕에 그을린 상체는 근육으로 잘 짜여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두 눈이 붉은색으로 빛났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렬한지 입구의 건장한 전사들조차 눌릴 정도였다. 아파발이 전사들을 향해 일렀다.
“눈치 없는 놈들. 다음부터 지민은 그냥 통과시켜라. 잘 때도 괜찮아. 얘는 내 형제나 마찬가지니까.”
“예, 알겠습니다!”
전사가 아파발을 향해 허리를 꺾어가며 인사했다. 전사들이 허리를 숙인 채 잘게 떨었다. 랑족의 현 아파발은 젊고 힘이 셌으나, 성정은 다소 급하고 자비 없었다. 지민이 전사들을 힐긋 보고는 눈치채 말했다.
“제가 무리하게 요구하여 막아선 거예요.”
“뭐야. 누가 뭔 짓 한다고. 넌 맨날 날 그렇게…아니, 그보다 정찰은 어땠어?”
아파발이 눈을 빛냈다. 아파발은 요새 다른 부족을 함락시켜 영토를 확장하는데 미쳐있었다. 살짝 광기마저 번들거리는 눈에 지민이 곧장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중후하면서도 인자한 목소리가 둘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지민이구나.”
이제는 노쇠하여 머리가 희끗한 선대 아파발이었다. 랑족의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대 아파발은 이제 장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지민은 장로를 보자마자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장로를 뵙습니다.”
장로는 황야를 떠돌던 지민을 직접 거둔 아비 같은 존재였다. 음식과 물이 없어 말라 죽어가던 지민에게 친절히 손을 내민 유일한 이였다. 같이 가자. 여기서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목숨이다. 입 하나 벙긋 못하고 쓰러져있는 지민에게 새 옷과 온기를 나눠준 그 순간부터, 지민은 장로를 위해 모든 삶을 쏟기로 결심했다.
“매번 굳이 그렇게 인사할 필요 없다는데도.”
장로는 따뜻한 미소와 함께 됐다는 듯 지민의 어깨를 한 손으로 두들겨주었다. 아파발이 그 잠시를 못 참고 손짓했다.
“어서 와서 정찰에 관한 보고를 해봐.”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파발이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파발의 책상에는 이미 들판의 지도가 크게 늘어서 있었다. 장로 역시 다시 조용히 책상으로 다가와 앉았다. 아파발이 장로를 흘긋 보았다. 정찰 보고는 아파발이 가장 먼저 듣는 게 원칙이었으나, 장로는 아직 몇 년 안된 아파발에게 아비이자 중요한 지략가였다. 지민이 입을 뗐다.
“내일 전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뭐? 범족이 대체 얼마나 깔려있었길래?”
아파발이 단박에 안색을 구겼다.
“어쩐지. 그래. 오면서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더니 다 여기 있었나 보네.”
랑족이 머무는 남쪽 광야부터 범족이 머무는 동쪽 강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 사이 기껏해야 랑족이 마주친 범족의 전사는 정찰을 온 몇이 전부였다.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오히려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조용했습니다.”
“아무도?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범족의 영역 바로 근처인 동쪽 강까지도 범족의 전사 무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몇이 보일 뿐, 그마저도 경계의 태세는 없고 평소처럼 영역을 돌아보는 듯했습니다. 우리 랑족이 남쪽에서부터 올라온다는 소식을 분명 들었을 텐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잠잠했어요.”
랑족이 벌써 몇 개의 부족을 함락시켰다는 건 들판에서 유명했다. 뱀족과 호족, 진족을 차례대로 멸족시키며 들판에서 누구보다 강한 부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전부 다 새로운 아파발이 물려받으며 일어난 성과였다.
그래서 지민은 그 점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동쪽을 차지한 범족이라해도 다른 부족의 전사들까지 먹어 치운 랑족은 결코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닐 터였다. 경계를 높이고 방어하는 게 당연하건만 범족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조용했다. 수상하리만큼.
“아무래도 내일 전투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
아파발이 지민의 판단에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인지 알고 하는 거야? 여기까지 오는데 달이 넘게 걸렸어. 이제 와서 아무 수익도 없이 우리 영역으로 돌아가자고? 꼴랑 범족 전사, 그것도 약해 보이는 놈들 목만 몇 개 딴 거 가지고? 초원의 모든 부족이 비웃을 거야.”
“아파발, 하지만 너무나도 수상해요.”
“흠…새로운 범족 아파발은 반쪽밖에 없는 새끼라지.”
아파발이 지도에서 범족을 가리키며 비아냥거렸다. 범족의 새 아파발은 인간과 범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 이어 받았다. 당시 그 소식이 들판에 퍼졌을 때 모든 부족이 범족을 비웃었다. 이제 범족이 멸망할 일만 남았구나.
수인화한 모습으로 정체성을 보존하는 부족에서 혼혈은 격이 떨어지는 존재로 취급 받았다. 애초부터 수인화를 하지 못하여 구석에 버려진 종족을 인간으로 구분하여 하찮게 여겼다. 어느 날부터인가 인간끼리 수를 늘려 하나의 나라를 만들고 지도자를 세웠지만, 수인사회에서는 여전히 멸시 받는 처지였다. 전사의 능력이 바닥을 치는 부족이라니.
그런 수인사회에서 범족의 새 아파발은 모든 이의 이야깃거리였다. 범으로 변하지도 못하는 약한 아파발. 격 떨어지는 인간들과 우호관계를 맺은 정신 나간 아파발. 오죽하면 범족이 들판에서 멸족하는데 채 5년도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말도 심심찮게 퍼져나갔다. 실제로 범족은 새 아파발을 세운 뒤 이렇다 할 활동을 들판에서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감이 좋지 않아요. 부디 제 이야기를 듣고 내일 전투를 멈….”
“아니. 네가 잘못 판단한 거야. 전투는 그대로 진행한다. 분명 그 놈이라면 부족 가장 안쪽에서 벌벌 떨고 있겠지. 아니면 우리 랑족이 온다는 소리에 아예 포기하고 도망 갔을지도.”
단호한 아파발에 지민이 입술을 꾹 씹었다. 아파발은 벌써 범족의 족장을 우습게 취급하며 범족을 점령할 생각에 들떠있었다. 범족까지 흡수한다면 우리 부족은 들판에서 제일 강한 부족이 될 거다. 하지만 아파발…. 지민이 이를 어찌 만류하나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사이,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장로가 말했다.
“아파발, 지민의 말이 맞습니다. 내일 전투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한창 들뜬 생각을 깨는 장로에 아파발이 장로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까지 왜 그러십니까. 그런 반 쪽짜리 혼혈이 이끄는 부족이 뭐가 무섭다고요.”
“범족은 척박한 황야에서부터 자리를 잡은 부족이라 전사 한 명 한 명이 강합니다. 들판을 오래 차지한 부족이니만큼 분명 우리가 이 근처까지 왔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지민이 말처럼 무슨 수를 꿰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군요.”
아파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장로는 지민을 대할 때와 달리 무감정하게 말을 이었다.
“새로운 범족의 아파발에 관해 알려진 건 아직 혼혈이라는 사실밖에 없습니다. 각 부족들이 참여하는 중앙회의에도 나온 적이 없으니 얼굴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요. 그렇기에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전의 범족을 이끈 아파발은 아무 이유도 없이 약해 빠진 혼혈에게 부족을 맡길 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 전 여태 모든 부족을 이겼습니다. 그런 별 볼일 없는 혼혈에게 제가 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파발이 억지로 미소를 띄워냈다. 그러나 장로는 여전히 딱딱한 태도를 유지했다. 오히려 말투는 한층 더 매정했다.
“여태 거머쥔 승리의 이유가 스스로가 뛰어나서라고 생각한다면 더욱 이 전투를 해선 안 된다.”
“…….”
“아비 말 들어라, 화우야. 시체로 돌아오기 싫다면.”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늙은 노인에게서 순간적으로 위협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지민과 아파발 모두 움찔했다. 그러나 아파발, 화우는 곧이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세우는 모습이 늑대로 변했을 때와 똑같았다.
“어디 아파발의 이름을 함부로 부릅니까.”
화우가 장로를 노려보며 짓씹듯 말했다.
“지금 랑족의 아파발은 접니다.”
“…….”
“다음부터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부족의 법대로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굴에 가둘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요.”
지민은 초조하게 화우와 장로를 번갈아 보았다. 점차 상황이 좋지 않게 변하고 있었다.
“아파발, 잠시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
“지민이 넌 닥쳐라.”
지민을 돌아보는 화우의 눈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약간의 열등감과 분노가 어그러져 섞여 있다. 지민은 이 눈을 어렸을 때부터 받아 왔다. 장로가 지민과 화우에게 활을 쏘는 법을 처음 가르쳤을 때, 지민이 먼저 과녁의 정중앙을 쏘고 칭찬을 받은 날. 또는 부족 내 활을 쏘는 대회에서 1등을 하여 기특하다며 장로가 지민에게 활을 선물로 준 날. 화우는 다시 아비를 돌아보며 호승심에 차 자신만만하게 내뱉었다.
“두고 보십시오. 반드시 이기고 말 테니.”
내일 전투를 준비한다. 덧붙이며 화우는 마지막까지 아비를 노려보고 뒤로 돌아 밖으로 빠져나갔다. 화우가 나가고도 아파발의 처소에는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지민이 한참이 지나서야 장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붙였다.
“…화우가 진심은 아닐 거예요.”
“아무래도 내가 화우를 잘못 키운 것 같구나.”
장로는 아직까지도 화우가 빠져나간 입구를 미련 가득히 시선으로 쫓고 있었다. 한 부족의 수장이었던 장로의 얼굴은 너무나도 늙어있었다. 족장으로의 삶보다 부모의 삶으로 느낀 회한이 담긴 것 같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지민이 힘 없이 책상 위로 올려진 장로의 손을 제 손으로 잡았다. 위로하는 손길에 장로가 그제야 지민을 돌아본다.
“지민아.”
“예.”
“화우를 잘 부탁한다.”
지민이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예, 제 목숨처럼 화우를 보살필게요.
***
동쪽에 흐르는 큰 강은 범족에게 중요한 영역이었다. 들판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만큼 넓은 영토를 가졌으나 대부분이 황야로 가득 했으니, 물은 범족에게 늘 부족하고 귀한 것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고 초원이 주된 영토인 랑족과 달리 강을 잃으면 범족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 없었다. 화우는 멀지 않은 곳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벌써 저 강이 자신의 소유가 된 것만 같았다.
“내 말이 맞았다.”
화우가 크게 웃었다. 저 모습 좀 봐라. 덜덜 떨고 있는 거. 랑족이 몸을 숨기고 있는 나무 뒤 강 건너 편에는 범족의 전사들이 방패를 들고 모여있었다. 활을 들고 있는 전사만이 방패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보였다. 전사의 수는 제법 되었으나, 여러 부족을 흡수해 불어난 랑족의 전사보다는 적었다.
“범족이 지배자 부족이라는 것도 이제 다 옛말이지.”
“아파발, 제가 상황을 보고 오겠습니다.”
지민이 말했다. 화우는 쉽게 허락했다. 그래. 다녀와라. 전쟁 전의 긴장감은 있었으나, 힘이 없는 부족을 대할 때처럼 조금은 우습게 보고 있었다. 망토를 걸친 채 바로 가려던 지민이 떠나기 전 화우를 향해 당부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오기 전에는 먼저 강을 건너지 마세요”
“걱정은. 됐다. 어차피 활 말고 검은 영 못 다루는 네가 내 곁에서 뭘 한다고.”
“그래도요.”
“알았으니 빨리 다녀와. 몸이 근질거리니까.”
화우가 맛있는 먹잇감을 보듯 범족이 있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감이 정말 좋지 않은데…. 생각하며 지민은 마지막까지 화우를 돌아보다 매로 변해 날개를 펼쳤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화우를 지키리라 되새기며.
하늘에서 내려다 본 전장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동쪽 강을 사이에 두고 랑족과 범족이 대치하고 있었다. 동쪽 강의 하류 중 어느 부간은 사람의 모습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얕았다. 범족은 화우의 말처럼 방패를 앞세워 똘똘 뭉쳐 다가올 랑족을 가로막고 있었다. 별 다른 이상은 없어 보인다. 지민은 그럼에도 쉽사리 안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정말 화우의 말대로 범족의 힘이 약해진 걸까?
한참을 주시하니 범족의 전사 대형이 조금씩 변화했다. 뭉쳐있던 방패 무리가 서서히 퍼지니, 그 사이로 검은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는 날갯짓을 하며 그를 유심히 주시했다.
저게…뭐지? 태어나 생전 처음 보는 것이다. 길다란 앞부리를 가진 물체는 사람보다 크기가 훨씬 더 컸다. 전사 한 명이 검은 물체로 낑낑거리며 무언가를 집어 넣더니, 곧 다른 전사들이 검은 물체의 앞부리를 랑족이 있는 반대편을 향해 겨냥했다. 무언가 낌새가 좋지 않다. 긴장으로 매의 날갯짓이 점차 빨라진다. 아무래도 알려야겠다. 낮게 내려가려는 그 순간.
콰앙! 커다란 폭발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놀란 지민이 날갯짓을 삐끗하여 공중에서 추락할 뻔했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매캐한 탄내가 났다. 아연실색하여 아래를 다시 보니 난리가 나있었다. 랑족이 있는 쪽의 거대한 나무가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검은색의 둥근 물체가 나무에 박혀있었다. 나무를 한방에 넘어뜨리는 위력이라니.
범족이 검은 물체를 더 꺼내 랑족을 향해 조준했다. 안돼. 지민이 파랗게 질렸다. 급히 내려가려는데, 어떤 소리가 지민을 붙잡았다.
…물소리?
강이니 물이 흐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다. 지민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인지 자세히 확인을 할 필요도 없었다. 강 위쪽이다. 이번에는 지민의 안색이 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려버렸다. 물. 막대한 양의 물이 강으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물에 들어갔다간, 랑족의 모든 전사가 휩쓸려 갈 게 분명했다.
이것이 계략이구나. 지민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미 아래쪽에서는 고둥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랑족의 전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
“돌격! 돌격하라!”
제발! 지민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한시라도 빨리 화우에게 도착하여 이 소식을 알려야 된다. 그렇게 날개를 기울여 아래로 내려가는 그때,
화살 하나가 날아와 지민의 날개를 관통했다.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꼈다. 삐익. 매가 긴 비명을 질렀다. 방향을 붙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공중에서 낙하한다. 빙빙 돌아가는 시야 사이에서 지민은 자신이 무엇에 맞은 건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게 죽는 건가 싶었다. 맥없이 떨어지며 아릿한 정신 사이, 순간적으로 지민의 귓가에 이명이 들렸다.
지민아. 화우를 잘 부탁한다.
자신은 죽을 수 없다. 죽으면 안 된다. 지민은 악착같이 남은 날개를 퍼덕여 나무 위로 방향을 틀어 추락했다. 삑. 나뭇가지에 부딪히고 긁히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땅에 꽂힌 새는 몸을 바르작거리더니 어느새 사람으로 변화했다.
“하아, 하, 윽!”
떨어진 곳은 랑족의 전사들이 머물던 터였다. 어깨에 꽂힌 활이 얼얼하다. 지민은 이를 악물고 활의 대를 부러뜨렸다. 그것만으로도 생살이 찢기는 충격이었으나,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이미 랑족의 전사들 대부분이 강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빨리…더 빨리….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섰으나 달랑거리는 팔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와 주저앉고 말았다.
“화우, 화우를 살려야 돼.”
정신력을 다잡는 이름을 되새기며 지민은 다시금 일어났다. 근처에 보이는 아무 천이나 빼 어깨를 감싸며 몸에 둘렀다. 팔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 지민은 강을 향해 달렸다. 맨발이 까지고 피가 나든 상관없이 뛰고 뛴 끝에 마침내 강이 다시 보였다.
“화우야!”
크게 외친 지민이 숨을 몰아 쉬며 입술을 씹었다. 이미 물이 랑족을 덮친 뒤였다. 화우야 안돼. 제발, 제발. 하늘에 빌며 지민은 전장을 살폈다. 물에 덮쳐지고도 살아남은 랑족의 전사들이 강 건너편으로 넘어가 싸우고 있었다. 저 속에 화우가 있을지도 몰라. 지민은 주저 없이 강에 발을 담갔다. 물살을 가로지르며 밖으로 나오자마자 범족의 전사가 지민에게 달라붙었다.
“더러운 늑대새끼, 죽어라!”
지민은 날렵하게 몸을 숙여 칼을 피했다. 그리고 범족의 급소를 발로 차 넘어뜨린 다음 얼굴을 짓밟았다. 컥, 컥. 헐떡거리는 범족의 머리를 차 기절시킨 다음 남은 손으로 범족의 칼을 뺏었다. 죽이는 건 필요 없다. 이미 졌다. 지민의 목표는 오로지 살아있을 화우를 찾아 이곳을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화우야! 화우…아.”
정신 없이 전장을 뛰어다니던 지민이 우뚝 섰다. 화우, 화우다. 커다란 몸집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화우가 살아있었다. 지민이 단숨에 화우를 향해 뛰어갔다. 이제 팔의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화우는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었다. 얼굴이 유독 하얗고 머리가 새카만 사내였다. 사내는 다른 전사들과 달리 긴 휘장을 등에 두르고 있었다. 범족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 같았다. 화우보다 체격이 작아 보이는데, 어쩐지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우가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크악!”
옆에서 튀어나온 랑족의 전사가 지민을 덮쳤다. 지민은 잽싸게 피하며 오로지 화우만을 향해 전진했다. 점차 가까워진 거리를 따라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자신이 미끼로 저 사내와 싸우고 화우만 탈출시키면 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마침내 헤집고 헤집어 화우에게 도달했다. 화우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범족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범족의 사내는 지민을 보더니 혀를 차며 짐짓 미간을 모았다. 이미 지민이 누구인지 아는 듯한 자의 얼굴이었으나, 지민은 그를 알아차릴 정신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 화우가 있었다. 때문에 지민은 이 역시 알아차리지 못했다. 화우와 지민을 번갈아 쳐다본 범족의 사내에 눈에 잠시 이채가 깃들었다는 것을.
“화우야!”
외치며 지민이 검을 휘두르려 높게 올려든 그 찰나.
“커헉….”
지민의 하얀 얼굴로 붉은 피가 확 끼얹어졌다. 시야가 핏빛으로 붉게 변한다. 지민이 정지했다. 모든 세상이 느리게 흘러갔다.
“커흑…컥….”
화우의 가슴을 꿰뚫은 칼에 피가 흘렀다. 화우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은 사내는 무표정하게 칼을 빼냈다. 피 몇 방울이 하얀 사내의 얼굴에도 튀었다. 화우가 무력하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화우의 피가 지민의 얼굴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작은 손에서 칼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화, 화우….”
다리에서마저 힘이 풀린 지민이 앞으로 고꾸라진 채 더듬더듬 화우를 불렀다. 넘어진 지민의 등위로 사내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네가 랑족의 아파발이 그렇게 아낀다던 매구나.”
“…….”
“그럴만하네.”
사내가 지민을 가늘어진 눈으로 천천히 훑더니, 느릿하게 낮은 목소리를 이었다.
“왜 그런지 알겠어.”
그에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얼굴에 끼얹어진 피 때문인지 시야가 붉은 것 같았다. 사내가 붉은 색으로 흠뻑 적셔져 보였다. 분명 사내의 얼굴에 아까 화우의 피는 별로 튀지 않았는데. 모든 감각이 멍해진 지민이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사내는 이내 지민에게서 시선을 떼고 크게 외쳤다.
“모두 들어라. 랑족의 아파발은 죽었다.”
주변의 모든 범족과 랑족이 사내를 쳐다보았다. 몇몇 범족이 말했다. 아파발, 민윤기. 그런 소리들이 어지러이 지민의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지민은 느리게 제 앞의 사내가 어떤 자인지 알았다. 범족의 계략을 알아챘을 때만큼이나 느리게.
범족을 다스리는 자. 새로운 범족의 혼혈 아파발. 윤기가 칼을 들어올렸다.
“범의 승리다.”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민은 이내 상관없이 다시 화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화우야. 화우야. 눈 좀 떠봐. 화우야, 내가 왔어. 모든 정신이 고장 난 것 같았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화우의 피가 지민의 손을 적신다. 아니면 내 피인가? 온통 붉은색, 또 붉은색. 함성도 귓가에서 멀어지더니, 붉어진 시야는 점차 검은색으로 뒤바뀌었다.
“아….”
눈앞이 흔들리더니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민이 본 마지막은 이랬다. 어느새 자신을 보고 있는 범족 아파발의 새하얀 얼굴.
곧 암전이 지민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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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물체는 대포 맞아요ㅎㅎ
너무..오랜만이죠?...ㅋㅋ..머쓱...
하 이미 저질러놓은 건 많은데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서 못 참고 불쑥 썼어요ㅜ.ㅜ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이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