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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황혼의 시간>












 전쟁은 윤기의 예측보다 잔인하고 끔찍했다. 동쪽 숲은 매캐한 연기로 자욱이 뒤덮었고 남쪽 강은 군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전쟁 발발 직후 제국은 연합국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국경선이 붕괴되고 연합군이 지나가는 곳마다 폐허가 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태운비는 귀족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조건으로 중요직책을 남발했다. 군의 총책임자 자리인 군대관직은 평생 검 한번 잡아본 적 없는 고위귀족들의 손아귀로 굴러 떨어진 지 오래였다.


 무능한 황실은 원성을 샀다. 황실문이 화가 난 백성들의 손에 의해 뚫리기 직전인 상황까지 몰렸다. 안되겠다. 태운비는 귀족들의 비위를 맞춰주던 안면을 싹 몰수하고 중앙청 회의를 열었다. 이러다 하나뿐인 제 자식인 3황자가 백성들에게 질질 끌려 전쟁터에 내던져지겠다.



“누가 가시겠습니까.”



 귀족들은 헛기침을 하며 설설 태운비의 눈치를 보고 시선을 피했다. 자리 하나 얻을 땐 그리 눈에 띠려고 나서더니. 아무나 잡아 보내야겠다고 생각할 그 무렵. 황태자가 적막한 회의장에서 입을 뗐다.



“제가 가겠습니다.”



 의외의 인물은 의심을 부르기 마련이다. 무슨 수작이지? 그러나 결론적으로 태운비는 승낙하고 말았다. 당장 한치 앞 상황이 급했고, 어차피 무능하고 방탕한 소문을 달고 살았던 황태자니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온다면 태운비의 입장에서 아쉬울 일은 없었다. 게다가 명분도 좋았다. 황태자가 직접 전쟁터로 간다니! 백성들도 입을 다물 것이다.


 민윤기는 황실을 떠나 전쟁터로 향하는 말 위에 탔다. 발길에 머뭇거림은 없었으나, 떠나기 전 황태자는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오래 준비했어도 긴장은 되시는 모양입니다.”



 황녀가 손수 떠나는 윤기를 위해 황태자궁을 방문했다. 윤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박힌 듯 의자에 앉아 방 안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까지 못 만나는군.”



 끝까지? 사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전서구라도 기다리는 것인가. 아무리 추측해도 황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윤기는 연이어 커다란 한숨을 쉬며 눈을 뒤로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주먹을 꽉 쥔다.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목걸이인 듯 했다. 줄 끝에 황태자가 연회에서나 종종 끼고 있던 반지가 걸려있었다.



“…떠나기 싫게 만드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별 거 아니다. 전쟁터에 끌려가는 게 무서워서 혼잣말을 좀 했다.”



 무서워하는 얼굴이 아니라 짜증이 난 얼굴 같습니다만. 황녀가 정직한 발언을 하기 직전, 마침 윤기를 보필하는 부관이 달려와 보고했다. 태자전하, 군사행렬이 전부 준비됐습니다. 윤기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챙겼다. 금세 피곤한 안색이 확 긴장으로 조여 들었다. 가지. 부관을 달고 나와 하얀 말에 올라타기까지 윤기의 발걸음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황태자가 지휘하는 군사는 동쪽으로 향했다. 황폐해진 숲을 가로질러 연합국이 침범했던 국경선을 되찾아 나갔다. 그렇게 동쪽에서부터 남쪽으로. 강의 줄기를 따라 빼앗긴 제국의 땅을 회복했다.


 전쟁터에서 그렇게 3년이 지났다.







***






 막사 가운데 남쪽 강 유역이 상세히 표시된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부관과 윤기는 모여 지도를 나무 막대로 짚으며 군사회의를 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마무리되어 가자, 부관이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곧 연합국 쪽에서 항복을 선언할 거 같습니다. 아마 내일 전투가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행이군. 보급로가 끊겼으니 더 버티면 시체만 쌓을 뿐이란 걸 그들도 알고 있을 거야.”

“황궁으로 바로 귀환하실 겁니까?”

“그래야지. 너무 멀리 오래 떠나있었지 않나.”



 윤기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부관은 그 모습을 흘금 바라보았다. 전쟁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저 화려하고 값비싼 반지를 황태자는 매번 꼭 쥐고 있었다. 부관은 저 반지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았다. 예전 회의에서 직언을 올린 적이 있었다. 군사들의 시선에 그런 장신구는 좋지 않으니 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윤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 한 방울 귀한 전쟁터에서 사치품이 분명 보기 좋을 리는 없을 거다. 그러나 윤기는 빼는 대신 옷 안으로 숨겨 넣을 뿐이었다. 이러면 안 보이니 상관 없지 않느냐. 어차피 귀해서 많이 꺼내보지도 못한다. 가진 단서가 딱 이거 하나뿐이라.


 부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반지가 그 정도로 비싼 건가. 아닌 듯 한데. 아무리 부관이 몰락귀족 출신이라도 반지가 어느 정도 값어치를 하는진 알 수 있었다. 황실에 쌓인 보물이라면 저 반지보다 차고 좋은 게 훨씬 많이 존재할 것이다. 황태자의 본 모습을 알고 황태자를 따르기로 결심했지만 여전히 황태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이를 테면 지금처럼 반지를 안타깝게 바라본다던가, 쉽게 깨지지 않을 보석이 박혔건만 애지중지 감싼다던가. 꼭 헤어진 연인처럼.


 부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애써 보지 않은 척 다른 말을 했다.



“아무리 연합군이 퇴각 중이라 하여도 전쟁은 전쟁이니 각별히 신경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말라. 절대 죽지 않을 테니.”



 죽을 순 없어. 윤기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아직 얼굴도 못 보고 화도 못 냈단 말이지.”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예 반지와 대화를 한다. 순간적으로 부관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전쟁터가 너무 벅찼었나. 아무래도 아군의 시체를 밟고 적들을 베어내는 것이 황태자 전하께 큰 영향을 미친 듯했다. 워낙 무덤덤한 얼굴이라 평소에도 속뜻을 알기 힘든 분이니 홀로 버티다 이리 되신 걸 수도 있다. 윤기가 부관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부관의 그런 생각을 절단시켰다.



“이만 가는 건 어떤가. 그 표정 그대로 나가면 반역자라 불릴 거 같은데.”



 헛기침을 짧게 한 부관은 지도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편히 쉬십시오.






 혼자 남은 윤기는 작게 벌어진 막사의 틈으로 달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지민을 본 후 생긴 습관 같은 것이었다. 달이 보이지 않는다. 윤기는 신음하며 이마를 손으로 꾹 눌렀다.



“…….”



 지민은 3일이 지나도, 3달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심지어 전쟁이 끝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엔 황태자궁이 아니라 나타나지 못하는 건가 추측도 했다. 그러나 지민은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태자전하가 계신 곳이라면 전 다 갈 수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보다 하얗게 질린 얼굴 때문인 것 같았다. 용이 아플 수도 있는 건가. 지민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답답했다. 얼굴과 이름, 그리고 종족만이 민윤기가 아는 전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보냈을 거다. 차라리 그때 사라지는 연기를 주워 모아 가둬놔야 했나 후회도 했다.



“…….”



 늦게 나타났다고 뭐라 하지 않을 테니 보여만 다오. 윤기가 반지에 짧게 입술을 꾹 눌렀다 뗐다. 말간 얼굴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







“퇴각하라!”



 연합군이 외쳤다. 연합군의 지휘관은 윤기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의 머리를 돌렸다. 와아아아! 제국군이 지축을 뒤흔들 만큼 커다란 함성을 질렀다.


 남쪽 강 유역은 대체로 날이 맑은 편이었다. 그러나 가끔 폭우가 내릴 때가 있는데, 그 시기가 마지막 전투와 딱 겹쳤다. 진흙에 무거운 전투화가 푹푹 빠졌다. 갑옷을 입은 윤기의 하얀 얼굴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윤기는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짙은 먹구름과 안개에 가려져있다.


 이제 황궁으로 갈 수 있다. 그 순간 윤기는 단 하나만을 떠올렸다. 황제의 왕관도 아니었으며, 선황도 아니었다. 지민아. 그리운 말간 얼굴. 어쩐지 황궁으로 돌아가면 지민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태자전하, 하문하십시오.”



 부관이 윤기를 불렀다. 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끝낼 시간이었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자. 칼을 높이 들어올리려던 그때.


 제국군 쪽에서 날아온 화살이 윤기의 어깨를 관통했다.



“태자전하!”



 부관이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윤기의 어깨에서 뜨끈한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격렬한 고통에 윤기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활을 쏜 자를 잡아라! 심상치 않은 상황에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태자전하, 괜찮으십니까? 어서 태자전하를 모시….”

“아니. 가려라.”

“예?”

“활의 대를 꺾고 상처가 보이지 않게 가리라고 했다.”



 부관은 입술을 꽉 물었다. 윤기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았다. 전쟁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려는 거다. 황태자가 직접 전쟁을 끝내는 장면을 병사들이 보면 그 소문은 제국 전체에 퍼질 것이다. 황제가 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테지. 그러나 활이 박힌 부위를 확인한 부관이 단호히 말했다.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영영 팔을 쓰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윤기가 짜증스레 재촉했다. 상관 없다. 듣지 못했느냐. 어서 하라. 결국 부관은 망설이다 활의 대를 꺾었다. 쇠가 박힌 채 충격이 전해졌으니 어마어마한 고통일 것이다. 윤기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질끈 씹은 입안에서 피가 흘렀다. 그 위로 제국의 국기를 둘러 감쌌다. 다행히 붉은 색의 국기라 상처를 감출 수 있었다. 윤기가 일어나 칼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병사들이 기쁨에 찬 얼굴로 환호했다. 윤기를 중심으로 길이 갈라진다. 윤기는 말에 올라타 검을 든 채, 그 길을 가로질렀다. 국기를 팔에 감은 채 전쟁의 승리를 알린 황태자. 그를 바라보던 군중 속 누군가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그 외침은 빠르게 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윤기는 어지러운 머리를 참지 못하고 침상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냥 태운비의 독약이 든 차를 마시고 죽는 게 편했을 거 같군. 아니면 잘 때 보내진 자객에게 아주 빠르게 살해당한다거나. 윤기를 부축한 부관 옆으로 군의관이 다가왔다.



“환부를 확인하겠습니다.”



 부관이 윤기의 갑옷을 벗겼다. 군의관과 부관, 모두 곧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하얀 옷은 완전히 붉게 물들어있었으며, 벌어진 상처는 보기만해도 심각해 보였다. 부관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대체 이 상태로 말은 어찌 타신 겁니까!”

“…머리가 울린다…작게 말하도록….”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괘씸하다. 주인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냐. 반역이네.”



 부관이 인상을 구겼다. 작은 농을 던진 윤기는 혼자만 짧게 실소를 흘렸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점점 의식이 멀어진다. 부관과 군의관의 말소리조차 희미해졌다. 허공에 붕 뜬 기분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민아. 네가 보고 싶다. 이렇게 가는 건 많이 억울하다. 아직 널 보지도 못했는데. 귀히 여겨주지도 못했고 아직 입밖에 맞춰보지 못했는데.



“태자전하, 눈을 뜨셔야 합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태자전하!”



 부관이 윤기의 뺨을 붙잡아 흔들었다. 그 순간 어깨의 상처로부터 흘러내린 피가 윤기가 목에 걸고 있던 반지로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반지에서 금색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따스해 보이는 빛은 순식간에 번져나가 윤기의 온 몸을 감쌌다.



“이, 이게 무슨….”



 놀란 부관이 윤기의 몸에서 손을 뗐다. 빛에 감싸이자마자 윤기의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하고 있었다. 군의관 역시 입을 딱 벌린 그때, 막사로 급히 병사 한 명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부관님,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늘에 기이한 일이….”



 부관은 병사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냐 병사에게 물을 필요도 없었다. 막사로 나가자마자 장엄함 광경이 부관의 눈을 휘감았다.


 용이었다. 검은 먹구름이 뭉쳐 용의 형상이 되어있었다. 뱀이 똬리를 튼 것마냥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모든 병사들이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먹구름으로 만들어진 용이 커다랗게 울부짖었다. 부관은 무릎이 덜덜 떨렸다. 짓눌릴 것만 같은 위압감이었다.


 용의 눈이 번쩍거렸다. 커다란 천둥 같은 빛이 몇 명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윤기를 감싼 빛과 비슷한 종류였으나, 날카롭고 차가웠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울며 외쳤다.



“자, 잘못했습니다. 그저 태운비마마께서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부관은 덜덜 떨리는 입술로 명령했다. 저자들을 묶어라. 먹구름으로 만들어진 용은 그들이 묶인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원래 없던 것처럼.







***







 반짝, 윤기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죽었나. 여기가 바로 사후세계인가. 화살에 찢겼던 어깨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아무래도 진짜 죽었나 보군. 생각하며 손으로 더듬더듬 바닥을 짚었다. 푹신한 풀밭이었다. 이대로 다시 눈 감으면 되겠군. 아무것도 하기 싫다. 죽으니 이런 건 좋아. 생각하며 태아처럼 몸을 말고 눕는데.



“어, 깼어요?”



 죽었더니 환청이 들리는 건가.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다정한 목소리에 윤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박지민이었다. 지민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안아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정확히 윤기의 기억에 새겨진 모습 그대로다. 달빛을 닮은 금발 머리카락과 총명하게 빛나는 새까만 눈동자. 윤기는 언제 모든 걸 다 귀찮아했냐는 듯 지민을 향해 뛰었다. 지민이 새된 목소리로 꽥 외쳤다. 태자전하!



“아직 그렇게 달리면 안돼요!”



 이렇게 움직이시면 안 되는데…. 작게 중얼거리던 지민은 결국 입을 꾹 닫고 말았다. 점점 가까이 다가온 윤기의 표정을 보니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거친 숨을 내쉬는 하얀 얼굴은 눈물로 잔뜩 젖어있었다. 윤기가 그대로 지민을 품에 가둬 안았다. 두 팔로 으스러뜨릴 듯 지민의 허리를 꽉 감싸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다.



“보고 싶었다.”

“…….”

“너무 보고 싶었다.”



 지민은 마주 윤기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위로하듯 토닥거렸다. 잠시간의 포옹 끝에 윤기가 지민을 놓아주며 물었다. 조금 전의 그리움이 가득 담겼던 표정과 달리 심각했다.



“헌데 설마 너도 죽은 것이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가 죽은 자가 오는 곳이 아니더냐? 난 활을 맞아 죽었다.”



 윤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수가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성인이 족히 반나절은 걸어야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만큼 컸다. 커다란 호수는 밤하늘과 달을 품고 있었다.



“저승치고 쓸데없이 풍경은 좋구나. 이곳에서 이제 우리 둘이 살게 되는 거냐?”

“아니 저승이라니. 제 집이거든요?”

“…이곳이?”

“정확히는 집은 아니긴 한데…살고 있긴 하니까….”



 지민이 호수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윤기가 되묻자니 지민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얼굴인 듯했다.



“어…그냥 잘 풀렸다고만 말하면 믿어주실 겁니까?”

“아니.”



 황태자는 쉽게 넘어가는 적이 없다. 지민이 머리를 열심히 굴려가며 설명했다.



“제가 태자전하를 치료했는데, 잠시 몸이 치료되는 동안 이곳으로 잠깐 전하의 혼을 불러서…어….”



 횡설수설 열심히 설명하긴 하는데 영 재주가 없다. 어찌됐든 태자전하는 죽은 게 아니고…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밖에선 전하의 부관이 황궁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긴 한데…. 윤기는 심각해지는 지민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설명은 듣고 있지 않았다. 고민하느라 톡 튀어나온 입술이 귀여웠다. 놔뒀다간 하루 종일 떠들 모양이라, 윤기는 불쑥 지민의 말을 잘랐다.



“알았다.”

“…정말요? 알아 들으신 겁니까?”

“아니. 그런데 이리 안 하면 네가 멈추지 않을 거 같아서.”



 그게 뭐예요. 지민이 자존심 상한다는 듯 인상을 모은다. 윤기가 달래듯 지민의 손을 잡아 강하게 당겼다. 그 순간 돌연 지민이 흠칫거리며 작게 인상을 구기고 신음을 흘렸다. 윽, 아…. 윤기가 곧장 지민의 손을 놓고 살폈다.



“무슨 일이냐. 다친 게야?”

“아니에요. 별 거 아닙니다.”

“이리 내봐라.”

“괜찮습니다.”

“어서.”

“정말 괜찮아요.”



 지민이 은근슬쩍 팔을 뒤로 감춘다. 그를 놓치지 않고 윤기의 눈동자가 따라간다.



“정말이냐.”

“예.”

“그렇구나.”



 윤기의 덤덤한 어조에 지민이 안심한 듯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눈에 띌 세라 화제를 돌렸다.



“이제 드디어 태자전하께서 황제가, 아!”



 윤기가 지민의 팔을 확 낚아채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깨로부터 시작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윤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옮겨가기라도 한 듯 자신이 활에 맞았던 곳과 똑같은 위치였다. 지민이 급히 윤기의 손에서 제 팔을 비틀어 빼내 소매를 내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거기에 상처가 있는 거냐.”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금방 낫습니다. 하룻밤이면 충분해요.”



 자신의 어깨에서 사라진 상처. 동시에 지민의 어깨에 생긴 상처. 화살이 뚫린 똑같은 자리. 만나자마자 지켜주겠다던 그 약속. 유추하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윤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날 지켜준다는 거였느냐? 널 깎아내는 게?”

“…….”

“여태 이렇게 살았던 게냐? 황궁을 지킨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여태 황제들에게 이랬느냐?”

“아닙니다! 거의 다 괴물이라고 그냥 사라지라고 내쫓아서….”



 윤기의 얼굴이 더욱 딱딱히 굳었다. 지민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화를 자극하는 말 같았다. 윤기가 단호히 말했다.



“다신 이런 짓 하지 마라.”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태자전하가 위험했습니다.”

“앞으론 죽게 둬.”



 지민이 마찬가지로 표정을 굳혔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당연한 일을 한 거예요. 전 황궁의 영물이니 태자전하를 지켜야 했어요.”

“아니. 네게 그런 의무는 없다.”



 윤기는 단호했다. 이래서 보여드리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지민이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축 떨어뜨렸다. 태자전하는 말이 너무 많아요. 그냥 고맙다고 해주면 안되나…. 윤기가 팔을 뻗어 지민의 손에 제 손을 엮었다. 더는 이렇게 두고 볼 수 없다. 지민은 얌전히 윤기에게 손을 내맡긴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민아.



“나와 함께 가자.”



 같이 가자. 이런 상처가 더는 생기지 않게 해주겠다. 윤기가 단호히 말했다. 지민이 놀라 눈을 크게 뜬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말인 듯 했다. 그러나 이내 입술을 달싹거리다, 마주보던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그건 곤란할 거 같아요.”

“내가 싫은 것이냐?”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머지않아 지민의 하얀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다. 입술을 꽉 깨문 지민이 먼저 얽혀있던 윤기의 손을 놓았다.



“전 여기서 나가면 안돼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나가면 안 된다니. 윤기가 무어라 입을 연 순간, 지민이 서서히 넘어가는 달을 확인했다. 무언가를 숨기려는 사람마냥 다급하게 윤기의 어깨를 밀었다.



“이제 그만 가요.”



 그 손길이 닫자마자 윤기는 눈이 감겼다. 안돼. 안 된다. 지민아. 나를 이리 보내지 마라. 손을 뻗었으나 닿지 못했고, 입을 열었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잠기는 시야 사이로 지민이 멀어진다. 암전이었다.







***







 부관이 침상에 누워있는 윤기의 옆에서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 반지에서 나온 금색 빛이 윤기의 몸에 흡수 되듯 사라진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옆에 앉은 의관을 괜히 재촉했다.



“태자전하께 아무 이상도 없는 게 확실한 것입니까?”

“예, 예.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사옵니다.”



 의관이 쩔쩔맸다. 의학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아니, 문제가 없는 수준을 넘어서 기적이었다. 화살이 박혔던 어깨는 말끔하게 아물었다. 심지어는 상처자국조차 남지 않았으며, 그동안 전쟁에서 윤기가 얻은 크고 작은 다양한 상처자국까지 다 사라졌다. 조금 더 기다려보심이…. 답답해하는 부관을 의관이 말릴 즈음.


 윤기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태자전하!”



 부관이 반색하며 일어났다. 괜찮으십니까? 깨어나시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수많은 걱정을 쏟아내는 부관에게 윤기는 답 대신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내가 줄곧 이 막사에서 잠들어 있었느냐?”

“예? 예. 반지에서 빛이 나온 뒤 계속 이곳에 계셨습니다. 그는 왜….”



 윤기는 연이어 화살이 박혔던 어깨 자리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멀쩡한 어깨를 확인하더니 곧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다.



“누가 이리 하라 했어, 누가.”

“태자전하…?”



 윤기의 혼잣말을 이해하지 못한 부관이 의아하게 윤기를 불렀다. 윤기는 그제야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부관과 의관을 확인했다. 생사가 위험했던 상처가 나았는데 좋아하진 못할망정 왜 욕을 하시나…. 그러나 윤기는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침상에서 아예 몸을 일으켰다. 다시 칼을 찬다.



“당장 황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



 드디어 3년만의 귀환이었다.







***






 지민은 무릎을 끌어안고 홀로 호숫가를 둘러싼 울창한 나무에 기대앉아있었다. 달이 밝은 밤, 호수가 품은 달만 고요히 빛났다. 황궁에 뿌리가 박힌 지 몇 백 년이 지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런 날이면 종종 장난을 치기도 했다. 호수 위 달 주변을 걷거나 그 위에 동동 떠있거나. 그러나 오늘은 머릿속에 단 한 문장만 맴돌았다. 나와 함께 가자.


 가자고? 여기 밖을 나가자고?


 밖으로 나가면 좋을 거 같다. 태자전하를 매일 볼 수 있고, 달이 아닌 해도 볼 수 있으며, 황궁 밖을 벗어날 수도 있다.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더는 사람들을 몰래 흘끔거리며 쳐다보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게 되면 사람들도 나를 볼 수 있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지민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과거의 파편이 스쳐 지나갔다.


 괴, 괴물이다!


 새파랗게 질려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 움찔한 지민은 금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은 모두 변한다. 다정한 호의로 손을 내밀었던 사람도 지민의 능력을 보면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지민을 피했다.


 지민은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호숫가로 다가갔다. 고요한 수면은 거울처럼 지민의 얼굴을 비췄다.



“…….”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금발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두 개의 뿔이 솟는다. 사슴의 뿔처럼 컸다. 연이어 동공은 뱀처럼 길게 찢어진다. 지민의 얼굴이 슬픈 빛으로 물들었다. 태자전하도 이 모습을 보면 끔찍하게 여기겠지. 스스로를 마주보던 지민은 곧 수면 위를 손으로 헤집었다. 물이 흔들리며 얼굴이 뭉개진다. 다시 손을 뺐을 때, 평범한 인간의 모습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지민은 먼 예전 처음 이 호숫가에 발을 들였을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숨을 곳을 주겠다. 대신 그 대가로 내 후손들을 보살피거라.


 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내는 그리 말했고, 머지않아 붉은 용포를 몸에 두르고 왕관을 썼다. 그 뒤로 그는 매일같이 전쟁을 일으켰고 상처를 입을 때마다 지민을 불러냈다. 지민은 알면서도 불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유일하게 지민이 말을 나눌 수 있는 상대였다. 외로움은 신체에 새겨지는 상처들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마저도 죽어버렸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렇게 지민은 이제 누군가에게 제 이름을 말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태 만난 황태자들이 보인 반응은 대부분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외면당하거나, 기겁하면서 무서워하거나. 아예 다른 경우로는 검을 들고 베려고 한다던가. 지민도 그들을 이해했다. 무서울 테지. 인간과 달리 생겼는데, 심지어 호수 밑바닥에 갇힌 본체에서 영혼만 빼내 돌아다닌 상태라 희미하게 사라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 그때, 윤기를 만났다. 아직도 윤기를 처음 만난 순간이 감격스러웠다. 빨개진 눈으로 사납게 노려보던 황태자는 지민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때부터 지민은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기대대로 윤기를 만나는 시간은 행복했다. 수면의 틈에 달빛이 쏟아질 때마다 윤기를 열심히 찾아갔다. 만나는 내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심지어는 이미 다 겪어서 알고 있는, 윤기가 읽어주는 제국의 역사서조차 흥미로웠다. 윤기 쪽으로 무너져 내리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웃느라 바빴다. 모습을 감추기 위해 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은 아쉬웠고, 윤기의 아쉬운 눈길을 보면 떠나고 싶지 않았다.



“…….”



 윤기가 황제가 된 모습을 상상했다. 제국을 잘 다스릴 거 같다. 머리 좋고 훌륭한 분이니까…. 여태 만난 어느 황제보다 성군이 될 거다.



“그래도 즉위식은 보고 싶은데….”



 지민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낮에는 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밤하늘에서 서서히 달이 사라진다. 유난히 밤공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이만 몸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지민이 점점 투명하게 변해 사라진다.


 호수 바닥 아래 묻힌 거대한 용의 눈꺼풀이 잠시 꿈틀거렸다.






***







 온갖 소문을 달았던, 그러나 제국을 전쟁해서 구한 황태자의 황제즉위식은 성대했다. 윤기는 눈코 뜰새 없이 뒤틀려있던 황궁의 일을 바로잡아 나갔다. 가장 먼저 포박한 첩자의 자백으로 태운비와 3황자의 계략을 밝힌 후 그들을 황족시해죄로 처형했다. 외교관계 문제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항복깃발을 올린 연합국이며, 새로운 황제의 즉위로 인해 방문한 사절단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공을 세운 가문을 치하하는 둥, 단순하게 한 마디로 침소에서 눈을 붙이는 일이 없었다.


 윤기는 며칠이나 밤을 새 핏발이 선 눈으로 대서관을 불렀다. 대서관은 황실의 모든 역사를 기록하는 자였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백발의 노인이 정중히 예를 취하기 무섭게 윤기는 그의 앞으로 그림 한 점을 내밀었다. 그림은 빈말로도 잘 그렸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대서관이 미간을 살짝 모으며 말했다.



“이 그림은 무엇입니까.”

“이곳을 찾아라.”



 대서관은 그림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커다란 호숫가와 주변의 키 큰 나무들이 빼곡히 서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넓은 제국에 열 곳도 넘게 존재한다. 대서관이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그림의 실력이 미약한지라 아무래도 이것만으로는….”

“내가 그렸다.”



 대서관은 입을 다시 합 다물었다. 저 말은 달리 해석하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란 뜻이다. 소, 송구합니다. 대서관이 땀을 뻘뻘 흘리건 말건 윤기는 상관 없다는 듯 연이어 명령을 내렸다.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상관 없다. 제국의 모든 곳을 뒤져 찾아라. 또한 황실의 숨겨진 역사서가 있다면 그것도 구해오도록 하라.”

“예, 알겠습니다.”

“물러가도록.”



 다시 윤기가 책상에 쌓인 역사서로 손을 뻗었다. 황제만 출입할 수 있는 서재에서 황실의 역사와 관련되어있단 책은 모두 뽑아서 읽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나 대서관은 윤기의 명령에도 머뭇거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 말이 남아있느냐. 아니면 명령을 이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냐.”



 윤기의 말에 대서관이 황급히 답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그림과 비슷한 곳이라면 가까운 자리에 하나 있긴 합니다. 예전에 선황 폐하를 모신 적이 있습니다.”

“…선황께서?”

“예.”

“그곳이 어디냐.”



 대서관이 망설이며 입술을 뗐다 붙였다 했다. 말하기 곤란한 듯한 얼굴이었다. 윤기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대서관을 다시 한번 재촉했다.



“내 이제 알았군. 대서관께선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황제의 명령을 받들 생각이 없다는 걸.”

“다, 당치 않습니다. 그곳은….”



 윤기의 눈치를 살핀 대서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입을 뗐다.



“황궁에 있습니다.”

“황궁이라? 황궁에 이런 곳이 있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

“폐하께선 가신 적이 없으실 것입니다. 선황께서 모든 이들의 출입을 금했던 곳인지라 발길이 끊긴지 오래입니다.”

“…후원의 숲을 말하는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황제의 집무실은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후원의 숲. 황실의 후원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숲이 존재했다. 역사서에서나 가끔 황실에서 사냥대회를 열 때 찾았던 곳이다. 선황은 사냥을 즐기지 않았고, 때문에 윤기의 기억에서조차 잊혀진 곳이었다. 모자란 황태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으니 스스로 그곳에 가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침묵을 깬 것은 윤기였다. 대서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시종장을 불렀다.



“말을 준비해라. 후원으로 가겠다.”

“예, 전하. 시종들에게 채비를….”

“아니, 혼자 가겠다.”



 황제는 모든 장소에 시종을 동행해야 한다. 그것이 법도였다. 그러나 황제의 표정은 단호하다. 시종장은 당황했으나 이내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후원의 지도를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숲은 황궁에서 멀어질수록 울창한 나무를 자랑했다. 윤기는 말을 몰아 달릴수록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점점 꿈이지만 꿈이 아닌 그곳에서 봤던 나무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도에 표시된 호수에 도착했을 때. 윤기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앞에 두고도 못 찾았으니.


 이곳이다. 지민을 만난 장소와 똑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그 당시 호수는 달을 품고 있었고, 지금은 해를 품고 있었다. 윤기는 말에서 내려 호숫가 근처를 향해 걸어갔다. 한 발자국만 더 내밀면 물 위다. 빛을 만난 수면이 반짝거리며 빛난다. 파동 하나 없는 호수엔 하늘이 담겨있었다. 끝없는 창공 같았다.


 윤기는 문득 선황이 눈을 감기 전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그곳엔 괴물이 산다. 아닙니다. 아바마마께서 틀리셨습니다.

 그토록 다정한 사람이 어찌 괴물이겠습니까.



“지민아.”



 대답은 없었다. 보이지 않지만 지민이 보이는 듯하다. 어쩐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윤기는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 애정이 넘치는 미소였다. 그 채로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지민이 듣고 있다고 확신하며.



“나는 네가 그림자 속에 있도록 놔두지 않을 거다.”



 낮고 단단한 울림이 호수 위로 퍼진다. 윤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 청량하고 맑은 숲의 냄새가 반겼다. 지민의 냄새 같았다. 맨날 네가 찾아왔으니 이제 내가 널 찾아가야겠다. 이 정도면 그 동안 많이 참지 않았느냐.



“허나 이렇게 말한다고 네가 순순히 나오진 않겠지?”



 다행히도 3년이나 만나지 못했던 지민을 만난 날을 윤기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깨에 화살이 박혀 죽을 뻔했을 때. 영리한 윤기는 단숨에 지민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눈치챘다. 바로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때다.


 윤기는 눈가를 좁혀 가늠하듯 호수를 바라보았다. 익사가 죽을 때 가장 고통스럽다는데. 물은 많이 차갑나. 몸에 힘을 빼는 과정이 여간 쉽지 않을 거 같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내 평생 자살을 시도해 볼 줄은 몰랐구나. 익숙지 않아서 어렵긴 한데, 하다 보니 될 거 같다.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만나고 싶은 하얀 얼굴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대로 몸에 힘을 뺀다. 붉은 용포를 두른 이가 물 위로 떨어졌다. 커다란 물보라가 일었다.








***








 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난데없이 사람이 위로 떨어졌는데, 그게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란 사실이. 더불어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고막을 두드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뛴 것도 잠시, 정신 없이 인간으로 변해 윤기를 건져내야만 했다. 살면서 많은 인간을 지켜봤지만 이런 인간은 처음이다. 정말이지 민윤기는 박지민의 모든 처음을 잡아먹고 있었다. 자살은 익숙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힘내보겠다며 몸을 던지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거냐고.


 지민이 다급히 윤기의 뺨을 두드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미동도 없다. 살며시 불안해진다. 혹시 조금 늦었나.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지민은 윤기의 가슴에 귓가를 가져갔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불안 때문에 그런지 조금 약한 거 같기도 하다. 안되겠다. 능력을 사용하려 윤기에게 손을 뻗은 그 순간, 지민의 손목이 덥석 다른 손에 잡혀 길이 막혔다. 지민과 달리 커다랗고 뼈마디가 굵은 손이었다.



“쓰지 말라고 했는데 또 말을 안 듣고….”

“전하!”



 윤기가 말을 잇지 못한 채 거칠게 물을 토해냈다. 켁켁거리는 윤기의 등을 지민이 두들겨주었다. 됐다, 괜찮다. 손을 들어 윤기가 지민을 저지했다.



“이제 폐하라 불러라.”



 윤기는 언제 생사의 기로에 섰냐는 듯 허허로운 소리나 지껄인다. 지민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점점 벌개지던 눈으로 윤기를 노려보았다. 원망스레 가슴팍을 퍽퍽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장난을 치실 때입니까?”

“장난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누가 생각도 없이 그렇게 호숫가에 몸을 던집니까!”

“생각이 없긴 널 보고 싶, 욱!”



 윤기가 남은 물을 마저 토해낸 후 숨을 가쁘게 몰아 마시었다. 그리고는 지쳤다는 듯 세상 다 산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두 번 할 짓은 못 되는 구나. 숨이 서서히 막히는 게 아주 끔찍하고 무서웠다.”



 끔찍하고 무서웠단 사람이 어떻게 말 한 마디를 안 지나. 윤기를 노려보는 지민의 시선이 더욱 강렬해진다. 윤기가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지민을 마주보고는 멋쩍은지 젖은 뒷머리를 손으로 헤집어 털었다.



“뭘 그렇게 눈을 치뜨고 있는 게냐. 보기만해도 내 눈이 다 시리다.”

“…….”

“계속 그러고 있을 작정인 건 아니겠지. 그래도 주인이 이리 왔는데.”

“주인은 무슨….”

“네 입으로 넌 황실의 소유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제 내가 황제인데 내 것이지.”



 얄밉고 괘씸하기 짝이 없는 뻔뻔함이다. 지민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찌되었든 앞으로 다신 이러지 마세요.”

“그래. 익사는 나도 좀 괴롭다. 앞으론 널 보려면 다른 방법으로 정해야겠다.”

“그걸 지금 말이라…!”



 그 순간 요동치는 감정을 따라 지민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뿔이 나고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지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지민이 숨기듯 뿔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수사슴과 비슷한 크기의 뿔은 작은 두 손으로 결코 가려지지 않았다. 안돼. 윤기의 눈동자가 지민의 얼굴이 아닌 머리 위로 올라간다. 뿔을 보는 게 분명하다. 지민이 급히 윤기가 보지 못하도록 몸을 돌렸다.



“보, 보지 마세요.”



 어떡하지. 윤기가 봤다. 봐버렸다. 그토록 숨기려 했는데 들켜버렸다. 심장이 발 밑으로 끝도 없이 떨어진다. 지민은 다시 윤기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윤기는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경멸에 차서, 두려움에 차서 저를 바라보는 윤기를 본다면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도망가야겠다. 후회된다. 진짜 본체라 영혼으로 나왔을 때처럼 사라지지 못하는 게 원망스러웠다. 어디로 가야 되지? 어디든 일단 윤기의 눈 앞에서 사라져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평상시와 똑같은 높낮이를 가지고.



“그게 너의 일부인 거냐.”

“…….”

“지민아.”



 윤기가 지민의 어깨를 붙잡는다. 물에 빠졌다 나와서 그런지 손은 차가웠다. 그대로 지민을 제 쪽으로 돌렸다. 지민의 시선이 땅에 처박힐 듯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연이어 윤기는 뿔을 가리고 있는 지민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하얀색의 곧게 선 뿔은 지민이 윤기와 다른 존재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뿔을 바라보던 윤기가 다시 지민과 시선을 맞췄다.



“너와 잘 어울리는구나.”



 지민이 다시 조심스레 윤기와 눈을 맞췄다. 그 안엔 두려움도 공포도 없었다. 여전히 애정 어린 단단한 눈이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왜. 무서워하길 바랐느냐. 위엄 있어 보이는, 뭐 그런 걸 원한다면 무서웠다고 해주마.”



 윤기가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맞춰주기 힘들구나. 아름다운 걸 보고 무서워하라니. 지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여러 차례 감았다 떴다.



“정말 제가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왜 무섭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폐하와 다르잖아요. 모두가 무섭다고 했어요.”



 윤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그간 지민이 어떤 세월을 살아왔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윤기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평범한 사람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무엇이 다르단 거냐. 나와 같다.”

“…….”

“나는 네가 전혀 무섭지 않다.”



 말하며 윤기는 지민의 손을 잡았다. 두 손 모두 차가웠다. 그러나 두 명이 붙인 손바닥 사이로 점점 온기가 퍼져나갔다. 윤기가 말했다.



“지민아 나는 아까 정말 무서웠다. 숨이 서서히 졸려오는데 아무 발버둥도 칠 수가 없었다. 주변은 점점 컴컴해지고 의식은 혼미해지고. 내 생에 그렇게 무력한 순간은 처음이었다. 꼭 커다란 괴물에게 삼켜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더는 널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일 두려웠다.”

“…….”

“그리고 이 무서운 곳에 계속 혼자 있었을 네가 생각나서 마음이 저렸다.”



 얼마나 너는 이곳에서 혼자 존재했을까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거기까지 말한 윤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서 지민아 나는 네가.



“나는 네가 그곳에 있는 게 싫다.”

“…….”

“나와 가자.”

“…….”

“혼자는 너무 무섭지 않느냐.”



 눈물 나게 다정한 목소리다. 지민은 이 목소리를 한번 들은 적이 있었다. 입을 맞춘 날, 자신을 끌어안은 채 기다리겠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그는 다짐대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꼬박꼬박 기다렸다. 지민의 목구멍으로 뜨끈한 게 울컥 차올라 왔다. 곧 울 것 같은 그 얼굴을 보면서, 윤기는 작게 웃었다.



“해가 있어서 좋구나. 이런 얼굴도 자세히 볼 수 있고.”



 지민은 더는 참지 못하고 윤기의 품으로 쏟아져 내렸다. 목을 감아 어깨에 얼굴을 푹 묻었다. 달려오는 무게감에 속수무책으로 뒤로 넘어가면서도 윤기는 지민을 견고히 받아냈다. 두 팔은 지민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마침내 연기가 아닌 사라지지 않는 지민이 손에 잡혔다. 그대로 지민이 윤기의 귓가에 속삭였다.



“매번 폐하를 이렇게 오랫동안 안고 싶었어요.”



 그 말에 짧게 웃은 윤기가 같이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도 이리 꽉 끌어안고 싶었다.”



 달이 아닌 해가 그들의 주위를 밝혔다. 흐르는 빛이 찬란했다.







***








 성군인 황제 밑에서 태어나, 한 때는 온갖 괴상한 소문을 달고 다녔던 황태자는 선황 만큼이나 훌륭한 성군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제국 역사상 가장 강한 황권으로 대리청정으로 무너졌던 제국의 틀을 다시 바로 세웠다. 부당하게 뿌려졌던 주요관직들을 되찾아왔으며, 알현을 신청한 백성들과 만나는 시간을 늘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연합국과의 관계 역시 발전했다. 잠정휴전계약을 맺고 국경선은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워졌다. 추후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제국의 황금기라 불렀다.


 때문에 제국의 모든 사람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뜬금없는 황제의 황위계승선언에.



“폐하, 제발 그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모든 귀족들이 반발하며 일어났다. 이리 옥체가 멀쩡하신데 어찌하여! 제국 역사상 이렇게 일찍 황위를 승계하신 분은 없습니다. 중앙청에서 귀족들의 우는 소리뿐만 아니라, 제국 곳곳에서 상소가 올라왔으나 윤기는 단호했다.



“이미 나는 결정을 내렸으며 현명한 계승자가 있다.”



 귀족들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황녀를 향했다. 황녀는 윤기가 즉위한 이후,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관직에 앉아있었다. 황녀의 표정 역시 여느 귀족과 다르지 않다. 설마 진짜로? 귀족들의 시선을 확인한 윤기가 태연하게 긍정했다.



“바로 황녀다.”



 윤기는 빙긋 웃었다. 그날 이후 상소문의 행렬이 2배로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







 금색 용의 휘장이 장식으로 늘어진 황제의 알현실. 황녀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권을 무시했다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당장 군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그 시선을, 윤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차를 한 모금 삼켰다. 황녀는 그런 윤기가 더욱 얄미웠다. 저 하얀 얼굴 밑에 깔린 간사한 생각을 모를 줄 알고.



“다 떠넘기고 가시는 겁니까?”

“떠넘기다니. 말이 심하군, 황녀.”



 윤기가 여유롭게 대꾸한다. 아니긴. 황녀는 환멸 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윤기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 6년을 옆에서 같이 일하다 보니 이제 어느 정도 저 머릿속을 알 거 같다. 아니, 지금은 아예 윤기가 훤히 속을 다 내보이고 있다. 모든 일을 떠맡기고 황실 후원에 숨겨놓은 연인과 시간을 보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황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6년전 황제가 후원의 숲에 커다란 궁을 지은 이유, 그리고 황제의 비밀연인이라 소문이 무성한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남자라는 것까지. 윤기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그대도 황제의 자리를 원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렇게 밀린 일 처리 떠안듯 원하진 않았습니다.”

“아 슬프군. 그간 이룬 내 업적이 아무 일도 아니라 폄하 당하다니.”



 전혀 슬프지 않으면서 슬픈 척은. 황녀는 이만 윤기를 추궁하도록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황녀 역시 머리 좋은 지략가였다. 서로에게 득인 일이었다. 황제는 후계를 낳을 생각이 없고, 황녀는 지금이 아니면 황위를 가질 수 없었다. 황녀가 물었다.



“앞으론 어디로 가실 겁니까?”

“뭐 일단 여기저기 돌아다니겠지. 다스린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전혀 안 궁금한 어조로 궁금한 척을 한다. 황녀는 이 역시도 가볍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황제가 끼고 도는 연인이 가고 싶다고 한 모양이지. 간단한 잠행마저도 귀찮아하는 황제에게 제국을 돌아보는 일이 반가울 턱이 없었다. 윤기는 곧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잘 부탁하지. 일부러 부수지만 말아줬음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욱 훌륭하게 다스릴 테니.”

“그럼 기대하겠네.”



 윤기는 당찬 황녀의 발언에 작게 웃었다. 실제로 황녀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고, 아마 제국은 윤기가 깔아놓은 밑판과 황녀의 영리한 머리로 더욱 날개를 달 것이다.


 그 해, 제국 최초로 여황이 즉위했다.






***






 소아원은 7살미만의 어린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곳이다. 주로 제국의 수도나 중심부에나 있는 기관이었으며, 최근엔 여황의 뜻에 따라 제국 곳곳에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의 수도와는 한참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엔 약 2년전 이상한 소아원이 새로 생겼다. 작은 마을의 소아원은 다른 소아원과 달리 규모가 아주 작았다. 학생 수가 10명이 채 되지 않을뿐더러 선생은 단 두 명, 수업시간은 2시간으로 짧은 편에 속한다.


 일찌감치 수업을 끝낸 선생 중 한 명은 팔짱을 낀 채 교실 뒤편에 앉아있었다. 뚱한 얼굴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 가득 쓴 채. 윤기는 불만스럽게 웅얼거렸다.



“대체 왜 이것들은 사라지질 않아.”



 남은 선생 중 한 명, 지민은 수업이 끝나고도 아이들 곁에 앉아 있었다. 지민이 다정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천히 먹어도 돼.”

“천천히 먹긴. 빨리 먹고 가라. 수업은 한참 전에 끝났잖아.”

“아냐. 천천히 먹어.”

“네~”



 아이들은 윤기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란 듯 지민과 말을 섞었다. 선생님 내일은 뭐 배워요? 내일도 간식 먹어요? 윤기의 인상이 더욱 불만으로 물들며, 의자에 몸을 한껏 젖혀 기대앉았다. 서럽다, 서럽기 짝이 없다. 이래서 키워봤자 다 소용 없다더니. 지민이 혼자 다 들리게 꿍얼거리는 윤기를 향해 외쳤다.



“그럴 거면 집에 혼자 가요.”

“가고 싶다 나도.”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먼저 일어나진 않는다. 오히려 더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는다. 지민은 간식을 다 먹은 아이들의 손을 털어주며 인사를 건넸다. 내일 보자. 어느새 의자에 딱 붙어있던 윤기가 일어나 같이 대충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래. 빨리빨리 가라. 집으로 곧장 가.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지민이 그제야 윤기를 돌아보았다. 윤기가 감탄하는 시늉을 했다.



“드디어 날 볼 생각이 든 거냐. 황송하기 이를 데 없구나.”



 지민이 그에 가볍게 웃으며 윤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리고는 애정 가득한 눈웃음을 선보이며 윤기의 품에 안겨왔다. 허리를 꽉 두르고 달래듯 얼굴을 비빈다. 윤기는 안겨있는 작은 체구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매번 이렇게 넘어가려고 하지.”

“예. 그래도 넘어가 줄 거잖아요.”

“…용이 이렇게 세속적으로 변해도 되는 게냐.”



 저렇게 대놓고 이용해먹는데도 윤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아도 어쩔 수 없다. 봐주지 않으려고 해도 달처럼 빛나는 두 눈만 보면 일단 자신도 모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예, 다 형님한테 배웠습니다.”

“이제 말 한 마디를 안 지지.”

“어째 그리 속이 좁아요. 이 넓은 제국 땅은 대체 어떻게 다스린 건지.”

“어린 애들 여럿 상대하느니 차라리 황제 역할이 더 쉽다. 대관들은 시끄럽게 굴다가도 화내면 말은 들어.”

“아아 알았어요. 그런데 언제 형님이 날 키워요. 형님을 내가 키웠지.”

“네가 키우긴. 내가 널 키웠지. 기억 안나? 책도 읽어주고….”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또 연설을 듣게 생겼다. 이럴 때면 지민은 윤기의 말을 멈추는 방법을 알았다. 지민이 윤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뗐다. 예정된 것처럼 윤기가 말을 뚝 멈춘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빛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지?”



 지민이 대답하기도 전, 윤기가 먼저 두 뺨을 부드러운 손길로 감쌌다. 그대로 맞붙는 입술. 지민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이내 윤기의 목에 팔을 둘렀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에게 밀착했다. 애정 어린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서서히 노을이 지는 주홍 햇볕이 그들의 곁에 머물렀다.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함께했고, 낮게 내려온 지금, 행복하기만 할 뿐이다. 확신할 수 있다. 함께라면 어디라도 따사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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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진 2020.01.22 17:27
    와와. 대박. 토페님 글이 그리워 단편을 다시 읽고 있었는데, 하편이 올라오다니. 운이 좋네요! ㅠㅠ 흑흑.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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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리썬 2020.01.22 17:35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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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스러기 2020.01.23 03:06 SECRET

    "비밀글입니다."

  • ?
    가을달 2020.01.23 18:01 SECRET

    "비밀글입니다."

  • ?
    몽교 2020.02.17 01:05 SECRET

    "비밀글입니다."

  • ?
    융기해 2020.02.29 03:46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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