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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리 - 운명의 파트너>









윤기는 가로등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신 적은 처음이다.


그놈의 퇴사가 뭐라고. 야 축하한다. 너가 우리 중에서 1등이야. 같은 대학교 수인 동기들이 부어주는 술을 모두 받아 마셨더니 머리끝까지 취해버렸다. 진짜 미친놈들이었다. 퇴사가 아니라고, 아는 동생이 부탁해서 이직하는 거라고. 아무리 이유를 덧붙여도 윤기 앞으로 들어오는 술잔은 멈추지 않았고, 민윤기는 띄워주는 분위기에 휩쓸려 한잔 두잔 끝도 없이 들이켰다.


윤기는 기다시피 차를 주차해놓은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건 주차위반 견인통지서 종이였다. 어렴풋 조금 전 동기를 데려올 테니 차키를 빌려 달라던 놈이 떠올랐다. 진짜 이 씹새끼들.


윤기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므로 동기놈의 사지를 절단한다는 욕을 하는 대신 금방 해결책을 생각했다. 대리는 취소하고…택시를…. 뒤질 거 같다. 도저히 못가겠다. 지하철역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던 윤기는 결국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려면 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윤기는 주변을 흘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민윤기 인생에 노숙이라니. 그건 인권포기나 마찬가지였다. 폼에 살고 죽는 윤기는 용납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무언가를 결심한 윤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컴컴한 길목 가로등의 주홍 불빛, 널브러진 직장인용 수트. 머지않아 수트 사이로 고양이가 머리를 꾸물럭 내밀었다. 밝은 회색빛의 러시안블루였다. 신비한 빛깔의 에메랄드를 닮은 녹색 눈동자는 과음으로 또렷하진 않았으나, 원체 그 빛깔이 예뻤다. 인간이면 노숙이지만 수인 본체 고양이로는 노숙이 아니니까.


미야아….


러시안블루는 비틀거리더니 이내 수트 위에 몸을 말고 털썩 엎어졌다. 10분정도만, 정말 잠깐 누워있어야겠다. 찬 바닥에 머리를 대니 술이 좀 깨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새벽이라 다행이다.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그 무렵.



"으아악! 오, 옷이 움직여…!"



등장한 또 다른 직장인 수트. 누가 봐도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남자가 야단을 떨며 등장했다. 감각기관이 아예 마비된 건지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시끄러움에 윤기가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으어어, 내 심장. 왜 옷이 길 한 복판에 버려져있는 거야. 엉엉 귀신인줄. 심장을 부여잡고 있던 남자는 뒤늦게야 옷 사이로 빼꼼 고개를 드러낸 러시안 블루를 눈치 챘다.



"고양이?"



시끄러운 목소리는 조금이나마 회복했던 정신력을 다시 두 쪽으로 갈라놨다. 뇌를 수백 개의 바늘로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윤기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가련하게 울었다. 어디 병들어 버려진 고양이처럼.


냐아…. 해석하자면 이렇다. 시끄러워. 닥쳐봐….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자는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부작용만 났다. 기겁한 남자가 윤기를 안아들었다.



"야옹아 아픈 거야? 누가 버리고 갔나? 괜찮아?"



설상가상 안 그래도 울렁거리는데 손길이 몸을 건드린다. 윤기는 절박하게 울었다. 건들지 말라고. 울렁거린다고. 넘길 거 같다고. 손 떼라고.



"괜찮은가…."



손은 옆구리를 쓰다듬다 조금 더 올라와 얼굴까지 매만졌다. 물어버려? 아니다. 입을 열면 그대로 오늘 삼킨 술들이 타고 올라올 것 같았다. 대신 비키라는 의미를 담아 얼굴로 손을 밀어냈다. 그 미약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은 최후의 부탁이었다. 그러나 손의 주인은 대체 어떤 의미로 알아먹은 건지 치우긴커녕 윤기의 이마를 살살 매만져왔다.



"많이 아파?"



어떡하지, 어떡해. 동동 발을 구르던 남자는 손톱을 까득까득 씹었다. 손목에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캔이 봉지에 담겨 달랑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기운이 통 없는 고양이 앞에서 한참이나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다, 어떤 대단한 결심을 한 건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야옹아, 조금만 참아."



윤기는 공중으로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아니야, 이거 아니야. 냐옹, 냐아. 윤기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꼬리로 남자의 손목을 감으며 말렸다. 놔, 놔봐. 결국 윤기는 참지 못하고 남자의 품에 웩 속을 올렸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야옹아! 조금만 참아!"



겔겔거리는 윤기를 남자는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그 뒤로는 전력으로 뛰었다. 롤러코스터를 탄 효과가 났다. 윤기는 남자의 품 안에서 모든 것을 게워낸 후 혼절하고 말았다. 길거리 동물 구조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남자는 옷이 젖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동물병원 간판 아래 문을 힘차게 열고 뛰어들었다.



"선생님! 고양이가 아파요!"



닥쳐봐 좀…. 그 기운 없는 전하지 못한 협박이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유언이었다.

나이 서른, 이직을 앞둔 민윤기는 길에서 납치를 당했다.





***





반짝, 윤기는 눈을 떴다.



"……."



푹신푹신한 감촉은 혼자 사는 오피스텔의 침대보다 딱딱했고, 코에 닿는 냄새는 어색했다. 처음 와보는 공간이다. 예민하게 반응하기에는 속이 영 메슥거렸다. 때마침 저쪽에서부터 왕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의 두 귀가 쫑긋거린다.



"선생님, 슈가가 아직까지 눈을 뜨지 않는데요? 괜찮은 걸까요? 정말 그냥 탈진이라서 그런 게 맞는 건가요?"



바로 그놈이었다. 어제 납치범이 저기 있었다. 윤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는 전화를 붙들고 애걸복걸 매달렸다.



"선생님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우리 슈가가 위험한 건가요?"



윤기는 슈가가 누구인가, 하는 기본적인 의문 대신 울리는 골을 붙잡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납치범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봐도 그다지 크지 않은 키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 모습의 윤기보다 조금, 아주 미세하게 조금 작았다.


남자는 스피커폰 모드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의사의 답답한 목소리가 들린다. 같은 말씀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단순 탈진이에요. 일어나면 물이나 좀 주시면 됩니다. 아…네…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감사합니다. 남자는 영 석연찮은 표정으로 머지않아 전화를 끊었다. 뒤통수에 콱 박힌 윤기의 시선은 모르는 듯했다.



"어떻게 고양이가 술에 취해?"



돌팔인가. 다른 병원도 이러나. 태형이랑 같이 갔던 병원에선 안 그랬는데. 남자는 맞는 말만 남긴 의사를 의심하며 혼자 이상한 결말을 내렸다.


윤기는 남자를 놔둔 채 시선만 굴려 집을 살펴보았다. 침대는 슈퍼싱글, 벽걸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진, 각종 사물이 바닥에 자유분방하게 튀어나와있는 집안. 윤기의 밑에는 부드러운 담요가 깔려있었다. 이 이불 저 이불 마구잡이로 꺼내놓은 걸 보니 누가 봐도 담요를 찾아 헤맨 꼴이었다. 아무래도 남자는 어제 데려온 고양이를 위해 급히 잠자리를 마련한 모양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남자는 잘못이 없었다. 민윤기가 수인이고, 과음으로 떡이 된 상태였다는 걸 모르는 남자는 단순 동물구조를 한 거다. 손수 집에 데려와서 따뜻한 잠자리까지 내어주고, 진심으로 생명도 걱정해준다. 이런 과분한 친절은 사회인 민윤기에게나 필요 없을 뿐이지, 남자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착한 인재였다. 차분해진 윤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쁜 건 저 남자가 아니라 앞뒤 상황 생각 안 한 동기새끼들이었다.


다시 지민 쪽으로 윤기의 시선이 스스슥 박힌 그때.



"슈가…?"



뒤를 돌아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단숨에 함박미소를 띄우고 윤기의 앞으로 돌진해왔다.



"슈가야!"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부담스러울 만큼 가깝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황한 고양이는 뒤로 고개를 슬쩍 뺐다.



"괜찮아? 괜찮아 슈가야? 이제 안 아파?"



…슈가? 내가? 누가 슈가래? 아까부터 의사한테 따지던 이름의 주인공이 자신이었단다. 황당한 윤기는 제멋대로 이름을 만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벙 쪄 가만히 있자니, 남자는 요리조리 윤기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숨소리는 괜찮은 거 같은데."



남자가 윤기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기는 앞발로 남자의 얼굴을 차단하듯 꾹 밀었다. 숨소리는 오히려 남자가 거칠게 쉬고 있었다. 푹신한 앞발에 막힌 남자는 눈을 댕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제 입을 막은 앞발을 내려 보았다. 곧 입매가 말랑하게 풀리더니 헤실헤실 웃는다.

뭐야. 윤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병원도 다녀왔는데, 얘는 내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나?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남자가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가 건드리는 걸 귀찮아하는 평소 성격대로라면 팍 쳐냈겠지만, 나름 상황이 상황이었다. 윤기는 영 의심쩍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아빠랑 살자, 이제 혼자 안 돌아다녀도 돼."



아빠? 윤기는 일순 말을 잃었다. 이로써 확정이다. 남자는 자신이 수인이라는 걸 모른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슈가야."



아까부터 신나게 확정지어서 부르더니 이젠 대놓고 못 박기까지. 윤기는 꼬리만 팔락거렸다. 대답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 남자는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듯 생글생글 눈을 휘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수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겠다. 가만히 있었다간 남자가 목에 슈가라고 단 하트 이름표라도 가져올 기세였다. 신체 건강하고 정상적인 멘탈을 가진 사람으로서 애완동물 취급이나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이상 서로 민망한 일을 만들지 않는 게 낫다. 윤기가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킨 그 순간이었다. 남자의 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무섭도록 표정이 굳어진다. 조금 전 따뜻한 말투는 어디 갔는지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지킬앤하이드 부럽지 않은 반전이었다.



"아…강대리…어떻게 주말에, 하…."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명함 하나가 같이 팔락팔락 윤기의 앞으로 떨어졌다. 영업 1팀, 박지민. 명함에 적힌 이름이었다.



"네, 강대리님. 네, 네. 아 지금요…? 아 네 확인해보겠습니다. 네."



전화를 조심스레 끊은 지민의 얼굴에 급격히 먹구름이 꼈다. 사람이 맞나….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는 윤기를 확인하고는 인상을 풀었다. 마시멜로 냄새가 날 것 같은 다정함이었다.



"슈가야 일찍 돌아올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지민은 부랴부랴 물그릇까지 떠 윤기의 앞에 놨다. 그렇게 쾅 문이 닫혔다.



"……."



러시안블루 고양이가 크림색 담요에서 빠져나왔다. 잘됐다. 번거롭게 밝힐 필요도 없고. 이 사이에 빠져나가면 간단한 납치사건은 종료될 수 있다. 윤기는 지민의 명함을 밟고 일어났다. 옷은 훔쳐입으면 되겠고…, 착착 계획을 세우던 순간. 회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고양이가 멈칫했다.


방금 밟은 명함에서 어떤 익숙한 단어가 보였는데. 윤기는 다시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대명기획 에메랄드빛 눈이 파도 치듯 흔들렸다.


'형 한번만 도와줘요. 1년도 아니고 몇 개월만 부탁해요. 월급은 지금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도 가능.'


영업 1팀이면, 그러니까…. 납치범은 한 달 뒤 팀장자리를 권유받은 회사의 팀원이었다.



"……."



삼류 드라마 스토리로 써도 백 번은 까일 설정이다. 이런 우연도 세상에서 일어나긴 하나 보다. 잘 짜놓은 무대 세트장 위에 출연한 연기자가 된 기분이었다. 지민을 만난 뒤로 윤기는 벌써 두 번이나 인생에서 몇 없던 황당함을 맛 봤다. 그것도 단 하루만에.


지민이 몇 주 뒤 다시 볼 사람이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여전히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몰래 사라지는 거였다. 한편 머리 반대편에서 사정사정하던 전정국의 말이 떠올랐다.


'형만 믿을게요. 잘 찾아봐주세요. 영업팀 쪽에 있는 게 분명해요. 산업스파이만 캐내면 형이 얼마를 원하든 다 줄 수 있어요.'


이직의 이유. 애걸복걸 매달리던 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회사 분위기를 먼저 파악하는 게 분명 도움이 될 텐데….


윤기는 고민을 시작했다. 명함을 다시 한 번 보고 앞에 놓인 물그릇을 또 봤다. 인권을 포기한 채 애완동물이 되어 살아가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인생이다. 하지만 몇 달은 걸릴 수도 있는 귀찮은 일이 반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



주인 역할 할 사람도 착한 거 같고. 적당히 주는 밥 먹고 누워서 고양이 흉내만 몇 번 내면 될 거다. 아주 간단하게 일이 해결될지도 모른다. 러시안블루 고양이는 다시 담요로 돌아와 몸을 말고 누웠다. 지민은 모르는 간택식이 끝났다.





***





지민은 모처럼 태형과 약속을 잡았다. 그들은 8살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일명 동네친구였다. 중간 태형이 고등학교를 해외로 다녀온 시간만 제외하면 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을 했다. 그런데 저번 주말, 지민이 고양이 슈가를 집에 들인 뒤로 그 연락이 잠시 끊겼었다. 약속장소는 애견카페였다. 태형이 종종 키우는 강아지 연탄이를 맡기는 곳이라고 했다.



"지민아, 여기."



카페에 먼저 앉아있던 태형이 지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태태! 지민이 마주 반갑게 웃으며 곧장 태형이 있는 좌석으로 달려왔다. 골든리트리버가 지민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꼬리까지 힘차게 흔들면서. 태형이 말했다.



"넌 진짜 동물들한테 인기 많다."

"그런가?"

"엉, 존나."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태형의 말대로 지민은 유독 어릴 때부터 동물들과 빨리 친해지곤 했다. 길고양이는 물론, 처음 보는 옆집 강아지, 이구아나, 뱀, 심지어는 어항 속에 담긴 비단잉어. 태형은 박지민한테만 동물을 잡아당기는 신기한 마력이 있는 건가 고민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대학교 다닐 때 박지민의 별명이 동물원이었다. 왜냐하면 같은 과의 수인들이 죄다 박지민한테 목을 매서.


지민은 유순하고 애교 많은 성격과 달리 낯을 잘 가렸다. 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사람한테는 관심도 주지 않는 철벽이었다. 심지어 불필요한 건 빨리 잊는 성격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지민을 거머리같이 쫓아다니던 호랑이 수인의 이름마저도 지금은 다 까먹었다.


지민이 익숙하게 골든리트리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동시에 저쪽에서 앙앙거리며 콩알만한 강아지가 달려왔다. 겁도 없이 자기 몸의 네 배는 되어보이는 리트리버에게 몸통 박치기를 하더니, 끝내 지민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오구구, 우리 연탄이. 보고싶었쪄.



"근데 너 고양이는 갑자기 만난 거라고? 그 고양이가 너 막 길가는 거 따라온 거 아니야. 어떻게 생겼어?"

"아냐. 길에서 쓰러져있길래 내가 데려왔어. 사진 보여줄게. 완전 예뻐."



지민이 연탄이를 끌어안은 채 자랑스럽게 갤러리를 열었다. 셀카가 줄을 지었던 갤러리에는 회색빛의 러시안블루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거 봐. 완전 미묘야. 그치?"



지민이 확 밝아진 얼굴로 화면을 보여주었다. 우리 슈가 너무 예쁘지. 영락없이 자랑하는 팔불출이었다. 그러나 태형은 마땅한 반응 없이 입맛을 다셨다. 사진은 엉망이었다. 초점은 흐렸고 슈가라는 이름의 고양이는 지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고양이 얼굴에서 귀찮음과 언짢음이 한가득 느껴졌다.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진 없어?"

"다른 거? 있지. 잠만."



지민이 갤러리를 넘겼다. 중간중간 넘어가는 사진들에서 슈가는 모두 누워 자고 있었다. 깨어있는 거 어제 찍었었는데. 중얼거리며 열심히 찾던 지민이 다시 한 번 화면을 내밀었다.



"귀엽지? 대박이지?"



태형은 눈만 깜빡거렸다. 쇼파에 얌전히 앉아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사진이었다. 태형이 별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더니, 지민은 다른 사진들도 연이어 보여주었다. 고양이와의 침대 셀카, 사료 그릇 앞에서 멀뚱히 앉아있는 사진 등등.


…존나 잠만 자는데? 태형이 순화하여 말했다.



"원래 이렇게 고양이는 다 이래?"

"우리 슈가가 좀 어려. 아기라서 자는 거야. 아기 때는 원래 다 자잖아."

"이게 아기야? 연탄이 보다 큰데?"



연탄이 앙 짖는다. 꼭 김태형의 말이 맞아도 백 번 맞단 것처럼. 지민도 윤기가 활동량이 많지 않은 고양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차분히 또박또박 반박했다.



"고양이는 왕이니까 이래도 돼."



할 말이 없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말았다. 그렇지. 고양이는 아무거나 다 해도 되지.





***





슈가라는 이름의 길고양이가 지민의 집에 온지 거의 일주일이 됐다. 고작 일주일 사이 지민의 일상은 많이 바뀌어있었다. 아침마다 활기 넘치게 슈가와 마주보며 이야기하는 건 기본이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슈가 옆에 앉아 조곤조곤 대화를 나눴다. 고양이가 뭘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만, 꼭 슈가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치? 물어볼 때마다 추임새처럼 냐 하고 울어주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지민은 슈가를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강대리는 왜 그러는 걸까? 혹시 새디스트인가? 그래서 내가 몰래몰래 죽이고 싶은 눈으로 볼 때마다 짜릿해서 견딜 수가 없는 걸까? 강대리 퇴사하면 회사 옥상에서 불꽃놀이 할래."



회사욕. 또는.



"슈가야 오늘은 왜 이렇게 외로울까…섹스를 안 한지 오래 돼서 그런 걸까? 아냐. 다 필요 없어. 나는 우리 슈가만 있으면 돼. 어, 슈가야 왜 내려가. 다시 올라와. 허벅지 불편해?"



연애상담. 또는.



"슈가야 왜 사료를 이거밖에 안 먹어? 맛이 없어? 다들 이게 좋다고 했, 켁! 아 먹지 마, 먹지 마. 너무 맛없잖아. 이건 개도 안 먹겠다. 이게 뭐야. 내가 다른 사료로 바꿔줄게."



같이 사료 먹기.



"슈가야 내가 캣타워 만들어줄게. 어,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크지…?"



해봤자 뭐 얼마나 걸리겠어. 그러나 그 날 지민은 하루 종일 캣타워를 만들다 거실에서 기절해 잤다. 캣타워를 만드는 것보다 남산타워 세우는 게 더 쉽겠다는 말이 마지막 대사였다. 그로부터 캣타워가 만들어지기까진 약 2일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완성된 타워 꼭대기 슈가가 올라갔을 때 지민은 태형에게 약 30장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손도 못 대게 털을 세우던 슈가가 지민이 자는 침대에 올라와서 잔 날. 지민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불을 들어올렸다. 그래 슈가야 너가 다 여기서 자. 고양이에게 침대의 반 이상을 내어주고 본이는 벽에 붙어 찌그러져 잤다. 그러다 슬금슬금 다가와 슈가를 끌어안았지만.


점점 슈가의 패턴도 바뀌었다. 지민이 들어오든말든 무신경하게 방관하던 고양이는 6시가 되면 시계를 종종 쳐다보곤 했다.



"슈가야 아빠 왔어."



지민이 뽀송해진 얼굴로 등장했다. 하얗고 탱탱한 볼을 방금 지민이 뱉은 말과 전혀 매치 안됐다. '아빠 왔어.' 하고 무게감을 잡을 게 아니라 '아빠 왔어?' 하고 와다다 달려 나와 아이스크림은 사왔냐 물어볼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고양이는 느긋하게 현관으로 다가왔다. 지민은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씩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 슈가가…우리 슈가가 이제 나한테 아는 척을 해줘, 흑흑. 슈가야 맞아 내가 아빠야. 그러나 감격한 티를 내며 그대로 끌어안으면 슈가는 금세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하고 지민을 밀어냈다. 냐아. 놔라 인간아. 지민은 귀엽다는 듯 슈가의 머리를 쓰다듬고 물러났다.



"슈가야 이제 아빠 일 해야 되거든. 빨리 끝내고 놀아줄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우리 슈가 말도 잘 듣네."



놀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원래부터 쇼파에 앉아 꼼짝도 안 했던 고양이에게 지민이 칭찬을 퍼부었다. 어떻게 기다리라는 말을 알아. 우리 슈가 진짜 천재다. 두 볼이 달아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말을 들으면서, 고양이가 울음소리를 냈다. 냐냐.



"그만하고 빨리 일하라고?"



지민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양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노트북을 켜자마자 어두운 안색으로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이거 다 할 수 있냐."



지민은 늘 일이 많았다. 이 모든 영광을 강대리 씹새끼한테 돌립니다…. 진짜 억울하다. 이렇게 일하는데 월급은 왜 두 배가 안 되는 걸까. 고생은 내가 하고 강대리가 과장으로 올라가면 그 자리에서 피토를 할지도 모른다.



"이 시간에 빨리 하자…."



지민이 자판을 두들긴다. 쇼파 위에 앉은 고양이는 계속해서 그 자세 그대로 지민을 지켜보고 있었다.





윤기는 책상에 엎어진 채 기절한 지민을 내려다보았다. 자면 안 돼, 시장자료조사 하나만 더 넣고….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지민은 결국 다크서클을 턱까지 늘어뜨린 채 기절하고 말았다. 일은 마무리 안 됐고, 이 자세로 뻗어 자면 분명 아침에 목 아프다고 할 게 뻔했다. 짧게 한숨을 쉰 윤기는 지민을 안아 쇼파 위로 올려놓았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었다. 사람이 고양이를 키우는 건지, 고양이가 사람을 키우는 건지.



"슈가야…."



끄응, 뒤척거리며 지민이 잠꼬대를 한다. 그래. 어. 슈가 여기 있다. 자연스럽게 지민의 투정을 받아주던 윤기는 급격한 현타가 밀려왔다. 집고양이 노릇을 얼마나 했다고 본명처럼 잘 반응하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간지에 죽고 간지에 산다던 민윤기가 어쩌다 이렇게….


그래도 따지자면 박지민은 나쁜 주인이 아니었다. 지민은 여태 민윤기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사람이 고양이보다 더 끼를 잘 떨었다. 웅웅, 우리 슈가 잘 있어쪄요? 거기에 뽀뽀세례는 필수. 코에도 쪽, 이마에도 쪽, 앞발에도 쪽. 귀찮아진 윤기가 앞발로 동그란 이마를 꾹 밀어내면 그것도 좋다고 지민은 히히 웃었다. 우리 슈가 너무너무 귀여워. 우리 슈가는 솜방망이도 왜 이렇게 귀여워? 아구 귀여워. 냐아, 꼬리를 까딱거린 윤기가 저리 떨어지라는 의미를 담아 성의 없이 울어도 지민은 눈치 없이 반겨주는 거냐며 감격했다.


박지민은 윤기의 생각보다 더 '슈가'를 예뻐했다. 웅냥냥, 우리 슈가. 평소 멀쩡한 인간처럼 굴다가도 제 옆만 오면 박지민은 혀가 반토막이 됐다. 아빠 보고시퍼쪄요? 그래쪄요? 아빠, 해보자. 아빠! 함박 웃으면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지민의 배를 윤기가 꾹 밟고 지나가도 지민은 헤죽 웃었다. 슈가 아빠한테 왔어? 심심해? 툭하면 끌어안고 분홍색 발바닥을 꾹꾹 누르며 귀찮게 만지작거렸다. 길가에서 주워온 고양이를 인간 아기 다루듯 어화둥둥 얼렀다. 사실 지보다 2살이나 많은 사람인데 말이다.


박지민은 진짜 웃긴 놈이었다. 민윤기를 완전히 세상 제일 불쌍한 고양이로 대했다. 아마 민윤기가 박지민의 세 배는 거뜬히 넘는 연봉에, 외제차를 끌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걸 알면 뒤집어 넘어질 거였다.


윤기는 지민이 그대로 펼쳐놓은 노트북을 확인했다. 몇 장만 대충 봐도 지민의 업무능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입사했대."



수석입사 박지민도 외국 유학 코스의 엘리트 윤기의 눈에서 보면 햇병아리였다. 영업 1팀에서 전반적인 팀의 아이디어를 담당하는 게 박지민이라고 하면 아마 민윤기는 그대로 욕을 한 마디 날렸을 거다. 어떻게 모아와도 다 빠가새끼들만 모아왔대. 그러니까 회사가 털리는 거지. 지민은 기르는 고양이의 한심한 시선은 손톱만큼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실컷 잤다. 입맛까지 냠 다시면서.


윤기는 턱을 괴고 고민했다.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를 열심히 챙겨본 적은 없다. 간혹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나 몇 번 도와줘봤지. 그것도 원래 별로 도와주고 싶진 않았다. 단순히 이미지 관리용으로 했지. 눈을 굴리면서 고민하던 윤기는 고개를 빙글 돌려 스트레칭 했다. 


어찌됐든 박지민이 실신하면 민윤기가 거주하는 집의 상태가 후져졌다. 안 그래도 개판인 냉장고에서 식재료라는 게 사라질 거다. 빡친 박지민이 이제는 냉장고 한 칸만 채우던 상태에서 전체를 술로 채울 가능성도 있다. 이건 그냥 귀찮아지지 않으려고 챙겨주는 것뿐이다. 별다른 뜻은 없다. 정말로. 아직까지는. 무슨 득을 볼 수 있다고 박지민을 따로 챙겨. 생각을 정리하던 윤기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왜 스스로 변명하고 있지?



"……."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이유를 붙이기에 세상은 너무 복잡했다. 별다른 이유를 붙이길 포기한 채 윤기는 지민의 노트북 위로 손을 올렸다. 빠른 속도로 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눈물겨운 취업준비 기간을 걸쳐 대기업 입사만 하면 모든 게 끝나리라 생각했다 지민은 인생 최악의 모든 불운을 면접을 통과하고 맛보았다. 강대리, 그 놈이 문제였다. 정말 강대리 개자식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개자식이었다. 그 개자식은 지민의 실적을 모두 자신이 낸 것처럼 빼앗아서, 작은 흠이 발견되면 쥐 잡듯 지민을 달달 볶았다. 이걸 지금 보고서라고 쓴 거야? 입사한지가 몇 달인데 아직도 이런 거 못해. 어제까지만 해도 보고서의 폰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둥, 별 트집은 다 잡아댔다. 거기다 더해 지민이 낸 아이디어를 쏙 가로채 팀장에게 칭찬과 보너스를 받았다.


심각하게 회사를 그만둘까 고민까지 하던 그런 우울한 인생에 햇볕이 떴다. 해는 달달한 이름을 가진 러시안블루 고양이였다. 슈가! 지민은 고롱고롱 자는 슈가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헤죽 웃었다. 아빠가 돈 많이 벌어갈게. 우리 슈가 오늘은 뭐 하고 있으려나. 요즘엔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면 애완동물을 볼 수 있다는데. 그거라도 설치해볼까 싶다.


지민은 퇴근시간만을 바라보며 메일함을 열었다.



"어."



또다. 처음 보는 익명의 메일주소로 메일이 와있다. 메일은 며칠 전부터 오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S', 딱 한 글자다. 단순한 스팸이라면 차단하겠지만, 메일의 내용은 여태껏 지민이 받아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프로젝트 설계서의 초안. 실현단계 위험가능성. 보고서를 쓸 때마다 지민이 과외라도 하듯 헷갈리는 부분만 콕콕 잡아 알려주었다. 


대체 누구지? 이런 일을 할 사람이라곤…. 같은 신입동기들인가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닐 터였다. 왜냐하면, 거기서 수석으로 입사한 게 박지민이었다.


지민은 고심 끝에 최근 회사에서 실시한 마니또를 떠올렸다. 누구람, 대체. 에스면. 신대리님? 머쓱해진 기분에 지민은 파티션 너머 신대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맞나. 아닌가. 시선을 느낀 건지 신대리가 지민 쪽을 바라본다.



"왜요? 할 말이라도 있어요?"

"아 아닙니다."



그녀는 전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연기를 잘하시는 건가. 고개를 갸웃한 지민은 곧 팔짱을 낀 채 메일을 바라보았다.


사실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오는 메일만이 아니라, 요즘 지민의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티셔츠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는 표현보다는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는 표현이 맞다. 쇼파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놨던 게 어느 날 보니 옷장 안에 얌전히 들어있었다. 어, 내가 언제 이걸 여기다 놨었지? 어깨를 으쓱한 지민은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난번에 빨래 할 때 섞여 있었나봐.


그러나 점점 하나 둘 사소한 상황들이 늘어났다. 분명 쇼파나 바닥에서 기절하듯 잤는데, 일어나니 침대였다던가. 개어놨던 담요가 펼쳐져 있다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상황들을 여러 차례 마주하니 둔한 지민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옷에 발이 생겨 제 발로 걸어 다니진 않았을 터였다. 


지민은 머리를 작게 긁적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여타 커다란 피해는 없었다.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 신고를 하기도 이상했다. 도둑이 들었다거나, 아니면 영화에서처럼 한 집에 사실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거나, 그런 상황이라면 벌써 난리가 나도 한참 났을 거다. 아니면 혹시 몽유병이라도 생긴 건가….


지민이 골몰하던 사이, 책상에 올려두었던 지민의 폰 화면이 반짝거렸다. 동물병원. 슈가와 관련한 메시지를 남겼더니 이제야 연락이 온 듯했다. 지민은 살그머니 사무실을 둘러본 다음 휴게실로 빠져나갔다. 



[박지민씨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

[어제 남겨주신 문자를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아 선생님이세요?"

[네, 고양이가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요.]



지민은 어제 문의를 남겨놓았던 동물병원을 기억해냈다. 선생님 우리 슈가가 밥을 늘 깨작깨작 먹고 남겨요. 입에 직접 대줘도 아예 먹지 않구요. 혹시 버려졌던 기억이 다시 나서 그러는 게 아닐까요? 보시면 연락 부탁드려요.


지민은 사실 의사를 믿진 않았다. 고양이가 과음했단 이상한 진단이나 남겨놓은 돌팔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연락한 이유는 슈가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는 슈가를 유일하게 만나본 의사였다. 의사가 말했다.


[자세한 건 아마 정밀검사를 해봐야 알 거 같은데. 예약 잡고 오세요.]

"네, 언제가 괜찮을까요?"

[흠, 수인은 따로 오전에만 진료 받고 있으니 오전에 같이 오세요.]

"네? 수인이요? 그럼 슈가는 오후에 가야되는 거 아니에요?"

[그건 곤란해요. 수인은 오전에 진료를 진행해야 오후에 방문하는 동물들의 진료가 편리합니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로 헛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지민이 차분하게 주장했다.



"그러니까 슈가는 오후에 가야죠."

[…아니, 박지민씨. 병원 방침상 수인은 오전에 봅니다만.]

"그러니까요."



역시 돌팔이다. 지민은 답답해하며 외쳤다.



"아니 우리 슈가는 수인이 아니잖아요."



전화 반대편의 병원에서도 복장 터진다는 듯 허,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슈가는 수인입니다만.]

"…네?"

[모르셨습니까?]



상상도 못한 헛소리라 지민은 말문이 막혔다. 잠깐만, 잠깐. 수인? 아니, 여보세요, 저기 잠시만요. 지민은 의사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의사는 쯧쯧거리며 태연히 설명했다. 그럼 어떻게 평범한 고양이가 자발적으로 술에 취해있겠어요? 수인입니다.



[자세한 진료는 더 해봐야 알겠지만 성인 수인 맞습니다.]



서, 성인 수인? 우, 우, 우리 슈가가요!? 아기, 아기 아니에요!? 아니 근데, 근데. 지민은 에러 난 로봇처럼 버벅거리며 간신히 되물었다. 의사 선생님면허 걸고 대답해주세요.



"노, 농담이시죠?"

[…끊습니다.]



의사는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듯 끊었다. 평소라면 마찬가지로 돌팔이 새끼라고 욕이라도 해줬겠지만, 패닉에 빠진 지민은 스르르 유령처럼 사무실 자리에 귀환했다. 넋이 빠진 지민을 보고 강대리가 빠짐없이 찾아와 면박을 주었다. 지금 나까지 같이 잘리게 하고 싶어요? 지민씨 여기가 회사에요 아니면 뭐 당신 놀러 다니는 곳이에요? 지민은 죄송합니다,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 앞에서 불처럼 화내는 강대리는 뒷전이고 머릿속에 온통 방금 의사와의 대화가 동동 떠다녔다.


슈가가? 수인이라고? 수인이면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건가? 아니 우리 슈가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수인이야. 우리 슈가는 길거리에서 떠돌던 상처 많은 고양이라고. 무려 처음 본 장면이 길에서 다 죽어가던 모습이었다. 우리 슈가가 어떻게 수인이야. 정말 말도 안 된다. 지민은 하하 웃으며 헛소리로 치부했다. 그 의사가 맛이 간 거야, 맛이 간 거지.






지민은 어쩐지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에 입이 바짝 말라왔다. 슈가를 위한 고양이 사료를 주문한 게 어제다. 그런데 슈가가 나랑 똑같이 말을 하고 키도 크고 걸어다니면…그럼…. 지민은 애써 복잡한 생각을 하하 웃으며 꾸깃하게 접어 머릿속 끝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 슈가는 그냥 흔한 러시안블루 고양이인데 왜 이딴 걱정이나 하고 있어. 생각과 달리 커다란 심호흡을 거쳐 지민은 현관문을 열었다.


냐아. 푸른 회색빛의 고양이가 어떻게 안 건지 현관 앞에서 얌전하게 앉아 지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민은 바로 눈을 반짝 빛내며 달려가 끌어안으려다, 멈칫했다. 귀에 들리는 목소리 때문이다. 수인인데요, 모르고 계셨습니까? 



"슈, 슈가…."



냐. 슈가가 고개를 갸웃한다. 댕그란 눈도 함께 무슨 일 있냐는 듯 바라본다. 심각하게 귀여웠다.


사람이 시각에 약한 동물이라 누가 그랬던가. 오늘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의심의 새싹이 녹아 없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떻게 우리 고양이가 나를 속일 수가 있어. 지민은 냉큼 허리를 숙여 슈가를 들어올렸다. 상쾌해진 머리로 결론을 내렸다. 그 의사는 역시 돌팔이다. 어쩐지 병원에 사람이 없다 했어.



"슈가야! 아빠 보고 싶어찌? 웅웅, 나두"



이 귀여운 게 어떻게 사람이야. 지민은 슈가의 입에 쪽소리나게 입맞춤했다. 우리 이렇게 벌써 뽀뽀두 백 번은 넘게 했는데 말이야. 그치?





***





대명그룹 영업 1팀은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내일이면 소문 많은 새 팀장이 오는 날이었다. 말이 부임이지 낙하산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대기업 어디 꽤나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도 아니고, 들어보니 해외 어디 기업에서 일하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왔단다. 대학도 해외에서 나와 새 팀장과는 연줄이 통 닿는 사람이 없었다. 학연도 아니고, 지연도 아니고, 그렇다면 단 하나다. 바로 혈연. 신입동기 유하나가 명탐정마냥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내일 오시는 새 팀장님은 대체 어디 라인이래요? 그 젊은 나이에 이렇게 오는 거 보면 어마어마한가 봐요."

"혹시 막 우리 기업 재벌가 도련님 이런 거 아냐. 물려받기 전에 한번 테스트처럼 해보는 사원체험 같은 거."

"혜지씨 드라마 너무 본 거 아니야? 우리 사장님 연세를 봐. 벌써 손주 다섯은 보셨지. 지난 번에 법원 출두하면서 휠체어 타고 가셨잖아."

"에이 원래 그건 다 누워서 그렇게 실려가잖아요."

"그치? 지민씨는 어떤 거 같아?"

"네? 아…저요?"



가운데서 커피만 마시던 지민이 영 흥미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실제로도 큰 관심 없었다. 팀장이 좋은 사람이면 좋기야 하겠지만, 이미 강대리만으로도 지민은 충분히 힘든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고 해외에서 왔으면 적당히 융통성도 있고…. 일단 잘하는 거라곤 허구한 날 괜찮은 기획서나 가져오란 말밖에 전팀장보단 일을 잘할 거 같다. 평범한 또라이 정도만 돼도 괜찮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영 평범한 대답에 신입동기들이 싱겁다는 표정을 했다. 지민은 아차, 했다. 회사생활백서 1번 맞장구치기를 잠시 잊을 뻔했다. 냉큼 덧붙였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팀장이시고 그러니까 잘생기셨을 거 같아요. 키도 엄청 크시고 막.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처럼요."



헤헤, 지민이 순둥한 얼굴로 웃었다. 생존형 미소였다. 그렇지? 그녀들은 곧 서로 흔한 재벌가 아들 스토리를 쓰며 추측해대기 시작했다.



"일단 오자마자 팀한테 쫙 인사하는 거야. 그런데 엄청 건성건성 하는 거지. 왜냐하면 대기업 회장 아들이라 온실 속 화초로 자란 거지. 이런 서민 생활 같은 걸 언제 해봤겠어. 그러니까 전혀 모르는 거야."

"눈 감고 봐도 그거네. 바로 그 스토리야. 그래서 마지막에 정체 밝힐 때쯤에 우리 영업 1팀에서 애인이 있는 거지. 그렇게 몰래 둘이 연애하다가…."



지민은 중간 사이에 끼어 연신 웃는 미소만 유지하고 있었다. 시청률 0.5퍼센트도 안 나올 드라마 스토리라고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대화를 차단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찾았네. 어제 수정 본 기획서 과장님이 찾아."



강대리였다. 처리한 다음에 바로 예산팀한테 넘겨야 한답니다. 아 그래요? 휴게실에 모여있던 무리는 냉큼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럼 빨리 가봐야겠네요. 지금 바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신입동기들이 무슨 힘이 있으랴. 지민은 냉큼 동기들의 뒤로 따라붙었다. 부디 강대리의 눈에 띠지 않길 바라며.



"아 잠깐 지민씨."



아…. 늘 신은 지민의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프로직장인 박지민은 웃으며 뒤를 삭 돌아보았다.



"네, 대리님! 무슨 시키실 일 있으세요?"

"아까 오전에 맡긴 SNS 마케팅서류 1시까지로 변경해서 보내."

"어…그게 4시까지라고 해서 조금 시간이 부족할 수도…있겠지만 하하 제가 최대한 빨리 해보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강대리는 언짢은 내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긴. 열심히 줄 선 라인이 망했으니 기분이 최저점을 찍었을 거다. 지민은 하찮은 반항을 하는 대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떴다. 벌써부터 어깨가 뻐근하고 눈앞이 흐려지는 기분이다.


지민은 폰을 꺼내 바탕화면을 아련하게 쓰다듬었다. 식탁 위에 앉은 러시안 블루 고양이가 지민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우리 슈가 사료값 벌어야지. 머리를 탈탈 흔들어 잡념을 턴 뒤 눈에 힘을 부릅 떴다.






박지민은 성실한 기계처럼 일했다. 슈가, 슈가. 폭력성을 낮춰주는 주문을 외며 기적적으로 모든 능력을 발휘해서 일을 끝내놨을 때였다. 대리님, 여기 다 해서 부서에 넘기고 왔어요. 강대리는 살짝 의외라는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 마침 잘 됐다는 어투로 지민에게 또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그럼 지금 시간 남지? 예산팀에서 까인 기획안 다시 잘 수정해봐. 오늘까지야."



일순 지민은 강대리의 이마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꽂아버릴 뻔 했다. 그건 오전 팀장이 강대리에게 준 업무였다. 그러나 어떤 반항을 할 수 있으랴. 네…. 결국 강대리의 업무를 끌어안고 자리로 귀환했다.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큼 서류에 파묻혀있던 그때.


결국 지민은 꼭두새벽이 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택시를 어떻게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파스스 재가 되어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실신하듯 늘어진 뒷좌석의 지민을 거울로 바라본 택시기사가 혀를 내둘렀다. 요즘 다 사는 게 그렇죠. 지민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살지 않고 죽고 싶어요. 택시에서 내린 지민은 천근만근 늘어지는 발걸음으로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다.



"슈가야…아빠 왔어…으어어…."



냐아. 비밀번호를 들은 건지 슈가가 현관 앞에 앉아있었다. 혼자 잘 놀았어어…? 다른 때라면 뽀뽀도 백번은 하고 끌어안고 잘 지냈냐고 난리를 쳤을 텐데, 오늘은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지민은 마지막 힘을 다해 슈가의 머리를 쓰다듬고 좀비처럼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으아…살려줘…."



슈가가 지민을 따라 졸졸 따라 걸어왔다. 지민은 엎드린 자세로 슈가와 눈을 마주보았다. 반쯤 빠진 영혼이 지민의 머리 위에 동동 떠있었다. 러시안블루 고양이는 지민의 볼을 앞발로 푹 찔러보았다. 거의 죽기 직전이다.



"슈가는 오늘 어떻게 지냈어."



고양이는 지민을 에메랄드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지민이 흡사 유언처럼 옹알옹알거렸다.



"응 슈가야…나는 오늘 분쇄기에 들어갔다 나온 날이었어…그냥 눈 뜨니까 10시인 거야. 그리고 다시 감았다 뜨니까 2시인 거 있지…우리 슈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막 달려왔다…근데 슈가야 아빠가 내일은 일찍 나가야 돼서…새로운 팀장님이 오신댔거든…가서 잘보여야…."



점점 잦아들던 목소리는 새근거리는 숨소리로 마무리 됐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기절했다.






윤기는 그대로 거실 바닥에 실신한 지민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침대는 왜 산 거야. 침대에서 자는 날 반, 쇼파나 바닥에서 기절한 날이 반이었다. 침대까지 갈 체력도 없으면서 용케 고양이한테 말은 건다.



"대체 애를 얼마나 굴려먹길래 이래."



회사에 뱀파이어라도 있는 건지 아주 생기가 쪽 다 빨려 있었다. 매번 싱글싱글 웃던 얼굴이 비 맞은 생쥐꼴이었다. 박지민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어디 끌려갔다 왔냐 물을 만큼 지금 지민의 꼴은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하…. 낮게 한숨 쉰 윤기는 익숙하게 지민을 뒤집어 안아 침대에 뉘어주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다 야."



죽은 건 아니지? 혼잣말에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으응, 지민이 작게 잠투정을 부렸다.


윤기는 갑작스럽게 짜증이 스멀스멀 치솟았다. 꼭 박지민이 서류에 파묻혀 일만 하고 있던 때와 비슷했다. 원래대로라면 환호했을 거다. 몇 번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곯아떨어진 박지민이라니. 이 얼마나 횡재인가. 조용한 분위기에, 심지어 몸을 옥죄는 팔도 없고, 머리 위로 쏟아지던 뽀뽀세례도 없고. 늘 꿈꾸던 대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편한 잠자리 보장을 노래 부르던 게 바로 민윤기였다.


왜 그럴까. 역시 마지막이라 그런가…. 윤기는 지민의 말랑한 볼을 손으로 꾹 눌러보았다.



"응…."



정작 윤기의 손길은 가만 놔두면서 답답했는지 낑낑거리며 목 부분을 손으로 매만진다. 인상은 있는 대로 쓰면서 헛손질만 계속했다. 잠자코 구경하던 윤기가 넥타이를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윤기가 있는 방향으로 지민이 한 바퀴 데굴 굴러온다. 흐응. 하얀 얼굴은 만족한 찐빵처럼 느슨하게 펴졌다. 진짜 웃긴 애다.



"……."



온 집안을 헤집어가며 고양이를 찾다 펑펑 울 박지민을 상상했다. 슈가야…어디루 간 거야. 자는 지민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하니, 명치 쪽에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보고만 두기 싫었다.


진짜 고양이 행세 조금 했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이러다 고양이 사료도 맛있다고 퍼먹고, 츄르 좋다고 따라다니고, 깃털 장난감 더 사달라고 조르기까지 하겠다.


그래도 박지민의 엉성한 정성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긴 했다. 캣타워를 만든다고 설계도를 엎드려서도 보고 누워서도 보고 굴러서도 보는 게, 매일매일 앉아서 사람 대하듯 마주보고 있는 게, 아니면 누가 고양이고 누가 사람인지 모르게 애교를 부리는 게….


머리를 긁적거린 윤기는 방문을 빤히 바라보다 얌전히 닫고 다시 들어왔다. 그런 상황을 보고 싶지 않으면 그런 상황이 없게 만들면 된다. 회사를 출퇴근하는 동안 조금 불편하긴 하겠지만 뭐….


어느새 사람은 사라지고 러시안블루 고양이가 지민의 곁에 몸을 말고 누웠다.





***





지민은 퀭한 안색으로 사무실에 출근했다. 다른 사원들도 딱히 좋아 보이는 안색은 아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 집엔 잘 들어가셨죠. 지민씨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아하하 괜찮아요. 지민은 힘없이 웃었다. 이러다 새로 온 팀장이 영업 1팀이 아니라 좀비 1팀으로 오해한다고 해도 변명거리가 없겠다.



"새 팀장님 좀 늦으시네요."



유하나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10시 20분. 벌써 20분이나 지나있었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인물은 다른 건가. 첫출근부터 20분이나 당당하게 늦는 상사를 보니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강대리보다 더 쓰레기면 어떡하지? 한 달 중 반을 지각하는 강대리도 입사첫날은 제 시간에 출근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강대리가 지민을 불렀다.



"이거 파일 좀 영업 2팀에 서팀장님한테 결재 받아와."



왜 하필 또 지금…. 지민은 이런 운이 없었다. 왠지 가는 동안 새 팀장이 도착해있을 것만 같았다. 쎄한데…. 지민이 우물쭈물거리자 강대리가 눈을 뒤집어 까듯 치켜떴다.



"왜? 문제 있어?"

"아닙니다. 다녀올게요."



뒤에서 유하나의 측은하단 시선이 닿아왔다. 빨리 다녀올게요. 지민은 두 손으로 파일을 받아 급히 사무실을 나왔다. 그래. 바로 아래층이니까 괜찮겠지. 그 5분 사이 무슨 문제가 발생하겠어. 그럼 그때야말로 진짜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사람 리스트에 박지민이 있을 거다.


영업 2팀의 서팀장은 다행히 자리에 있었다. 빛의 스피드로 서류를 전한 지민은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띵 네모박스가 열린다. 급한 마음에 지민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후다닥 돌진했다. 덕분에 엘리베이터 안쪽에서 나오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



사과하며 나오던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지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포멀하게 입은 수트와 검은색 머리의 남자. 지민과 비슷한 키를 가진 남자는 혼자 조명이라도 받는 듯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백설공주, 뭐 그런 것과 비슷했다. 그를 본 순간 지민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생각만 떠올랐다. 그 생각은 뇌를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바로 튀어나왔다.



"…슈가?"



엘리베이터 안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남자가 시선을 틀어 지민을 본다.


응? 나 지금 뭐라고 했지? 당황한 지민의 동공이 팝콘처럼 튀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한테 아는 척했다. 어떻게 하지. 짧은 1초 동안 지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 제가 사람을 잘못 봐서요. 이건 아니다. 천장에 매달려서 거꾸로 봐도 슈가라는 이름은 전혀 사람이름처럼 생기지 않았다. 남자가 먼저 말했다.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 말했어요."

"민윤기입니다."

"네? 아 저는 박지민입니다…."



얼결에 덩달아 이름을 말했다. 커다란 표정 변화 없는 게 그리 상관하지 않는 모습 같았다. 지민이 무마하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놀라셨죠, 네…."

"제가 아는 사람이랑 닮았나 봐요."



윤기는 굉장히 차분한 표정이었다. 어투도 낮고 나른했다. 성격이 나쁜 사람같진 않아보였다. 지민이 애교 가득한 눈웃음을 배시시 지었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도 늘 먹힌 전설의 미소였다. 



"사실 제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에요. 닮으셨어요."



아 이건 좀 기분이 나쁜가. 다짜고짜 처음 만난 사람한테 고양이 닮았다고 하면. 윤기는 가만 지민을 바라보더니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민이 뒷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안타깝게도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윤기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상관없어요."



동시에 먼저 내린다. 지민은 일순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저 사람이…왜 여기서 내리지? 이 층은 영업 1팀이 전부 썼다. 그러니까 영업 1팀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선 내릴 일이 없단 말이다. 


급속도로 쎄한 감각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설마, 잠깐 설마. 너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지민은 걸어 들어가는 윤기의 뒤를 쫓았다. 혹시, 혹시 박과장님 아들인가. 아니면 잠깐 들린, 설마 진짜 동기들의 말대로 회장님 아들. 아니 그건 진짜 너무 현실가능성 없잖아.


윤기가 입장하자마자 사무실 안의 시선들이 쏠렸다. 모두 새 팀장님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윤기는 사무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조금 사정이 있었어요."



따라 들어오던 지민이 발을 멈췄다. 박과장이 벌떡 일어나며 껄껄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박성재입니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한 윤기는 그대로 비워진 책상 쪽을 향해 쭉 직진했다. 오늘 아침부터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내내 비워져있던 책상이었다.


지민은 윤기의 발걸음이 책상에 다가갈수록 기묘한 얼굴을 했다. 아니, 거기는 그, 우리 새로운 팀장님이 오실 곳인데…. 마침내 윤기가 서류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놨을 때, 지민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무섭게 흔들렸다. 아니, 그…네?


윤기는 적당히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무게감 있게 사무실을 울렸다.



"민윤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신이여…. 사원들이 박수를 친다. 그 사이에서 지민만 허수아비처럼 우뚝 굳어있었다. 지민은 생각했다. 오늘 저승사자 명부에 내가 있었구나.





***





좆 됐다. 지민은 휴게실에 혼자 멍하니 앉아있었다. 감히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 그것도 미친 사수가 붙어있는 박지민이 한참 근무시간 중 일을 빼먹고 휴게실에 있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



나 진짜 좆 됐다…. 지민은 갑작스럽게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엄마 나 벌써 귀농할 시기가 온 거 같아요….


지민은 차마 바로 사무실에 들어가서 새로 온 팀장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말해도 위로하며 어깨를 두드려줄 거 같다. 혹시 팀장님한테 자기 집고양이를 닮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결방법이 있을까요? 힘내세요. 세상에 회사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퇴사하시고 행복 찾으세요.


민팀장이 고요히 등장한 아침. 짧게 인사만 나눈 어색한 사무실 분위기에서 창백하게 박지민은 내내 질린 안색으로 앉아있었다. 다들 한 명씩 인사하는데, 박지민만 석고상처럼 굳어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대리가 깜짝 놀라 말했다. 지민씨 오늘 몸 상태 안 좋아요? 네, 네? 마찬가지로 더 화들짝 놀라니 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지민을 향해 우수수 박혔다.


아, 어 저, 저 잠시 화장실 좀…. 불판 위에 올려진 송아지처럼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왔고, 그 결과 현재 이 상황에 도달했다. 지민이 넋두리처럼 중얼중얼거렸다.



"반년도 안 됐는데 짤리면 이직도 못하는데…."



우리 슈가 밥값은? 이미 벌어진 상황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우울에 빠져있을 시간 없다. 머리를 탈탈 흔든 지민은 미래지향적으로 수습멘트를 떠올렸다.


차라리 빌어볼까? 팀장님, 제게는 사랑스러운 고양이가 한 마리 있어요. 딸린 식구를 책임져야 해요. 부디 한 번만 아량을 베풀어주세요. 가련한 주인공처럼 무릎을 꿇고 말하면 새 팀장이 아량을 베풀어줄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 한…10퍼?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는. 지민은 휴게실 안쪽에 놓인 소화기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저걸로 민팀장의 머리를 까서 기억상실증에 걸리길 기도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딱 조금 전 엘리베이터의 기억을 잊을만큼만. 근데 고양이 닮았다고 한 게 욕은 아니지 않아. 지민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상심한 그때.


누군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지민의 어깨 너머로 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몸이 많이 안 좋아요?"

"티, 팀장님!"



지민이 스프링 튀듯 일어났다. 안 돼. 타이밍도 나쁘다. 자칫 농땡이 치는 신입사원으로 찍힐 수도 있다. 지민이 냉큼 양손을 공손하게 모으며 말했다.



"금방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조금 전에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는데, 어."



나는 등신이다…. 돌대가리도 아니고 왜 이런 것만 말하고 있어. 지민은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 여전히 윤기는 무표정이었다. 변명이 필요했다.



"아까 그, 엘리베이터에서…."

"엘리베이터?"



윤기가 되묻는다. 모른 척 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아니면 다시 말하게 하려고? 지민이 뱅글뱅글 말을 돌렸다. 네, 아까 그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에서요. 그…제가 잘 모르고 불렀던…. 주변만 빙빙 겉도는 말을 듣던 윤기는 여과 없이 콕 집어 말했다. 윤기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아침부터 죽을상이던 지민이 민망해질 만큼 담담한 어조였다.



"아 그거. 고양이?"

"네…."



지민은 저절로 고개가 푹 숙여졌다. 정수리가 뜨거운 걸 보니 새로 온 팀장의 시선이 달라붙어있는 게 분명했다. 회식을 사랑하던 전팀장이 보고 싶었다. 일은 못해도 사표를 권유하진 않았는데…. 빨리 아무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빌고 있던 시점.


"괜찮다고 말한 거 같은데. 지민씨는 내 말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서운하게."



지민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히려 조금 장난스러웠다. 그가 덧붙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런 소리 뭐…나쁘진 않았어요."

"…정말요?"

"예."



진짜인가? 지민이 윤기의 눈치를 보며 진심을 파악했다. 무뚝뚝한 표정이나 어투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생에서나 보자 사표나 권유할 거 같이 생기긴 했다. 눈에서는 한 치의 분노나 괘씸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유순한 눈매처럼 입꼬리로 말랑하게 풀려있었다.


새팀장은 아량이 정말 넓은 인물임이 틀림없다. 지민은 모든 얼굴 근육을 활용해 활짝 웃었다. 생기를 되찾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순간 너무 기쁜 나머지 윤기의 손을 양손으로 간절하게 꽉 맞잡았다.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할게요."



그 모습을 보던 윤기가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악수하듯 잡힌 두 손. 지민이 아, 하며 급히 놓으려고 했다. 윤기가 빠져나가려는 손을 힘을 줘 붙잡았다. 뼈마디가 굵은 손이 짧은 손을 꽉 붙잡았다.



"그래요. 앞으로 잘해봅시다. 기대할게요."



동시에 윤기가 악수한 손을 조금 잡아당겼다. 살짝 앞으로 당겨진 지민이 어? 했다. 뭔가…이 오랜만에 받는 느낌. 대학교에서 모든 수인의 관심을 휩쓸었던 동물원이라는 별명을 창조했던 이 미묘한. 뭐지? 정확히는 짚어내지 못한 지민이 살풋 인상을 쓰는 사이, 윤기가 말했다.



"더 있으실 겁니까?"

"아뇨!"

"그럼 오후에 마케팅 기획안 들고 오세요. 수정본 거 박지민씨한테 있다고 하던데."

"네, 체크해서 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네!"



어쨌거나 해결됐다. 천사다. 새로 온 팀장은 대천사였다. 지민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방금 느낀 미세한 플러팅의 기운을 지민은 말끔히 잊었다. 그래, 이렇게 착한 사람인데! 윤기를 향해 꾸벅 예의 바르게 인사한 지민은 구름이라도 걷듯 사뿐사뿐 휴게실을 나왔다.





***





영업 1팀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민팀장은 전팀장과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툭하면 이거 말아먹었을 때 네가 책임질 거냐 묻는 전팀장과 달리 직접 나서서 프로젝트를 전담했고, 일도 미루지 않았다. 다만 단점이라면 매번 아침 30분정도 늦는다는 점과 회의 때마다 불만족한 사항에 대해서 필터 없이 직설적으로 구리다고 쏘아댄다는 점이었다. 신선하네요. 한 8년 전쯤에 이 기획안이 나왔으면 보너스 받았겠는데요.


어찌 됐거나 젊고 센스있으며 유능한 팀장은 사원들 사이에서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남자주인공의 표본으로 언급되곤 했다. 살짝 까칠한 성격은 좋은 말로 완벽주의라 포장되었다. 게다가 마냥 무게 잡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 가끔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주며 팀원들 사이에서 웃기도 했다. 환생해서 사회생활만 100년 찍어본 사람 같았다.


안 좋게 바라보던 눈초리들은 그마저도 윤기가 이사 회의에서 예산을 따올 때 싹 들어갔다. 입이 떡 벌어질만큼 커다란 예산이었다. 심지어 대명기획 회장이 직업 지시한 사항이라고 한다. 미친. 대체 어떤 빽을 가지고 있길래 회장이…. 


그즈음 회사 곳곳에 소문이 돌았다. 회장 아들이 분명하다. 민팀장 도련님설을 기반으로 날개를 달고 퍼졌다. 사생아다, 조카다, 친인척이다, 대명기획 말고 대명유전을 물려받으려는 거다. 모두 민윤기라는 인물 한 명을 놓고 뒤에서 수근거렸다. 특히나 신입동기들은 난리가 났다.



"나 회사 다니면서 저런 사람 처음 봐. 회장 아들. 아니 근데 일단 내 친구들한테 말했더니 다 안 믿더라. 판타지래. 유니콘, 유니콘."

"유니콘 맞지. 낙하산이 일 잘하는 것부터가 유니콘이야."

"진짜 사생아인가? 회장님이랑 성이 다르잖아. 궁금하다."



회사 다닐 맛 난다. 그게 전체적으로 신입의 입장이었다. 반면 전팀장 라인을 탔던 강대리와 유차장은 거의 전세금 뺏긴 얼굴로 회사를 다녔다. 자리를 토스해주겠다던 전팀장이 증발해버린 지금 그들은 투자한 모든 주식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요즘 아무나 걸리기만 하면 화풀이 샌드백으로 쓰겠다는 뜻을 팍팍 풍기고 돌아다녔다. 덕분에 지민은 레이저를 발사하고 있는 강대리를 피해 숨죽여 돌아다녔다.


지민은 정작 윤기에게 다른 사원들만큼 지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점심을 진짜 사내식당에서 먹는지, 집에 갈 때 비서가 데리러오는 건 아닌지 체크하는 쪽으로는. 회사에서 떠도는 말을 듣고 그런가? 하고 잠깐 생각해볼 뿐이었다. 심지어 그 소문들 중에서도 말도 안 되는 것들은 다 귓등으로 넘겼다. 회장의 사생아다, 곧 회사를 물려받을지도 모른다. 뜬구름같은 소문들을 믿기엔 지민은 현실주의자였다. 오히려 다른 부분에 더 관심이 갔다.


사무실 가장 안 쪽, 제일 넓은 책상이 있는 팀장자리. 지민은 사무실 입구를 드나들 때마다 그쪽을 흘긋거렸다.


진짜 아무리 봐도 닮았다고…. 자세히 보니 민팀장의 머리카락은 햇빛 아래에서 조금 푸른 끼가 돌았다. 슈가와 민팀장의 평행이론 증거는 그것 말고도 여러 개 더 있었다.


가장 첫 번째. 민팀장은 커피를 좋아했다. 하루에도 기본 세 잔은 마시는지 책상이나 손에 대부분 커피가 들려있었다. 슈가도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향만 맡으면 슈가가 지민이 있는 쪽을 기웃거리며 다가오고는 했다. 달라는 듯 냐, 우는 윤기를 보며 지민은 애써 시선을 외면했었다. 안 돼. 이거 안 줄 거야. 몸에 안 좋아. 나만 몸에 안 좋은 거 마실 거야. 슈가는 안 돼. 그랬더니 슈가는 지민의 발을 꾹 밟고 지나갔다.


두 번째. 민팀장은 나른한 저음의 목소리를 낸다. 슈가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고양이들이 시끄럽게 울 때 슈가는 짧게 한 두 번만 울었고, 그 마저도 톤이 낮은 편이었다.


그밖에 또 다른 증거들이 있었다. 민팀장이 눈을 감을 때면 특히 더 닮았고, 작게 웃을 때면 그것도 또 닮았고. 이것도 슈가와 비슷하고, 저것도 슈가와 비슷하다.


사실 찾은 평행이론의 증거 모두 개소리라는 건 지민도 알고 있었다. 커피 좋아하고 목소리가 낮다고 해서 슈가와 비슷하다는 주장으로 치면 지민이 혐오해 마지않는 강대리도 슈가와 비슷한 거였다. 이유들은 필요 없다.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슈가가 사람이 된다면 딱 저 모습일 거 같았고.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 챈 건지 민팀장이 입구쪽을 바라본다. 헉. 지민은 화들짝 놀라 급히 시선을 피해 휴게실로 달아났다. 아직도 당신 우리집 고양이 닮았다고, 그래서 관찰 중이었다고 들키면 또라이 취급을 받을 거다.


그러나 금방 후회했다. 그냥 자리로 돌아갈걸. 휴게실에는 강대리가 있었다.



"마침 잘 됐네. 지민씨 피티 자료는."



피하기도 전에 강대리는 노렸다는 듯 다가왔다. 지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피티요? 순간 강대리의 눈이 먹잇감이라도 낚아챈 매처럼 번쩍 빛났다.



"내가 말했었잖아. 그것도 준비하라고. 설마 까먹었어?"



대체 언제? 지민은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기억을 전부 뒤졌다. 아. 그러고 보니 그날 강대리가 퇴근하기 전 뭐라뭐라 말한 거 같다. 처음 민팀장이 회사에 온 날. 지민은 입맛을 쩝 다셨다. 그날이라면 할 말이 없긴 하지….


왜냐하면, 그날은 슈가가 사라진 날이었다. 늘 현관으로 마중 나오던 슈가가 퇴근해 돌아오니 집에 없었다. 슈가야? 아빠 왔는데? 슈가 어디있니. 그렇게 1시간동안 온 집안을 다 뒤지다가, 진짜 없다는 걸 알고 눈물이 한두 방울 후두둑 떨어졌을 때.


냐아. 안방 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안방 창문이 열려있었다. 2층 오피스텔은 고양이에게 그리 높은 위치가 아니었나보다. 창문 앞에 앉아있던 슈가가 지민을 바라보더니 폴짝 뛰어내려왔다. 지민은 위장을 토해낼 듯 서럽게 울며 슈가를 숨 막히도록 끌어안았다. 엉엉, 슈가야. 다신 사라지지마.


그때 듣고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민은 얌전히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제가 실수로 까먹고 아직 작업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뭐? 못해? 당장 다음 주가 피티야. 그런데, 뭐라고?"

"죄송합니다…."



강대리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지민은 예감했다. 좆 됐다. 강대리 이 새끼 작정했다.



"지민씨가 책임 질 거야? 콜로라도 설계산업 예산 땄던 거 다시 다 빠지면 지민씨가 책임지고 옷 벗을 거냐고. 입사한지 반년도 안 된 신입이 벌써 이 꼴이면, 뭐 장난해? 기본부터 전혀 안 되어있는데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야. 어? 안 그래도 손 딸려서 업무지원 요청해야 하는 판에 해야 할 일도 안 해?"



늘 듣는 패턴이었다. 대부분 들은 말이라 큰 타격은 없었다. 강대리를 하도 겪은 지민은 대충 끝나는 타이밍도 잴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보통 죄송합니다를 세 번 정도 하면 끝나긴 했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마무리를.



"사람이 지금 말을 하는데. 대가리를 푹 숙이고 있어? 가정교육을 대체 어떻게 받았길래 이래? 지금 내가 말하는 게 우스워?"



할 생각이 없구나…. 사무실이 아닌 휴게실이라 더 했다. 보통 주변의 눈총이 쏠리면 멈추기라도 하는데 이건 뭐 온통 강대리 세상이었다. 그러나 지민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으랴. 더욱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야 이 새끼야 대답 안 해?"

"…아닙니다."

"아 씨발, 너 내일까지 반드시 다 해와. 아니면 각오해."



강대리는 그대로 지민의 어깨를 밀치며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지민은 휴게실에 못 박힌 것처럼 서있었다. 인성이랑 직급이랑 비례했으면 강대리 저 놈은 회사 로비에 발도 못 붙였을 텐데. 휴게실 안쪽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딱 봐도 굳어있는 게 돈이라도 떼먹힌 안색이었다.

푸우…. 지민이 한숨처럼 큰 숨소리를 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직급이 권력이지.



"…개서럽네 진짜."



오늘 집에 가서 슈가한테 다 말할 거야. 볼을 찹찹 두들기며 정신을 추스르던 그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기 한 가운데 서서 뭐해요."

"…아, 민팀장님."



지민은 냉큼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인사했다. 점심 잘 드셨어요? 윤기는 대답 대신 지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방금까지 존나 까였단 걸 들키고 싶지 않다. 지민이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커피 드시러 오셨어요? 제가 타드릴게요. 안 그래도 어제부터 커피가 바뀌었더라구요."



지민이 부랴부랴 믹스 봉지를 뜯었다. 뜨거운 물을 타고 종이컵에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제가 커피는 잘 타거든요. 전팀장님께서도 떠나실 때 그러셨어요. 다른 건 몰라도 제가 타는 커피는 그리울 거 같다고. 하하…아 음."



말은 하지 말고 탈걸. 지민은 짧게 후회했다. 전팀장과 관련된 유머는 최악이었나 보다. 휴게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여기요. 잘 마실게요. 커피를 받은 윤기가 잔을 기울인다.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깔고 커피를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시지 말아요."



윤기가 지민의 컵을 받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기호를 다 파악하고 있는 오래된 사이마냥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이었다.



"네? 왜요? 맛이 이상해요?"

"내 입맛엔 맞는데. 그쪽 쓴 거 싫어하잖아요."



윤기가 커피를 홀짝인다. 반면 지민의 얼굴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회사에서 단 한 번도 밝힌 적 없는 취향이었다. 사내식당에서 대화할 때도 '불호'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부 참여하지 않았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윤기가 순간 커피를 마시던 동작을 멈춘다. 다시 한 번 휴게실을 감도는 작은 침묵. 곧 윤기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종이컵을 기울였다. 표정 하나만큼은 평소와 같았다.



"…지민씨 얼굴이 달달한 거 좋아하게 생겼어요."



아무 말이나 하는데도 포커페이스라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건 무슨 얼굴이지? 지민의 머릿속으로 최대한 떠올릴 수 있는 방향은 하나였다. 살쪘다는 건가. 하얗게 생겼다는 건가. 사회생활백서 1탄. 모를 땐 웃어넘겨라. 지민은 아하하 눈웃음부터 지었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생전처음 들었다. 윤기는 별다른 리액션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어색한 공기도 잠시, 윤기가 입을 열었다.



"고양이 이름도 슈가라면서요."

"아아 그거 때문에 아셨구나."



지민이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그래도 민망하거나 머쓱하진 않았다. 희한하게 윤기와 있는 이 자리가 편했다. 팀장과 신입사원이라는 정반대의 직급을 가지고 있는데도. 지민이 말을 이었다.



"그때 정말 팀장님께 이상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슈가랑 엄청 닮으셔서…앗 우리 슈가 엄청 예뻐요."



윤기가 멈칫한다. 그러더니 미묘하게 지민을 향하던 시선의 방향을 바꿔 바닥을 봤다.



"그래요?"

"네. 사실 슈가는 제가 길에서 데려온 아이거든요. 아팠었는데 이제 건강해요. 러시안 블루인데 눈은 에메랄드색이에요. 보면 바다 같기도 하고 보석 같기도 해요. 그래서…아, 사진 보여드릴까요?"



윤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잘 바라보지 못하고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응? 갑자기 왜이래. 평상시 민팀장과는 거리감이 있는 모습이었다. 하얀 얼굴로 무슨 상황에서든 청산유수로 말하던 게 민윤기였다. 단 한번도 이런 모습은 보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한 지민은 이내 신이 나 갤러리를 열었다.



"예쁘죠? 이건 리본 한번 달아줬을 때예요. 싫어해서 바로 풀어주긴 했는데 잘 어울리지 않아요?"



화면 안 러시안 블루는 빨간 리본을 머리에 묶고 있었다. 내내 지민을 바라보지 못하던 윤기가 일순 언짢은 내색을 드러냈다. 그거…. 그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신이 나 있는 대로 눈웃음을 뿌리고 있는 지민을 보고 다시 닫았다.



"이건 산책하고 돌아와서 창문 앞에 앉아있는거구요, 이건 제 배 위에서 잠 들었을 때예요. 또…아 제가 너무 많이 말했죠."



윤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고양이를 되게 좋아하시네요."

"네."



지민은 곧장 대답했다. 늘 슈가에게 보여주던 진심 어린 웃음을 선보였다. 



"사랑해요."



윤기가 지민을 본다. 두 시선이 정확히 만났다. 지민은 스스로 말해놓고도 조금 민망했다. 너무 주책이었나 싶다. 사실 더 민망하게 만드는 건 윤기의 반응이었다. 조금 멍한 그 표정. 어디 고장이라도 난 모습이었다.



"하하…."



적당히 나댈걸. 지민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시계를 확인했다.



"아 저는 이제 그만 업무 처리하러 가봐야 돼서요.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회사에서 이렇게 웃어본 게 거의 처음인 거 같아요. 팀장님은 커피 다 드시고 올 거예요?"

"…예."

"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지민이 휴게실을 나왔다. 뒤를 살짝 흘끔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윤기가 못 박힌 듯 휴게실 한 가운데에 계속 서있었다. 문득 지민은 생각했다. 근데 민팀장 그 표정은 좀 쑥스러워 한 거 같기도 한데….


곧 지민은 다시 발걸음을 놀렸다. 고양이 칭찬에 민팀장이 왜 쑥스러워해. 빨리 가서 일이나 해야겠다. 강대리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면 1분 1초가 모자랐다. 






지민은 정신없이 일에 빠져들었다. 뒤통수를 불태우려는 강대리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무실의 모든 직원은 서서히 시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6시. 곧 퇴근시간. 슬슬 윤기의 책상을 주시하는 그때였다.



"강대리님 지난번에 말한 씨제이 계획서 체크해봤는데 잠시 오시겠어요."

"네? 어제…아 네."



강대리는 제일 먼저 퇴근할 준비를 마친 건지 별다른 움직임 없이 모니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확인이라면 어떤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대리의 손은 공손히 모아져있었다.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희대의 악당 상이었다. 서류를 넘겨보던 한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이 타깃층 부분 왜 이렇게 작성하셨습니까. 보충 설명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그래프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조용한 사무실에 윤기의 목소리가 울렸다. 일에 집중하던 지민도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씨제이 제안서면. 요 저번 강대리가 지민한테 몽땅 미룬 업무였다. 갑자기 저건 왜 꺼냈지? 완벽하게 했는데. 지민이 강대리와 윤기 쪽으로 살그머니 시선을 던졌다. 강대리는 사뭇 당황한 듯했다.



"아 이 부분이면…어…타깃층이…."



알 리가 없었다. 대충 결말만 본 다음 패스했던 서류였다. 사실 민윤기가 관여할 필요 없는 서류였다. 전팀장에게 초안을 제출했었고, 그때 보류로 찍혀 어딘가 구석에 처박혀 있을 터였다. 갑자기 이 서류는 왜…. 어물쩡 대답하려던 강대리는 순간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에 나른함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내칠 것 같다. 긴장으로 강대리의 목울대가 꿀렁 울렸다.



"강대리가 제출한 제안서 아니에요?"

"네,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좀 시간이 지나서…."

"시간? 누가 들으면 1년은 지난 거 같네요. 한 달입니다. 고작 한 달. 제안서부터 무너지면 대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나. 참 궁금하네요. 아니면 월급 받으면 저번 달에 무슨 일 했는지는 그냥 잊는 겁니까? 강대리는 타깃층도 설정 안하고 작업해요? 물건 사줄 사람도 모르면서 물건은 왜 만들어요? 회사에 돈이 넘쳐나요?"



강대리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이렇게 갑자기 까이는 경우는 드물다. 그 때문에 어떻게라도 만들었을 변명을 이번엔 미처 답하지 못했다. 윤기는 싸한 얼굴로 말했다.



"강대리는 왜 대화할 때 사람 눈을 안 봅니까. 무시하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똑바로 하세요. 회사 놀러 다니는 거 아니잖아요? 대리까지 갔는데, 일 한 두 번 해봐요? 이 정도면 기본이 안 되어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수준인데. 이대로 가다간 위에서 부서 싹 갈아엎으라는 이야기까지 나돌겠네. 그러면 좋겠어요, 강대리?"

"…아뇨…."

"그럼 열심히 하는 시늉이라도 냅시다."



무미건조한 어조는 오히려 누적 데미지를 쌓았다. 강대리는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입사 이례로 이렇게까지 까여본 적은 몇 없었다. 윤기가 서류를 탁 덮었다. 마지막이 화룡점정이었다.



"괜히 성질내면서 애먼 사람 피해주지 말고."



사무실에 있던 모두가 낮게 숨을 쉬었다. 민팀장이 이만큼 사원을 깐 건 이번이 유일했다.



"알았습니까."

"네."

"퇴근들 합시다."



윤기가 제일 먼저 일어난다. 지민은 그때까지도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지민씨 퇴근 안 해? 신입동기가 물어보고 나서야 지민은 가방을 챙길 수 있었다. 네, 네 가요.





***





직장인이라면 목숨은 포기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주말. 바야흐로 봄이었다. 꽃나들이를 나온 인파로 공원이 꽉 찼다는 게 오늘 아침 뉴스소식이었다. 반면 지민은 슈가를 끌어안은 채 쇼파에 앉아있었다. 태형과의 약속이 취소되면서 오늘 하루 스케줄이 텅 비어버렸다.


냐. 울음소리가 들리자마자 지민의 손은 자동화된 로봇처럼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응, 슈가야 그래. 습관처럼 슈가를 다정하게 부르긴 하는데, 시선은 허공의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지민이 쓰읍, 숨을 마시며 미간을 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냐아. 슈가가 뭐냐고 대답하듯 울었다.



"들어봐, 슈가야. 아빠가 요즘 신기한 사람을 만났어. 지난 번에 말한 우리 회사 팀장님인데. 슈가 닮았다고 한."



슈가는 느른하게 지민에게 온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앞발로 얼굴을 문지르며 세수를 한다. 지민이 추리하는 탐정처럼 말했다.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그 사람.



"뭔가 수인 같아."



뚝. 슈가가 파드득 고개를 들어 지민을 본다. 지민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고양이의 푹신한 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수인이면 뭔가 고양이 일 것도 같은데. 슈가 너랑 닮았으니까."



말이 안 되면서 말이 되는 것 같은 이 기분 슈가 너는 아니. 아냐 알지 않는 게 좋겠다. 지민을 바라보는 에메랄드 눈에 진동이 오고 고양이의 수염이 떨리는 듯 보였다. 얼굴은 내 취향이긴 해. 속으로 중얼거린 지민이 계속 허공만 바라보았다. 고양이한테 이런 이야기까진 좀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목소리도 좋고. 만약 민팀장이랑…. 그러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한건지 누워있던 쇼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슈가 넌 내 가족인데. 닮은 것도 싫어. 세상 두 쪽 나도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돼."



지민이 단정지어 말했다. 지민이 배에서 미끄러여 내려온 슈가의 앞발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이미 백 번은 넘게 했을 프러포즈를 또 했다.



"난 슈가랑 평생 살 거야. 슈가도 아빠랑 평생 살거지이?"



이상하게 슈가가 굳어있었다. 엄청난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이내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지민을 올려다본다. 무언가 엄청난 배신감에 휩싸인 눈.



"슈가야?"



슈가야! 아파?! 지민이 굳은 슈가를 끌어안으며 몸 상태를 이리저리 체크했다.





***





<Q. 키우던 고양이가 갑자기 의기소침해질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밥도 잘 안 먹어요. 원래 사료를 잘 안 먹긴 했는데, 이제 먹는 시늉도 안 해요. 꼭 차인 사람 같아요. 울음소리도 기운이 없구요. 어르고 달래서 안으면 가끔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봐요. 사진 찍자고하면 예전에는 그래도 가만히 있었는데 이제는 아예 바닥에 누워있어요.>


A. 차였네요. 놔둡시다. 시간이 약.

A. 그건 병원에 좀 데려가 봐야겠는데요? 심각.

A. 혹시 얼마 전에 출산했나요? 고양이도 산후우울증을 겪을 수 있어요. 잘 대해주세요.




조용한 오후의 사무실. 지민은 고양이카페 게시판에 올린 댓글들을 확인했다. 대부분이 차인 사람 같다며 신기하단 반응이었다. 정말 병원에 데려가라는 말처럼 가봐야 할 거 같다. 동네 동물병원 의사는 영 꺼림칙한데. 태형이가 자주 간다는 병원 소개시켜달라고 해야겠다. 하아. 지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일단 답글을 달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슈가는 남자예요.


지민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죽고 못 사는 하나뿐인 반려고양이 슈가가 한순간 갑자기 고장나버린 탓이었다. 이유를 모르겠다. 주말에 한입만 더 먹어보자며 내민 사료에 안 좋은 게 섞여있었나, 그게 아니면 밖에서 산책 할 때 뭐 잘못 먹고 들어온 건가. 혹시 슈가한테 길고양이 애인이, 아니 짝사랑 상대가 있던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민이 땅이 꺼져라 다시 한숨만 내뱉었다. 뭐가 됐던 지민이 바라는 점은 하나였다. 슈가야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작게 열어놓은 카페 창을 닫았다. 때마침 지민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민팀장이었다. 



"지민씨 오늘 오후 일정 비우세요."

"네? 시키실 일이라도…."

"시킬 일이라면 아~주 많긴 하죠."



월루한 거 들켰나. 지민이 움찔했다. 금방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지민이 궁금한 얼굴을 했다. 사무실 직원들의 눈도 이쪽으로 몰린다.



"오늘은 콜로라도 담당자랑 미팅 잡힌 거 보조해요."

"아 네."



다소 뜬금없는 일이었다. 보통 외근은 강대리나, 신대리가 나가곤 했다. 사무실 직원들도 다 그렇게 느낀 건지 슬쩍 강대리 자리 쪽을 확인했다. 역시나 썩은 감자처럼 굳어있었다. 그러나 최근 까인 게 있어서 그런지 그는 의견을 내는 대신 얌전히 서류에 관심을 돌렸다. 민팀장은 시계를 보지도 않고 지민만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준비해서 나와요."



민팀장이 먼저 사무실을 나선다. 지민이 부랴부랴 가방과 서류를 들고 따라나섰다.






6시가 아닌 시간에 가방을 들고 회사 밖으로 이동하는 건 지민 인생에서 몇 번 없는 일이었다. 지민은 윤기의 뒤를 따라 주차장에 도착했다. 윤기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법인차량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응? 그가 멈춘 곳은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외제차의 앞이었다.



"타요."



순간 지민은 회사 내에 떠도는 소문들이 살갗으로 와 닿았다. 이 차는…팀장급이 아니라 임원급인데? 회장의 사생아. 초대박 낙하산. 몇몇 수식어를 떠올리다 차에 먼저 탄 윤기를 보고 냉큼 따라 탔다.



"벨트 매요."



윤기가 운전대를 잡는다. 어라, 했다. 보통 팀장과 사원의 동행이라면 계급사회 회사에서 사원이 운전대를 잡는 게 평균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한 마디씩 듣기 마련이다. 전팀장한테도 들었다. 박사원 운전 못해? 네, 아직 제가 면허는 있는데 잘 하질 못 해서요…. 아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운전을 제대로 못해. 박사원 큰일이네, 큰일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강대리랑 오는 거였는데. 지민이 민망함에 말꼬리를 흐리며 말했다.



"원래 운전 제가 해야 하는데…."

"됐습니다. 다음에나 연습해서 해요. 단 둘이 황천길 건너갈 거 아니잖아요."



지민이 빤히 윤기를 바라보았다. 분명 해야 한다고만 말했지, 못 한다고 실토하진 않았다. 박지민이 운전 못한다는 사실은 같이 딱 한번 외근을 나갔던 전팀장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얼굴에 운전 못함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지 않는 이상 모를 텐데. 시선을 느낀 건지 윤기가 지민을 돌아본다.



"왜요."

"…아니에요."



지민이 벨트를 착용하자마자 차량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왔다더니, 그 코스에 운전도 끼워져 있었는지 민팀장은 운전도 능숙하게 잘했다. 굳은 입매, 다른 날보다 약간 창백한 피부. 어째 표정이 어두워 보인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터였다. 민팀장의 기분이 다른 날보다 다운되어 있다는 사실은. 유달리 말수가 적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한 편으로는 그 생각도 들었다. 뜬금없이 이런 상태인 것도 슈가랑 비슷하네….


차는 번화가를 빠져나와 조금 한적한 도로의 신호등 신호를 받고 있었다. 민팀장의 폰에 전화가 왔다. 네, 여보세요. 민윤기입니다. 지민이 앉은 조수석에선 무슨 내용인지 들리지 않았다. 윤기의 미간에 주름이 진다.



"미팅을 당일에 미룬다고 통보하는 회사가 세상에 존재하긴 했네요. 일단 알겠습니다."



헉. 지민이 대신 숨을 삼켰다. 다음에 다시 회사로 연락주세요. 윤기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갓길에 차를 잠시 멈춰 세웠다. 공채면접에서도 상황대처능력으로 이런 지문은 나오지 않았다. 퇴근 1시간 전 미팅이 최소 되었을 때의 결정을 서술하시오. 사회생활백서를 마스터한 지민은 아쉬운 마음을 꾹 누르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요."

"그러게요. 어쩔 수 없네요. 둘이 놀 수밖에."

"…네? 사무실이 아니구요?"

"사무실 돌아가서 일하고 싶어요?"



민윤기는 탈선도 무덤덤한 어투로 제안했다. 무조건 맞장구부터 치는 게 박지민의 직장 살아남기 전력이긴 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탈출하자는 말을 권한 상사는 처음이라 지민이 어버버거렸다.



"어…근데 그러면 회사가…."

"언제부터 우리 팀이 업무보고서를 고양이카페에 올려 받았는지 나만 모르고 있는 거 같은데."

"……."

"진짜 사무실로 가고 싶어요?"

"…어디로 갈까요? 카페 괜찮으세요? 아니면 영화? 날씨도 좋으니까 다 좋을 거 같아요."

"좋네."



윤기가 다시 차를 출발시킨다. 지민은 창밖으로 흩어지는 도시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민윤기…진짜 회장 아들인가.






금요일 저녁의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영화관은 유명 액션영화의 개봉으로 자리가 모두 차있었다. 영화가 실패했으니 남은 건 밥집이다. 강남 존맛. 강남 맛집. 몇 번 검색하던 지민은 윤기에게 대놓고 물어봤다.



"혹시 팀장님 술 좋아하세요?"

"갑시다."



직빵으로 술 데이트를 하자고 권하는 사원은 처음일 텐데, 윤기는 흔쾌히 수락했다. 따라서 간단하게 찾은 합의점으로 둘은 어느 룸술집에 들어와 있었다. 직장인 수트를 입은 두 남자의 입장에 주인이 희한한 듯 바라봤다. 주문하신 안주 나왔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놓고 문을 닫으니 룸술집은 완전히 지민과 윤기만의 공간이었다.


와 맛있겠다. 지민은 먼저 국자로 윤기의 그릇에 오뎅탕을 덜어주었다. 술을 까고 잔을 따르면서 지민이 슬쩍 운을 뗐다.



"팀장님 혹시 어제 기분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글쎄요."

"와 팀장님 그거 진짜 어려운 화법이에요."



분명 뭔 일 있다. 확신한 지민은 마찬가지로 원샷부터 했다. 왜 그런지 모르게 민팀장이 저 모양새로 앉아있으니 달래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슈가를 닮아서 그런가 보다. 집에 들어가면 지금 민윤기랑 똑같은 얼굴을 한 슈가가 축 늘어져있을 터였다.



"혹시 어디 이야기할 곳 필요하시면 저한테 이야기하셔두 돼요."

"들으면 감당할 수 있어요? 무슨 이야기인 줄 알고."

"에이, 왜요. 대체 어떤 이야기길래 그렇게 숨기시는 거예요? 원래 그렇게 가릴수록 더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잖아요. 괜찮아요."



지민이 애교 있게 살살 윤기를 달랬다. 우리 슈가도 삐지면 틱틱거리는데. 이 부분마저도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 시점. 윤기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차였어요."

"…아 그러셨구나…."



지민의 말을 끝으로 테이블은 어색한 침묵에 빨려 들어갔다. 보글보글 오뎅탕이 끓는 소리만 났다. 식기 소리도 왠지 지금은 나면 안 될 거 같아 지민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렇다. 고양이 슈가와 달리 민윤기는 복잡한 사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급격히 공손해진 지민을 보고 윤기가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안쓰러워하는 중?"



"제가 딱히 누굴 위로할 만한 그런 입장은 아니긴 한데요…. 대체 팀장님이 뭐가 모자라서. 에이 그분이 보는 눈이 없으시네! 민팀장님 정말 완벽하신데."



일을 수습하기 위해 지민이 줄줄 윤기의 장점을 열심히 읊는 노력을 했다. 진짜 그분은 보석 놓친 거예요. 민팀장님 성격도 좋으시지 잘생기셨지 능력도 좋으시지 다정하시지. 어 또, 그리고 아 아까 보니까 운전도 엄청 잘하시던데. 가만히 듣던 윤기가 마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렇게까지 지민씨가 날 생각해주는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요. 그럼 지민씨는."

"네?"

"나랑 사귈만해요?"



만약 이게 작업멘트라면 솔직히 말해서 여태 모든 사람한테 받았던 작업 멘트 중 하위권에 머무른다. 그런데도 지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일순 아무 말도 못했다. 왜냐하면, 지그시 마주봐오는 까만 눈동자에 명치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저런 눈빛을 장착하고 있는 거야. 어, 아, 음.



"그건 또 싫은가 보네."



윤기가 말하자 홀린 듯 가만히 있던 지민이 꿈에서 깬 것처럼 고개를 냉큼 저었다.



"저라면 저는 팀장님 제가 업고 다녔어요. 아 덥다. 술 더 시켜도 돼요?"



뭐지. 아직 안 취했는데.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여기 도수가 쎈가. 지민은 사뭇 당황하며 벨을 눌렀다. 어, 주방이 바쁜가 봐요. 화장실도 다녀올 거라 제가 나가서 아예 가져올게요. 윤기의 시선 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머지 쿠당거리며 룸을 빠져나왔다.






혼란스러운 지민이 선택한 방법은 단순하고도 파괴적이었다. 테이블 위에 소주만 몇 병이 굴러다녔다. 머리가 아프니 아예 이성이 사라지는 게 작전이었다. 이렇게까지 많이 마셔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단 위에 무식하게 쏟아 붓고 봤다. 지민이 알딸딸한 기분으로 애교 섞인 눈웃음을 흘렸다. 으흐흥. 윤기는 테이블 위에 뻗은 지민을 흔들었다.



"지민씨."

"네엥."



완전히 맛 갔다. 배실배실 웃고 난리가 났다. 윤기는 이 모습이 익숙했다. 그러니까, 사람 민윤기가 아니라 슈가의 모습으로는. 종종 냉장고에서 맥주 몇 캔씩을 꺼내 맛이 가는 지민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박지민의 술버릇이 혀 반토막나기라는 것도 알았다. 아니, 원래 슈가만 보면 반토막이 났으니 반의 반토막이 났다. 그땐 슈가도 아닌 츄가라고 불렀다.


윤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잠깐 내뱉었다. 그나마 집에 혼자 있을 땐 몰라. 직장 상사랑, 그것도 같은 부서 팀장이랑 마시고 이렇게 제 정신줄을 놓다니. 윤기와 지민 같은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형을 시켜달라고 조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윤기가 말했다.



"취했네."

"아냐! 나 완전 진짜루 멀쩡한데?"

"어 그래. 가자."



윤기는 빠르게 흐물렁거리는 지민을 챙겼다. 계산이요. 가게 주인은 다시 한 번 우리 안 동물이라도 구경하듯 지민과 윤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들어갈 땐 직장동료더니 나올 땐 왜 이런 분위기…. 차로 돌아가는 길 내내 지민은 비틀거렸다.



"슈가야 나 땅이 올라와 어지러어…."



이젠 아예 대놓고 슈가라 불렀다. 누가 그렇게 많이 마시래. 차에 도착해 옆좌석에 앉혀놓은 다음 악셀을 밟았다. 차는 슈가와 지민의 해피하우스가 아닌 인간 민윤기의 고급 오피스텔 쪽으로 향했다. 뭘 믿고 대체 이렇게 마셔.


냉정한 민윤기 성격이라면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도 바닥에 버리고 갔을 터지만, 그래 그 사랑이라는 마음이 문제였다. 오히려 둘이서만 마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귀엽다고 박지민 볼이라도 꼬집어 봤어봐. 이미 분위기 파탄 내고 술자리 나왔을 거다. 원래 고양이는 질투가 많은 생물이다.



"내 어깨 잡아."



윤기가 말하니 헤롱거리던 지민이 윤기의 목에 팔을 찰싹 둘렀다. 취했어도 말은 또 잘 듣는다.


고급 오피스텔은 지민의 집보다 더 컸다. 이리저리 어질러진 집과 달리 모던한 디자인의 장식품이 많았다. 가정부를 부르는 윤기의 집은 늘 깨끗했다. 오랜만에 오는 집은 윤기가 길에서 지민에게 납치를 당하기 전과 똑같았다. 윤기는 빠르게 걸어 지민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지민이 푹신한 게 좋다며 또 사르르 꿀처럼 웃었다.



"이제 놔도 돼."

"시러요. 안 놔줄 건데요?"



지민이 애교 넘치는 말투로 윤기의 목에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윤기는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광대를 어쩌지 못했다. 고양이로 있을 때도 고르릉거리는 소리를 참지 못했는데, 사람으로 있다고 다를까 싶다. 윤기가 마찬가지로 입꼬리를 예쁘게 잡아당겨 웃으며 물었다.



"그럼 안 놓고 뭐하고 싶은데."

"글쎄요."

"애매한 말 하지 마."

"시러여. 팀장님두 아까 그랬잖아요."

"…취해도 입은 살아선."

"히히 입 말구 다른 곳도 살…으응? 우리 슈가 아빠 찾아서 여기까지 왔어?"

"환장하겠다."

"엉…민팀장님?"



초점이 흐릿하다. 지민이 눈을 찡그리며 느리게 꿈뻑거린다. 침실은 정적으로 휘감겼다. 둘이 숨을 고르는 소리로 꽉 찼다. 윤기와 지민은 시선만 교환하고 있었다. 정적을 먼저 깬 사람은 지민이었다.



"우리 슈가랑 닮아서 그런가…."

"……."

"머리 한번만 만져 봐도 돼요?"



지민이 조심스럽게 윤기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세공품을 다루는 장인이라도 된 것마냥 아주 섬세했다. 만지는 감각조차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 슈가는 여기에 귀가 있어요. 팀장님은 없네요."



지민이 윤기의 목에 매달리며 흐흥 숨소리 같은 웃음을 흘렸다.



"팀장님."



죄 없는 시트를 쥔 윤기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간다. 지민도 윤기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타고난 끼는 술을 마시면 더욱 증폭이라도 되는 건가 보다. 더없이 야살스럽게 윤기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나 다른 곳도 더 만져도 돼요?"



어딘가 뚝, 실 끊기는 소리가 났다. 그 실의 이름은 민윤기의 이성이었다.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동물과 사람이 아닌, 사람과 사람으로.





***





지민은 으응 잠결 맺힌 콧소리와 함께 꼬물꼬물 따뜻한 형체로 파고들었다. 볼을 비비적거리며 다시 수면 욕구를 채우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슈가가 언제 이렇게 커졌지…? 지민은 아직 반쯤 잠에 잠긴 정신으로 고민했다. 따뜻하긴 한데, 그런데 우리 슈가는 극세사처럼 엄청 부드러운 털을 가졌는데. 이 매끄러운 느낌은…그러니까…사람.


반짝, 지민이 눈을 떴다. 바로 정면에 하얀 얼굴이 보였다. 민윤기였다.



"……."



대체 왜…민윤기랑 내가 아침에 같이…. 멍청히 지민은 얼빠진 얼굴로 감긴 눈꺼풀의 윤기를 바라보았다. 너무 충격적인 사실을 맞닥뜨려서 그런 건지, 머릿속이 깜빡깜빡 정전을 일으켰다. 시멘트를 붓고 굳혔다. 잘 기억이 안 난다. 딱 기억나는 건 마지막즈음 테이블에서 아예 소주병을 들고 마셨다는 거다.


그런데…왜 이렇게 허리가 무거울까. 슈가가 배에 올라와서 자는 무게감이랑은 또 달랐다. 지민의 시선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간다. 그는 마침내 보고야 말았다. 실 오르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한 이불을 같이 덮고 있는 민팀장과 자신. 그리고 제 허리에 감겨있는 민팀장의 팔. 하하…신선한 장면이네. 신선한 장면이야. 꿈인가.


얼핏 떠오르는 기억의 한 조각. 누워서 민윤기를 올려다보며 뭐라고 불렀더라. 팀장님, 민팀장님, 민윤기. 존나 다채롭게도 불러젖혔다. 그러다 중간중간 형이라고 불렀던 거 같기도 하다. 지민은 순간적으로 욕을 뱉을 뻔했다. 미친. 차마 민윤기가 눈을 뜨면 더 무서운 상황이 벌어질 거 같아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또 연이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퍼즐들. 굳이 떠오르지 않아도 되는데 막을 새도 없이 떠올랐다. 


허리에 다리 감아봐. 가게 해줄게.

아니야, 그망, 혀엉.


뇌세포들아 제발 그만. 그만 기억해. 지민은 고민도 없이 살금살금 침대를 빠져나가려 꿈틀거렸다.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널부러져 있는 옷을 스캔했다. 진짜 정신없이 했, 상상하지 마. 하지 말라고. 지민은 숨조차 참고 조용히 옷을 끌어안은 채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 뒤 무슨 정신으로 택시를 잡고 집까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내내 이대로 차도에 뛰어들어 죽고 싶단 생각을 했다. 지민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꾹 참았던 비명을 왈칵 터뜨렸다.



"돌았니? 돌았어? 돌았냐고!"



마음에 든다고 그대로 바로 침대로 직행하면 어떡해! 지민은 대책 없는 자신을 욕했다. 심지어 민팀장은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비록 차였지만. 그, 근데 그럼 괜찮지 않나…. 바람은 아니니까.



"…하…."



지민이 보이지 않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도망쳐 나오긴 했지만, 바로 집에 들어온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슈가야 아빠 왔어. 미안해. 말도 없이 늦게 와서."



그러나 지민은 더 이상 민윤기에 관한 문제를 생각할 수 없었다. 술 마시고 상사랑 떡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슈가야 어디있어. 또 산책 갔나. 쇼파 아래 있어? 지민이 침실로 향했다. 늘 슈가가 산책을 나가는 날이면 창문이 열려있었다. 오늘은 닫혀있다. 슈가야. 슈가야 어디 있니. 점점 심박수가 높이 뛰어올라왔다. 그러다 펑 터져버렸다. 절벽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슈가야?"



지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고양이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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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공개본은 위까지가 완결입니당
?
  • ?
    진태령 2019.05.07 00:20 SECRET

    "비밀글입니다."

  • ?
    후유카 2019.08.05 17:26 SECRET

    "비밀글입니다."

  • ?
    몽교 2019.08.15 11:25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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