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athique - no hay problema>
어거스트 사무실은 패닉이었다. 출근한지 약 2시간. 귀를 터뜨릴 듯 울려대는 전화벨소리는 물론이요, 개떼처럼 몰려든 기자들이 어거스트 타워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의혹이 몰린 누군가를 카메라로 찍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켜고 드나 다니는 사람들을 체크했다. 네, 지금 드릴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던 레이첼이 결국 전화선을 뽑고서야 사무실에 평화가 찾아왔다. 우아한 태도를 좀체 잃는 적이 없는 레이첼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어거스트 수석비서 경력은 오늘부로 끝일지도 모른다고.
레이첼은 손을 살짝 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헤드라인과 함께 기사가 떠있었다. 이미 동시다발적으로 퍼져나가서 하나를 내리면 백 개가 올라온다는 건 그녀도 알지만, 내리는 시늉이라도 해야했다. 아니면 윤기 앞에서 모아갈 변명이 없을 테니까. 다시 봐도 기사의 내용은 현란했다.
[…더는 제 자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이미 아트스쿨에서 한번 교사된 도리를 저버린 것으로 충분합니다. 한번 잘못을 저질렀지만 두 번은 저지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거스트에서 직접 촬영장에도 사람을 보내 직접 감시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밖에 알릴 길이 없었습니다. 부디, 이 종이에 적힌 말로 세상이 한결 하얗게 변했으면 좋겠….]
배우 케일론 베닌은 자살 도중 주민에게 발각되어 현재 병원으로 이송되어 안정 상태를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유서 내용 아래 케일론의 위치소재까지 적어놓은 기사는 머지않아 삭제된 페이지로 처리되었다. 어떻게 해결할지 좋은 수를 떠올려봐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어거스트에서 로비를 받았다는 탑배우의 양심선언과, 그 선언의 방식이 자살이라는 점은 지극히 파격적이었고 어거스트에 모든 화살이 돌아가도록 겨냥하고 있었다.
“퇴직할 때가 됐나.”
하아, 이마를 짚으며 레이첼은 맨해튼 거리를 뛰어다니며 커피를 나르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왜 그 당시 선임들이 유독 바쁘고 피곤하고 찌든 안색이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입사한지 약 3개월쯤 됐을 때다. 레이첼 너도 금방 그만 두는 게 좋을 거야. 이 일은 하면 할수록 정신이 낡아가거든. 더 이상 날 속이면서 일하고 싶진 않아. 하소연하며 책상을 정리하던 선임의 얼굴은 무거웠다. 레이첼은 엘리 하트만에게 과할 정도로 지극정성인 하트만 회장의 부성을 썩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선임들을 지금 와서야 이해했다.
윤기가 취임하면서 수석비서의 자리를 꿰찬 레이첼은 이런 막막함을 느껴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해보자. 선임들과 이미 죽은 하트만 회장에게 왜 이딴 엿을 남겨뒀냐고 멱살을 잡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살 길을 찾아야했다. 케일론이 유서에 밝힌 내용은 사실이라서 더 반박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죄를 지은 사람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으니 법의 심판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모르쇠 작전으로 하트만 전회장의 독단이었다고 발뺌하면 될 텐데….
“…….”
어거스트의 얼굴. 어거스트의 마스코트 민윤기가, 그 연기 역할을 해줘야 할 사람이 통 연락이 되지 않으니. 아무리 방법만 떠올려도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레이첼은 다시 두통이 몰려왔다. 사실 현재 일이 터진 상황보다 쏙 숨어 연락하나 되지 않는 상사에게 받는 열이 더 컸다. 어젯밤 전화를 받고 끊더니 그 뒤로는 아예 깜깜무소식이다. 스물 후반의 어거스트 회장을 고아센터에 신고할 수도 없고. 어린 나이로도 회장 자리를 보존할 만큼 영리한 제 상사가 늦게 반응하면 반응할수록 여론이 안 좋아진다는 걸 모를 리 없다.
레이첼은 무책임한 개자식이라는 욕을 남기면서도 다시 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머지않아 레이첼의 고운 입에서 무책임한 또라이 개자식으로 욕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내 회사야? 차고 나오는 험한 욕을 꾹꾹 누르면서 레이첼은 전화 상대를 바꾸기로 했다. 박지민한테는 연락을 했을 수도 있겠지. 어제만 해도 운전기사가 퀸스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언급을 했으니까.
아니 그렇게 소중하면, 스케줄까지 깨고 박차고 나갈 정도로 보고 싶으면 와서 지켜야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세상에서 단 한 개만 존재하는 보물을 잃을까 걱정해본 적 없는 레이첼은 윤기가 이해가지 않았다. 자신에게 어거스트의 재력과 힘이 주어졌다면 조각조각 사진을 찢어 배달한 놈의 머리를 거꾸로 매달아 뽑아버렸을 텐데. 하트만 시절부터 합치면 장차 열 손가락이 넘는 세월을 봐왔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다.
아무에게도 스스로를 온전히 다 보여주지 않지만 사랑하는 한 명에게는 알렸을지도 모른다. 레이첼이 제발, 이라는 단어를 붙여가며 지민의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려는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진이 우당탕 쏟아져 들어왔다. 주주들의 성화를 온몸으로 맞고 들어온 그의 창백한 안색은 패전소식을 들고 온 파발보다 더 했다.
“큰일났어요! 레이첼! 레이첼!”
오 제발. 그 잠깐의 순간 레이첼은 여기서 더 나빠질 일이 없을 거라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조금 있다 말해줄 수 있어요? 진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필름, 아스팔트 정글 필름이 유출됐어요.”
있네. 나빠질 일이…. 레이첼은 이대로 유리문을 뚫고 건물 아래로 투신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행히 전체는 아니고 중간부터 엔딩까지만 유출되긴 했는…레이첼 내 말 듣고 있어요?”
“잘 있어요, 진. 내가 먼저 퇴사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레이첼! 정신 차려요! 보스는요?”
“실종신고를 하는 게 빠를 거예요.”
“그래도 일단 다시 전화를 걸어보고….”
“안 돼! 꽂지 마요!”
레이첼이 벌떡 일어나 손을 뻗었으나 때는 늦어있었다. 진이 전화선을 꽂은 순간, 그들의 대화는 전화벨소리에 파묻혀버렸다.
***
정국이 커튼을 살짝 열어 지민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구경했다. 기사가 터진 2일전부터 차를 가져와 뻔뻔하게 주차하더니,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화장실도 안 가요?”
“몰라.”
“때리면 어떻게 돼요?”
“감옥이지 뭐.”
“민트색, 아니 그 싸이코가 꺼내주지 않을까?”
“…너 나중에 회사 커지면 불법적인 거 잘할 거 같다.”
“그래보여요? 그런데 쟤네는 좀 맞아도 돼. 사람 집 앞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정국이 미간을 찌푸리며 커튼을 놓았다. 지민은 일어나자마자 폰을 찾더니, 저녁으로 스파게티를 먹을 때까지 미동도 없는 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정도면 포기할 만도 한데. 정국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아직도 연락 안 돼요?”
“응.”
“그 정도면 그냥…아니에요.”
포기해요, 하고 말하려던 정국은 상처받을 지민을 생각해 말을 끊었다. 하루종일 어거스트 사무실이며, 같은 비서들이며, 민윤기며 모든 곳에 전화를 걸어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으니 이미 걱정이 태산일 텐데, 굳이 그쪽에 쓸데없는 말을 얹어줄 필요성은 없다. 어차피 기사를 보고 충격 받을 지민을 걱정해 달려온 집이다.
지민의 상태는 울음바다가 되어있을 거란 정국의 추측보다 꽤 괜찮았다. 피곤한 얼굴이긴 했지만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응, 알고 있었어, 기사가 난 건 몰랐지만…. 정국은 꽤나 놀랐다. 난 형이 또 죽는다고 막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정국은 울음바다를 넘어 지민이 차도에 뛰어든다고 설치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가진 것 없어도 가정교육은 확실히 받은 지민의 높은 도덕표준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을 처음으로 내준 사람이 그런 비난받을 일의 중심에 서있다니, 당연히 충격을 받아도 모자라다.
정국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해 더 놀랐다. 바로 윤기에 대한 지민의 신뢰였다. 이건 민윤기가 한 거 아니야. 그 사람은 이런 거 안 해. 딱 잘라서 일축하니, 정국도 거기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명확한 확신은 세상에 알을 깨고 처음 나온 새끼동물이 제 부모를 믿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니 정국이 참견할 수 있는 부분은 극소했다. 고작해야 기자들 갈 때까지 같이 있어준다는 말.
“저 먼저 잘게요. 형은 언제 잘 거예요?”
“나는 좀만 더 있다가.”
“내가 침대 써도 돼요?”
“응. 써. 난 카우치에서 잘래.”
“형도 빨리 자요.”
정국이 손을 흔들고 방 안으로 사라진다. 지민은 정국이 사라지자마자 픽 쓰러져 테이블에 고개를 묻었다. 진짜 이 개자식.
전화한다며. 보고 싶었다며. 왜 거짓말해.
지민은 후회했다. 그때 윤기를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했다. 꾸역꾸역 이상해 보인다며 꼬치꼬치 캐묻고, 정 하다못해 옆 좌석에 꾸역꾸역 엉덩이를 들이밀어 같이 탔어야 했다. 그러면 이렇게 연락만 기다리며 손톱을 깨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답답함으로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이쪽으로 윤기가 온다면 찍을 생각이긴 할 테지만, 저들에게 얼굴을 한 컷이라도 더 내비춰 떡밥을 풀어주긴 싫었다. 마찬가지로 기자들이 깔렸을 어거스트로는 갈 수도 없는데.
걱정된다. 왜 스물 후반이나 된 남자를 걱정하고 앉아있는지, 그것도 무려 대기업 회장 자리에 앉은 사람을 평범한 소시민인 자신이 감싸주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지 신기한 광경이지만 지민은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센트럴 파크에서 홀리를 잃을까 안절부절 못하던 때 말고는 누군가를 이렇게까지나 걱정한 건 처음이다. 아니 홀리보다 못하다. 말라뮤트 홀리는 이름이라도 부르면 쫑긋 귀를 세우고 돌아오지. 민윤기는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다.
한 편으로는 윤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안 받지? 말하기가 무서워서? 가족이라 부르던 그들이 그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뇌를 열심히 굴려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민윤기는 가족의 죄는 자신의 죄와 같으니, 자신을 돌로 치라며 모조리 뒤덮어 쓰겠다고 나올 성격이 아니었다. 케일론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자신이 다 해결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한 사람이었으니까.
진짜 못됐다. 민윤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빌어먹게 못 됐다. 이 거짓말쟁이.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지민은 테이블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폰의 전원버튼을 꾹 눌렀다. 역시나 들어오는 메시지는 0개. 레이첼이나 진으로부터 온 연락도 없다. 무수히 많이 눌러본 전화번호를 또 누르는 대신, 스팸 문자나 이리저리 삭제하던 지민은 다시 테이블에 엎어져 눈을 감았다.
***
대서특필로 어거스트의 비리가 터진 아침. 누구보다 분주해야할 윤기는 평소와 똑같은 하루를 시작했다. 일단, 운전기사의 무능을 비아냥거리며 쫓아냈다. 낙타 혹 한가운데에 타도 이 정도보다는 덜 흔들릴 거야. 아니면 악어 등이라던가. 토할 뻔 했는데 여기 누구 소화제 좀 가져다 줄 사람? 거기 운전대 잡고 있는 당신이 딱 적합해 보이는데. 오 못 알아들었어? 당신 해고라는 말이야. 내려. 운전기사는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나, 하는 눈길로 허, 하더니 문을 팍 닫고 나가버렸다. 잘리는 마당에 될 대로 되라하는 생각인 듯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주택가 도로 한복판에 선 슈퍼카는 그 자리 그대로 한참이나 서있었다.
윤기는 사이트 메인 대문짝만하게 실린 어거스트 비리 기사를 성의 없이 휙휙 넘겨보았다. 채 반절도 읽기 전 화면을 닫았다. 이딴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레이첼이 케일론의 기사만 말했더라면 어떻게 조질까 고민이라도 하긴 해봤겠지만, 박지민의 안전을 누군가가 위협한다는 사실을 말한 순간부터 윤기는 온통 그쪽으로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세상에, 박지민이 자신의 약점으로 이용당한다. 자신 때문에 다친다. 그 끔찍한 사실을 현실로 체험한 순간, 윤기는 아이스하키채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얼얼하다 못해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건 니가 나를 떠난다는 사실보다 무서웠다. 정말 무서웠다. 박지민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일 퍼센트라도 존재한다면. 그게 자신 때문이라면. 그냥 콱 다 같이 죽는 게 나을 거 같다.
시끄럽게 전화가 울려댄다. 레이첼이나 진의 연락처는 손쉽게 무시하던 윤기는 유일하게 어떤 번호 앞에서만 멈칫거렸다. 엄지손가락이 통화버튼 위에서 배회했다. 받을까, 말까. 걱정하고 있긴 할 텐데. 마지막까지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주던 눈빛까지 떠올리고 나니 받을 엄두가 안 났다. 거짓말로 능글맞게 내가 보고 싶었냐며, 그렇게 걱정할 시간에 날 더 좋아해보라 안심시키기엔, 안타깝게도 단 일 그람도 긍정적인 상황이 되지 못했다.
윤기는 운전대를 어디로 꺾어야할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손가락으로 톡톡 운전대를 두드렸다. 회사나 집 앞은 이미 기자들이 잔뜩 깔려있을 테고, 위험분자로 취급되고 있으니 무의식중에도 지민에게 가선 안 된다.
“…….”
왜 하필 지금 순간 그곳이 떠오르는 걸까. 집과 차를 모두 잃어 노숙자 신세가 되어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 저장해놓은 곳. 그들이 만들어놓은 과거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들과 함께 머물렀던 장소로 돌아가다니. 한 때는 그 땅을 다시 밟느니 발목을 잘라버리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미쳤다고 거기를 또. 그러나 한번 떠오른 장소는 쉽사리 머릿속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
결국 윤기는 홀린 듯 악셀을 밟았다. 도로를 미끄럽게 주행한 슈퍼카는 곧 조용한 고급 하우스저택 앞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린 그는 커다란 저택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질리게 크다. 천천히 걸어 초인종을 눌렀다. 지이잉, 벨이 울린다. 어쩐지 긴장감이 올라와 윤기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부랴부랴 나온다. 그는 놀란 눈으로 한참이나 헛것을 본 것처럼 깜빡거리더니 윤기를 불렀다.
“도련님!”
“…잘 지내셨어요?”
노인은 믿지 못하는 얼굴로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곧 푸근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하트만 저택의 집사가 그를 초대했다. 커다란 대문 안으로 윤기는 발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에 집사와 마주앉은 윤기는 지민이 씌워준 모자를 벗었다. 페퍼민트티의 따뜻한 김이 안개처럼 올라왔다. 새삼스럽다. 이 넓디넓은 저택에서 5년을 넘게 생활했는데도 꼭 자신이 오늘 처음 온 손님 같았다. 아니 뭐 손님이 맞다. 끝내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연결되지 못했으니까. 장기투숙객정도겠지. 응접실을 어색하게 둘러보던 윤기는 세월의 바람을 집사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정하게 쓸어 넘긴 백발 아래 그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로빈츠 하트만이 죽고부터 그의 시계는 참 빨라진 듯싶었다.
“잘 오셨습니다. 차는 입에 맞으시죠?”
“세상 어디에 버트가 내준 차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과찬이십니다. 아 티비에서 나오는 도련님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아아.”
집사는 따뜻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는 것처럼 흐뭇한 감정도 담겨있었다. 윤기는 그 인자한 미소 앞에서 약간의 죄책감을 가졌다. 오늘 아침 뜬 기사를 봤겠지. 하트만 가문의 저택을 오래전부터 돌봐온 그는 로빈츠 하트만이 키운 어거스트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감히 윤기가 추측할 수 없을 기간을 하트만들과 함께 보냈으리라. 어쩐지 입안이 말라온다.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집사는 아주 뜬금없는 소리라도 들은 양 허허 웃었다.
“집주인이 허락을 구하면…저는 뭐라 대답하면 좋습니까?”
“…….”
“여기는 도련님의 집입니다. 내일 바로 부지를 팔아버린다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
“원하는 만큼 편히 쉬고 가시면 됩니다.”
빈 티컵을 트레이에 챙긴 집사가 일어난다. 집이라는 건 좀 편해야 되는 거 아닌가. 윤기는 하트만 저택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을 떠올렸다. 그건 ‘크다’라는 감상이었다. 문도 컸고, 타고 온 차도 컸으며, 로빈츠 하트만과 그의 아내인 페트리아 하트만도 거인처럼 느껴졌다. 어색하고 민망한 게 꼭 걸리버 여행기의 작은 난쟁이가 길을 잘못 찾아들어온 것 같았다. 모든 환경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라졌지만, 일단 귀찮은 일이 사라져서 좋았다. 이 속옷이 니 꺼냐, 이 양말이 내 꺼냐 바구니에서 빨래를 분류하지 않아도 됐고, 식사를 할 때마다 제 몫의 식판을 챙겨들지 않아도 됐으니까.
윤기는 천천히 걸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대리석은 반듯하게 닦여 윤이 났고, 걸어놓은 그림들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꽃도 장식품도 똑같았다. 로빈츠 하트만이 죽기 전 머물렀던 그대로에서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한발 한발 느리게 계단을 올랐다. 기억도 생생했다. 3층으로 올라가면 맨 끝 쪽에 있는 자신의 방, 그리고 그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
윤기는 가장 먼저 치고 올라오는 싫은 기억을 미뤄놓고, 애써 그 전의 기억을 끌고나왔다.
‘슈가, 니가 상대편 연기를 해줘야 돼. 빨리 읽어봐. 곧 있으면 오디션이니까 좀 도와줘.’
당장 내일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윤기가 싫고 귀찮은 내색을 팍팍 풍겨도 엘리 하트만은 꿋꿋이 윤기에게 대본을 들렸다. 결과물은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허, 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걸 지금 연기라고 하는 거니? 길거리의 돌이 그거보단 더 성의 있겠다. 뭐 어떡하라고. 난 원래 연기에는 관심 없어. 음, 그건 그러네. 그래도 계속 해봐.
‘예쁜 고양이네요.’
‘이 고양이는 이름이 없어요. 내가 원하는 집을 얻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을 거예요. 그게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죠. 아마 티파니 같을 거예요.’
‘티파니? 보석 상점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저는 티파니를 정말정말로 좋아해요.’
나는 연기를 정말정말로 좋아해. 윤기는 거기까지 떠올리고 제 방 손잡이를 돌렸다. 꽃병의 꽃도 과거와 똑같은 그곳의 공기는 신기하게도 예상만큼 차갑진 않았다. 이불조차 어제 빤 듯 깨끗했다. 윤기는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매번 사로잡혀있던 과거의 기억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