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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ny Elfman - Did That Hurt?>









 케일론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사진을 대충 넘겨보았다. 멍청한 파파라치가 돈값을 하지 못했다. 얼굴에 멍을 가득 달고 나타난 그는 목표물에게 가드가 붙었다는 이야기는 왜 해주지 않았냐며 성질을 냈다. 가드? 어거스트 회장이 경호업체를 수소문한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의구심을 품은 그는 씩씩거리는 파파라치에게 몇 푼을 던지고 돌려보낸 다음, 그나마 찍어왔다는 사진을 책상 위로 늘어놓았다.



…흠.”



 아무리 봐도 쥐새끼는 정해져있는데…. 케일론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봉투를 들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지민의 사진을 손으로 집어 까딱거리며 흔들었다. 알까? 모를까?


 추측하자면 이렇다. 트레일러가 주차된 공간은 배우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존중해 촬영장의 스태프들도 쉽사리 오지 않는다. 초대받지 않는 이상 경호원이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들여보낼리 없다. 그렇다고 대화를 했을 때 그 비서가 딱히 불편해하거나 당황한 티를 많이 내지도 않았으니. 확신할 수 없지만 케일론은 조용히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오늘이면 지긋지긋한 아스팔트 정글의 촬영이 끝나니까.


  케일론은 트레일러에서 내려 촬영이 준비중인 현장을 가만 바라보았다. 아스팔트 정글의 마지막 촬영장소는 고급 하우스저택이었다. 이 촬영을 끝으로 제게 약속된 부산물을 떠올리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었다. 베스트셀러 원작을 기반으로 촬영예정이 된 시리즈,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는 캐스팅. 모든 게 보장되어 있었다. 생각하면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다잡기 힘들다. 아, 마지막까지 최고의 연기를 선보여야 하는데.


 아스팔트 정글이라는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꽤나 좋긴 했다. 그러나 과거 로빈츠 하트만이 움직이던 어거스트라면 모를까, 노란 동양인이 지배한 어거스트는 그 밑에서 부려진다는 사실 자체가 거북했다. 거만하게 떠받들어지는 어거스트의 새파랗게 젊은 회장은 존재만으로도 불편했다.



“너무 늦게 온 거 아냐? 마지막 날인데. 더 빨리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뷔가 장난처럼 웃으며 말을 걸었다. 촬영 끝나고 또 만나면 되지. 케일론이 웃으며 대답했다. 감독도 뷔와 같이 있었다.


“케일론! 왔군요. 잠깐 설명해줄 게 있어요.”

"네, 말씀하시죠."

“다름이 아니고 장면을 바꾸는 게 어떤가 해서….”

…이제 와서요?”



 소심한 감독이 머뭇거린다. 뷔가 대신 치고 나왔다.



“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좀 결말이 약한 거 같아서. 별로 속이 확 풀리는 느낌도 아니고.”



 촬영장에서는 늘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모델이나 배우가 촬영을 펑크내면 장면이 전환되거나, 엑스트라의 경우엔 스탭이 그 자리를 메꾸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니 시나리오 변경쯤은 현재 아스팔트 정글에 출연하는 배우 모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촬영 중 변동사항이었다. 케일론이 흔쾌히 끄덕였다. 어떤 장면으로 바뀌는데요? 감독이 케일론에게 변경된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마지막페이지를 확인해보세요.



“딱히 대사가 있거나 어려운 건 없으니까 괜찮을 거 같아요. 작가도 찬성했고요.”

“…….”

“줄은 스태프가 방금 구하러 가서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겁니다.”

“이걸…나보고 연기하라는 겁니까?”



 대본을 확인한 케일론이 딱딱하게 인상을 굳혔다. 겁이 다람쥐보다 많은 감독이 일순 움찔한다. 케일론이, 그 누구도 아닌 천사라 불리는 케일론이 화를 내다니. 감독은 뷔가 요청한 마지막 장면의 수정을 전적으로 찬성하고 있었다. 감옥이라는 방법보다 죽음 쪽이 아스팔트 정글이라는 제목에 더 부합하고 감옥을 섭외해야하는 번거로움도 줄일 수 있었다. 왜, 왜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감독이 급격히 자세를 낮췄다. 감독을 발견한 케일론이 아, 하고는 급히 표정을 풀고 조금 곤란하다는 낯빛으로 인상을 바꿨다.



“저는 원래 있던 스토리가 조금 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자살을 쉽게 결심할 수 있는 캐릭터도 아니고.”

“아 그런가요….”

“왜? 난 이쪽으로 바뀌는 거 조금 더 속 시원하던데. 댄 나쁘잖아.”



 뷔가 목소리를 냈다. 얼마나 나쁜데. 회사도 배신하고. 가족처럼 믿고 있는 사이였는데. 거기다 사람도 죽이려고 하고. 그치? 시선을 받은 로렌이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쪽이 좀 더 와닿아요. 조금 더 짜임새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로 케일론이 한 번 더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건 조금….”



 뷔가 아쉽다는 듯 눈썹을 축 꺼뜨리고 배려하듯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면 이런 장면에 트라우마라도 있어?”



 감독이 같이 케일론을 바라본다. 혹시 진짜 있는 건가, 궁금한 시선들이 박혔다.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면 민감한 장면을 연기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케일론은 간신히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내보였다.



“…그럴 리가. 그럼 이 방향으로 하죠.”



 감독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그럼 준비시킬게요. 이제부터 완벽한 촬영준비를 위해 논의할 게 생겼다는 감독이 떠나고, 로렌은 메이크업 도중 끌려왔다며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움직였다. 뷔는 미안하다는 듯 다가와 케일론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에이, 놀랐잖아. 느리게 말해서 진짜 그런 트라우마라도 있는 줄 알고.



“그래도 너무 급작스럽게 알려줬지? 그냥 밧줄에 묶여서 발만 보여주면 되니까…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어.”

“…….”

“사실 다 고생이긴 해. 스태프들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나무에 사람을 올리는 것도 기기 없으면 힘들잖아.”

“…….”

“미안해. 다음에 또 같이 작업하면 명심할게.”



 케일론이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다음부터는, 좀 일찍 말해줘. 크게 알았다며 등을 몇 번 토닥거린 뷔가 웃으며 자리를 뜬다. 마지막까지 파이팅!









 쨍그랑,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날아간 유리꽃병이 산산조각이 났다. 씨발, 씨발! 천박한 말투로 욕을 내뱉으며 케일론은 보이는 모든 것을 깨부쉈다. 처음 시작은 글라스였고, 두 번째는 물병이었고, 그 뒤로는 눈에 보이면 닥치는 대로 집어들고 던지고 부쉈다. 분노로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어찌나 수치스럽고 화가 나는지 스태프가 밧줄을 제 목에 걸어준 순간엔 그대로 스태프의 어깨를 발로 차 밀어내고 욕을 내뱉을 뻔 했다.


 케일론은 벌게진 눈가로 허공에 씩씩거렸다. 스스로가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나도 죽을 줄은 몰랐다고! 그러게 반항은 왜 해서? 하는 게 처음도 아니면서. 처음부터 배역을 달라고 조르며 먼저 꼬리를 친 건 그년인데. 아니 흥분해서 조금 졸랐기로서니 꽥 죽어버릴 줄 알았나…닭 모가지도 아니고….


 케일론은 이어 불안증세를 보이는 환자처럼 까득까득 손톱을 씹었다. 아는 건가?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아니, 어거스트가 알 리가 없다. 무조건 딸의 배역을 따내겠다고 돈을 물심양면으로 퍼나르던 하트만도 멍청하고, 부모조차 제대로 없는 현재 회장도 멍청하다. 게다가 알았다 하더라도 10년이나 가까이 지난 지금 대체 왜? 애초 캐스팅을 할 리가 없지 않는가. 미친 사람처럼 호텔을 정신 산만하게 왔다갔다거리던 케일론은 계속해서 불안해지는 마음을 다스렸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스마트픽처스 쪽에서 매수해둔 관계자가 아스팔트 정글의 필름을 풀어버릴 터였다. 머지않아 어거스트는 영화사업계에서 완전히 추방당할 것이다. 새파랗게 어린 어거스트 회장의 행보는 거기까지가 될 거다. 케일론은 어느 샌가 까득거리며 손톱을 씹었다. 피 맛이 난다. 케일론이 인상을 쓰면서 손가락을 입에서 뺀 순간.



“…….”



 바닥에 떨어져있던 사진이 그의 시야 사이로 들어왔다. 파파라치에게 가져오라 부탁한 사진. 케일론은 천천히 사진을 주워들었다. 말랑하게 풀린 분위기로 지민이 전화를 받으며 환히 웃고 있었다.







***








 윤기는 뷔로부터 촬영이 끝났다는 문자를 받자마자 저녁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집으로 향했다. 레이첼과 진이 당황하며 대주주 메딘이 이미 레스토랑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앞세워 윤기를 말렸다. 미스터 윤, 우호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나빠져? 그럼 너네가 마차라도 태워서 집에 정중히 돌려보내. 그 정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냐며 여유롭게 비아냥거렸다. 온갖 여유로운 척을 다 떨며 집으로 돌아온 윤기는 조금 전과 달리 조급한 손놀림으로 서랍을 뒤져 신경안정제를 복용했다. 수면유도제와 같은 약 종류는 지민과 통화하면서 하나씩 건너뛰는 날이 많았으니, 복용하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윤기는 뷔의 메시지가 온 화면을 다시 열었다. 사진이 하나 첨부되어있었다.



[mission complete!]



 브이를 한 뷔의 셀카 속 배경으로 많은 스태프들과 촬영장비 사이로 케일론이 밧줄에 목을 매달고 있었다. 매트와 안정장치가 달려있더라도 분명 이 그림은 윤기가 몇 년 동안이나 설계한 장면이었다. 로빈츠 하트만이 사망하고 어거스트 회장 자리에 앉은 길고도 긴 그 시간동안 매일. 윤기는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폰을 던지고 쓰러지듯 등을 기대 누웠다. 딱히 통쾌하지도 기쁘지도 않다. 그저 귀찮았다.


 왜 기쁘지 않을까? 과거를 꼬아놓은 놈은 놈대로 처리하고, 영화는 영화대로 흥행한다. 계획은 완벽했다. 엄청난 파급력을 달고 영화는 퍼져나갈 것이고, 노이즈마케팅이라 비난하는 수준을 넘어서 어마어마한 양의 욕은 좀 먹겠지만 홍보효과는 톡톡히 할 거다. 자신이 죽인 방식대로 죽임 당하는 살인마라니. 하물며 그 살인마가 쌓아놓은 천사 이미지를 따지면 누구라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영화관에 돈을 쏟아 부어 한 좌석을 구매할 것이다. 논란이 좀 있어도 뭐.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개봉했는지 내렸는지도 모르게 아무 수익도 거둬들이지 못하고 망하는 것보다는 낫다. 거기에 영화를 통해 거둬들인 수익을 전액 기부한다고 공표하면 자신은 케일론의 천사라는 칭호를 뺏어왔을 것이다. 하는 일마다 못마땅한 기색을 비추는 임원들도 찍소리나지 못하게 기가 눌리는 건 덤으로 딸려올 테고.


 그런데 만족스럽긴커녕, 이 공허한 감정은 대체. 나름 거창하게 복수라 이름붙인 계획은 이제 막 이뤄지는 단계인데….



“…….”



 징그럽게도 과거의 환영조차 그대로였다. 금발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온 소녀가 앞에 있었다. 꾸역꾸역 스물아홉까지 자라버린 윤기와 달리 그녀는 기억 속에 박힌 그대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대.

 아빠는 왜 날 못 믿었을까?

 너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니?

 슈가, 이거 좀 열어줘.


 윤기는 몸을 뒤척였다. 이것은 표류인가. 아니면 항해인가. 항해라고 생각했는데 표류였다. 몇 년을 해매며 찾은 보물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이 텅 비어있는 것만 같은.


“…….”


 윤기는 모든 게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온화하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바라보는 엘리 하트만의 환영을 향해 묻고 싶었다. 네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어? 이렇게 하면 나한테서 떨어져나가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뭘 원해. 나는 이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데…. 일을 어떻게 깔끔하게 마무리해야할지도, 이제 그만 내 앞에 튀어나오라 환영에게 싹싹 빌 의지도 점점 녹아갔다.


 그래 그냥 지금은…박지민이 보고 싶다.


 정신상태가 마약을 한 것보다 흐려졌다고 느끼면서도 윤기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나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다, 너무 힘들었으니 네가 좀 달래달라, 등도 토닥여주고 꽉 끌어안아서 위로해주라 어린 아이처럼 박지민한테 매달려 대책 없이 찡찡거리고 싶었다. 너만큼 따뜻한 사람을 몰라. 너만큼 다정한 사람을 알지 못해. 그러니까 네가 날 도와주면 안 될까. 넌 원래 착하잖아.


 그러나 그 욕구와 나란히 어깨를 견주는 생각이 있다. 이렇게 한심하고 못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 어느 누구도 하자있는 상품을 가지고 싶다 말하진 않는다. 처음부터 멀쩡한 새 것을 가지고 싶지 중고를 고쳐 쓰고 싶진 않을 터였다. 윤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민이라면 못내 받아들여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불안감의 굴레에서 탈출하진 못했다. 보고 놀라 도망가도 붙잡지도 못한다. 지민 앞에서 형편없이 뻥 뚫려있는 속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쯤 얼굴만 보는 건, 정말 순식간에 보고 오면. 윤기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차키를 직접 집어들다 생각을 바꿔 기사를 호출했다. 혼자 간다면 박지민 발목에 매달려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것만 같았다.



“어디로 출발할까요?”

“…퀸스로.”



 윤기는 외우고 있는 지민의 주소를 말하고 눈을 감았다. 뷔에게 연락을 하는 매너라고는 없냐고 이죽거리던 과거는 깔끔히 삭제했다. 가면 박지민이 있을까. 보고는 싶은데, 차라리 없어서 만나지 못하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서로 반대되는 마음이 반반 섞여있었다. 윤기가 갈등하는 사이 부드럽게 움직인 차체가 퀸스의 아담한 저택거리에 정지했다.



“도착했습니다.”

“…잠깐 대기하지.”



 창문 밖으로 확인한 집의 전등은 꺼져있었다. 차라리 비어있길 바랐으면서도 윤기는 어쩔 수 없이 차오는 아쉬움을 느꼈다. 차문을 연 윤기가 천천히 땅을 딛고 나와 차문을 닫은 그때, 오늘 하루 종일 지민의 연락이 올까 신경을 썼던 폰으로 진동이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건성으로 전화를 받아 대꾸했다.



“지금 바빠.”

[아니 끊지 말아주세요.]



 이례적으로 윤기의 말을 어긴 적이 없는 레이첼이 다급하게 윤기를 붙잡았다. 대주주 메딘이 반대파로 넘어갔다, 수준의 보고만 생각하던 윤기가 미간을 모았다. 그는 자신의 수석비서가 쓸데없는 일로 호들갑을 떨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뭔데.”



 전화를 받으며 자연스레 옆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쪽엔. 요새 하루종일 보고싶다는 말만 나오게 하는, 이름 부르는 것조차 닳까 아까운 대상이 있었다. 발에 채는 콘크리트 조각을 하얀 스니커즈로 툭툭 차면서 걸어온다. 멈칫 그 스니커즈가 멈춘다. 눈이 마주친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지민이 눈을 서서히 크게 뜬다. 놀라 껌뻑거리던 지민이 벌어진 입술을 달싹였다.



[케일론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유서에 어거스트가 언급되어 있어요. 상황이 좋지 않, 아니 위급합니다.]



 미스터 윤? 꽤나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 입모양만은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사무실에 누군가 지민을 찍은 사진을 가득 보냈습니다.]



 윤기는 일순 발밑이 푹 꺼져 정신이 아찔해졌다. 항해였다가, 표류였다가, 마지막은 침몰이었다. 깊은 바다에 빠진 것처럼 숨이 콱 졸려왔다. 지민이 윤기를 확인하고 환하게 웃는다. 미스터 윤!



[…강아지 시체랑 같이요.]



 폰을 쥔 윤기의 손이 힘 빠진 듯 스르르 내려간다.











 지민은 요즘 자신의 인생이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살 생각은 없었는데. 전 세계적 대기업 회장의 애인이 되고, 범행현장의 목격자가 되고, 불과 저번 주에는 정의로운 시민 역할을 추천받았다. 혹시라도 케일론과 관련된 일이 있다면 신고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그 언젠가 우주비행사가 되어 또 다른 제 2의 지구를 발견하다거나, 나폴레옹처럼 신대륙을 발견한다고 해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거스트와 켈링턴 아트스쿨, 그리고 케일론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풀어낸 시몬은 하얀 명함 하나를 지민의 앞에 남겨놓았다. 그런데 저번에 명함 드렸지 않았나요? 버렸어요. 음, 그렇군요. 시몬은 쉽게 수긍하며 의심 가득한 지민의 눈초리를 감당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아뇨, 그냥. 저한테 그런 어거스트는 낯설어서요.


 시몬이 물었다. 그럼 지민이 아는 어거스트는 어떤 어거스트입니까? 지민은 고민했다. 어거스트가 케일론에게 로비를 하고, 억울하게 배역을 뺏긴 학생이 자살을 했다니. 자신이 아는 어거스트는, 전회장이 아는 어거스트는 어떤지 몰라도 현재 윤기가 이끌고 있는 어거스트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고아원에 매년마다 곰인형을 직접 만들어 편지와 함께 보내고,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 선물도 보냈다. 고작 커피나 사다 나르고 감상문이나 쓰는 위치의 비서인 자신이 볼 수 있는 어거스트의 크기란 한정되어있을 테지만, 적어도 지민이 느낀 감상은 그랬다. 이렇게 몰래 고발할만한 일은 안 해요. 뭐 노동시간 어기는 거면 몰라도요.


 지민은 근처 마켓에서 맥주를 몇 캔 샀다. 머리가 복잡한 기분이라 집 앞에서 바로 택시를 멈추는 대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내렸다. 지민이 걸을 때마다 맥주가 여러 캔 담긴 봉투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민윤기는 대체 무슨 일이 겪은 걸까? 아마 자신이 상상할 순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을 겪은 게 확실하다. 자신이 뭐라고 또 민윤기가 걱정된다. 그렇다고 대뜸 찾아가서 그런 일 겪었죠? 이제는 괜찮아요? 하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얼굴을 대면한다해도 지민은 민감한 이야기를 눈치 없이 확확 꺼낼 만큼 무신경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전화라도 하고 싶은데…. 구글에 민윤기 이름이라도 쳐봐야하나, 고민하며 터덜터덜 걸어오던 지민은 퀸스의 서민 주택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슈퍼카를 한 대 발견했다. 저게 뭐야. 저런 집 한 채 값이 넘는 슈퍼카를 끌고 드나들만한 인물은 지민이 알기로 딱 한 명이었다. 설마. 아닌데 오늘 저녁에 스케줄 있다고 했는데. 오전 사무실에 전화를 거니 캔슬은 불가능하다는 레이첼의 전언도 있었다. 입을 떡 벌리고 조금 더 다가가니 차 옆에 선 하얀 얼굴이 보인다. 맙소사, 진짜 민윤기였다. 오매불망 그리던 얼굴을 보니 너무도 반가워 지민은 다른 생각 따위는 다 밀어버리고 폴짝거리는 사슴처럼 단번에 뛰어 윤기에게 달려갔다. 전화를 하고 있던 건지 윤기가 전화를 끊었다.



“미스터 윤!”



 지민은 깜짝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왜 연락도 안 하고 왔어요? 오늘 일 바쁜 거 아니에요? 물어보면서도 이미 입이 귀에 걸려있다. 레이첼이 안 된다고 했는데, 설마 또 막무가내로 뺀 거 아니죠? 이상하게 혼이 조금 빠져나간 듯 보이던 윤기가 이내 평소처럼 말했다.



“질문은 하나씩 해.”

“빼도 되는 스케줄인 거예요?”

“아니.”

“…….”

“그래도 뺐어. 보고 싶어서.”

“…….”

“너도 보고 싶다고 했잖아. 빨리 칭찬이나 해줘봐.”



 윤기가 너스레를 떨며 능글맞게 말을 붙인다. 잘했잖아. 지민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윤기를 응시했다.



“나중에 이렇게 하다가 해임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해임? 내가 누구한테. 다 데려와. 그 사람 모가지부터 자를 테니까.”

“…맨날 그놈의 해고는….”

“뭐 그래도 요즘 아군도 생겼어. 성소수자 단체에서 행사 참석해달라고 편지도 보냈던데?”



 …레이첼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그냥 양아치처럼 빼고 왔다고 하는데도 마음 한 구석이 기쁜 걸 보면 올바른 비서의 자세로는 탈락이다. 그냥 한번만 봐줘. 말하며 입꼬리를 예쁘게 올리는데 다그치며 돌려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휴, 밉지 않은 한숨을 내쉰 지민이 돌연 헉, 했다.



“그, 그런데 여기 이렇게 막 오면 안 되지 않아요?”



 이렇게 튀는 차를 가지고 오면 어떡해요! 아예 ‘여기 어거스트 회장이 타고 있어요!’ 표지판으로 붙여놓은 수준이다. 지민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제 모자를 빼 윤기의 머리 위에 씌웠다. 철저한 무반응으로 대응하니 한풀 열기가 꺾이긴 했지만 한 컷이라도 더 찍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찍혔다고 하면 이미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동안 다 찍혔을 테지만. 지민이 윤기의 손을 잡고 끌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윤기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지민이 의아하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아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아쉽지만 가봐야 돼.”

“…빼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 네 말대로 막 빼고 왔더니 찾는 사람이 많아서.”



 윤기가 징징 울리는 폰을 흔든다. 아 그러면. 지민이 윤기의 손을 붙잡은 채 다시 앞으로 다가왔다. 지민은 아무래도 퇴사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대로 일하러 간다는데 보내기 싫다는 마음이 너무 많이 드니까.



“가셔야겠네요….”

“어.”

“다음은 이런 차 말고 좀 얌전한 거 타고 와요.”

“생각해볼게.”

“그리고…좀 못된 생각이긴 한데, 사실 미스터 윤 일 빼고 왔는데도 좋은 게 더 커요. 얼굴 많이 보고 싶었는데….”

“…….”

“역시 사진 백 번 보는 거 보다 실물 한 번 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전화로 매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노래를 부르니 실제로도 솔직한 말만 나온다. 윤기를 향해 순하고 선한 애정을 가득 담고 있는 두 눈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말간 두 눈이 나는 너를 믿고 있노라 믿음과 신뢰의 신호를 보낸다. 윤기는 그 눈을 빤히 본다. 지민과 달리 윤기의 눈빛은 어떤 의미인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곧 입매를 부드럽게 풀며 웃었다.



“그건 곤란한데.”

“…네?”

“요즘 일이 너무 많거든. 앞으로 매일 사진 찍어서 보내야겠네.”

“아….”

“갈게.”



 윤기가 지민의 손을 놓는다. 스르르 미끄러지듯 느리게 빠져나간다. 조심히 가요. 어. 윤기가 손을 흔들고 차문을 연다. 한발을 차에 딛고 몸을 숙이는 윤기를 보면서, 지민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윤기가 완전히 차에 타고 차문을 닫으려는 그때, 지민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가 문을 잡고 막았다. 윤기가 의아하다는 듯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왜.”

“어, 음….”

“할 말 있으면 해.”

“그, 일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요.”

“지금도 매일 하잖아.”



 윤기가 픽 웃으며 할 말이 끝이냐 묻는다. 석연찮은 느낌이 들면서도 지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꼭 해야 돼요, 덧붙이고 닫기 싫은 문을 닫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쎄한 기분이 드는 거지. 다른 날과 크게 다름없는 대화였는데. 매끄럽게 출발한 슈퍼카가 동네를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지민은 너 좀 이상해 보인다, 하는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게 다 시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그렇다.



“…….”



 집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지민을 일깨운 건 한통의 전화였다. 이렇게 떠나자마자? 아니 뭐 일 끝나고 하라고 했는데. 하참, 누가, 이렇게 빨리. 어이가 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확 밝아진 지민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뭔데 전화를 이렇게 안 받아요!]

“아…정국이구나….”

[뭐예요. 지금 그 실망한 목소리는?]

“아니 내가 뭘…근데 왜 전화했어?”



 정국은 다짜고짜 긴 한숨을 흘렸다.



[목소리 이렇게 평온한 거 보면 아직 모르고 있나보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또 뭐가.”

[뉴스 안 봤어요?]

“뉴스? 헉, 설마 기사 떴어? 왔다 간지 10분도 안 됐는데…!”



 파파라치가 대체 어디있었지? 진짜 못 봤는데. 정국이 답답해하며 성질을 꾹 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뉴스 켜요. 지민은 차가 떠난 길을 한번 보고, 정국이 시킨 대로 뉴스를 검색했다. 하고 있죠? 보고 전화 끊지 마요. 지금 거기 어디에요? 정국이 계속 묻는다.



“뭔데 그래. 나 지금 집이야. 키고 있으니까 좀 기다려.”



 느리게 인터넷 창이 뜬다. 뉴스 포털사이트 맨 앞 크게 뜬 헤드라인이 눈을 사로잡았다. 지민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한낱 스캔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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