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이른 새벽 여섯시 반. 재빠르게 출근준비를 마친 지민은 폰을 확인했다. 레이첼에게 온 연락은 없다. 바로 넣는 대신 잠깐 메시지 창을 잡고 고민했다. 잘 잤어요? 잘 주무셨어요?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오늘 아침 날씨가 좋죠? 조금 있다 만나요?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결국 마음을 접었다. 에이, 뭘 해. 어차피 한 시간만 지나면 얼굴 보는데. 스스로 주책이다 싶어진 지민은 민망한 기분으로 폰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한번쯤은 막연히 누군가와의 연애를 상상해본 적이 있다. 벌어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연애야, 하는 쪽으로 매번 결론을 맺긴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는 영상을 통해 로망을 가져보긴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연락하기, 로맨틱한 데이트 후 집에 데려다주기, 여행가서 서로 사진 찍어주기. 뭐 어떤 일을 해도 둘만 있으면 다 좋긴 하겠지. 건전하고 바른 연애초보 박지민의 사고회로는 단정하기 짝이 없어서 그런 예상을 했고, 언젠가 애인이 생기면 자신도 비슷해지지 않을까 추측도 해봤다. 민윤기랑 이렇게 되는 게, 이게 맞는 건가.
학창시절은 모두 겉도는 생활의 반복이라 이렇다 할 경험담을 들어보지 못했고, 정국도 연애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다. 정국의 연애론은 지민보다 더했다. 형 내가 한국에서 고등학교 때 많이 해봤는데 다 쓸모없어요. 그 시간에 대회에 프로그램 코딩이나 한 줄 더 하고 상금 타는 게 이득이에요. 그나마 가장 가깝게 지켜본 표본이라고는 민윤기인데. 애인이라는 타이틀보다는 파트너라는 쪽이 더 어울리는 그도 썩 좋은 표본은 되지 못했다.
어떤 예시도 없지만 마냥 평범하지 않은 시작이라는 건 알겠다. 서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연발하면서 입술부터 맞부딪혔으니. 아니지. 어제 상황을 추가하면 키스는 기본이고 서로를 향해 더 뭘 어떻게 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 지민은 흘러가는 상황에 편승하기로 했다. 비록 어젯밤 끝에 가서 윤기가 스케줄 따위는 그냥 취소해버리란 소리에 같이 어울릴 만큼 이성을 잃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민윤기와 같이 있는 시간이 꽤 좋았으니까.
가판대에 도착한 지민이 줄을 섰다. 회사까지는 35분. 여유있게 도착하겠는데. 시계를 보느라 고개가 숙여진다. 덕분에 지민은 신문을 사고 나온 사람의 의아한 시선이 잠시 자신에게 닿았다 사라지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차례가 된 지민은 줄줄 사야할 일간지를 주문하며 버릇처럼 가십지 일면을 확인했다.
“월스트리트저널 하나랑요, 또….”
순간 지민은 그 시끄러운 맨해튼 거리의 소음이 삭제되는 기현상을 체험했다. 꽥 울리는 클락션이 한 귀로 들어와 다른 한 귀로 흘러나갔다. 하키채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듯 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가십지를 들었다. 이게 뭐지. 진짜인가. 여러 차례 눈을 깜빡거려도 망막에 맺힌 형태는 같았다. 기사 한 가운데 박힌 사진 속 주인공은 자신과 민윤기였다.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데이트를 망친 날. 데이트 아닌 데이트로 같이 장을 보며 카트를 끌던 날. 라스베가스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이후 윤기와 가진 만남이 모두 사진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드려요?”
가판대 주인이 여상하다는 듯 말했다. 매일아침 같은 시각 가판대에 들리는 밝은 청년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매일 또랑또랑하게 주문을 말하더니 오늘은 어쩐지 넋이 좀 빠져있었다. 뭔 일이람. 그러고보니, 가판대 주인이 허리를 숙여 오늘 제일 많이 팔린 가십지의 일면과 지민을 비교하며 들여다보았을 때.
“마, 많이 파세요!”
지민은 냉큼 돈을 내밀고 가십지를 낚아채 도망쳤다. 미친 듯이 한 블록을 질주하고서야 헉헉거리며 무릎을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언제 찍힌 거지? 파파라치가 사라진 게 아니었나? 갑자기 왜 나온 거지? 첫 번째로 엉성하게 찍힌 사진을 봤을 땐 이런 충격이 없었는데. 떨리는 손으로 가십지를 다시 펼쳤다.
[어거스트 회장과 비서의 은밀한 외출!]
쿵쿵 저지른 나쁜 일이라도 들킨 것처럼 정신없이 심장이 뛴다. 지민은 정신없이 기사를 훑어 내렸다. 당사자들이 설명해놓은 이야기처럼 아주 상세하다.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곧 지민은 길거리 한 복판 주저앉은 사람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의식하고 다시 일어났다. 뇌는 자연스럽게 살기 위해 최면을 걸었다. 아냐, 세상에 누가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겠어, 하하 마저 커피 사서 들어가는 거야. 커피만 사고 어거스트로 가면 돼.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면은 실패했다. 왜 자꾸 쳐다보지? 오늘 기사를 본 건가? 나를 알아본 건가? 지민은 그럴 리가 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혹 눈이 마주칠세라 걸음이 빨라졌다. 자꾸 일간지로 얼굴을 가리고 싶어진 손이 움찔거린다. 아냐, 그러면 앞을 못 보잖아. 눈을 가리고 걸어서 차에 박으면 보험처리도 안 된다고. 가자, 지민아. 가는 거야! 넌 할 수 있어!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어떤 사람이 한가하게 셀러브리티 연애소식이나 아침부터 들여다보고 있겠어! 괜찮을 거야!
볼을 찹찹 두들긴 지민은 그래도 마저 주어진 임무는 완수하겠다는 마음으로 한 달음에 스타벅스까지 뛰어갔다.
“여기 라떼 하나 주시는데, 어, 샷 한 번, 아니 두, 두 번 넣어주세요. 그리고 아, 그냥 그렇게 주세요.”
눈을 감고도 술술 외는 주문조차 꼬여버렸다. 안면을 튼 직원이 식은땀이 흐르는 거 같다며 괜찮냐는 물음을 던졌다. 아하하 안 괜찮을 리가요. 오늘 날씨 정말 좋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방긋 웃은 지민은 멀쩡하고 바쁜 현대인을 연기하며 구석에 가 커피를 기다렸다. 저도 모르게 딱딱거리며 커피가 올라올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오늘따라 커피가 느리게 나온다고 느껴졌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앗!”
불행히도 커피를 받아들던 지민과 내밀던 직원의 손이 엇갈리고 말았다. 커피는 그래도 왈칵 쏟아져 테이블을 타고 흘러 지민의 수트로 떨어졌다. 괜찮으세요? 세상에, 어떻게 해! 작은 소란에 매장 안의 모든 시선이 사고가 난 쪽으로 쏠렸다. 직원이 수건을 내밀며 허둥지둥거렸다.
“죄송해요, 커피 많이 뜨거울 텐데, 여기 일단 수건 받으세요.”
“아, 아뇨. 괜찮아요. 떨어진 컵 여기 있어요.”
대충 묻은 커피를 털어낸 지민은 한사코 괜찮다며 커피부터 다시 부탁했다. 박히는 시선들이 그 어느 때보다 부담스러웠다. 왜, 왜 계속 쳐다보지? 식은땀이 흐른다. 제발 빨리 주시면 안 될까요, 못 참고 카운터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스스로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한 그 순간.
“어, 저 사람, 어거스트….”
쾅, 심장이 발 아래로 추락했다. 그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한 마디에 지민은 동상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빠른 속도로 탈색된다. 본인조차도 소화하지 못한 스캔들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들린다는 건 상당한 공포로 지민을 덮쳐왔다. 패닉에 빠진 지민이 어쩔 줄 모르고 사람들의 시선만 감당했다. 간신히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상황은 더 안 좋아질 뿐이라는 판단이 선 그때였다. 지민은 머리 위로 씌워지는 가벼운 무게감을 느꼈다. 모자를 씌운 누군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커피 주문하려고 하는데요.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우유랑, 음 허니라떼 하나 주세요.”
뷔? 뷔 아냐? 순식간에 가게 안이 소란이 인다. 뷔가 팬서비스를 하듯 손을 살짝 흔들었다.
“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죠, 여러분.”
아 그런데 줄은 뒤로 서야 되는 거지. 까먹을 뻔 했네. 카페 안은 갑자기 등장한 헐리우드 스타 덕분에 조금 전 일어난 작은 소란은 완전히 잊혀져버렸다. 야 찍어, 찍어. 찰칵거리는 카메라 셔터음이 난무했다. 뷔는 멍청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민의 등을 툭툭 쳤다. 가까운 거리의 지민 정도나 들을 수 있는 목소리 크기였다.
“왜 모자도 안 쓰고 나온 거야?”
“뷔, 뷔가 왜 여기 있어요?”
“왜긴. 커피사러 왔지. 너 지금 왜, 아 아니다. 앞에 차 있는데, 내 매니저한테 집 주소 말하면 데려다 줄 거야.”
“네? 그럼 뷔는요?”
“난 어거스트 가려고.”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한 건지 뷔가 처음 만난 사이처럼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겉보기에 스타와 처음 만난 팬, 그 정도로 여겨질 그림이었다.
“…고마워요.”
지민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검은 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차문을 열어준다. 뷔랑 이야기한 분이죠? 타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지민은 온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듯 탑승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흡수하기도 벅찼다. 매니저는 뒷좌석과 운전석을 분리하는 창을 열고 주소를 요구했다. 그, 아, 일단 퀸스로 부탁드릴게요.
지민은 손에 꽉 쥐고 있어 구겨진 가십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커피를 흘리면서 묻은 건지 사진 부분이 조금 젖어있었다.
“…….”
지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커피가 묻은 가십지 속 자신과 윤기의 얼굴을 문질렀다. 손톱으로 긁으면 다른 얼굴이 그려진다던지, 해리포터 속 그림처럼 진짜 신문이 등장한다던지. 당연하게도 얼룩만 더 번졌다. 안 돼…진짜잖아…. 어흑흑, 속으로 울은 지민은 창문 밖으로 스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
현재 뉴욕에서 가장 추운 곳은 어거스트다. 새벽부터 뛰어나와 사태를 알아보던 진과 레이첼은 윤기가 들어온 순간 사무실이 북극으로 바뀌는 기현상을 체험했다. 주주총회를 마친 뒤 성질을 못 이기고 엘리베이터 문을 뻥 차며 들어온 그는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시퍼런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을 주주총회는 유달리 최악으로 치닫고 끝을 맺었다. 스캔들로 심기 언짢아하는 의원들과 윤기의 뜨끈한 기싸움으로 회사가 녹아내릴 뻔했다. 윤기 앞에서 공손하게 손을 모은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과연 오늘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설명해.”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데도 당장 명패를 집어던지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레이첼은 드물게 윤기 앞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 설명하고 싶어도 이건 설명할 말이 없었다. 본 그대로였다. 파파라치가 찍었고, 언론사는 어거스트를 개무시하고 기사를 냈으며, 지민의 얼굴이 온 뉴욕에 뿌려졌다. 뿐이랴. 인터넷이라는 연결망은 국경선이 없어 전세계에 박지민이 어거스트 회장의 새로운 게이애인이라는 도장을 찍어버렸다. 그녀가 오늘 유일하게 잘할 수 있던 일은 윤기가 오자마자 시킨, 지민에게 오늘은 출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둘 중 조금 더 용기를 낸 사람은 진이었다. 진은 짧은 헛기침을 시작으로 현상황을 보고했다. 윤기의 화를 돋우지 않는 문장을 최대한 골라가며.
“…최대한 기사를 내리는 방향으로 컨택하고 있긴 합니다. 언론사와 접촉하고 있는 곳만 손쓰면 빠르게 처리가능할 거라 봅니다.”
“어디야.”
“스마트픽처스입니다.”
진이 배후 회사가 정리되어있는 서류를 내밀었다. 윤기는 리셉션에서부터 따라다니며 사사건건 간섭하던 꼬장꼬장한 노인을 기억해냈다. 열을 내느라 색색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당장이라도 그 새끼를 묻을 관을 사오라는 말을 남길 것만 같이 윤기의 미간은 찌푸려진 상태였다.
무슨 말을 하려나. 살인청부? 아니면 주가조작으로 파산? 비인간적인 명령을 예상하는 비서들의 추측과 달리, 윤기는 도무지 어떻게 이 상황을 대처해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화가 나 이성의 불이 깜빡거리는 건 또 처음이었다. 윤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하얀 손에 핏줄이 툭 불거져 올라온다.
“기사 퍼다 나른 사람, 찍은 사람, 글 쓴 사람 상관없으니까 다 고소해. 그리고 여기, 그 노인네가 빚진 은행 관계자랑 약속 잡고, 스마트픽처스에서 개봉하는 이번 영화 프로모션 계약한 곳도 다 뒤져서 압박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서 처리해.”
네, 알겠습니다. 대답 후 레이첼과 진은 현명하게 빠른 속도로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윤기는 문이 닫히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없던 일로 돌아갈까. 자금줄을 틀어쥐고 회사앞길을 막아도 이미 인터넷에 퍼진 사진은 지울 수 없을 게 확실했다. 대기업 회장의 새로운 연인.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다. 그러나 같은 성별의, 그것도 비서출신이라는 진실이 덧붙으면 대중들의 구미에 딱 맞는 스토리가 완성된다. 폭발적인 관심이 이 스캔들에 쏠릴 것이란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초상권은 포기한지 오래인 자신은 별 문제가 없다. 언론에서 젊은 경영가의 몰락이라 이름 붙이며 자신을 까내리든, 어거스트의 위기라며 회사를 까내리든 하등 상관하지 않았다. 하트만 가문을 먹어치우고 어거스트를 차지한 행운아, 바람 잘날 없이 스캔들을 터뜨리는 난봉꾼, 최연소 세계 재벌 순위 등극. 좋든 나쁘든 이미 많이 붙어있는 수식어에 다른 몇 가지 논란을 추가해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이미 넘친 쓰레기통에 쓰레기 몇 개를 더 얹어 티가 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효과다.
하지만 그 치가 떨리는 언론 집중의 대상이 박지민이라면? 이미 모든 정보가 까발려진 윤기의 정보보다는, 단연 사람들은 신데렐라 역할을 맡고 있는 쪽에 관한 정보를 원할 터였다. 윤기는 숱한 경험으로 쉽게 다음 상황을 그릴 수 있었다. 어디서든 시도 때도 없이 카메라를 들이미는 파파라치들은 개떼처럼 몰려들어 박지민을 물어뜯어댈 거다. 이름이 뭔지, 어디 사는지, 나이가 몇인지. 정보가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뻔했다. ‘아아 그 어거스트 회장 호모 애인?’ 하며 지민의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저속하게 굴려질 거란 생각에 도달한 순간, 윤기는 입안 살을 꽉 씹었다. 열이 받아 머리가 터질 거 같다.
“하….”
윤기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렇게 소중한 게 생길지 몰랐다. 괜찮을까? 지금쯤 박지민은 어떤 생각을 할까.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후회할지도 모른다. 왜 하필 박지민을 물고 늘어진 거지. 하트만이 떠넘긴 회사의 명예,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돈. 그딴 건 정말 수천 번을 뺏기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도 괜찮은데.
괜히 가슴이 갑갑해져와 한숨을 쉰 그때, 비서실에서부터 연락이 왔다. 미스터 윤, 뷔가 방문했는데요.
“…들어오라 해.”
어거스트 타워 최상층에서 내려다보는 뷰는 훌륭했다. 구름 높이만큼 쌓아올려진 빌딩숲, 허허롭게 흘러가는 허드슨 강. 문명과 자연의 조화가 한 프레임에 어우러진 광경은 언제 봐도 감동을 자아냈다. 펜트하우스로 옮기는 것도 괜찮겠는데. 아니야, 그래도 맨해튼은 너무 정신없어. 생각하며 카우치에 앉아 윤기의 집무실 유리벽을 쳐다본 뷔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는 윤기를 향해 대화를 마무리했다.
“감독이 고민하고 있긴 한데 뭐…엔딩은 네가 말했던 대로 무리 없이 바뀔 거야.”
“받은 개런티값은 하는군.”
“그럼 이제 개봉하고 일은 계획대로 진행하는 거야?”
“그래.”
등받이에 등을 기댄 윤기는 그 이후 별 다른 말을 꺼내놓지 않았다. 피곤하게 눈을 감는 게 어쩐지 무료하고 한 발작 떨어진 방관자 같은 태도였다. 뷔는 빨대를 질겅거리며 이제는 검은 색으로 바뀐 머리카락을 보고 잠시 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뷔는 윤기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지금 보다는 훨씬 어렸고, 물이 빠진 머리는 거의 백발이었고. 그날 민윤기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뭐 서로 모른 채 각자 알아서 살았겠지. 옥수수 농사를 짓는 자신과 그날의 앳된 윤기를 그려보다 뷔는 말을 정정했다. 음, 둘 다 살아있었을지 부터 생각해봐야겠구나.
쪼로록, 빨대로 우유를 다 마신 뷔가 컵을 내려놓았다.
“소감이 어때? 이제 곧 끝나잖아.”
“딱히.”
“나도 이상한데 넌 왜 괜찮아?”
“네가 이상한 거야.”
“왜? 벌써 몇 년이나 된 걸 끝내는 건데. 그때 장례식부터라고 치면….”
아 이거 민감한 말인가. 뒷말을 삼킨 뷔가 흘긋 윤기를 봤으나 윤기는 상관 않는 듯 넘기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제 네가 불쑥불쑥 처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아주 마음에 드는군.”
“엥? 나 앞으로도 찾아올 건데?”
“1층에서 경호원한테 질질 끌려 나가는 창피당하고 싶으면 오던가.”
“그럼 2층 창문으로 뛰어넘어서 와야지.”
윤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비서실을 호출하는 버튼을 눌렀다. 와아, 무시하는 거 봐. 볼일 끝났다 이거지? 뒷목이 당긴다며 눈을 감고 고개를 지그시 꺾던 뷔가 돌연 아, 하고 반짝 말했다.
“아침에 지민 만났어.”
“뭐?”
윤기가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몇 년을 끌어오던 일과 관련한 이야기에도 다소 성의 없는 태도를 내보이더니. 미간을 모으고 어서 더 이야기해보라는 듯 빤히 본다.
“카페에 우유 사려고 들어갔는데 있더라고. 나는 그래도 지민이 모자는 쓰고 나왔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쳐다보길래 당황하는 거 같아서 구해줬지.”
“…….”
“뭐 그래도 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던데.”
창백하게 질리긴 했지만. 그래도 멀쩡히 걷긴 했지. 그 정도 반응이면 괜찮은 편이었다. 뷔는 시상식 뒤풀이자리에서 마스카라가 떡이 질 때까지 울던 배우를 기억했다. 약 시상식 한 달 전 즈음 파파라치들이 거하게 터뜨린 스캔들의 당사자였다. 그녀의 일반인 애인은 스캔들이 터진 순간부터 신경안정제를 꾸준히 복용하다가, 결국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있는 세상은 감당할 수 없다며 이별을 고했다고 했다.
뷔는 걱정이 없었다. 그가 겪어본 지민은 아주 단단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숨는다거나 쫄아서 포기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다. 지금이야 처음 겪는 일이니 머릿속이 난장판이겠지만. 그런데 뭐가 문제라고 저렇게 심각한 얼굴이람. 이해할 수 없는 뷔는 윤기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혹시 의외로 겁이 많은 성격?”
“나가.”
뷔는 군말 없이 윤기의 몫으로 사온 허니라떼를 집어 들었다.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컵의 무게는 처음 사왔을 때와 똑같았다.
“이거 계속 안 마실 거지? 내가 마신다.”
뷔는 타워 밖으로 나가기 전 마스크를 썼다. 영화가 개봉하면 한 바탕 세상은 시끄러워질 거다. 잠시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파리의 에펠탑, 세느 강을 떠올리며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 방금 어거스트 나왔어. 언제 도착해? 아 근데 형 나 혼자 여행 갈래. 전화 건너편에선 식겁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미쳤어? 또 미아 되기로 작정한 거냐. 매니저는 혼자는 절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나 몰래 갈 거야.”
[지난번처럼 길 잃었다고 전화해도 안 갈 거다.]
“맞다, 근데 형 내 모자는?”
[무슨 모자?]
“음…아냐 그냥 선물로 줘야겠다.”
내 소중한 친구니까. 아! 지민이랑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해볼까. 그것도 꽤 괜찮다 생각하며 뷔는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촬영일을 셌다.
***
매니저는 별 다른 말없이 지민을 집 앞에 내려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생명을 구해주셨어요. 동화 속 용사에게 할 법한 인사를 받은 그는 멋쩍어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연예인과 가까운 직업을 가진 사람이니 이런 기사는 익숙한 모양이었다. 저야 뭐 운전밖에 한 게 더 있나요. 아무튼 힘내세요. 지금은 많이 괴롭겠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예요. 어떻게 하고 싶어도 소문엔 딱히 약이 없어서…. 가십지를 눈짓한 매니저는 딱히 소용없는 위로 몇 마디를 덧붙이고 차를 몰고 떠났다.
지민은 집으로 돌아와 익숙한 공기를 맡자마자 풀리려는 다리를 질질 끌었다. 침대에 도착해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았는데 새벽 다섯 시까지 막노동이라도 한 것처럼 온 몸이 쑤셨다. 베개에 얼굴을 푹 묻고 생각했다. 방금 내가 겪은 게 진짜일까. 꿈이 아니라? 그래…살다보면 다 그런 거지 뭐…교육부 장관한테 편지도 써보고 좋아하는 배우랑 모노폴리도 하고 신문 일면을 상사랑 스캔들로 장식도 하고….
집에 혼자 남겨져있으니 방금 전 일이 꿈같이 느껴진다. 지민은 기운 없는 손으로 바스락거리며 일간지를 다시 폈다. 이불속에 파묻혀 눈만 빠끔 빼 기사를 쳐다보았다. 둘 다 잘 나오긴 했네, 허없는 생각을 하며 길에서는 타이틀 밖에 보지 못한 기사를 차근차근 읽었다.
[은밀한 데이트를 가진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을 포착했다.]
“연인….”
좋아한다고 아직 말 한 마디 못 붙여봤는데 다른 사람들이 난리였다. 민윤기는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기자들이 유난이라고? 아니면 저번처럼 글을 못 쓴다고 비아냥거릴까. 어쩌면 귀찮은 일이 생겼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이런 스캔들쯤이야 열 번도 넘게 겪어본 윤기의 입장을 고려하면 무리도 아니다. 다른 때처럼 아무 일 아니란 듯 무시할까. 조금 그 하얗고 마른 얼굴이 그립다고 생각한 순간, 벼락처럼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 내가 회사에…말을 하고 집에 왔던가?
맙소사, 무단결그은! 기겁하며 벌떡 일어난 지민은 폰을 켰다. 바로 레이첼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의 사정을 얘기하려는 순간, 발견한 메시지 하나. 오늘은 출근하지 마요. 딱 일간지를 사서 기사를 확인한 시점이다. 지민은 쏟아지는 전화로 죽어갈 진과 레이첼을 떠올렸다.
“미안해요….”
지민은 죄책감 반, 안도하는 마음 반으로 한숨을 크게 터뜨리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크게 당한 일이 없으니 웃긴 생각도 들었다. 이거 월차로 들어가나? 반차면 좋겠다. 지민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박지민 정신 안 차렸구나…이런 생각까지 하고…아 아닌가. 더 똑바로 차린 건가? 월차가 중요하긴 하지.
하하 뭐 어때. 현실은 똑같은 걸. 내일은 마스크랑 모자 쓰고 출근해야겠다. 아스라이 생각하며 옷장을 뒤져보려던 지민은 손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꼈다. 이 폰으로 걸려올 전화는 한정되어 있었다. 회사, 전정국, 아니면 한국에 있는 가족. 세 가지 선택지 중 한국까지는 아직 소식이 닿지 않았을 테니 남은 건 정국뿐이다. 뭐라고 말하지. 고민하며 연락처를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잤어? 자다 깬 목소리인데.]
“…미스터 윤!?”
지민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깨운 모양이네. 느리고 나른한 윤기의 목소리는 평범한 범주에 속해있었다.
[깼으면 다시 자. 기왕이면 신문이랑 티비는 다 끊고.]
지민은 금방 윤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봤냐는 거겠지. 조금은 머뭇거리다 가벼운 척 말했다.
“이미 봤는데 죄 없는 신문이랑 티비는 왜 끊어요. 괜찮아요!”
[…그럼 그 기자를 더 죽여버려야겠군.]
“그건 너무한 거 같은데요!? 사진 좀 찍….”
사진 좀 찍었다고 죽이는 건 너무 하잖아요, 하고 말하려던 지민은 침묵했다. 풍경사진이나 찍었으면 몰라. 그럼 죽이는 건 말고 감옥 정도만…아니, 벌금? 결국 정도를 따지다 포기했다. 어차피 제 손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니 윤기에게 맡기는 셈이 된다. 그런 부담은 얹고 싶지 않은 지민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같이 침묵하던 윤기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괜찮아?]
“네? 그럼요! 고작 기사 하나인 걸요.”
뷔가 아니었다면 커피매장에서 그대로 쓰러져 앰뷸런스에 올라탔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침대 위에 누워있지 않은가. 지민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과장되게 밝은 척을 했다.
“그런 기사 하나 난다고 인생이 크게 바뀌겠어요? 제가 무슨 연극에 나오는 배우도 아니고. 이미지관리 그런 거두 안 하는데 당연히 괜찮죠! 얼굴 한 컷 찍혔다고 뭐.”
[…….]
“진짜 하하…괜찮은데…!”
오늘 놀란 심장소리가 어거스트 타워까지 들렸나.
“근데 미스터 윤은 괜찮아요?”
[…어.]
“그럼 됐죠.”
정작 제일 큰 문제에 직면한 당사자가 긍정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다 잘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요! 그 밝은 목소리에 마음을 놓은 건지 쌓이는 불안을 꿀꺽 부러 같이 삼킨 건지 윤기는 수긍해왔다. 그래 네가 괜찮으면 됐지.
[그래도 당분간 출근은 하지마.]
“그렇게까지나 해요?”
[그렇게까지나 해. 이건 네가 아무리 말해도 안 넘어가.]
윤기는 단호했다. 출근길에 호시탐탐 카메라를 들고 쫓아다니는 사람까지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눈동자를 또르륵 굴린 지민이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았다.
“그러면…커피는 어떡하고요?”
이 심각한 사태에서 커피 걱정이나 하고 있다. 윤기가 하,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흘렸다. 걱정이 살짝 가신 건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다.
[커피 하나 못 마신다고 죽진 않아.]
“그럼 얼마나 쉬어야 돼요?”
[잠잠해질 때까지.]
기약이 없다는 말이다. 지민은 쉽게 납득했다. 이번은 공짜휴가, 공짜월급 그런 게 부담스럽다며 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회사에서도 달갑지 않은 입장을 보일 텐데. 그로 인해 가장 먼저 난감해지는 건 윤기일 터였다. 출근도 앞으로는 평범한 직장인의 출근, 그런 시선으로 보여지지 않을 테고. 알았어요. 답은 했으나 시무룩해진 목소리까지는 노련하게 숨기지 못했다.
“그럼 조금만 참아야겠네요.”
지민은 괜히 이불 위를 손으로 빙빙 그렸다. 일 잘하시구요. 무리하지 마요. 화도 많이 내지말구요. 다음에 또 전화해요. 특별하지 않은 인사를 늘어놓으며 묘하게 끊기 싫은 전화를 붙잡은 그 시점, 숨소리만 내쉬던 윤기가 말을 꺼내왔다. 전파상으로 낮게 들리는 목소리는 퍽 애틋했다.
[보고 싶어.]
“…….”
[정말로.]
아 어쩜 좋지. 방금 전까지는 이게 진짜일리 없다며 이불 속에 머리를 박고 있었는데. 금새 빠듯하게 가슴이 뛰었다. 솔직하게 치고 들어온 인사에 맞먹는 대답은 역시 솔직함뿐이다.
“…나도요.”
역시 그딴 종이가 뭐라 쓰든. 삼류 게이포르노로 취급받든.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알아보고 수군거리든.
[끝나고 다시 걸게.]
마지막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침대에서 훌훌 털고 일어난 지민은 가십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골인시켰다. 커피가 묻은 수트를 허물 벗듯 벗어던지며 생각했다. 스캔들이 터지면 보통 며칠이나 갔더라. 중간에 또 만나면 사진이 찍히겠지. 지민은 부디 그 기간이 짧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