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무대는 제한이 없다. 바꿔 말하면 배우만 있다면 그곳이 무대다. 일상에서도 연기를 하면 기분이 묘하다. 뷔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내가 사기에 꿈이 없어서 다행이야. 워낙 탁월한 실력으로 모두를 속여먹는 건 일도 아니니 꿈을 배우로 둔 건 세상 모두가 감사해야 할 일이다. 망한 회사의 주식을 우량주로 다 팔아먹었을 수도 있을 테고, 말 몇 마디로 거렁뱅이의 호주머니까지 탈탈 털어먹었을 거다.
원래부터 자신감이 높았던 건 아니다. 뷔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연기연습을 한답시고 켈링턴 아트스쿨 담벼락을 도둑고양이처럼 넘나다니면서 빗자루로 엉덩이를 종종 두들겨 맞긴 했지만. 매일 밤 구식 카메라 앞에서 버벅거리며 대사를 외우던 소년이 예측할 수 있는 인생은 그 정도였다. 이렇게 연습 몇 번 하다가 핫도그 배달 아르바이트나 하겠지. 아니면 태국 요리전문 레스토랑에서 탓파이 서빙이나 하던가.
뷔는 맹세코 추호도 몰랐다. 먼날 자신이 헐리우드의 스타가 되어 누군가의 장기판에서 말로 굴려지고 있을 줄은. 특히나 그 누군가가 뉴욕에서 소문난 싸이코라 불리는 대기업의 회장이라고는.
감독과의 대화는 순탄했다. 감독님 마지막에 댄이 나오는 장면 하나를 바꾸는 건 어떨까요? 모든 말이든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며 예스를 외치는 감독은 희대의 예스맨이었다. 내가 뭘 말하는지 듣기는 했나. 감독의 이해도를 의심하던 뷔는 포기했다. 하긴. 감독도 민윤기가 골랐다. 일부러 이런 감독을 골랐을 테지. 미리 짜놓은 계획을 실행하려면 남의 의견에 자주 흔들리고 눈치를 잘 보는 감독은 더없이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뷔는 흥얼거리며 트레일러로 향했다. 지민을 만나는 순간이 좋았다. 그 앞에서만 촬영현장에서 유일하게 연기를 풀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색하게 스태프 사이에 끼어있는 지민은 윤기가 띄워 보낸 선물이었다. 처방전, 구호식품. 또는 다른 메시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허튼 짓 하지 말고 똑바로 해.
“나 왔어! 많이 기다렸어?”
지미인, 어디 있어? 우리 카드놀이부터 할까? 아니면 블록쌓기? 요란하게 입장한 뷔는 트레일러의 제일 안쪽까지 살피고 시무룩하게 눈썹을 떨어뜨렸다. 왜 없지. 어깨를 으쓱했다. 찾으러 가지 뭐. 트레일러 문손잡이를 돌린 순간, 반대로 덜컥 문이 열렸다. 지민이었다. 뷔가 환하게 웃었다.
“왜 안 보였어. 찾았는데! 어디 있었, 억!”
지민이 덮치듯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얼결에 지민을 감싸안고 뒤로 넘어간 뷔는 지민과 한 몸이 되어 데굴데굴 굴렀다. 카페트 한 가운데에 도착해 뷔가 허리를 부여잡으며 끙끙거렸다.
“갑자기 왜 그래, 아 아파.”
“뷔예요?”
“그럼 내 트레일러에 누가 들어와, 나 말고. 다른 사람 들어오면 무단침입이야.”
방금 무단침입을 하고 온 지민은 입을 합 다물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아직 정리가 안 됐다. 미안해요. 올라타 있던 지민이 어딘가 넋이 빠져 꾸물꾸물 비켜났다. 뷔가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뒤로 빼 카페트를 짚었다. 아무리봐도 상태가 수상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일도….”
“심장이 뽑힐 거 같은데, 너?”
뷔가 지민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이거 봐. 지민은 통 정신을 못 차렸다.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뷔, 미안해요, 그런데 이럴 때가 아니라. 아 미안해요. 이리저리 방황하다 지민이 떨며 말했다.
“밖에 누구 안 와요?”
“밖에?”
뷔는 고개를 갸웃했다. 트레일러 주변은 촬영 관련 스태프가 아니면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되고 있었다. 어쩐지 공포에 조금 떠는 거 같다. 말 한 마디로 그칠 수 있지만 뷔는 친히 뒷머리를 털며 일어났다. 보고 올게. 기다려 봐. 문을 열고 고개만 쏙 빼 살핀 뒤 다시 돌아왔다. 지민은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아무도 없어.”
“…….”
“물 한잔 줄까?”
넥타이를 헐렁하게 끄르며 지민이 고개만 끄덕거린다. 쭉 마셔, 쭉. 옳지 잘하네. 뷔는 길거리 고양이 다루듯 지민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제 괜찮지. 괜찮으니까 말해봐.
“무슨 일이야.”
“뷔 트레일러로 오려고 했는데요, 근데 실수로 제가 아까…아.”
지민이 고개를 팍 처들었다.
“전화.”
“어?”
“전화해야 돼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문 지민이 버벅거리는 손으로 폰을 귀에 가져갔다. 몇 번이나 미끄러지며 바라보는 뷔조차 불안한 손놀림이었다. 레이첼?
“레이첼 할 이야기가 있어요. 급해요. 전화는 안 돼요. 정말, 정말 급한 이야기예요. 어떻게든 잠시 나와주시면 안 될까요? 사무실이요? 사무실은 좀, 그게 할 이야기가…현장보고 관련된 거예요. 네. 그럼 지금 출발할게요.”
지민이 전화를 끊고 일어났다. 뷔는 지민의 뒤를 종종 쫓았다. 뭘까? 연기를 하다보면 상대의 감정에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왜 겁에 질렸을까? 촬영현장에서 무슨 일이 후원자 비서를 떨게 만들 수 있을까? 문을 연 상태에서 지민이 말했다.
“고마워요, 뷔.”
“다음에 또 와.”
잘 가. 뷔가 손을 흔들었다. 지민이 뛰쳐나갔다. 달려가다 시선이 잠시 케일론의 트레일러에 머물렀다. 뷔의 시선도 따라간다.
“…음.”
뷔는 입맛을 쩝 다셨다. 아 망했다. 악랄한 게 멍청하기까지 해서 무언가를 흘린 모양이다. 천사는 무슨, 멍청이지 멍청이. 짜증이 나 반대쪽 트레일러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그리고는 마지막까지 멀어지는 지민을 지켜보았다. 영영 카드놀이는 못하겠지 싶다.
맨해튼 브로드웨이 8번가 맥도날드. 유리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한 번씩 흠칫 몸을 떨었다. 얼굴을 지지는 뜨거운 시선 탓이었다. 웬 남성이 수트 차림에 콜라 빨대를 질겅거리고 있었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소름 돋는 팔을 문지르며 사람들은 부랴부랴 카운터로 갔다. 지민은 들어오는 사람마다 눈도장을 찍었다. 아니고, 또 아니고. 마침내 유리문을 통과한 금발의 미녀를 보고 지민이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났다.
“레이첼, 여기!”
“나 진짜 바쁜데 나왔거든요. 중요한 이야기 아니면 오늘 같이 야근할 준비해요.”
레이첼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앉았다. 나온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연락으로 폰이 마비될 기세였다. 진의 연락과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의 연락이었다. 레이첼, 큰일이에요. 눈이 고장 난 거 같아요. 서류 탑이 안 줄어들어요. 아직 지민 못 만났어요? 레이첼이 거칠게 전원 버튼을 아예 꺼버리고서야 불이 난 폰이 잠잠해졌다.
“하, 봤죠? 대체 무슨 일인데요?”
“좀 믿기 힘들 수 있는데요.”
지민은 상황을 더듬었다.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이성의 판단이 지민을 지배했다. 다시금 호흡이 가빠져왔다. 지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케일론이었어요. 다른 영화사랑 촬영을 들어간다고 했고, 감독한테, 그러니까 마약 스캔들이라는 말도 했어요. 또, 또 아스팔트 정글을 해치겠다는 말도, 그리고….”
“지민, 지민.”
“…네?”
“일단 진정하는 게 좋겠어요.”
레이첼이 딱딱 손가락끼리 부딪혀 주의를 환기했다.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심상치 않다 생각하긴 했지만 상태가 이 지경일 거라곤 몰랐다. 넋이 완전히 빠져있었다. 죄송해요, 레이첼. 다시 말할게요. 뭘 들었냐면요. 간신히 말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가상했으나 정작 듣는 레이첼의 입장에선 고문장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굳이 지금 다 말하려고 하지 마요.”
마셔요, 일단. 레이첼이 쪽쪽이 물리듯 지민의 입에 빨대를 물렸다.
“이야기하려 하지 말고 내가 묻는 질문에만 대답해요. 알았죠? 알았으면 끄덕거려요.”
지민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적인 푸른 눈은 지민을 진정시켰다.
“자, 차근차근 말해 봐요. 이야기 주인공이 누구예요?”
“…케일론 베닌.”
“좋아요. 어디서 들었어요?”
“트레일러요.”
“거기는 왜 갔는데요?”
“뷔가 초대했는데 잘못 들어갔어요. 그게 케일론일 줄은 몰랐어요.”
레이첼은 쉽게 상황을 그렸다. 뷔나 민윤기가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니니 대충 모양만 알려줬을 거고, 헐리우드 배우의 명품 트레일러를 처음 보는 소시민은 일단 아무 곳이나 들어갔을 터였다. 본격적인 이야기 시작도 전에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레이첼은 계속해서 친절히 물었다.
“트레일러 안에 케일론이 있었던 거예요?”
“네, 누구랑 전화를 하고 있었어요. 다른 영화사였던 거 같아요. 캐스팅 관련 이야기도 했고 아스팔트 정글이 엎어진다는 이야기도 나왔어요.”
“그렇군요.”
예상외로 레이첼은 놀라지 않았다. 차분한 어조는 신뢰감을 쌓는 효과가 있었다. 어느덧 잘게 떨리는 지민의 손은 멈춰있었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 레이첼이 다시 말했다.
“증거 있어요? 녹음이라든가. 지민의 말을 증명할만한 방법이요.”
“그건…없어요. 하지만 분명 똑똑히 들었어요. 제 말을 믿어주세요, 레이첼.”
“물론 난 지민을 믿어요. 내가 말하는 건 밖이에요. 사람들이 어느 쪽 말을 믿을 진 뻔하지 않아요? 헐리우드 천사와 아직 근무경력이 1년도 안 된 비서. 그리고 몰래 들은 거라면 더욱 힘들지 않겠어요?”
지민은 쉽게 공감했다. 레이첼 말이 맞아요…. 이미 한 번 휘황찬란한 리셉션에서 먹잇감으로 내몰려 물어뜯길 뻔했다. 지민은 문득 재킷 주머니 속에 넣어놓은 구겨진 사진을 떠올렸다. 다시 꺼낼 엄두는 안 나지만 유일하게 증거라 취급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채 지민이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 레이첼이 말을 꺼냈다.
“설사 증거가 있다 치더라도 말한 그 순간 지민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인터뷰 정도라면….”
“과연 인터뷰 하나로 끝일까요? 경찰에 증언 몇 번 하면? 무사히 빠져나온 걸 보면 다행히 잘 넘어간 거 같긴 하지만 그 악랄한 사람들이 과연 얌전히 포기할까요? 지민은 누가 보호하는데요? 이미 신고자 살해당하고 30분 뒤에 오는 경찰들? 일을 망친 지민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무조건 찾아서 찢어죽이든 소리 소문 없이 없애든. 알다시피 사방이 적이잖아요, 여긴.”
“…….”
“정의감에 나서는 건 좋지만 다시 생각해 봐요. 만족감에 도취되는 건 잠깐뿐이죠. 언젠가는 지금 가진 평범함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거예요.”
물론 힘 있는 사람 한 명이 뒤에 버티고는 있지만. 레이첼은 부러 뒷말을 잘랐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샐까 애지중지 지민을 감싸는 어떤 한 사람을 생각하면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은 늘 우발적으로 터지기 마련이다. 전 하트만 회장 시절부터 오랜 경험을 쌓아온 그녀는 언론이 얼마나 집요하고 질기게 사람을 괴롭히는지, 그리고 군중의 악의적 관심에 몰린 사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알고 있었다.
“충고 고마워요, 레이첼.”
“오늘은 이만 퇴근해요. 이 상태로 더 이상 일은 무리잖아요. 퇴근 소식은 내가 대신 전할게요.”
“…그래도 될까요?”
누가 파릇파릇 빛나는 막내비서의 생기를 훔쳐갔나. 생기있던 두 뺨이 햇빛도 못 받고 시든 이파리 같다. 레이첼은 지민을 안쓰럽게 여겼다. 싸이코같은 상사가 무턱대고 연애하자 들이밀지를 않나, 일주일 출장을 전날에 끌려가지를 않나, 하물며 진짜 미친놈이 떠들은 협박까지 듣고 얼결에 온갖 부담을 떠안은 목격자가 됐다. 1년도 안 된 신입사원이 겪는 일들 치곤 과격하긴 했다. 흠. 레이첼이 잠시 고민하더니 메뉴판을 눈짓했다.
“햄버거 세트라도 하나 포장해줘요?”
“…레이첼 방금 저 좀 감동 받았어요.”
“그럼 세트 두 개 사줄게요.”
지민이 레이첼의 노력을 알고 배시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레이첼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넝마가 된 빨대가 꽂힌 빨대를 들고 일어났다.
“나갈까요?”
“사주겠다는 건 진심이니까 언제든 연락해요.”
말하며 레이첼이 꺼놨던 폰을 켰다. 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우수수 떨어지는 연락이 그녀를 재촉했다.
“진, 어떻게 됐어요? 지금 가요. 미안해요, 날아갈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줘요. 내일 봐요, 지민.”
아찔한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묘기를 보여주며 레이첼이 멀어져갔다. 지민은 생각했다. 어거스트에 취업해서 다행이다.
***
그날 입은 코트를 봉인했다. 지민은 드라이클리닝도 맡기지 않고 사진이 들어있는 그대로 옷장에 처박았다. 끔찍한 사진은 열어볼 엄두가 안 났다. 잔상이 치고 올라올 때마다 호흡이 가빠지고 손이 떨려왔다. 처음으로 민윤기 관련 생각을 이겨먹는 생각이 등장했다. 간밤 내내 끙끙거린 지민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간신히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 주장인가. 멀쩡한 헐리우드 배우를 손가락질하며 ‘저 사람이 이런 사진을 가지고 있어요! 미친 성벽을 가지고 사람을 찍어요!’ 외치면. 지민은 지나가는 길고양이도 믿지 않는다는 쪽에 내기를 걸 수도 있었다. 사진을 획득한 경로도 문제다. 제가 말이죠, 어쩌다 보니 트레일러에 무단침입을 했는데 이게 테이블 위에 어질러져있었어요. 못 믿으시겠지만 전부 사실이랍니다. 결론. 사람들이 믿을 확률. 제로. 차라리 슈가 스튜디오에서 새로 만든 영화 스토리라고 하면 좀 더 믿겠다.
지민은 노트북을 켰다. 아예 몰랐다면 모른다. 수상한 미친놈을 좀 알아놔야 피하든 맞붙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다. 뉴욕 데이트 레스토랑, 뉴욕 로맨틱 데이트 코스 추천. 일전 검색기록을 뒤로하고 새로운 단어를 적었다. 케일론 베닌.
화제의 아스팔트 정글, 케일론 베닌 주연.
케일론 베닌, 또 드러난 천사의 선행. 십만 달라 기부.
첨부된 사진 속 케일론이 자상하게 웃고 있었다. 으, 지민이 소름 돋은 팔을 문질렀다. 꿋꿋이 검색을 이어갔다. 이렇다할 소득은 없었다. 한참이나 의미 없는 케일론의 기부전적만 보고 나온 그때. 쭉쭉 내리던 프로필에 특이한 경력이 있었다. 켈링턴 아트스쿨 특별교사. 지민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모두 하나의 장소로 연결된다. 직접적으로는 뷔, 간접적으로는 윤기가 입양 간 집의 엘리 하트만. 급기야 케일론까지. 누가 봐도 수상쩍다. 지민은 곧장 자판을 두들겼다.
“켈링턴, 아트, 스쿨.”
명문학교라면 빠질 수 없는 가십거리들이 촤르르 화면을 점령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큰 화젯거리는 매해마다 아트스쿨이 대중에게 선보이는 연극이었다. 엔터테이먼트 관계자, 음반회사, 공연기획 관리자. 예술계의 큰손들이 모이는 공연은 스타로드의 발판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뷔도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극에서 로미오를 쫓는 하인 역할을 하다 데뷔작 스카이 가든 캐스팅 오디션을 제안 받았다는 경험은 유명했다.
지민은 마우스를 쭉쭉 내렸다. 올해의 작품, 햄릿. 커다란 포스터를 훑고 다음페이지로 넘겼다. 그리고 그때 눈에 밟히는 제목 하나.
「켈링턴 아트스쿨 자살사건」
블로그에 정리된 기사는 흔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배역을 놓쳐 비관한 학생의 안타까운 죽음. 아침 정원을 가꾸는 관리인이 나무에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는 시체를 발견했다 적혀있었다. 당시 공연은 취소되었고 현재 나무는 베어냈으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구조를 개선한다는 켈링턴 아트스쿨의 답변 또한 같이 첨부되어있었다. 지민은 꼼꼼히 사건의 날짜까지 확인했다.
“…거의 10년 전쯤인데….”
시몬과 만난 날, 진은 시몬이 이 사건과 어거스트가 관련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10년 전 사건이 어거스트가 대체 어떻게? 아니 시몬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케일론은 저때쯤 학교에서 초빙을 받았고…근데 자살이잖아? 아 모르겠다. 지민은 테이블에 이마를 꿍 박았다. CSI 과학수사대 같은 거 많이 볼걸. 괜히 감상문 복잡할까 피해서 봤는데 후회된다.
데이트는 무슨. 민윤기 어떡해. 정작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주제에 걱정은 무지하게 됐다. 캐스팅한 배우는 쓰레기고, 새로 확장한 사업은 여기저기서 공격받고. 심지어는 어거스트를 노리는 적이 하도 많아 누가 범인인지도 모른다. 지켜주고 싶어도 지켜줄 수가 없으니, 고작 할 수 있는 건 너 지금 위험하니 도망가야 한다는 비둘기 역할 뿐이었다.
지민은 어쩐지 윤기가 보고 싶다 생각했다. 뻔뻔하게 이런 맛없는 밥이 넘어 가냐는, 그렇게 싫어하던 빈정거림이라도 들으면 안심이 될 거 같단 이상한 충동마저 느껴졌다. 지민은 축 처진 어깨로 하얀 니트를 입고 슬리퍼에서 스니커즈로 갈아 신었다. 때마침 주머니에서 폰이 웅웅 진동했다. 아는 사람 몇 없는 어거스트 회장의 귀한 개인번호. 윤기였다.
“여보세요, 미스터 윤?”
[어디야.]
“지금 출발해요. 한 10분정도 일찍 도착할 거 같은데. 미스터 윤은 어디세요?”
[도착했는데.]
“네에!? 지금이요?”
예정된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앞서있었다. 이건 너무한데? 약속장소는 브루클린의 선상 레스토랑 앞이었다. 검색의 검색을 거듭해 브루클린 브릿지를 걷고 맨해튼의 야경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는 코스는 완벽했다. 남 기다리는 일은 질색하는 사람이 왜. 당황하며 지민이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면 어, 좀 차에 계시면. 윤기는 짜증을 낼 거란 지민의 예상과 달리 유순하게 되물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돼?]
지민은 신발끈을 묶는 손을 빨리했다. 마저 대답하며 문을 열었다.
“빨리 가면 그러면 한 40분정도 걸릴 거 같은….”
그리고 지민의 눈앞으로 펼쳐진 풍경은 소형주택과 동 떨어진 그림이었다. 벤츠 카브리올레 한 대와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 맙소사. 지민의 손에서 열쇠가 툭 떨어졌다. 문도 닫지 못했다. 지민의 뒤로 밝혀진 자동센서 불빛이 서서히 어두워진 저녁거리를 비집고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 위로 불빛이 떨어졌다.
“나왔어?”
작은 현관계단 밑에서 얌전히 지민을 기다린 윤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다. 지민이 기함하며 외쳤다.
“미스터 윤!?”
“만나기로 약속한 사이에 놀란 표정은 좀 넣지?”
“대체 왜 여기 계세요?”
“아까 전화로 말했잖아. 도착했다고.”
아니, 그 약속장소는 브루클린 브릿지 쪽인데요? 친절히 되짚어주려던 지민은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이 씨익 눈꼬리를 접어가며 매력적으로 웃은 탓이었다.
“좀 더 빨리 왔어.”
장소를 바꾼 이유는 당당하게 까발렸다.
“보고 싶어서.”
검은 머리로 바꾸니 차분해 보인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지민은 홀린 듯 멍청히 윤기를 바라보았다. 너무 예뻤다. 솔직하게 웃는 윤기를 볼 때마다 지민은 심장이 반씩 사라지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혼이 빠진 얼굴이 웃긴 건지, 기분이 좋은 건지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윤기가 말했다. 뭐해.
“여기서 밤샐 거야? 나라면 나쁘지 않지만.”
“…아뇨.”
“어서 가.”
뭐가 심각했더라. 하데스에게 반해 모든 걸 잊고 따라가는 페르세포네처럼 지민은 윤기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