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Club Des Belugas - Take Three>
천장까지 책이 가득 찬 서재, 윤기는 삐딱한 자세로 앉아 편지를 확인했다. 지민이 열심히 필체를 모방하여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이다. 미스터 윤, 유감스럽지만 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네. 결정이 되면 다시 연락을 주도록 하지. 멋들어진 필체로 쓰인 문구는 윤기가 추진하는 사업 확장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시간 같은 소리하네. 그전에 관에 묻히겠지. 그는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밥그릇을 뺏기기 싫다 울부짖는 편지들을 바닥에 휙휙 던졌다.
머리가 슬슬 아파온다. 달고 사는 두통이 또 올라오는 모양이다. 윤기는 미간을 구기고 침실로 자리를 바꿨다. 고용인들도 마저 없으니 적막하고 커다란 공간은 슬리퍼 끄는 소리조차 거슬리도록 컸다. 그는 이내 익숙하게 액자가 엎어져있는 협탁을 열어젖혔다. 어제 그의 비서가 제출한 현장 보고서였다. 한줄 읽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한결같다. 못쓴다.
아스팔트정글은 센트럴파크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문장으로 시작하여 훌륭한 영화가 탄생하리라 믿는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되어있다. 현장보고서보다는 센트럴파크 생태계 보고서가 더 어울렸다. 윤기는 그럼에도 구기는 일 없이 다 읽었다. 왜 내가 이딴 걸 읽고 있는가, 같은 질문은 안 한지 오래다. 사실상 도움 안 되는 보고서를 써오라 명령한 이유부터 글러먹었다. 어떻게든 열심히 써온 걸 보면 좀 귀엽기도 하고 웃기니까.
“…….”
적막은 익숙함을 수반하는 동시에 공허함을 선사한다. 윤기는 엉망으로 쓰인 보고서를 쥐고 고민했다. 차라도 몰고 그의 집으로 처들어가볼까. 따뜻하고 다정한 그의 비서는 황당하고 어이없어할 거다. 그러면서도 끝내 모질게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착하니까, 넌. 그 증거로 이미 막무가내로 끌어낸 만남에도 응해줬지 않은가. 그러나 윤기는 포기하고 누운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가 있지? 원하는 건 그딴 게 아니다.
욕심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없다. 때문에 계속 커진다. 몇 번 그와 웃고 떠들었다고 이 적막이 싫었다. 윤기는 사뭇 그 변화가 우스웠다. 한때는 죽지 못해 살아있었으면서, 이제는 희망으로 알록달록한 기대를 꿈꾼다. 그는 세상에서 자신이 아는 모든 하트만이 사라졌을 때 자신의 인생까지도 같이 사라졌다 믿었다.
네 이름은 뭐가 좋을까?
하트만 저택으로 걸어 들어간 날 금발의 소녀가 말했다. 윤기는 눈만 깜빡거렸다. 다섯 번의 이름을 가져본 그에게 이름이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뭘로 바뀌든 처음 받은 민윤기로 돌아왔으니까. 아무거나 괜찮아요. 엘리 하트만은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네가 좋은 이름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보자. 이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에 따라 그녀는 윤기를 다른 호칭으로 불렀다. 슈가. 그랬더니 전염이라도 되는 건지 다른 하트만들도 윤기를 모두 그리 불렀다. 슈가, 하고.
왜 슈가예요. 건조하다 못해 퍽퍽한 감성을 지닌 십대 중반 소년은 달콤한 애칭이 어색했다. 엘리 하트만은 묻는 윤기를 반대로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싫어? 잘 어울리는데. 소년은 생각했다. 싫은가? 간지러워서 가끔 심장을 꺼내 벅벅 긁고 싶은 감상이 들긴 해도 뭐. 여태 가진 어떤 이름보다 실용성은 없지만, 어디서 이름을 말해야 할 때는 민윤기라는 이름을 고집할 정도로, 그래도 듣기는 나쁘지 않았다. 싫진 않아요.
슈가 하트만, 그 이름을 쓸까? 궁전 같은 저택에 온지 2년, 서서히 그런 생각이 소년의 머리를 점령하게 됐을 무렵. 필름 감기듯 다른 장면이 윤기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찢긴 캘링턴 아트스쿨 극 포스터와 기괴하고 소름 돋는 비명소리. 마지막은 늘 산발이 된 금발에 케이크처럼 달콤하게 웃는 소녀다. 슈가, 이거 좀 열어줄래. 넌 내말 들어줄 거잖아, 응? 착하지.
“…….”
윤기는 감았던 눈을 열었다. 목이 졸려지는 것만 같다. 떨쳐내듯 머리를 흔들어 털었다. 들어줬잖아. 시키는 대로 했잖아. 그러니까, 곧 끝이니까 그만 나타나.
어느덧 많이 자란 앞머리가 눈가를 괴롭혔다. 물이 많이 빠진 머리색은 민트색이라기보다는 백발에 가까웠다. 가만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잠시 뒤 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친절한 목소리에 윤기는 인사 따위는 모르고 바로 용건을 말했다.
“디자이너랑 약속 잡아. 한 시간 뒤.”
난데없이 상사의 주말전화 공격을 받은 진은 놀라지도 않고 익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디자이너는 자로 잰 듯 정확히 한 시간 뒤 저택을 방문했다. 콧대 높은 어거스트 회장의 급작스러운 통보 덕분에 미리 잡혀있던 일정을 취소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디자이너는 친절했다. 이번에도 같습니까? 디자이너는 익숙하게 민트색 염색제품을 준비했다.
“그 색 말고.”
이 색으로 하지. 디자이너는 멈칫했으나 능숙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차 뒷좌석에서 주전부리를 들고 왔던 고용인과 마찬가지로 기이한 눈빛을 하고.
***
정국은 지민을 추궁했다. 이게 뭐예요? 졸업시험 준비로 깔려 죽어가고 있던 정국이 툭 내던 진 건 특정한 날짜의 일간지였다. 저 쓰레기 신문을 다 모아서 태워버렸어야 했는데. 라스베가스, 은밀한 데이트. 뜨끔한 지민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음, 이거는 말이지…출장 갔다가 어쩌다보니 찍혀서….
정국이 눈에 힘을 빡 주고 지민을 노려보았다. 샌프란시스코로 벨라지오 호텔 이사했다고는 못 들었는데? 지민 스스로 생각해도 출장과는 멀어 보이는 컷이었다. 하필 왜 분수쇼 앞에 있는 건 찍어서. 할 말이 사라진 지민은 싸우면 질 문제라 뻔뻔해지기로 했다. 쭈그러드는 허리를 당당히 폈다. 뭐, 뭐가. 민윤기가 가자고 한 거지 내가 가자고 한 줄 알아. 나는 엄연히 출장을 다녀온 거야. 정국은 영 믿지 못한다는 눈초리를 유지하다 마지못해 시험공부를 하러 갔다.
평화로운 어거스트의 최상층 사무실. 나름 손발이 척척 맞는 비서 셋은 타워의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커피를 쥔 지민은 심부름거리 예측이나 하고 있었다. 윤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문이 열린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 말을 하려고 했다.
“오늘 오전 일정 취소해.”
제멋대로인 명령을 시작으로 생로랑 수트, 프라다 검은 코트, 그리고 검은색 머리카락. 잠깐, 검은색? 사무실은 혼란으로 휩싸였다. 지민은 시야에 안개라도 낀 건 아닌지 수차례 눈을 깜빡거렸으며, 진은 입을 떡 벌리고 코트를 받을 준비를 하던 자세 그대로 굳었고, 레이첼마저 윤기의 심부름리스트를 곧장 받아 적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셋은 눈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지금 제 눈이 이상한 건가요?
“이게 바로 아쿠아리움 속 펭귄 마음인가? 아주 끝내주는군. 커피 내놔.”
빈정거린 윤기가 커피를 쏙 빼간다. 먼저 정신을 차린 레이첼이 문제없이 수행하겠다는 답을 남겼다. 순식간에 집무실로 윤기가 사라지자마자 셋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맞대고 모였다. 프라다 코트를 품에 안은 진이 급박하게 말했다.
“봤어요?”
“검은색이죠? 민트색 아니죠?”
지민이 맞장구쳤다. 고작 머리색 하나에 유난이다, 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가 윤기일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취임식 때부터 민트색을 고수했다. 거대한 기업을 책임지고 있는 위치에 안 어울리게 여느 20대와 같은 차림은 윤기의 또 다른 아이덴티티였다. 민트색, 저 얼굴, 아 민윤기. 그런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게 그의 머리색이었다. 레이첼이 말했다.
“진, 무슨 연락 없었어요?”
“주말에 디자이너를 부르라고 전화는 왔긴 했는데.”
까칠한 상사의 행동반경은 예측해놓는 게 좋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고심하던 진이 심각하게 말했다. 설마.
“내일 퇴임하는 게 아닐까요?”
“멀쩡한 직장 없애서 실업자로 만들지 말아줄래요?”
레이첼이 식은 눈빛으로 되받아쳤다. 레이첼 생각해봐요, 솔직히 그게 제일 가능성 있지 않아요? 민윤기 퇴임설을 주장하던 진은 레이첼이 가서 그렇게 물어보지 그래요, 하는 대답에 쩝 입맛을 다셨다. 내가 잘못했네요.
“그럼 왜죠?”
사업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사업확장은 호전적으로 굴러가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의심이 가는 건 인간관계인데. 좁은 그의 인간관계에서 최근 화제되는 인물이라면. 도르륵 진과 레이첼이 시선이 일순 지민에게 몰린다. 지민은 어느 순간부터 열렬한 토론을 벌린 레이첼과 진과 다르게 윤기가 사라진 집무실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넋이 빠져서.
“…일이나 하죠.”
“좋아요.”
동의한 진이 지민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네, 네?”
“지민 전화 맡길게요. 회의 취소 됐으니까 앉아만 있어요.”
“아 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진이 문이 닫히자마자 레이첼에게 말했다. 저쪽은 문제없어 보이죠? 역시 퇴임일지도 몰라요.
사무실에 덜렁 혼자 남겨진 지민은 빠져나올 수 없는 고민의 덫에 갇혀있었다. 검은색, 좋지. 깔끔하고 세련됐잖아. 하지만 난 체크무늬가 더 좋아. 내일 인터넷으로 체크무늬 셔츠를 쇼핑하는 거야. 옷 안 산지 오래됐으니까 사이즈도 재볼겸 다시 입어보고, 그리고 사서 민윤기한테 입혀보고…아니, 왜 또 민윤기가 튀어나오는 건데. 지민은 세수하듯 얼굴을 묻었다. 신경체계가 맛이 갔다.
이건 다 민윤기 탓이다. 지민은 괜스레 안은 보이지도 않는 집무실을 흘겨보았다. 왜, 어? 하필 검은색으로 한 거야. 차라리 그가 무지개색 광대 가발을 쓰는 게 덜 신경 쓰이겠다. 순식간에 태풍처럼 사라져버린 몇 분이라, 다시 한 번 자세히 보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그때.
덜컥 문이 열렸다. 억, 퍼드득 놀란 지민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타세요?”
“그럼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아하하…설마요. 엘리베이터로 가야죠. 지민은 늘 보이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윤기를 배웅하려했다.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릴 때 즈음.
“너도 타.”
“하지만 그러면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걸요.”
“고작 전화 몇 번 못 받는다고 망하는 회사 같아?”
여태 전화 한 번 놓쳐 잘린 비서들이 들었다면 기함할 말이었다. 윤기는 엘리베이터 안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점심시간이잖아, 너. 타.”
“아 그거면 괜찮아요. 진이랑 같이 먹기로 했어요.”
“타.”
“…네.”
지민은 결국 진에게 전달해야 할 서류를 끌어안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회사 주인이 가라는데. 비서의 법칙 같은 게 실존하는 게 아니니 상관없을 거다. 그럼에도 양심은 쿡쿡 찔렸다. 진에게 밖에서 만나자고 문자라도 보내야 할까, 하는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다. 지민은 티 나지 않도록 윤기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평범한 검은색인데, 아침마다 만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개수로 따지면 우주의 별만큼 많을 텐데, 그 흔한 색이 윤기와 섞이니 이상하게도 눈을 못 떼겠다. 그런 느낌이다. 투명한 겨울의 요정이 알고 보니 퇴폐적인 대악마일 때. 더욱 차분해보이고 고요해 보인다. 옷도 잘 어울리는 거 같다, 그런 감상을 떠올리고 있을 때 결국 걸리고 말았다. 휙 지민을 돌아본 윤기가 말했다.
“왜, 이제 사귈 마음이 들어?”
“아, 아니거든요!”
차라리 말을 걸어줘서 다행이다. 알게 모르게 쿵쿵거리던 심장이 가라앉는다. 지민은 조심스레 질문했다.
“왜 검은색으로 하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뭐 그냥.”
“…….”
“데이트 편하게 하면 좋잖아.”
농담 식으로 던진 윤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괜히 물어봤다. 지민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숫자판만 올려다보았다. 90층대다. 잘 어울리시네요…. 그런 말이나 간신히 꺼내놓았다. 그런데 한참 있자니 옆얼굴을 찌르는 시선이 뜨겁다.
“…왜요?”
윤기는 잠깐 말이 없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만 깊어진다. 지민은 침이 바짝 말랐다. 안 그래도 저 시선엔 쥐약인데, 아직 적응 못한 분위기 탓에 더 죽겠다. 머릿속 벨이 띠링 울린다. 뭔가 듣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 괜히 물어본 거 같다, 느낀 찰나, 윤기가 가벼운 어조로 툭 말했다.
“너랑 자고 싶어.”
정말이지 낯 뜨겁도록 솔직했다. 한 단어 한 단어 뭉쳐낸 문장과 어우러진 저음은 외설적이었다. 갇힌 공간이라 더 웅웅 울렸다. 지민의 귓가가 확 달아오른다. 어쩌다 잘못 들어간 사이트에서 우수수 뜬 음란광고를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 형태였다. 놀란 여우가 킹킹거리듯 지민이 발끈했다.
“그, 그런 소리 좀 아무렇게나 하지 마세요!”
“뭐가 그런 소리인데.”
“방금 말하신 거 같은 그런 거요! 여기 고, 공공장소고 저쪽에 씨씨티비도 있고, 또, 또…!”
“공공장소? 어디가. 내 건물에서 내가 하겠다는데.”
윤기가 시니컬하게 반박했다. 씨씨티비는 가져오라하면 돼. 반박할 게 없다. 어거스트에선 그가 살아있는 법이었다. 지민은 더 평범한 논리를 갖다 붙일 수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마냥 넘길 수 없어 계속해서 주장했다. 자꾸 놀라거든요? 차라리 직장 성희롱이라 통보하는 게 합리적일 테지만, 당황한 지민은 심장존중 해달라, 이상으로 다른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윤기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수긍했다. 그럼 안 할게.
네모난 박스는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오랜만에 느낀다. 이 숨 막히도록 어색한 공기. 예전 같은 이 공간에서 그는 약을 안겨주기도 했다. 박지민 그래도 많이 컸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헐레벌떡 도망가기 바빴는데, 대담하게 따지기도 하고. 엘리베이터는 아직 60층대에 머물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좀 그럴 거 같은데.
다시금 윤기를 곁눈질했다. 본능을 다 드러낸 사람치고는 차분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재주라면 재주였다. 남은 롤러코스터 태워 보내놓고 정작 본인은 멀쩡한 게. 맛있게 드세요, 그런 인사라도 해야겠다. 지민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넬 타이밍을 쟀다. 눈이 마주친다.
“그니까요….”
그리고 그다음 순간, 시야가 빙글 돌았다. 순식간에 지민의 허리가 팔에 감겨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윤기는 입술을 붙이고 혀를 밀어 넣었다. 대체 그 나른해보이던 분위기에서 이런 순발력은 어디서 난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빨랐다. 지민은 숨이 맞붙었을 때가 되어서야 헉, 했다. 당황하여 어깨를 두드려도 떼지 않는다. 마른 주제에 지민을 옭아매는 힘만큼은 차고 넘쳤다. 오히려 그는 남은 손으로 뒷머리를 엉켜 쥐었다. 싫다는 듯.
첫 번째보다 거칠었다. 같은 게 하나 있다면 지민은 몇 번 어깨를 두드리다 가만 손을 올려두는 선택을 했다. 아직 결론을 맺지도 않았으면서 이러면 안 돼, 그런 생각은 윤기가 뒷머리를 움켜쥐었을 때 이미 하늘로 증발했다. 띵, 1층입니다. 안내문이 들릴 때 윤기는 입술을 뗐다. 그러더니 타액으로 번질거리는 지민의 입술을 손으로 슥 쓸었다. 본인이 잔뜩 헤집어놓은 뒷머리도 쓸어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윤기는 생긋 웃었다. 유독 말 붙이기 어렵던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린다.
“좀 있다 봐.”
문이 열린다. 윤기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상어를 피하는 물고기 떼처럼 로비가 촤르르 갈린다. 지민은 풀릴 뻔한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서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누군가 어디선가 한번 들었던 질문을 던졌다.
“안 내리세요?”
“아….”
내립니다…. 지민은 간신히 내려 로비의 대리석을 짚고 섰다. 방금 나한테 뭐가 일어났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주먹을 말아 쥐느라 구겨지고 난리가 난 서류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보면 파쇄하기 직전의 서류다. 안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건 사기다, 주장하기 전 일단.
“…다시 올라갔다 와야겠다.”
하아, 지민은 구겨진 서류로 붉어진 얼굴을 부채질했다. 요즘 뉴욕이 심각하게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