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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30

by 토페 posted Jan 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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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Lullaby of the leaves - Eddie Higgins Trio>








 아스팔트 정글 가서 현장보고 해. 아침부터 윤기가 내린 명령이다. 지민은 얼얼한 정신으로 정말요? 대신 간신히 네, 하고 대답했다. 또 다시 보낼 줄은 몰랐다. 솔직하게 지민이 봐도 첫 번째로 제출한 현장보고서는 발로 쓴 것보다 못했다. 현장 보고서를 빙자한 뷔 찬양서였다. 찢어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한 줄 읽고 아예 안 읽었나 봐. 어찌됐거나 지민은 긍정적으로 정리했다. 예스, 뷔 또 만난다!


 지민은 횡당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이번 촬영 장소는 센트럴파크였다. 뉴욕 풍경액자를 사면 반드시 한번쯤은 담겨있는 곳.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허허롭게 웃었다. 그래…홀리 처음 산책 시킨 날 고모할머니를 만나고 올 뻔 했지. 라스베가스에서 다녀와 못 본지 한 달이 넘어가니 안부가 궁금하다. 하트만 저택에서 외로워하진 않겠지. 그래도 착했는데. 덩치 커다란 강아지는 나중엔 혀를 헥헥 내밀면서 힘들어하는 자신을 기다려주기도 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다음에 민윤기한테 한번 물어봐야지. 막 신호등을 건너려는 그때.



“저기요.”

“…네?”

“시간 괜찮으세요?”



 키가 몹시 큰 흑인 남성이 지민을 내려다보고 방긋 웃고 있었다. 지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요? 어색하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짚으니 남성이 끄덕거린다.



“네. 잠시면 됩니다.”



 남자가 선히 웃었다. 처음 보는데. 수상한 수작을 거는 거 같진 않다. 길거리에서 발을 붙잡힐 일이라곤 길 이정표 역할 정도밖에 없는 지민은 설문조사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했다. 볼을 긁적거리며 곤란하다는 듯 얕게 웃었다.



“그게 제가 지금 일을 가야 돼서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 진짜 짧아요.”

“안 되는데….”



 또 발휘되고 말았다. 거절 못하는 병. 지민은 세상에서 남의 부탁을 거절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남자는 순식간에 머뭇거리는 지민을 눈치 채고는 본격적으로 애걸을 해왔다. 정말 잠깐인데 그도 곤란하신가요? 다 큰 성인남성이 도로 한복판에서 애절하게 바라본다. 눈 깜짝할 시간 정도면 충분하거든요. 지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깐이라는데.



“무슨 일이신데요?”

“인터뷰 하나만 해주셨으면 합니다.”



 인터뷰요? 카메라맨은 보이지 않는다. 지민은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더 없이 선량한 웃음이긴 한데, 머릿속 버튼이 꾹 눌려진다. 수상하니 주의해라. 한가롭게 풀린 날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유튜브에 올리려는데 참여 부탁드릴게요, 같은 그런 흔한 질문은 아닌 듯했다.



“…어떤 인터뷰인데요?”

“자리를 옮길까요?”

“네? 아까 잠깐이라고 하셨….”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자, 가죠.”



 남자가 지민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거구의 남성에 비하면 풍차 앞 깃털 같은 지민은 팔랑팔랑 딸려가는 게 고작이었다. 납치인가 보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남자는 기어코 지민을 스타벅스 의자에 앉혀놓았다. 오늘 아침 방문한 스타벅스였다. 차원이 다른 보폭에 거의 뛴 지민의 붉어진 볼을 보고 남자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미안합니다.



“시몬 윌리엄입니다. 아직 춥긴 하지만 그래도 시원한 음료가 좋으시겠죠? 아니면 저랑 같은 아메리카노로 시키시는 건?”

“…지민이에요.”

“반갑습니다, 지민. 주문은 제가 하죠.”



 시몬은 휘적휘적 걸어 주문까지 마쳤다. 점점 수상하다. 뭐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그때였다. 시몬이 더없이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어거스트에 다니면 이런 커피는 많이 드시겠어요.”

“아니에요. 딱히 그렇게까지 많이 먹지는….”



 술술 대답하던 지민이 멈칫했다. 오늘 지민은 남자와 처음 만났다. 어거스트 로고가 지민의 이마 위에 붙어있는 건 아니다. 백만분의 일 확률로 첫눈에 반해 따라 왔을 리는 없을 터였다. 지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직구로 물었다.



“제가 어거스트에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아세요?”

“사실…매일 어거스트 근처에서 지민이 돌아다니는 걸 봤습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



 드르륵, 말을 끊고 지민이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의자를 밀었다. 시몬은 당황하며 손을 내둘렀다.



“농담, 농담입니다. 너무 경계하셔서 조금 풀어드리려고 한 건데, 죄송합니다. 제 소개를 다시 하죠. 저는 뉴욕 글로브의 시몬 윌리엄 기자입니다.”

“기자요?”

“네, 작은 곳이라 잘 들어보진 못하셨을 테지만요.”



 제가 다니는 곳은 요만하죠. 시몬이 새끼손가락을 피고 넉살좋게 웃었다. 평소 남의 말을 잘 믿는 박지민이라면 그쯤에서 의심을 내려놓았을 거다. 그래요? 기자분이셨군요. 마주 웃으며 큰 회사도 마냥 좋은 건 아니라고, 농담이라도 해줬겠지만 작은 머릿속은 바빴다. 신문 일 면에 실리고 나니 예민해지긴 했다. 기자? 기자가 내 얼굴을 어떻게 알지? 어디서 봤다는 건가? 그렇다면.



“3일 전 그 기사…!”



 지민이 시몬을 손가락질했다. 그 쓰레기 기사! 파파라치! 시몬이 응? 하고는 무슨 기사를 의미하는지 알아차리고서 급히 부정했다.



“그건 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많이 욕먹었으면 저는 지금쯤 병원에 누워있을 겁니다.”



 거짓말. 지민은 미심쩍은 눈을 유지했다. 시몬이 말이라도 삐끗하면 할퀴기라도 하고 도망칠 자세였다. 시몬은 퍽 억울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그딴 기사를 쓰려고 여기 온 건 아니니까요.”



 윤기 말이 맞다. 언론은 다 쓰레기다. 면상 한번 보고 싶다 염불을 외긴 했는데, 그런데 어째. 지민은 차원이 다르게 넓은 시몬의 어깨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살금 제 어깨를 내려다보고 과거의 다짐 다음 단계는 철회시켰다. 마지막으로 시몬의 주먹크기까지 스캔하고서 믿는 척을 했다.



“…어떤 인터뷰인데요?”

“어거스트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민이 엉덩이를 의자 끝으로 밀어붙였다. 상황을 봐서 튀자.



“좀 적어도 될까요?”



 시몬이 노트와 펜을 꺼낸다.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시몬은 볼을 긁적거렸다. 차분하고 편한 분위기를 가져야 대답도 잘 나오는 법이다. 꽤나 사람 좋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본 전적이 있던 시몬은 화제를 주도했다.



“그 기사 참 웃겼죠. 그런 친구들이랑 같은 타이틀이라는 게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이미 저희 사이에선 어거스트의 새 비서가 남성분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인데. 사실 어거스트에 새 비서가 왔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다들 심심풀이 삼아서 내기를 하곤 하거든요. 얼마나 갈까 하고. 아 물론 전 안 했습니다, 하하.”



 지민은 뚱한 표정이었다. 나온 커피를 한 모금도 입에 가져가지 않고 털 부풀린 고양이마냥 시몬만 미심쩍게 노려보았다. 거짓말이잖아, 다 알고 있어. 시몬은 생각했다. 의심이 많네. 어거스트 회장한테 배우기라도 했나. 그래서 좀 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선한 미소를 뽐냈다.



“이거 제가 날을 잘못 찾아온 거 같군요. 상사랑 스캔들이 나면 누구라도 일주일 내내 맥주를 마셔도 모자란데.”

“…….”

“아 기사가 진짜였나요?”

“네에!?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지민이 펄쩍 뛰었다. 가짜! 어마어마한 가짜인데요! 내일 지구에 혜성이 떨어진다는 소식보다 더 가짜에요! 열과 성을 토해내며 윤기까지 모르는 사람이라 부정할 기세였다. 웃자고 한 농담인데 죽자고 달려든다. 오히려 산전수전 다 겪은 시몬이 어버버거렸다. 왜 화를 내는 거지?



“아,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진정하세요, 지민.”

“전 이,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부턴 찾아오지 마세요.”

“잠시, 지민! 잠시만요!”



 검은 구두는 순식간에 유리문을 통과해 스타벅스를 날라버렸다. 급히 따라나서던 시몬이 책상에 다리를 박고 윽, 했다. 스타벅스 입구 앞에서 주변을 둘러본 시몬은 허탈한 웃음을 허, 내뱉었다. 고작 3초 늦었을 뿐인데 순간이동능력이라도 있는지 맨해튼 거리의 많은 인구 사이로 섞인 그를 더는 찾을 수 없었다. 뭐야, 설마 진짜야?








***







 푸르른 녹색이 가득한 뉴욕의 허파 센트럴파크는 꽤나 쌀쌀했다. 지민은 택시에서 내리면서도 끝까지 뒤를 돌아보았다. 맨해튼 중심부에서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그대로 경찰을 부를 생각이었다.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지. 소름 돋은 팔을 벅벅 문질렀다. 이럴 때마다 어거스트의 크기를 깨닫는다. 평범한 연구소에 취업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순간들을 만날 때. 다시는 보지 말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지나 도착한 저수지는 한산한 편이었다. 조깅하는 몇몇 사람들과 카메라장비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무리가 있었다. 감독은 동그랗게 모여 진지한 얼굴로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지민을 발견하고 굽신거리며 짧은 인사를 건넸다. 아시죠? 정말 열심히 촬영하고 있어요. 촬영기간만 1년인 히말라야 다큐멘터리라도 찍어올 열정이었다. 지민은 하하 웃으며 생각했다. 부담스러워죽겠네. 어색한 상황을 꺼내준 히어로는 다름 아닌 뷔였다.



“지미인!”



 수정화장을 받으며 뷔는 손을 붕붕 흔들었다. 마침 세팅이 끝난 건지 달라붙어있던 스태프들이 뷔의 곁에서 사라진다. 지민은 어색하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안녕. 촬영준비를 마친 뷔는 집에 붙여놓은 포스터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윤기가 보냈어?”

“네,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을 거 같아? 촬영 하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뷔는 장난스럽게 눈물자국을 지으며 힝힝거렸다. 힘들었어, 감독 혼내줘, 영화 엎는다고 해. 겨울의 표본처럼 하얀 목티에 검은 코트를 입고 부리는 애교는 영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얼굴을 보면 어울렸다. 그러셨구나, 하던 지민은 빨리 위로해주지 못하냐는 뷔의 눈초리에 어색하게 등에 손을 올려 토닥거렸다. 뷔가 참, 하며 말했다.



“맞아, 나 신문보고 엄청 놀랐잖아.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거요. 하하 그냥, 어쩌다보니 찍혔어요. 미스터 윤 얼굴 되게 잘 나왔죠. 안 나왔으면 더 좋았을 뻔 했지만요.”

“사진을 멍청하게 찍어놔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다 들킬 뻔했어. 그런데 공개데이트는 왜 한 거야? 너무 티 나게 했던데? 아, 기념일이었던 거야?”



 뷔가 갸웃하며 물었다. 눈망울은 순진했다. 어깨를 토닥거리던 손이 격한 펀치로 변할 뻔했다. 지민이 냉큼 반박했다.



“아니 그거 데이트 아닌데요!?”

“아니야?”

“그럼요! 정말 엄청 깊은 오해세요!”

“둘만 있는 걸로 보였는데. 아 레이첼이랑 진도 같이 간 거야? 사진에만 안 나왔구나.”



 지민은 묵묵히 입을 닫았다. 선선히 수긍하던 뷔는 마침 궁금했다며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사귄 거야?”

“…네?”



 저는 아무하고도 안 사귀는데요. 어쩐지 뷔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불안하다. 뷔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갸웃하며 툭 말했다.



“윤기랑.”

“누, 누, 누가 사귄다고 그러세요! 절대 아니에요!”



 왜 사람들이 민윤기 이야기를 나한테 꺼내는 거지? 지민은 팔이 뽑힐 듯 휘저으며 부정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잘못된 생각이거든요. 그 기사를 보셔서 최면을 당한 걸 수도 있어요. 뷔는 빤히 지민을 바라보기만 하더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으음…그래?”

“네!”

“민윤기 안 좋아해?”

“안…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냥 제 보스고…그러니까…아, 아무튼 아무 사이 아니에요.”



 조금 더 휘말리다간 다 털어놓을 거 같다. 지민은 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만난 횟수는 다섯손가락 안에 꼽는데 꽁꽁 숨기고 있는 비밀은 다 알아차리고 있다. 왜 다 알고 있는 거지? 아무런 티도 안 나는데. 등 뒤에 해명이라도 써놔야겠다. 민윤기랑 사귀는 거 아님. 뷔는 눈만 꿈뻑거리면서 천진하게 지민을 뒤집어놓았다.



“그냥 관심만 있구나.”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그래?”

“네!”



 뷔는 생각했다. 관심 엄청나게 많은 거 같은데. 그래도 본인이 꾸역꾸역 아니라 우기니 대충 끄덕거려주었다. 그러면 그렇다고 치자. 지민이 사실이라며 다시금 억울한 눈썹을 만드는 그때, 로렌이 다가왔다.



“나도 껴줘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 거예요?”

“아 로렌, 오랜만이에요.”

“재미있는 거 하고 있지. 바로 지민 연애상담 중.”



 뷔가 쏙 치고 들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 지민은 뷔의 입을 막기 위해 튀어나가는 손을 간신히 붙잡았다. 로렌이 휘둥그렇게 커진 지민을 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감정에 정말 솔직하네요, 지민. 그때쯤 스태프가 외쳤다. 곧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무슨 촬영인 거예요?”

“오늘? 공개데이트.”

“…….”

“아 놀리려는 거 아니고 진짜 데이트 장면이야. 표정 풀어.”



 뷔가 실실 웃었다. 친절하게도 그는 설명을 이었다. 로딘슨이, 아 나야. 래리 삶을 연기하는데 래리는 원래 애인이 있었거든. 정리하자면 이랬다. 얼굴이 똑같은 남자의 인생을 대신 살며 애인의 역할까지도 대신한다는 이야기. 그녀는 여전히 로딘슨이 원래 연인이라 믿고 있다 했다. 센트럴파크에서 갖는 로맨틱한 데이트. 그게 오늘의 촬영내용이었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센트럴파크를 걷는 아름다운 연인. 뷔와 로렌이 발을 맞춰 숲길을 걸었다. 아니, 영화 속 사랑을 나누는 로딘슨과 올리비아가. 지민은 수많은 스태프 속에 섞여 뷔와 로렌을 주목했다. 손을 잡고 걷는 그들은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로렌이, 올리비아가 말했다.



“자기 요즘 뭐랄까. 변했어.”

“내가?”



 로딘슨이 움찔하며 멈칫한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뭐…요즘 밥을 많이 먹긴 했는데. 살이 많이 쪘나? 어색하게 눈을 피하는 애인을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뭇 귀엽다는 듯.



“좋은 방향으로 말이야. 왜 긴장하고 그래?”

“그, 그렇지? 다이어트 할 뻔 했네.”

“살 찐 건 밤에 확인해보면 되지.”



 올리비아가 은근한 어조로 로딘슨의 팔을 쓸어 올리고 팔짱을 낀다. 컥컥거리며 놀란 로딘슨이 도토리라도 빼앗긴 다람쥐 같은 눈망울로 어색하게 팔을 뺐다. 왜 그러냐는 올리비아의 눈초리에 급히 말을 돌린다.



“나도 사실 변한 거 같다고 생각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싶고…특히 당신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라 생각해, 올리비아. 꿈같아.”

“…….”

“내가 이렇게 행복해질지 몰랐어. 난, 음, 계속 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어져. 내가 왜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 갑자기 이런 소리하니까 조금 이상하지?”



 로딘슨이 멋쩍게 웃었다.



“왜? 하나도 안 이상한데?”

“…괜찮아?”

“물론. 더 해줘도 괜찮아. 그리고 왜 그러냐니. 그 부분은 빼줘. 당연한 거잖아.”



 올리비아가 달콤하게 웃으며 포옹한다. 



“당신은 날 사랑하니까.”



 순간 지민은 하나의 대사가 머릿속에 콱 박혀오는 것 같았다. 그야 당신은 날 사랑하니까. 촬영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감독이 큐 사인을 내린다. 다시금 촬영 시작지점으로 뷔와 로렌이 돌아간다. 둘은 돌아가는 동안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서로를 밀치며 웃음을 바쁘게 터뜨렸다.


 그 왁자지껄하고 요란스러운 찰나, 지민은 동떨어진 공간에 갇혀있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떠올랐다. 본인조차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고 무작정 애정이나 달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 모른다고 했으면서 넌 나를 그렇게 쳐다보고. 이상하게 착하게 굴고. 관심을 달라 솔직하게 조르고.


 왜 나는 계속 그 사람이 떠오르는 걸까? 연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장면에서. 놀랍게도 지민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혹시, 아마도, 어쩌면. 머릿속이 온통 푸른 민트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