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Chopin Waltz Op.69 No.2>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평소 드시는 게 없긴 한데….”
“상관없어. 아무거나 줘. 집 깨끗하네.”
“아무래도 밖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요.”
“내 탓이라 들리는 건 그저 내 착각인가?”
“아하하…여기요.”
커피 두 잔을 가져 온 지민은 웃음으로 대답을 피하며 쇼파에 앉아있는 윤기에게 한 잔을 내밀었다. 윤기의 몫은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믹스커피였다. 대학교 과제로 밤샘을 할 때 종종 마시던 종류라, 달달한 커피를 선호하는 지민은 카페인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선호하지 않지만 단 커피를 싫어하는 윤기의 입맛에 그나마 부합하는 게 이런 종류였다.
쇼파 옆으로 나란히 앉은 지민은 윤기를 흘끔거렸다. 사사건건 까탈스럽게 굴더니 예상 외로 군말 없이 잔을 쥔다. 그 채로 집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운동장만한 집에 사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 아담한 소형주택은 드레스룸보다 조금 큰 크기일 것이다.
“너 닮았군.”
“…그거 작다는 뜻이에요?”
“좋다는 거야.”
윤기는 평범한 어투였다. 간결하고도 깔끔했다. 순간 지민은 마시던 커피가 식도를 뚫고 나가 심장에 쏟아진 느낌이었다. 카페인에 절여진 듯 뜨겁고 맥박이 일순 빨라졌다. 어색하게 웃거나 딴청을 부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구경하듯 주변을 둘러보는 윤기를 바라보던 지민은 흔들리는 시선을 머그컵에 박았다. 사람이 적응할 시간은 좀 주고 바뀌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지민은 차라리 윤기가 홀리도 이만한 크기의 집에서는 좁아 살 수 없다고, 이 커피를 먹고도 정말 앰뷸런스를 타지 않았느냐고 빈정거리길 바랐다. 그러나 윤기는 지민의 뜻과 반대로 나아갔다.
“저 분은 누구지.”
“네?”
윤기가 턱짓으로 가리킨다. 벽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액자였다. 따스하게 웃고 있는 중년 여성과 지금 키의 반절도 안 되는 어린 지민이 있었다. 미국으로 온지 약 세 달이 됐을 때 찍은 사진이다. 지민은 아, 하고는 액자를 보자마자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그녀가 지민에게 그런 존재였다.
“고모할머니예요. 정말 따뜻한 분이셨어요.”
“뭔가 너랑 분위기가 비슷해보이시는군.”
“그쵸, 아무래도 고모할머니 혼자 절 키워주셨으니까요.”
“훌륭한 분이시네.”
그녀는 눈을 감을 때조차 지민을 걱정했다. 잠들기 전 침대로 지민을 불러 주름진 손으로 고운 두 손을 꼭 잡고 연신 되풀이 말했다. 사랑한다, 아가야. 다정하고 곧은 성정을 가진 그녀는 늘 지민이 받지 못한 사랑을 부족함 없이 채워주었다. 사람이 받고 자라야 할 애정의 크기를 욕조라 가정한다면 반 이상이 그녀의 사랑일 것이다. 액자를 연신 바라보던 윤기는 이내 실소를 흘렸다.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재미있게 생긴 건 똑같군. 특히나 저 때는 눈이 곧 소멸하겠어.”
“오해하지 말아주실래요. 사진 찍기 전 날에 울어서 그런 거거든요?”
“오, 그래? 울보였어?”
“…아기는 원래 다 울면서 커요.”
“산타한테 선물 못 받아서 슬펐어?”
윤기는 얄밉게 싱글거리는 미소를 유지했다. 지금이라도 내가 산타 연기 좀 해줘야 하나. 별 거 아닌 말인데도 어쩐지 놀리는 거 같다. 뭐 자기는 탯줄 끊을 때도 안 울었던 거처럼 말하네. 지민은 콧잔등을 씰룩이며 반박했다.
“미스터 윤도 똑같이 생기셨던데요, 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액자에서 봤죠.”
이만한 거요. 지민은 직접 손을 펼쳐 액자의 크기까지 쟀다. 딱 한번 본 액자는 유난히도 세세히 기억났다. 윤기는 고개를 살짝 모로 삐딱하게 꺾더니 더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기는 그만하고. 또?”
“미스터 하트만도 계셨어요.”
“아 그래. 침실에 있는 그거?”
“네.”
“누가 내 침실에 겁도 없이 들어와서 건드렸나 했더니 너였군.”
지민이 뒤늦게 입을 헙 막았다. 잘려도 무리 없는 고백이었다. 몇 주 전부터 서서히 나사가 풀려간다 생각한 머리가 결국엔 사고를 쳤다. 언제부터 민윤기가 편해졌다고 일일이 다른 거까지 다 말하고 있던 거지. 바람 빠진 풍선마냥 쪼그라든 지민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건 직업상의 문제였다.
“그게요….”
“옷만 얌전히 놓고 가라고 했더니 구경까지 아주 열심히 했나봐. 입장료라도 받아야 할 거 같은데.”
“그게! 보려고 한 건 아니거든요 진짜.”
“덕분에 재미있는 추억이 생겼군.”
“…죄송합니다.”
“됐어. 딱히 사과 받을 생각은 없어.”
아마 성질대로 할 수 있었다면 건드려진 액자를 본 즉시 해고통지서를 발령했을 거다. 오늘 하루 종일 마트 따위는 가지도 않고, 이런 좁은 집에 앉아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직도 지민은 잘 모르는 듯했다. 네가 뭘 해도 이제 더는 자를 생각이나, 해고명령 같은 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윤기는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액자만 응시했다.
지민은 커피를 마시는 윤기를 훔쳐봤다. 조용히 있으면 오늘 하루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니, 박지민 넌 이미 민윤기를 따라온 순간 끝났어. 지금 아니면 또 물어볼 수 있는 기회는 한참 뒤에나 올 것이다. 적당히 상대하고 도망치는 방식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라 확신이 들었다. 진짜 진지하냐고, 농담이 아닌 진심이냐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미스터 윤.”
윤기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춘다. 말하라는 뜻이다.
“저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뭔데.”
지민은 정작 기회를 얻고도 쉽게 말하진 못했다. 말하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질문 답을 듣는다고 뭔가 명쾌하게 해결 되나? 지금과 똑같이 남으면 더 불편해지기만 하는 거 아니야?
“한다며.”
“어, 그니까요.”
“…….”
“그러니까!”
“…장난 쳐?”
“왜, 왜 저예요?”
저질렀다. 후회해도 끝이야. 식은땀까지 날 거 같은 지민과 달리 윤기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왜 널 채용했냐고? 정말 빠른 질문이군. 지구가 한 바퀴 돌아올 시기야.”
“아니, 그게 아니구요. 그니까…어….”
“뭔지 정확히 말해.”
“영화표로 거짓말 한 거도 그렇고, 오늘 하루 종일 맞춰주신 거도 그렇고. 왜 그러신 거예요?”
솔직하게 말해주셨으면 해요. 지민은 질문을 하면서도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건가, 생각했다. 고작 비서가 해도 되는 질문인건가. 아니다. 어차피 평범한 비서와 상사 관계로 돌아가기는 틀려먹었다. 윤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재듯 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래 뭐 좋아. 대답해주지.”
“…….”
“몰라.”
“…네?”
출제자가 답을 모르는 시험의 결말은 과연 누가 예측할까. 지민은 미국의 수도가 히말라야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얼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신다구요? 진지하게 널 사랑해, 하는 대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호감이 있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윤기는 다 마신 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솔직히 영화에서처럼 네가 보고 싶어서 수명이 단축될 거 같다거나 바다에 뛰어들고 싶거나 그런 건 아니긴 해.”
윤기는 사랑만큼 낯선 게 없었다. 조금씩 나눠주는가 싶으면 언제나 사람들이 떠나서 배우다 말았다. 기대를 거는 법보다는 실망을 배웠다는 게 맞다. 때문에 윤기는 어떻게 말하면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할 수 있는지는 알아도 감언이설로 사랑한다 거짓을 뱉는 법은 몰랐다. 애초 제대로 받아본 게 없으니 흉내조차 못 냈다. 뭔지 모르면서 왜 너한테 이러고 있냐고? 윤기는 솔직함을 넘어 적나라하게 말했다.
“너 보면 탐나.”
착해빠진 박지민이 끝내는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는 게 좋았다. 기대를 걸고 싶게 만드는 따뜻한 눈이 좋았다. 너 외로워 보인다며 손을 먼저 내미는 배려가 좋았다. 더 줬으면 좋겠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흔한 사랑인지 무시하던 태도를 바꿔 나름대로 열심히 알아보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의문으로만 남겨져있다.
“가지면 좋을 거 같아.”
“…….”
“너랑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 같거든.”
지민은 물에 잠긴 듯 입을 열 수 없었다. 급하게 숨이 막히고 심장이 쾅 추락했다. 어떤 게 당신 모습이지? 그 질문 하나를 했더니 정신없이 밀어닥쳤다. 니가 본 게 맞아. 너가 알고 있는 게 착각이 아니야. 나른하던 목소리가 유독 여유가 닳아 없어졌다. 윤기가 한 마디 한 마디 뱉을수록 욕심이 드러났다.
“니가 나한테 다정한 게 좋아.”
“…….”
“그래서 독차지하고 싶어.”
윤기가 지민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마주치는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떨리는 걸 알면서도 이제까지 찾은 결론을 말했다. 일단 뭐가 됐든.
“계속 이러고 싶게 돼.”
느릿하게 거리가 좁혀진다. 동시에 다른 손을 뻗어 동그란 뒤통수를 쥐었다. 지민은 지난번처럼 떨쳐내면 떨쳐지리란 걸 알면서도 꼼짝 못했다. 시커먼 눈동자에 끌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지민이 뒤늦게 아차, 하고 어떤 말이라도 하려 입을 뗀 찰나였다.
파고 들어온 혀가 순식간에 얽혀들었다. 이 순간만을 노린 것처럼 느리게 다가온 것과 달리 혀는 공격적으로 입안을 헤집었다. 움찔한 지민이 뒤로 밀리면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따라와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질척거리는 물소리만 외설적으로 울렸다. 신음까지 모두 먹어치우는 격한 키스였다. 사고회로가 몽롱해진다.
“아 잠깐….”
숨이 딸린 지민이 벅차다는 듯 윤기를 살짝 밀었다. 젖은 숨을 토하는 입술이 반질거렸다. 채 지민이 호흡을 제대로 내뱉기도 전, 윤기는 급하게 다시 한 번 달라붙어서 아랫입술을 물었다. 지민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윤기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원래 키스란 게 이런 건가. 지민은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야하고, 정신없고. 코끝에 느껴지는 윤기의 향수가 지금 입을 맞추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더 대놓고 알려주는 거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윤기의 손이 뱀처럼 후드티 안으로 쑥 기어들어왔다. 눈을 꽉 감고 윤기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지민이 번쩍 눈을 떴다. 손은 망설임 없이 등허리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정신이 돌아온 지민은 급하게 윤기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파고든 팔을 잡아냈다.
“잠시, 잠시만요.”
입술을 뗀 윤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가 그르렁거렸다. 밀려났어도 여전히 바짝 밀착된 자세였다. 탁한 욕망을 드러내며 흐트러진 모습에 모든 신경이 그를 향해 민감하게 쏠린다.
“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요.”
어쩔 수 없다며 여태와 마찬가지로 끌려 다닐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지민은 떨리는 시선으로도 꼿꼿이 윤기를 마주보았다. 종말 같은 적막이 공간을 채웠다. 마침내 윤기가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며 정적을 깼다.
“…그럼 그렇게 해.”
윤기는 곧장 손을 빼고 거의 쇼파에 등이 닿기 직전인 지민의 위에서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영혼마저 잡아먹을 듯 열정적으로 키스하던 남자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간단한 행동이었다. 지민은 올라간 후드티를 잡아 내리고 민망함에 눈알만 굴렸다. 하 이번엔 내 집이라 이번엔 나갈 수도 없고. 나지막한 기대를 걸어보지만 윤기는 민망함이라고는 모르는지 나갈 기미 따위는 안보였다. 그래…사람마다 느끼는 민망함의 수준은 다른 거니까. 지민이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내일은 감상문 어떻게 할까요?”
“쓰고 싶어?”
“…….”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얼굴에 그렇게 다 드러내면서 말이지.”
“티가…나나요?”
“알라고 한 거 아니었어?”
내일은 쓰지 마. 지민이 원하는 답을 남긴 윤기는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윤기를 따라 지민도 일어났다.
“가시게요?”
“피곤한데 내가 빠져줘야 푹 쉬시지, 내 비서는. 안 그래?”
지민은 아니라는 빈말은 내뱉지 못한 채 현관으로 나가는 윤기의 뒤를 따랐다. 운전 조심하세요, 그런 인사가 전부였다. 지민은 더 이상한 대화가 오가기 전 사라지는 윤기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현관을 나선 윤기는 문을 닫기 전 아, 하고는 한 마디 남겼다. 그와 동시에 환하게 웃었다. 정말 눈이 시릴 만큼 예쁘고 밝게.
“커피 네가 마신 게 더 맛있어.”
“…….”
“다음부터는 그거로 줘.”
윤기는 기습공격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문이 닫힌다. 얌전히 사라져주기는 무슨. 지민은 현관에 기대듯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볼이 화끈거린다. 답을 주기도 전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
어거스트의 필수적 인물, 레이첼의 아침은 클래식 음악과 함께 시작한다. 혹자는 상당히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라 칭할 수 있겠지만 그건 단순한 시계 역할에 불과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제 1정경이 끝날 때 즈음 샤워를 마치고,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이 시작할 때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쯤 마스카라를 칠해 화장을 완료한다. 교향곡이 마무리되는 시점엔 전날 코디한 옷을 입고 그날의 뉴스를 간단하게 훑는다. 훑으면서 먹는 아침은 아메리카노 한 잔이었다. 이 완벽한 루틴을 벗어나면 아침부터 불호령을 만나게 되는 거고, 여유가 생긴다면 클래식을 감상했다.
오늘따라 시간이 꽤 남았다. 10분 이상 시간이 남은 경우에는 특별히 토스트를 구웠다. 레이첼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토스트와 커피를 들고 아이패드를 켰다. 뉴스는 물론 각종 사회와 정치를 살피긴 하지만, 어거스트 관련 기사를 1순위로 살피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고아한 자세로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어거스트를 검색했다.
[어거스트 대표, 동성애 현장포착]
풉! 잔에 토네이도가 휘몰아쳤다. 커다란 타이틀을 단 스캔들이 맨 앞을 장식했다. 레이첼은 기사를 누르기 전 입 밖으로 넘어올 뻔한 심장을 다시 삼켜냈다. 신이시여, 제발 가호를 베풀어주소서. 표정관리에 실패한 레이첼은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눌렀다.
“…….”
기사에는 흐릿한 사진이 하나 붙어있었다. 분수대를 배경으로 남자 둘이 그 앞에 있다. 위치를 보자마자 어디선가 뭉글뭉글 떠오르는 지역명. 라스베가스. 레이첼은 밀려오는 두통에 잠시 아이패드를 내려놓았다. What the, 참지 못하고 욕을 뱉으며 입술을 깨무느라 정성껏 바른 맥의 립스틱이 뭉개졌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을 들어 클래식을 꺼버린 뒤 기사를 다시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가까이 붙은 자세는 잘만하면 입맞춤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윤기의 얼굴과 민트색 머리카락은 선명하게 보이지만 다른 한 쪽은 흐릿했다. 각도상 수트를 입은 뒤태와 동글동글한 검은색 뒤통수만 보이는, 딱 성별만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기사를 터뜨린 언론사는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관심을 끌 커다란 화제가 필요한 듯싶었다.
아이패드를 불태우고 싶어진 레이첼은 냉철한 이성을 다잡으며 당장 오늘 아침에 일어날 일을 계산했다. 당장 먼저 당사자의 반응이었다. 얼굴이 팔릴 대로 팔린 윤기는 둘째치더라도 지민이 문제였다. 활발하고 잘 웃지만 윤기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면 감을 못 잡는 그 애가 이걸 본다면 아마 정신을 놓고 차에 치일 수도 있다.
“하아….”
그거 먼저 막아야지. 레이첼은 이 일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받은 목소리는 아침이라 살짝 잠겨 있는 것 빼고는 문제없었다.
[여보세요, 레이첼?]
“오늘은 커피만 사서 곧장 와요. 나머지는 다 필요 없으니까.”
[네? 오늘 무슨 일 있나요?]
의아한 지민이 던지는 질문에 레이첼은 대충 업무 관련이라고만 전했다. 네, 그럴게요. 순순히 답한 지민이 전화를 끊는다. 레이첼은 한 입도 먹지 않은 토스트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대체 왜 남의 연애사정에 자신이 고통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에르메스, 프라다, 구찌, 카드값, 카드값.”
레이첼은 사표를 막는 주문을 외웠다. 출근하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었다. 오늘은 야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