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Touch My Body Greta Randevoue Remix - Valentino de SoNaR>
뉴욕의 랜드마크로 손꼽히는 어거스트 타워는 멀리서도 존재감을 뽐냈다. 지나갈게요, 잠시만요. 아침부터 맨해튼 거리를 휩쓴 지민은 한 손에는 커피를, 옆구리에는 일간지를 끼고 있었다. 이것도 간만에 하니까 힘들어 죽겠네. 헥헥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질주했다. 그리고 뉴욕의 노란택시만큼이나 반갑고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진!”
“세상에, 지민!”
진은 층수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돌려 지민을 발견하자마자 양팔을 확 벌렸다. 지민은 함박웃음을 쏟으며 와다다 달려가 익숙하게 포옹했다. 커피를 흘리지 않는 기술은 이미 신의 경지였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잘 지냈어요? 사무실 층수를 누르며 진은 황홀해마지 않는 표정으로 답했다.
“정말 하…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어요.”
요 며칠은 휴가를 기점으로 인생이 나뉜다 할 만큼 완벽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어나는 게으름을 즐겼고, 느긋하게 마트와 극장도 갔다. 아프다면 월요일이 온다는 사실에 마음이 좀 쓸렸다. 맛집 하나 찾았는데 다음에 거기 같이 가요. 괜찮죠, 지민? 완전 좋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다 화제를 잘못 텄다.
“거기 술도 괜찮더라고요.”
“안돼요.”
“응?”
“술은 절대 안돼요, 선배님. 이번에 엄청 고생하셨잖아요. 또 드시면 입원할지도 몰라요. 술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마세요.”
진은 급격히 헛기침을 했다. 우연히 주운 행복의 제물은 막내비서였다. 상사의 변덕이라는 이름의 산타클로스가 던져준 선물은 달콤했으나 다시금 희생양을 보니 양심이 아파왔다.
“크흠, 그렇죠. 지민 덕분에 그래도 금방 괜찮아졌어요. 그대로 비행기를 탔으면 토 하고 하늘에서 잘려본 최초의 사람이 될 뻔 했어요. 아니면 그대로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고요.”
순간적으로 움찔한 지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전용기 진짜 좋더라구요. 깜짝 놀랐어요.
“…진짜 뛰어내리라고 했어요? 낙하산 주고?”
“아, 아뇨! 농담으로 하셨어요. 제가 실수를 좀 해서….”
진은 윤기의 꼬인 심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계획까지 뒤엎고 데려가 놓고서 잘해주지는 못할망정 뛰어내리라고 하는 건 무슨 심술인거람. 나름 오래 일했고 서서히 윤기의 행동범위를 이해하게 됐다 생각했는데, 그의 속은 아직도 풀 수 없는 미궁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식으로 진은 멀리 있는 누군가를 흉봤다. 오구, 우리 막내비서 고생했어요.
“술 필요 없어요, 지민?”
지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민망한 웃음만 흘렸다. 진은 다시금 지민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따뜻한 포옹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지민은 애교 있게 진을 향해 프시시 눈웃음을 지었다. 선배님 존재 자체만으로도 괜찮은 걸요.
어느새 최상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렸다. 레이첼은 딱 달라붙은 사람뭉치를 마주하고 썩은 치즈라도 씹은 표정을 했다.
“그쪽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건 알겠는데, 빨리 내려서 일부터 좀 하면 안 될까요?”
“레이첼!”
“끌어안으면 힐로 찍어버릴 거니까 떨어져요.”
이 화장 30분짜리라고요. 반갑게 양팔을 벌리며 다가온 진이 끌어안기 전 살벌하게 답한 레이첼은 진의 손에서 투자관련 보고서 파일만 쏙 꺼내갔다. 진이 흐뭇하게 웃었다. 레이첼 오늘도 기운찬 걸 보니 잘 다녀왔나 보네요. 지민이 스타벅스에서 주문을 빠르게 하는 능력의 달인이 되었다면, 진은 긍정적인 시야를 획득하는 쪽의 달인이 되었다.
“회장님 도착 5분전이에요.”
어거스트 최상층 사무실은 착착 굴러갔다. 진은 넥타이를 손봤으며, 레이첼은 립스틱을 덧칠했고, 지민은 거리를 쏘다니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지민은 유리판에 쓰인 층수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거스트 사무실에 이력서를 가지고 올라온 순간부터 긴장을 푼 적도 없긴 하지만. 이상한 말이야 하겠어. 아무렴 일하는 곳인데.
띵, 문이 열리고 등장한 윤기는 핏 좋은 생로랑 수트와 검은색 코트를 걸치고 서있었다. 선글라스로 가려진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전운이 감도는 사무실로 윤기가 느릿하게 한발자국씩 걸어 나왔다.
“며칠 자리 비웠다고 개판이 따로 없군. 치우라던 프로젝트는 왜 계속 붙들고 있는 거야? 못 들은 건가? 아 아니군. 들었는데 새로 또 가져온 게 그 지경이면 내가 처음부터 회사에 사람이 아니라 앵무새들을 고용했나보군. 오후에 잡혀있는 회의 1시간 앞당겨. 다들 내 얼굴이 그리워서 일을 그 지경으로 한 거 같으니까. 하고 싶은 따뜻한 말이 너무 많아서 목구멍이 벽난로보다 따뜻해.”
윤기는 지민이 내미는 커피를 받고 그대로 지나쳤다.
“회계보고서는 왜 아직까지 안올리는 거야? 누가 캠핑 가서 마시멜로 구워먹는데 쓰기라도 했나? 오늘 네 시까지 올리라고 해. 그리고 집에 걸어놓은 그림 싹 다 다른 걸로 사다 바꿔. 질려. 특히 꽃 그림 좀 그만 갖다 붙여놔. 집인지 잡초밭인지 구분이 안 가니까. 아 바꾸는 김에 침대까지 바꿔. 사이즈 더 큰 걸로. 넷이 뒹굴어도 넘치게. 의논할 게 있으니 레이첼 넌 따라 들어와.”
진이 윤기의 말을 빠르게 받아 적었다. 레이첼은 윤기의 스케줄을 다시 한 번 정리했으며, 지민은 날아올 윤기의 코트와 선글라스를 기다리며 손을 뻗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지시사항을 쏟아낸 윤기가 뒤를 돌아보는 짧은 찰나 지민은 선글라스에 가려진 윤기의 시선이 제게 향한다 생각했다. 옷은 이리주시면…. 그리 말하기 전이었다.
“으억!”
코트는 장외홈런으로 진을 향해 날아갔다. 지민은 모세가 바다를 가를 때 구경하던 물고기보다 더 눈을 커다랗게 벌렸다. 허둥지둥 외투를 낚아채는 진을 보고 윤기는 놓치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휴가 때 너무 집에만 있어 근육이 녹은 모양이군. 건강검진 한번 꼭 받아보지 그래.”
고개를 훽 돌려버린 윤기는 고고하게 집무실 안으로 쏙 사라져버렸다. 빨리 움직여. 그 한 마디만 남겨놓고. 레이첼은 가만 진을 지켜보다 고요한 눈빛으로 따라 들어갔다. 꼭 알만하다는 듯이.
“지, 지민 좀 도와줄래요?”
“…….”
“지민?”
“네, 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지민은 흘러내리는 지방시 코트를 잡아주었다. 옷걸이에 끼우다 계속해서 손이 미끄러지는 지민을 눈치 채지 못하고 진이 별일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림 그때 꽃으로 골라놨던 게 그렇게 싫으셨나. 지민 그림은 꼭 다양하게 골…지민, 내 말 듣고 있어요?”
“저, 전 빨리 갤러리로 가볼게요!”
지민이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로 사라졌다. 남겨진 진은 볼을 긁적거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다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리셉션은 많은 일거리를 남겨주었다. 얼굴을 스치며 구두로 잡은 사업상의 약속도 처리해야했으며, 아직도 젊은 회장의 능력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대주주들이 슈가 스튜디오에 우호적인 관심을 갖도록 신뢰감을 심어주는 연기를 적당히 떨어줄 필요가 있었다. 당분간은 욕심 많은 인간들과 입씨름을 벌이는 식사약속을 빙자한 토론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순서는 네가 알아서 짜. 어리버리한 놈부터.”
“오늘 당장 시작할까요?”
“어.”
“알겠습니다. 잡혀있던 인터뷰는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스케줄러에 표시한 레이첼은 턱을 괸 채 건성으로 런칭파티에 관한 기사를 넘겨보고 있는 윤기를 향해 입을 뗐다.
“지민의 인사이동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걔 왜.”
윤기가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성적으로 굴릴 수 있는 사업상 이야기를 대충 듣는 태도와는 달리 백만 개의 관심을 드러내는 태도를 보고 레이첼은 확신했다. 사람 인생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군. 그녀의 상사가 막내비서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는 건 파티에서 사고를 친 지민을 구해놓을 때 파악완료 했지만 다시 봐도 놀랍다. 어설픈 실수를 빈정거릴 땐 언제고 인사이동 한 마디에 못마땅한 표정이라니.
“처음 계약했을 때 기간은 슈가 스튜디오 관련 행사가 마무리 될 때까지였습니다만.”
지민은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면서 바빠진 레이첼과 진의 잡일을 떠맡는 역할이었다. 몇 달 동안 버틸 사람이 필요했고, 이력서를 들고 온 지민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약서에 대놓고 ‘일 끝나면 좋은 부서로 낙하산’이라 써놓을 순 없으니 계약서에 싸인을 하며 추가적으로 이야기했다. 리셉션이라는 최대의 난제가 떠난 지금 구두로 약속한 일이 마무리 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었다.
“슈가 스튜디오 관련 행사가 끝날 때까지라….”
윤기는 미묘하게 미간을 모으고 고민하듯 책상유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기간 바꿔.”
“어떻게 바꿀까요?”
“…스크린에 필름 걸 때까지로.”
“네.”
최소 몇 개월은 더 옆구리에 끼고 있겠다는 거다. 처음부터 행사를 제대로 명시해놓지 않았으니 지민도 의아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아예 아무 생각 없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앞에 앉은 남자의 세상에 이변이 온 것처럼 지민의 세상에도 적지 않은 지진이 치고 있을 터였다. 윤기는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간지를 넘겼다.
“이제 나가봐.”
스케줄을 모조리 취소하고 라스베가스로 단 둘이 날라버리는 막장 행동을 보일 때부터 얕은 건 아니겠거니 했는데, 오히려 레이첼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레이첼인 이 변화가 반갑지 않았다. 가령 라스베가스의 경치 좋은 호텔과 레스토랑을 예약했던 것처럼 일거리는 늘어나고, 윤기의 스케줄은 날뛸 확률이 높았다.
지민을 생각했을 때도 마이너스였다. 풀만 먹고 사는 토끼와 고기를 뜯어먹는 매는 같이 어울릴 수 없다. 매가 토끼를 위해 같이 풀을 뜯어먹어준다면 모를까. 어쨌거나 그녀는 처음부터 토끼에게 매는 위험하니 도망가라는 짧은 충고를 했다.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문제는 지민의 몫이었다. 엄연히 다정다감하고 순한 성정과 본인이 어떤 상황에 놓인 지 구분 못하는 멍청함은 다른 거고, 레이첼이 본 지민은 충분히 제 앞가림은 하는 사람이었다. 한달에도 그만 둔 사람이 한 트럭도 넘쳐나는 곳에서 몇 달 동안 버틴 게 이미 그 증거다.
“레이첼 회의준비는 어떻게 진행할까요?”
진이 나온 레이첼을 보고 말을 걸어왔다. 그건 내가 할 테니 진은 침대 알아봐줘요. 고개를 끄덕인 진이 아, 하고는 추가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혹시 출장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그건 왜요?”
“옷장 역할은 이제 졸업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진이 끄응 이마를 짚었다.
“너무 안심하고 있었어요. 다시 밉보이는 걸까요?”
“신경 쓰지 말고 일해요. 커피기계 노릇까지 하고 싶은 거 아니면.”
단순히 어떤 한 사람 한정으로 애정이 높아진 거뿐이다, 그런 말을 레이첼은 현명하게 목 안으로 삼켰다.
***
삶은 영화가 아니다. 흔한 헐리우드 B급 신데렐라 영화의 서사를 빼닮은 상황에 놓여있어도 전개마저 같을 수는 없다. 지민과 윤기의 사이는 드라마틱하게 무언가가 바뀌진 않았다. 다만 비정상적인 명령들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다. 예를 들면 콘돔 사다 나르기, 센트럴 파크에서 홀리한테 산책 당하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한정판 LP 구해오기 같은, 지민이 처음 듣고 사직서부터 갈기게 만들었던 일들. 좋은 변화다. 한 달 월급으로 생활비를 벌어먹고 사는 비서의 입장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결혼식 선물은 어떤 걸로 보낼까요?”
“와인이나 몇 개 던져줘.”
“네. 편지는요?”
“그 망나니라면 3년 안에 이혼할 텐데 굳이 편지까지 보낼 필요가 있나?”
국방부 장관 차남의 결혼식이다. 어거스트가 손수 앞장서 보안관련 사업을 하는 건 아니지만, 국방부 장관의 입김은 셌으므로 무시할 상대는 아니었다. 대충 알아서 써.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 윤기의 태도를 보면 어째 그도 틀린 말이다.
“다른 시킬 일은 없으신가요?”
윤기는 지민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라스베가스에서 따라 붙었던 눈빛이고 이제 저 눈빛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안다. 지민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큼, 다른 시키실 일 없으면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정말 신기하군.”
“네?”
“널 옆에 두고 어떻게 일만 했던 건지 신기해.”
이런 어이없는 멘트가 종종 등장했다. 어조만큼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어서 매번 들을 때마다 기습공격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당황하고 허겁지겁 도망가듯 나가던 것도 한 두 번이지 지민은 나름 대처법을 찾았다. 시선을 피하면서 대충 땅이나 하늘을 보면 된다. 그래도 계속해서 시선이 따라붙으면 말을 돌리면 된다.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지민은 꿋꿋이 한 번 더 말했다.
“시키실 일 없으면 저는 그럼 이만 마저 업무를 처리하러….”
“급하게 나갈 이유 있어?”
“…레이첼한테 번역본도 넘겨줘야하고….”
“그렇게 성실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내 옆에 있었다고 해.”
너 일 없냐? 지민은 그리 받아치고 싶은 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빙글빙글 돌려 표현했다. 아직도 둘만 남아있는 분위기가 꺼려지긴 했다.
“미스터 윤 일도 많으신데 방해되고 싶지 않고….”
“오, 걱정 마. 너 볼 시간은 있어.”
시간은 만들면 돼. 느물느물하게 덧붙이며 윤기는 지민이 사다 받친 커피를 들고 일어나 카우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맞은편을 눈짓했다.
“앉아있다 가.”
하라면 별 수 있나. 지민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윤기가 시키면 길거리의 가로등까지 뽑아 와야 하는 비서였다. 윤기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쉰 지민은 윤기의 맞은편 카우치에 자리 잡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한 마디 해야겠지 싶었다. 지민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첫마디를 뗐다.
“미스터 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요. 이제 이상한 명령은 그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상한 거? 내 기억으로는 너한테 바니걸 옷을 입고오라 했던 적은 없는 거 같은데.”
“…….”
“아아 그래. 농담 안 할게. 뭔데.”
뚱하니 변해가던 지민의 표정이 그제야 멈춘다.
“점심시간 늘려주신 거 같은 거요.”
“그게 뭐.”
“…저만 늘려주셨잖아요.”
어찌 보면 사소하다. 아침마다 대충 던지는 옷을 받는 건 진의 몫이 되었고, 점심시간은 30분으로 늘어났으며, 세탁물을 가져다놓는 건 다시 레이첼의 차지가 되었다. 일의 난이도가 높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들이라 지민도 처음엔 그러려니 넘겼다. 하지만 점점 하나둘 쌓여가다 보니 움찔움찔하게 되고 마는 거다. 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요즘 미스터 윤 뭔가 변한 거 같지 않아요? 하고 말했을 때는 왜 그런지 모르게 자신의 심장이 발 아래로 철썩 떨어졌다. 윤기는 흐음, 하며 고개를 모로 살짝 꺾었다. 그게 뭐가 문제 되냐는 표정이었다.
“왜? 더 늘려줘?”
“그게 아니라 진도 같이 있는데 저만 그러면 그건 너무 그렇잖아요. 꼭 편애하시는 거 같고….”
“맞는데? 편애. 뭘하든 네가 더 눈에 들어와.”
윤기는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태연하게 말했다. 잘 봤네. 지민은 윤기의 재능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어마어마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며 사람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어이가 증발한 지민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니, 윤기는 긍정적이지 않는 지민의 반응을 눈치 채고 물었다.
“그게 싫어?”
“보, 보통 사람들이 그걸 좋게 보지는 않으니까요. 아무래도 제가 민망한 것도 있지만 미스터 윤 소문도 더 안 좋게 날지도 모르고….”
윤기는 고요히 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픽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넘겼다. 나랑 너를 위해서 말이지.
“다른 사람시간까지 같이 늘려달란 말이야? 그건 곤란해. 내가 자선사업가는 아니라서.”
“그, 그럼 앞으로는 조금 주의를 해주시면 좋을 거 같은데….”
아직 윤기에게 무언가를 당당하게 요구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거 같다. 몇 달 비서 노릇했다고 몸에 배어버린 습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기는 진득하게 한숨을 한번 쉬었다. 너 참 어렵다는 듯.
“하아…까다롭기는.”
그쪽이 할 말은 아니거든요? 반박할 말을 찾으라면 한 시간짜리 뉴스를 채우고도 남지만 지민은 얌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윤기는 선심 쓰듯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참고는 해보지.”
“잘 생각하셨어요.”
“그런데 너, 좋아하는 게 있긴 해? 선물도 싫고, 이런 거도 싫으면. 네가 정확하게 말해봐.”
지민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딱히 싫어하는 건 없는데…. 윤기의 쏘아보는 눈빛이 거세진다. 무엇이든 본인이 원하는 답을 내놓으라는 뜻일 것이다. 눈의 요정같은 하얀 피부와 민트색 머리카락과 다르게 불을 뿜어내는 눈은 어서 양말주머니를 벌리라 협박하는 산타 같았다.
왜 이렇게 내가 강제선물을 받아야 하는 거지? 지민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왜 민윤기와 둘이서 이런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된 건지 아직도 머리 한 편으로는 납득이 안 되긴 했지만. 제일 좋은 답은 휴가와 보너스지만 부담스러운 선물은 물론이고, 또 이런 수상한 호의는 받고 싶지 않다. 적당한, 부담이 없는. 그런 형용사들 사이에서 고민하던 지민의 머릿속으로 빛나는 아이디어가 스쳐지나갔다.
“저 뷔 좋아해요.”
“뭐?”
“뷔요.”
윤기가 미간을 사뭇 찡그린다.
“설마 그거 내가 아는 사람?”
“어…잘 아실 걸요. 뷔는 아트스쿨때 봤던 사이라고 하던데요, 미스터 윤이랑.”
“1달러보다 가벼운 입이군. 대체 언제 본 거야, 둘이?”
“그때 밤에 옥상….”
못마땅하다는 듯 묻는 윤기에게 답하려던 지민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옥상으로 올라가기 전 상황이 떠오른 탓이었다. 어, 어쩌다 보게 됐어요. 얼버무려도 윤기는 크게 트집을 잡진 않았다. 대신 한층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뷔가 왜 좋은데?”
“제가 좋아하는 작품을 뷔가 연기했어요.”
“그게 전부?”
“연기도 잘하고…성격도 좋으시던데요?”
좋긴. 윤기는 팔짱을 끼고 빈정거렸다. 부정은 하지 않는다. 진짜 아는 사이긴 했나 보다. 신기하다 생각하며 지민이 이제쯤 나가봐도 되지 않을까 타이밍을 잴 무렵, 가만 고민하듯 입을 다물고 있던 윤기가 툭 뱉었다.
“그럼 너가 가서 현장 보고해.”
“네? 어떤…?”
“아스팔트 정글.”
지민은 머리에 입력된 정보를 나열했다. 뷔의 주연 영화. 뉴욕에서 촬영할 거야. 뷔는 분명 그리 말했다. 설마. 윤기는 무신경한 태도로 연속해서 축복을 선물해주었다.
“어차피 사람 붙일 생각이었으니까. 아침마다 감상문이랑 같이 특별한 점 있으면 보고해.”
“정말요!?”
“두 번 말하게 하지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입사시켜줬을 때보다 더 큰 대답이군.”
이제 나가봐. 함박미소를 뿌리며 나온 지민은 손마저 덜덜 떨렸다. 내가 뷔가 촬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아마 윤기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그대로 감사하다며 윤기를 업고 사무실을 미친 황소처럼 뛰어다녔을 거다. 이런 선물이라면 백만 번이라도 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