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minor swing - havana swing>
레스토랑은 단연 최고급이었다. 심장이 팝콘처럼 터져버릴 가격은 기본옵션으로 근사한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천장은 흡사 오페라 극장을 본 따 놓았고, 지민이 넋을 놨던 벨라지오 분수대를 필두로 프랑스의 에펠탑을 본 따온 타워가 야경으로 깔려있었다. 등받이 키가 높은 의자는 주변의 시선을 차단했다. 딱 그런 곳이었다. 당신들이 테이블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습니다. 레이첼 왜 하필 이런 곳에 예약해준 거예요. 혹시 아직도 제가 일 못해서 싫은 건가요. 눈 닿는 곳곳마다 연인이 가득한 레스토랑은 정말이지 하루에 한 번씩 청혼이 튀어나올 로맨틱한 분위기였다. 식사에 집중하던 윤기가 흘러가듯 말을 흘렸다.
“불만 쌓였던 거 말해. 괜찮다면 내일부터 적용해줄게.”
지민은 스테이크를 입으로 밀어 넣으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뭐라 해야 돼. 진짜로 이름도 웃긴 오너와 사원의 진실한 대화 따위를 한다고?
“없어?”
“어….”
“없으면 됐어.”
불만이라면 많았다. 계약서는 왜 쓴지도 모를 터무니없는 출근시간, 소화시킬 시간도 충분하지 않은 식사시간, 그나마도 다시 올라올 거 같은 말도 안 되는 심부름 거리. 그럼에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지민은 데이트라 이름 붙이기도 아까운 이 일정이 룸에서 벌어진 일로 탄생했다 확신하고 있었다. 카지노와 분수쇼는 어찌어찌 지났다 해도 레스토랑에선 필히 그 화제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끝난다고?
지민은 느리게 고기를 씹었다. 웃기게도 또다시 찝찝함과 원인 모를 아쉬움이 꾸물꾸물 올라왔다. 이대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면 가끔씩 짠해 보이는 민윤기를 발견할 때마다 무시할 수 있을까? 내가? 퍽이나. 이미 알아버렸는데 잘도 그러겠다. 잔을 기울이는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아뇨, 딱히.”
왜 진실하지 않으세요? 이런 우스꽝스러운 데이트는 왜 하신 거예요? 뭘 하시려는 거예요? 지민은 고기와 함께 질문을 질겅거리며 삼켜 넘겼다. 스스로 봐도 미친 거 같긴 했다. 이래서 신들이 인간을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기껏 소원을 들어줬더니 왜 진짜로 소원을 들어줬냐며 따진다.
“눈빛이 너무 뜨거운데? 이러다 녹아버리겠어. 할 말 있으면 해.”
“…제게 할 말 없으세요?”
“왜, 있을 거 같아?”
“그럼 제가 물어봐도 돼요?”
윤기가 고개를 까딱거린다. 여기서 한 마디만 더 뻗어나가면 태풍의 눈에서 벗어난다.
“어제 왜 그러셨어요?”
“뭘.”
“아시잖아요.”
쐈다. 저질렀다. 지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윤기는 아예 나이프를 내려놓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무덤덤한 얼굴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게 고민하는 듯 했다. 기다리는 1초가 1시간 같다. 테이블은 식기 부딪히는 소리 하나에도 쨍 깨져버릴 긴장감이 감돌았다. 윤기는 이내 하아,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무리 봐도 넌 겁이 없는 편이란 말이지.
“또 도망갈 줄 알고 가만 놔뒀는데 먼저 덤벼들 줄은 몰랐네.”
“…….”
“왜냐고 하면 할 말은 없어. 충동적이었거든. 그건 사과하지.”
신이시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과거로 시간을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안면근육이 요동쳤다. 애써 다잡으려 해도 커지는 눈을 막을 수가 없다. 난리가 난 지민의 얼굴을 본 윤기는 혀를 차며 이어 말했다. 거봐, 이래서 말 안 하려고 했어.
“아무리 봐도 내 손해군. 벌써 도망가고 싶은 표정이잖아, 너.”
지민은 하얗게 바래려는 머릿속을 다잡았다. 당사자 입에서 들은 거뿐이다.
“그, 그러면 오늘 일정까지 모두 충동적으로 취소했단 말이에요?”
“오 그렇게 들으니 엄청난 개망나니 같군.”
“…….”
“충동적인 건 아니고.”
윤기는 잔을 들어올렸다. 매끄럽게 목울대가 울린다. 윤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재듯 잔을 노려보다 내려놓았다.
“그냥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게 뭔데요?”
특유의 시선이 지민 쪽으로 쏠렸다. 가끔은 종종 마주쳤던 시선이다.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움찔하고 만다. 그럼에도 지민은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윤기는 눈만 움직여 다시금 뚫어버릴 듯한 시선을 보냈다.
“들을 자신 있어?”
지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유명한 영화의 반전을 기다릴 때보다 긴장됐다. 윤기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별 건 아니고.
“라스베가스에서 잭팟이 터질 확률.”
“…안 믿어요. 룰렛기계도 안 돌리셨잖아요.”
“안 웃겼어? 열심히 준비한 농담인데.”
지민은 방금 윤기와 평범한 대화를 했다는 사실도 놓쳤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는 뇌구조는 어떤 뇌구조야. 사람 맥이란 맥은 다 빠지게 만든 윤기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스테이크를 썰었다.
“다시 또 그럴 생각은 있는데.”
툭 지민의 손에서 나이프가 낙하했다.
“그때처럼 어설프게 시도했다 차이는 멍청한 짓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니까 걱정 마.”
“…….”
“어차피 좋은 관계가 되어보자며.”
“그, 렇게…말하긴 했죠….”
맞다. 좋은 관계가 되어보자고, 사적으로도 친해지고 싶다고 겁도 없는 소리를 헤까닥 돌아 내질렀다. 지민은 윤기가 쥐었다 피고 가지고 노는 상황에 빠져 멍하니 허우적거렸다. 고백? 고백인가? 윤기는 척 보기에도 갈림길에 빠졌다 주장하는 지민을 보고 한 마디 툭 던졌다. 고민해야 할 이유가 있어?
“원하면 같이 있는 시간마다 진짜 만 달러도 줄 수 있고.”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농담이라고 생각해? 네가 많이 사다 날라봐서 알 거 같은데.”
사실이다.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간 나른 선물들은 리스트만 뽑아도 억 소리가 절로 난다는 것도, 윤기가 그런 일회성 관계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도. 지민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마세요. 왜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을 유도하세요?”
순간적으로 확 대꾸했다 지민은 헉, 하고 윤기의 표정을 살폈다. 평범하다.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윤기와 제 사이에 그어놓은 선을 조금씩 넘나다녔다. 건방지다는 말이 등장하려면 한참 전에 등장했어야한다. 오늘은 괜찮은 거야. 지민은 쫄았던 가슴을 내려놓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윤기는 부랴부랴 시선을 피하며 안절부절 하는 지민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그, 그냥 돈으로 관계를 사는 건 좀 아니잖아요.”
“…….”
“오래가지도 못하고…저는 그런 거 말고 평범하면 좋겠어서….”
제한 시간 끝났나…. 지민이 쪼그라들 무렵이었다.
“다시 봤군. 눈치도 빠른 줄은 몰랐는데.”
“…네?”
“그럼 어떻게 하면 평범하게 시작하는데?”
윤기는 아예 팔짱을 끼고 질문했다. 꽤 경청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세였다.
“그, 글쎄요?”
“…장난해?”
“저도 마찬가지에요. 충동적으로 대답한 거예요. 매번 그렇게 혼자 외로워하시는 거 보기 힘드니까….”
이젠 모르겠다. 운명은 손을 떠났다. 지민은 윤기를 보며 혼자만 느끼고 있던 감상까지 내뱉었단 사실도 잊었다. 윤기는 다시 한 번 말없이 그의 비서를 바라보았다. 민망함에 죽어버릴 거 같은 지민이 사과를 건네야하나 고민하기 전까지. 그런데 진심인데 무슨 사과를 해. 지민은 대답 없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다른 화제를 엉거주춤 꺼냈다.
“…식사 다 하셨어요?”
“어.”
지민은 복잡한 심경으로 고기를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대회에서 열 번이 넘는 수상성적을 가지고 있다는 쉐프의 요리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음…미스터 윤.”
“왜.”
“내일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너랑 데이트.”
이제야 끝이구나 싶어 잔을 들었던 지민이 물을 뿜을 뻔했다. 켁켁거리며 가슴팍을 두드렸다. 윤기는 놀라는 지민의 꼴을 보더니 친히 냅킨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뒷말을 이었다.
“하고 싶지만 날 찾는 곳이 많아서 뉴욕행이야.”
지금 놀린 거죠, 하고 까만 눈동자가 원망을 담는다. 눈가가 벌게진 지민을 보고 윤기는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그렇게 놀랄 정도로 아쉬워?”
“아니거든요!”
“원하면 또 빼보고. 원래부터 개망나니라서 다들 그렇게 놀라지는 않을 거야.”
“…내일 몇 시 비행기로 준비할까요?”
“9시.”
지민은 오늘 룸을 두 개로 잡은 윤기의 선택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택으로 꼽았다. 룸까지 하나였다면 누가 뭐라 해도 그 자리에서 즉시 뉴욕행 티켓을 끊어 날아갔을 거다.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밤이 종료됐다.
***
태어나 뉴욕을 이렇게 그리워 해본 적은 처음이다. 매연 가득한 뉴욕의 공기마저 상쾌했다. 뉴욕을 거니는 모든 시민들에게 반가움의 포옹이라도 하고 다니고 싶었다. 지민은 집에 도달하자마자 감격에 차 몇 년을 초원에서 떠돈 유목민족의 심정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지민은 문득 어라, 했다. 뭔가 허전한데. 고개를 갸웃하며 볼을 긁적거리다 발에 걸리는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여행용 카메라. 세상에, 정국이.
미쳤다, 미쳤어.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지민은 곧장 폰을 확인했다. 불이 나게 오던 연락은 캘리포니아에 도착할 즈음 뚝 끊어져있었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결된 정국의 목소리는 의외로 평범했다. 어디까지나 당장 날아와서 지민을 옥상에서 던져버릴 정도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보세요.]
“…정국아.”
[누구세요?]
“아니, 그게….”
[초면인데 제 이름이랑 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제 번호 그쪽 폰에 저장되어 있었나 봐요?]
“…미안해.”
[아아 생각났다. 지민이 형, 맞다. 이 번호 지민이 형이지 참. 난 또 형 전화 용암에 녹은 줄 알았잖아요. 아님 형 거기 아직도 화산 안이에요? 캘리포니아에서 화산 구경중인 거죠? 요즘 시대 좋네. 화산 안에서도 전화가 터지고. 신기하다.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 봐요. 화석 발견할지도 모르잖아요.]
지민은 한참이나 정국의 화산 타령을 들었다. 다음 탄은 바다 시리즈였다. 화산 아니에요? 아 바다구나. 이번엔 그 싸이코가 심해에서 물고기라도 잡아오라 했던 거예요? 물속이라서 형이랑 연락이 안 됐던 거고. 하긴 아니면 그렇게 연락이 안 될 리가 없잖아요. 형이 내 연락을 고의적으로 씹을 의도는 없었을 텐데. 그쵸? 정국이 한결 더 차분해진 목소리로 웃음소리를 섞으며 말했다.
[제가 얼마나 형을 좋아하냐면요. 지금 전화 끊고 가서 스카이다이빙 시켜줄 수도 있어요. 줄 없이.]
“진짜 미안해, 진짜. 나 지금 갈게.”
[잠수함 안인데 뉴욕은 어떻게 오려구요.]
“오늘 뭐 먹고 싶어?”
[햄버거.]
“그래, 그러면 지난번 거기서 만….”
[피자.]
“햄버거 먹고 피자집 가자.”
[도넛이랑 감자튀김이랑 스파게티랑 스시.]
“…한번만 봐줘라. 어디로 갈까?”
정국은 퀸스 거리에 있는 이탈리아 요리 전문점 가게의 이름을 부르고 끊었다. 지민은 아침마다 맨해튼을 뛰어다니느라 쌓은 달리기 실력에 감사를 표했다. 입이 열 개라도 정국에게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잊고 있었다. 일 관련이 아니라 순전히 민윤기 때문에. 택시에서 내려 뛰어온 지민은 헉헉거리며 검은 머리의 잘생긴 동양인을 찾았다.
“헉, 정국아!”
“그래도 얼굴은 알아봐서 다행이네요. 난 형이 내 번호랑 같이 얼굴도 까먹은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형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사랑은 메뉴판 받을 때 얼마나 큰지 확인해볼게요.”
“가자, 배 많이 고프지? 다 시켜, 다.”
정국은 대단한 기세로 음식을 주문했다. 지은 죄가 가득한 지민은 그냥 가게를 사줄까, 하는 말로 옆에서 거들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정국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아깝지 않았다. 큰 눈을 깜빡거리던 정국은 한숨을 푹 내쉬고 뚱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대체 가서 뭘 하고 온 거예요?”
“리셉션이랑….”
차마 데이트라고는 곧 죽어도 못 말하겠다. 아니 데이트는 맞나. 도박장에서 돈 잃고 분수쇼는 혼자만 즐긴 것 같아 미안했으며, 밥은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먹었다. 지민은 얼버무리다보니 괜스레 목이 탔다. 그냥 이것저것 했어…. 정국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단숨에 복잡해지는 얼굴 꼴을 보자니 분명 어떤 사건이 있었다.
“회사 안 그만 둘 거예요? 뭐하러 그런 곳 다녀요. 하루 전날에 출장이나 가라고 하는 회사. 그리고 언제 형 꿈이 비서였어요? 아니잖아요.”
“…그렇긴 한데.”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데 어거스트 아니더라도 갈 수 있는 곳은 많아요.”
정국은 진지한 눈빛과 다르게 입으로는 피자를 와왕 입에 담았다. 그리고는 빨대로 콜라를 쪽쪽 빨며 코를 찡긋거렸다. 지민은 스파게티를 말다 말고 끄응거렸다. 순한 얼굴이 대신 대답했다. 사표는 무리야. 정국은 피자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더는 미룰 시간도 없고 기회도 없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다 망했다.
“사실 나 회사 차려요.”
“…엉?”
“사업한다고요. 한국 가려는 거 그거 때문이에요.”
“그래 축하…자, 잠깐. 입사가 아니라 사업이라고?”
“잘 들었네.”
화산과 바다이야기에 이어 부리는 심통은 아니다. 정국이 영리하다는 건 누구보다 지민이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지민은 정국이 뱃속에서부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워온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돈이 부족하다 싶으면 용돈의 개념으로 공모전에 나가 상금을 타왔고, 인턴으로 나간 대기업에서도 취업을 권유 받았다. 뛰어난 정국의 능력이라면 큰 인물이 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곧장 사업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의외였다. 왜냐하면 코딩천재 정국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괜찮겠어? 너…돈 관리 잘 못하잖아.”
그의 사업적 감각은 최악이었다. 상금으로 오천달러를 타오면 일주일 만에 모든 돈을 탕진했다. 대체 어떻게? 한낱 대학생이 학교 다니면서 써봐야 얼마나 쓴다고. 어제 하루 종일 먹지 못했다며 거지꼴로 집에 찾아온 정국을 위해 씨리얼을 말아주고 들은 답은 상상초월이었다. 제 2의 워렌 버핏이 될 수 있다 해서 주식으로 투자했는데 어제 보니까 기업이 사라졌어요. 조금도 남겨놓지 않고 모든 돈을 유령기업에 당당히 털어 넣었단다.
“뭐…그래서 말인데요, 형.”
“응?”
“입사할래요? 내 회사에.”
정국은 영 폼이 나지 않는 상황에 입맛을 쩝 다셨다. 나름 스카웃하는 건데 이렇게 말하니까 엄청 없어 보이네. 지민은 정국을 보다 겨우 한마디 뱉었다.
“…돈 필요해? 어떡하지 내가 많이는 못 빌려주는데.”
“아 아니거든요.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처음 미국 올 때부터 생각했던 거라고요.”
“아직 내가 정리가 좀 안돼 정국아.”
“알아요. 그래서 그때 자리 잡고 이야기하려고 한 건데 싸이코가 나타나서 다 망쳐버려 가지고.”
정국이 툴툴거렸다. 형은 결혼하는 거 아니냐는 헛소리나 하고. 지민은 처음으로 위화감을 느낀 레스토랑 상황이 다시금 떠오를 것 같아 훅 넘겼다.
“내가 입사한다는 건 무슨 소리야.”
“개발 쪽으로 와줬으면 좋겠어요. 나 혼자는 무리니까. 아직 구체적으로 계약서까지 작성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토대는 다 잡혔어요. 아는 형한테 계약이나 사무 쪽도 부탁했고. 그리고 충분히 예상하겠지만 월급은 어거스트보다 많이 못 줘요.”
“아니아니, 그러면 엄청 중요한 거 아냐? 나를 불러서 어떡하려고.”
“왜긴요. 형이 잘하니까죠. 내가 설마 단순히 친분에 기대서 사는 사람으로 보여요? 큰맘 먹고 차리는 건데 망하면 누구 좋으라고.”
정국은 피자 한 조각을 단숨에 입에 구겨 넣었다. 평소 스스로를 낮춰 평가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던 지민은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정국은 진지했다. 정국의 오랜 꿈을 알았다는 놀라움보다도 덜컥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중요한 건데 내가 망치면 어떻게 해. 정국은 긍정적이지 않는 반응을 보고 예상했다는 듯 손을 탁탁 털었다.
“거절해도 괜찮아요. 형한테 어려운 결정이라는 거 아니까.”
그래도 영업은 계속 할 거예요. 정국이 선전포고를 날렸다. 다시금 며칠은 굶은 것마냥 스파게티를 마시던 정국을 보고 지민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
“…자신이 없어.”
“왜요? 형 잘하는데.”
지민은 대답 없이 포크로 미트볼만 쿡쿡 쑤셨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확신이 없었다. 정국이한테 피해만 끼치면 어떡해. 최악으로는 정국이 자신을 싫어할 수도 있다. 지민은 웃으며 농담으로 넘겼다.
“어거스트 월급보다 많으면 생각해볼게.”
“친분에 기댄다는 말 그냥 취소할래요. 선후배 디씨 해주는 거 없어요?”
“근데 너 밥 못 먹었어?”
“심해어 채집하러 들어간 어떤 사람 연락 기다리느라고요.”
지민은 다시금 정국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우리 정국이, 어떤 걸로 포장해줄까? 원하는 거 다 해.
정국과 짧은 만남 후 집에 돌아온 지민은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죽은 듯 누워있다 한 바퀴 데굴 굴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3일 사이에 무슨 일들이 나한테 일어난 거지. 어마어마한 파티에도 참여하고, 캘리포니아를 찍고 라스베가스를 여행했다. 심지어는 좋아해 마지않는 연예인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기회도 가져보고, 친한 동생한테 이직 제의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꿈이 아니라니….”
지민은 순간적으로 자유의 여신상에 줄을 매달아 번지점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이건 미친 거다. 내가 미치거나 세상이 미친 게 확실해. 지민은 베개를 끌어와 얼굴을 덮었다. 가슴속이 뒤숭숭했다. 이미 윤기의 머릿속 나사가 하나 풀렸다고는 확신했다. 박지민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대기업 회장과 열애설이 터지는 건 같은 위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신데렐라 드림을 안고 음흉한 속셈을 가지고 접근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벌어먹고 살기위해 꾸역꾸역 비서로 취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에이씨.”
지민은 벌떡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인쇄를 실패한 영화감상문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더 깊숙한 안쪽에 하얀 봉투들이 몰려있었다. 사직서. 종이 하나를 들고 다시 침대로 돌아온 지민은 그 봉투가 윤기라도 되는 것처럼 사직서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자, 폭풍을 건너왔으니 차분하게 생각을 다듬는 시간을 갖자. 아직은 그럴 수 있는 단계다. 이제 하다하다 그딴 헛소리를 심부름이라고 지껄여요? 미친 거 아니에요? 아직도 생각만하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피폐했던 입사 초 매일 그린 꿈대로 봉투를 민윤기 얼굴에 던지면 된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윤기 이름만 나와도 이를 뿌득 갈며 커피 대신 전봇대를 뽑아 뒤통수를 치겠다 매일 밤 상상하던 시절에도 못한 거다. 게다가 지금은 민윤기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와 다르다. 하나둘 발견한 민윤기의 외로움을 눈치 채고, 과거의 자신이 생각 나 신경이 갔다. 도와주고 싶었다. 아마 이런 정의 못할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미래를 알더라도 도와줬을 것이다.
“버리자….”
쓸 일도 없는데. 지민은 사직서를 구겼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조금 친해진 회장과 비서의 관계. 거기인거야.
민윤기란 존재만 떠올리면 복잡해지지 않는 순간이 없다. 지민은 강제로 윤기 생각을 밀어내기 위해 폰을 꺼냈다. 어떻게 여행을 갔는데 사진이라고는 한 장밖에 못 찍었냐. 지민은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어이가 싹 달아났다. 분명 발 아니고 손으로 찍어줬는데.
“분수대 앞에서 찍은 건지 그냥 길거리에서 찍은 건지도 모르게 찍으면 어쩌라는 거야.”
너무 노골적으로 나만 찍었잖아. 기가 막힌 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때, 어느 대화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생각보다 훨씬 더 예쁘네요. 민윤기는 분명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며 답했다.
그러게. 생각보다 더.
예쁘네. 내뱉지도 않은 뒷말이 자연스럽게 민윤기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쾅 심장에 파문이 인다. 불투명한 목적어를 윤기의 시선이 알려줬던 것만 같다. 진정해. 그런 거 아니야. 과대망상 하는 거 아니야, 박지민. 사직서, 사직서를 끌어안고 자자. 얼굴이 순식간에 확 붉어진 지민은 구겨진 사직서를 펴 가슴팍에 고이 가져다댔다. 당연하게도 진정 효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