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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22

by 토페 posted Dec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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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Nikka Costa - Everybody got their something>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해 아무 곳이나 온 게 호텔 옥상수영장이었다. 밤하늘과 마주 닿은 유리수영장이나, 발 아래로 깔린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을 구경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지민은 심장이 퍼레이드의 드럼보다 웅장하게 쾅쾅거리는 단계를 지나, 영혼이 증발하는 단계를 겪고 있었다. 멍하니 썬베드 위에 웅크려 앉아 반짝이는 도시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뛰어내려볼까…아까부터 엄청 이상한 꿈을 계속 꾸고 있는 거 같은데….



“…진짜 너무 화가 나서 정신이 이상해진 거야….”



 그의 상사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맛이 간 게 확실했다. 숨이 섞이기 직전이었다. 느릿하게 달라붙는 눈동자며 숨결이며, 한층 깊어진 신체적 접촉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를 만큼 지민은 둔하지 않았다. 간신히 진정된 심장이 다시 또 팔딱거린다. 지민은 고개를 좌우로 격렬하게 휘둘렀다.



“아니야, 아니야.”



 내 머릿속이 썩은 거야. 말이 돼? 키스라니! 박치기로 기선제압을 하고 프로레슬링이라도 한판 뜨자는 거였을 지도 모른다고. 일단 윤기가 한 게 뭔지는 몰라도, 왜 그런 미친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원인은 총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민윤기의 의도,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



 난 왜 가만히 있었지? 박수도 두 손이 마주쳐야 가능하다. 방금 일어난 상황의 배우는 두 명이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 행동 어디에서도 위협은 찾을 수 없었다.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백이냐는 헛소리를 윤기가 처음 던졌을 때부터.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단호하게 직장 성희롱이라며 쳐내지 못할망정 왜 옴짝달싹도 못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지민은 다시금 머리를 쥐어뜯었다.


 거기서 만약 레이첼의 목소리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지민은 저도 모르게 침을 크게 꼴깍 삼켰다. 지금쯤…. 아 진짜 뛰어내려야겠다. 미쳤지. 민윤기가 알면 고소당했을 거야. 그 사람은 그냥 나를 때리고 싶었던 거라니까? 이대로 뇌가 끊어져서 그만 생각하고 싶다. 지민이 두 손으로 작은 얼굴을 세수하듯 포옥 가린 시점이었다.



“안녕.”

“으아악!”



 심장을 부여잡고 돌아본 곳엔 마찬가지로 샤워가운을 걸친 뷔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파파라치 컷에나 나올법한 가벼운 차림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편해보였다. 뷔는 놀라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진 지민의 몰골이 웃긴지 잠깐 킥킥거리더니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뭐 그렇게 놀라? 혹시 현상수배 걸렸어?”

“아하하 아니요, 갑자기 오셔서…놀라셨죠.”

“심심해서 올라왔는데 잘 됐다.”



 히죽 웃으며 뷔는 자연스럽게 지민의 옆 썬베드에 자리를 잡았다. 느른하게 기지개를 키고 누워 머리 뒤에 팔을 포갰다. 조용해서 좋다. 그치?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민은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시끄러울 거 같은데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무려 뷔가 옆에 앉아있는데도 복잡한 머릿속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신경 쓰이는 일 있어?”



 아직도 거기 있을까? 갔겠지? 가볼까? 아냐. 가다가 다시 마주치면 어떡해. 퍽이나 내가 무슨 용기가 있어서. 마주치고 비명이라도 안 지르면 다행이지. 빤히 점점 잿빛으로 질려가는 안색의 지민을 지켜보던 뷔가 가볍게 푹 찔렀다.



“민윤기?”

“네에!?”

“어? 못 만났어? 파티 끝나고 곧장 사라지던데.”

“모, 못 만났어요!”



 뷔는 꿰뚫어볼 듯 큰 눈을 깜빡거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은 펄쩍 뛰어오른 게 민망해 뒷목을 문지르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지금 제가 보스 생각을 왜! 하하 농담도 뷔는 멋있게 하시네요.”

“진짜? 보기보다 대담하네. 나 같으면 하루 종일 민윤기 생각하면서 당장 가서 무릎 꿇었을 텐데.”

“…….”

“하긴. 이미 지나간 버스는 어쩔 수 없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가 생각하는 게 중요한 거야. 추천서쯤 망해도 갈 곳은 있겠지! 추천서에 어거스트 대형 프로젝트 하나 말아먹을 뻔 했다는 거 적히는 거쯤이야! 걱정 마. 나도 한 번에 성공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사람은 그렇게 쉽게 추락하지 않거든.”



 뷔가 싱긋 웃었다. 꿈에서도 그리는 배우의 애매한 위로를 받고 지민은 어설프게 웃으며 아 네, 하고 마지못해 답했다. 그렇죠, 괜찮을 거예요.



“근데 꽤 친한가 봐.”

“친해요?”

“민윤기랑.”



 지민은 말문이 대뜸 턱 막혔다. 내가 원하면 우리가 어떻게 바뀌는지. 반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저음에 또 한 번 심장이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냥 그건 박치기였을 뿐이라니까. 뷔는 팝콘 터지듯 흔들리는 지민의 동공을 바라보고는 잠깐 눈을 가늘게 뜨다 히 웃었다.



“많이 친해?”



 지민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마냥 횡설수설했다.



“아, 아니요? 친하긴요.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신 분인데. 저는 아마 미스터 윤보다 북극에 있는 북극곰이랑 더 친할 거예요. 아니면 바다괴물이라거나.”

“둘이 진짜 재미있어.”



 비싼 오페라 티켓이라도 예매하듯 기대감이 꽉 차있는 얼굴이라, 지민은 어쩐지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왜 내가 더럭 찔리는 거야.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꿨다. 



“근데 두 분이 친하세요?”

“음…친구는 아닌데 친해.”

“…이해가 안가요.”

“나 아트스쿨 다닐 때 처음 만났어. 벌써 몇 년 전이지?”



 아무튼 볼 만큼은 봤어. 뷔는 계산하기 귀찮다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뷔의 데뷔초 인터뷰까지 기억하는 지민은 뷔의 학력을 떠올렸다. 캘링턴 아트 스쿨. 살인적인 학비를 자랑하는 사립명문학교다. 뷔를 비롯해 수많은 헐리우드 스타와 방송사 간판 앵커, 스타감독을 배출해낸 명실상부 최고의 학교다. 그런 학교가 천상 타고난 사업가 소리 듣는 민윤기와 무슨 관련이 있어서?



“사실 지금도 신기해. 민윤기랑 만난 거. 내가 친해지고 싶은 건 엘리 하트만이었거든.”



 의외의 이름이었다. 지민은 윤기의 침실 액자에서 본 금발소녀를 기억해냈다. 윤기를 입양한 어거스트 전회장의 하나뿐인 외동딸. 지민이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뷔가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시켰다. 으 여기서 안 나가고 싶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늘어놓으며 오래 알아온 동갑내기 친구 대하듯 편한 자세로 중얼거렸다.



“다음 주부터 촬영 시작이야. 연기는 좋은데 대본 외우는 건 너무 귀찮아.”

“설마…아스팔트 정글이요?”

“맞아. 뉴욕으로 가. 주 촬영지가 거기거든.”



 좋아하는 배우가 스케줄을 알려준다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민은 윤기에 밀려있던 팬심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뉴욕이요? 그쪽에서 하시면 길에서도 볼 수 있는 거예요? 시들시들 죽어가던 게 언제냐는 듯 밝아진 지민을 보고 뷔는 쉽게 긍정을 표했다. 왜 보기만 해?



“구경 와도 돼. 싸인 옷에다 해줄까?”

“아! 맞아, 아 어떡하죠. 가운이 호텔 꺼라서.”

“그럼 사진 찍자.”



 뷔는 별 문제 없다는 듯 지민의 썬베드로 건너와 허리를 숙였다. 네, 네? 지금요? 지민이 어리벙벙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이 뷔는 씨익 웃으며 사진을 한방 찍었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흑백으로 나왔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는 사진을 보내준다며 지민의 번호까지 순식간에 입력 받아 저장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번호 갈취를 당한 지민은 폰을 해맑게 흔드는 뷔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지민이 존경해 마지않는 학생회장 칸 데이슨은 자유분방하기가 바람보다 더한 유치원친구로 변해있었다.



“혹시라도 민윤기한테 잘리면 내가 채용해줄게!”

“…매니저로요?”

“운전 잘해?”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로는 잘 몰 수 있어요.”

“그럼 내가 68살 되면 부를 테니까 취직하러 와.”

“저도 그럼 68살인데요?”

“그래? 같이 천국 가겠네. 민윤기도 같이 태워가자.”



 뷔는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웃었다.



“난 이제 내려갈 건데, 넌 언제 가?”



 그러게요. 지민은 그대로 남겨진 자신의 방을 상상했다. 아직도 그곳에 윤기가 있을까. 그의 성격을 볼 때 머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다시 가는 것보단 차라리 노숙이 편할 거란 생각이 물씬 떠올랐다.



“저는…야경 조금 더 보려구요.”

“좋은 생각이야.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줄 아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뉴욕에서 보자!”


그나마 말을 걸어주던 뷔가 사라지자, 생각은 다시 쳇바퀴를 탔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서서히 날씨마저 추워지는 거 같다.


수없는 갈등을 겪고서야 지민은 조심스럽게 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본인에게 배정된 룸 손잡이를 따는 손이 맹수 우리를 처음 접한 사육사와 닮았다. 역시나 방은 텅 비어있었다. 그래 민윤기가 계속 있었을 리 없지. 텅 빈 방 창문으로 옅은 푸른 보랏빛 새벽동이 터오는 게 보인다. 지민은 관에 들어가듯 침대에 쓰러져 간신히 눈을 감았다. 저쪽 벽에서 민윤기가…. 자기는 글렀다.







***









 뛰어난 사업가란 무릇 천 가지의 위기대처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윤기는 감히 위협을 가한 경쟁사를 어떻게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지 고민하는 대신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다. 예외적인 일이었다. 평소라면 순식간에 열 가지의 엿 먹일 방법을 추리고, 예를 들어 경쟁사의 개봉예정인 영화 속 배우의 가십거리를 퍼뜨린다던지, 경쟁사 대주주 한 명과 식사 약속을 잡으라 곧장 레이첼에게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습게도 자신의 방에서 푹 쉬란 말을 남겨놓고 쌩하니 사라져버린 방의 주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호텔 지배인이 신경쇠약이 걸리도록 준비한 스위트룸, 창문 밖으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의 황홀한 야경은 안중에도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비서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언가가 윤기의 안에서 삐걱삐걱거렸다. 완벽하게 그려놓은 설계도에 미세한 빗금이 간다는 거다. 사실 로엔의 꼬장은 커다란 위협이 아니었다. 화려한 파티에는 온갖 손님이 오기 마련이고, 어린 나이에 취임해 별별 일을 다 겪은 경험치를 가진 윤기에게 작은 헤프닝은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한 판이었다. 파티에서 순진하게 낚여 발끈하는 박지민을 봤을 때 몇 가지 감상을 나열할 수 있을 만큼 여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얼굴도 할 줄 알아? 말랑말랑하게 생긴 얼굴로 진지하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그리고 제법 기특했다. 갑작스레 휴가도 취소당하고, 감당 못할 일을 들이부었는데도 저를 위해 나서준다는 게 퍽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마지막엔 당황하여 얼굴도 못 들고 사라지는 게 마음에 미묘하게 걸렸다. 때문에 잔상처럼 맴도는 얼굴을 잊지 못하고 손수 발걸음을 옮기기까지 했다. 문을 열고 풀 죽은 얼굴이 나왔다가 저를 발견하고 커지는 광경이란. 평소처럼 심술을 부리고 적당히 빈정거리고 넘어가면 됐을 텐데, 그 우울하게 처진 눈꼬리가, 완전히 풀 죽은 얼굴색이 보기 싫어 계획을 틀었다. 그래, 기특하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그랬더니 예상도 못한 상황이 튀어나왔다. 앞으로 노력할게요. 미스터 윤이 원하면 더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요. 그 똑 부러지고 애정 어린 포부가 윤기를 흔들었다. 하얗고 주인을 닮아 말랑한 손은 당당했고, 제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껏해야 감사하다는 말이 끝일 줄 알았던 윤기로서는 난데없는 폭격을 맞은 격이었다. 눈치 따위 보지 않고 동등한 상태에서 직접 맞부딪힌 박지민의 선의는 생각보다 대단해서, 윤기의 행동에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버렸다. 다시금 떠올려도 어이없었다. 기도 안 찬다. 박지민 사람 뒤통수 때리는 법은 어떻게 알아서.



“…….”



 윤기는 눈을 감았다. 홀린 듯 멈춰있다, 결국엔 어찌할 바를 모르던 박지민을 두고 하마터면 그대로 일을 치를 뻔 했다. 사춘기를 겪는 질풍노도의 십대도 그런 뜬금없는 입맞춤은 안할 것이다. 다시금 머릿속에 영상을 되감아도 우스워서 헛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더욱 황당한 건 다시금 그 상황으로 돌아가도 똑같은 짓을 반복할 제 자신이었다. 그때의 박지민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 말을 하고, 그런 눈빛을 하고 손을 내미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윤기는 이미 모든 기대를 접고 있었다. 또 다시 누군가와 인생을 나누고, 감정을 나누는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 더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돌고 돌아 어거스트라는 고독한 높은 탑에 앉은 순간부터, 이제는 기대를 귀찮음이란 단어로 바꿔 부러 외면했다. 그게 편했다. 또 기대를 하고, 버려지고, 누군가 빠져나간 자리에 홀로 남아 숨 막히는 외로움을 뜯어먹는 건 지긋지긋했다. 수차례 실망을 반복한 윤기에게 삶이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었다.


 그게 뭐 대단하다고. 무슨 일이 있으면 지켜줄 테니 자신을 믿으라는 허무맹랑한 발언 같은 게, 제 욕도 아니건만 불쾌해 대신 화를 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 겁도 없이 말하는 게. 그런 우습지도 않은 말 몇 마디에 꾹 닫아놓았던 무언가가 윤기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자제력이 일순간 끊겨본 뒤에야 윤기는 솔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웃기게도 그런 따뜻하고 순진한 관심이 좋다. 심지어는 자꾸만 독차지하고 싶어져, 다른 누군가에게 뺏긴다 생각하면 유치하게 얼토당토 않는 심술까지 부리게 만든다.


 원래대로라면 리셉션이 끝나고 박지민의 부서를 옮겨줄 계획이었다. 그건 박지민을 향한 관심이라는 변수가 생겼어도 변함없는 사항이었다. 어차피 가끔 박지민을 통해 느낀 미묘한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흩어질 수준이었고, 지금까지는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정도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은? 버젓이 눈앞에 놓인 증명된 상황에 윤기는 스스로 맺은 결론을 철회했다. 통제는 무슨. 아슬아슬한 게 곧 끊어질 상태다.


 그럼 이제 어쩔까. 단 한순간의 실수로 덮을지, 모른 척 박지민이 내밀었던 손을 잡을지. 보랏빛의 푸른 새벽녘이 윤기의 반듯한 이마 위로 쏟아졌다.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








“밤에 좀비한테 물렸어요?”

“그냥 좀…잠을 설쳤더니…그렇게 심각해요, 레이첼?”

“백신 안 찾아봐준다고 나는 물지 말아줘요.”



 지민은 더듬더듬 볼을 매만졌다. 하루 만에 십 키로는 빠진 안색이라 추측한 지민은 다크서클을 꾹꾹 눌렀다. 아마 30분쯤 잤나. 하다하다 제 머릿속까지 먹어 치운 민윤기를 쫓아내려다 결국 실패했다. 간밤 윤기를 어떻게 볼까 조식까지 거르며 고민하던 지민은 남다른 결심을 했다. 될 대로 되라지.


 어떡하겠어.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순간이동 초능력을 부려 뉴욕으로 곧장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침이 못 오도록 시간을 얼릴 수도 없다.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민윤기라고 해도 이렇게 대낮에 일을 치진 않겠지. 심지어 이곳엔 레이첼을 비롯해 윤기의 편안한 비행을 꾸려줄 사람들이 몇 명이나 더 있다. 사람이라면 지난밤과 같은 상황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지민은 최소한 윤기가 무덤을 열고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제 몰골을 보고 측은한 마음을 가지기라도 바랐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뒤는 나름 간단했다. 고귀한 회장님 일정을 뒤에서 죽은 듯이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레이첼 옆에서 평소처럼만 행동하는 거야. 눈에 튀는 실수만 안하면 괜찮을 거야.


 지민과 레이첼이 기상상태와 짐을 점검하고 스케줄을 정리하길 한참, 경호 무리를 줄줄 매단 인물이 걸어왔다. 지민은 양손을 모으고 힘을 꽉 쥐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신의 뜻대로 맡긴다지만 긴장이 됐다. 비서라는 이름으로 윤기의 곁에 머물며 처음으로 빌었다. 평소처럼 사람 취급도 안하고 무시하면서 왔으면. 윤기의 민트색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에 유독 더 하얗게 빛났다. 캐주얼한 수트를 걸친 외견만은 다른 날과 비교할 바 없이 세련됐다.



“준비는?”

“모두 완료했습니다.”

“어제 파티에서 문제 일으킨 직원한테 손해배상 청구하고 그 로엔 늙은이한테는 편지 하나 보내. 내용은 앞으로도 걸리적거리면 무덤에 정성껏 묻어줄 거라는 착한 협박 메시지가 좋겠어. 선물도 대충 아무거나 하나 끼워서 보내고.”



 윤기는 지민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그대로 지민을 지나쳐 곧장 전용기로 올라가는 발판에 발을 디뎠다. 네, 알겠습니다. 레이첼이 뒤따르며 믿음직한 대답을 남기고 그 뒤를 지민이 따랐다.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윤기의 모습 그대로라 지민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진짜 지민의 바람대로 윤기가 단기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지민은 레이첼이 읊는 스케줄을 듣는 윤기를 훔쳐보았다. 다른 사람인가….


 역시 단순한 변덕이었던 거다. 기대한 최고의 시나리오다. 지민은 굴곡 없는 자신의 인생그래프를 지켜냈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맥이 빠지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제멋대로인 인간. 사람 괴롭히는 방법 한번 다양하게 가지고 있네. 그래도 잘리는 것보단 싸게 먹힌 건가. 윤기를 작게 원망하며 지민이 긴장을 느슨하게 풀었을 즈음이었다.



“어거스트 일렉트릭 쪽에서 직원을 보내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착륙한 뒤 어거스트 일렉트릭 쪽에서 제공된 차를 타고 움직이시면 됩니다. 그리고 슈가 스튜디오에서 또한….”

“레이첼.”

“네.”

“다 취소해.”



 윤기가 폭탄을 던졌다. 뒤에서 지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레이첼은 사뭇 당황한 얼굴이었다. 슈가 스튜디오까지 말씀이신가요? 어. 단호하게 답한 윤기는 모든 일정을 뒤집어놓고도 태연했다. 그리고는 뒤쪽을, 정확히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리와.”



 지민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윤기가 바라본 시선 쪽엔 혼자뿐이었다. 천천히 굼뜨게 움직이자 윤기의 미간이 찡그려지고, 그를 본 레이첼의 무언의 눈빛으로 레이저를 발사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다가온 지민은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듯 레이첼의 옆에 딱 붙어 섰다. 윤기는 의미 모를 눈빛으로 평상시와 다름없는 어조로 계획을 뒤바꾸어놓았다.



“라스베가스로 바꿔.”

“라스베가스로…말씀이십니까?”

“어. 벨라지오 분수쇼랑, 호텔은 알아서 예약해. 특히 레스토랑이 유명한 곳으로 해. 룸은 두 개. 디즈니랜드랑 그랜드 캐니언까지 이틀 내로 가능한가?”



 저거 많이 익숙한 계획인데. 위화감을 느낀 지민은 윤기가 줄줄 나열하는 계획을 들을 때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레이첼은 순식간에 자료를 찾더니, 완벽한 시간대와 일정을 계산해 윤기에게 받쳤다. 그랜드 캐니언과 디즈니랜드는 이틀내로 불가능하고, 대신 이쪽 지역을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지민은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불안감을 밀어냈다. 라스베가스의 유명한 여행지를 나열한 거뿐이야. 게다가 지금은 둘이 아니잖아. 레이첼도 있고, 또 그리고.



“그리고 레이첼 네가 대신 오늘 스케줄 가. 간 다음 보고서 만들어서 제출하고. 그리고 넌.”



 지민은 그 순간 한계치에 닿은 심장이 펑 터져버리는 효과를 체감했다. 윤기가 지민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한 치의 사심도 없는 듯한 평소의 무심한 어조로.



“나랑 가.”

“…….”

“이를테면, 그래. 오너와 사원과의 진실한 대화라고하면 되겠군. 그거 할 거야.”



 얼음동상마냥 굳은 지민은 꼭 한 가지 생각만 떠올렸다. 아어제 옥상에서 떨어져볼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