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Waldeck - Memories>
윤기는 방의 주인마냥 자연스레 앞장섰다. 지민은 다소 현실성 없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윤기의 뒤를 쫄쫄 따랐다. 이게 진짜인가…내 앞에 있는 게 진짜 민윤기 등인건가. 아니면 지금이 리셉션이 열리기 전날 꿈인가. 방의 주인이 어버버거리는 사이 윤기는 지민이 앉아있던 쇼파를 차지했다. 삐딱하게 고개를 꺾어 서있는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생각?”
“…네?”
“내가 너를 뽑은 이유 중 하나는 눈높이가 비슷하다는 점인데.”
지민은 급히 윤기의 맞은편에 앉아 어느새 양손을 꽉 모아 쥐었다. 이제 만족스럽군. 윤기가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우울 바이러스에 잠겼다 돌아온 정신은 곧장 더 바쁜 곳으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말도 안 돼. 이렇게 통보도 없이 제 발로 먼저 지민을 찾은 적은 처음이었다. 윤기가 지민을 부르는 방식은 몹시 단순했다. 전화 한 통으로 심부름거리를 던져준다거나, 오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면서 보고서를 제출하란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사무실 안 쪽으로 사라져버린다거나. 대체로 아주 간단한 방식의 공통점은 윤기가 지민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방금 씻은 건가?”
“아 이거…갈아입고 올까요?”
“됐어.”
윤기는 그 짧은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침묵만이 이어진다. 지민은 샤워가운의 끈을 꼼지락거렸다. 대체 어떤 무서운 소리를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성공적으로 끝내야 할 리셉션에 흠집을 낸 오너와 직원으로서 할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하나로 추측이 가능했다. 해고겠지? 해고야, 해고밖에 없어. 해고뿐이야. 모든 답은 해고라고. 남은 건 어떤 방식으로 해고 통보를 받느냐하는 문제일 뿐이다.
이미 지민은 직장의 유지여부에 관해서는 체념했다. 다만 사과하고 싶었다. 착하디착해 남에게 조금의 피해도 용납할 수 없단 강박관념이 어김없이 발동했다. 몇 개월이나 준비한 행사에 피해를 입혀서, 대신 맡은 일을 이렇게밖에 진행하지 못해서, 다시 그 상황에 처해진다면 또 참지 못할 거 같아서. 그간 수도 없이 내뱉어 지루하게 느껴질 죄송하다는 인사를 마지막에도 한다는 사실조차 미안함의 대상이 되었다. 지민은 윤기가 먼저 해고통보를 내리기 직전 우물우물 입술을 열었다.
“…죄송해요….”
“뭐가.”
“제가 손님께 올바른 언행을 사용하지 못하고…열심히 노력했는데 참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윤기는 가만히 시선을 던졌다. 지민은 괜히 그 시선에 고개가 더 숙여졌다.
“짐은 지금 싸서 가면 될 까요…?”
결국엔 정수리에 윤기의 시선이 박힌다. 지민은 모든 게 끝이라 생각했다. 윤기가 흐음, 하고 눈을 좁히더니 짧게 명령했다. 고개 들어.
“혹시 나 몰래 파티 때 약이라도 하고 갔던 거야?”
“네…?”
“아까 그 용기는 어디 간 거야? 곧 있으면 가루처럼 사라지겠는데? 멀리서 볼 땐 당장이라도 그 늙은이를 한 대 칠 기세더니.”
윤기가 픽 웃었다. 지민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평소에도 잘 보여주지 않던 웃는 표정을 보여준다. 입꼬리 끝을 잡아당겨 가볍게 웃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제법 다정하게 풀렸다. 그리고는 상상이라도 떠올리는 듯 한쪽 눈을 미약하게 찡그리며 덧붙인다. 주먹으로 쳤으면 그 늙은이는 지금쯤 관짝 안에 들어갔을 텐데. 아쉬워라. 윤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약간은 장난스럽고도 실망감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아 반응 없네. 재미없게. 같이 그 늙은이 욕이라도 하자고 왔더니.”
미스터 윤, 혹시 제가 너무 화나게 만들어서 약을 하신 건가요? 지민은 불쑥 차오르는 질문을 참아냈다. 윤기는 한가롭게 흥미를 논하며 입맛을 다셨다. 경멸이나 분노는 그에게서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혹스럽다. 가벼운 농담을 날리는 윤기는 외계종족처럼 낯설었다. 아니라면 우주선에 납치된 윤기가 외계인으로부터 뇌를 개조 당했다는 가설이 좀 더 설득력 있었다. 결국 앞에 앉은 사람이 실제 민윤기인가 아닌가로 나뉜 의심은 윤기의 화가 허용범위를 넘어서서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쪽으로까지 발전하다 간신히 종료됐다.
“앵무새같은 그 죄송하다는 소리는 저리 좀 치워두고. 너 안 억울해?”
급작스럽게 해동된 분위기는 지민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분명 너 때문에 일을 다 망친 거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널 뽑는 게 아니었다, 남의 사업은 개판으로 말아먹고 멀쩡하게 눈 뜨고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런 종류의 말이 머리 위로 쏟아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솟구치는 질문을 그대로 내뱉었다.
“혹시 화 안 나셨어요?”
윤기는 평온하고도 무심한 평소의 어투 그대로 되물었다.
“화나 보여?”
“…아니요.”
“그럼 안 난거겠지.”
지민은 조심조심 알에서 나온 새끼오리가 처음 물에 들어갈 때처럼 윤기의 눈치를 살폈다. 윤기를 감싼 분위기는 평소와 같으면서도 조금 달랐다. 쉽게 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대단한 아우라는 그대로인데, 묘하게 유순해보였다. 물론 그 기준이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절함까지는 절대 아니지만. 그저 죄송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을 꺼내도 까칠하게 굴거나 빈정거리지 않을 것같았다.
“그러니까 진짜, 진짜로 화 안 나신 거예요?”
“왜. 내주길 원해?”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내가 그런 성격파탄자로 보여?”
지민은 고개를 힘차게 휘휘 저었다. 물론 입사 초에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긴 했다만. 이번엔 윤기가 물었다.
“그럼 나도 묻지. 넌 왜 그 늙은이한테 화가 났는데.”
“그건 그 분이…!”
지민은 가까스로 목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욕을 참았다. 차마 당신을 이런이런 종류로 험담했습니다, 하며 상세히 말하지 못하겠다.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주먹이 꽉 쥐어지는 말인데, 하물며 당사자에게 하면 어마어마한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 늙은이가 뭐. 윤기가 끊긴 말을 이으란 압박을 넣었다. 지민은 에둘러 빙글빙글 말을 돌렸다.
“그게 그러니까 그분이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막 하시고…그냥, 그냥 말투가 그냥 좀 별로였어요. 그, 그리고 사실 좀 제가 과하게 흥분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어서 예민하게 반응….”
“내 욕해서?”
“…네.”
어쩐지 무안해진 지민은 뒷목을 매만졌다. 좀 넘어가 주지. 윤기가 피하는 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돌아갔다. 정말이지 윤기의 말대로 그 노인에 대한 욕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윤기는 민망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는 지민을 빤히 바라보더니 또 물었다.
“내 욕인데 왜 네가 화가 나.”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요. 막힘없이 대답하려던 지민은 윤기와 눈을 마주친 순간 뒷말을 흐렸다. 아마 리셉션의 그 순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던 게 액자였던 탓이다. 그걸 어떻게 솔직하게 말해. 지난번 심부름 시켜주셨을 때 제가 액자를 실수로 훔쳐봤거든요. 그래서 그게 당신한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아버렸는데 그 사람이 그거에 관해 욕했어요. 그런 말들을 포장해 평범한 애사심이라고 뻔뻔하게 말하기엔 애석하게도 지민의 면역력이 부족했다.
“…제 보스니까요.”
뭔가 아부하는 거 같나. 윤기는 다시 한 번 풍선 바람 빠지는 웃음을 낮게 흘렸다.
“오 대단하군. 내가 그렇게 존경받는 대상이었어? 이거 기특하네. 월급이라도 올려줘야 하나?”
“그런 거 기대하고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 그냥, 그냥 진짜 미스터 윤이니까…제가 아는 사람이니까….”
어물어물 표현하고 싶은 무언가를 지민이 열심히 말했다. 이건 설명하기 애매하다. 말하다보니 굳이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어이없었다. 딱히 이유를 찾아가면서 남이 아는 사람을 욕할 때 화를 내야하는 건 아니잖아. 깔끔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랬다. 그냥. 민윤기가 욕먹는 게 유쾌하지 않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불쾌했어요, 제 기분이.”
“아 널 위해서 화를 냈다는 거군.”
“네? 그건…아, 아마도요?”
지민은 이상하게 끝난 결론에 머뭇거렸다. 그렇다고 하기엔 좀. 그러나 더 이상 좋은 결론을 찾기도 힘들다. 대화가 어쩌다 이렇게 흘러갔는가, 고민하는데 얼굴이 쿡쿡 찔린다. 가끔씩 자신을 민망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는 윤기의 시선이었다. 또 내가 뭐 했나. 지민은 아직도 윤기로부터 이런 시선을 받을 때 어떤 방법으로 대처해야하는지 잘 몰랐다. 그저 얌전히 있어야겠다 생각할 뿐이었다. 최근 이 시선을 언제 받았더라. 아마 퇴근준비를 하며 정국과 여행계획을 상의하다 웃긴 대화가 오고 갔을 때였다. 소리 안 나게 샐샐 웃고 있을 때 옆얼굴을 태울 듯 바라봐오는 시선에 급히 전화를 끊었다.
“내일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거 한 시간 뒤로 미뤄. 아침에 어거스트 일렉트릭 잠깐 들렸다가 슈가 스튜디오로 갈 거야. 점심 약속 잡은 건 취소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끊은 윤기가 대번에 몸을 일으켰다.
“가시게요?”
“그럼 여기서 너랑 밤새 카드놀이라도 할까?”
“…….”
“아 그리고 아까 그거.”
미련 없이 방 밖으로 걸어가던 윤기가 지민을 돌아보았다.
“네가 할 말은 휴가신청이 아니라 내일 내 비행기를 제 시간에 맞춰 띄워놓겠다는 거밖에 없어.”
“저는 휴가신청을 한 기억이….”
“짐 싸서 간다며. 뉴욕으로.”
“아.”
“뭐 잘리는 게 꿈이라면 지금 말해. 들어주지.”
지민은 볼이라도 꼬집어 이 상황이 환상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할 거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윤기가 방에 들어온 이후로 모든 게 예상을 어긋났다. 몇 마디 일과 관련된 명령은 대부분 전화로 일방적인 통보를 하는 게 평소 윤기의 패턴이었다. 궁극적으로 방에 들어와 한 것이라곤 대화, 그것도 퇴사명령이 아닌 평범한 대화가 전부다.
지민은 설마, 했다. 방에 온 목적이 꼭, 그러니까 꼭, 제 상태가 괜찮나 확인하러 온 듯했다.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지민은 약 3초 만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사고나 친 고작 일개 비서인 자신이 윤기한테 어떤 큰 힘을 발휘한다고. 그럼에도 지민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등을 보고 머뭇거렸다. 오늘 자신을 구해주었고, 심지어 친히 방으로 찾아와 실수까지 덮어주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이상한 날인 거 같다. 윤기나 자신이나.
“미, 미스터 윤!”
어디서 난 용기인지 충동적으로 외쳐버렸다. 돌아보는 딱딱한 눈과 마주친 순간 작은 후회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과 같지만 눈빛만 마주해도 무슨 끔찍한 심부름을 시키려나, 날 쏘아 죽이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 하던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지민은 꿋꿋이 용기를 냈다.
“오늘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사라지지 못한 소심함은 윤기의 반응을 체크했다. 아무런 표정 없이 가만히 듣고 서있는 윤기를 보면서 지민은 윤기의 앞까지 겁도 없이 졸졸 다가왔다.
“사실…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제까지는 아무래도 생계를 유지하려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다닌다는 느낌이 컸어요. 어차피 조금만 버티고 나간다는 생각으로 다녔는데, 그랬는데, 오늘부로 느낀 게 많아요.”
제법 건방진 소리도 윤기는 끊지 않고 들었다.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을 보면서도 지민은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는 이 일을 좋아하고, 열심히 하고 싶어요.”
“…….”
“앞으로 노력할게요.”
“…….”
“훨씬 더 노력하고 잘해서 아까 말씀드린 거처럼 믿고 맡기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할게요.”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부드럽게 말하는 지민이 윤기 앞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적은 처음이었다. 거짓이 아니다. 업무강도도 높으며 출퇴근 시간도 제 멋대로 정해지고, 꼬일 대로 꼬인 괴팍한 성격의 상사라 칭찬다운 칭찬도 못 받지만, 그래. 막상 이 일을 그만두고 떠나야 한다 생각하니 드는 건 또 어느 직장을 구한다는 걱정이 아니라 아쉬움과 슬픔이었다. 여전히 얌전한 대화대상을 보며 지민은 깊숙이 저 밑에 숨겼던 진심까지도 꺼내왔다.
“미스터 윤과도 잘 지내고 싶어요.”
“…….”
“일하다 힘들면 고민도 같이 의논하고, 아 일 말고 다른 거도 좋아요. 말이 좀 이상한데, 이건 제가 맞먹겠다는 말이 아니고요. 이걸 뭐라고 하지.”
“…….”
“음…미스터 윤이 원하면 더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요.”
신데렐라 요정의 마법처럼 그때만큼은 윤기가 어렵지 않았다. 방금 화려한 리셉션에서 플래쉬를 맞으며 가면을 쓰고 환히 웃던 남자가 아니라, 늘 머릿속 한 구석에서 신경 쓰이던, 외로움의 증거를 발견할 때마다 계속해서 마음에 걸려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사람으로 보였다. 윤기의 시선을 마주보며 지민은 악수를 청했다. 순수한 애정이 깃든 손은 성인 남성의 손 치고는 무척이나 작았다. 꼭 주인의 성격마냥 하얗고 마디마디가 동그랗다.
“…….”
“…….”
윤기는 잠잠했다. 사람이 말을 했는데 아무 대답이라도 하나 해주면 안 되나. 악수가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한 마디라도. 아니면 역시 여기까지는 아닌가. 너무 주제넘은가 싶기도 하다. 윤기 입장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그의 회사에서 일하는, 스쳐지나가는 사원 중 하나일 텐데. 마법이 깨지고 슬며시 선을 넘어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다시 움츠러들 즈음이었다. 손마디가 툭 튀어나와있는 큰 손이 지민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한참 만에 윤기가 입을 열었다.
“고백이야?”
생각보다 대담하네. 지민은 총 세 단계를 거쳐 윤기의 말을 느릿하게 이해했다. 귀를 의심하는 첫 단계. 고백이란 단어를 정리해보는 두 번째 단계. 그리고 앞에 있는 윤기가 신종 괴롭힘 방법을 개발하는 건지 의심하는 세 번째 단계. 내가 말을 너무 이상하게 한 건가? 아니면 진짜 민윤기 머리가 맛이 간 건가? 입만 떡 벌리고 있던 지민은 잘못 전달된 의미를 필사적으로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에요! 제가 말한 건 서로 조금 더 믿고 의지하고….”
“아니면 뭔데.”
말을 끊은 윤기가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말하는 좋은 사이가.”
지민은 말문이 턱 막혔다. 윤기가 화를 내는 건 아니다. 건방지게 친구놀음이나 하자는 거냐 따져 묻는 어조도 아니다. 그런데도 목에서 어떤 말도 나오지 못했다. 아마 한층 더 집요할 만큼 깊게 마주봐오는 시선 탓일 것이다. 느릿하고 천천한 음성은 낮게 지민의 귀를 관통했다.
“넌 나를 신경 쓰고 내 대신 화도 내고.”
맞는 말이다. 다 제 입으로 했던 말인데 윤기 입에서 나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사실들이 지금에서야 왜 이렇게 낯부끄럽게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윤기가 조금 더 거리를 좁혔다. 악수를 청한 손보다 몸이 더 가까이 붙었다. 지민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이리저리 크게 흔들리는 동공의 끝엔 윤기가 있었다.
“나도 니가 신경 쓰여서 여기로 왔고.”
“…….”
“내가 단순히 친절과 아량을 베풀어 넘어가준 거라 생각해?”
“…….”
“네가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점점 심장이 크게 뛴다. 쿵쿵거리는 고동소리가 고작 한 뼘 정도 남기고 붙은 거리의 윤기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체온이 닿아있는 손 역시 뜨끈하게 열이 올라온다.
“말해봐.”
“…….”
“내가 원하면 우리가 어떻게 바뀌는지.”
위험하다. 시끄럽게 빨간 사이렌 소리가 머릿속을 댕댕 울렸다. 윤기가 잡은 작은 손을 꽉 쥐었다. 윤기의 나머지 손이 허리를 잡은 것도 아니고, 못 가게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잡혀있는 손 따위 힘으로 떨쳐내면 그만일 텐데, 지민은 덫에라도 걸린 거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인어의 노래에 홀리기라도 한 선원처럼 멍하니 윤기만 응시했다. 숨결이 바짝 닿는다. 민트색 머리카락이 더없이 가까이 눈앞에 있다. 딱 둘 사이의 틈이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 남은 순간이었다.
도망가요.
식당에서 금발머리의 미녀가 던져준 충고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지민은 황급히 윤기의 손을 털어내듯 풀고 뒤로 한 발짝 훌쩍 물러났다. 허공에 붕 뜬 윤기의 손을 보고 다시 시선을 마주하고 아까보다 더 크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다 지민이 꺼낸 말은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푸, 푹 쉬세요! 내일 뵐게요!”
지민은 무표정한 윤기를 지나쳐 룸의 문을 박차고 나섰다. 쿵 다시 닫힌 호텔룸 안은 방의 주인 대신 초대손님만이 남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