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General Elektriks - Little Lady>
한번 일이 꼬이면 모든 게 같이 꼬이는 법칙이 있다. 불운의 법칙은 여지없이 지민에게 콸콸 쏟아졌다. 한적하던 도로가 그 짧은 사이 무슨 대단한 사건이라도 생긴 건지 꽉꽉 막힌다. 호텔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지만 벌써 13분을 썼다. 솔직히 15분은 말도 안 되는데, 그래, 민윤기가 언제는 가능한 미션을 준 적 있냐고. 시간이 차라리 얼어버렸으면 좋겠다 주문을 외우며 경적을 울려보는데, 그새를 참지 못하고 전화벨이 지민을 들들 볶았다. 올 때 약국에서 두통제나 몇 개 사와. 늘 그렇듯 제 할말만 하고 전화는 뚝 끊겨버렸다. 귀하신 분께서 부린 변덕에 감사인사를 해야할지 다른 때처럼 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할지.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호텔에 도착한 지민은 부랴부랴 산 옷을 들고 방으로 돌진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카드로 시원하게 긁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옷에 감격할 여유는 없었다. 대충 하얀 셔츠에 팔을 꿰었다. 윗단추도 채 다 잠그지 못하고 재킷을 걸쳤다. 이렇게 입는 게 맞나? 섬세한 손길로 매장직원들이 옷을 입혀주었을 때와는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다. 에이, 고민할 여유가 어디 있어. 또 늦었냐 빈정거릴 날벼락부터 피하는 게 먼저다. 옷과 함께 맞춰 입어야 할 보타이는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지민은 예정보다 무려 한시간이나 늦게 이 사태를 만들어준 장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리자 무표정한 얼굴이 등장했다.
"내가 말한 건 15분이었지만 넌 150분으로 알아들었나보군. 들어와."
"그게…!"
"약은."
"여기요."
낚아채듯 윤기가 지민의 손에서 약을 받아간다. 지민은 윤기가 컵에 물을 따라 약을 삼킬 때까지도 헥헥거리며 가슴팍만 들썩이고 있었다. 된 건가. 됐지. 급한 불을 끄고 세이프존에 들어온 지민은 그제서야 컵을 기울이는 윤기의 뒷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역시, 민윤기구나. 자유분방하고 깔끔하게 입는 평소와 다르게 격을 차린 수트는 그림처럼 어울렸다. 가만 지켜보던 지민은 세련된 문양이 수놓아진 검은 재킷을 걸친 마른 어깨에서 한 단어를 찾아냈다. 겨울. 투명하고 시린,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눈꽃이 수놓인 겨울. 입만 열면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윤기를 보면서 지민은 넋을 놓고 멍하니 같은 생각만 되풀이했다. 요정 같아.
"오늘은 변명 따위 들어줄 시간 없어."
"…아 네, 네!"
"그 얼빠진 표정은 뭐야. 또 네 특기를 실행하고 있는 건가? 눈 뜨고 자기? 오늘은 제발 접어줬으면 좋겠…."
지민을 돌아본 윤기가 돌연 말을 멈췄다. 지민에게 고정된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쭈욱 미끄럽게 타고 내려간다. 그리고 불만족스럽게 찌푸려지는 미간과 침묵. 지민은 감상에서 끌려나와 현실에 내팽개쳐졌다. 뭐, 뭐지. 붙어오는 시선을 따라 제 몸을 훑어보는데 급하게 꿰어 입은 티는 나지 않고 나름 괜찮아 보인다. 보타이 안한 거 때문에 그런가….
"아 그게 시간이 없어서 가면서 하려고 챙겨왔어요."
지민은 꼬물꼬물 바지주머니에서 검은색 보타이를 꺼냈다. 거울 좀 써도 될까요? 윤기는 고개를 끄덕여주는 대신 혀를 한번 쯧 찼다.
"내 리셉션을 망치려고 작정했군. 나에 대한 시위를 이렇게 하는 건가?"
그렇게 별론가. 지민은 민망함으로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내가 이런 옷을 입어 봤어야 알지. 다시 가서 제대로 입고 올게요, 하려는 순간.
"이리와."
"네?"
"아니면 내가 너한테 걸어가야 하나?"
윤기가 한 손을 까딱인다. 아니요! 제가 갈게요! 지민은 궁금증 반, 또 무슨 명령을 시키는 건가 하는 불안함 반으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서자니, 윤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잔등을 작게 찡그렸다. 남은 걸음을 마저 좁힌 건 윤기였다. 훅 다가와 거리는 성인 한명이 끼기 빠듯할 정도로 좁혀졌다. 헉, 지민은 일순 숨을 삼켰다. 댕그랗게 열린 눈이 정신없이 깜빡거린다.
"미, 미스터 윤! 어, 어…."
"가만히 서있어."
당황한 지민이 발걸음을 한 발작 뒤로 뺏을 때, 윤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섬세하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풀린 단추를 채운다. 본능적으로 쫄았던 지민은 여전히 크게 뜨인 눈으로 제 단추를 채워주는 광경을 내려보았다. 키는 비슷하건만 손은 더 크다. 짧똥한 제 손과 달리 마디마디가 길쭉한 손은 단추 하나를 채우고 맨윗단추로 성큼 올라갔다. 머리 위로 윤기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쏟아진다.
"고개 들어. 네 머리 때문에 안 보여."
군기 바짝 든 군인처럼 지민은 번뜩 고개를 처들었다. 이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윤기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래로 시선을 내린 윤기는 권태로우면서도 나른해보였다. 어쩐지 손에 땀이 차는 기분이다. 갑자기 왜 이러지. 남의 옷은 왜 채워주는 거야.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기다리다 무슨 인성수양이라도 한 건가. 배려의 깨달음을 얻은 건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는데, 울리는 목울대로 윤기의 시선이 잠깐 이동한다. 윤기는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마저도 가까운 거리 탓에 평소보다 좀더 낮고 진하게 들렸다.
"아까 그거 내놔."
"어떤…?"
"네 손에 있는 거."
지민은 냉큼 윤기의 손에 보타이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윤기는 연신 변화 없는 표정으로 손을 놀렸다. 뼈마디가 굵은 손이 선이 가는 목을 드문드문 스친다. 이상하게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이 쥐어진다. 분명 윤기는 친절을 베풀고 있는데, 단순히 가만히 서있으라는 말 한마디 밖에 하지 않았건만 벅찬 명령을 받았을 때보다 긴장이 된다. 손이 스칠 때마다 꼭 숨결이 닿는 것만 같다. 윤기가 보타이를 매주는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혼잡한 도로에서 경적을 울리던 시간보다 더 길다. 윤기는 작업을 완료하고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손을 뗐다.
"내 비서가 옷 입는 법도 모른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군."
"그게요…."
"이쯤이면 내가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어. 그렇지 않나?"
"…감사합니다."
"이제 네가 알아서 정리해. 설마 내가 그거까지 해주길 바라는 큰 욕심이라도 가지고 있어? 보기보다 야망있네."
"그럴리가요! 지금 할게요."
지민은 거울 앞으로 달려가 매무새를 마저 다듬었다. 놀라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줄 알았다. 윤기가 기상천외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어도 이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친히, 그것도 같이 침대를 뒹군 하룻밤 연인을 상대로만 움직였을 손으로 옷을 채워주었다. 그마저도 입히는 게 아니라 벗기는 것이었을 터다. 시중을 받으면 받았지 절대 해줄 사람이 아닌데. 지민은 놀란 심장을 달랬다. 어지간히도 리셉션이 중요한 자리인가 보다. 한낱 비서의 옷차림까지 직접 신경 쓸 정도면. 빠른 손놀림으로 작업을 끝낸 지민은 윤기에게 도도도 뛰듯 다가갔다.
"차는 아래에 대기하고 있어요. 가시면 돼요."
"지금 나가도록 하지."
"어, 잠시만요."
지민은 검은 수트재킷에서 튀는 민트색 머리카락 하나를 짚어 떼어냈다. 여기 머리카락이. 떼어내고 어깨를 얌전하게 털어 정리하는데, 금방 다시 걸음을 옮길 줄 알았던 윤기가 지민을 빤히 쳐다본다. 왜 또 저렇게 보는 거야. 그냥 챙겨준 건데. 지민은 가만히 시선을 마주치다 아, 하고는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절대 실수 안 할게요. 아까 운전하면서 신호 막혀있을 때마다 잠깐씩 생각하면서 외웠어요. 이게 미스터 윤한테 엄청 중요한 일이라는 거 알아요. 실망 하시는 일 없게 최선을 다할 거예요. 믿고 맡겨주세요."
포부를 밝히는 지민을 보는 윤기는 잠잠했다. 빈정거릴 줄 알았는데. 지민은 자신감을 얻어 준비했던 말보다 한참은 멀리 뻗어나갔다.
"레이첼한테 들었어요. 혹시라도, 정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거기서 무슨 일 있으면 제가 지켜드릴 테니까 걱정마세요."
지민은 신뢰감을 선사하는 눈빛을 반짝반짝 띄워보냈다. 몇 달이나 준비한 행사다. 그 사이 비서로서 직업정신이 가득 찬 건지 가슴속에서 어떤 열정이 폴폴 솟아났다. 그동안 밤을 새고, 윤기의 명령에 분주하게 뛰어다닌 건 모두 이 행사를 위해서다. 반드시 성황리에 끝내리라. 윤기는 무표정하게 지민을 바라보다 발길을 틀었다.
"보타이 다시 체크해. 이상해."
"헉, 네!"
앞뒤로 꽉 찬 경호차량과 누가 봐도 가장 돋보이는 화려함을 뽐내는 차량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윤기는 문을 열어주는 서비스까지 받아 페라리 라페라리에 탑승했다. 지민은 그 뒤에 길게 늘어선 차량 중 하나로 올라탔다. 이미 타고 있던 레이첼이 짧은 인사를 던졌다. 그래도 제 시간엔 맞춰 갔군요. 리셉션에 못 올까 조마조마했어요. 지민은 헬쓱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사실 저도 그 생각 했어요.
"와 레이첼 오늘 엄청 예뻐요."
"고마워요. 지민도 달라보이네요."
차가운 인상의 금발미녀는 늘 아름다웠지만 검은 드레스를 걸친 오늘만큼은 더욱 빛났다. 시원하게 파인 등과 귀에서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귀걸이는 뭇 헐리우드 여배우보다 우아했다.
"레이첼 보타이 어디가 기울어졌어요?"
"멀쩡한데요?"
"에, 그래요?"
단순히 윤기가 까탈을 부린 모양이다. 보타이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매끄럽게 차가 출발한다.
"잘 들어요. 주의사항을 알려줄게요. 가서 안 잡아먹히려면 뼛속에까지 새겨요."
"영혼에다가도 새길게요."
"지민은 먼저 나서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려고 하지 마요. 미스터 윤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의 정보를 작게 읊어주는 게 지민의 임무라는 걸 명심해요. 이를테면, 그게 좋겠군요. 미스터 윤 그림자가 되는 거라 생각해요. 나도 곁에 있을 테지만 만약의 상황이라는 게 있으니 절대로 뒤에서 떨어지지 마요. 미스터 윤은 사업과 관련된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혀 모르거든요."
그렇지, 워낙 세상 혼자 사는 사람이라 잘 모르겠지…. 지민은 고개가 부러져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른 건요?
"무언가 나서서 하려고 하지 마요. 서있기만 잘해도 반은 성공한 거니까."
"…그냥 진짜 그림자가 될게요."
"좋은 생각이에요. 술이나 그런 건 입에 대지도 말고요."
"물론이죠."
두 다리는 튼튼한 지민은 탄탄한 정신력도 가지고 있었다. 무릇 파티를 가장한 밥그릇 쟁탈전에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애초 윤기 밑에서 몇 달이나 악착같이 버틴 점부터 합격점이라고 할 수 있다.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 멈춘다. 지민은 긴장된 눈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차문이 열리자 기절할 만큼 화려한 리셉션장소의 외관이 지민을 압도했다. 이 화려한 리셉션의 주인이 자신이라 선포하기라도 하듯 입구 위 크게 걸린 어거스트, 그리고 슈가 스튜디오라는 조각 글씨가 가장 먼저 눈길을 휘어잡았다. 구름 같은 인파를 담아내고도 남는 커다란 레드카펫이 그 아래로 깔려 있었으며, 카메라를 목에 건 기자들과 방송차량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으며, 나오는 사람마다 열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미 도착한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꾸민 리셉션 참석자들이 레드카펫 위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하나의 시상식을 방불케 하는 이 광경은 아마 '올해를 대표하는 파티'같은 타이틀을 단 잡지에서 분명히 언급될 것이다.
순간적으로 넋이 나간 지민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사이, 돌연 레드카펫 위가 술렁인다. 도로를 달린 여러 대의 차량 중 가장 비싼 몸값을 호가했을 라페라리의 문이 열리고, 이번 파티를 위해 장인이 손수 제작한 구두가 레드카펫을 밟았다. 온전히 윤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별이 점멸하듯 기자들의 플래쉬가 팡팡 주인공을 향해 터졌다. 앞다투어 함성이 흘러나오고 모든 관심이 그를 향해 몰렸다. 어서 찍어! 어거스트 이쪽 좀 봐주세요! 이쪽도 봐주세요! 굉장히 훌륭한 파티입니다!
윤기는 이런 화려함이 당연한 것처럼 한발한발 천천히 레드카펫을 걸었다. 여유롭게 웃으며 기자들을 바라보는 태도는 한 나라의 황제처럼 품위 있고 위풍당당했다. 공식석장에서 비추는 밝은 미소. 그 모습은 여태 지민이 혼자만 알아차린 윤기의 외로움과는 명백히 정반대였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못한 외로움을 앓고 있으며, 꾸역꾸역 아픈 것도 혼자 참아내던 사람. 지민이 알던 가장 외로운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행운을 거머쥔 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지민 뭐해요. 벌써 정신을 놓은 거에요?"
"아."
지민은 황급히 레이첼을 쫓아 레드카펫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윤기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작 몇 걸음 떨어진 윤기와의 거리가 어마어마한 차이로 보였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거만한 회장. 알쏭달쏭하다. 내가 본 게 틀린 건가. 아니면 혼자 비추는 외로움을 완벽하게 가릴 만큼 그가 단련된 걸까. 저와 별로 차이 없는 키를 가진 그가 지금만큼은 또 훨씬 커 보인다. 과연 민윤기는 얼마나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거지?
간혹 레드카펫에 서있던 몇몇 사람들이 말을 붙였다. 오 레이첼, 오랜만이군요. 옆은 누구죠? 지민은 머지않아 상념을 잊고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안녕하세요, 어거스트 새 비서 지민이라고 합니다. 길게 깔린 레드카펫을 지나 계단을 밟아 입구를 지났다. 샹들리에가 위성처럼 빛났다. 천사조각상이 새겨진 미니분수대와 슈가 스튜디오 마크를 단 얼음조각상이 질세라 자태를 뽐냈다.
지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시작이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자, 박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