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BitterSweet - The bomb>
석진과 레이첼은 다리를 꼬고 앉은 윤기를 박제된 듯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뉴욕의 뷰가 펼쳐진 호텔 전망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 분위기를 가진 남자는 왁자지껄한 식당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거만하게 턱을 괸 자세는 물에 섞여 들지 않는 기름처럼 동 뜬다. 석진은 당황이 역력한 태도로 지민을 돌아봤다. 지민은 설명을 바라는 듯한 얼굴들에도 웃음으로만 답했다.
"하하…! 좀 늦었죠…?"
레이첼은 알만하다는 듯 냉정한 판단력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석진은 지민을 한번 윤기를 한번 보고는 눈을 여러 차례 감았다 떴다 했다. 꿈인가 현실인가 헷갈리는지 눈까지 부비적거린다. 지민이 점점 증가하는 죄책감에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석진은 한 타이밍 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하하 같이 웃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뇨, 그래도 얼마 늦지 않았어요. 뉴욕 도로는 늘 빼곡하니까요."
"회장님 아니셨으면 오늘 12시가 지나도 못 왔을 거 같아요. 신데렐라처럼요."
지민이 농담조로 대답하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석진만 엉성하게 웃어줄 뿐, 레이첼과 윤기는 딱딱한 표정 그대로였다. 토크쇼에 부패정치인이 나와도 이렇게까지 싸늘한 반응은 아닐 것이다. 유리구두 이야기까지 안 꺼낸 건 잘한 일이야. 지민은 민망한 헛기침을 터뜨리고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어느 걸로 시킬까요?"
셋의 시선 모두가 윤기를 향했다. 윤기는 메뉴판에 시선도 주지 않고 알아서 시켜, 하고 손을 뗐다. 지민은 머뭇거리다 원래 시키기로 했던 메뉴를 골랐다. 메뉴판을 아무리 털어도 윤기가 입에 델 만한 값비싼 음식들은 없다. 나가서 다른 음식 테이크아웃 해오라고 하면 해오면 되지. 지민의 말엔 털끝만큼의 반응도 보이지 않던 레이첼이 윤기에게 사무적으로 말했다.
"다른 장소로 옮길까요?"
"됐어. 난 신경 쓰지 말고 얘기해. 이제 보니 내 비서들끼리 이렇게 어색한 사이였나? 지난번엔 근무시간에도 잘 떠들더니 말이야."
…네가 있어서 그런 거거든. 지민은 치미는 말을 참았다. 가만히 앉아있는 테이블로 흘긋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윤기의 인지도를 제외하고서라도 시선을 받을만한 조합이었다. 한 사람은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고, 세 사람은 빳빳이 긴장하고 있다. 연설이라도 받아 적을 분위기의 테이블은 가게에서 유일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민은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넷이 앉아있는 테이블은 숨 막힐 듯 어색했다. 윤기가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편하게 해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석진과 레이첼은 간간히 물을 마시며 말을 아꼈다. 어떤 대화를 꺼내면 이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끝이 날까. 이 웃기는 조합을 만든 지민은 의무감에 휩싸여 말을 꺼내볼 괜찮은 대화내용을 찾아 머리를 괴롭혔다. 넷이 같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는 뭐가 있지? 생각해, 생각하는 거야 박지민. 너는 할 수 있어. 테이블 아래로 손톱만 주물거리다 아, 하고는 화색을 띄우며 이야기했다.
"영화는 언제쯤 영화관에 나오게 될까요?"
석진은 숨막히는 침묵을 깬 목소리에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냉큼 받아주었다.
"내년 5월이나 6월에 나오지 않을까요?"
"참 재미있을 거 같아요. 벌써부터 너무 보고 싶어요."
"그렇죠? 저도요. 지민만큼이나 기대돼요."
"전 열 번도 넘게 볼 거예요."
지민이 억지로 웃는 입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게 힘들게 궁리해 꺼낸 대화의 끝이었다. 라디오라도 하나 켜놓으면 좋을 텐데.
지민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이젠 다 끝이야…. 체할 것이 확실하다. 집에 소화제가 몇 알 남았더라. 피자 환불하고 싶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넘쳤다. 그때였다. 폰 벨소리가 들린다. 천국에서 오는 전화가 분명했다.
"저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지민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 의자에서 냉큼 일어났다. 석진이 애절한 눈빛을 보내왔지만, 지민은 과감히 모른척했다. 차에서부터 막힘 숨을 잠시라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선배님 꼭 살아계시면 제가 구하러 돌아올게요. 지민은 시끄러운 식당을 빠져나가 도보로 나왔다. 완전히 석진을 떠난 다는 것이 미안해, 그마저도 테이블과 가까운 위치였다. 테이블에서 창 밖을 내다본다면 보일 위치. 이쯤이면 되겠지. 지민은 그제서야 전화를 받았다.
[지민이 형! 보고 싶었어!]
"막내구나!"
장하다, 우리 막내. 지민은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날아가 네가 형을 살렸다며 동생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싶었다. 어휴, 우리 막내 예쁘네. 예뻐. 전화를 걸자마자 지민이 칭찬을 쏟아내자, 전화 건너편이 히히 웃는다.
[형도 나 보고 싶었어?]
"물론이지. 우리 한재 보고 싶어서 형이 맨날 잠도 설친다니까? 그런데 막내야 지금 통화해도 돼?"
[으응…해도 돼.]
목소리에 자신이 없다. 지민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차를 고려하면 한국은 아침이다. 부모님은 일을 나간 시각이고, 막 방학했을 둘째와 셋째는 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한참 자고 있을 시각이었다. 지민이 거짓말이 서툰 목소리에 푸스스 웃었다. 요놈 자식.
"형아 보고 싶어서 몰래 걸었구나? 둘째랑 셋째한테 허락은 맡은 거야?"
[음, 아니! 그렇지만 형이 보고 싶었는걸? 둘째 형은 어제 술 마시고 들어와서 괜찮아. 누나도 지금 코 골면서 자고 있어.]
한재가 꾸물꾸물 답했다. 각각 통화할 시간을 합치면 그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돌아가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이 둘째였으니, 다음 차례는 셋째였다. 차례를 당당하게 가로챈 한재는 큰 소리를 떵떵 쳤다. 괜찮아! 안 깰 거야!
"알았어, 알았어. 막내 그런데 뭐하고 있었어?"
[나? 나 지민이 형한테 보낼 사진 찍고 있었어. 보여줄까? 완전 잘 나왔다.]
"그래, 형이 보고 우리 막내 칭찬해줄게."
지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폰으로 전송된 사진을 보고 눈을 배시시 접었다. 실제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막내와는 종종 사진을 주고 받았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네. 어쩜 나 어릴 때랑 이렇게 판박이냐. 지민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퍼부었다.
"우리 막내 너무 잘생긴 거 아니야?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지? 형 닮았으니까 틀림 없어."
[형 인기 많았어?]
"어, 어? 무, 물론이지! 형 막 여기서 파티 같은 거 하면 인기 제일 많았어."
파티에 초대도 못 받았다. 지민은 멀리서 지켜봤던 학교의 인기 학생회장을 떠올리며 가장했다. 형이 인기 얼마나 많았는지 알면 막내 너 기절할걸?
[진짜? 형 그럼 나 하나 물어봐도 돼?]
"당연하지. 다 물어봐."
[있지, 나 좋아하는 여자애가 한 명 있는데…이번에 고등학교 가면서 학교가 달라지거든.]
머뭇머뭇 부끄러운 듯한 목소리가 사정을 설명했다. 지민은 풋사랑을 고백하는 막내가 너무 귀여워 실실 입꼬리를 들썩거렸다. 한참 좋을 때지, 그래. 사춘기 시절의 예민하다가도 첫사랑 앞에서는 서툴고 어리다. 우울한 중학교시절을 보낸 지민은 부러운 한편, 동생이라도 사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했다.
"그럼 핸드폰으로 연락하면 되겠네."
[번호 없는데?]
"달라고 하면 되지."
[마, 말을 걸 수 있을까?]
"…말도 못 걸어봤어?"
[응.]
지민은 연애를 못하는 세포가 핏줄에 선천적으로 박혀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상황을 전달받을수록 의심이 짙어진다. 완벽한 짝사랑이다. 우물우물 상황을 설명하는데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멀리서만 소심하게 바라봤단다.
"그 아이가 너를 알긴 해?"
[알지 않을까…?]
"…무슨 같이 한 일 없었어? 뭐 수업 때 뒷자리에 앉는다던가…."
[하나 있긴 했어! 나 이때 심장 터져 죽는 줄 알았어, 형아.]
"뭔데, 뭔데."
한재가 그때의 설렘이 되살아나는 듯 쑥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걔가 나한테 샤프심 빌려달라구 했어….]
"……."
지민은 순간 환경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연애를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방방 들뜬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떻게 하면 돼, 형아?]
"쉽지. 그건!"
[응, 응]
"그, 그건…!"
[응, 그건!]
형을 향한 순수한 신뢰도가 가득 담겨있었다. 자신만만해하던 지민은 막상 진지하게 방법을 짚어주자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연애를 해본 적이 있어야지. 스스로도 건사하기 힘든 판에 누군가와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동생 앞에서 자존심을 구길 수는 없다. 지민이 나름 그럴싸한 방법을 떠올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순간 전화 너머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박한재! 너 지금 치사하게 지민이 오빠랑 혼자 통화하는 거야!
[헉, 형 누나 깼다. 다음에 봐!]
전화가 다급하게 뚝 끊겼다. 지민은 길거리라는 사실도 잊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좋아졌다. 방금 전까지 속해있던 숨 막히는 분위기를 완전히 잊을 만큼 유쾌했다. 지민은 아쉽게 끊어진 폰화면을 아련하게 쓸었다. 형은 이제 지옥으로 간다 동생아…. 심호흡을 다지고 있는데, 여행객으로 보이는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길 좀 물어볼 수 있을까요?"
지민은 서비스센터 직원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흔쾌히 승낙했다. 네, 편하게 뭐든지 물어보세요.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간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길이라도 같이 고민해줄 수 있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석진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민이 떠난 테이블은 적막 그 자체였고, 석진은 침통한 손길로 콜라를 마셨다. 오늘 저녁 편하게 먹기는 틀렸다. 레이첼이 피자 한 조각만을 먹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석진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레이첼, 혹시 다 먹은 건가요?"
"네."
셋이 앉은 테이블에서 두 사람 모두 음식을 먹지 않으면 곤란하다. 석진은 속이 더부룩해짐을 느끼며 입맛이 떨어져갔다. 음식을 아무리 사랑해도, 세계에서 제일 비싼 음식이 앞에 놓여있어도 이런 장례식 같은 분위기에선 한입도 먹기 싫어지는 게 당연했다. 석진은 어서 무슨 말에도 환하게 웃음을 흘려주는 지민이 보고 싶어졌다. 윤기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셋이 전부 피자 싫어하면 여긴 왜 온 거야?"
윤기는 혀를 차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석진은 안 넘어가는 피자를 몇 번 더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레이첼이 차라리 먹지 말라는 듯 그만 먹으라는 손짓을 했지만, 이 피 말리는 테이블에서 대화거리를 꺼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먹어서 입을 막아서 얘기를 못 하는 거라고 할래요. 레이첼이 그에 목을 긋는 시늉을 보이며 뜻을 전한다. 그러다 죽어요.
공감한 석진은 힐끔 윤기의 눈치를 살피다 윤기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같이 쳐다봤다. 창밖에 전화를 받으며 웃고 있는 지민이 있었다. 있는 대로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보슬보슬 웃는다. 간혹 허리까지 접어가며 큰 웃음도 터뜨렸다. 석진은 절로 행복해 보이는 광경에 작게 같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 전화가 끊기고, 한 여성이 지민에게 다가섰다. 대화를 몇 마디 주고 받더니 지민이 고민하다 순하게 웃었다. 폰을 꺼내들어 무언가를 입력한다.
잠자코 관람하던 윤기의 눈 속에 못마땅한 빛이 떴다 사라졌다. 윤기가 삐딱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정작 초대해놓은 주인은 사라지고. 퍽이나 재미있는 저녁식사네? 이 맛없는 피자가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손님만 찬바람 나는 곳에 내팽개치면 쓰나."
윤기 특유의 낮고 섹시한 음성이 한번 더 울렸다.
"아주 불쾌해."
"…해결하겠습니다."
음식을 씹던 석진이 말하려는 찰나, 레이첼이 선수를 쳤다. 굽 있는 샤넬 부츠를 신고 나가는 그녀는 어느 때보다 빨랐다. 한번 더 기회를 놓친 석진은 절망의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맙소사. 단 둘이 식사라니. 끔찍하기 짝이 없어 입에 씹고 있는 피자를 뱉을 뻔 했다. 심지어 불쾌하다는 말은 확실히 진심인지 윤기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석진이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혹시 더 시키실 일 있으시면…."
윤기가 고민하듯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없어."
없는 게 아니신 거 같은데요. 윤기를 상대로 꼬치꼬치 캐물을 배짱이 없는 석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레이첼을 밀쳐서라도 내가 나갔어야 했는데. 더 이상 목구멍을 조여오는 침묵이 싫어 오늘 외근하며 들은 자료를 보고했다.
"벤슨 가에서 다시 한번 만나고자 청했습니다. 다음 약속 잡으시겠습니까?"
"내일 박지민 보내."
"내일이라면 지민이 뉴욕에 있지 않아 곤란할 거 같습니다만…."
"뉴욕에 없어? 왜?"
윤기가 석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친한 동생이랑 라스베가스에 간다 했습니다."
"친한 동생?"
잠시 생각하던 윤기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아 그 놈이로군. 윤기는 아까 보인 못마땅한 기색을 이번에 더 대놓고 드러냈다. 석진은 1년이나 넘게 윤기를 모신 결과로 지민보다 높게 윤기의 상태를 추측할 수 있었다. 윤기는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겼을 때 저런 태도를 보인다. 대체로 어거스트가 점 찍어놓은 사업을 다른 기업들도 같이 탐내거나, 구미가 당기는 예술품을 이미 다른 누군가 차지하고 있다거나. 저건 무언가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남과 나눌 때 보이는 언짢음이다.
"자세히 말해봐."
석진은 왜 윤기가 지민의 여행스케줄을 궁금해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거부권은 석진에게 있지 않았다. 어차피 여행계획을 말하는 것에 무슨 큰 문제가 있겠는가. 다른 기업으로 가서 어거스트의 기밀자료를 빼돌린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여행이다. 그랜드 캐니언, 벨라지오 분수쇼, 가고 싶지만 일정 때문에 가지 못한다는 디즈니랜드. 지민이 말한 여행계획을 그대로 석진이 이야기하는 동안, 윤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경청했다.
"그게 전부 이번 쉬는 기간 동안 간다는 거군."
"예, 아마…."
윤기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레이첼과 함께 있는 지민을 주시했다. 석진은 이유도 모르고 갑작스레 무척이나 지민에게 미안해졌다.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거 같은데.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말한듯한, 악마의 소굴에 밀어 넣은듯한 느낌. 석연찮은 느낌에 찝찝해하고 있자니, 윤기가 창 밖에서 눈길을 떼고 불쑥 말했다.
"네가 가."
"예?"
"벤슨 가랑 만나는 거 네가 가라고. 그리고 날짜는 내일 말고 목요일 날로 해. 애 좀 타보라고."
"…그럼 리셉션은 어떻게 할까요?"
"대신 할 사람 구해놓고 가."
당장 내일 출발하는데, 어디서 어거스트의 비서직을 맡을 사람을 데려온다는 말인가. 지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박지민을 데리고 갈 것이라고. 하지만 여행 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갑자기? 석진이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사이, 윤기가 지갑을 꺼내 그 안에서 블랙카드를 빼 테이블에 툭 던졌다.
"피치 못할 사정은 과음이 좋겠군."
"……."
"실컷 마셔."
윤기는 보통 지갑을 직접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의 곁엔 늘 수행원들이 붙어있었고, 계산은 그들의 몫이었다. 여자를 만날 때나 가끔씩 사용하는 지갑을 윤기가 꺼냈다는 건, 지금 앉아있는 것도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더 충동적인 일이었다.
"아 가야 할 사람들한테는 먹이지마. 비행기에서 술 냄새 풍기는 건 싫어."
사람들. 지민을 대신 전용기에 태워놓으라 확인사살을 마친 윤기가 일어났다. 어거스트의 회장이 맞나, 안 맞나 확인하는 듯하던 가게 사람들은 뒤늦게야 정체를 알고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어거스트야! 석진은 허망하게 석상처럼 앉아있다 떨리는 손으로 한도가 무제한이라는 블랙카드를 손에 들었다. 유유히 사라지는 윤기의 뒷모습에 한가지 확신이 들었다. 지금 일어난 일은 비밀로 묻자. 대체 민윤기가 자신에게 무슨 앙금이 있길래 이러는 것이냐며 지민이 사표를 내던질 거 같았다.
섬세하게 폰으로 지도까지 켜 길을 알려준 지민은 흐뭇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별 거 아닌걸요. 재미있는 여행 되셨으면 좋겠네요. 훈훈하게 현지인과 여행객으로 인사를 하고 있는 도중, 누군가 팔짱을 감아왔다. 지민은 상대를 확인하고 기겁했다.
"레, 레이첼?!"
여행객은 사뭇 당황하더니 곧 알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늘씬한 금발의 미녀는 금세 팔짱을 풀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작업 아니었어요?"
"그, 그냥 길 알려준 건데요?"
"하도 다정해서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다행이네요. 오래 걸릴까 걱정했는데. 어서 안으로 들어가죠."
레이첼은 금방 말을 끝내고 발걸음을 돌렸다. 지민은 뒤에 남아 레이첼이 설마 날, 하다 생각을 접었다. 샤프심을 빌려줬다 행복하게 헤헤거리던 막내와 같은 수준으로 남는 건 사양이다. 지민은 시간이 꽤 지났음을 알아차렸다.
"잠깐 그런데 레이첼이 여기 있으면 설마…지금 진 선배님 혼자…?"
"진 걱정부터 하기 전에 지민 걱정부터 해야 할걸요."
"…네?"
“미스터 윤이 약속 주최자한테 불만이 생긴 모양이더군요. 다 자초한 일이니 알아서 살아남아봐요.”
화가 났다고? 왜? 전화 받은 게 고작인데. 지난번 식사에서는 대놓고 시비를 걸어도 화를 참더니,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는데 화를 냈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황당하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지민은 두려움에 달달 떨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한 병이 비워져 있고, 석진은 다른 병을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다 갑자기 왜…?”
"어서 와서 앉아요."
“회장님은요?”
“갔어요. 우리끼리 먹으면 돼요. 하하 쭉 마십시다. 아 지민은 마시지 말고 피자 먹어요. 안 먹었잖아요.”
윤기가 갔다는 소식에 기뻐하기도 잠시, 지민은 술을 콸콸 따르고 있는 석진을 보며 당혹했다.
“서, 선배님? 괜찮으세요?”
“피자 다 식었네…다시 시킬까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선배님 내일 비행기….”
“괜찮아요, 괜찮아!”
레이첼은 자리에 앉기 전 바닥에서 블랙카드를 발견하고 주워들었다. 이런 카드를 가질 수 있는 인물은 가게에서 자리를 떴다는 사람뿐이다. 레이첼은 카드를 한번 보고, 테이블에 가득한 술병을 보고 가늠했다. 카드까지 던져놓고 사라진 회장과 모든 것을 놓은 듯한 자세로 술을 들이키고 있는 비서. 그 비서는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한다. 영리한 레이첼은 금방 분석을 끝냈다. 무슨 말을 들은 모양이네.
지민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걱정을 시작했다.
“선배님 내일 캘리포니아 가셔야 하는데, 마시면 안 될 거 같은데.”
“나 원래 술 잘 마셔요. 이 정도 가지고는 끄떡도 없어요.”
“그, 그래도 이건 좀 많….”
“자 지민, 여기 콜라 잡아요. 마셔서 끝장을 보는 거예요, 오늘!”
레이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이 담긴 잔을 들었다. 리셉션에서 입을 드레스를 생각하면 물도 부담스럽다. 그리고 체중조절보다 힘든 것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상사의 비위다.
***
아침부터 바쁘게 벨소리가 울렸다. 뒤척거리던 지민은 손을 더듬거려 폰을 잡아냈다. 정말 눈만 감았다 뜬 거 같은데.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커튼 틈을 잠깐 바라보자 여전히 컴컴하다. 최근 레이첼이나 진이 비상사태라며 새벽부터 전화를 거는 일은 드물었다. 더군다나 지민은 명확히 휴가를 받은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손톱만큼의 의심도 없었다. 정국과 졸업여행을 떠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영원히 남을 사진을 몽땅 찍어올 것이란 사실에 대해.
"여보세요…."
[윽…지민….]
"선배님?"
석진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썩은 빵처럼 푸석푸석했으며 바닥을 긁었다. 잠이 순식간에 달아난 지민이 놀라 눈을 확 떴다.
"선배님 어디 아프세요?"
[배랑 머리랑…으…팔도 말을 안 들어요….]
"괜찮으세요? 지금 몇 시…다섯 시 반이구나. 병원은 가보셨어요?"
[갈 힘이 없어서…쿨럭! 하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 같아요….]
석진이 연신 기침을 터뜨렸다. 큰일이다. 9시에 석진과 레이첼이 도착하고, 그 뒤로 윤기가 도착하면 전용기는 캘리포니아로 출발하기로 되어있었다. 그 전에 병원에 다녀올 수 있나. 그러게 술을 많이 드시더니. 지민은 뒤늦게 석진을 필사적으로 말릴걸, 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차는 떠난 후였다. 석진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지민…으윽….]
"네, 네 선배님. 말씀하세요. 제가 지금 선배님네 집으로 갈까요? 누워계세요, 선배님. 아니면 앰뷸런스라도 부를까요?"
지민은 급히 일어나 전화를 어깨에 끼고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
[내 대신 캘리포니아에 가주면 안 될까요?]
"…네?"
바지를 벗던 자세로 지민은 멈춰버렸다.
"캐, 캘리포니아요?"
너무 당황해 말도 더듬었다. 석진은 대신 리셉션에 참여해달라 부탁하고 있었다. 휴가를 부수는 건 둘째치고, 지민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약 4시간 남아있는 상태에서 캐리어는 여행용으로 싸져있었고, 리셉션에 관해서는 아는 것도 없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윤기가 보낼 일정도 대략적으로만 알 뿐 자세히는 모른다.
"선배님 그건…어…제,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레이첼이 도와줄 거예요.]
"그, 그런데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럽고…."
지민이 머뭇거리자, 기침을 멈추었던 석진이 돌연 급격히 기침을 토해냈다. 피를 토할 듯 거센 기침과 함께 애절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아…역시 너무 무리한 부탁, 쿨럭! 크흡…이런 거 말해서 미안…켁켁! 하아…해요.]
"서, 선배님 괜찮으세요?"
[괜찮을, 거예요. 지금 열이 펄펄 끓고, 으, 땅이 다가와서 얼굴에 부딪히고, 토네이도에 휩쓸린 것처럼 속도 울렁거리고, 아 다리도 좀 저린 거 같은데…잘 걸을 수 있을…으엇!]
쿠당탕 무언가 화려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진동했다. 지민은 소음에 폰에서 귀를 잠시 뗐다 붙였다. 술 마신 다음날 이렇게까지 아플 수도 있는 건가. 술이 아니라 어디 차에 치였다며 병원에 입원해도 이상하지 않은 증상들이다. 난생 처음 듣는 과음후유증들이지만, 당장이라도 관을 짤 것처럼 아파하는 사람한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증상들이 있냐 다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불어 지민은 아픈 사람을 채근할 만큼 성격이 독하질 못했다. 석진이 아픈 신음을 내며 억지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고작 이정도 아픈 거니까, 괜찮아요. 지민은 더 자, 윽!]
아 어쩌지. 어떡하지. 진짜 방법은 이거밖에 없는 건가.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하던 지민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니에요. 선배님 지금 가면 쓰러지실 거 같아요. 제가 대신 갈게요."
[지민, 고마워요. 미스터 윤한테는 내가 연락할게요.]
"네…푹 쉬고 병원 꼭 가세요."
[정말 고마…우웁!]
헛구역질을 끝으로 전화가 다급하게 끊겼다. 지민은 석진을 걱정하다 이럴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주하게 출장용 짐으로 캐리어를 다시 쌌다. 그리고는 꺼내놓은 사진기를 발견하고 아, 하며 정국에게 문자를 보냈다. 정국아 나 여행 못 가게 됐어.
속을 싹 게워낸 석진은 변기를 부여잡고 비척비척 일어나 세면대에서 입주변을 헹구었다. 수건에 손을 닦고 전화를 확인하니 이미 전화는 끊겨있었다. 지민과 통화하며 일부러 떨어뜨렸던 샴푸와 린스를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열이 펄펄 끓고, 다리와 팔이 저리고, 땅이 올라온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속이 미칠 듯 울렁거린다는 건 진실이었다.
"미안해요, 지민."
석진이 속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며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자본주의에 굴복하고 만 자신이 하는 것이라곤 기도가 전부다. 쓰린 위를 부여잡고 나오며 석진은 윤기를 흉봤다.
"이렇게 착한 애한테 왜 그러나 몰라."
도무지 미워할 구석이라고는 없는데. 석진은 안타까움에 속마음으로조차 제대로 위로할 수 없었다. 이러다 지민마저 도망가면 누가 또 온다고. 막내비서의 앞날을 걱정하다 이내 뒤집히는 속에 입을 틀어막았다가 다시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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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랑 지민이는 대화할 때 한국어도 하고 영어도 하고 섞어쓴다고 생각해주심 될 거 같아요~! 그리고....소장본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뽑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흑흑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