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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15

by 토페 posted Jan 0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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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Gustaf Spetz - You And Me>











 휴가 전날은 아침 공기부터 다르다. 다른 날처럼 가기 싫어 어기적거리는 행동이 아니라 빠르게 착착 준비한 지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어쩜 하늘이 이렇게 푸르고, 바람이 청량할 수 있단 말인가. 길거리 가득한 차의 매연마저 사랑스럽다.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을 향해 손을 잡고 홍보하고 싶다. 그거 아세요? 제가 오늘만 나가면 회사를 쉰답니다! 무려 6일동안이나요! 지민은 룰루랄라 재즈 스텝을 밟듯 신나게 걸어 사무실에 도착했다. 윤기가 내팽개친 옷조차 산뜻하게 받아 들고 윤기의 집무실을 찾았다.



"말씀하셨던 감상문 가져왔습니다."



 윤기가 손을 뻗었다. 지민은 표를 맨 위에 붙인 감상문을 윤기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심각하게 재미없는 영화라 유난히 쓰기 힘든 감상문이었다. 워낙 쓸 말이 없어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 급기야 물고기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의 실제모델이라는 물고기가 사진까지 찾아 넣었다. 이 이상으로 이 재미없는 영화를 더 재미있게 포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윤기는 감상문을 넘기기 전 표에 시선을 머무르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나도 다음 페이지로 넘기지 않는다. 무표정한 미간이 잠시 찌푸려진다. 그 미세한 표정변화에 구름을 밟고 있던 지민은 순식간에 땅으로 추락했다. 윤기의 작은 표정변화 하나가, 명령 하나가 지민의 하루 운명을 결정했다. 뭐지. 뭐가 마음에 안 든거지. 제목으로 쓴 폰트가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표를 한번 접어서 가져온 게 마음에 안 든 건가?



"둘이네."

"네?"



 둘. 지민은 머리를 돌돌 굴리다 금새 윤기가 말한 뜻을 알아차렸다. 토요일 날 표에 표시된 두 좌석을 말하는 모양이다. 지민은 순순히 자세히 설명을 덧붙었다.



"네. 아는 사람이랑 같이 다녀왔습니다."



 괜찮겠지 싶었다. 혼자 보라는 명령은 없었다. 치사하게 이런 거까지 물고 늘어지진 않겠지. 미세하게 인상을 찡그렸던 윤기는 언제 찡그렸냐는 듯 무표정이었다.



"그때 본 네 후배인가?"

"네? 네…."



 지민은 오늘 윤기가 나쁜 기분으로 출근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아닌데. 뜨거운 커피를 찾고, 아침부터 강도 높은 일거리를 남겼고, 어거스트에서 벌어진 사원들의 실수를 이죽거렸다. 출근 때만해도 지극히 밉살스러운 말만 골라 하는 게 평상시와 같다. 그러나 표를 본 직후, 지민은 몇 달 간 일한 감으로 잡아챌 수 있었다.

 지금, 민윤기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 제발. 오늘만은 부디 얌전하게 넘어가줬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윤기는 감상문을 책상 위에 대충 올려놨다.



"이제 나가봐."

"네!"



 예스! 지민은 마음 속에서 펑펑 휴가를 기념하는 폭죽을 터뜨렸다. 책상에 앉아 윤기가 던져준 심부름 리스트를 확인했다. 카달로그 확인하고 요트 사놓기, 홀리를 맡아주고 있는 애견보모 새로 바꾸기, 윤기 앞으로 온 선물들에 대한 감사편지 쓰기. 지민은 절로 헤에 벌어지는 입을 막지 못했다. 이 일들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면 내일부터 6시에 안 일어나도 된다. 민윤기는 캘리포니아로 가고, 날 괴롭히는 심부름 전화벨소리는 사라지고. 싱글벙글하고 있는데, 석진이 말을 걸어왔다.



"지민, 이번 휴가에 계획이라도 있어요?"

"헤헤, 네. 아는 동생이랑 여행가기로 했어요."



 지민은 웅대한 여행계획을 석진이 묻지 않아도 알아서 설명했다.



"라스베가스에 다녀오기로 했어요! 그랜드 캐니언도 가기로 했고, 벨라지오 분수쇼도 보고 올 거예요. 에펠탑 전망대랑 후버댐도요! 예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곳들인데, 사정이 힘들어서 못 갔었던 곳들이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가는 여행 의미가 특별해서 다녀오려구요. 원래 라스베가스에도 가고 디즈니랜드 가고 싶었는데 그렇게까진 시간이 안 되는 게 너무 아쉬워요. 듣기만해도 너무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요?"



 사막 한복판에 세워진 환락가의 도시. 별이 떨어진다는 도시는 고등학교시절부터 한번쯤은 가보고 싶었다. 돈을 저축하고 또 저축하던 지민은 마지막 여행에 의미를 두고 빠듯한 여행 스케줄을 세웠다. 정국은 이왕 라스베가스에 가면 무조건 카지노에 참여해야 한다 주장했지만, 지민은 취업도 못한 게 무슨 도박이냐며 말렸다. 정국이 담이 그렇게 작아 어디에 쓰겠냐 슬슬 속을 긁었지만 꿋꿋이 들리지 않는 척 무시했다. 석진이 아쉬운 듯 긴 한숨을 쉬었다.



"부러워요. 나도 라스베가스에는 못 가봤어요."

"가서 사진 찍고 선배님한테도 보내드릴게요."

"음식 사진은 다 보내줘요. 거기 호텔식 먹어보는 게 꿈이니까 꼭 내 대신 호텔식을 먹어줘요…."



 나는 캘리포니아로 가니까요. 석진은 출장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푸르죽죽한 안색이었다. 야자수 괴물들과 그들의 마왕. 관광은커녕 해가 떠있을 때는 관계자와 미팅을 하고, 해가 지면 호텔에 틀어박혀 주구장창 일만 했다. 지민은 진심으로 가기 싫어하는 기색의 석진에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런칭파티가 있으니까 그때랑은 다르지 않을까요?"

"그게 있어서 문제죠."



 차라리 서류랑 연애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덧붙이며 석진은 혹시라도 집무실에 들릴까 목소리를 줄였다.



"워낙 기가 센 사람들이라 어지간한 태도로 갔다간 무시 받기 십상이에요. 알잖아요, 이쪽 사람들."

"이쪽 사람들이라 하면…?"



 덩달아 지민까지 목소리를 죽이고 쑥덕거렸다. 석진은 사무실 안쪽을 고갯짓함과 동시에, 입모양으로 애인들도요, 하고 표현했다. 빠른 속도로 이해한 지민이 낮게 탄식을 흘렸다. 아, 그쪽 사람들.



"알겠죠?"

"네…."



 리셉션은 총성이 들리지 않은 하나의 전쟁터다.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며 서로를 견제하는 곳은, 그 장소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뛰어난 연기자라 봐도 무방했다. 더불어 윤기가 주최하는 리셉션엔 대부분 어마어마한 부와 명성을 쥐고 세계를 주무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평범한 일반인이 부를 거느린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들어가 멀쩡한 정신으로 버텨 나오기란 매우 힘들다. 지민이 위로의 눈빛을 건네며 토닥거렸다.



"이번에는 그래도 좀 나을 거예요. 열심히 준비했잖아요."



 석진은 허허 웃으며 부정했다. 의도는 고마워요, 지민. 그런데.



"자칫 잠깐 정신 놓고 있으면 그대로 물어뜯길 걸요.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이번에는 부디 무사히 넘어가야 할 텐데. 차라리 월급을 반절 삭감하고 안 갔으면 좋겠어요."



 지민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도대체 그 리셉션 안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길래 월급의 반을 받쳐서 안 간다는 소리까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석진은 그만큼이나 절박하게 본인이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거스트 자선행사 때 만난 또 하나의 지옥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모름지기 기싸움이 벌어지지만, 윤기는 그 경우가 더했다. 회장직을 맡기에는 어린 나이가 좋은 빌미였고, 동양인이라는 점이 윤기를 무시하려는 이유였다. 인종차별주의가 과거에 비해 줄긴 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인종차별주의가 있는 나라였다. 특히나 그 의식은 부의 집권층에서 더 드러난다. 작은 실수 하나라도 던져줄 수 없는 윤기의 위치는 윤기만이 아니라 그 주변조차 조여왔다.

 지민이 미라처럼 퍼석퍼석 말라가는 석진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 사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온 레이첼이 들어섰다.



"분위기가 왜이래요?"

"레이첼! 오셨어요? 식사는 잘 하셨구요?"

"왔어요…?"



 매번 하트 만들면서 노는 사람들이. 레이첼은 흐물흐물하게 앉아있는 석진과 자신을 보고 눈을 반짝 빛내는 지민을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다음으로 석진과 지민의 런치타임이다. 가서 먹고 와요. 친절하게 일러주며 레이첼이 일에 집중하려는 순간, 돌연 지민이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제안했다.



"우리 오늘 저녁에 모여서 식사하는 건 어때요? 한번도 다 같이 먹은 적은 없잖아요. 리셉션 준비 잘 마무리 된 기념으로요."



 다분히 충동적이었지만 지민은 뱉고 보니 꽤 좋은 제안이라 생각했다. 어거스트가 아닌 밖에서 시간제약 없이 여유롭게 식사를 하는 건 꽤나 좋을 듯했다. 당장 내일이 전용기를 타는 날이니 급한 심부름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식사를 끊는 불호령도 없고, 시간 때문에 대충 선택하는 메뉴가 아닌 곳에서 셋이 가지는 시간은 즐거울 것 같았다. 석진은 안색을 밝히며 제안을 반겼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요? 식당 괜찮은 곳 알고 있어요?"

"21번가에 피자 맛있는 곳이 하나 있는데, 예약 걸어놓을까요?"



 식당예약의 달인이 된 지민이 수화기부터 들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윤기 탓에 이곳 저곳 식당을 알아보고 포장하러 돌아다니다 보니 익숙해졌다. 석진은 언제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냐는 듯 고향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브로드웨이에 있는 혹시 그곳이요?



"거기 치즈타르트도 진짜 맛있잖아요."

"선배님도 아시는군요! 그거 입에서 살살 녹아요. 진짜 맛있어요. 듣기로는 여기 맥주도 맛있다고 하는데."

"후식으로 나오는 퍼넬케잌도 끝내주죠."



 석진이 가게주인처럼 메뉴를 앞장서서 설명했다. 거기 디저트로 나오는 펌킨오렌지잼이랑 화이트초콜릿은 어떻고요. 지민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석진이 풀어놓는 설명을 들었다. 21번가 식당의 디저트에서 시작된 설명은 미슐랭 3스타에 선정된 음식점까지 올라갔다. 지민이 훌륭한 방청객의 자세로 경청하고, 레이첼이 또 시작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즈음이었다. 지민이 참, 하며 말했다.



"레이첼은요? 오실 거죠?"



 엄청 맛있어요. 석진이 말을 보태왔다.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은 레이첼을 향해 네 개의 눈동자가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레이첼은 작성하던 서류를 멈췄다.



"아니요. 오늘 외근 나가…."



 정말요? 정말 안가요? 눈동자들이 뚫어져라 더 간절히 쳐다본다. 끙, 하며 레이첼이 작게 이마를 짚었다. 안 간다 말하면 저 기대들이 실망으로 변해 퇴근 전까지 책상 주변을 돌아다닐 것이다. 엄청 맛있는데…재미있을 텐데…. 시끄러운 원망을 듣느니 한번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레이첼은 작은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지민과 석진이 활짝 웃었다. 그러나 레이첼의 뒷말에 숨을 컥!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 점심시간 8분 남았어요.








 지민은 6시를 남겨놓은 5분전 코트까지 다 입고 있었다. 최근은 계속 일찍 퇴근했고,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특히나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참에 더 시킬 일이 무엇이 있으랴. 레이첼과 석진은 외근 후 사무실에 들리지 않고 곧장 식당으로 도착한다 일러주었다. 붕 울리는 진동을 확인하니 문자가 온다. 식당에 레이첼이랑 같이 도착했어요. 지민은 어서 윤기가 빨리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길 바랐다. 아 나도 빨리 가고 싶다.



"박지민."

"네!"



 상기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지민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퇴근해. 당연히 나올 목소리를 떠올리며 지민은 머릿속에 식당으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역시 택시를 타고 가는 게 좋겠지? 레이첼이랑 선배님이 기다리실 테니까. 지금 시간이면 정거장에 내려서 뛰어가는 게 빠른가.

 윤기는 만반의 퇴근 준비를 마치고 들어오는 지민을 위아래로 쭉 훑어 내렸다. 가방만 메면 순식간에 사무실에서 빠져나갈 기세다. 유난히 신나 보이는 목소리와 더불어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유순한 눈매는 누가 보아도 나 오늘 약속 있어요, 하고 티가 났다. 지민은 말없이 바라보던 윤기가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난번 썼던 아시아 경제투자논문 중국어로 번역해놔."

"…네?"



 뭐? 퇴근이라는 단어를 번역이라는 단어와 헷갈린 것인가 살펴보아도 윤기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다. 지민이 다소 어리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요?"

"그럼 언제 하게?"

"그…! 아…네…."



 난감해하던 지민이 끝내 어깨를 늘어뜨리고 수긍했다. 어찌 감히 내린 명령에 약속이 있으니 미뤄달라 부탁할 수 있겠는가. 부하직원의 사정 따위 윤기에게 있을 턱이 만무하다. 취소해야 되나. 내가 하자고 한 건데 뭐라 말하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레이첼과 석진이라면 윤기의 성격을 옆에서 같이 지켜봐 온 인물이고, 갑자기 일을 내렸다 하면 이해해줄 것이다. 지민은 완전히 풀이 죽어 물었다.



"더 시킬 일 없으세요…."

"내가 일 시켜서 싫어?"

"아, 아니요! 당연히 해야 하는 거죠. 미스터 윤이 제 보스인데."

"그 눈이나 어떻게 하고 거짓말을 해. 누구 만나기로 했나 봐."

"네? 아 그게…."



 지민은 우물쭈물 입술을 뗐다 붙였다 하며 망설였다. 그게 그러니까…. 말해도 되나? 진이랑 레이첼이랑 밖에서 같이 식사 약속이 있거든요. 순수한 의도로 정한 만남이지만 윤기 앞에서 말하니 어쩐지 너만 쏙 빼고 우리끼리 놀아요, 하고 전하는 것만 같아 불편했다. 내가 무슨 하이스쿨에서 파벌싸움 하는 소녀들도 아니고. 지민이 머뭇거리고 있자니 윤기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영어 까먹었어?"

"아닙니다…."

"아 그때 그 후배라도 만나나 보군."

"네? 후배…아 정국, 후배랑은 안 만나요. 그게…오늘 사실…."



 아까 심기가 불편해 보이더라니. 민윤기 앞에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민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레이첼이랑 진이랑 식사약속을 잡았거든요…이게 그러니까 점심시간에 갑자기 잡은 거라서…아 제, 제가 잡자고 한 거였어요! 두 분은 제가 가자고 하니까 알았다고 하신 거예요. 셋이서만 작정하고 가려던 건 아니구요…미스터 윤은 이런 약속 불편해하고 싫어하실 거 같아서 말씀 못 드렸어요. 절대로 불편해서 그런 건…."



 불편하다. 또 같이 밥을 먹으면 체할지도 모를 만큼 불편하다. 거짓말로 약간의 양심이 쿡쿡 찔렸지만 지민은 나름 꿋꿋이 변명했다. 윤기는 무슨 생각인지 드러나지 않는 견고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변명하는 지민을 가만히 바라다보았다.



"그래서 그…어쨌든 일 주신 게 있으니까 약속 취소하는 문자 보낼 거구요. 오늘 시키신 일 다 하고 퇴근하겠습니다…."



 시무룩하게 처진 눈꼬리가 허망하게 밥그릇을 물에 빠뜨린 새끼강아지를 닮아있었다. 처음 잡는 약속이었는데. 선배님이 많이 아쉬워하시겠지. 레이첼도 많이 좋아하진 않았지만 서운해 할 거야. 내 인생이 그렇지 뭐.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지민이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윤기가 지민을 불러 세웠다.



"그냥 가. 그런 표정을 하고 번역하면 퍽이나 잘하겠어. 이번 주까지 해놔."

"진짜요?"

"왜, 일본어로도 번역하라 해줄까?"



 비아냥거리는 말투지만 속뜻은 허락이었다. 지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있다 입을 함박 벌리며 웃었다.



"완벽하게 해올게요!"

"내 외투 가져와."

"네!"



 지민은 냉큼 밖으로 나가 옷걸이에서 에르메스 가죽재킷을 찾아 집무실로 들어왔다. 윤기의 뒤로 돌아가 재킷을 들어주며 윤기가 팔을 넣기 쉽도록 도와주었다. 자연스럽게 시중을 받는 윤기를 보며 지민은 민트색 뒤통수를 잘했다 쓰다듬고 싶었다. 드디어 배려라는 단어를 배웠냐며 꼭 끌어안아주고 싶기도 했다. 지민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피자를 그리다, 고민했다. 그래도 한번 예의상 같이 가겠냐고 물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윤기는 이런 트여있는 곳 따위는 가지 않는다. VIP시설도 따로 없으며, 일반 평범한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입에 델 리 없다. 분명 동석을 제안하면 코웃음을 치며 그딴 곳 너나 가라는 소리를 할 터이지만, 이건 기분의 문제였다. 주도하여 누군가를 따돌리는 위치는 되고 싶지 않다. 더욱이 지민은 찝찝한 것이 있다면 잠을 자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윤기가 옷을 다 입고 소매를 정리하고 있을 때, 지민이 작게 헛기침하며 물었다.



"저…혹시 괜찮다면 미스터 윤도 같이 가시겠어요?"



 윤기는 뒤로 돌아 지민을 빤히 쳐다봤다. 지민이 순간 가까워진 거리에 뒤로 한발 물러서며 덧붙였다. 아마 술은 안 마시고 피자랑 후식이랑 간단한 디저트를 먹을 거 같아요. 윤기는 지민의 예상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리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 하, 했다.



"됐어. 보나마나 어디 이상…."



 그러다 돌연 말을 멈췄다.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무슨 생각이 드는지 지민을 쳐다보다 고민하듯 흐응, 했다. 지민은 그렇지, 거절을 안 하면 민윤기가 아니지, 하고 흡족해하다 덩달아 멈칫했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윤기는 체스판을 조종하는 지략가 같은 폼으로 고민하다 기상천외한 답변을 내놓았다.



"좋아. 가주지. 안내해."

"네, 네?!"

"네가 부탁했잖아. 가달라고."



 부, 부탁까진 아니었는데. 지민은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확실한 거절의 의사였다. 갑자기 승낙 쪽으로 기울인 윤기는 진심으로 갈 생각인 듯 앞장서라며 엘리베이터 쪽을 턱짓했다. 지민은 몇 분전으로 돌아가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찌 돌이킬 방법이 없다. 제 입으로 꺼낸 말이고, 방금 안 간다 했는데 왜 가는 것으로 결정을 바꿨냐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민윤기는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하루에도 수백번씩 부리는 변덕을 깨닫고 이해하려면 수천번은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빨리 가."

"……."

"레이첼이랑 진이 기다린다며?"



 답지 않게 재촉도 한다. 지민은 윤기 모르게 이게 아닌데, 하고 입술을 꼭 깨물다 울상을 지으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레이첼과 석진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적은 메시지를 취소할 필요가 사라졌다. 그냥 미안하다는 거 말고 엄청 미안하다는 걸로 바꿔 보내야겠지…? 지민은 제 스스로 판 무덤이 제발 얕기를 바랐다.





 식당까지는 가는 동안 몸은 편했다. 버스나 택시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비싼 람보르기니 베네토는 매끄럽게 도로를 주행했다. 윤기는 묵묵히 입을 일자로 다물고 다리를 꼰 자세로 창문만을 봤다. 뒷좌석에 윤기와 같이 탄 지민은 마른 침만 삼켰다. 적막한 공기만 무거워진다. 이런 상태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문자를 보낼 정신도 들지 않는다. 석진과 레이첼에게 이 재앙과도 같은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손에 땀만 차던 지민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능한 많이 뽑아냈다. 하하 괜찮을 거야. 선배님이랑 레이첼도 밥 한 끼 정도는 괜찮다 해주실 거야. 어차피 사무실에서 맨날 다 만나는 사이들이잖아. 네 명이 같은 식탁에 있다 해서 무슨 큰 일이라도 나겠어. 그 사이 차는 달려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여기야?"

"네."

"가."



 지민이 앞장서고 윤기가 그 뒤를 따랐다. 매번 윤기의 뒤에 서있다 위치가 바뀌니 그것도 또 새로운 고문이었다.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고 싶어지고, 화장실로 사라져버리고 싶고. 차라리 석진과 레이첼이 저를 기다리다 지쳐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게 창가 자리 쪽을 차지한 금발의 늘씬한 미녀와 직장인용 수트를 입은 잘생긴 남성이 보였다. 석진이 레이첼과 대화를 하다 먼저 지민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민, 이쪽이에요!"



 지민이 난감한 눈웃음을 흘렸다. 하하, 네 선배님 저 왔어요. 근데 왔는데 말이에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윤기가 지민의 뒤에서 앞으로 나왔다. 석진은 민트색 머리카락을 보고 절로 떡 벌어지는 입을 막을 수 없었다. 석진의 표정이 변하자 레이첼 또한 무슨 일인가 하며 뒤를 돌아보다 윤기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확장시켰다. 윤기가 겉치레 섞인 말을 내뱉으며 4인용 테이블 의자를 하나 빼 앉았다.



"내 비서들과 오랜만에 재회하는군. 약속에 초대해줘서 고마워.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시키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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