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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12

by 토페 posted Dec 2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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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Herbie Hancock - Watermelon man>








 지민이 할당 받은 15분의 점심시간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그리 많지 않다. 초코빵, 치킨수프, 샐러드 몇 조각. 영양가 없는 음식을 여유 따윈 개나 주고 마시듯 삼키면 곧장 복귀시간이었다. 그마저도 제멋대로인 윤기가 회의시간을 앞당기거나 일정을 취소하면 반 토막으로 줄었다. 탓에 지민은 윤기가 정치가나 재력가와의 오찬 약속을 가질 때가 가장 좋았다. 정확히는 약속을 가지면서 따라오지 말라 명했을 때. 그때면 윤기의 등 뒤로 날개가 펄럭이는 환상이 보이기도 했다. 네, 다녀오세요. 방긋 웃는 얼굴로 배웅하고 나면 지민이 사랑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바로 어거스트 건물 근처의 브런치 가게에 갈 수 있는 점심시간이다.



"전 베이컨 포테이토 팬케이크 시킬래요."



 지민이 메뉴를 찍고 메뉴판을 석진에게 넘겼다. 대식가 석진은 지민보다 훨씬 넘치는 양을 주문했다. 그럼 난 크림치즈와플이랑 어니언햄버거. 점원이 메뉴판을 가져가자마자 지민은 신이나 말했다.



"레이첼 것도 포장해서 갈까요?"

"그거 좋네요."

"레이첼은 채식하니까…토마토샐러드로 가져가요."



 사무실은 반드시 한 명 이상 지켜야만 한다는 법칙이 있었고, 그에 레이첼은 자신이 빠질 테니 다녀오라 했다. 어차피 가도 먹는 건 똑같다는 말도 덧붙이며. 은혜로운 희생에 감명받은 둘의 표정을 보고 레이첼은 어서 사라지라 손을 내저었다. 지민은 길을 걷는 동안 석진과 목소리를 높여 레이첼을 칭찬했다. 전회장부터 현회장의 퍼스트비서를 맡을 수 있는 건 역시 레이첼 뿐이 틀림없다고.



"참 선배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어떤 거요?"

"그 있잖아요, 미스터 윤."



 막상 말문을 터놓고 지민은 쉽게 말하지 못했다. 그게 그러니까요. 뱅뱅 돌리는 이유는 좀체 그 단어가 걸려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물어보지. 미스터 윤이 저보고 아낀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볼 때 회장님이 약을 하는 거 같아요. 이런 말 따위를 제 입으로 하기 민망했다. 민윤기는 이런 거 뻔뻔하게 잘만 하는데 난 왜 안 될까. 내가 이래서 돈을 못 버는 걸까. 우물쭈물하며 지민이 머뭇거리는 동안 석진은 재촉하지 않았다. 내킬 때 이야기하라는 듯 물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편하게 기다렸다. 결국 꺼낸 말은 앞뒤가 다 잘려있었다.



"…미스터 윤 이상해요."

"맞아요, 이상해요. 이상할 만큼 꼬였죠.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한 사람만 존재해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설마 지민 그거 이제서야 알았어요?"

"에이, 설마요. 그런 거 있잖아요. 막 자기 멋대로 하고, 사람 대하는 거 쉽게 하고."

"거기다가 너무 자기 방식대로 부지런해서 주변을 괴롭히죠."



 석진이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회의시간 좀 제발 원래 시간에 진행하고, 입맛이라도 덜 까다로우면 좋으련만 까칠함의 표본이란 표본은 다 모아놨다. 윤기를 욕할 의도가 없던 지민은 당황하다, 틀린 말 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긴 한데요.



"그런데 그 좀 약간 다른 의미로 변덕스럽다고 해야 되나…."

"어떤 거요?"

"어느 날 갑자기 다르게 행동한다거나 하는 거요. 친절해지시고, 상냥해지시고 농담도 하시고 또 치, 칭찬도 하시고요."



 돌리고 돌려 말한 대체단어가 칭찬이었다. 석진이 고심하듯 중얼거렸다.



"흐음…가끔씩 일 잘할 때면 웃긴 하시죠. 약간 사기꾼이 사기치고 성공했을 때 웃는 거랑 비슷하긴 하지만요."

"다른 때는요? 평상시에요. 예를 들어…식사할 때라거나?"

"평상시요? 회장님과 친절이랑 칭찬, 그리고 상냥이라…."



 지민은 귀를 쫑긋 세웠다. 있어요? 긍정하길 바랐다. 있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단순한 변덕으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 사람 칭찬도 하고, 돈이 오가는 거래의 현장이 아닌 곳에서도 매너를 내보인다는 답이 듣고 싶었다. 고심하던 석진이 이내 괴담이라도 들은 것마냥 어깨를 떨었다.



"새로운 유머 연구하는 거면 실패에요, 지민. 농담이라면 웃겨야 하는데 그건 무섭잖아요."

"…무서워요?"

"생각해봐요. 만약 지민이 야근하고 있는데 미스터 윤이 다가와서 커피라도 마시라고 내미는 모습을."



 지민은 석진의 말을 따랐다. 책상으로 다가와 걸터앉아 슥 커피를 내미는 섬세한 손. 귀로는 달달하고 매력적인 중저음이 쏟아진다. 힘들어? 연이어 머릿속의 윤기는 매끄럽게 웃으며 말했다. 쉬엄쉬엄 해. 아끼는 비서를 고생시키긴 싫어. 상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썩어가는 지민의 표정을 보고 석진이 거 보라는 듯 웃었다.



"어때요, 무리죠?"

"네. 그건 정말 아닌 거 같아요. 차라리 일주일 동안 사자랑 동물원 안에서 동거할래요."



 상냥하고 친절한 민윤기는 그 딱딱한 무표정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금요일 날 일어난 일을 설명하지 않는 이상 원하는 답을 얻을 순 없을 듯했다. 원망이 또 윤기에게로 튀었다. 그러게 평소에 덜 삐뚤어졌으면 좀 좋아. 지민은 나온 팬케이크를 자르며 말을 바꿨다.



"선배님 그럼 선배님은 어떤 비법이라도 있어요? 일년이나 계셨는데. 혼날 때나 일할 때 노하우 같은 거."

"일은 성실하게 하는 거 말곤 딱히 알려줄 게 없네요. 뭐…혼날 때라면 약간의 수법이 있죠."

"진짜요? 저도 알려주시면 안돼요?"



 석진은 햄버거를 크게 한입 물고 삼킨 뒤 흐뭇하게 웃었다. 큼큼, 뭐 대단한 건 아닌데. 우러러보는 동그란 눈동자는 언제 받아도 어깨를 올라가게 만든다.



"비법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거 까진 없어요."

"뭔데요? 뭔데요?"

"그냥 잠시 뇌를 꺼놓으면 돼요. 최면 같은 느낌이죠."



 핸드폰 꺼놓는 것처럼. 석진이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지민은 세기의 요리비법이라도 들은 것처럼 오오, 하며 눈에서 별빛을 뿌렸다.



"선배님은 그런 게 자유자재로 가능하세요? 역시 선배님!"



 석진은 뿌듯하게 웃으며 나름 겸손한 척을 했다. 아무나 다 되는 건 아닌데, 또 나니까 되는 거 아니겠어요. 예쁘게 쳐다봐오는 막내비서 앞에서 부작용은 말하지 않았다. 넌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며 윤기가 더 화를 내거나, 레이첼이 한심하게 보다 옆구리를 꼬집어온다는 사소한 문제점들 말이다. 으스대고 있자 지민은 제게도 그 비법을 전수해달라며 졸라왔다.



"그건 앞으로 차근차근 알려줄게요."

"네, 선배님!"

"어쩜 대답도 예쁘게 할까. 내가 진짜 지민 때문에 산다니까요. 여기 콜라 좀 마셔가면서 먹어요. 체하겠네."



 석진이 콜라를 내밀어가며 지민을 챙겼다. 썰라고 준 팬케이크와 포크를 자르기 귀찮은지 거의 덩어리째 입에 쑤셔 넣고 있으니 걱정이 됐다. 지민은 콜라를 마시며 감사하다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석진은 햄버거를 먹던 속도를 조금 늦췄다. 신기했다. 밝고 천성이 따스한 지민은 챙김 받는 게 익숙할 법한데, 의외로 그런 것들을 낯설어했다. 사랑을 퍼주는 건 능숙하지만 받는 것엔 서툴러한다.



"맞아, 그러고 보니 작가가 울면서 선배님한테 전화했다면서요?"



 레이첼이 그거 때문에 골머리 썩는다던데. 레이첼이 그리 건성으로 전화에 대답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네, 힘드시겠어요. 하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그사이 손은 바쁘게 타자를 치고, 눈은 윤기의 스케줄러를 훑고 있었다. 기계적인 위로는 자동응답기보다 무성의했다. 한참을 위로하다 끊은 레이첼에게 무슨 전화냐 묻자 레이첼은 작가예요, 하더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답해줬다.

 석진이 일순 식욕이 떨어진 듯 와플을 쿡 찌르고 멈췄다.



"그 얘긴 진짜 꺼내지도 마요."



 석진은 분노로 불타며 와플을 으적으적 씹어먹고 휴지로 입가를 훔쳤다.



"엊그제 저녁엔 한 시간이나 붙들고 안 놔주더라니까요. 이럴 거면 왜 자신을 고용한 거냐, 자율적인 작품의 권리를 보장해달라, 그게 아니면 정중하게 부탁해달라. 그리고 또 뭐라더라? 아무튼, 미스터 윤한테는 못하겠고, 그러니 말 좀 잘 해달라 우리만 괴롭히고 있는 건데…다 불가능한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별 수 있나요. 참고 하라고 다독여야죠. 그런데 나름 작가 입장이 이해는 가요. 이건 뭐 완전히 영화를 같이 만들고 있으니…."



 지민도 얼추 눈치를 채고는 있었다. 작가로부터 시나리오를 받고 이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고치라 되돌려 보낸 것만도 다섯 손가락이 넘는다. 윤기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권리를 부수며 거기서도 제 입맛대로 사람들을 주물렀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이 올라갈 때 작가자리에 윤기의 이름을 같이 넣어야 할 수준이라던가.



"그쪽도 고생이 만만치 않네요…."



 그래…민윤기한테 월급 받는 사람들 처지가 다 똑같지. 밑도 끝도 없는 노동력 착취, 열악한 근무환경, 심각한 정신노동. 지민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짧게나마 위로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문자 온 거 보니까 오늘 부로 전화 안 올 거 같아요. 이번 수정본은 엄청 자신 있어 하던데요? 배역도 주인공은 정해졌고요."

"헉 진짜요? 누구요?"

"뷔라고 하던데요."



 석진이 큰 감흥 없이 말했다. 지민은 빵을 자르던 포크와 칼을 멈췄다. 맙소사.



"뷔? 그 뷔요?"

"네. 알아요, 지민?"

"저 진짜 팬이에요!"



 지민이 소녀팬처럼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뷔라니. 그 배우라니. 뷔는 지민이 유일하게 작품을 챙겨보는 배우였다. 그가 출연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모으던 하이틴 드라마도 시리즈 별로 다 챙겨봤으며, 그를 단숨에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는 극장에 가 열 번이나 봤었다. 지민은 좋아하는 연예인을 꼽으라면 단연 뷔를 1순위로 꼽을 만큼 좋아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 못하겠는지 볼까지 살짝 붉히는 지민을 석진이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연예인에 관심 많은 줄은 몰랐어요, 지민. 그럼 조금 더 일찍 알려줄걸."

"관심은 원래 딱히 없는데 그 배우만은 엄청 좋아해요. 저 스카이 가든 때부터 좋아했거든요."



 스카이 가든은 뷔의 데뷔작이었다. 하이틴 드라마로 십대들 사이에서 눈보라 치듯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며 뷔라는 배우를 사람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시켰다. 스카이 가든 속 뷔는 지민의 고교시절 우상이었다. 똑똑하고 잘생겼으며,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멋진 엘리트 학생이었다. 우울한 고등학생이던 지민은 그를 보자마자 동경에 빠져버렸다. 심지어 존경하는 인물 칸에 뷔의 배역 이름인 칸 데이슨을 써낸 적도 있었다.



"복귀작을 고르고 있다고는 들었었는데, 그게 이 영화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저번 라이프 허슬 영화 찍고 나서는 쉰다고 했었잖아요. 아 그 영화 진짜 대단했는데…! 눈빛연기가 압권이었죠. 적이랑 싸우다가 분수대에 들어가서 숨었던 거, 그 장면이 애드립이었다면서요?"

"진짜요? 그 친구 연기 잘한다고는 생각했었는데. 제법이네요."

"그쵸? 엄청나지 않아요? 20대 배우 중에서 가장 연기 잘하는 배우가 틀림없어요."

"일단 몸값은 제일 비싸다면서요. 잘됐네요. 그럼 이번에 가서 말 좀 걸어봐요. 리셉션에 올 거예요."

"네에?!"



 저, 정말요? 지민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쿵쿵 설렘으로 뛰었다. 내가 뷔랑 말을 하고, 내 코앞에 뷔가 있다니. 아아 민윤기 아래서 개처럼 구른 건 다 이순간을 위해서 그랬던 거야. 그 잘생긴 얼굴을 보면 돌처럼 굳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악수하면 그날은 손 씻지 말아야지. 뷔를 떠올리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민이 상기되어 말했다.



"선배님, 선배님 이번 영화 무슨 내용이에요?"

"글쎄요. 내용은 안 봐서 모르겠고 제목만 알아요."

"그럼 제목은 뭐예요?"



 호기심 가득한 팬심을 담아 지민이 물었다. 석진은 크림을 듬뿍 올린 와플의 마지막 조각을 삼키고 말했다.



"아스팔트 정글이라던가? 위에 그렇게 적혀있었으니 맞을 거예요."

"아 벌써부터 엄청날 거 같은 제목이에요. 하긴 뷔가 나오는데 당연히 엄청나겠죠. 어서 보고 싶다…."



 꿈에 젖은 지민이 중얼거렸다. 내 배우의 소식을 이렇게 듣다니. 이게 바로 권력의 맛일까. 반절 정도 남은 팬케이크를 잘라 행복하게 입에 밀어 넣은 때였다. 석진의 전화가 울렸다. 석진은 발신인을 보곤 음식물이 막힌 듯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지민을 불렀다.



"지민."

"네?"

"레이첼한테 전화 왔어요."



 지민은 입에 씹고 있는 팬케이크가 갑자기 돌로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행복하던 만찬의 식탁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석진이 비장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커피랑 또, 어떤 거요? 알겠어요. 금방 갈 테니 기다려요."



 전화는 짧았다. 지민이 긴장하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설마…벌써요?"

"지민은 나가서 이대로 스타벅스 들려서 커피랑 미술관에 들려서 그림 찾아와요. 미술관은 55번가에 있어요. 미스터 윤 10분 뒤에 들어온다고 했으니 난 먼저 가서 있을게요. 빨리 와요."

"네, 네. 선배님 먼저 가세요. 제가 계산하고 갈게요."

"부탁해요."



 어깨를 두드린 석진은 꼬리에 불붙은 말보다 더 빨리 떠났다. 테이블에 남은 음식이 반절이었다. 콜라는 반절도 채 마시지 못했으며, 토마토 샐러드는 챙길 시간도 없었다. 지민은 마찬가지로 식사를 끊고 일어나 계산한 다음 맨해튼의 거리로 나왔다. 복잡한 사람들 틈에 섞여 어깨를 부딪치며 뛰었다.







 차를 사자. 돌아오는 내내 지민은 그 생각뿐이 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직장을 다니려면 아무래도 두 다리로는 힘겹다. 아침에 지하철 타고 출근하는 것도 참을 수 있고, 땀나도록 뉴욕 길바닥을 뛰어다니는 것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제 키의 절반을 넘는 것 같은 그림을 들고 돌아다니는 건 참을 수 없다. 품에 끌어안지도 못할 만큼 넓은 그림을 모시고 걷다 부딪친 횟수만도 다섯 번이 넘는다. 그림인간에 부딪힌 사람이 으악! 비명을 지르면 지민도 같이 죄송합니다! 하고 외쳤다. 내가 오늘 꼭 집에 가서 중고차라도 알아볼 거야. 커피까지 들고 돌아오니 이미 행색은 만신창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민은 너덜너덜해져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누가 커피 좀 받아주시면 안될까요. 헥헥거리며 말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선배님이 안 계신가. 그림을 아래로 향하게 내리고 시선이 트이자 사무실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누가 폭탄이라도 쏜 거야? 지민이 놀라 입을 떡 벌린 채 빙 돌며 사무실을 돌아봤다. 사무실은 난장판이었다. 종이들이 바닥에 양탄자처럼 마구잡이로 깔려있었고, 석진과 레이첼의 책상 모두 엉망이 되어 포스트잇이 복잡하게 붙어있었다. 사무실 바닥에 널린 종이를 발로 밀며 지민은 책상에 엎드려있는 석진을 향해 다가갔다.



"서, 선배님? 진?"



 기절한 듯 엎어진 석진이 스르륵 일어났다. 환경오염에 썩어가는 나뭇잎처럼 그새 푸석푸석했다.



"왔어요, 지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 두 시간 채 못 되는 시간에 도무지 어떤 일이 벌어지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지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석진은 무덤에서 나온 미라보다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선배님, 선배님 정신차리세요! 지민이 어깨를 붙잡고 짤짤 흔들고 나서야 석진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넋을 놓다 입술을 열었다.



"그게 아까 마지막 원고를 받아왔는데 그 원고파일이…."



 그 순간, 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레이첼이 뛰어들어왔다. 늘 완벽한 그녀의 화장이 살짝 번져있었다. 지민에게 붙들려 있던 석진이 벌떡 일어나 레이첼에게 다가갔다. 레이첼이 먼저 들썩거리는 숨을 누르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성공이에요?"

"레이첼은요?"



 짧은 침묵과 함께 눈빛이 오갔다. 둘은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결과를 파악했다. 실패구나. 실낱 같은 희망을 서로에게 걸고 있다, 방금 짤막한 대화로 모든 게 무너졌다. 레이첼은 버건디색 립스틱이 짙게 발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더니 이마를 부여잡고 하늘을 보며 기도하듯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Shit, 욕을 짓씹고 쉴새 없이 책상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찾듯 뒤적인다. 지민이 눈치를 보다 레이첼에게 주춤주춤 다가갔다.



"레이첼 무슨 일이에요?"

"지금 바빠요. 설명할 시간 없어요. 진! 멍청히 서있지 말고 움직여요! 아직 미스터 윤 오기까지 10분 남았잖아요. 다시 작가한테 전화 걸어보기라도 해요!"



 레이첼이 날카롭게 외쳤다. 석진은 가로등처럼 멍하니 서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50번도 넘게 걸었는걸요. 무인도에 처박힌 사람한테 어떻게 연락을 취하는 건 직접 가서 전하는 거 말고는 없어요. 군부대에까지 연락해서 알아봤는데 헬기도 뜨지 못한대요.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가는 항로에 태풍이 쳐서 태평양으로 갈 수 있는 건 적어도 3일 뒤라고 했어요. 다시 받아오는 건 어떤 방법으로든 절대 불가능해요. 아! 나가서 길가에 다니는 공대출신 한 명을 데려와서 돈을 주고 시키는 게 어떨까요?"

"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일반인한테 이 시나리오를 공개하자고요? 아예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시나리오를 띄우지 그래요? 이게 슈가 스튜디오에서 준비하는 영화고, 갑자기 잘 작동되던 원고파일이 다 깨져서 없으니 고쳐주시길 바랍니다 하면서요!"



 원고파일이 깨져…? 눈치를 살피며 중간에 끼어있던 지민은 석진의 모니터 화면을 확인했다. 치직거리는 화면 안 파일은 글자가 뒤틀리고 엉켜 깨져있었다. 이게 모든 문제의 원인인 듯싶었다. 지민이 작게 물었다.



"저 혹시 이 파일 복구하면 되는…."

"이 망할 작가 진이랑 마지막으로 통화했었죠? 그때 뭐라고 했어요? 언제 돌아온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음 이제 생각해보니 이 개 같은 핸드폰도 놓고 갈 거라서 드디어 미스터 윤 목소리랑 작별이라고 좋아한 거 말고는 없었어요. 레이첼 이럴 바엔 차라리 이 원고 뒤에 우리가 쓸래요? 내가 반, 레이첼이 반 쓰는 거예요. 어렸을 때 기자가 꿈이었거든요. 장르는 SF로 변경해버리는 거예요."



 레이첼은 해탈한 듯 하하 웃고 있는 석진을 한심하게 쳐다보고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했다. 나름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석진은 진심으로 쓸 작정인 듯 유일하게 깨끗한 지민의 책상에 앉아 메모장을 켰다. 그러다 한 줄을 쓰고는 책상에 털퍽 엎어졌다가 일어나 해사하게 웃었다. 내 정신 좀 봐. 제일 좋은 방법이 있는데 왜 고민하고 있었지.



"레이첼, 좋은 방법이 있어요. 들어볼래요?"

"빨리 말해요. 전화해야 되니까."

"바로 사표를 쓰는 거예요! 그럼 이 모든 고민이 사라지죠! 자 이건 내가 쓸 종이고."



 레이첼도 한 장 줄까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미소를 걸친 석진이 친절하게 종이를 내밀었다. 레이첼은 윤기 못지않게 싸늘한 표정으로 종이를 짓이겨 던져버렸다. 진이나 써요! 그에 정작 어정쩡하게 그림을 끌어안고 있던 지민이 움찔했다. 이게 바로 총성 없는 전쟁일까. 지민은 에러가 올라오고 있는 석진의 컴퓨터를 보다 조심스럽게 그림을 구석에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레이첼, 이거 제가 만져봐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어거스트입니다. 한가지 물어볼 사실이 있어 전화 드렸어요. 랩몬 작가님이랑 영화작업 같이 하셨죠?"



 씹혔다. 지민은 타깃을 바꿨다.



"선배…아, 아니에요."



 광기에 홀려 악보를 써내는 거장처럼 격렬하게 사표를 작성 중인 석진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지민은 오랜만에 전공지식을 꺼냈다. 이거 한번 예전에 과제하다 이렇게 됐었던 거 같은데. 일주일을 밤새 해낸 과제를 노트북이 먹어버린 적이 있었다. 못 알아볼 글씨로 깨진 화면은 피눈물을 흘리며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 간신히 해결했던 그 사태를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 때, 엘리베이터 문이 또 한번 열렸다.



"오 이런, 내 사무실에 눈이 왔는걸?"



 작게 휘파람을 분 윤기가 발에 차이는 종이를 지그시 밟으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레이첼은 전화를 급히 끊었고, 석진은 사표를 쓰던 펜을 떨어뜨렸다. 구찌 로퍼가 지나갈 때마다 하얀 종이들 위로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나갔다. 윤기는 책상에 앉아있는 지민을 흘금 보고는 관심 밖인 듯 레이첼과 석진에게로 시선을 박았다. 석진과 레이첼이 윤기 앞으로 나란히 모여 고개를 숙였다.



"한 시간 지났어."

"……."

"결과는?"



 무거운 침묵만이 존재했다. 윤기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정말 유능한 비서들을 뒀는걸? 고작 시나리오 하나 제본 떠서 가져오라고 했더니 말이야.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눈까지 내리는 더 대단한 일들도 하셨는데 고작 그걸 못하네. 첫눈을 보게 해준 거에 대해 고맙다고 하기라도 할 줄 알았어? 아주 실망이군."

"……."

"작가는?"

"…연락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레이첼이 먼저 결과를 읊었다. 그 말로 모든 것이 정리가 가능했다. 한 시간 동안 해결한 것은 없으며, 사무실은 개판으로 만들어 놓았고, 뒤늦게라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말한 것이다. 윤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 웃으며 팔짱을 꼈다. 한 시간 동안 일을 이 따위로 했다는 거야?



"잤어? 아니면 놀았나? 컴퓨터 게임? 경험치는 많이 쌓았고?"

"……."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내가 급하게 두 명이나 더 뽑아야 하잖아. 리셉션까지 2주남은 마당에."

"저…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미스터 윤."



 지민이 소심하게 한쪽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윤기의 냉기 어린 시선을 받으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간담이 서늘했다. 감히 네가 지금 말을 끊어? 시시한 일이면 죽여버리겠다는 듯한 눈동자는 언제나 무섭지만, 화가 났을 때는 유독 무서웠다. 지민은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제본으로 뽑아서 가져다 드리면 될까요…?"

"뭐?"



 윤기가 눈썹을 찡그렸다. 석진과 레이첼이 동시에 지민을 쳐다봤다. 셋의 시선을 모두 받은 지민은 눈을 깜빡거리다, 모니터를 윤기가 볼 수 있도록 돌려주었다. 언제 오류가 있었냐는 듯 멀쩡한 화면이 모니터 속에 떠있었다. 석진과 레이첼의 눈이 확장될 수 없을 만큼 크게 확장됐다.



"이게 필요하신 거 같아서…그런데 고장 나있길래 고칠 수 있을 거 같아서 고쳤거든요…."



 빤히 쳐다봐오는 시선들에 민망해진 지민이 뒷목을 작게 긁적거렸다.



"저는 뉴욕대 공학부를 졸업했고…음 그러니까…이런 문제 정도는 해결할 수 있고…아! 시나리오는 안 봤어요. 방금 바로 고쳐서 보여드린 거예요."



 잊혀졌던 기술자가 여기 있었다. 한시름 덜었다는 듯 석진과 레이첼이 긴 안도의 숨을 들이켰다. 윤기는 모니터를 한번, 지민을 한번 쳐다보더니 팔짱을 풀었다. 바닥에 깔린 종이를 발로 퍽 찼다.



"너넨 이거 치우고 넌 그거 제본 가져와."

"네!"



 이제 다시 평화다. 지민은 돌아온 평화가 좋아 속으로 안도했다. 큰 일이 나기 전에 처리해서 다행이야. 하루라도 살얼음판이 아닌 날이 없네, 없어. 윤기가 다시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커피는 어디 있지?"

"아 여기요!"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지민이 냉큼 책상에 놓았던 커피를 내밀었다. 윤기는 커피를 받고 지민에게 잠시 시선을 뒀다. 그러다 이번에는 레이첼을 향했다.



"가져오라는 그림은 어디 있어?"

"그림 여기요!"



 지민이 벽에 세워놨던 그림을 이고 끙끙거리며 가져왔다. 윤기는 커피를 든 채 지민을 잠자코 응시했다. 지민은 긴장했다. 이번에 나 좀 잘하지 않았나. 깊은 시선은 지민을 위아래로 훑고는 꽤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느릿하게 커피잔에 입술을 데고 마시면서도 눈은 지민을 향한다. 윤기가 목울대를 울렁거리며 말했다.



"…수고했어."



 그리고는 지민을 스쳐 지나가며 덧붙였다.



"박지민."



 심장이 부풀어오른다. 지민은 그림을 놓칠 뻔하다 아래 내려놓았다. 급하게 내려놓다 발이 찧일 뻔했다. 멀어지는 민트색 머리카락을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뜨고 봤다. 지금, 민윤기가 나 부른 거 맞지. 뭉개지는 발음이 아니라 또박또박한 한국말로 된 제 이름이었다. 확실히 박지민이었다. 지민은 환하게 웃었다. 기쁨의 꽃이 눈웃음을 비롯해 가슴팍까지 진하게 피어났다.



"네! 감사합니다!"



 크게 답하자 집무실로 들어가던 윤기가 짧게 구박했다. 시끄럽고 빨리 다녀와. 지민은 그 구박에도 헤죽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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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브금 맞습니당 태형이랑 지민이가 춤 췄던ㅋㅋㅋㅋ저도 주신 피드백들 맨날맨날 본답니다ㅠ-ㅠ 글이 안 써질때 계속 다시 들여다봐요ㅠㅠㅠㅠㅠ피드백으로 걱정해주시고 재미있다 해주시는 천사님들두 감기 조심하세요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