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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11

by 토페 posted Dec 1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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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Gotye - Somebody That I Used To Know>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까지 고생했다. 하루 종일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웩웩거리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등을 두들겨주고 돌봐주던 정국은 한층 체기가 가시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정국아 내가 돈 많이 벌면 너한테 빌딩 사줄게. 이거 진짜야. 침대에 누워 골골거리고 있는 지민이 웅얼거리자 헛소리할 시간에 자라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지민은 일요일 오후 1시즈음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그마저도 일어나기 싫어 게으름을 부리다 이부자리를 파고들어오는 햇빛에 어기적어기적 눈을 떴다. 아파 못 먹은 만큼 배도 고팠다. 사람은 왜 꼭 밥을 먹어줘야 하는 걸까. 이불에 엉켜있던 지민은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한탄했다.



"내 주말이 이렇게 끝이라니…."



 모든 주말 일정이 무너졌다. 매일매일 받쳐야 할 영화감상문도 미리 써놓지 못했고, 윤기가 지시한 어거스트 중국 본사에 보낼 편지 내용도 짜지 못했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더라. 신발장정리, 빨래방 다녀오기, 마트 가서 일주일 치 장 봐오기. 밀린 일 더미를 세던 지민은 일단 밥부터 먹자며 어제 저녁 정국이 만들어놓고 간 수프를 떠 식탁에 앉았다.

밀린 일, 그보다 다른 문제가 있지. 늘 무서운 월요일이 더 무서운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



 사적인 장소에서 상사가 칭찬을 했다. 필요해서요, 제가. 민윤기는 신사 같은 미소를 걸치고 이런 말도 했었다. 굉장히 아끼고 있습니다. 떠올리던 지민은 이내 냉큼 머릿속에 차려진 프랑스식당의 테이블을 뒤엎었다. 아 다시 얹힐 거 같아. 떠올리기 만해도 목까지 닭살이 오돌토돌 돋아난다.

 드라큘라 백작한테 사랑고백 받으면 이런 기분이려나. 물론 사랑고백과는 먼 대화였지만, 지민이 느낀 기분은 그러했다. 떨림보다는 그대로 있으면 제 피를 다 뽑아먹었을 거 같은 그런 불안감. 가만 민윤기를 드라큘라 백작과 대치해보니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이미지와도 비슷하다.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며, 사람을 압도하는 눈빛이며,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주목 받는 오묘한 분위기며. 지민은 뾰족한 송곳니의 윤기를 그리다 으, 하고는 수프를 한 숟가락 더 떠먹었다.



"…음…그래도 이제 내 이름으로 불러주려나?"



 박지민이라고 한번 불러줬으니까 불러주지 않을까. 비록 상황이 좋진 않았지만, 윤기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이 뿌듯해 지민은 숟가락을 물고 베시시 웃었다. 그래도 한 사람으로서 기억해주긴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머리 좋은 민윤기가 내 이름 모른다는 건 역시 말이 안 되지. 박지민이라고 계속 불러주면 좋을 텐데. 앞으로 레이첼이라고 안 부르면 헷갈려서 늦게 가지 않게 되고, 그러면 죄송하다 말할 거리가 줄어들고.

 행복한 꿈도 잠시, 지민은 급격히 식욕이 떨어져 내렸다. 정국이 쳐놓은 사고를 어떻게 뒷수습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고민한다 해서 해결 될 부분은 아님을 지민은 알고 있었다. 친한 친구 대하듯 미안하다 전화를 거는 건 어불성설이고, 문자를 남기는 건 제 손으로 목을 졸라달라 재촉하는 것 같았다. 어떡하냐, 나.



"하…."



 지민은 자꾸만 떠오르는 금요일 날 상황을 지우고 수프그릇을 비웠다. 일단 윤기가 시킨 남은 일을 처리하는 게 먼저다.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영화감상을 끝내기 위해 노트북을 들고 침대에 착석했다. 그러다 반드시 밥 먹고 약 챙겨 먹으라 머리맡에서 계속 잔소리하던 정국의 목소리가 떠올라 협탁을 뒤적였다. 귀찮아 한 손으로 대충 뒤적이고 있던 중, 무언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응?"



 지민은 허리를 굽혀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 입구가 뜯어진 아스피린 박스였다. 민윤기가 엘리베이터에서 떠넘기듯 건넸던 약. 감기가 걸린 날 한 알을 까먹고 비몽사몽 협탁에 넣어놨던 것이다.



"…아씨…."



 간신히 민윤기 생각 밀어냈는데. 지민은 윤기를 원망했다.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 거야, 어? 아낀다는 둥, 곤란하다는 둥. 언제 상냥하게 대한 적이나 한번 있냐고. 매번 쓴 소리만 듣다 단 소리를 들으니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당사자에게 그날 왜 그런 미친 소리를 한 것이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에 관련된 질문조차 금기인 윤기가 말해줄 리 만무하다. 고민하던 지민은 가만 약 상자를 만지작거리다 노트북 앞으로 달라붙었다.



"민…윤…됐다."



 고작 떠올린 게 인터넷 검색이었다. 민윤기에 대해 조금 더 알면 알 수도 있겠지, 뭐. 검색하자마자 촤르르 뜬 화면에 곧장 윤기의 프로필이 뜬다. 연설하는 사진, 취임식 때의 사진. 아래로 하버드 경영대를 졸업했다는 학력과 함께 가족관계, 어거스트의 CEO라는 글자가 시선을 이끌었다. 이때부터 민트색 머리카락이라니. 지민은 이미지랑 다르게 민트색을 좋아한다며 꽤 구석에 처박혀있는 기사를 클릭했다.



[어거스트 현대표, 과거 파파라치 폭행. 탕아의 끝은 어디인가?]



 자극적인 제목을 보며 지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아는 민윤기는 말로 사람 패지, 직접 패는 사람이 아닌데. 의문은 기사를 내릴수록 조금씩 풀렸다. 사진은 윤기의 양아버지인 로빈츠 하트만 전회장의 장례를 치른 뒤, 집에 박혀 일주일간 죽은 듯 나오지 않다 처음으로 윤기가 모습을 드러낸 날 찍힌 것이었다.

 첨부된 영상을 재생하자 개미처럼 바글바글한 파파라치들이 짜증나는 듯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윤기가 그 속에 있었다. 욕이라도 하는 듯 주변 인물들이 한껏 쫄아있다. 경호원들이 치우라는 손짓에도 카메라맨은 꿋꿋이 카메라를 유지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미스터 윤. 카메라맨의 목소리에 윤기의 인상이 사람 하나쯤은 칼로 찌를 수 있을 듯 더 일그러졌다. 영상에서 멀찍이 서있던 윤기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카메라 화면을 손으로 잡고 아래로 내렸다. 작작 찍고 꺼져. 카메라맨은 당황하더니 고소한다 외치기 시작했고, 윤기는 더 싸늘해진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그 뒤로 화면은 거세게 흔들리며 하늘과 땅바닥을 찍다 검은색으로 암전됐다.


 영상을 다 본 지민은 윤기에게 연민을 느꼈다. 개인적인 슬픔조차 이득과 실을 따져야 하고, 가십거리로 소비된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언론은 무수히 많은 비난을 쏟아냈다. 곁에 있던 가족은 떠나고, 남은 자신의 밥그릇을 노리고, 주변에서는 비난한다. 그런 삶이 얼마나 지독하고 외로웠을지 지민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어지간한 가십에는 코웃음도 안 치는 마른 등이 떠올라 가슴 한쪽이 짠했다.



"…이런 거 볼라고 검색한 건 아니었는데…."



 지민은 윤기의 기사사진을 보다 노트북을 덮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나도 어이없네. 왜 계속 민윤기 생각만 하고 있는 거야. 말 한번 곱게 하지 않는 사람 뭐가 좋다고. 그럼에도 외면은 하지 못하겠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이런 사실을 알아갈수록 속에서 무언가 하나씩 툭툭 걸렸다. 다시 속이 얹힌 것처럼 불편해 뒤척거리던 지민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몰라. 이게 다 민윤기가 맨날 말도 안 되는 일 시켜서 그런 거야.

 투덜거리고 있을 무렵, 폰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도 안 하고 받은 지민은 정국이겠거니, 했다.



"여보세요."

[우리 아들, 잘 있었어?]

"엄마!"



 지민은 미소를 만개하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전화요금도 전화요금이지만 정반대의 시차 탓에 전화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퍽퍽한 삶에 지쳐가던 목소리에 사랑스러움이 깃들었다. 엄마, 보고 싶었어요. 전화를 받는 상대편은 애교부리는 듯한 지민의 목소리에 호호 웃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아니에요. 그냥 몸이 쫌 아팠어요. 그런데 이제 괜찮아요."

[많이 아프니? 이제 괜찮은 거야?]

"네,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정국이가 챙겨줬어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니까 말끔하게 낫는 거 있죠?"



 다소 과하다 싶을 만큼 지민은 괜찮다며 어른스러운 척을 했다. 어렸을 적부터 습관이었다. 내가 이러면 엄마가 걱정하실 거야. 안 그래도 힘드실 텐데 나까지 짐이 될 순 없어. 눈물을 꾹 눌러 참는 법부터 익혔고, 정말 힘들어 못 견딜 때만 마지못해 울음을 토했다.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 때, 속으로 더는 울음을 삼키지 못할 때. 지민이 목놓아 울음을 내비친 때는 고모할머니가 눈을 감은 순간뿐이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마요, 엄마. 지민은 히히 웃으며 내용을 환기시켰다.



"한국은 지금 새벽 아니에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엄마가 우리 아들 긴장하게 했나 보네. 그건 아니니 걱정 말렴. 잘 하면 여기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우리 아들한테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단다. 일년 정도만 더 있으면 괜찮아질 거 같아. 그렇게 되면, 그럼.]



 여인은 감정에 벅찬 듯 말을 잠시 끊었다.



[그럼 이제 다시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원한 소식을 들은 기분은 얼떨떨하고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지민은 울먹거리는 여인을 달랬다. 엄마, 왜 울어요. 좋은 소식이잖아요. 그러다 전화 반대편에서 다른 목소리들이 들렸다. 누구야아, 지미니 형이야? 잠에서 깬 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세 명의 동생 중 이제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는 막내가 틀림없었다. 미국에 건너올 당시 뱃속에 있어 얼굴도 보지 못한 막내는 어린 구석이 남아있었다.



"에이, 엄마 동생들 잠을 깨우면 어떡해요. 이제 그만 우세요."



 지민이 농담 식으로 가볍게 웃었다. 애들 학교 내일 다 지각하겠네. 상대방이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언제나 사랑한다. 보고 싶다, 우리 아들.]

"나도요, 엄마.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전화를 끊은 지민은 폰을 꾹 쥐었다. 나도 여기서 열심히 해야지. 먼 미래를 그리며 다부지게 노트북을 열었다.









***









 출근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을 모으고 윤기를 기다리는 지민은 바짝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쓸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괜히 소매를 펴고 잘 준비를 하는 바쁜 햄스터처럼 유난을 떨었다. 천장을 봤다가 땅을 봤다가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까지 했다. 혹시 모르니까 사표 챙겨올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써놓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민윤기에게 싸움을 건 행동은 미친 짓이었다.  레이첼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어라 입을 열기 전, 냉큼 석진이 다정하게 물었다.



"지민, 무슨 일 있어요?"

"네? 아,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분명 무슨 일이 있다. 과장되게 손을 휘저으며 도리질을 치는 폼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때랑 같은 걸요? 멀쩡해요. 지민이 필사적으로 주장하자, 석진은 꺼림직하면서도 못내 속아 넘어가 줬다.



"음…아무일 없다면야…."

"그럼 가만히 좀 있어요. 정신 시끄러워요."

"죄송해요, 레이첼."



 티가 나나 보다. 진심으로 사과한 지민은 말이 무색하게 얼마 안가 또 눈알을 빙글빙글 굴리며 안절부절 했다. 석진은 한마디 쏘아붙이려는 레이첼의 손목을 붙들며 참으라 무언으로 사정했다. 레이첼은 눈을 가늘게 뜨다 됐다, 하고 작게 말하며 포기했다. 어차피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를 쥔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띵, 지민은 맑은 엘리베이터의 도착소리에도 파륵 떨며 긴장했다.



"안녕하…."

"버크셔에서 열리는 발표회 참여할 거야. 20분만 있다 나올 거니까 차 대기시켜. 운전기사 바꿔. 사막 한가운데에서 랠리라도 타는 줄 알았어. 면허 딴 건 맞는지 확인해봐. 십 분만 더 탔다간 어제 저녁에 먹은 거까지 다 토하게 생겼더군. 그리고 오늘 저녁은 코크 대표랑 미팅 잡아."



 지민은 다른 때보다 더 쭈굴쭈굴한 자세로 윤기의 뒤를 따랐다. 레이첼이 말을 받아 적고, 석진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듯한 지민을 걱정했다. 어쩐지 과도하게 눈치를 살피는 게 그 문제가 윤기와 관련되어있는 듯싶었다. 저러다 더 큰 일 생기는 거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거침없이 걸어가던 윤기가 뒤로 돌아 빈정거렸다.



"그렇게 양손으로 꼭 쥐고 있으면 내가 뺏어먹는 거 같잖아?"

"죄, 죄송합니…."



 지민이 내민 커피를 낚아챈 윤기가 캐주얼한 와인색 수트재킷을 뒤로 집어 던졌다.



"중국투자회의 결과 보고서는 왜 아직까지 안 올라오는 거야. 아아 족친지 얼마나 됐다고들 또 일을 안 해. 내가 월급 주는 게 사람인지 비둘기인지 헷갈릴 지경이야. 차라리 햄버거 패티를 고용하는 게 더 쓸모 있어 보이는군. 아니지. 상한 양상추가 더 나을 수도 있겠네. 오늘 저녁까지 내 책상에 안 올릴 거면 보고서 말고 사원증 올리라고 해. 돌려받을 생각은 하지 말고."



 윤기의 옷을 끌어안고서 지민은 안심했다. 비평을 퍼붓고 있는 윤기는 평상시 그대로였다. 서늘한 무표정으로 왜 내가 뽑지도 않은 사람이 여기 있지, 하고 커피를 제 머리에 부어버리는 상상은 다행히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너."

"네, 네?"



 갑자기 돌아봐오는 날카로운 눈매에 허를 찔린 지민이 파닥거리며 윤기의 옷을 떨어뜨릴 뻔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처음 본다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윤기는 미간만 작게 구길 뿐이었다.



"옷 걸어 놓고 따라 들어와."



 불러서 죽이려나. 지민은 본능적으로 석진을 돌아봤다. 선배님, 함께해서 즐거웠어요. 레이첼을 향해서도 아련한 눈빛을 발사했다. 그리고 레이첼 은근히 많이 챙겨줘서 고마워요. 옷을 천천히 건 지민은 눈을 질끈 감고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부르셨어요, 미스터 윤."

"옷 하나 거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해?"

"다음부터 더 빨리 오겠습니다."



 윤기는 지민이 사온 일간지를 넘기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민은 아침 내내 했던 상상들을 다시 꺼냈다. 꺼내고 싶지 않아도 더 부피가 커져 알아서 날뛰었다. 저 명패를 내 머리로 던지진 않겠지? 잡지를 던질까? 아니면 아까 안 던진 커피? 커피는 뜨거운데. 안 되는데. 사부작거리는 종이소리를 따라 심장이 팔딱거렸다.



"앞으로 주말마다 스크린에 걸린 것들로 감상문 가져와."

"…네?"

"감상문 써오라고."

"감상문이라면 지금도 쓰고 있는데요?"



 이미 매일마다 써서 바치고 있다. 뭘 더 바치라는 거지. 못 알아들은 지민이 미약하게 항의하려다 제 처지를 되새기고는 눈만 감았다 떴다 했다. 윤기는 일간지를 접어 바닥에 버리고는 지민과 눈을 마주했다.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야?"

"…매일매일 쓰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진짜였군. 졸업장은 대학에서 그냥 기부해줬어? 그러니까 주말에도 써오라고. 현재상영중인 것들로."



 컴컴한 앞날에 윤기가 아예 검은 물감을 탈탈 털어 붓는다. 지민은 안 굴러가는 머리를 괴롭혔다. 현재상영중인 영화를 감상문을 써오라는 건 영화관을 가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주말마다 의무적으로 영화관을 다녀오라는 거다.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찬 명령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이건 그 중 으뜸이었다.

 내가? 영화관에? 매 주말마다? 영화관을 가는 것만 한 시간이다. 표를 예약하고, 보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족히 추가로 네 시간은 더 걸린다. 지민은 기가 차 대답도 까먹고 윤기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정리하면 간단했다. 방금, 민윤기가 제 주말을 삭제했다.



"너 그거 알아?"

"네? 어떤걸요?"

"네 얼굴 지금 잠 덜 깬 새끼하마 같아."



 내 아이큐가 모자란 건가. 아니면 민윤기가 머리가 이상해져 이상한 소리만 뱉는 건가. 잠이 덜 깬 새끼하마는 대체 어떻게 생긴 거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대답할 필요도 없이 윤기가 친절하게 뜻을 해석해주었다.



"멍청해 보인다는 뜻이야. 대답하라고 언제까지 가르쳐 줘야 되지?"



…못생겼으면 차라리 못생겼다고 해. 금요일 날 식당에서 만난 민윤기는 다른 사람임이 확실하다. 아낀다, 필요하다 천연덕스럽게 지껄이더니 금세 돌아와 하마취급을 하고 있다. 기억상실증? 아니면 이중인격자? 밤만 되면 다른 인격이 튀어나오나? 정국이가 한대 치게 놔뒀어야 했는데. 통탄하며 지민은 죄송합니다, 했다.



"시키신 대로 주말마다 써올게요."

"표도 같이 가져와."



 지민은 일차원적으로 풀고 싶은 의문이 있었다.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현재상영중인 영화 감상문을 써다 받쳐야 하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왜 하필 영화관일까. 단순한 심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표를 내라 돌려 말하는 듯 하지만, 윤기에게 질문은 금지였다. 지민은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근데, 미스터 윤. 만약에 일이 생겨서 못 써올 경우가 있으면요?"

"네게 나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



 윤기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지민은 적반하장으로 대꾸하니 할말이 없었다. 없는데, 없긴 한데. 일반적으로 밥줄인 윤기를 놓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없긴 했다. 잠에 빠져있다가도 전화 한 통이면 달려나가야 하는 게 지민의 신세였다. 세모꼴로 축 처진 눈꼬리가 주인 모르게 억울함을 물씬 드러냈다. 흐음, 하며 윤기가 말했다.



"싫어? 내가 써오라고 하는 게."

"아, 아니요.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거예요."

“눈썹은 억울하다고 하는데?”



 눈치는 빨라서. 지민은 티 나는 거짓말로 꾸몄다. 미스터 윤이 주신 일인데 당연히 해야죠. 윤기가 한발 더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즐겁게 일하는 방법 알려줄까?"

"정말요? 그게 뭐예요?"



 순간 혹했다. 귀가 얇은 지민은 윤기 쪽으로 좀더 붙듯 다가갔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윤기는 많은 연설을 했다. 전세계가 보고 있는 화면 앞에서도 했으며, 대학교 연설 축사도 한 적이 있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라, 하는 식이 아닌 대단한 사람이 알려주는 방법은 다를 것 같았다. 느른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윤기가 말했다.



"네 일상을 나로 채워."

“…….”

“처음부터 끝까지 내 생각만하면 내가 내린 일도 즐겁겠지.”



 지민은 고민했다. 웃어야 하나. 농담인가. 무슨 개소리를 저렇게 진지하게 해. 민윤기는 비서를 구하는 게 아니라 노예를 구했던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극악무도한 소리를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훽훽 던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웃음기하나 없는 표정을 보면 진담인가 보다. 윤기를 가늠하던 지민은 떨떠름한 기색을 가능한 숨기고 수긍했다.



“하하…네…한번 해볼게요…미스터 윤 생각….”



 꿈에서도 만나기 싫건만 알았다 답하려니 양심이 찔렸다. 지민은 만족하기로 했다. 싸게 먹혔다. 민윤기의 심기를 건드리고 퇴사가 아니라 일 더미정도면 괜찮은 값이다. 비록 그 일이 퇴사와 견줄 만큼 짜증나는 일이긴 하지만. 윤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때 네 후배, 어거스트에 지원할 생각 있으면 하라고 해.”

“어…잘 모르겠어요. 워낙 다른 회사들이 데려가려고 해서….”

“그래? 아쉽게 됐군.”



 윤기가 정말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셨다. 지민은 눈을 의심했다. 훌륭한 인재를 놓쳐서 아쉬운 게 아니라, 엿 먹일 기회를 놓쳐서 아쉽다는 걸로 보이는 걸까. 지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 했다.



"그런데 미스터 윤, 만약 몸이 안 좋을 땐 어떡하죠?"

"오 이제 반박도 하네."

"그, 그건 아니에요.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듣던 윤기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미세한 반응을 보고서야 지민은 말끝을 흐리고 자학했다. 이것저것 변명 붙이면 친절하게 퍽도 민윤기가 그럼 쉬라고 말하겠다. 내 욕은 내가 다 버네. 지민은 머리 위로 떨어질 빈정거리는 말을 기다렸다.



"아프면 전화해."

"네에…."



 다음날 두 개 써오라는 답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도 안하고 미리 준비한 대답을 하던 지민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되물었다.



"네? 전화요? 미스터 윤한테요?"



 제 귀가 잘못 된 게 아니라면, 챙겨주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윤기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순간은 시킨 명령에 관한 보고를 올릴 때뿐이다. 그래도 아낀다는 거, 그 말은 진짜였나. 혹시 나한테 일 더 시키는 게 미안해서 그런가. 여태 당한 것도 잊고 지민이 살짝 감동을 받으려는 순간이었다. 윤기는 충성도가 높아지는 지민의 얼굴을 보더니 무신경하게 말했다.



“어. 다음날부터 나올 필요 없다고 말하게.”

“…….”

“나가봐. 레이첼.”



 말하며 윤기는 서류에 집중했다. 문을 닫고 나온 지민은 속으로 윤기를 흉봤다. 이상한 인간. 도대체 뭐야. 이랬다가 저랬다가 사람이 줏대가 없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가지고 놀면 좋나. 나쁜 인간. 진짜 혹할 뻔했다. 전화하라 말하는 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서, 진심인듯한 눈을 하고 있어서. 헷갈린다. 아무리 사람 한 명이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못되게 굴거나 잘해주거나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지민은 입술만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이름도 제대로 안 불러주고.”



 언제쯤 제대로 불러주려나. 한숨을 폭 내쉬고 집무실 문 앞에 서있는 그때 레이첼이 바쁘게 지나가며 말했다.



“다 혼나고 나왔으면 10분 뒤에 나가서 차 좀 대기시켜줘요. 회장님 30분뒤에 외출하실 거예요.”

“네….”



 지민은 잠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엎어져 주말을 향해 작별인사를 고했다. 함께해서 즐거웠고 너만큼 내 인생에서 사랑한 건 없었어.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사표 던지는 날에. 찬 유리에 볼을 대고 슬픔을 식히다 흐물흐물 일어나 정국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만나기로 한 날 영화 보는 거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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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같은 로맨스는 한 세네편 더 빼면 나올 거 같습니다....그나저나 어쩜 다 말을 그리 예쁘게 하실 수 있는 거죠ㅠㅠㅠㅠ제가 더 님들을 사랑한다구요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