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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ProleteR - Whatever blues>








 박지민이 부르면 부르는 대로 나가는 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끔 인생에선 태세전환이 필요할 때가 있다. 취미로 슈퍼카를 수집하는 박지민은 현재 일당 오 만원의 보나베띠의 스페셜 아르바이트생 자리를 차지했다. 정직한 실명의 아이디, 민윤기가 비밀덧글을 남긴 다음날. 지민은 그 하나만 보고 보나베띠를 향했다. 윤기는 꽤나 정중하고 멋쩍게 한 가지 일을 제안했다. 다름이 아니고요.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은 간결했다. 하루에 단 한 시간, 신메뉴를 먹고 솔직한 감상평을 남길 것. 손님 없는 브레이크 타임이나 오전에 와요. 못 오는 날은 전화만 한번 해줘요. 의외로 지민은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5분만에 체결된 근로계약은 박지민의 머릿속에 조금 다르게 입력됐다.



  "부드러운 식감 좋아하시면 이게 크림소스 스테이크가 제일 맛있어요.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소스가 달달해요."

  "직원분이 설명을 되게 재미있게 해주시네요. 파스타도 추천해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로제 그릴쉬림프 파스타 꼭 한번 드셔보세요. 해산물이 오늘 진짜…결혼하려다 그물에 잡힌 새우예요. 딱 드시는 순간 입에서 새우가 펄떡펄떡거려요." 



  손님 테이블에 찰싹 달라붙은 박지민은 쫑알쫑알 잘도 떠들었다. 주문 받는 일을 뺏긴 정국이 메뉴판만 든 채 멀찍이서 황망히 바라봤다. 한 시간만 있는다더니. 아침부터 쳐들어와서 브레이크타임까지 둥지를 틀고 정국의 일을 몽땅 뺏어갔다. 레몬즙을 팡팡 터뜨리며 손님과 하하호호 웃고 있는 박지민을 황당하게 구경하던 정국이 윤기를 찾았다. 윤기도 정국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쟤 저기서 뭐하고 있냐. 온 얼굴에 그런 말을 적어놓은 윤기에게 정국이 물었다.



  "형이 시켰어요?"

  "그럴 리가 있냐."



  난 모르는 사람한테 가게 일 안 맡겨. 윤기는 오히려 정국보다 더 황당했다. 딱 봐도 험한 일 없이 살아온 부잣집 도련님같은 박지민이 왜 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그것도 그토록 아끼는 치미의 딜리셔스를 박살낸 가게에서?



  "네,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박지민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메뉴판을 안은 채 주방으로 온다.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이 지민의 뒷모습을 흘긋거리며 서로 이야기했다.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얼굴을 보면 상당히 만족한 듯했다.



  "테이블 팔 번에 크림소스 스테이크 하나, 로제 그릴쉬림프 파스타 하나랑 리코타치즈 샐러드 하나요. 파스타에 넣는 새우 싱싱한 거 중에서도 제일 싱싱한 걸로 해주세요."

  "……."

  "왜요?"

  "…재미있어요? 주문 받는 게?"

  "네, 괜찮은데요?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아요. 근데 사실 제가 못하는 일이 딱히 없긴 해서요."



  지민이 활짝 웃었다. 애초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일만 골라하긴 했다. 질리거나 쉽게 풀리지 않는 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방금방 때려치곤 했으니 못하는 일이 없긴 했다. 실제로 지민은 보나베띠를 휘젓고 다니는 일이 재미있었다. 단순히 안티팬들의 폭격을 맞아 치미의 딜리셔스를 쉬는 동안 대충 시간을 보내자는 목적으로 했는데, 적성에 꽤 맞았다. 손님들의 입맛취향에 따라 메뉴를 추천하는 것도 좋았고, 키친에서 서커스 쇼 같은 요리과정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물론 집에서도 물 한번 안 묻혀본 손이라 청소는 여전히 몽땅 정국을 포함한 다른 직원들의 몫이었지만.



  "왜 그렇게 쳐다봐요?"

  "…별건 아니고…."

  "아 손님 오셨다. 주문 받고 올게요. 새우 진짜 싱싱한 걸로 골라서 해요!"



  니가 주인이냐. 윤기는 미묘한 얼굴로 환하게 메뉴판을 들고 멀어지는 지민의 뒷꼭지를 바라보았다. 박지민이 도와주는 가게 일의 결과가 나쁘지 않긴 한데. 그렇다고 딱히 마냥 두 손 들고 환영하며 좋게 보기도 애매했다. 예를 들자면 그런 일들 때문이다. 지민이 새로 들어온 손님의 테이블에도 다가가 막 영업을 시작한 참이었다. 손님이 말했다.



  "그런데 혹시 여기 아르바이트…."

  "네? 아 아르바이트요?"

  "네, 그 원래 주문 받으시던 분이 계셨는데…."



  아마 정국을 찾았을 손님을 깜빡깜빡 바라보던 지민이 이내 부끄럽고 쑥스럽다는 듯 아아, 했다. 동시에 뿌듯하고, 본인이 자랑스러워 견디지 못하겠다는 그런 성취감을 담아서. 뒷목을 긁적거리며 하하 웃었다.



  "아 이렇게 또 알아보시기도 하시는 구나. 생각하신 게 맞는데, 네,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서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요. 아 민망해라. 별 건 아니구 사정이 있어서요. 사진은 지금 

제가 바빠서 같이 못 찍어드릴 거 같아요. 어떡해요. 죄송해요. 다음에 만나면 그때 찍어드릴게요."

  "…네?"

  "메뉴는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아 저, 알리오올리오 하나랑 유자 샐러드로 하나요."

  "네, 그럼 그렇게 준비해드릴게요. 아 그리구 저 여기서 보셨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네? 아 네…."

  "저도 알아봐주시구 하셨으니까 서비스로 빵 드릴게요!"



  지민이 환히 말했다. 단순히 알바생 교체냐 물어보던 손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듣다, 서비스라는 단어에 결국 같이 환히 웃었다. 한껏 뿌듯한 얼굴로 윤기에게 달려온 지민이 자랑을 쏟아냈다.



  "여기서까지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셰프님도 좀 놀라셨죠? 저도 놀랐어요. 서비스로 빵 드리려고요."



  윤기의 시선에 보인 손님은 마침내 정국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꾸준히 가게에 들르는 손님이었다. 너무 뻔한 목적으로 정국이 주문을 받을 때마다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대체 어떻게 착각하면 저런 착각을 하지?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를 정국이 알려준 적이 있다. 역시 관종이 맞네. 윤기는 냉정했다. 엄연히 테이블에 나가는 메뉴를 통과시키는 건 윤기의 몫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제 월급에서 까요.'



  언제 내가 너한테 월급을 줬는데. 근로고용계약서도 쓴 적이 없다. 당당하게 요구한 지민은 이미 빵을 꺼내고 있었다. 할 말을 잃은 윤기는 신난 지민을 주방에서 내쫓는 대신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있는 박지민을 굳이 꺼내오는 수고를 거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딱히 주방에 피해를 주지 않기도 하고. 빵을 자르던 지민이 다시금 윤기의 옆으로 스물스물 다가왔다.



  "셰프님 이거 플레이트 어떻게 더 예쁘게 해요?"



  소스는 땅콩소스로 할까요? 물끄러미 지민을 보던 윤기는 곧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럼 월급에서 못 까는데요. 내 인건비까지 합치면 지민씨 월급보다 비싸요."

  "셰프님 그거 알아요? 지금 제 손에 나이프 들려있어요."

  "…이리 줘요."



  지민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윤기에게 나이프를 넘겼다.



  "셰프님 진짜 칼질도 잘하시네요. 와 손도 예뻐요."

  "박지민씨. 요리하는데 옆에서 그런 이상한 말 좀 하지 맙시다."

  "네?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 게 뭐가 이상해요."

  "……."

  "와 진짜 잘 자르신다. 셰프님이랑 같이 있으면 저도 요리를 사랑하게 되는 거 같아요."



  또 거품 몽글몽글한 둥근 칭찬만 남긴다. 대체 무슨 사람이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민은 윤기가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박지민이 쏟아내는 예쁜 말들에 다시금 할 말이 없어진 윤기는 입을 닫고 얌전히 완성된 플레이트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행복한 얼굴로 플레이트를 잡은 지민이 신이 나 멀어진다. 민윤기는 박지민을 종 잡을 수 없는 인간으로 낙점했다.






  지민은 보나베띠로 깊숙이 침투했다. 점점 보나베띠의 시간에 박지민이 녹아들었다. 대체 어디서 친화력 특강이라도 배워온 건지, 주방식구들과 홀 식구들 모두 박지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한 박지민을 두고 수군거리던 일은 먼 과거라는 듯 어느 샌가 붙어 누룽지를 해먹고 앉아있었다.



  심지어 어느 날은 둥글게 모여 앉아 과자를 허공에 던져 받아먹고 있었다. 지민의 제안이었다. 과자 던졌다 받아먹기 저 진짜 잘해요. 지민은 개인기랍시고 보나베띠 직원들 앞에서 쇼를 했고, 쇼는 점점 너도 나도 해본다는 말을 따라 과자 받아먹기 대회로 발전했다. 대회는 자다 일어나 1층으로 내려온 윤기의 잔소리로 흐지부지 끝이 났다. 니네 가게냐? 니네 가게야? 바닥에 떨어진 과자 개수대로 월급에서 십만 원씩 깐다.



  지민이 요리하는 윤기를 골똘히 바라보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그날은 유난히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뭐야."



  결국 의식하다 못한 윤기가 말했다. 지민은 그대로 선언했다.



  "저도 요리하는 거 배워보고 싶어요. 가르쳐주세요."



  지민은 윤기의 손에서 현란하게 돌아가는 프라이팬을 보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했다. 윤기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나가 떨어질 거다. 박지민은 요리에 재능이라곤 발톱의 때만큼도 없었다. 직원들이 간단한 간식을 먹는 브레이크타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민이 형 볶음밥 할 줄 알아요? 정국이 꺼낸 그 한 마디로 재앙은 시작되고 말았다. 자신만 믿으라던 박지민은 어떻게 한 건지 볶음밥을 몽땅 태워먹었다. 태워먹다 못해 주걱까지 같이 태워먹었다. 그런 애가 무슨 요리를 한다고. 적당히 하다 포기하겠지.



  "그럼 월요일에 같이 해."



  어차피 신메뉴 만드니까. 덧붙이며 윤기는 주방을 마저 정리했다.







  보나베띠는 매주 월요일이 휴무였다. 윤기는 신메뉴를 개발하거나, 직접 거래처를 찾아가 재료를 고르고 장을 보곤 했다.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월요일도 보나베띠로 침투한 누군가로 인해 바뀌었다. 슈퍼카는 보나베띠 주차장을 날짜 상관없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 람보르기니를 끌고다니는 일급 알바생 지민은 힘차게 보나베띠 문을 밀고 들어왔다. 늘 그렇듯 아르바이트생 차림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라이더재킷과 선글라스를 걸친 채.



  "셰프님! 민셰프니임! 자요? 어디 있어요?"

  "앵무새야? 아니면 노래방이라도 왔냐."



  가게 구석 쇼파에 누워있던 트레이닝복 차림의 윤기가 부스스 일어났다. 박지민이 오기 전까지가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조용한 휴식이었다. 팔랑팔랑 윤기를 향해 뛰어간 지민은 손에 들고 온 묵직한 마트 봉투를 열어 자랑했다. 형, 이거 봐요. 내가 많이 사왔어요.



  "한우랑 표고버섯이랑, 송로버섯? 그것도 사왔어요. 오늘 송로 한우 파스타 만들 거예요."

  "얼마치야."

  "오늘요? 얼마였지."



  지민이 볼을 긁적거렸다. 얼마가 나가는지 카드를 늘 본 적이 없다. 윤기는 지민이 사온 재료를 스캔했다. 한우는 에이플러스플러스. 송로버섯도 저 통조림이면 한 숟가락당 몇 만원은 한다. 한우 송로 파스타라면서 돼지고기도 들어있었다. 최소 20만원의 쓰레기가 나오겠군. 윤기는 마른 세수를 한번 했다. 치킨을 좋아한다면서 피자를 추천하는 두서없는 치미의 문맥 능력을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건 놔둬. 칼질 연습부터 할 거니까."

  "칼질이요? 저 칼질 이미 잘하죠!"



  그리고 사실 저는 칼질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는데. 그냥 맛있게 만들고 싶어요. 윤기는 지민의 말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양파와 당근, 각종 채소를 꺼내 손질했다. 주방에서 돌아다니는 윤기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지민은 계속해서 본인의 매력을 어필했다. 제가 간도 잘 보거든요. 또 음, 이렇게 많이 씻어요? 칼질 정도는 그냥 사과 하나만 자르면 충분한데. 저 진짜 잘한다니까요?



  "그럼 해봐."



  결국 윤기가 도마를 가리켰다. 지민이 호언장담했다.



  "보고 놀라지 마세요."



  당당하게 칼을 들고 양파를 처음 자른 그 순간.



  "악!"

  "아니 무슨, 봐봐. 많이 다쳤어?"

  "그, 아, 아파요."

  "봐봐."



  지민이 감쌌던 손을 내밀었다. 지민의 손목을 잡은 윤기가 휴지로 다친 부분을 꾹 눌렀다. 피 멎게 꾹 눌러. 상처는 다행히 깊지 않은 편이었다. 미간을 모은 윤기는 한숨을 내쉬더니 지민을 이끌고 2층으로 향했다. 손이 욱신거리는 와중에도 지민은 이리저리 윤기의 방을 구경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은 딱 윤기다웠다. 적당히 깔끔하고, 적당히 장식품이 널려있었다. 요리대회 포스터를 보며 지민은 윤기의 침대에 앉았다.



  "기다리고 있어. 밴드 찾아줄 테니까."

  "와, 2층 처음 와봐요."

  "지금이 처음 아니면 너 전에 한 건 무단침입이야. 손 내밀어 봐."



  윤기는 붉게 남은 상처를 보고 혀를 찼다. 보고 놀라지 말긴.



  "넌 뭐 애가 손가락을 자르냐."

  "괜찮아요. 이 정도는 뭐. 침 바르면 낫지. 그리고 전 요리사도 아니라서 괜찮아요."

  "요리사 아니라고 니 손은 안 소중하냐. 너 블로그 하는 그거, 타자 열심히 쳐야지. 아니야?"

  "어, 형 제 블로그 또 봤어요?"



  움찔한 윤기는 곧 태연한 척 지민의 손가락을 밴드로 감싸는 일에 집중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는.



  "내가 그걸 뭐하러 보냐. 니가 맨날 말하잖아. 너 유명하다고."

  "하긴. 요즘 글도 잘 안 올리는데."



  벌써 3주째 새 글을 올리지 않고 있었다. 딱히 악플을 다는 사람을 신경 쓰는 건 아니었다. 보나베띠에 와서 놀다 보니 뭐. 딱히 다른 맛집을 찾아서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지민은 상처를 확인하고 밴드를 두르는 윤기를 흘끔 쳐다봤다.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지민이 말했다.



  "오늘은 형한테 고소한 냄새가 안 나요."

  "고소? 아 기름."



  주방에 있다 보니 늘 온갖 냄새가 섞이기 마련이었다. 윤기는 잘 까지지 않는 밴드의 스티커 부분을 노려보았다.



  "다른 때는 냄새 많이 나냐?"

  "네."

  "그 동안 어떻게 가까이 왔냐. 기름냄새 별로 안 좋은데."

  "안 좋다고 한 적 없는데요?"



  됐다. 밴드 다 붙였다. 윤기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다. 지민은 애교 있게 배시시 웃었다.



  "땅콩소스 마시멜로우 같아요."

  "……."

  "형은 하얗고 따뜻하니까."



  말랑말랑. 덧붙이며 지민이 치료가 끝난 손가락을 확인했다. 우리 나머지 또 만들어요? 네? 윤기는 시선을 피하며 지민을 지나쳐 1층으로 내려갔다. 더 만들긴 무슨. 나와서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있어. 애써 덤덤하게 말하는 윤기의 귀 끝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




  요즘 박지민의 얼굴값은 하늘의 별보다 귀했다. 파워블로거를 한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보다 더 보기 힘들었다. 태형은 지민을 걱정했다. 혹시 얘가 너무 상심해서 그런 건가? 대부분 만난 지 일주일이 지나면 지민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오는 편이었다. 태태 뭐해.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마지막 연락이 보나베띠 유니폼을 입어봤다며 셀카를 찍어 보낸 게 마지막이었다. 태형은 꾸준히 연락했다. 지민아 오늘은 돼? 아니. 나 오늘 보나베띠 가. 그럼 오늘은? 오늘도. 그렇게 약 2주일을 못 봤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이제 네 얼굴도 잊어버린다는 협박 끝에 태형은 지민을 불러낼 수 있었다.



  지민을 한 달 만에 본 태형의 소감은 간단했다. 여전히 날렵한 턱선이며, 라이더 재킷을 기가 막히게 소화하며 풀풀 풍기는 간지며, 예쁜 이마는 그대로인데. 어딘가 좀.



  "지민아 너 동그라미 됐다."

  "뭐?"

  "볼살 귀여워졌는데?"

  "아 좀 쪘나? 많이 먹긴 했지."



  지민은 아메리카노를 쪽 빨면서 볼을 주물럭거렸다. 그럴만해.



  "보나베띠는 무려 5점이라구. 거기 계속 있는데 살이 안 찌는 게 이상하지. 좀 줄여야겠어. 그런데 윤기 형 요리 맛있는데 어떻게 줄이지."

  "걔? 꾸꾸?"

  "꾸꾸는 다른 애야. 정국이라고 귀여운 애 있어. 그냥 아이디만 잠시 뺏긴 거래."

  "뭐야. 그럼 다 풀렸어? 용서한 거야?"

  "어. 그럼. 누가 속 좁게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냐? 태형아 나 박지민이야."



  차단까지 다 해놨던 지민이 이제와 다리를 척 꼬며 말했다. 그런 걸로 신고하겠다느니, 유치한 감정싸움 같은 거 난 안 해. 세상에서 그런 게 제일 유치한 거야. 지민은 자연스럽게 보나베띠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블로그 비밀덧글로 찾아왔던 민윤기, 신메뉴를 개발하는 민윤기, 손가락에 밴드를 감아준 민윤기, 민윤기, 민윤기. 보나베띠를 가장한 민윤기 일화를 듣던 태형은 딸기스무디를 빨대로 푹푹 휘저으며 건성으로 말했다.



  "야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는 너만 재미있지."

  "뭔 소리야. 내가 언제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만 하고 있어. 보나베띠 이야기했지."

  "그게 민윤기 이야기지 어떻게 보나베띠 이야기냐?"

  "야 그건 그냥 민윤기가 보나베띠 메인셰프니까 그렇지."

  "그럼 안 좋아해?"



  순간적으로 지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 아니? 한발 늦게 대답하고 스스로 입술을 깨물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동공이 흔들린다.



  "거봐. 넌 좋아해."

  "아니야!"



  지민이 펄떡 일어났다. 카페의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지민과 태형 둘 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는 인물이 아니라, 태형은 딸기 스무디를 빨대로 빨아올리며 지민을 깜빡깜빡 올려다봤다. 아니면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지 그렇게까지 크게 반응할 일인가. 역시 맞다. 생각하며 태형은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비틀거리며 카페 의자로 주저앉은 지민이 혼란스러워하며 이마를 짚었다. 아니, 나는, 내가? 내가? 박지민이? 윤기형은, 그러니까 민윤기는.



  "그냥 윤기형은 밥을 해주는 거 뿐이고…그냥, 그냥 밥을 해주는데!?"

  "밥솥을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야! 윤기형 밥솥 아니거든!?"

  "아니 어쨌거나. 밥 준다며…."



  원래 잔잔한 연못 속에 던진 작은 돌이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키곤 한다. 지민은 사약이라도 마시는 얼굴로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날, 태형과 같이 본 영화의 내용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토록 보고 싶던 액션영화 속 주인공 대신 민윤기만 회전문처럼 계속 떠올랐다. 모든 진이 빠져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운 지민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생각했다.



  포켓몬스터 지우도 웅이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할까? 밥을 해주는 친구라며. 민윤기의 좋은 점? 요리를 잘하지. 말은 좀 싸가지 없긴 해도 해달라는 건 다 해주고. 생긴 거? 생긴 것도…생긴 것도 꽤…괜찮긴 하지…요리복 잘 어울리잖아. 검은색이 잘 받는데. 사실 하얀 편이니까 다 잘 어울릴 거 같아. 지민의 이상형은 한결같이 손이 예쁜 사람이었다. 마디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민윤기 손. 그 손으로 시범을 보여준다고 칼을 쥐고 당근을 썰고 있으면.



  "……."



  지민은 폭포처럼 머릿속을 흐르는 민윤기를 막고자 좋아하는 요리를 떠올려보았다. 그때 5점을 줬던 강남의 허니자몽타르트, 갈릭 쉬림프 알리오올리오, 크림소스 스테이크, 땅콩소스 마시멜로우, 땅콩소스 마시멜로우, 땅콩소스 마시멜로우….




*




  민윤기와 박지민의 요리교실은 1회를 끝으로 장기간 휴식을 맞이했다. 요리수업 대신 윤기가 주로 들리는 시장에 가기로 했다. 거기서 어떻게 요리공부를 하냐며 작은 반항을 하던 지민은 다친 사람은 절대 자신의 주방에 들일 수 없단 윤기의 주장에 밀려 수긍했다. 윤기는 곧 온다는 지민의 문자를 받고 보나베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네. 다른 때보다 유독 늦는다. 평소 지민의 입장시간은 윤기의 기상 시간과 동일했다. 즉, 보나베띠 오픈 시간이다. 서서히 전화를 해볼까 생각할 무렵, 슈퍼카가 매끄럽게 보나베띠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늦었죠? 아침에 조금 일이 있어서요."

  "산책하러 중국까지 갔었어? 뭔데 그…."



  윤기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슈퍼카에서 내리는 지민은 잘 빠진 수트 차림이었다. 누가 봐도 고가인 수트는 보나베띠에 오면서 처음 선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하더니. 잘 어울린다. 생각하며 윤기는 괜히 헛기침을 한 번했다. 상대방을 보고 감탄하는 상황은 지민도 똑같았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윤기를 바라보던 지민은 윤기의 주변을 위성처럼 돌았다.



  "와, 와, 형, 와, 옷."



  윤기의 옷차림 역시 평소와 다르긴 했다. 주방에서 매일 입고 있던 검은 옷 대신 캐주얼하게 청바지에 가디건을 걸쳐 입었다.



  "뭐하냐. 앵무새야?"

  "아니 너무 잘생겨서…."

  "입 발린 말은. 그렇게 해도 너 지금은 다시 칼 못 잡아."



  지민이 입술을 잠시 삐죽였다. 입 발린 소리 아닌데. 윤기는 괜히 어딘가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박지민은 말로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간질간질한 게 싫진 않지만 아직 적응하진 못했다. 아니 적응할 수나 있을까. 윤기는 애써 시간을 확인하며 화제를 회피했다



  "빨리 타. 오늘은 근처 시장 가서…."

  "잠깐!"



  뭐냐. 윤기가 쳐다보니 지민은 큼, 헛기침을 한번 하고 제 차를 가리켰다.



  "제 차로 가요."



  윤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지 뭐. 다시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지민이 다시 번쩍 외쳤다. 잠깐! 윤기의 미간이 좁혀진다.



  "뭐야 또."

  "아니 형 타라구."



  큼큼. 헛기침을 한 지민이 민망한 손놀림으로 문을 열었다. 폼이 턱시도를 입고 가슴털을 부풀리며 꼬리깃을 자랑하는 까치 같았다. 그러더니 본인은 바삐 운전석으로 들어간다. 윤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영화 본다고 자랑하더니 그 영화에 안 좋은 게 섞여있었나. 그러나 이내 곧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차에 탑승했다. 더 중요한 문제가 그 다음에 있었다. 야 너 운전 왜 이렇게 못해. 나와 내가 할게. 지민이 문을 열어준 보람도 없이 제 발로 다시 걸어 나온 윤기는 그날 하루 종일 운전을 담당했다.




  한 순간의 바람이라고 생각했던 박지민의 변덕은 그저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다. 원래도 이탈리아 레스토랑 아르바이트생 복장으로 어울리지 않는 옷들을 입고 다니는 박지민이지만, 요즘엔 경우가 더 심했다. 자주 입던 후드티를 벗어 던지고 셔츠와 수트를 갖춰 입었다. 정국이 지민을 발견하고 놀라 물었다. 오늘의 지민이 걸친 핏 좋은 하얀 셔츠와 매치한 반지와 귀걸이는 모두 빠짐없이 화려했다. 최소 천 단위는 넘어가리라.



  "레드카펫이라도 가요? 왜 이렇게 차려 입고 왔어요? 끝나고 어디 가요? 데이트?"



  박지민의 대답은 전설로 남아 아르바이트생들의 사이를 떠돌았다.



  "무슨 말이야 정국아. 난 늘 이렇게 입고 다녔지."



  지민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발연기를 펼치며 꿋꿋이 주장했다. 나 항상 이랬지. 잠옷 같아. 기억 안나? 안 나는 거 보면 너가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네. 형한테 어떻게 관심이 없냐? 홀 서빙 직원과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 모두 상관없이 지민의 변화에 관심을 보였다. 뭐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지민아? 그럼 박지민은 똑같이 어색한 발연기를 하며 대답했다. 제가, 무슨, 좋아하는, 사람이요. 저는, 그런 거, 없죠. 



  옷차림뿐만이 아니었다. 점점 특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식재료를 다듬기 위해 옮기는 도중이었다. 윤기가 야채가 담긴 통을 번쩍 들어올린 그때.



  "어, 형! 주세요! 제가 들게요!"

  "뭘 줘."

  "그거요."

  "이거?"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는 가늘게 좁힌 눈으로 지민을 잠시 바라보곤, 뒤에 남은 식재료 박스를 쳐다보았다. 야채가 담긴 박스보다 훨씬 무거운 것들만 남았다. 윤기는 반짝거리는 지민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바꿔 들자는 건가 보다. 정국이나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애초 윤기에게, 사장에게 바꿔 들자는 말을 하지 않을 테지만. 윤기는 식재료 박스를 내려놓았다.



  "그래라."



  지민이 활짝 웃는다. 그러더니 또 뿌듯하고 민망하다는 듯 눈웃음을 치면서 윤기가 내려놓은 박스를 들었다. 분명 박지민이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거 같긴 한데…. 다음에도 가벼운 거 들게 해달라는 건가. 윤기가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사이, 창고 안으로 정국이 들어왔다. 정국이 지민을 대놓고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형 요리에 뭐 잘못 넣었어요? 신메뉴 개발하다가 후추 통을 통째로 넣어버렸다거나…아니면 국자로 지민이 형 쳤어요? 지민이 형 청소나 이런 건 절대 안 하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일이나 해라."

  "지민이 형 진짜 이상해졌지 않아요?"

  "뭐가."



  정국이 탐정마냥 콧대를 훑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냄새가 나. 냄새가 난다 이 말이죠. 안 그래도 형이랑 누나들도 의심스럽다고 한다니까요. 지민이 형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같다고."



  윤기가 코웃음을 쳤다. 대체 누가 그런 발추리를 하냐. 아니 발추리라뇨. 정국이 발끈하며 꿋꿋이 뒷받침하는 근거를 댔다.



  "매일 예쁜 옷 입고 오잖아요. 요즘 전화도 많이 하고. 가끔가다 시무룩한 얼굴 했다가 정신 놓고 웃고 있다가…그렇지 않아요?"

  "뭐가 그렇긴 그래. 걘 맨날 나만 쳐다보느라 정신 없는 애인데."



  윤기의 말이 맞긴 했다. 지민은 가게에 들어온 날부터 윤기가 요리하는 모습만 보면 눈을 떼지 못하고 몰려와 구경했다. 셰프님, 형, 민셰프님. 여러 가지 호칭을 골라 쓰며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마냥 박수를 쳐가며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찬양을 했다. 셰프님 진짜 멋져요. 세상에서 제일로 멋질 거예요. 정국은 흥미 없는 얼굴로 에이, 했다.



  "그건 그냥 존경의 눈이잖아요. 늘 그랬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게 분명해요. 지민이 형 잘 됐으면 좋겠는데. 아 아쉽다. 아는 사람이면 도와줬을 텐데."

  "도와주긴 뭐.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뭐 그렇긴 해요. 표정 딱히 나쁘지 않은 거 보면 잘될 거 같기도 하고."



  아까까지만 해도 변화 없던 윤기의 미간이 조금 모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 없다는 듯 대꾸한 윤기는 정국의 말을 라디오 삼아 들으며 식료품 박스를 체크했다.



  "솔직히 지민이 형이 무매력은 아니잖아요. 한수누나가 막 지민이 형 친구소개 시켜주고 싶다고 막 그랬었는데."

  "……."

  "파워블로거 행패 그런 사건 엮어있던 것도 뭐. 흠도 아니지. 만나보니까 그런 사람 아닌 것도 알…."

  "누가 그래? 박지민 욕하는 애들 다 데려와. 남 욕할 시간에 본인 일이나 잘하라고 그래."

  "아니 뭐 이게 욕이에요. 다들 안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건데. 말도 안돼."

  "월급 깎이고 싶어? 빨리 들고 날라라.



  왜 저렇게 짜증이래. 정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고기가 담긴 박스를 들었다. 뒤에 남은 윤기는 어느 샌가 체크하던 손을 멈추고 식료품 상자를 들고 나가는 지민의 뒤통수를 미어캣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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