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NE - Day 1 ◑>
학생회 모집합니다! 학기 초 모든 동아리에서 바쁘게 광고를 뿌렸다. 그중에서도 학생회는 유독 바빴다. 건축학과의 학생회는 늘 인원이 부족했다. 일단, 장학금 지원 금액이 얼마 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회는 주는 돈에 비해 시키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탈주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목표는 졸업까지 같이 달릴 신입생이다.”
과대는 비장한 얼굴로 선언했다. 과실의 모두는 같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지민도 의지를 불태웠다. 지민의 목표는 하나였다. 기필코, 이번엔 기필코 후배 뽑아서 총무부장 탈출한다.
지민은 누구보다 열심히 홍보했다. 거기 학생 학생회 해보고 싶지 않아요? 이거 스펙에도 도움 많이 되는데. 취업할 때 한 줄 더 쓰고 안 쓰고 차이 알죠? 아 누구? 태형이 선배 있냐고? 김태형? 그럼! 태형이 학생회지. 같이 엠티도 가고 회의실에서 회의도 하고 그래. 카톡 아이디 줄까? 김태형까지 팔아가며 사근사근 꼬셨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건지 기획부는 사람이 넘쳐났지만, 총무부는 지원자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홍보했는데. 지민은 책상에 엎드려 흑흑 우는 소리를 했다.
“어떻게 한 명도 없을 수 있어! 온다고 해놓고! 선배님 들어가면 밥 사달라고 해놓고!”
같이 과실 쇼파에 앉아있던 태형이 지민의 어깨를 위로하듯 툭툭 두들겨주었다.
“야 지민아 그래도 힘내라. 기획부 사람들이 도와준다고 하잖아.”
“닥쳐 이 기획부야. 지난 번 학기에도 도와준다고 하고 너네 다 도망갔잖아.”
지민이 눈을 좁히며 태형을 노려보았다. 태형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실제로 그랬다. 지민을 도와주겠다는 감언이설로 꼬드겨 계속 총무부장에 앉혀놓고 단 한 명도 엑셀파일을 같이 열어준 사람이 없었다. 도와준다며 하늘에 대고 맹세했던 태형 역시 살그머니 빠져나가 술은 술로 해장해야한다며 과 동기들과 술로 밤을 새운 터였다. 그 시각 박지민은 엠티 영수증을 모두 챙겨 과제도 미룬 채 엑셀 파일을 만들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자료를 정리할 즈음 개념을 말아먹은 기획부의 인간들은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지민아 니 친구 취했다. 박지민은 저승사자같은 얼굴로 으스스 등장해 김태형을 부축해 데려갔고, 태형과 지민은 그날 절교를 할 뻔 했다. 뭐? 과제? 과제 때문에 못해? 죽고 싶냐?
태형이 가슴팍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야 지민아 내가 어떻게든 신입 구해줄게.”
“안 믿어 이 자식아.”
“진짜라니까? 완전 일 잘하는 사람으로 한명 딱! 어? 딱!”
그리고 태형이 말을 딱 끝마친 그 순간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태형이 말하자 학생회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얼굴은. 지민과 태형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윤기 선배님?”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무슨 볼 일 있으세요? 윤기는 쇼파에 얽힌 지민과 태형을 바라보며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지원하러 왔는데.”
“…네?”
“학생회.”
태형과 지민은 침묵했다. 왜냐하면, 민윤기의 발언과 학생회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학생회는 소위 ‘인싸들만 가는 곳’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정의된 곳이었다. 그러나 민윤기가 어떤 인간인가? 모두 그를 삼장법사라고 불렀다. 복학 후 세 가지의 장소에서만 출몰한다는 속뜻이 담겨있었다. 누구도 세 장소 외의 캠퍼스에서 민윤기를 본 적이 없었다. 강의실, 아니면 도서관, 그것도 아니면 작업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학생회는 강의만 쏙쏙 듣고 혼자 유유히 사라지는 민윤기같은 인간이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윤기가 말했다.
“왜. 안돼? 인원 다 찼어?”
“하하하 아뇨!”
태형은 일단 웃었다. 신입생이 아니라 좀 그렇긴 하지만, 일꾼은 언제나 환영이다. 반대로 지민은 낯을 가리며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어차피 기획부나 하겠지.
“선배님 어떤 부서 지원하실 건데요?”
“총무부.”
지민이 고개를 팍 들어올렸다. 윤기는 태형을 바라보고 있었고, 태형은 잠깐 멈칫하며 물었다.
“총무부요?”
“어.”
“대박. 거기 저희 사람 완전 부족했거든요. 대박, 대박.”
“그랬냐. 좋네.”
“거기 지민이 혼자라서, 야 지민아 완전 잘 됐지?”
태형이 네모입을 만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쇼파에 앉아있던 지민은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박지미니?”
“…어, 어…잘 됐네….”
“선배님 이거 작성해주세요.”
“펜 없는데.”
“아 펜, 여기요. 학번은 여기다가 적어주시면 돼요.”
윤기가 신청서를 작성하는 동안, 태형은 옆에서 종알종알 떠들었다. 총무부가 유독 사람이 적었거든요. 형이랑 지민이만 총무부예요. 와 진짜 잘됐다. 지민이가 일 힘들다고 했었거든요. 아 물론 혼자 하기에는 힘들다는 거예요. 둘이하면 하아나도 안 힘들어요. 지민은 냉장고에서 언 붕어빵처럼 그 과정을 껌뻑거리며 지켜볼 뿐이었다. 머지않아 꽉 찬 신청서는 다시 태형의 손으로 돌아왔다. 태형이 함박 웃으며 윤기를 향해 말했다.
“과대 형이 연락해주실 거예요.”
“그래.”
“가세요?”
“어. 강의 있어서.”
윤기는 강의 잘 들으라는 태형의 인사에 대충 손짓을 한 뒤 빠르게 문을 닫고 나갔다. 태형은 팔딱거리며 지민에게 윤기의 신청서를 가져와 펄럭펄럭 흔들었다.
“야! 지민아! 내가 신입 구했다! 윤기형 똑똑하니까 딱이네!”
대박이다, 그치? 니가 구한 게 아니라 선배가 온 거지. 지민은 방방 뛰는 태형을 밀어냈다.
“어 그래. 고맙네.”
“뭐야. 너 별로 안 고마운 거 같은데?”
“진짜 고마워. 고맙다, 고마워.”
사실 하나도 안 고맙다. 계속해서 미간을 찌푸린 지민은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좋을 리가 있냐.
민윤기는 나 싫어한다고.
지민은 윤기를 새내기 시절 조별과제로 처음 만났다. 강의는 아마 건축학개론이었던 거 같다. 학년 상관없이 듣는 강의였고, 당시 민윤기는 복학 후 첫학기였다.
“안녕하세요, 16학번 박지민입니다.”
앉은 순서대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소개를 했고 마지막은 윤기의 차례였다.
“14학번 민윤기입니다.”
지민은 그 목소리가 꽤 좋다고 생각했다. 가장 고학번인 윤기가 조장이 됐다. 누구도 하고 싶지 않아 눈치만 보고 있었으니 거기까지 과정은 참 좋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번호를 교환했고 단톡방을 팠다.
그러나 민윤기에게 좋은 건 목소리뿐이었다. 민윤기는 사람이 이 정도로 부려먹을 수 있을까, 싶은 수준으로 조원들에게 과제를 내렸다. 여기 자료 찾아와주시구요. 그 인용하신 논문 제가 확인해봤는데 출처가 조금 이상하더라구요. 새로 찾아봐주시겠어요? PPT 디자인은…새내기세요? 아 얼마 안 만들어보셨구나. 제가 할게요. 자료 찾기 담당이었던 지민은 출석만하고 시험만 대충 봐도 B는 나온다는, 누구나 자체휴강을 세 번까지 때리는 건축학개론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자료 오늘 제출한 거 확인했어요. 피드백 했으니까 확인해요]
민윤기한테 메시지가 왔다. 지민은 제 몸을 베개 삼아 누워있는 김태형을 치우고 눈을 부비적거리며 일어났다. 밤 열한시. 잠도 안 재우네. 생각하며 지민은 태평한 생각으로 메일을 열었다. 최대한 찾을 수 있는 만큼 찾았고, 반복된 자료도 모두 뺐으며 참조한 논문은 모둔 출처를 달아놓았다. 다른 강의에서는 교수님께 칭찬도 받았다. 해봤자 한 두줄 있겠지. 지민이 메일을 열었다.
“……?”
지민은 눈을 의심했다. 빼곡했다. 모니터를 길게 채운 화면은 끝이 없이 이어져있었다. 다 틀렸단다. 말도 안 돼. 괜히 트집 잡는 거 아니냐? 지민은 미간을 찌푸리고 윤기의 피드백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읽어나갈수록 지민의 입술이 불만 많은 오리부리처럼 쭉 밀려나왔다. 맞는 말이네…. 과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봐….
이 정도면 민윤기만 제외한 채팅방이 하나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시키면 뭐든지 하는 자신마저 헉헉거렸으니 다른 조원들의 상태는 뻔했다. 다들 이걸 참나? 어떻게 하는 거지? 의심하면서도 꾸준히 자료를 찾아간 지민은 과실에서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민윤기는 조원인 다른 새내기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 많이 시켜서. 그런데 내가 학점이 진짜 필요하거든. 커피 사줄까?”
“괜찮아요, 선배님. 저도 학점 잘 받으면 좋죠 뭐. 그리고 선배님이 제일 일 많이 하시는 걸요.”
“됐어. 사양 하지마. 이럴 땐 먹는 거야. 케잌도 먹을래?”
“앗 그럼…헤헤.”
민윤기는 헌내기인 다른 조원에게도 똑같이 대했다.
“자료 찾느라 수고했다. 조금만 더 버티자. 곧 끝이니까.”
그리고 또 다른 조원에게도.
“PPT 만든 거 봤는데 이제 잘하더라. 조금만 더 손보면 될 거 같은데. 뭐 마실래?”
그래도 마냥 무개념은 아니었구나. 지민은 자연스럽게 기대했다. 자신한테도 한 마디 기운 내라고 해주겠거니. 생각하며 윤기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고민했다. 나한테는 언제 해주지?
“발표문은 내가 짜서 보내줄게. 한번씩 보고 피드백 할 거 있으면 해줘.”
둘만 있을 때 하나? 꽤 괜찮은 사람 같다. 할 일 다 하고 똑똑하고. 윤기는 얼굴에 닿아오는 지민의 시선을 느끼고 노트북만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돌렸다.
“할 말 있어?”
“네?”
“계속 보길래.”
“아 아뇨. 선배님이 너무 잘하셔서….”
“…집중 조금만 하자.”
어째서인지 지민의 예상과 달리 그 뒤로 윤기는 지민과 눈도 쉽게 마주치지 않았다. 지민이 더욱 성의를 쏟아 악착같이 조사해온 자료를 보며 말 몇 마디만 툭툭 던지기만 했다. 어, 그래. 맞아. 잘 찾았네.
그렇게 조별과제 중간발표. 중간고사, 퀴즈, 기말시험, 기말발표. 지민은 조금 당황했다. 교수는 흡족했고 점수는 보지 않아도 A+가 뻔했다. 윤기는 기말발표가 끝난 날 수고했다며 커피를 한 잔씩 사서 건네주었다. 모든 조원들이 헤어지고, 마지막 윤기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민은 무슨 생각인지 윤기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선배님!”
뛰어와 헥헥거리는 지민을 윤기는 가만히 할 말 있냐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그, 수고하셨어요….”
“…어. 너도.”
“덕분에 성적도 잘 나오고….”
윤기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딱히 없는 듯했다. 지민은 불굴의 의지로 꾸역꾸역 대화를 이었다. 아무런 말이나 막 했다. 발표하실 때 듣기 편하게 말씀해주셔서 더 좋았던 거 같아요. 제가 이번 학기에 제일 열심히 한 게 건축학개론이었어요. 선배님 덕분이에요. 아, 이게 고생했다는 건 아니구 열심히 했다는, 그런 거예요. 윤기는 그래? 하는 짧은 리액션도 없이 묵묵히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듣다 한 말이라고는.
“나 지금 다른 강의 시작해서.”
조금 멀어서 빨리 가야되거든. 윤기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무감각한 얼굴로 지민을 응시했다.
“아! 그럼 어서 가보셔야죠. 안녕히 가세요.”
윤기는 주저 없이 지민에게 등을 보이며 떠났다. 뭐지…. 지민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했다. 바쁘셔서 그러신가 보지 뭐.
한 강의만 겹칠 줄 알았던 인연은 신기하게도 다음 학기까지 지속되었다. 서양건축의 이해. 그 강의에서 지민은 대체 무슨 우연인건지 윤기와 또 조별과제를 하게 됐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랑 짝을 이뤄서 하세요. 교수의 말에 따라 주변을 둘러보니 그날 하필 게임 버닝타임이라며 혼자 휴강을 때린 김태형은 없고, 한 칸 떨어진 곳에 앉은 민윤기가 있었다. 그렇게 조가 구성됐다. 민윤기와 박지민, 단 두 명으로.
“아 선배님 저 그거 말인데요. 바로크양식 부분은 제가 다 찾아놨구요, 검토하면서 손만 조금 더 손봐주시면 될 거 같아요.”
“어.”
“현대건축양식이랑 비교해야 되는 건…여기는 자료가 조금 부족해서요.”
“내가 찾을게.”
“그리고 또 여기 궁전에선….”
“그것도 내가 할게.”
사무적인 대화만 딱딱하게 이어졌다. 지민과 윤기의 회의는 놀라운 속도로 빨리 끝났다. 카톡도 단순했다. 선배님 그 부분 찾았어요. 언제쯤 오세요? 저는 도착했어요. 지민이 주절주절 써 보내면 윤기는 음성을 옮겨놓은 듯한 대답만 했다. 확인했어. 어. 곧 가.
지민은 오기가 생겼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한테만 냉랭하게 대하는 태도는 꽤 신경 쓰이고, 서운하고,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꼭 좋은 말을 들어보고 싶다. 이렇게나 열심히 하면 윤기의 입에서 수고했다고 말과 다정한 말투가 나올 거 같았다. 룸메이트인 태형이 눈을 비비며 새벽까지 노트북을 붙들고 있는 지민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야, 지민아. 너는 뭔데 그거 그렇게 열심히 하냐? 지민은 이를 으득 씹으며 대답했다. 나 이거에 인생 걸었으니까 말리지마.
지민이 다크서클을 달고 준비를 갖춘 회의날. 윤기는 지민의 완벽한 레포트를 확인했다. 학점에 관해서는 그 깐깐하다는 민윤기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 볼 필요 없겠다.”
이변은 없었다. 민윤기는 여전히 삭막했다. 사막의 폭풍으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마지막 발표날, 사기꾼이 물건 팔 듯 완벽한 발표를 마친 윤기는 박수를 받으며 돌아왔다. 이번에는 커피도 없었다. 의무적인 수고했다, 딱 한 마디만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의실을 떠났다.
그로부터 지민은 한 가지 사실을 추측했다. 민윤기는 박지민을 싫어한다.
그 가설이 실체화 되는 순간이 있었다. 지민은 작업으로 밤을 새고 쉴겸 찾아간 작업실에서 민윤기를 만났다. 윤기는 웃으며 동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 민윤기 넌 과탑이잖아. 한 번쯤 노는 것도 괜찮지 않냐?”
“어 안 돼. 이 시간에 가서 톱질이나 해라.”
지민은 갈등했다. 무려 두 번의 조별과제를 했다면, 그래도 오며가며 인사 한 번 정도는 날려줄 수 있는 사이라고 박지민은 생각했다. 아니 그냥 갈까. 딱히 좋아하시지도 않는데….
“됐다니까. 너네나 가서 놀아.”
지민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동기와 말하며 웃고 있던 윤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눈도 작은데 민윤기가 자신을 본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겠다. 도망가기도 어색해진 지민은 쭈뼛거리며 다가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이게 누구야. 박지민?”
“아 형우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직도 학생회 하지? 어때? 병철이가 많이 부려먹지 않냐?”
“아니에요. 잘 해주세요. 재미있는 게 더 많은 걸요.”
“너도 참 순둥이다, 순둥이.”
학생회는 다 그런 애들만 가. 준비된 이 시대의 열정페이 일꾼들. 형우는 아, 하더니 윤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민윤기. 처음 보지? 삼장법사.”
윤기는 늘 그렇듯 그 돌덩어리같은 얼굴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차례의 조별과제를 하는 내내 쏘아보냈던 무심한 눈빛. 아는 사이이긴 한데. 지민이 입을 떼려는 그 순간, 지민과 가만히 눈을 마주치던 윤기가 먼저 말했다.
“나 먼저 간다.”
“가냐? 너 안 가?”
“어. 안 가.”
아 하여간 저 삼장법사 새끼. 형우가 투덜거렸다. 그때, 지민은 확신했다. 자신에게만 냉랭한 민윤기.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민윤기. 동기와 웃으며 이야기하다가도 말을 끊는 민윤기. 형우는 입술을 꾹 깨물며 윤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지민에게 물었다.
“야, 지민아 너 술 마시러 안 갈래? 어 야, 너 뭐 안 좋은 일 있냐? 표정이 안 좋은데.”
“제가 지금 야작중이라서요. 다음에 같이 갈게요, 선배님.”
민윤기는 자신을 싫어한다.
왜 민윤기는 학생회를 들어온다고 했을까? 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 윤기와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윤형우는 과대인 이병철과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낯을 가리다가도 마음을 열면 누구에게나 곧잘 애교도 피우고 환하게 웃는 지민은 학생회실에서 마음 편히 지내는 날이 줄어들었다. 정말로 총무부 신입으로 들어온 윤기에게 일을 가르쳐주는 건 고역이었다.
“여기 영수증 모아서 이렇게 해주시면 돼요. 회계장부는 이거인데요.”
단 둘이 딱 붙어 앉아 조잘조잘 떠드는 지민에게 윤기는 간혹 질문을 몇 번 던졌다.
“영수증 없으면?”
“어림짐작으로 쓰세요.”
“돈 남으면?”
지민은 의무적으로 착실히 대답했다.
“돈 남으면 그냥 선배님이 드시면 돼요.”
잠시 옆얼굴을 빤히 보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곧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민은 윤기가 영 껄끄럽고 불편했다. 친해지기만 하면 뭐든 다 해주는 지민은 어디를 가나 예쁨을 받는 편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그것도 자신만 찬밥 취급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돈을 뺏은 것도 아니고, 자다가 얼굴을 한 대 친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시다 침을 뱉어놓은 것도 아니고. 무슨 짓을 하긴커녕 열심히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 왜 온 거람. 과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취업 때 쌓을 스펙으로 학생회를 선택한 모양이다. 그러니 자신이 있어도 꾸역꾸역 학생회실을 들락거리는 거다. 의자를 나란히 놓고 딱 붙어 앉아 조별과제 연장선의 대화를 하는 이유도.
“영수증 내가 모아놨어. 넌 가.”
“네? 선배님 혼자 하시게요? 많은데.”
“별로. 괜찮던데.”
“그래도….”
지민은 빤히 바라보는 윤기의 시선에 말이 막혔다. 같이 있는게 싫다는 건가.
“네, 그럼 부탁할게요. 감사합니다.”
태형이 지민을 반겼다. 어? 너 일 안 해? 어쩐 일? 윤기 선배가 다 한 대. 야 잘 됐다 같이 게임하자.
모든 학생회 부서는 늘 개강시즌이 되면 바빠졌다. 엠티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기획부가 모든 준비를 했고, 지민과 윤기는 영수증을 차곡차곡 모았다. 그리고 대망의 장을 보는 날. 마트는 엠티 며칠 전 대부분의 학생회 인원이 가지만, 그날 하필이면 기획부에 비상이 걸렸다. 숙박업소의 변덕으로 예정된 숙소가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두 명이서 그 많은 짐을 날라요? 말도 안 돼요!”
지민이 기겁하며 외쳤다.
“야 그럼 어떻게 해. 반만 사와도 돼. 대충만 해줘. 지민아 한번만 도와줘라, 어? 차도 렌트해줄게. 윤기 운전할 줄 알잖아.”
“아니 그래도!”
“후배님 부탁해!”
막무가내로 등을 떠미는 병철의 사정 하에 결국 장을 보는 인원은 두 명으로 확정이 나고 말았다. 박지민과 민윤기. 딱 둘.
하늘이 날 버렸다. 확신하며 지민은 어색한 적막을 어떻게든 떨쳐버리고 싶었다. 장을 보고 옮겨놓는 일까지 한다면 최소한 세 시간은 붙어있어야 할 터다. 지민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제안했다.
“선배님 피곤하시면 그만 가셔도 돼요.”
“별로 안 피곤한데.”
“아 그래요….”
같이 있기도 싫으면서 왜 저러냐. 지민은 태형에게 카톡을 날렸다. 태태, 회의 끝났어? 여기 올 수 있어? 열심히 ‘ㅠㅠ’ 이모티콘을 날리고 있던 와중, 카트의 손잡이를 쥔 윤기가 말했다.
“왜. 피곤해?”
“네?”
“얼굴 색 안 좋아 보여서.”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지민은 꽤나 의외라고 생각하며 윤기를 바라보았다. 눈치가 있긴 있었구나. 두 번 물어보는 일 없는 윤기는 먼저 카트를 끌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옆으로 재빨리 따라붙은 지민은 흘끔 윤기를 관찰했다. 말하는 게 나을 것도 같다. 윤기와 같은 학생회실을 드나들며 요새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싫어하는 이유라도 알면 조금 편할 거 같았다. 그 과정에서 다투고 둘 중 한 명이 총무부를 관두게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지민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냥 전 선배가 불편하실 거 같아서요.”
“…….”
“선배는 저 싫어하니까….”
윤기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텅 비어있는 카트도 같이 멈췄다. 뒤로 돌아 지민을 빤히 바라본다.
“안 싫어해.”
늘 지민에게 사무만 간단히 던져대던 특유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 대답이 들리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확고하게 부정한 윤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내가 왜 널.”
시선은 계속 대립한다. 지민의 눈은 조금 놀라 커진 상태였고, 윤기의 눈은 약간 어이없다는 빛을 띄우고 있었다. 윤기가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런 거 없어.”
지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지않아 윤기는 먼저 걸어가 소주 박스를 카트에 담았다. 술만 사가자. 나머지는 기획부가 하라고 해.
기획부의 눈물로 엠티는 성사되었다. 어지간한 펜션은 다 예약이 꽉 차 있었고, 영웅으로 등장한 이가 기획부의 꽃 김태형이었다. 태형은 브이를 날리며 인맥을 썼다 했다. 우리 삼촌이 도와준대! 모두들 김태형을 영웅으로 치켜세웠고, 지민은 기특하다며 태형을 꽉 끌어안아주었다.
날씨는 꽤 싸늘했다. 반팔만 덩그러니 입고 온 지민은 웅크리고 눈을 붙이고 있는 태형을 확인했다. 누구 더워하는 사람 없나. 두리번거리는 지민에게 과잠을 내민 것은 신입생 전정국이었다.
“형 입어요.”
“너 괜찮아?”
“별루 춥지도 않은데요 뭐.”
정국은 문제없다는 듯 팔을 까딱거리며 스트레칭을 해보였다. 히히, 그럼 내가 잘 쓴다? 지민은 추우면 안기라며 가슴팍을 내밀었다. 정국은 질색했다. 아 그냥 다시 내놔요. 야, 한 번 주면 끝이야. 오직 지민과 정국만이 떠드는 사이, 차는 펜션에 도착했고 하나의 좀비떼처럼 사람들이 비척비척 일어나기 시작했다.
“야 애들아 짐 날라.”
지민은 소주박스를 들었다. 선배 이거 너무 무거운 데요? 야 잔말 말고 날라. 정국이 저기 두 박스 들고 걸어가는 거 안 보이냐. 이미 펜션에 거의 도착한 정국은 소주박스 두 개를 겹쳐 들고가고 있었다. 와씨, 쟤는 뭐. 지민은 끄응 소리내며 소주박스를 품에 안았다.
“야 정국아. 이것도 같이 들고 가.”
정국이 저기 있는데. 생각하며 지민이 들고 가는데, 한 번 더 목소리가 들린다. 전정국! 그제야 지민은 자신이 정국의 과잠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뒤를 돌아보니 학생회 애들에게 짐을 나눠주고 있던 민윤기가 서있었다.
“네? 저요?”
“…니가 왜 걔 과잠을 입고 있어?”
“좀 추워서요.”
윤기는 지민을 빤히 쳐다봤다. 지민은 손을 뻗었다.
“하나 더 들어요? 이리주세요.”
민윤기가 손을 뒤로 쏙 뺀다. 고개를 휙 돌리며 시선을 피한다.
“됐어. 그냥 가.”
그러더니 혼자 소주박스 위에 짐을 더 얹고 지민을 지나쳐 박지민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지나갔다. 지민은 뒤에서 눈만 깜빡거렸을 뿐이었다. 병철이 지민의 등을 탁 때렸다.
“가만히 서서 뭐해. 안 춥냐? 빨리 들어가야지.”
“아 네.”
“아 맞다, 야 민윤기! 과잠 챙겨! 짐 놓고 내리지 말라고 했잖아!”
병철이 투덜거렸다.
“갑자기 벗어서 내팽개치는 건 무슨 이유야. 아까 춥다고 이런 날씨에 꼭 엠티를 가야하냐고 뭐라 꿍얼거리고선.”
야! 과잠 가져가라니까! 병철이 외치며 버스 안에서 과잠을 챙겨 나왔다.
엠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학생회가 나서서 게임을 주도하며 분위기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마지막은 늘 그렇듯 술자리였다. 이미 소주 몇 십 병이 방을 굴러다녔고, 슬슬 하나 둘 뻗어 어딘가 잘 곳을 찾고 있었다. 그중 거의 마지막까지 버티며 게임을 하던 지민은 서서히 올라오는 취기를 느꼈다. 하루종일 힘쓰면서 무리하기도 했고 술 자체도 많이 마셨다. 몇 병이더라. 네 병…? 헷갈린다. 지민이 끄응 머리를 붙잡았다. 여자선배가 말했다.
“왜 지민아 머리 아파? 취했어?”
시선이 모두 주목된다. 주량이 센 건지 아직까지 자리에 앉아있는 민윤기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무지 어울릴 거 같지 않더니 술자리도 게임도 윤기는 다 참여했다. 지민은 어설프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저 좀 그만 마셔야 할 거 같아요.”
“야 괜찮아, 괜찮아. 더 마셔 더.”
동기가 지민을 붙잡았다. 아니야, 나 진짜 더 마시면 골로 가. 괜찮아,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줄게. 노걱정, 노걱정. 쭉쭉 원샷! 마셔라! 마셔라! 분위기를 중시하는 자리에서 지민은 빼지 못하고 약 한 병을 더 마셨다. 그리고 그 한 병이 바닥을 비울 때 즈음, 진정한 죽음의 위기를 느낀 지민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디가징…. 찬바람을 쐬니까 조금 낫다.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지민은 소주병 하나를 들고 망설임 없이 신발을 신고 뛰쳐나왔다. 왜 들었는지는 모른다. 원래 술 취한 사람은 아무 짓이나 잘 하지 않는가.
지민은 발 닿는 곳으로 마구 뻗어나갔다. 걱정은 없었다. 박지민의 술버릇은 웃음이 많아지고, 혀가 짧아지는 종류였다. 더군다나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주사를 부리는 동안 기억이 한 번도 끊긴 적은 없었다. 지민은 펜션과 적당히 떨어진 길가에 무작정 주저앉았다. 고개를 꺾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많았다. 빼곡히 박힌 별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검은 하늘을 쭉 긋고 떨어지는 별똥별도 있었다.
서서히 눈이 감기는 그때.
“…여기 있었냐.”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 뛰어다닌 듯했다. 거의 넘어갈락 말락 꾸벅거리던 지민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위로 드니 민윤기가 보였다. 뭐야…민윤기잖아….
“무슨 애가…이건 또 뭐야.”
지민의 앞으로 돌아온 윤기는 어이없다는 손놀림으로 지민이 품에 소중히 끼고 있던 소주병을 꺼내들었다.
“…줘….”
“그렇게 취하고서도 이건 가지고 나갔냐.”
지민은 꾸물꾸물 윤기의 손에서 소주병을 뺏어 다시 품에 소중히 장착했다. 졸립다. 말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머리를 어디론가 기대고 싶어 지민은 눈을 감고 고개를 뒤쪽으로 까딱거렸다. 위험하게 넘어갈 모양새라 윤기가 급히 지민의 목을 한 손으로 받치며 품으로 안 듯 데려왔다.
“뒤에 돌 있어. 찧으면 골로 간다.”
“졸려.”
“걱정은 다 시키고.”
취한 지민은 그 와중에도 합리적인 생각을 했다. 민윤기가 왜 날 걱정해. 닌…내가 싫다며. 아니지. 싫진 않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그랬다. 싫지 않다고. 민윤기는 애매하고도 이상한 존재였다. 마트에서 그런 일이 있은 후 조금 관계가 나아지나 했더니 다시 원점이었다. 단호하게 싫지 않다고 대답한 민윤기는 이상했다. 그럼 왜 그렇게 무시하는데. 왜 그렇게 나만 싸늘하게 바라보고 관심도 없고 차별하는 건데.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도 다 그러는데 내가 못 보는 거냐. 윤기는 지민의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정신 좀 차려봐.”
끼잉거리며 지민은 귀찮으니 손 떼라는 듯 팔을 휘적거렸다. 손쉽게 지민을 제압한 윤기는 혀를 쯧쯧 찼다.
“많이 취했네.”
졸립다. 자고 싶다. 민윤기가 자신을 찾아 튀어나왔다는, 알면 눈 돌아가게 놀랐을 사실에도 지민은 졸립기만 했다.
“이건 계속 쥐고 있을 거냐.”
소주병을 쥔 지민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알았어, 알았어. 안 뺏을게. 힘 빼.”
다시 힘이 빠진다. 윤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작게 새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졸려?”
“…….”
“잘 거야?”
“…….”
“지민아.”
언젠가 지민이 좋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는 다정했다. 꼭 조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박지민이 귀엽다는 듯. 지민은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미닌데…. 눈을 게슴츠레 뜨니 민윤기의 하얀 얼굴이 보인다.
“박지민.”
민윤기는 웃고 있었다. 정말 어느 때보다 활짝. 여태 지민이 본 ‘박지민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사람인 민윤기’ 그 이상으로.
너 안 싫어해. 말하던 낮은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슈팅가드(Shooting guard , SG)
1. 농구 포지션으로 장거리에서 슛을 하여 점수를 얻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