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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Dave Brubeck - Unsquare Dance>









 일주일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넋을 빼고 있었으면 됐다. 지민은 일자리 있는 백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영화감상문을 썼고,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부엌과 침실을 왔다갔다하는 동선으로 나름대로의 조깅을 했고, 가구를 들어 집안 구조를 이리저리 바꾸고. 그리고 뷔가 준 카메라의 필름을 몇 개씩 누워 돌려보았다. 가끔 외출도 했다. 물론 마스크와 모자를 칭칭 감아두른 채로. 시간이 빨리 가는 듯 가지 않는 듯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특히나 윤기에게는 꼬박꼬박 문자를 보냈다. 영화감상문에 적듯 짧은 편지였다. 오늘 하늘이 정말 맑으니까 꼭 올려다보세요.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커피는 이제 진이 사요?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딱히 길게 쓰지않아 꼽을만한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답장은 금방금방 왔다. 뭐지, 안 바쁜가? 묘한 의심이 가면서도 마냥 기분이 좋아서 지민은 배시시 웃고 말았다.


 지민은 뷔의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대충 만든 와플과 콩 통조림을 가져오는 성의도 보였다. 쿡 와플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밀어 넣으며 카메라를 켰다.



“오늘은…며칠이더라.”



 어제 마지막으로 본 영상에선 뷔가 레옹의 대사를 읊었다. 지민은 차례차례 매일 날짜가 표시되어 있는 영상목록을 뒤적거렸다. 그럼 오늘은 3월 18일.



“어?”



 없다. 영상 목록은 3월 17일에서 3월 19일로 곧장 건너뛰어 있었다. 아무리 버튼을 주르륵 위로 올려도 아래로 내려도 3월 18일 날의 영상은 보이지 않는다. 삭제된 건가? 매일매일 찍혀온 영상 중 유일하게 빠진 날짜. 의아해하며 19일의 영상을 클릭하니 장소도 바뀌어있었다. 컴컴한 배경과 달리 테이블과 벽에 붙은 가게 인테리어를 보니 식당인 듯했다. 극단에 들어간 건가?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흐름이 끊긴 기분이라 카메라를 접은 지민은 시간을 확인했다. 9시. 퇴근길이 이어지는 평범한 시각. 사람도 많고 파파라치야 물론 아직까지는 따라다니겠지만. 뉴스를 아예 끊으니 사진 몇 장쯤에는 관대해지는 여유까지도 가지게 됐다. 세탁소부터 다녀와야겠다. 그딴 사진 몇 장 안 찍히려고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대충 후드티를 눌러쓰고 모자를 착용한 지민은 집을 나섰다.



“…….”



 지민은 요즘 외출하며 느꼈던 수상한 감각을 다시금 감지했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최근 외출을 할 때마다 계속 느꼈다. 스멀스멀 불안함이 올라온다. 단순한 파파라치라고 정의하기에는 지나치게 집요했다. 지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걷는 속도를 빨리했다. 빨라지면 같이 빨라지고, 느려지면 다시 느려진다. 뭐지? 왜 따라오는 거지? 강도인가? 살인마? 뭐지? 아니면 민윤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과거애인이 나한테 킬러를 붙인 건가? 온갖 말도 안 되는 망상을 기반으로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지민은 주머니에 손을 푹 집어넣고 후드를 더 당겨썼다. 아무것도 눈치 못 챈 것처럼 평범하게 걷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죽을힘을 다해 미친 듯이 뛰었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쫓아오지마악!”



 지민은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카메라를 쥔 웬 남자가 전속력을 다해 쫓아오고 있었다. Fuck! 남자가 상스러운 욕을 내뱉으며 서라고 바락바락 외쳤다. 잡히면 죽는다. 확신한 지민은 허파가 뽑히도록 속도를 올리며 머릿속에서 빠져나가기 쉬운 지름길을 검색했다. 그 골목을 꺾어서 돌아가면 큰 길이.



헉, 이게 뭔.”



 나와야하는데. 대체 언제 생긴 거야. 접근불가 표지판이 붙은 철조망이 통로를 떡하니 차단하고 있었다. 에이씨, 지민은 학학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싸울 준비를 했다. 꼭 그런 느낌이다. 프로레슬링 무대로 떨며 올라온 디즈니의 미키마우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안 봐줄…!”



 그리고 그 순간, 또 다시 누군가가 튀어나와 지민을 쫓아온 사람을 습격했다. 헉, 지민이 숨을 크게 삼켰다. 두 그림자가 서로 엉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씨발, 누구, 악! 짧은 고성이 오가고, 미행했던 남자가 카메라를 챙겨 냅다 반대쪽으로 뛰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넋이 날아가려던 지민은 허겁지겁 여전히 바닥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괘, 괜찮으세요?”



 어흐윽, 바닥을 구른 남자의 얼굴이 가로등에 비춰 드러난다. 정체를 확인한 지민은 입을 떡 벌렸다. 저 유독 튀는 커다란 덩치에 자신을 쫓아다닐 남자는.



“…시몬?”



 그 기자 한명만 존재한다.



“쓰읍, 아 차에 치였을 때보다 아프네요.”

“대체 여기 왜….”

“우연히 만났다고 하면 안 믿겠죠?”



 지민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늘 쫓아다니던 맨해튼도 아니고 퀸스, 그것도 자신의 집 근처. 시몬이 툭툭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그는 눌러쓴 후드티를 벗으며 설명했다.



“아까 도망간 파파라치를 쫓고 있었어요. 요 며칠 이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돌아다니더니, 하아 지민을 찍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시몬도 파파라치….”



 같은 파파라치가 파파라치를 쫓는다? 이해할 수 없는 지민이 작게 내뱉으니, 시몬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파파라치 아니라니까요?”



 매번 따라다녔으면서…. 불신의 눈초리에 움찔한 시몬이 킁, 코를 들이마신다. 다 업보였다.



“물론 저도 그러긴했지만.”

“…….”

“그런데 혹시…여기 가까운 약국 좀 알려줄 수 있어요?”



 쓰읍. 시몬이 소매를 걷어붙이니 붉은 자국이 나타났다. 세상에, 다치셨어요? 놀란 지민이 다가와 무릎을 굽혀 앉아 상처를 확인한다. 땅바닥에 구르면서 까진 건지 피가 줄줄 흘렀다.



“일단….”



지민이 시몬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거부터 치료해요.”








 계속 새로운 손님이 추가된다. 고모할머니를 보내드린 후, 지민의 집을 들락거리는 건 오로지 정국뿐이었다. 거기에 민윤기가 추가되고, 이제는 미친 파파라치라고 의심했던 기자도 추가됐다. 커피 드실래요? 괜찮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젠가 한번쯤은 인터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고는 생각해봤는데, 집에서 커피를 직접 탄 커피를 마시며 식탁에 앉아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있을 줄은 몰랐다.



“여기 드세요.”

“감사합니다.”



 반창고와 밴드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시몬이 머그컵을 받아들었다. 밝은 불빛에서 확인한 얼굴은 생각보다 많이 까져있었다.



“아프진 않으세요?”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트럭한테나 치여야 병원 가는 거죠.”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뭘요. 아는 사이인데.”



 아는 사이…맞긴 하죠, 그쵸. 일단 쫓고 쫓기고 질색하며 난리를 쳤어도 아는 사이인 건 맞다. 지민이 사뭇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같은 언론 쪽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해도 괜찮으신 거예요?”



 파파라치를 다른 파파라치가 패서 쫓아냈다. 같은 업계에서 이 소식이 퍼진다면 배신자, 그런 쪽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겠지 싶었다. 쉽게 따지면 그런 논리다. 개와 고양이가 치고받고 싸우는데 개가 고양이의 편에 선 경우. 시몬이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놈은 기자도 아니고 개인파파라치에요.”

“네? 개인파파라치요?”

“돈만 받으면 뭐든 찍어다주는 놈들이죠. 주로 높으신 분들이 결혼하고 나면 서로에게 붙이는 일로 애용하곤 합니다. 한 컷 당 어마어마하게 받을 걸요.”

“누가 대체 절….”



 지민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흔한 가십지의 기자라면 불쾌하긴 해도 납득은 된다. 굳이 따지자면 시민들의 호기심 충족, 돈 벌이 그런 목적을 쉽게 떠올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개인이라면 사진을 찍는 목적이 모호해진다. 게다가 저런 비싼 파파라치를 쓸 수 있는 부를 가진 사람은 주변에 몇 없다. 아니 몇 없는 게 아니라 딱 한 명이 있고, 그 주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말 민윤기를 잊지 못한 과거 애인이 있기라도 한 건가? 지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사람이 누구인데요?”

“제가 쫓고 있는 사람입니다.”



 돌연 지민이 멈칫한다. 싹 굳어 핏기가 빠진다. 생각보다 더 격한 반응인데, 시몬은 공포심 때문이라 추측했다.



“…혹시 그 사람과 어거스트가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건.”



 시몬은 말을 멈추고 지민을 바라보았다. 어거스트 회장의 애인이라는 취급을 받는 사람 앞에서 얼마나 이야기해야 할까. 당연히 애인 회사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환영할 리는 없을 터였다. 하다가 물이나 끼얹지 않으면 다행인데. 취재를 돌아다니며 문전박대와 물세례는 많이 받아봤어도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뒤집어쓰긴 싫었다. 놀랍게도 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케일론 베닌인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말하는 게 오스카에서 상탄 그 배우가 맞다면 맞아요.”



 어떻게 알고 있지, 생각하면서도 시몬은 긴장감이 몰려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일이 좋게 풀릴 것 같은 강력한 확신이 시몬의 감각센서를 자극했다. 의자를 바짝 당겨와 허리를 피고 눈을 빛냈다.



“그럼 대화가 빨라지겠군요.”



 좀 긴 이야기입니다. 뜨끈한 머그잔을 감싼 지민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







[D-DAY!]



 뷔는 달력 어플에 체크해놓은 날짜의 메모를 확인했다. 아스팔트 정글 마지막촬영. 많은 작품을 촬영했지만, 마지막 씬을 촬영할 때면 늘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곤 한다. 끝이라는 성취감. 작품에 대한 기대감. 조금은 싱숭생숭한. 그런 것들이 한데 아우러져 느끼는 감정이라고 뷔는 추측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세수를 하고 비타민을 오독오독 씹어 먹는다. 오늘 그의 머릿속에는 평소와는 다른 것들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아스팔트 정글 대본의 마지막 장면대사나, 촬영이 끝난 후 뒤풀이파티 참석여부가 아닌, 어거스트 최상층 사무실에서 한 약속. 윤기의 목소리가 라디오 방송처럼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촬영이 끝나면 넌 그 일에 관해선 잊어.



“준비 다 됐어?”



 매니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응, 다 했어. 뷔는 구찌 셔츠의 커프스단추를 잠그고 타이를 맸다.



“나 비행기 언제 뜨더라?”

“3일 뒤에 출발하는데 시간은 알아야 하지않냐.”

“에이, 또 알려줄 거잖아.”

“프랑스 가서 스핑크스 찾지 말고.”



 걱정마, 걱정마. 뷔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히이 웃었다. 일부러 놀리려고 작정을 했다. 가서 스핑크스 대신 피사의 사탑 구경하고 올 거니까. 그래 가서 기울어진 탑 똑바로 세워놓고 와라. 결혼도 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매니저가 운전석에 앉아 엑셀을 밟았다. 부드럽게 출발한 차는 빠르게 저택거리를 벗어나 국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한 말 참 좋은 거 같아.”

“뭐, 설마 문화재랑 결혼권장이?”

“아니 그거 말고 기울어진 건 똑바로 세워놓는다는 거.”



 …무슨 소리람. 매니저는 이내 익숙하게 넘겼다. 그래,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몇 년이나 같이 일하다보니 뷔의 자유로운 사고방식 세계를 이해하진 못해도 놀라지 않는 수준에는 이르렀다. 물론 뷔가 몰래 도둑외출을 한다거나, 홀랑 해외로 날라버리는 무식한 짓을 할 때면 개거품을 물고 기절할 거 같지만.



“기울어진 건 똑바로 세워야 돼.”



 기울어진 걸, 똑바로. 뷔는 감상에 취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어떤 오래된 과거필름이 영사기에서 돌아갔다.








***








 시카고 남부 빈민촌에 거주하는 열다섯의 소년은 연기를 좋아했다. 네모난 프레임 앞에 서서 대사에 숨을 불어넣으면 다른 사람이 되는 그 순간이 소년에겐 기적이었다. 그 앞에선 뭐든 될 수 있었다. 가위손이 되어 정원을 온통 하트모양으로 다듬었고, 쇼생크탈출의 앤디가 되어 교도소 벽을 숟가락으로 팠고, 빌리 엘리어트가 되어 토슈즈를 신었다. 뷔는 매일같이 트루먼쇼의 포스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짐캐리에 자신의 얼굴을 합성했다.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나잇! 내 영화가 생기게 해주세요!


 안타깝게도 짐캐리는 신이 아니었다. 영화는커녕 아무리 동네를 뛰어다녀도 그 흔한 연극 포스터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뷔는 동네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이 생각해도 이곳은 심각했다. 남부의 빈민촌 밀집구역은 정부에서조차도 손을 놓았다. 마피아의 도시라는 별칭답게 경찰은 부패했고, 통제 대상이 없는 마피아는 총을 들고 미쳐 날뛰었다. 새벽에도 심심찮게 총성이 울렸다. 어느 미친 예술인이 갱의 사생활을 녹인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 둥지를 틀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예술과 접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콩 통조림과 계란, 우유가 올라온 저녁식탁. 뷔가 식기를 내려놓고 비장하게 말했다.



“나 뉴욕으로 갈래.”



 식탁 위를 오가던 모든 숟가락질이 정지했다. 깜빡깜빡 눈만 뜨고 있던 부모가 천천히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얘가 왜 이러지? 알아요? 나도 몰라. 혹시 아까 나갔다 오면서 마약 브로커한테 강매라도 당했나? 뷔는 들떠 계속 말했다.



“거기에는 브로드웨이가 있대.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쪽에 몰려있다고 했어.”

“그걸 누가 말해줬니?”

“테드가. 아까 자전거 타다가 마주쳤어.”



 아이가 연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부모는 으음, 신음을 흘리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뷔를 가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 눈으로 이어진 대화. 당신이 거절해, 왜 내가? 하라면 해. 결국 큼큼 헛기침을 하며 총대를 멘 건 미스터 레이언이었다.



“얘야 아빠는 잘 모르겠다. 넌 연기에 재능이 별로 없어서.”

“그래도 여기 살면 마피아밖에 할 게 없잖아.”



 난 그거 적성에 안 맞아. 뷔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입단 미션 샷으로 지나가는 일반인에게 총구를 겨누기도 싫었고, 하면 두 눈이 벌게져 좀비 같아 보이는 마약을 팔기도 싫었다. 이 총은 총알이 몇 개가 들어간다며 자랑하는 그들만큼 무식해보이는 인물들이 또 없었다. 미스터 레이언이 소심하게 눈을 굴렸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얘야,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는 건 어떻겠니. 답답해진 건지 긴 흑발을 단정하게 묶은 여성이 나섰다.



“가면 집은 어떻게 하게?”

“일하면서 구하면 되지.”

“밥은?”

“햄버거 먹을 거야.”

“가면 누가 너 배우 시켜준대?”

“그럴걸?”

“어떻게 확신해.”

“음…잘생겼으니까?”

“그래 좋아. 가.”



 아니 여보!? 미스터 레이언이 식겁했다. 하이스쿨도 못간 애를 혼자 뉴욕에 보내면 어떡하려고…! 뉴욕이 안전한 도시라고는 해도 아이 혼자는 위험하다, 아직 면허도 따지 않은 애를 어떻게 놔두냐. 그러다가 장기매매 브로커라도 만나면! 끔찍한 상상을 마친 미스터 레이언이 더는 못 말하겠다는 듯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듣는 둥 마는 둥 미스 레이언은 식탁에서 일어나 서랍을 뒤져 검은 물체를 꺼내왔다. 매끈한 총구가 돋보이는 리볼버였다.



“시카고에서 왔다고 만만하게 보면 쏴버려.”

“내일 바로 가도 돼?”

“응. 잘 다녀와. 영화 찍으면 연락해.”

“응!”



 뷔는 부모의 뺨에 입맞춤을 하고 우다다 방으로 올라갔다. 흑흑거리는 미스터 레이언을 미스 레이언이 위로했다. 당신 닮아서 잘생겼으니까 괜찮아. 딱히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위로였지만 미스터 레이언은 손수건에 눈물을 찍으며 결국 동의했다. 그래 우리 작품이지. 다음날 새벽. 운치 있는 여명이 떨어지는 길을 나서며 뷔는 맑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아빠 안녕! 다녀올게!








 듣던 대로 뉴욕은 화려한 도시였다. 야경은 북부의 발달된 시카고의 다운타운과 비슷했다. 다만 뉴욕의 화려한 거리엔 시카고에 없는 각종 뮤지컬과 연극 간판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뷔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브로드웨이를 걸었다.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한 블록을 건널 때마다 화려한 간판이 반짝반짝 빛나며 뉴욕 입성을 환영했다. 이쪽에는 오페라의 유령이, 저쪽에는 맘마미아가. 그리고 한 블록을 지나가면 위키드의 마녀가 깔깔 웃으며 소년을 초대했다.


 뷔는 선물로 받은 리볼버를 사용하는 대신 되팔아 카메라를 샀다. 카메라를 사고 햄버거를 사먹으니 돈은 금방 바닥이 났다. 뉴욕에 와서 카메라를 사고 연기를 하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를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잠자리를 알아봤으나 이미 햄버거와 카메라로 탈탈 털린 주머니는 텅 비어있었다. 극단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뷔를 거절했고, 맥도날드는 일손이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 일주일의 노숙생활을 전전한 끝에 소년은 브루클린 가게의 일자리 하나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뷔, 또 나가니?”

“네!”

“파이 먹고 갈래?”



 샌드위치 가게 주인 파트가 인상 좋은 미소를 지었다. 카메라를 들고 문 앞에 선 뷔가 갈팡질팡했다. 어어, 가야되는데…. 그래도 파이는 갓 만들었을 때 먹는 게 맛있지. 유혹에 진 소년은 머뭇거리다가 파이를 선택했다. 그럼 조금만 먹고 갈게요. 와앙! 크게 파이를 베어무는 소년을 보며 파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부로 열쇠는 네가 챙기고 다니렴.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바로 따고 들어와서 자.”

“그애두 대까야?”



 그래두 될 까요? 파이를 목에 밀어 넣느라 발음이 뭉개진 뷔가 열쇠를 받아들었다. 물론. 파트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녀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뉴욕을 찾아온 소년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줄 만큼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일단 천진하게 웃으며 당당하게 제 꿈이 배우라 밝히는 소년은 도무지 미워할 수 있는 구석이 없었다. 구김 없는 다정한 성격은 물론이요, 작은 몸집으로도 날다람쥐마냥 요리조리 테이블 사이를 날아다니며 제 할 일까지 톡톡히 하니, 파트는 뷔가 아들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참 이거 아니?”

“이게 뭐예요?”

“켈링턴 아트스쿨에서 연극을 한다고 해서 뷔 네가 생각나서 가져왔는데.”



 파트가 포스터를 내밀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제목이 적힌 포스터 속 금발머리의 소녀가 환히 웃으며 뷔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금방이라도 달빛이 흐르는 강으로 같이 가자 손을 내밀 듯 달콤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엘리 하트만이라는 글자까지 확인하니, 파이를 집어들던 뷔의 손이 느려진다.



“마음에 드니?”



 뚫어져라 포스터를 바라보는 뷔를 보고 파트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세상의 중심은 뉴욕이다. 누군가 미국을 찬양하는 흔한 멘트지만, 소년에겐 진짜 뉴욕이 전세계의 중심처럼 느껴졌다. 맙소사, 브로드웨이에 모자라 아트스쿨이 있다니! 이름도 멋졌다. 켈링턴 아트스쿨. 뷔는 켈링턴 아트스쿨의 졸업연극 포스터를 보자마자 결심했다. 나는 여기로 들어가야 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곳에 입학하면 어떨까. 일단 고향의 학교와는 다를 것 같았다. 너 이 새끼 기분 나쁘게 했다며 라카에서 총을 꺼내는 일도 없고, 경찰이 없는 곳에서 레이싱 대결을 하자고 스포츠카를 훔치자는 무리는 없을 것이라 추측했다.


 뷔는 켈링턴 아트스쿨의 학비를 알아본 순간 기함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끝없이 늘어서있는 숫자 단위를 확인하고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여기 가려면, 그러면 난 샌드위치를 몇 개 팔아야 갈 수 있는 거지? 가게에서 가장 비싼 샌드위치는 25달러니까. 베이컨토마토달걀 샌드위치를 졸업까지 약 만 개, 이만 개…. 음. 머리가 하얗게 바란 파트에게 가게를 물려받을 때쯤 입학을 할 수 있겠다.


 뷔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잠을 두 시간씩 쪼개가며 연기를 연습하는 열정이 있다고 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극단에서 배워야지. 아르바이트 장소도 조금 더 알아보고. 아니면 시카고로 돌아가야 하나. 볼을 긁적거린 뷔는 어쩐지 막상 포기하려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가기는 싫고 돈은 없고….


 쪽쪽 손가락만 빨며 포스터만 바라보던 뷔는 어느 순간 결심을 했다. 안이 안 되면, 그럼 밖에서 있으면 되지. 어차피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뉴욕이 아니었던가.


 결론적으로 마피아가 싫다며 시카고를 떠나온 소년은 뉴욕에서 경찰에게 걸리지 않고 담을 몰래 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경찰들이 순찰을 끝낸 시각, 감시카메라의 간격이 멀리 떨어져있는 정원. 두 가지 조건을 터득하고 나니 뷔는 아트스쿨 담벼락을 샌드위치 가게 화장실 넘나들 듯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뷔는 도착한 정원 수풀 사이에 앉아 카메라를 켰다. 어두컴컴한 정원은 가로등 몇 개만이 켜져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소년이 쏙 가로등 불빛 쪽으로 허리를 기울인다. 노랗고 하얀 빛이 소년의 얼굴을 비추었다.



“오늘은, 어 3월 18일.”



 영화의 제목과 간략한 스토리를 비롯해 기본적인 항목을 늘어놓았다.



“그럼 첫 번째 장면부터 촬영….”



 뷔는 말을 멈추었다.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헉, 바짝 긴장하며 뷔는 허겁지겁 가로등의 불빛을 피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다시 순찰이라도 하는 건가? 숨을 죽이고 경찰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한참, 뷔는 돌연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슥 스쳐지나가는 불시순찰과 달리 유독 부스럭거린다. 뭔가 좀 헉헉거리는 숨소리도 나는 거 같고….


 고개를 갸우뚱거린 뷔는 흘끔 정원 밖을 내다보았다. 감시카메라도 없는 이곳에서 또 누가. 나처럼 몰래 온 건가. 생각하며 포복 자세로 낮게 몸을 숙였다.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경찰이 아닌데. 남자라는 것과 경찰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는 것. 두 가지만 확실했다. 원체 시력이 나빠 뿌옇게 보인다. 흐릿한 형체는 커다란 나무 앞에서 끙끙거리며 무언가를 나무에 걸고있었다.


 뭐야 저게. 뷔는 남자를 관찰했다. 빨래인가? 옷? 수건? 하얀 색의 하늘하늘한 그것은 샤워가운처럼 컸다. 아무리 봐도 수상해 보이는 남자는 마침내 갖은 노력 끝에 무언가를 나무에 걸어놓았다. 얼마나 힘을 쓴 건지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뷔의 귀까지 들려왔다. 빨래 이상의 것을 떠올리지 못한 뷔가 점점 더 고개를 빼꼼 내민 그때.



“헉!”



 뷔는 다시금 머리를 훅 숙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와 눈이 마주칠 뻔했다.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리며 박동했다.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머리를 감쌌다. 곧이어 타닥거리며 올 때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잔디밭에 얼굴을 뭍은 뷔는 찬찬히 수풀 사이로 고개를 다시 내밀었다. 똑같이 몰래 침입한 사람한테 왜 숨은 거람.



“누구야, 대체.”



 어떤 싸이코가 빨래를 이 시간에 널어? 아 오늘 다시 찍어야 되잖아. 뷔는 투덜거리며 정원에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켈링턴 아트스쿨의 벽돌이 쌓이고 첫 입학생이 들어온 순간부터 심어진 나무는 크고 높았다. 나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뷔의 하얀색 스니커즈가 천천히 느려지다가, 결국 뚝, 멈췄다.



“…….”



 뷔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계속, 또 계속. 그렇게 시선은 남자가 걸어놓은 물체의 높이까지 올라갔다. 바람이 분다. 하얀 색의 그것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꼭 깃발처럼. 사람만한 크기의 빨래라 생각했던 그건. 뷔의 머리카락과, 나무에 걸린 그것의 검은 머리카락이 같이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



 뷔가 빠져나온 수풀 속, 뷔를 담고 있던 카메라의 빨간불이 모든 것을 담고 깜빡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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