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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Dave Brubeck Quartet - Angel Eyes>









 사람은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가. 금요일만 해도 떨며 돌아왔던 길을 월요일에 아무렇지 않게 밟고 간다. 지민은 토요일 밤만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올라 맨해튼에서 퀸스까지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민윤기를 보니 무언가 아쉬워서,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서, 잠깐 발만 붙이고 간다는 게 얼결에 입술까지 붙여버렸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더 창피했다. 왜 도망치듯 뛰어갔지. 내가 무슨 잘 나가는 농구부 주장한테 고백하고 도망가는 수줍은 십대도 아니고.


 다행히 월요일 아침부터 볼이 익는 일은 없었다. 진은 커피를 들고 돌아온 지민을 환영하며 윤기의 오후 출근을 알렸다. 지민이 말했다.



“그럼 그동안 전 뭐하고 있을까요?”

“지민이요? 음…쉬는 건 어때요?”



 지민은 어설프게 웃으며 말도 안 된다 부정했다. 선배님 제가 아무리 그래도 월급을 공짜로 받아먹을 수는 없어요.



“그럼 촬영장 가는 건 어때요?”

“어…현장보고요?”



 그러고 보니 진에겐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민은 갈등했다. 대놓고 발길을 뚝 끊으면 케일론 쪽에서도 자신이 수상해보이긴 할 거다. 일단은 누가 훔친 건지 모르니까 조용한 거겠지. 한번쯤은 얼굴을 더 보고 동향을 살펴도 될 거 같다. 공포는 당당하게 할 이야기가 그것뿐이냐 요구하던 민윤기가 쫓아내줬다.



“좋아요, 다녀올게요! 좀 있다 봐요, 진.”



 진이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지민.







***







 술래가 잡는 사람 얼굴을 모르는 숨바꼭질은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 수가 얕은 사람은 꾸역꾸역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숨는 거고, 똑똑하고 배짱이 두둑한 사람은 숨바꼭질에 참여하지 않는 척을 한다. 지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촬영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수고하시네요. 트레이드마크인 눈웃음과 사람 좋은 미소를 뿌리며 감독과 인사했다. 오늘은 온다는 소리 안 하셨던 거 같은데. 아리송하게 갸웃하는 감독은 한 마디로 납득 시킬 수 있었다. 원래 제 보스가 좀 변덕이 많고 까다롭잖아요.


 촬영장소는 다소 외진 브루클린의 한적한 거리였다. 케일론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은 현장에 없었다. 촬영 준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휴식을 취하는 모양이었다. 이대로만 적당히 넘어가면 소원이 없겠는데. 되도 않는 연기로 잘하는 건 웃는 표정밖에 없다. 작업을 줄기차게 걸어대던 민윤기 덕분에 그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지민은 팔짱을 끼고 선 자세 그대로 고민을 시작했다. 민윤기는 아침부터 어딜 간 거지. 근래 윤기의 스케줄을 읊어본 지민은 어디도 떠올릴 수 없었다. 뭐 간다고 한 건 없는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심부름으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가져다줄 사람이 줄을 섰는데 뭘까. 뭐지. 근데 아침에 얼굴 안 봤다고 이렇게 궁금할 일인가. 큰일 났다. 정국이랑 연락 안 될 때랑 비슷하게 궁금하네. 지민이 아무래도 스스로 뇌세포가 마비된 거 같다고 판단을 내리고 있을 그 무렵.



“오랜만입니다.”



 뒤를 돌아본 지민은 순간적으로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 부드러운 인상의 신사가 저런, 하더니 곧 다정하게 웃어보였다. 케일론이었다.



“놀라셨나요?”

“하하 조금, 기척도 없이 다가오셔서….”

“저도 모르게 반가워서 말이죠. 사과드립니다. 촬영장에는 많이 오셨는데 따로는 인사를 자주 못 드렸네요.”



 아뇨, 제가 찾아갔어야 하는 걸요. 지민은 가능한 제 목소리가 차분하게 나오길 빌었다. 다행히 전처럼 손이 덜덜 떨려오진 않았다. 케일론은 평이하게 말을 걸어왔다.



“미스터 윤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럼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행입니다. 좋은 영화가 태어나려면 환경이 좋아야하죠. 특히나 제작사 호주머니는요.”



 케일론은 잘도 빙긋 웃었다. 차마 심장이 쿵쿵 과도하게 뛰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지민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거의 최면에 가까웠다. 나는 트레일러에 들어가기 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웃고, 안부를 묻고, 좋은 하루를 보내라 하고. 평소처럼만 하면 돼. 할 수 있어. 괜찮아.



“어거스트와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연이 많았는데…이번 기회를 통해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너무 뜻 깊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요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예전에는 굉장히 친근감 있게 말을 걸어오셨던 거 같은데….”



 지민은 급히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아 그렇게 보이나요? 사실 오늘 일거리를 정말 많이 받았거든요. 신문도 사야하고, 저쪽 센트럴 파크 가서 개도 산책시켜야하고, 세탁 맡긴 옷도 찾아가야하고 또 기사 스크랩도 정리해야 하고 경영보고서도 중국어로 번역해야 하거든요! 또, 아 더 있었는데, 어쨌든! 하하 정말 많죠?”

“정말 많네요.”



 그렇죠? 그럼 저는 이만 일이 있어서…! 배우 앞에서 연기를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지민이 한시라도 빨리 도망가려는 그 순간, 케일론이 이마를 짚으며 비통한 일이라도 겪은 듯 한숨을 깊게 터뜨렸다. 사회성이 발달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해석하면 어서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라, 정도 되겠다. 조금이라도 티내고 싶지 않은 지민은 도망가고 싶은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가요?”

“사실 최근에 아끼는 강아지가 죽었습니다. 푸들이었는데 정말 하얗고 작은 친구였죠.”



 케일론이 과장되게 어깨를 축 떨구었다. 누구나 다 사랑하는 귀여운 친구였어요. 지민은 간신히 동정심을 나타내는 목소리로 꾸역꾸역 내뱉었다. 미스터 베닌…. 케일론은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젓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습니다. 피치 못할 상황이었는걸요.”

“…네?”

“그게 산책 도중 갑자기 튀어나온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순식간에 목을 물고 도망갔지 뭡니까. 전 황급히 뒤따라갔죠. 내 강아지를 돌려줘! 멈춰 서! 하고 외치면서요. 사람들이 문을 열고 무슨 일인가 한명씩 나오더군요. 하지만 동물이 알아들을 리가 있나요. 겨우겨우 쫓아가니 너덜너덜하게 목덜미가 뜯겨 핏덩어리가 된 제 강아지만 남아있었습니다.”



 지민은 떨리는 동공으로 말을 흐렸다.



“…뭐라고 위로를 드려야할지….”

“괜찮습니다.”



 케일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다행히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스태프가 뛰어와 촬영 시작할게요, 하고 알렸다.



“이만 가야겠군요. 촬영도 이제 거의 마지막인데 아쉽습니다.”

“기회는 또 있겠죠.”

“그렇겠죠.”



 케일론이 악수를 요청했다. 지민은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하는 표정으로 손을 잡았다. 케일론이 말했다.



“손이 부드럽네요.”

“네?”

“하얗고.”



 케일론의 시선이 악수를 하고 있는 손으로 내려간다. 검지 손가락이 스윽 지민의 손을 쓸었다.



“작고….”



 순간적으로 흠칫한 지민이 손을 비틀어 빼냈다. 발밑에서부터 소름이 쭉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케일론이 뿌리쳐진 제 손을 보고는 아, 했다.



“수상한 의미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그,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아요. 미스터 베닌.”

“정말 예쁜 손인데…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민에게 어거스트처럼 힘든 일은 좀.”



 그럼 다음에 봅시다. 신사의 정석이라 불리우는 미소를 건 채 케일론이 멀어졌다. 지민은 멀어지는 케일론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어정쩡하게 남은 제 손을 내려 보았다. 벌레가 기어다닌 느낌. 작게 미간을 찌푸린 그 사이.



“지미이인!”



 우다다 달려온 뷔가 지민을 훽 끌어안았다. 휘청거리느라 심각한 생각은 증발했다.



“왔으면 나부터 찾아왔어야지!”

“방금 왔어요, 방금.”



 뷔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랑 놀자.







***








 뷔는 신이 난 다섯 살짜리 아이처럼 외치더니 트레일러 어디에선가 보드게임을 들고 나타났다. 많기도 많았다. 이름도 모르는 많은 게임도 섞여있었다. 첫 번째로 뷔가 집어든 건 카드게임이었다. 라스베가스의 추억이 떠오른 지민이 황급히 발을 뺐다. 전 카드 안해요. 룰도 모르는 걸요. 뷔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카드를 쌓자.



“너 진짜 못한다.”

“다른 걸로 다시 해봐요. 원래 카드 쌓기는 못했어요.”

“악어를 피해라 할래?”

“좋아요.”



 결과는 패배. 악어는 지민의 손이 입안에 들어올 때마다 입을 가차 없이 닫았다. 뷔는 히히 웃으며 승리의 인증샷을 남긴다고 지민이 손가락을 물린 상황을 찍어댔다. 처음으로 뷔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 지민은 이를 빠득 갈았다.



“다른 거 또 해요.”



 게임은 계속되었다. 모노폴리, 블록쌓기, 원숭이구하기. 별별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게임까지 지민은 죽자고 달려들었다. 10전 10패. 승률 빵이라는 기록을 거두고 나서야 지민은 인정했다. 그래 뭐든 잘할 수 없지. 게임에 소질이 없을 수도 있는 거야. 가만 보면 대학교 때도 그랬다. 교수가 게임을 만들어야하는 녀석이 게임을 해본 적이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구박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진짜 재밌다, 그치?”

“…….”

“또 할래?”

“아뇨.”



 지민은 괜히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는 뷔를 향해 뚱하니 말했다.



“다 이기니까 좋아요?”

“좋은데? 엄청 좋아.”

“고작 저 하나 이겨봤자 쓸데도 없잖아요.”

“왜 쓸데가 없어. 내 기분이 좋아졌잖아. 그럼 그만이지.”

“…….”

“이거 트위터에 올릴래. 내가 이긴 걸 천만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거야.”



 그럼 내가 진 걸 천만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거구나. 지민은 약 3초간 집에 있는 포스터를 뗄까 말까 약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런 게임결과 따위는 신경 안 쓸 거다. 하참, 유치하게 뭔 이런 게임 따위를. 게임 주제에. 어, 카드게임 주제에…. 지민은 테이블을 손으로 휘저어 패를 마구잡이로 섞었다. 뷔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아직 못 찍었단 말이야!”

“다음에 또 하던가요.”

 


 지민은 무던하게 대꾸하고 딴청을 피웠다. 진짜 완벽하게 이긴 건데! 일부러 그랬지? 다시 패를 맞추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노력하는 뷔를 외면한 채 트레일러를 구경했다. 때마침 장식장에 보이는 낡은 카메라 하나. 고풍스러운 그림과 꽃 사이에서 발견한 카메라는 공간에서 붕 떠보였다. 의아해하며 지민이 말했다.



“이게 뭐예요?”

“어떤 거? 아 그거. 예전에 연기연습 할 때 썼던 거야.”



 뷔가 장식장에 넣어놓은 카메라를 확인하고 설명했다. 애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본격적으로 학교에서 연기 배우기 전부터.”

“…켈링턴 아트스쿨이요?”

“응. 아직도 쓸 수 있어. 내가 아끼는 거야. 보여줄까?”



 내가 이걸로 천편의 영화를 찍었지. 첫영화는 가위손이야. 말하며 뷔는 아기 다루듯 조심하며 카메라를 꺼냈다. 낡은 카메라는 기스도 많았고, 렌즈를 끼우는 부분도 헐거워져 있었다. 전원버튼을 누르니 깜빡거리며 빨간불이 들어온다. 이건 집에 안 놓고 연기할 때마다 가지고 다녀. 가지고 다니면 연기를 더 잘하는 거 같거든.



“이걸 사려고 그때 잔디를 엄청 열심히 깎았지. 부모님이 안 사준다고 했었거든. 나보고 얼굴은 자기들 닮아서 괜찮은데 연기는 못한대.”

“제가 만져도 돼요?”

“응. 이거처럼 부수지만 않으면 돼.”



 뷔가 바닥으로 떨어진 카드를 가리켰다. 하하 설마요. 민망하게 웃은 지민은 마찬가지로 보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조심스레 카메라를 받았다. 좋아하는 배우의 첫 연기를 담은 카메라. 이처럼 가슴 뛰는 순간이 또 있을까. 두근거리는 손길로 카메라 앨범을 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짜와 제목이 끝도 없이 이어져있다.



“와 대단해요. 날짜가 이때면, 열여섯 살 때부터 연기하신 거예요?”

“연기까진 아니고 그냥 하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 그러고 놀았지.”

“저 이거 봐도 돼요?”

“다 봐도 돼.”



 뷔는 턱을 괴고 카메라를 바쁘게 넘기는 지민을 구경했다. 반짝거리는 눈과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만지는 손을 보고 뷔는 언젠가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새끼고양이 한 마리를 떠올렸다. 앞에서 먹이를 흔들고 있으니 어미고양이 뒤에서 나오고 싶어 눈치만 보다, 결국 어미가 없는 틈을 타 몰래 빠져나와 눈을 반짝거리며 야옹야옹 울던.



“빌려줄까?”

“네? 이걸요?”

“응.”

“저, 정말요? 이거 뷔한테 소중한 거 아니에요? 제가 가져가도 되는 거예요?”

“나만큼 네가 아껴줄 거 같은데 뭘. 괜찮아.”



 타인이 자신의 연기를 좋아해주는 일을 사랑한다. 뷔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관람료는 특별히 공짜야.”

“…죄송해요. 아까 사실 뷔 포스터 뗄까 생각했었거든요. 절대 안 뗄게요.”

“방에 내 포스터 어떤 걸로 걸려있어?”

“스카이 가든이요. 칸 데이슨!”



 뷔는 손발을 가만 두질 못하고 뒤로 넘어가며 싫어했다.



“으아악! 그거 너무 옛날이잖아! 내가 새로 구해다 줄게. 그거 떼자.”

“싫어요.”

“왜!?”



 지민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때 뷔가 얼마나 잘생긴지 알아요? 연기도 최고였다구요. 물론 지금도 뷔는 잘생기고 연기도 잘하지만 뷔가 연기한 캐릭터 중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란 말이에요. 찬양서를 줄줄 읊으니 질린 뷔가 대신 샤넬의 뮤즈로 활동하던 시절 포스터와 아스팔트 정글 개인포스터를 약속했다.



“나 다 뺏겼다 진짜 하….”

“카드게임 좀 더 할까요?”

“…얼마나?”

“세판?”

“다섯판.”



 뷔가 다시 카드를 잡았다.







***







 어거스트 최상층의 퇴근시간은 으레 다른 회사와 다르다. 계약서상의 퇴근시간이 가까워져도 아무도 시계를 보거나, 코트를 걸치는 일이 없다. 레이첼은 슈가 스튜디오의 추진작업에 우호적인 임원진 리스트를 정리했고, 진은 수십 장의 사진들을 살피고 있었다. 어거스트의 임원이 타 영화사의 비서와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있는 사진을 체크한 진이 말했다.



“찰스는 어떻게 할까요?”

“버려요.”



 좋아요, 자 삭제. 진이 사진의 뒷면에 마카로 대문짝만하게 엑스자를 그었다. 이것도 추가. 진은 가뿐한 손놀림으로 이미 엑스자가 그어진 사진뭉치가 있는 곳으로 사진을 던져놓았다. 모두 거금을 들여 고용한 파파라치들이 찍어온 사진이었다. 다음 사진을 꺼내들었다. 크지는 않지만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대주주 크리아트가 찍혀있었다. 지난번 윤기와 지민의 스캔들을 터뜨렸던 작은 언론사의 기자와 함께.



“크리아트는 뭐, 당연히 치워야겠죠?”

“과연 삭제만으로 끝일까요?”

“…음, 보류.”



 진은 처음으로 사진의 뒷면에 세모를 그렸다. 어거스트 내부의 적을 분리하는 방법은 이랬다. 동그라미는 통과. 엑스는 어거스트에 위협을 가하니 처리해야 할 사람. 세모는 측은지심이 들 정도로. 로봇처럼 사진과 임원진의 정보가 쓰여있는 서류를 번갈아 본 진이 뻐근한 뒷목을 문질렀다. 벌써 3시간이나 지나있었다.



“그런데 우리 퇴근 언제 할 수 있을까요?”

“퇴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사실이 놀랍네요.”

“그렇죠? 역시. 사실 지금이 꿈같아서 물어본 거였어요.”



 왜 그 비싼 월세를 내는 걸까? 어차피 집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진은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흘끔 레이첼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레이첼은 언제 퇴사할 거예요?”

“어거스트 월급이 내 카드값을 막아주지 못할 때요.”

“전 회장 때도 이런 작업 했어요?”

“정확한 일은 몰라요. 그땐 내가 어렸으니까.”

“그거 지금 커피머신이었다는 말이죠?”

“진, 입으로 일해요?”



 진이 눈물을 닦는 척을 하며 흑흑거렸다. 지민 보고 싶어요, 그런 소리를 하며 다시 사진을 집은 순간 윤기와 연결된 스피커가 울렸다.



[퇴근해.]



 진과 레이첼이 눈을 크게 뜨고 모세의 기적이라도 본 것마냥 서로를 마주보았다. 방금 들었어요? 레이첼도요? 왜죠?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짧은 정적을 걸쳐 멍하니 굳어있던 둘은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싸 누구보다 빠르게 준비를 완료해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 지민한테 메시지 하나 남길까요? 사무실 들어오면 혼자니까.”

“정말 혼자라고 생각해요?”

“아.”



 비워진 사무실. 남게 된 두 사람. 진이 만물의 원리를 깨달은 박사처럼 중얼거렸다.



“우리가 쫓겨났군요….”

“그래도 메시지는 남겨줘요. 당황할 테니까.”

“좋아요. 쌀국수 먹으러 갈래요? 지난번에 지민이랑 먹었는데 맛있더라고요.”

“그러던가요.”



 너무나도 행복한 추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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