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슈짐] 아스팔트정글 08

by 토페 posted Dec 04,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BGM Azure ray - Sleep>








 어거스트의 건물에 엘리베이터는 총 여섯 개가 존재한다. 그 중 하나만이 대표실과 연결되어 있다. 맨 왼쪽에 위치한 4번 엘리베이터. 전임대표가 사원들과의 친목발전을 위해 평사원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들 사이에 끼워 넣은 엘리베이터는, 철저한 공포의 대상이 되어 단 넷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신임대표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비서 셋, 그리고 어거스트의 주인뿐이다. 커피와 신문을 끼고 로비를 걸어오던 지민은 엘리베이터에서 낯익은 뒤통수를 발견하고 반가움을 드러냈다.



"진 선배님!"

"지미이인!"



 석진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지민은 입이 찢어질 듯 환하게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석진을 마주 안았다. 물론 절대 커피가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감동의 상봉현장에 로비를 지나다니는 정장무리가 힐끔거렸다. 시선이 몰리던 말던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부둥거리며 위로하기 바빴다.



"지민, 미스터 윤이 혹시 잡아먹지는 않았죠?"

"진 선배님 가서 잠은 잘 주무셨어요? 저 진짜 선배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콘돔 사오라는 거 잘 했어요? 지난 번처럼 돌기형 사서 혼나진 않았죠? 얼굴 살이 쫙 빠졌네. 아팠어요?"

"감기가 걸리긴 했는데…이제쯤 괜찮아졌어요! 그보다 아무리 그래도 선배님만 했겠어요, 제가. 전 선배님 영영 캘리포니아에서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석진이 헬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흑,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거기서 야자수들이랑 같이 죽는 줄 알았어요, 지민."



 실제로 수요일이던 귀국예정이 금요일까지 미뤄졌다. 이유는 다름아닌 윤기가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런칭파티 장소 바꿔. 그 한마디로 레이첼과 석진, 그리고 지민이 일주일을 꼬박 밤새며 준비한 모든 일정이 무너져 내렸다. 원래 뉴욕이었던 장소를 캘리포니아로 바꾸면서, 그야말로 일주일 치 일을 삼 일만에 처리한 꼴이었다. 석진은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한지 창백한 안색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지옥이 어떻게 생긴 줄 알아요? 지옥의 마왕은 민트색 잎사귀의 야자수고, 그 아래로 하얀 종이 악마들이 떠다니는데…난 정말…잠만 자면 꿈에 그 지옥이 나와서 잘 수가 없었는데…."



 울컥한 석진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민은 이해한다는 듯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커피를 들지 않은 손으로 어깨를 토닥거려줬다. 이해해요, 이해해요. 제가 그 마음 잘 알죠.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람이 꿈에서까지 진저리를 칠까. 꿈에서까지 울며 영화감상문을 쓰던 제 처지와 똑같다. 백 번도 더 공감하며 지민은 제 쪽에서 벌어진 상황도 브리핑했다.



"선배님이 없으니까 사무실이 사막이었어요. 아무도 안 웃고 다 일만 하는데, 으 진짜 기계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어요. 숨소리도 내지 말아야 할 거 같은 거 있죠."



 지민은 조기퇴근 한 다음날부터 시작된 지옥을 떠올렸다. 윤기는 다음날 마스크를 걸고 나온 지민을 흘긋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코트를 던지고, 커피를 찾고, 지민의 어설픈 실수에 빈정거렸다. 서류의 행진과 계속 울리는 전화벨소리. 조기퇴근의 의미도 없이 다음날부터 야근의 연속이었다. 어찌나 심각한지 전화벨소리만 울려도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조금이나마 말이 통하는 석진도 없어, 쉬는 시간마다 짧은 잡담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전에 쉬는 시간이 거의 전무했지만.



"그래도 지금 너무 행복해요. 선배님이 와주셔서."

"나도요, 지민. 매번 출장 갔다 오면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윤기는 도로 출장이나 안 보내면 다행이었고, 레이첼은 다녀왔으면 밀린 일처리가 석진을 기다린다는, 정말 듣고 싶지 않은 인사부터 건네왔다.



"선배님…."

"지민…."



 둘은 애틋하게 서로를 마주봤다.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인 동료를 위로하는 눈빛이었다. 한참 감동의 분위기를 만들다 석진이 먼저 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지민 주려고 선물 사왔어요."

"정말요? 뭔데요, 뭔데요?"

"이걸 보니까 지민이 떠올라서 말이죠."



 석진이 코트 안쪽을 뒤적거렸다. 지민이 주인 반기는 강아지처럼 꼬리치듯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했다. 여기 있을 텐데. 여기다 놨는데. 한참을 뒤적거리는 걸 보니 좋은 선물인가보다. 바짝 올라간 기대감을 두고 석진이 과장된 연기를 펼쳤다. 아 여기 있네.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이게 원래 이렇게 꺼내기가 힘들었…짠!"



 석진이 양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며 내밀었다. 자, 선물이에요. 내 사랑. 지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허리까지 접으며 눈꼬리를 있는 대로 휘어 접었다. 커피만 없다면 로비를 데굴데굴 구를 기세였다. 석진은 제 개그에 열과 성을 다해 웃는 지민을 보고 탄력 받아 하트를 더 그려냈다. 짜자잔 여기도, 여기도 있다! 숨이 다 할 때까지 웃은 지민이 꺽꺽거리며 그만하라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아 진짜 너무 웃…."

"뭐가 그렇게 웃겨?"



 행복한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리는 목소리였다. 신나게 웃던 석진과 지민이 빳빳하게 굳어 어느새 옆에 다가온 인물을 쳐다봤다. 물고기떼가 상어를 피하듯, 로비의 사람들이 쩍 갈라진 길을 따라 걸어온 윤기였다. 선글라스를 걸치고 하얀 니트에 검은 코트를 매치한 윤기는 오늘도 눈에 튀었다. 찢어진 청바지까지 더하니 정장만 돌아다니는 로비에서 유난히도 돋보였다. 지민은 헉, 하며 급히 인사부터 건넸다.



"오셨어요, 미스터 윤."

"내 비서들이 로비에서 팔자 좋게 웃고 떠들고 있으니 내 체면이 말이 아니군. 내가 다 고용하는 애들은 다 놀고 먹는 줄 알겠어. 다들 내 비서가 되려고 덤벼들면 어쩌지?"

"죄송합니다."



 뜨끔한 진과 지민이 동시에 말했다. 지민이 이상하다 싶어 시계를 확인했다. 올 때가 아닌데. 왜 벌써 왔지? 지금 원래보다 도착 20분 전 아냐. 선글라스로 가려져도 탐탁지 않다는 눈길이 볼을 쿡쿡 찌른다.



"회의 30분 앞당겨서 진행할 거야. 대기시켜."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아 다행이다. 혼날 시간을 줄여준 엘리베이터에 감사를 표한 지민은 윤기 몰래 뒤에서 석진과 마지막으로 힘내라는 메시지의 눈빛을 주고 받았다.






 지민은 동태 같은 눈동자로 모니터 앞에 멍 앉아있었다. 껌뻑이는 마우스 커서를 따라서 정신도 같이 깜빡이는 기분이다. 차라리 기절하게 해줘. 정시퇴근은커녕 이제 그만 집에 보내달라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민, 이거 런칭파티 지출내역서인데 마지막 검토만 해줘요. 지민은 레이첼이 내민 종이를 처음 들여다 보고 뒷목을 잡을 뻔 했다. 공이 대체 몇 개야? 일차적으로 빌렸던 뉴욕호텔에 위약금을 문 것만도 삼백만달러가 넘었고, 구체적인 내용을 짜면서 딸려오는 비용들은 지민의 상상을 초월했다. 윤기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하며 호텔을 아예 뜯어고치고 있었다. 실감이 안 나는 가격들에 손을 덜덜 떨다 점차 익숙해져, 나중에는 여기 조명을 더 바꾸는 건 어떨까요? 고작 십만달러밖에 안 하는데, 하고 제 입으로 결코 내뱉지 못할 말도 했다.

 지친 지민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긴 미쳤어. 미친 곳이야. 하지만 사표는 안돼. 사표는 안돼, 참자, 참아. 그래도 그나마 제 사정은 나은 편이었다. 석진은 단명하기 일보직전인 얼굴로 모니터를 뜯어보고 있었고, 그 표정변화가 많지 않은 레이첼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마찬가지로 지민도 죽기 일보직전인 얼굴로 비몽사몽하고 있던 시기였다.



"지민, 이리와 봐요."

"네? 또 시키실 일 있으신가요?"



 석진의 부름에 지민이 동공을 흔들며 불안해했다. 여기서 서류만은 제발 더 주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아니, 줄 거 있어서 그래요."



 지민은 석진이 또 장난을 거는 줄 알았다. 선배님 저 지금 좀 많이 힘든데. 웃을 기운도 없어요. 그래도 못내 착한 지민은 뭔데요, 하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석진이 가방 안에서 포장된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공항에서 초콜릿을 팔길래 지민 생각나서 샀어요."

"우와아 진짜요? 와 저 초콜릿 받아본 적 한번도 없는데!"



 손바닥 보다 더 넓은 상자 속 알록달록한 모양의 초콜릿들이 한아름 들어있었다. 예쁘게 분홍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들고 좋아하는 지민을 석진이 뿌듯하게 바라봤다.



"이거 아까워서 어떻게 먹어요."

"포장지 풀면서 그런 말 하는 법 있어요?"

"헤헤 그게 지금 단 게 너무 고파서…아 살 거 같다. 스트레스 받을 땐 단 게 최고인 거 같아요. 선배님도 드셔보세요. 맛있어요! 레이첼, 레이첼도 먹을래요?"

"난 됐어요."



 저 사람들이 먹고 있는 것은 돌이다, 하는 표정으로 레이첼이 딱 잘라 거절했다.



"맛있는데…선배님, 선배님 자 아 해보세요."



 지민이 석진의 입에 초콜릿을 쏙 집어넣었다. 맛있죠? 맛있죠? 석진은 강력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준 선물을 하나 둘 집어먹기 시작했다. 자요, 지민도 먹어요. 레이첼은 서로 먹여주는 둘을 눈꼴 시리다는 눈으로 보다 묵묵히 타자를 치는 속도를 올렸다. 석진이 우물거리며 상자를 또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이건 레이첼 몫이에요. 채식주의자용 소시지세트. 레이첼은 야채만 먹잖아요."

"진, 채식주의자와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달라요. 내가 아니라 다른 다이어트하는 사람이었으면 총을 쐈을지도 몰라요. 주의해요."



 어쨌든 고마워요. 레이첼은 선물을 받고 곧장 일로 되돌아갔다. 지민은 석진에 대한 존경심의 탑을 한층 더 올렸다. 그 지옥 속에서도 사무실 식구들을 챙기다니. 역시 선배님이셔. 괜히 윤기의 밑에서 일년도 넘게 버틴 게 아니다. 존경의 눈빛을 반짝반짝 발사하던 지민은 초콜릿을 삼키며 물었다.



"미스터 윤 선물은 어떤 거예요?"



 역시 아무래도 상사 선물이니까 더 대단하겠지. 선배의 안목을 배워야지. 생각하며 지민은 선물이 나왔던 가방을 기웃거렸다. 민윤기는 음식 딱히 안 좋아하니까 아무래도 다른 물건인가. 그러나 정작 석진이 처음 듣는 듯한 얼굴로 반문했다.



"선물요? 미스터 윤?"

"네, 미스터 윤도 사무실에 있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석진은 눈을 깜빡거리며 순진한 궁금증을 가진 지민을 보다 이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 친구 진짜 너무 순수하네.



"미스터 윤 선물을 왜 사와요."

"…네?"



 석진이 세계 최고의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다. 지민 유머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손까지 저으며 완벽한 농담취급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지민이었다. 왜지? 왜 민윤기 선물 사왔냐 묻는 게 농담이야. 지민이 조심스럽게 웃고 있는 석진을 보며 말했다.



"저…왜 웃긴 거죠?"

"응?"

"미스터 윤 선물을 묻는 게 왜요?"



 진지한 눈빛은 진심이었다. 석진은 으응? 하며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진심으로 묻는 거예요, 지민?"

"네? 아니 그냥…그게 그냥…저 같으면 좀 그럴 거 같아서요. 다른 사람들끼리 다 선물 받고 있는데 자기만 못 받으면…모르는 사람들도 아닌데…."



 지민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봤다. 기껏 선물까지 사온 석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민윤기라면 엄청 기분 상할 거 같은데. 고등학교 크리스마스 파티 때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초대장을 못 받았을 때, 얼마나 속상하고 섭섭했던가. 고모할머니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방에 처박혀 질질 짰던 기억은 강력한 흑역사였다. 석진이 미간을 사뭇 찡그렸다. 으음, 그건 그렇죠.



"보통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죠. 나 같아도 엄청 섭섭할 거 같아요. 그런데, 미스터 윤이잖아요."



 지민은 이해하지 못했다. 윤기가 '보통'이라 부르는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건 인정할 수 있었다. 보통이 아닌 재능과 보통이 아닌 성격과 보통이 아닌 재력은, 확실히 일반사람들에 비견할 수 없었다.



"…그게 왜요?"

"음…뭐라고 딱히 설명하지 못하겠네요. 우리랑은 다르다는 말 밖엔."



 지민은 또 질문했다. 우리요? 다섯살짜리 아이가 이건 왜요, 저건 왜요 하고 묻는 것처럼. 석진은 쩔쩔매며 대답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미스터 윤이잖아요. 결국 레이첼이 일을 멈추고 빙빙 도는 대화에 한 마디를 첨가했다.



"이런 작은 일에 관심도 안 줄 거예요, 미스터 윤은. 신경 꺼요. 오히려 선물 가져가면 일 하라 보내놨더니 이런 거나 가져왔다고 생각할 걸요."

"아 그건…그렇네요."



 지민은 쉽게 수긍했다. 윤기는 하찮은 일에 정신력을 소모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 까칠한 성격으로 이딴 거나 사오라 출장 보낸 줄 알아, 하고 윽박지를 것 같기도 했다. 시킨 일이나 잘 하라는 게 윤기의 말이었다. 석진이 선물을 사오지 않은 것도 나름 이해가 간다. 선물가게를 통째로 살수 있는 사람한테 무엇을 주면 좋을지, 지민이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석진도 알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지민 가서 마저 일 해요. 미스터 윤한테 선물로 해고 받고 싶지 않으면."



 지민은 아직 퇴직금도 안 나와요. 레이첼이 덧붙였다. 그거 너무 무서운 선물이잖아요, 레이첼. 동조하며 지민은 초콜릿 상자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종이를 들고 마저 일을 하려다 멈칫하고는 윤기가 있는 집무실 문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뺏겼다. 세상에서 가지지 못할 건 없는 남자. 원한다면 아름다운 연인도 매번 부속품처럼 갈아 끼운다. 명예와 재력을 갖춘 그를 사람들은 천재라 불렀다. 레이첼과 진도 크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난 왜 자꾸 뭐가 마음에 걸리지. 집무실 쇼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던 윤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고아에서 백만장자로 인생역전 한 행운의 아이콘. 그게 윤기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럽다 말했다. 그 말이 지민은 찝찝했다. 창백한 낯빛으로 넓은 집무실에 혼자 누워있던 장면을 떠올려볼 때 그 말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파도 자신이 챙기지 않으면 도움 받을 수 없고, 선물도 쉽게 건네지 못하는 위치. 지민은 굳게 닫힌 저 문 안의 남자가 조금 측은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얇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사람들조차도 쉽사리 '우리'에 엮을 수 없는 존재.

 지민은 석진에게 받은 초콜릿 상자를 가만 손으로 쓸었다. 어쩌면, 민윤기는 고아였던 시절이랑 지금이랑 똑같다 생각하지 않을까? 곁에 누군가 없다는 건. 고모할머니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왔던 어린 날의 자신은 거진 일년간을 엉엉 눈물이 마르도록 울었다. 심지어 옆에서 할머니가 달래줘도 한국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서러움에 외로움은 틈만 나면 곁으로 파고 들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민윤기는 혼자라는 게 슬프지 않고, 외롭지 않을까. 민윤기는 나랑은 달랐을까?

 그 순간, 지민이 보고 있다는 걸 눈치라도 챈 건지 집무실 문이 덜컹 열렸다. 멍하니 보고 있던 탓에 눈이 마주쳐버렸다. 헉, 눈을 크게 뜬 지민은 보지 않은 척 재빨리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윤기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거야? 아 혹시 눈 뜨고 자는 법이라도 익혔어?"



 순식간에 동정심이 싹 다 증발한다. 화장실로 사라지는 민트색 뒤통수를 지민은 이를 갈며 쳐다봤다. 저, 저 개자식! 세상에서 아마 가장 불쌍한 건 민윤기 말 한마디에 열 시가 넘어서도 퇴근 생각은 꿈도 못 꾸는 자신임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