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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럭키 스트라이크 02

by 토페 posted Sep 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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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바람만이 지민과 정국 사이로 숭숭 떠다녔다. 방금 뭔 소리를 들었던 거지. 정국은 되새김질했다. 야 너 나랑 결혼하자. 동네 애들이 흔히 야 오락실 가자 하고 말하는 것처럼 눈 앞의 사람이 말했다. 결혼하자고. 지민을 빤히 바라보던 정국이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결혼하자고."

"저랑 당신이요?"

"응.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는데."

"아 당신이랑 나랑 결혼하자고요?"

"응."



 새벽 댓바람부터 문을 두들기기에 정신 나간 놈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정신 나간 놈이었다. 하하 난 또. 정국이 안심했다. 빚쟁이들인 줄 알았네. 다행이었다. 빚쟁이가 아니라 방금 만난 지 약 30초 정도 된 사람의 프로포즈라. 정국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손쓸 새도 없이 닫혀버린 문에 지민이 눈을 크게 떴다.



"야! 왜 닫아!"

"병원은 저쪽 길 아래로 내려가면 나오니까 가보세요."

"무슨 헛소리야! 병원 필요 없어! 문 열어!"



 지진이라도 난 듯 문이 쿵쿵 울렸다. 정국은 생판 무시하고 이불에 다시 누웠다. 잠은 늘상 부족했기 때문에 30분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너 전정국 아니야? 나 박지민이야!"



 누가 들으면 멀리서 찾아온 친구인 줄 알겠다. 정국은 맹세코 지민을 처음 봤다. 애초 누구도 제 집에 문을 두들기며 처들어올 사람이 없었다. 빚쟁이들이 유일했다. 정국이 귀까지 틀어막고 버티는데, 지민이 이익 입술을 꽉 깨물고는 더 쾅쾅 두들겼다. 누가 이기는지 대결해보자는 듯.



"문 열어! 나 박지민이라고!"



 지민의 패턴은 일관됐다. 자신이 박지민이라는 거다. 정국은 듣다 듣다 얼척이 없어 일어났다. 박지민 이름이 뭐 마패라도 돼? 문 두들기며 행패부리는 불청객이 박지민인 것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부서져라 문을 두들기는 소음은 끝끝내 정국의 잠을 앗아갔다. 에이씨. 중얼거리며 정국이 귀를 후비적거리고 옷을 꿰입었다.



"안 열어? 너 지금 나 세워두는 거야? 문을 안 열고?"



 묵묵부답이다. 지민은 허, 헛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떻게 나를 문 앞에 세워둘 수가 있지. 설마 내 얼굴 모르나. 우성오메가와 한울그룹 외동아들이 합쳐진 작품은 어지간한 톱스타 뺨치는 인기를 구사했다. 금수저 중에서도 크리스탈 금수저인 지민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파파라치가 따라붙은 적도 많았다. 따라붙은 파파라치를 볼 때마다 지민은 벼락같이 짜증내는 바람에 거의 씨가 마르긴 했지만. 날벌레들이 내 사생활은 캐서 뭐하게? 뒤질래? 손수 카메라를 바닥에 짓이기며 꺼지라 외치는 지민에 남준은 조용히 경호업체를 물렸었다.



"왜 안 여는 거야? 너 나 몰라? 아 혹시 못 여는 거야?"



 끈질기게 문을 두들기던 지민이 정국을 의심했다. 출입허가여부는 집주인이 가진다는 사실을 지민은 당연히 무시했다.



"네 집 문도 못 열어? 어떻게 자기집 문도 못 열수 있지. 그럼 부숴봐. 어차피 열지도 못하는 문 부숴버리는 게 낫겠네."



 지민이 아예 손대신 발로 문을 쳐댔다. 쿵쿵거리는 발소리는 달동네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지민은 포기를 몰랐다. 자신이 결혼하러 와주겠다는데, 문을 닫고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황금티켓이었다. 둘도 없는 인생역전의 기회인 것이다. 전정국! 야! 안 들려! 끊임없이 지민이 새벽방송을 하는 동안, 기어코 반대쪽에서 항의가 들려왔다.



"잠도 없냐! 조용히 좀 해라!"



 지민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흥, 자지마! 깨워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뭐! 이 새끼가!"

"새끼? 새끼이? 너 나한테 새끼라…으븝!"

"에이씨,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정국이 튀어나와 잽싸게 지민의 입을 틀어막았다. 허겁지겁 지민을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정국은 어이가 없다 못해 뽑히는 기분이었다. 버티다 버티다 고성방가로 주민싸움까지 일으키는 지민을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이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라고는 또 노숙생활뿐이었다. 지민이 입을 틀어막은 정국의 손을 탁탁 쳤다. 하얀 얼굴의 반을 가린 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정국이 항의한 주민이 쫓아오지는 않나 문에 귀를 대고 있는데, 치던 지민이 정국의 손을 꼬집었다.



"아!"

"푸흐, 숨 막히잖아!"



 지민이 정국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정국은 끌려오느라 구김 진 옷이 못마땅한 듯 씨잉 거리며 옷을 피는 지민을 황당하게 쳐다봤다.



"당신 뭐예요?"

"박지민."



 질문이 잘못됐다. 새벽의 불청객은 박지민 이름 하나면 만사형통이라도 되는 줄 안다. 정국이 슬슬 당기는 머리를 붙잡으며 질문을 바꿨다.



"…나는 왜 찾아요?"

"결혼하자구."

"이봐요, 장난 칠 기분 아니거든요? 대체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난 당신 오늘 처음보고, 아 혹시 우리 아버지가 뭐 빚이라도 졌어요? 또?"

"아니, 말했잖아. 결혼하자고 왔다고."

"하, 지금 나한테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음 따지자면 그렇지."



 아 맞다 나 근데 밖에 짐 놔두고 왔어. 그거 들고 와. 끄덕거리며 지민이 덧붙였다. 정국은 마음을 접었다. 정상인으로서 취급해주기로 한 마음을. 일을 나갈 시간보다 정국은 훨씬 더 일찍 집을 나섰다. 한쪽 팔에는 지민이 짐처럼 들려있었다.



"들건 내가 아니라 저 밖에 짐이라고. 너 만나러 오느라 한숨도 못 잤단 말이야. 졸려. 이거 놔."

"잠은 그쪽 집 가서 주무시고요."

"아씨, 힘이 뭐이리 쎄! 놔!"



 지민이 발버둥쳤으나 정국은 눈 하나 꼼짝 안 했다. 그대로 질질 끌어 계단 앞까지 걸어 나왔다. 지민은 바락바락 소리지르다 도무지 안되겠는지 살살 회유하는 방법으로 바꿨다.



"지금 놔주면 봐줄게. 나 이렇게 막 다룬 것도 용서하고, 집 문 안 열어줬던 것도 용서해주고, 내 입 틀어 막은 것도 용서해 줄 테니까. 응? 지금 놓으면 다 없던 일로 해줄게. 아씨, 놓으라 했다? 야! 놓으라고!"



 정국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민은 갈수록 열이 받아 씨근덕거렸다. 놓으라니까? 안 놔? 손아귀 힘이 뭐이리 센 건지 뒷덜미를 잡은 손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힘 한번 안 빠진다. 손은 또 어찌나 큰지 거의 뒷목 전체를 콱 붙잡고 있다. 베짱이가 아닌 알바만 하는 성실개미라 알고 있던 지민은 정국의 생활형 근육을 얕보다 당황했다. 계단을 중간쯤 강제로 끌려내려 왔을 때, 지민이 최후의 발악으로 정국의 배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윽!"

"내가 놓으라고 했…어…어?"



 공사판을 전전하며 쌓은 잔근육이 있어도 배는 약한 부분이었다. 정국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것보라며 꼴 좋다는 얼굴로 으스대던 지민이 순간적으로 지탱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눈 앞이 핑 돌아간다. 신음한 정국이 넘어지려는 지민을 발견하고 뻗은 손이 안타깝게도 허공을 붙잡았다. 어어, 거리던 지민이 순식간에 계단 아래로 굴렀다.



"이봐요!"

"아, 으…."



 몇 칸을 구르고서야 멈췄다. 정국이 다급히 쫓아가 지민을 일으켰다. 새벽의 불청객이라도 앞에서 사람이 구르는데 외면할 만큼 정국은 나쁘지 못했다. 딱 봐도 좋은 재질의 옷이 군데군데 찢어져서 그 사이로 피가 비췄다. 구른 불청객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린 듯 양손이 작은 얼굴을 폭 가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

"이봐요, 괜찮아요? 어디 부러진 거 같아요? 일어설 수 있겠어요?"



 혼자서 그리 떠들던 목소리가 잠잠했다. 얼굴을 가린 손등에도 생채기가 나있다. 정국은 큰일이라도 난 건 아닌지 불안해, 얼굴에 붙은 지민의 손을 잡아 뜯으려 했다.



"봐봐요, 많이 다쳤어요?"

"……."

"봐야 알 거 아니에요. 어디가 아파요?"



 지민은 손을 붙잡고 떼내려는 정국의 손을 힘을 주고 버텼다. 말도 없이 방해만 하는 지민에 정국은 서서히 짜증이 올라왔다. 확 손목을 휘어잡고 떼어내려는 찰나였다.



"…람…어?"



 모기만한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얼굴을 가린 지민이 손가락 사이를 살그머니 벌렸다. 답답함이 서려있는 정국과 밤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네? 안 들려요. 다시 말해봐요."

"…있냐고…."

"있냐고요? 뭐가요?"

"…사람 있었어?"



 밤색 눈동자가 안절부절했다. 정국은 맥이 탁 풀렸다. 아픈 것보다 쪽 팔린 게 더 큰 모양이다. 빼꼼 눈만 손 사이로 빼놓고 묻는 게 진지했다. 옷도 찢어지고 올라오는 계단의 경사가 높아 꽤나 심각하게 다친 줄 알았는데, 걱정이 아깝다. 황당한 눈으로 정국이 바라보고만 있자, 지민은 초조한 눈으로 정국의 옷 소매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나 넘어지는 거 누가 봤어?"

"……."

"어? 봤냐니까?"

"안 아픈가 보네요. 일어나세요. 아무도 없었으니까."



 정국이 미련 없이 일어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지민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넘어지다니. 넘어지다니! 박지민 인생에서 최고로 쪽 팔린 순간이었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지민은 넘어지는 순간부터 생각했다. 차라리 팔이 부러져도 좋으니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파파라치도 하나 있었다면 대문짝만하게 실려서 신문 일면을 장식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소름 돋는 장면에 지민이 으으 거리며 일어나려 바닥을 짚었다.



"아…."



 고통보다 체면먼저 챙긴다고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민은 그때서야 몸이 보내는 고통신호를 감지했다. 발목이 삐었는지 아래가 욱신거린다. 홧홧하게 저려오는 발목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이게 다 거지 같은 결혼 때문이야. 죄 없는 김태형을 씹고 지민은 계단 아래 쪽 뒤통수를 향해 외쳤다.



"난 내 집으로 안 갈 거야! 너랑 결혼하기 전까지!"



 정국은 그 꼴이 나고도 아직 외칠 힘이 남아있는 지민에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어느 집 또라이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러다 또 자신의 집으로 가 문을 두드릴까 걱정됐다. 온 동네 사람들을 깨우고 깽판이라도 치면 피박은 다 자신이 뒤집어쓴다. 설마 진짜 간 거 아니겠지. 정국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지민은 절뚝거리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하, 참."



 정국은 기도 안 찼다. 떵떵거리며 소리까지 바락바락 치고는 정작 일어나지도 못한다. 뻔뻔하게 집까지 쳐들어오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는데, 그거보다 더 쉬운 도와달라는 소리는 한 번 하지 않는다. 발목이 제 마음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지 입술을 질끈 문 게 보인다. 저 상태로 자기 쪽 팔린 거부터 챙긴 거야? 이해를 할 수 없다. 정국은 많이 맞아봤고, 고통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나약해지는 지도 잘 알았다. 정국이 한숨을 쉬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뭐야, 왜 왔어."

"업혀요."

"됐어. 나 혼자 할 수 있어.



 곧 죽어도 자존심인 지민은 뻐겼다. 정국이 등을 내밀어도 본체만체 했다. 혼자 아등바등 일어나려 노력하는데, 정국이 기가 차 그런 지민을 응시했다.



"해 저물어요."

"됐다고 했잖, 으아!"



 정국이 지민을 들쳐 업었다. 정국은 지민을 안으로 들이기 싫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피 같은 돈을 병원비로 상납하는 건 죽어도 못할 짓이다. 진료비에 약값까지 합치면 하루치 밥값을 훌쩍 뛰어넘는다. 지민을 버리자니 양심이 선뜻 따라주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응급처치 할 정도의 시간은 남아있었다. 지민은 업히고서도 정국의 어깨를 쳐가며 반항했다.



"피, 필요 없다니까!"

"그럼 저 바닥에 계속 주저앉아 있으려고요?"

"나 멀쩡히 걸을 수 있거든. 내려줘."

"그냥 조용히 하시죠. 진짜 내려주기 전에."

"내려줘!"

"계단에 앉아서 혼자 비비적거리고 있는 게 더 쪽팔리다는 건 알고 있어요? 모르고 그래요? 여기 사람들 다 부지런해서 곧 있으면 다 밖으로 나와요. 저기 계단 쓰는데 박지민씨 앉아있는 거 보면 참 재미있는 구경이겠네요."

"나를 구경거리처럼 보면 그대로 같이 계단을 굴러야 할걸? 상관 없…!"

"내 집은 어떻게 들어가려고요? 열쇠 있어요? 아 부시게요? 아까처럼 발로 쾅쾅 쳐서? 아참참, 박지민씨 방금 다리 부러졌죠."



 지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하나하나 맞는 말이었다. 계단에 앉아 못 일어나고 있는 걸 남에게 들키는 건 이미 정국으로 충분했다. 남이 보느니 죽는 게 낫다. 거기다 정국의 말마따나 정국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갈 곳도 없다. 남준은 아마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남준을 부를 폰도 위치추적이 되는 터라 할아버지 집에 꼭꼭 숨기고 왔다.



"발 뻗어봐요."



 지민을 방바닥에 내려놓은 정국은 신발을 벗기고 발목의 상태를 확인했다. 일순 지민이 힉, 하고 생소한 통증에 신음을 집어먹었다가, 정국과 눈이 마주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큼큼 헛기침 했다.



"얼마나 아파요?"

"완전 멀쩡…."

"아 진짜."



 정국이 언성을 높였다. 지민은 우기려다 갑작스레 인상을 구긴 정국에 움찔했다. 옆에서 짖어라, 나는 내 갈 길을 갈 테니 하는 태도로 응수하던 정국의 짜증은 아무리 지민이라도 기가 눌릴 수 밖에 없었다. 알파도 아닌데, 그 어지간한 알파한테도 쫄지 않는 지민이 순간적으로 쫄고 말았다. 정국이 인상을 구긴 채 한숨을 쉬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요."



 정국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퉁퉁 부어 오른 발목을 보다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병원비는 사치라고 생각하는 정국은 어지간한 상처를 집에서 치료했다. 까진 상처에 밴드를 붙이고, 발목에 압박붕대까지 감았다. 잘생긴 미간이 구겨진 것과 다르게 손은 정확하고 섬세했다. 큰 손에 잡힌 발목은 한 손으로도 너끈히 잡혔다. 정국이 손을 움직이는 동안 지민은 가만히 있었다.

 내가 쫄 수도 있다니. 겁도 없이 세상사는 지민에게 새삼스러운 감정이었다. 하물며 김회장 앞에서도, 우성알파 앞에서도 쫄지 않았다. 히트사이클 때는 약 먹고 방에 콕 틀어박혀 있는 탓에, 그 어떤 알파에게도 눌려본 적이 없었다. 지민이 발을 맡기고 있는 사이 정국은 모든 응급처치를 끝마쳤다.



"집 갈 생각 없어요?"

"응."

"……."

"너 이제 나가?"

"…네."



 더는 지민과 입씨름할 시간이 부족했다. 정국은 지민을 제 집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 찝찝했다. 지민이 걱정되는 것보다는, 집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게 불안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한다는 것이 청혼은 분명 제 정신인 사람이 아니다. 왜인지 인생의 불행이 아직 끝난 게 아닌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전정국 인생 이쯤이면 인생극장 티비쇼에 사연을 보내도 당첨되기에 충분했다.



"아무튼…수상한 짓 하지 마요.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수상한 짓? 도둑질 같은 거 말하는 거야? 난 물건 안 훔쳐. 오히려 날 훔치려는 사람이 많지."

"……."

"아 나갈 때 내 짐 안으로 넣어주구."



 지민이 문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손을 흔들었다. 정국은 마른 세수를 하고는, 그나마 지민이 잘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나섰다. 끝까지 지민을 힐끔거리는 시선에는 의심이 담겨있었다.

 지민은 정국이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다 제 발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붕대가 감겨있는 발. 붕대 끝 쪽을 손가락이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 발목을 붙잡은 손의 온기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







 지민이 내려갈 때 남준이 싼 가방은 단순했다. 옷만 가득 들어있었다. 실제로 지민이 필요한 것은 옷뿐이었다. 5개월이라는 소리에 남준은 거의 드레스룸을 옮겨오다시피 했다. 옷을 좋아하는 지민은 매일마다 옷을 바꿔 입었고, 남준은 혹여라도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지민이 서울까지 올라가 옷을 사오라는 명령이라도 내릴까 피난민 짐가방처럼 바리바리 옷을 챙겼다. 취향도 여간 까탈스럽다. 어제 입었던 옷이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선택적으로 골랐다가 지민의 취향을 빗겨가면 여지없이 서울행이었으므로, 짐가방은 당연히 컸다. 그리고 지민이 정국의 집에 눌러 붙기 위해 챙겨온 옷은 그 중 마음에 드는 옷 몇 벌이었다.

 지민은 짐가방을 풀어헤치고 후드티를 꺼내 들었다. 계단을 구르면서 찢긴 아르마니 셔츠는 쓰레기통으로 골인시켰다. 검은 후드티를 입은 지민은 한층 더 어려 보였다. 검은 옷에 파묻힌 하얀 얼굴이 유독 더 하얗게 강조됐다.



"이렇게 예쁜 얼굴에 상처라도 남아봐."



 거울을 들여다보며 지민이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전신거울을 한참 찾다가 발견하지 못하고 화장실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지민은 집 드레스룸보다 작은 화장실에서 한껏 멋을 뽐냈다. 머리를 쓸어 넘겨보기도 하고, 눈꼬리를 잡아당겨 눈웃음도 지어봤다. 됐어, 좋아. 정국이 매몰차게 문을 닫은 것에 혹시 하고는 상태를 확인했는데, 역시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다. 정국이 비몽사몽한 상태로 절 본 것이 틀림 없다. 내가 결혼해주겠다고 하면 넙죽 절이라도 해야지.

 문조차 쾅 닫아버린 정국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다리도 치료해주고 방도 내어줬다. 마음에 들면서 마음에 안 드는 척 하기는. 솔직하지 못하게. 속물적으로 굴어도 별로 상관 없는데 말이야. 알파가 아니라서 그런가. 지민은 정국이 결혼을 승낙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박지민의 고고한 자존심에 거부당함이란 쓰여있지 않은 단어였다.

 지민은 이내 늘어지게 하품하며 잠자리를 찾았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방구석에 쌓인 이불을 아무렇게 펴고 쓰러지듯 누웠다. 정국이 아침 잘 개고 나간 이부자리였다. 정국이 올 때까지만 자야지. 잠자리가 불편해도 피곤한 하루 탓에 졸음이 미친 듯 쏟아졌다. 역시 가출은 힘들었다.



 뼈 빠지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정국은 문을 열고 기운이 쫙 빠져버렸다. 어떤 말로 그 또라이를 쫓아내야 할까 별 말이란 말은 다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하룻밤만 제외하면 어떤 짓을 해서라도 곧장 쫓아낼 생각이었다. 경찰에 신고하기, 폰 뺏어서 불청객의 부모님께 불청객 위치 알려버리기 등등. 머리를 돌돌 굴리면서 왔는데 정작 원흉인 지민이 방 한가운데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으응…."



 집주인 없는 집에서 불청객은 아주 달게 잤다. 유일하게 하나 있는 이불과 베개까지 뺏고서는 완전히 제 세상이었다. 정국은 바로 지민을 깨우려다 생각을 바꿔먹고 씻고 잘 준비를 마치는 것까지 시간을 미뤘다. 무슨 사람이 저렇게 달게 자. 설탕이라도 한 움큼 주워먹고 자도 저 정도는 아닐 것이다. 정국은 욕실에서 머리를 털며 나와 지민을 흔들어 깨웠다.



"이봐요."

"……."

"이봐요, 박지민씨."

"…으…."



 지민이 뒤척거리며 실눈을 떴다. 그리고는 정국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벌써 왔어…?"

"그쪽이 오래 잔 거겠죠."

"별로 안 잔 거 같은데…."



 대답하면서도 지민은 꾸벅꾸벅 졸았다. 모이 쪼는 병아리처럼 작은 머리통이 흔들렸다. 정국은 하도 많이 자 부은 지민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가출 청소년인가. 검은 후드티에 하얀 얼굴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지민은 청소년으로 봐도 무리가 아닐 만큼 어려 보였다. 눈뜨고 사람 무시하는 표정만 짓지 않는다면 눈꼬리가 쳐져 순한 인상이었다. 박회장에게 애교를 떨어도 위화감이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정국은 독하게 지민을 쫓아낼 의지를 상실했다. 이런 어린애를 데리고 내가 뭘 한다고. 불청객과 치를 전투력이 급격히 하강했다.



"아무튼, 오늘만 재워주는 거예요. 내일부터는 얄짤 없으니까 나가요. 다리는…나도 잘못 했지만 그쪽도 잘못 했잖아요. 하룻밤도 재워주고 응급처치까지 해줬으면 내 몫은 다 한 거라고 봐요. 알겠어요?"

"우으…싫어. 난 여기서 살 거야…."



 졸면서도 지민은 제 뜻 하나는 잘 전했다. 평화롭게 전쟁을 종식시키려던 정국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돋았다.



"안돼요. 나가요."

"싫어."

"왜요?"

"너랑 결…."

"결혼타령 같은 거 안 통하니까 그만둬요. 대체 왜 안 가요? 나 알아요? 난 당신 몰라요. 생판 처음 보는 남이에요, 우리. 다른 사람들이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범죄라고 해요, 범죄. 주택침입죄.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제 발로 나가요."



 졸린 지민은 정국의 말 중 칠십퍼센트를 흘려보냈다. 낮부터 계속 무기로 들이미는 경찰만 언뜻 들렸다. 지민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두르며 다시 베개에 누웠다. 정국이 버럭 외쳤다.



"박지민씨!"

"경찰 그거 어차피 소용없을걸. 나 잡아가려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 잡아가야 돼. 신고해도 경찰은 네 말 안 들어주니까 그건 나한테 안 무서운 말이야. 근데…나 졸리니까 다음에 얘기하면 안돼?"

"내가 무슨 수로 그걸 믿고 당신한테 속을 거 같아요?"

"이름 전정국. 나이 스물네 살. 베타. 중졸. 현재 빚은 8억정도 남아있고 매달 초에 갚는 중. 이 집 가격은 500만원에 연애경험은 전무하고 아침에는 우유배달 알바, 아침에는 공사장 알바, 저녁에는 술집 알바. 그리고 주민번호는…."

"자, 잠깐만요."



 정국이 지민의 말을 막아 섰다. 지민은 생각나는 대로 읊다가 말리는 정국에 졸린 눈으로 물었다.



"나 자도 돼?"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지민이 아무렇지 않게 툭툭 뱉은 것들은 정국밖에 모르는 사실이었다. 빚의 규모도, 스케줄도, 학력도. 정국은 일터에서 제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딱히 자랑할 것도 없었으며, 해봤자 암울한 이야기뿐이었다. 어렸을 때 부도난 부모님이 동반자살하시고 저는 현재 8억의 빚이 얹혀져 있습니다. 하하 이렇게 불쌍한 인생 처음 보시죠? 박수라도 한 번 쳐주세요 하고 넉살 부릴 성격도 되지 못했다. 작정하고 지민이 어릴 적부터 정국을 스토킹 해오지 않는 이상 지민이 알 방도는 없었다. 지민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 텄다. 정국이 굳어있는 사이, 지민은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너두 자…."



 패닉에 빠져있던 정국은 지민이 눈부시다는 듯 후드를 쓸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일단 내일 일을 가야 했다. 정국은 제 잠자리를 뺏어간 지민을 보다 한숨을 쉬고는 바닥에 누웠다. 방이 좁아 자동으로 지민과 조금이라도 몸이 스칠 수 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인생. 생각보다 더 큰 지뢰가 집에 찾아온 듯싶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옆에서 고르게 울려 퍼지는 고른 숨소리는 피곤한 정국을 잠으로 인도했다. 내일, 내일 다시 이야기해보자. 한탄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지민이 굴러 정국의 등에 착 달라붙었다. 정국이 눕기만을 기다린 지민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구 우리 오늘 첫날밤이라 섹스 해야 되는데…그냥 졸리니까 다음에 하자, 정국아…."



 말의 끝은 졸린지 흐려졌다. 정국이 반쯤 감긴 눈을 번쩍 떴다. 지민을 돌아보는데, 이미 꿈나라에 도착해있다. 정국은 지민을 정정했다. 고작 지뢰가 아니라 핵폭탄급이었다. 핵폭탄급 불행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