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이 데뷔했던 무대보다 더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표백제로 빤 것처럼 작은 얼굴이 새하얘졌다.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고, 감정은 그대로 신체로 나타났다.
“히끅. 끅.”
딸꾹질로 어깨가 들썩였다.
“죄송, 히끅, 죄송합, 끅!”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윤기는 살짝 어이가 사라진 얼굴로 물컵을 밀어주었다. 그리고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나 덧붙였다. 그래.
“돈 많은 사람은 처음 봤을 테니까 이해해줄게요.”
“감사, 끅, 합니다.”
지민이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퍼뜩 이제라도 스폰서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머릿속 이성이 깨어났다. 지민이 윤기를 흘끔거리며 가능한 괜찮은 사회생활 멘트를 꺼내보았다.
“정말로, 끅, 부사장님처럼 대단한 분은 처음, 히끅!”
“물이나 마셔요.”
네에. 말 잘 듣는 긴장한 아이돌은 윤기가 시키는 대로 했다. 윤기는 이제 신기한 생물체 보듯 물 마시는 지민을 보고 있었다. 이 작은 게 그래도 사회생활을 해봤다고 노력은 한다. 비록 온갖 유형의 사람을 다 만나본 윤기 입장에서는 하찮은 멘트였지만. 물컵을 잡은 작고 통통한 손가락은 윤기의 반절 정도나 되는 듯했다. 끝 마디는 하얗게 물들어 있는 게 긴장한 티가 다 났다.
“메뉴는 골랐어요?”
“아 네! 저는….”
지민이 급히 부랴부랴 다시 메뉴판을 펼쳐보았다. 윤기를 보느라 메뉴판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가격을 확인한 순간 지민은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다. 잘못 적은 건가? 왜…숫자가 이렇지? 내가 아는 한식이 맞는 건가? 금을 덕지덕지 뿌리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 돈이면 불균형한 식단을 먹고 있는 멤버들과 한 달은 거뜬히 먹을 수 있을 터였다.
“어…저는요….”
당황하여 메뉴판을 쭉쭉 넘기니 주류 코너가 나왔다. 순간적으로 반복학습 되어있는 지민의 머리에선 사장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술은 절대 안돼! 그에 가만히 메뉴판을 보고 있자니 윤기가 말했다.
“그건 커서 먹고.”
이미 다 컸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지민은 참았다. 이미 실수를 한 전적이 있으므로. 네에. 순순히 딸꾹질을 끅끅거리면서 얌전히 메뉴판을 앞페이지로 돌렸다. 뭘 골라야 되지? 방황하는 어설픈 손짓을 본 윤기가 말했다.
“알아서 시켜줄게요. 못 먹는 거 있으면 남겨도 되니까 남겨요.”
“…네, 감사, 끅!”
윤기가 점원을 호출했다. 능숙하게 주문하는 폼이 이곳에 꽤나 자주 와본 듯 보였다. 네. 그렇게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점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
“…….”
기다린 것처럼 테이블에 정적이 찾아왔다. 지민의 히끅거리는 딸꾹질 소리만 요란했다. 윤기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지민을 응시했다. 뜯어보는 그의 눈빛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도 했다.
반대로 열정만 가득한 어린양은 이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부담스러웠다. 스폰은 원래 이런 건가? 영상으로 봤던 거랑 다른데…. 아니, 생각해보면 말이 없는 건 비슷했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키스하고 허벅지부터 만지는 장면이 시작이었으니. 그렇지만 평범한 드라마나 영화 속에선 투자 받는 사람이 말을 많이 하니까. 결국 지민은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저…끅, 투자해주시는 거면, 히끅, 저희 앨범도…다시 나올 수 있는, 끅, 건가요?”
“그렇겠죠.”
“아하….”
더 이상 대화할 의지가 없는 시큰둥한 단답에 지민의 노력은 무산됐다.
“말 편하게, 끅, 하셔두 돼요.”
“그래.”
또 단답. 분위기 전환은 실패다.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이 떨어질 무렵, 하늘에서 이 노력을 가엽게 봐준 건지 노크소리가 울렸다. 강아지였다면 귀가 쫑긋거렸을 모양새로 지민이 들어오는 점원을 기쁘게 반겼다.
“실례하겠습니다.”
점원은 로봇처럼 접시에 예쁘게 담긴 요리들을 테이블 가득 내려놓았다. 와. 지민이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그 넓은 테이블이 꽉 찰 정도로 가득 올라온 접시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고, 그 안에 담긴 요리들은 맛깔스러운 게 왕이 먹는 만찬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익숙한 듯 무감하게 윤기가 젓가락을 든 뒤, 지민이 이어서 젓가락을 들었다.
전을 집어먹은 지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맛있었다. 여태 먹은 전들은 그저 밀가루 덩어리였던 게 분명하다. 비교도 되지 않는 맛에 식욕이 돌았다. 그러나 앞에 앉은 윤기를 본 순간, 입맛은 거짓말처럼 싹 사라져버렸다.
식사 후의 본격적인 스폰이 시작될 거라 생각하니 속이 메스껍기까지 했다. 이 식사가 끝나면 바로 호텔로 가는 건가? 밧줄로 날 묶으면 어떡하지? 안대 씌우는 건 아니겠지? 혹시 호텔에 마약이 담긴 주사가…? 기계적인 젓가락질을 하며 지민은 윤기를 흘끔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나쁜 분 같지는 않은데. 잠깐만 아프고 말 수도…. 지옥과 용암 속을 오가는 상상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식사를 마친 윤기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생각하며 지민이 마찬가지로 비장하게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게 다 먹은 거니.”
“네?”
“하나도 안 줄었는데.”
윤기가 밥그릇을 까딱 고갯짓했다. 밥은 반 이상이 남겨져 있었고, 찬도 몇 개 줄지 않았다. 아…. 이후 있을 일에 집중하다 보니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많이 먹는 게 취향이신 건가? 지민이 숟가락을 다시 들어 보였다.
“더, 더 먹을까요?”
“…네가 먹고 싶으면 먹어.”
“아…저는 배가 불러서….”
와중에도 예의는 잊지 않아서 지민이 작게 덧붙였다.
“맛있는 밥 사주셨는데…죄송해요.”
“그런 건 상관 없어. 네가 그렇게 먹고 살아있는 게 신기해서 물어본 거니까.”
무심하게 대꾸한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일어나지. 아 네…! 지민이 윤기의 뒤를 쫓아 일어났다. 길다란 복도는 조선의 값비싼 가옥처럼 나무로 되어있었다. 앞서 걷는 넓은 어깨를 보면서, 지민은 이상하게 조금씩 안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분이라면 그래도 영상으로 봤던 싸이코 스폰서들보다는…. 괜찮을 거 같다. 마음의 준비를 다잡은 지민이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왜.”
“호텔로, 바, 바로 가나요?”
윤기의 걸음이 뚝 멈췄다. 돌아보는 그의 시야에는 긴장한 티가 역력한 아이돌이 침을 꿀꺽 삼키며 서있었다. 허. 윤기가 헛숨을 내뱉었다. 뭐라고? 언짢음과 어이없음이 적절하게 섞여있었다. 호텔로…. 추가로 대답하던 지민이 움찔했다. 꼭 뭔가 잘못한 듯한, 연습생 시절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혼났을 때와 비슷한…. 윤기가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팔짱을 낀 채 지민을 쳐다보았다.
“꼬마야.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나는 나보다 9살 어린애랑 자는 변태취향 따위 없어.”
그리고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래서 곧 잡아 먹힐 사슴처럼 덜덜 떨고 있던 거였군. 지민은 숨만 쉰 채 눈만 간신히 깜빡거렸다. 머리에 입력된 문장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약간 필요했다. 착각? 아니라고…?
“그, 그럼? 저랑 안…안 하시는 거예요? 호, 호텔은…스폰은….”
“쬐끄만 게 계속 아무 말이나 하네.”
“아….”
지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훤한 대낮에, 그것도 다 트인 식당에서 떠들고 있다는 걸 이제야 자각했다. 창피해서 온몸이 활활 타 들어 갈 것 같았다. 윤기가 고개를 모로 가볍게 꺾었다.
“내 비서가 식사만 한다고 분명 전했던 거 같은데. 말이 잘못 전달됐을 거 같지는 않고. 네 사장이 그렇게 하래?”
“그건 아니에요! 사장님은 잘못 없어요. 그게…제가 혼자 그냥…!”
“네가 혼자 그런 거라고?”
“네, 네. 진짜예요. 저는 아무것도 없는데, 투자해주신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가늘어진 눈으로 해명하는 새붉은 얼굴을 살핀 윤기는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됐어. 변명 안 해도 돼.”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아네.”
지민은 부러질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드러난 목이 얇고 하얬다. 윤기는 사고 쳐놓고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마냥 초조하게 흘끔흘끔 눈치를 보는 지민을 보며 생각했다. 대체 얜 뭐지? 애가 겁이 없기도 하고. 순진하기도 하고. 연신 죄송해요, 사과하는 걸 보면 예의는 또 바르고. 윤기가 지민의 어깨를 톡톡 쳤다.
“됐으니까 그만해.”
“…네….”
“오해도 없앴으니 이제 집에 가. 밥도 다 먹었잖아.”
지민이 떨궜던 고개를 다시 번쩍 들었다. …네? 그러나 이미 할말을 다 끝낸 건지 윤기는 앞서서 다시금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대로 끝? 지민은 일순간 넋 놓고 윤기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밥만 먹었고, 심지어 밥 먹으면서 오간 대화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성인인지도 모르고 들어온 그는 아직도 박지민이 성인이라고 믿지 않았으며, 영 불확실한 대화뿐이었다. 컴백할 수 있을까요? 그렇겠죠. 그 외에는 심지어 실수만 했다. 제 스폰서가 맞나요? 나랑 자나요? 헛소리만 날려대며 없던 정도 떨어지게 했다.
만약 스폰을 해주려던 마음이 다 증발했다면? 하얀 지민의 얼굴이 이제는 아예 시퍼렇게 질렸다. 미래는 하나의 테이프처럼 감겨 빠르게 돌아갔다. 제 발로 차버린 마지막 기회. 뿔뿔이 해체되는 멤버들. 빚을 쥔 사장님의 사무실로 들이닥치는 빚쟁이들…. 그리고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제 자신. 이제는 아예 대문을 통과해서 나가버린 윤기의 뒷모습이 지민은 사라지는 자신의 미래 같았다.
“잠깐만요!”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지민은 단거리 선수처럼 넘어질듯 질주하며 문을 나선 윤기를 좇았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화단이 양 옆으로 쭉 늘어선 돌길 위에 그가 있었다. 지민의 윤기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잠깐, 잠깐만요…!”
“갑자기 뭐….”
작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지민이 윤기를 꼿꼿이 마주봤다. 식사 내내 불안하게 돌아다니던 시선이 처음으로 온전히 마주 본 순간이었다. 간절함이 빼곡하게 꽉 찬 눈빛에 난데없이 붙잡혀 미세한 짜증이 섞였던 윤기의 입이 다물렸다.
“제 말 한번만 좀 들어주시면,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절 만나고 싶어하신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한번만 기회 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어요. 그게 뭐가 됐든 절대 실망하시지 않을 거예요. 꼭 해낼게요. 믿어주세요.”
“…….”
“딱, 딱 한번만 기회 주시면….”
용기 있게 윤기를 붙잡은 지민은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샘솟았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 그리고 여태 붙잡지 못한 수많은 기회들. 내가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윤기는 말없이 지민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한껏 쏟아낸 지민의 눈가가 붉어진다. 울기 직전으로 울멍거리는 눈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러나 끝끝내 이 악 물고 눈물을 참아낸다.
“아까 했던 제 실수가 불쾌하셔서 화가 나가지고, 혹시 그래서 투자하실 생각이 사라지신 거라면…저 말고도 저희 그룹 멤버들 정말 다 잘하거든요. 제가 빠질 수도 있으니까….”
“…….”
“그러니까 다시 한번 생각을….”
“…….”
“해주시면….”
“…….”
“…근데, 근데 한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 정말 춤이랑 노래가 좋아요.”
울음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가 떨린다.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 눈앞이 아예 완전히 흐려져서 지민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이렇게 붙잡는 거 싫으실 텐데, 근데 이번마저도 사라지면 제 인생은 완전히 끝일지도 몰라서….”
끝끝내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한줄기씩 줄줄 흐른다. 무릎이라고 꿇고 빌어봐야 되나…? 지민이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윤기가 드디어 말했다.
“…진짜 신기한 애네.”
“…….”
“고개 들어.”
지민이 천천히 윤기의 말을 따랐다. 줄줄 흐르는 눈물에 메이크업이 작게 번졌다. 윤기가 고저 없이 말했다.
“불어터진 떡이군.”
흑. 지민이 입술을 앙 물었다. 윤기의 말마따나 보기 좋은 꼴은 아닐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못생겨서 더 정이 떨어지셨나…? 지민이 마지막까지 어필했다.
“저희, 흑, 그룹에, 저보다 잘생기고 예쁜, 멤버들, 흑, 있, 있어요….”
“누가 걔네 보고 싶다고 했니.”
“그럼….”
지민이 불안에 떨고 있는데, 윤기가 지민의 옷자락을 눈짓했다.
“우는 거 질색이니까 눈물부터 닦아봐.”
“…네에.”
다행히 그건 아닌가 보다. 지민이 순순히 옷소매를 끌어왔다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울망거리는 눈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윤기를 보고, 또 옷을 보고 더 울망거린다. 세상 서러워 보였다. 윤기가 툭 물었다.
“왜 그래.”
“이게 제 옷이 아니라서….”
“…….”
“협찬이라서…버리면 물어줘야 하는데….”
메이크업은 안 지워져서…. 지민이 버린 몇 개의 사복을 생각했다. 심지어 지금 입고 있는 건 흰 셔츠였다. 묻으면 끝장일 터였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때라, 이 옷 하나를 변상하면 안 그래도 수입이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아 고생하는 사장님은 편의점에서도 밥을 못 먹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가지 하네….”
너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애니. 그런 생각이 새겨진 표정으로 윤기가 지민에게 명령했다.
“손 치워봐.”
얌전히 지민이 팔을 내리자, 윤기는 제 옷소매로 대충 지민의 얼굴을 꾹 눌렀다. 상냥하고 조심스럽긴커녕 정말 떡 모양 찍듯 대충 슥슥 문지르듯 눌렀다. 으븝. 지민은 윤기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두 발에 힘을 줘 서있었다. 지민의 협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명품 수트 재킷 소매에 메이크업이 마찬가지로 번졌다. 그러나 윤기는 아무렇지 않아했다. 오히려 눈물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있는 지민의 눈매를 보고 혀를 작게 찼다.
“이렇게 나가서 돌아다니면 네 생각대로 그런 스폰을 한 줄 알겠어.”
“죄송….”
“아까는 죄송한 줄 모르고 떠들더니 또 죄송하다네.”
“제, 제가 그런 거 아니라고 설명할게요….”
“연예인이 이런 꼴로 돌아다니면서 아니라고 하면 퍽이나 해명이 되겠어. 오해가 더….”
윤기가 말을 잠깐 멈췄다가 이었다.
“뭐, 아무도 못 알아볼 테니 오해 받을 일은 없겠네.”
지민의 어깨가 축 처진다. 슬프지만 맞는 말이었다.
“네…다행…이죠.”
탈색을 자주 했음에도 결이 좋은 머리칼이 나폴거린다. 윤기가 연한 갈색 머리칼 위로 손을 툭 얹었다. 그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몸짓으로 대충 한두 번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주 재빠르게 잠깐 닿았던 손길이 떨어졌다. 지민이 의외의 감촉에 고개를 들었다. 말간 눈동자만큼은 눈물의 자국이 남아 촉촉했다.
“나이도 어린 게 뭔 벌써 인생의 끝을 논해. 같잖게.”
“…….”
“돌아가서 기다려.”
지민이 눈에 물음표를 달았다. 기다려요…? 윤기가 무덤덤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
“아직 네 기회 끝난 거 아니라고.”
그 말은 그럼…. 지민이 멍청히 통통한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윤기는 별다른 추가설명 없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몇 걸음 채 멀어지기도 전에 뒤를 돌아보며 아, 하고는 덧붙였다.
“갈 땐 어른 불러서 가라.”
“…네, 네!”
더는 애 취급에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지민이 허리를 90도로 꾸벅 접으며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제는 믿기지 않는 기적이 얼떨떨했다. 그러나 어딘가 기쁜. 빼앗겼던 생기가 조금씩 말간 얼굴에 싱그럽게 차올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