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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完

by 토페 posted Nov 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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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Ed Sheeran - Photograph>









'천사' 케일론 베닌의 충격적인 실체가 밝혀졌다.



골든 글로브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고, 수많은 인기작품을 찍은 그는 과거 가르치던 켈링턴 아트스쿨 학생을 강간 후 살인했다. 이후 자살로 위장하여 나무에 시체를 걸어놓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살해당한 학생을 지속적으로 강간하였으며, 그 외에 수많은 여성의 몰래카메라를 소지하고 있었다. 경찰과 언론사에 피해자의 신고가 빗발치는 중이다. 강간 피해자는 수십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양심고백으로 벌인 자살소동 역시 거짓으로 밝혀졌다. 슈가 스튜디오를 견제하는 스마트픽처스에서부터 케일론 베닌이 거액의 돈을 받은 정황이 포착되었다. 그는 수억 달라의 돈을 챙겨 도망가려 했으나,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케일론 베닌은 살인, 강간,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Newyork globe by Simon William




「굿모닝, 뉴욕! 찰리와 패트릭의 쇼 2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찰리, 요즘 뉴욕에서 유행하는 게 뭔지 알아요?」

「뭐죠, 패트릭?」

「바로 거꾸로 말하는 거죠. 천사는 지옥에, 악마는 천국에!」

「아니, 찰리. 그 말은 틀렸어요. 천사는 감옥에 있죠.」

「명답이군요. 자, 오늘의 아침을 시작할 첫 곡입니다.」



 시몬은 라디오가 흐르는 넓어진 사무실 책상에 앉아 볼을 긁적거렸다. 얼결에 21세기 영웅이 됐다.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맨처럼 근사한 수트와 방패가 있어 시민들의 찬양을 받는 종류는 아니고, 뉴욕 글로브라는 작은, 이제야 지면을 갓 발행하게 된 언론사 안에서 시몬은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편집장은 보는 둥 마는 둥 대충 넘겼던 시몬의 기사를 법전처럼 모셨으며, 직장 동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그제는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투자자와 만찬을 가졌고, 오늘은 사장이 직접 내려와 공을 치하했다. 이 정도면 지민이 준비하라는 승진이 아니라 제 2의 인생이었다.



“오 대스타 아니야? 퓰리처상의 강력한 후보?”

“띄워주지 마라. 날아간다.”



 동료기자가 키득거리며 시몬을 부채질했다. 왜 너 퓰리처상으로 진짜 거론되고 있다고. 시몬은 손을 내저었다. 상은 무슨.



“그런데 진짜 그거 영상 어떻게 구했어?”

“흠, 글쎄….”



 시몬은 말끝을 흐렸다. 전화를 받고 급히 뛰어나간 곳엔 다급한 얼굴의 비서가 서있었다. 늘 유순하고 말랑해 보여 생크림 케이크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 시몬은 완전히 제 생각을 바꿨다.


 당신은 여전히 수상하지만 당신이 쫓아온 10년은 믿을게요.


 다부지게 자료를 내밀고 휙 떠나가는 뒷모습이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할지 포부가 크다고 해야 할지. 사랑하는 사람의 위기에 눈이 돌아갔다는 걸 모르는 시몬은 지민이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다.



“연예부가 진짜 잘 팔리긴 잘 팔려. 부서 옮길까?”

“너 그렇게 아무거나 잘못 먹으면 체한다.”

“왜, 어거스트 회장 애인이 요즘 제일 뜨겁지 않아? 가서 출근길 사진 몇 장이나 좀 찍어봐?”



 동료기자가 농담하며 웃었다. 시몬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를 말렸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머리가 걸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냥 놔둬.”

“왜?”

“직접 만나면 내 말을 이해하겠지만, 그냥 가만히 있는 걸 추천할게.”

“아 한국 출신이라고 했던가? 거긴 그, 태권도? 그게 유명하긴 하지.”

“가서 청소년 마약 유해성 기사나 더 내. 그게 제일 나을 거야.”



 대화는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로 끝났다. 네, 시몬입니다. 전화 너머 여성이 말했다. 시몬은 머지않아 편하게 앉아있다가, 등을 바짝 당겨 앉았다.



[여기 케일론 베닌 관련으로 제보를 할 게 있는데요. 기사 보고 용기내서 전화했어요. 저는 케일론 베닌과 영화를 작업했던 팀의 스태프로 일했어요.]







***







 민윤기의 드레스룸은 왜 올 때마다 커지는 걸까. 맨해튼 펜트하우스로 집을 바꿔도 공간은 홍수처럼 늘어났다. 혀를 내두르면서 지민은 윤기의 옷을 걸쳐 입었다. 그대로 펜트하우스에 돌아와 일을 치고 3일간이나 같이 처박혀있었다. 지민이 나가려고 할 때마다 허리를 붙잡고 조금만 더 있자며 어리광 같은 부탁을 해오는 윤기 탓이었다. 니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같이 있어줘. 물 먹은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말하면 이제 그만 나가야 한다는 결심에 힘이 풀리고 마는 거다. 사실 거절할 수가 없는 부탁이었다. 며칠 만에 만나 둘만 같이 눈치 안 보고 붙어있을 수 있다는데, 연락이 언제 오나 폰만 쥐고 살던 과거를 겪은 지민으로써는 감정에 무너지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아르마니 수트는 손수 고르고 제 옷장에 걸려있던 옷처럼 꼭 맞았다. 굳이 열심히 따지자면 반은 맞는 말이다. 결제는 윤기가 했지만 나른 건 지민이었다. 수트 재킷 단추를 채우고 팔을 툭툭 터는 그때, 어느 샌가 들어온 건지 윤기가 벽에 팔짱을 끼고 기대선 채 구경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

“그래요?”

“어. 당장 나랑 결혼한다고 발표하러 가도 되겠어. 기자회견 다시 열어야겠는데?”

“다시 벗어야겠다….”

“오 그럼 나야 좋지.”

“아, 진짜.”



 지민이 붉어진 귓가로 윤기의 어깨를 팍 쳤다. 아침부터 어떻게 그런 소리를! 윤기는 아프다며 엄살 아닌 엄살을 피웠다. 아, 이제 아주 막 패? 좀 맞아도 돼요. 아프지도 않은 주먹을 몇 번 맞은 윤기는 픽 웃으며 지민에게 다가와 접힌 수트의 카라 부분을 매만졌다. 이제 완벽해.


 지민은 문득 궁금해졌다. 원래대로 영화가 개봉되고, 뷔의 영상을 푼다면 어마어마한 논란이 뒤따랐을 것이다. 살인범에, 강간범에. 범죄행위만 몇 개인지 모르는 배우가 출연한 영화라면 며칠 만에 상영관에서 내려질 텐데. 순수한 궁금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지민이 근데요, 하고 말했다.



“원래 그렇게 영상 풀 계획이었으면 영화는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망하잖아요.”

“그까짓 푼돈에 관심 없어.”



 아 네…그깟 푼돈이요…. 리셉션의 비용만 해도 초호화 파티라 소문이 자자하게 났건만. 아니, 그전에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빼놓은 예산이며, 재촬영이라는 단어 하나에 얼마가 들어가는 건지 알까? 하긴. 재촬영 후 개봉되는 영화를 다들 돈을 들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긴 하다. 지민이 옷을 다 입고 나가려던 짧은 찰나, 옷장 사이에서 보이는 유독 익숙한 옷 하나.



“어! 이거!”

“뭐.”

“이거 내 옷이잖아요! 내 코트!”



 지민이 옷걸이에 걸려있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 언젠가 처음으로 윤기에게 지민이 보였던 작은 관심의 증거. 분명 윤기가 버렸을 것이라 예상하고 새로운 코트까지 샀던 지민은 반가운 기분이 되어 코트를 끌어안았다.



“안 버렸네요?”

“왜 버려.”



 분명 집에 있다고는 했다. 지민이 믿지 못했을 뿐이다. 그땐 버리고 갔다는 둥 뭐라고 하더니. 기억까지 하고 있다는 게 꽤나 기특했다. 지민은 무언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질문했다.



“이때부터 나 좋아한 거예요?”

“그건 몰라.”

“그게 뭐예요.”

“진짜 몰라.”



 윤기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아마 꾸역꾸역 논하자면 그때부터 박지민이 누구인가, 관심을 가졌다는 게 맞다. 그리고 손을 조심해야한다며 걱정하거나, 같이 약속에 가자고 하거나, 이런저런 일들이 쌓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전히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가지고 싶은 다정함의 냄새를 지민에게 맡고 주변을 얼쩡거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



“넌 언제부터였는데.”

“저요? 음…딱히 없는데…매일매일 이상한 심부름 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어야 말이지. 확실한 건 그땐 홀리가 천만 배는 이뻐보였어요.”

“내가 개같다는 거야?”

“설마 그런 뜻이겠어요. 전 그냥, 이때부터 뭔가 신경이 쓰였던 거 같아요. 아 이 사람도 진짜 사람이구나…그런 느낌?”



 지민이 코트를 짧게 흔들었다. 그때 되게 아파서 불쌍해보였어요. 그래서 이거 덮어준 거였어요.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 전까지는 사람 아니면 뭐였는데.”

“악마. 변태. 일에 미친 로봇.”

“…….”

“농담, 농담. 삐졌어요? 아니죠?”

“변태악마로봇을 따라와 준 네가 너무 대단해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데?”



 윤기가 삐딱하게 고개를 꺾더니 손뼉을 가볍게 친다. 대단해, 아주. 멋진 포용력이야. 선거의원으로 출마해. 지민은 금세 조금 말이 심했나 싶어 미안함의 의미로 애교스럽게 눈꼬리를 배시시 휘었다.



“에이, 그래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윤기의 뚱한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과거 얼마나 지민을 들들 볶았는지 생각지도 않는 눈치였다. 실상 그의 머릿속에 입력된 건 아주, 조금의, 작은 심술이었으니까.



“그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지금요?”



 지민은 약 5초간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목숨까지 걸고 달려올 수 있는 대단한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역시 흔히들 그렇게 말한다. 질문 하나를 놓고 둘이 매달려 머리를 모은 끝에, 답의 질문을 지민이 먼저 찾았다.



“그야 사랑하는 사람이죠.”



 사랑하는 사람. 이 대단한 게 사랑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보다 더 대단하려면 우주를 다 뒤져도 쉽게 찾지는 못할 거다. 신뢰로 반짝거리는 눈빛을 받은 윤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속이 말랑하면서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가지 말까?”

“안 돼요. 약속까지 다 잡아놨어요. 늦으면 어떡해.”



 쌩하니 거절한 지민은 계속해서 얼굴에 닿는 간지러운 시선을 감지했다. 저 시선에 넘어가 어제 아침에도 침대에 발이 묶였고, 엊그제 저녁에도 이 펜트하우스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진짜, 저런 붙잡는 시선은 어떻게 버틸 수가 없다.



“그럼 쪼끔만….”



 윤기는 지민의 볼을 잡아 깊숙이 잡아당겼다. 키스는 길고 깊었다.










 지민은 졸업시험을 준비하는 정국을 불러냈다. 나 떨어질지도 몰라요. 몇 번 거절의 말을 돌려하던 정국은 비싼 밥이라는 먹이에 낚여 술술 따라왔다. 립파스타와 갈릭쉬림프피자, 포테이토 두 바구니면 정국의 시간을 살 수 있었다. 지민과 같이 있어준다는 명목으로 못했던 공부를 몰아하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밥은 꼬박꼬박 먹으면서 해. 넌 안 씻어도 괜찮아. 잘생겼으니까. 정국은 피자를 물고 꿍얼거렸다. 언제는 냄새난다면서. 지민은 내가 언제, 하고 뻔뻔하게 대답하다가 슬슬 비어가는 그릇을 보고 오늘의 목적을 언급했다.



“나 할 말 있어.”

“민윤기랑 결혼한다고요? 베스트맨 해달라구요?”

“너라도 살려줘라 좀….”

“뭔데요?”



 음. 지민은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부서를 이동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곰곰이 생각을 하고 나온 결과였다. 정말 윤기의 말대로 어거스트 일렉트릭 캘리포니아 지부로 갈까, 아니면 조금이지만 어거스트 경력직을 들고 다른 뉴욕의 회사를 갈까. 현대사회의 스펙에 묶여있는 젊은이의 입장으로 여러 가지 고민을 해봤지만. 패기 있게 자신의 성공할 회사에 와달라는 제안이 지민의 구미를 잡아당겼다. 조금 더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이득을 붙이자면 어거스트라는 경력란을 흥미 돋는 눈으로 바라보며 꼬치꼬치 캐묻지 않을 직장도 필요했다.



“취업시켜줘.”



 정국이 칼질을 멈춘다. 어이없다는 듯 지민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 형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무슨 취업박람회센터에요?”

“아니, 내가 설마 그걸 물어봤겠냐.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가 뭔….”



 미간을 팍 찌푸리던 정국은 말을 멈췄다. 설마, 그거 지금 말하는 게.



“내 회사요?”

“엉…그거 아직 유효해?”

“형.”

“응?”

“잠깐 있어봐. 이거, 자 여기.”



 정국이 급히 폰을 꺼내 타자를 쳤다. 머지않아 빠르게 타자를 완료해 지민의 앞으로 폰을 들이밀었다. 한번 봐봐. 고개를 갸웃하며 화면을 본 지민이 황당하다는 듯 허, 했다. 계약기간. 회사 망할 때까지.



“이거 그냥 노예계약서잖아.”

“그냥 계약서라뇨. 종신계약이에요. 내 회사 망할 일 없으니까.”

“너 너무 자신감이 넘친다. 사업이 얼마나 어려운데.”

“어렵지만 그 어려운 걸 제가 다 해내죠.”



 내가 누군지 알아요? 정국이 당차게 파스타 새우를 포크로 쿡 찔렀다. 지민은 푸핫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너 대단하다. 그러니까 빨리 졸업해서 나 월급 줘.







***








 어거스트 사무실은 주인의 부재중에도 바쁘게 돌아갔다. 윤기는 아침에 폭풍같은 명령을 쏟아내고, 몇 안 되는 시간만 얼굴을 쏙 비추고 집으로 사라졌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 정말 말 그대로 급한 사항 몇 개만 해결한 뒤 맨해튼 펜트하우스로 무통보 허니문 여행을 가버린 누구 덕분에 진과 레이첼은 아스팔트 정글의 뒷수습을 진땀을 빼며 달려들어야만 했다. 다시 주주들과 윤기의 약속을 잡고, 총회의 안건을 정리한 다음, 슈가 스튜디오의 차후 방향 발표문을 짜고. 간단하게 정리하면 사무실에서 집으로 퇴근한 적이 없다는 소리다.


 아스팔트 정글은 엎어졌다. 완전히. 편집 작업은 중단되었으며, 프로모션도 취소했다. 겉은 그렇다. 그러나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는 어느 개봉한 영화보다 더 뜨겁게 대중의 관심을 흡수했다. 천사의 두 얼굴을 까발리기 위한 계획, 현실판 셜록. 이런저런 엄청난 수식어를 달고 영화 자체는 대도시의 범죄를 까발릴 정의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았다. 쏟아지는 영화의 방향 문의에 슈가 스튜디오가 내놓은 답은 재촬영이었다. 게다가 영화의 수익금을 모두 기부금으로 쓴다는 입장을 공표한 어거스트 역시 완벽하게 이미지를 개선했다. 희대의 악당 취급은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암 치료제라도 개발한 기업 대접을 받았다. 바닥에 처박혔던 주식 그래프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하늘을 뚫을 듯 높게 치솟았다.


 케일론의 살인혐의가 드러나고부터는 작가에게도 관심이 쏠렸다. 어떻게 살인범이 죽인 방식대로 영화에서 죽였지? 알고 있던 거 아닌가? 작가 알엠은 우연의 일치라 언급하며 영상의 주인이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온갖 의혹을 일축했다. 목을 매는 자살방법은 흔한 소재이며, 저는 결코, 이 글을 쓰는 동안 어떤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입장을 밝힌 그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증언했다. 윤기와 시나리오로 입씨름하며 눈물 흘렸던 과거는 수술이라도 받았는지 몽땅 잊은 모습이었다.


 거의 모든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올 즈음, 계속 비어있던 자리의 주인이 출근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신수들이 훤해졌군.”



 진과 레이첼은 너나 좋겠지, 하고 외치고 싶은 말을 넣고 묵묵히 일을 이어나갔다. 양심도 없다. 제일 신수가 훤해진 얼굴로 인사 아닌 아침인사를 남긴 윤기는 회의를 제 시간에 참석했다. 언제 서릿발 풀풀 풍기는 눈이었냐는 듯 그는 꽤 좋은 기분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나타난 건 한참이나 더 오래 비어있던 자리의 주인이었다.



“짐이 그래도 꽤 많네요. 별로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지민 그렇게 많이 일한 것도 아닌데.”



 짐은 조촐하게 적당한 크기의 한 박스를 채웠다. 윤기는 부서이동은 없던 일로 하자고 말을 바꿨지만, 지민은 끝끝내 우겼다. 한번 했다가 발 빼는 게 어디 있어요? 모든 일은 한 번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끝장을 봐야하는 거예요. 이 때다 싶어 물고 늘어진 지민을 윤기는 결국 이기지 못했다. 네가 원해는 대로 해. 그런데 또 비서는 안 돼. 넌 너무 착해. 지민은 턱 끝까지 차오는 말을 간신히 넣었다. 그쪽 말고 또 그렇게 비서를 괴롭힌 사람이 없어요….



“지민이 없으면 난 이제….”



 진이 돌연 왈칵 눈가를 누르며 흑흑거렸다. 이 기계나라에 나 혼자 버리지 말아요. 지민이 같이 안쓰러운 표정을 했다. 그간 같이 겪은 많은 감정이 둘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다음날 해가 뜨지 않길 바라며 외우던 퇴근 주문, 벅찬 일에 퇴사하고 싶을 때마다 느낀 동료의식, 해가 떨어져도 같이 남아 저녁을 먹넌 날들…. 진, 애절하게 부르며 지민도 진을 끌어안았다.



“죄송해요. 진짜 보고 싶을 거예요, 선배님. 진 때문에 완벽한 첫직장이었어요.”

“내가 정말 사랑해요, 알죠?”

“그럼요, 그럼요. 저도 정말 사랑해요.”

“사랑타령은 그만하고. 준비 다 했어요, 지민?”

“레이첼!”



 레이첼은 한 발작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하트로 된 풀장파티는 버리지 않는군. 대체 왜 저 난리인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퇴사를 한다고 해서 지구 밖으로 떠나버리는 것도 아니고. 식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니, 진짜로 눈물이 살짝 고인 진이 레이첼을 향해 팔을 뻗었다. 지민의 눈망울도 그렁그렁하게 변해있었다. 레이첼이 칼같이 말했다.



“난 됐어요.”



 빤히 쳐다본다. 곧 미스터 윤 회의에서 나올 거예요. 지민 역시 레이첼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

“하아….”



레이첼이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짚었다. 알았어요. 포기했다는 듯 레이첼이 가만히 서서 팔짱을 풀자 진과 지민이 달려와 끌어안았다. 우리 셋이 너무 다 수고했어요.







***







[이거 봐! 나 완전 잘나왔지:D]



 아스팔트 정글 필름 유출이 되고 재촬영이 확정되면서 뷔는 그간 개고생의 설움을 지민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대본을 얼마나 열심히 외웠는데, 헝헝. 지민은 아예 필름을 다 털어오는 뷔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속이 찔끔하긴 했지만 돈을 주고도 못 사는 좋아하는 배우의 한정판 영상이 거저 나오는데 거절이라니. 슈가 스튜디오 측에서 알면 뒷목을 잡을 일이니 뷔와 문자로만 앓았다. 진짜 너무 멋있어요, 아 이 대사 할 때 너무너무너무 좋았어요.


 지민을 줄기차게 따라다니던 기자 무리도 잠잠해졌다. 스마트픽처스의 로비 역시 케일론과 엮여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언론사들은 몸을 사렸다. 이미 한번 휩쓸려나간 과거의 언론사를 되새기며 어거스트의 보복이 두려운 건지 단 한 대의 카메라도 지민의 근처에서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거스트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한다는 소문이 이미 그 바닥을 한번 휩쓸었으니 당분간은 잠잠할 터였다.


 모든 게 평화롭게 돌아왔다. 그리고 딱 하나 걸리는 건.



“…….”



 지민은 메시지함을 열어보았다. 제가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하고 바쁘다며 제대로 연락하길 피하던 사람. 엄마라는 대화창 앞에서 엄지손가락은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두려워한다. 지민은 한 가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었다. 언제나 착한 아이로 있어야 해. 남의 부탁을 거절하면 날 싫어할 거야. 싫어도 내가 조금만 참으면 지나갈 거야. 주니어 하이스쿨 때부터 들어온 습관 같은 것이었다. 동양에서 왔다는 이유로 놀림거리가 됐을 때도 참았고, 락카에 저질스러운 낙서들이 늘어가도 참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고모할머니가 걱정하실 거야. 슬퍼하시겠지. 내가 걱정을 끼칠 수는 없어. 안 그래도 내 걱정 많이 하고 혼자 날 돌보느라 힘들어하시는데. 말하면 안 돼.


 세상은 이등분된 시선으로 나뉜다. 인터넷 댓글창을 조금만 읽어도 알 수 있다. 응원하며 박수를 치는 사람, 더럽다고 침을 뱉는 사람. 물론 21세기라는 사상의 발전에 따라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많긴 했다. 그런데 만약 90퍼센트의 응원과 10퍼센트의 경멸 중에서, 내 가족이 그 10퍼센트에 해당한다면? 괜찮다고 해줄까? 지민은 막연히 미약한 두려움을 느꼈다. 가족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어떻게 해. 민윤기는 포기 못하는데….


 신데렐라 역할에서 집에서 약혼을 반대한다고 뛰쳐나가는 비련의 주인공까지는 가고 싶지 않다. 지민은 끄응, 이마를 짚으며 고민했다. 평생 민윤기와 둘이서 몰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이미 둘이 몰래 살기에는 전세계 사람들 앞에서 입술을 스치는 장면이 공개되었지만. 아무리 껄끄럽고 가능한 피하고 싶어도 이건 해야만 하는 숙제였다. 낳아준 거밖에 더 있냐며 패륜을 저지르고 연락을 끊어버리지 않는 이상 말을 꺼내야했다.


 누구에게나 꼭 해결해야 하는 숙제는 있다. 마침내 결심이 선 지민은 윤기에게 문자를 넣었다.



[저 잠시 한국 좀 다녀올게요! 얼마 안 걸려요!]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약 30분 후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여행이 되셨기를 바라며, 저희 항공사를 이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손님, 곧 착륙하니 일어나 자세를 바로해주시길 바랍니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지민은 안대를 한손으로 끄응거리며 올렸다. 상냥한 승무원의 안내에 비몽사몽 안전벨트를 다시 바로 묶었다. 장시간 비행으로 어깨며 허리며 안 쑤시는 곳이 없다. 창밖을 내다본다. 도시는 아침 안개와 구름에 감싸여 블록퍼즐의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반쯤뜬 눈으로 지민이 중얼거렸다.



“…얼마만이지….”


 떠난 날짜도 가물거린다. 여섯 살쯤이었나, 다섯 살쯤이었나. 급격히 집안의 재정사정이 악화되면서 쫓기듯 갔으니까. 손으로 꼽아보던 지민은 계산을 미루고 잠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저기서 태어나고 걸음마도 떼고 했다는 건데. 한국에 남아있는 기억은 몇 개 없다. 동생들이 태어나는 순간, 고모할머니의 손을 잡고 공항을 떠나던 순간. 나 진짜 이렇게 보니까 외국인이구나. 시민권조차 미국으로 되어있으니 정의상 외국인이 더 가까웠다.


 한국에 간다는 메시지를 보내니 가족들은 환영했다. 다만 그 날짜가 평일이라, 눈물 나는 한국의 학생들과 직장인들은 지민을 마중 나올 수 없었다. 친구와 날짜를 바꿔서라도 마중 나오겠다는 첫째를 지민은 필사적으로 말렸다. 괜찮아, 주소만 알면 잘 갈 수 있어. 빠지면 눈치 보이잖아. 진짜 동생의 스케줄을 걱정하는 마음 반, 어쩐지 가족의 얼굴을 바로 본다는 두려운 마음 반.


 지민은 짧은 입국수속을 마치고 내려와 택시를 잡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5월의 하늘은 맑고 청량했다.



“날씨 좋다.”



 중얼거리며 크게 공기를 들이마시었다. 정국과 대화를 할 때를 빼곤 잘 쓰지 않는 한국어가 입에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달라붙었다.


 오전 11시, 한국이었다.














 주택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빌라촌이었다. 지민은 적힌 주소와 붉은 벽돌이 박힌 빌라를 한참이나 비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이렇게 떨리지. 하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흡사 어거스트 처음 면접을 볼 때만큼이나 떨린다. 설사 호모포비아라고 해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그대로 쫓아내는 것도 아닐 터였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어쩌면 아직 기사도 못 봤을 수도 있잖아?


 강 건너 대륙까지 다른 나라라 그런지 흘긋거리는 눈길은 확실히 줄었다. 거의 아무도 모른다고 봐도 될 거 같다. 게다가 저 사람이 어거스트 회장 호모애인이래, 그런 눈빛 자체는 이제 면역력이 생겼으니 문제없다. 대놓고 앞에 와서 혹시 연애스토리 좀 들려주실래요? 하는 무례한 질문만 받지 않는다면 시선쯤은 상관없는 괜찮은 콘크리트 멘탈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윤기와 관련된 일 말고도 걱정은 쌓여있었다. 만약 실제로 만났는데 내가 생각한 느낌이 아니면 어떡하지? 어색하진 않을까? 혈육은 상관없다며 떵떵거리기에 20년이라는 세월은 너무 길었다. 지민은 캐리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심호흡을 깊게 들이마시는 그 사이.



“누구세요?”



 똘망똘망한 인상의 남자아이가 지민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고등학교 마크가 달린 옷은 교복이었다. 지민은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도둑처럼 화들짝 놀라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저 수상한 사람은 아니구요. 여기가 제가 아는 집주소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여기 이 집의, 어, 음.



“여기 이 집의….”



 첫째 아들? 20년이나 밖에 있었지만 어쨌든 혈육으로 이어진 사람? 오랜만에 들리는 손님? 그냥 지나가다가 집이 예뻐서 서봤습니다…. 입술만 우물우물거리며 지민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던 때, 교복을 입은 소년이 지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거대한 캐리어, 말끔한 수트,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리같이 톡 튀어나온 입술. 매일 아침의 거울에서 만나는 자신의 신체부위와 참 닮아있었다. 남자의 생김새와 오늘 소년을 꾀병으로 조퇴까지 하게 만든 반가운 가족의 한국 귀국소식을 합치면.



“지민이 형?”

“…아?”

“형아!”



 한재는 지민의 품으로 와다다 뛰어들었다. 어억, 벅차게 달려오는 고등학생 남자아이는 지민보다 훨씬 컸다. 지민은 익숙한 목소리 톤에 설마, 했다.



“박한재!?”

“응, 응!”



 지민은 크게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귀여운 말투는 그대로인데, 전화상으로 추측했던 어린 꼬마아이는 어디가고 곰처럼 덩치 커다란 남자아이가 있었다. 지민과 다르게 발육이 상당히 왕성한 어깨는 지민을 깔아뭉개고도 남았다. 헉, 한재야 형이 숨, 숨을 못 쉬겠어. 형아 죽으면 안 돼! 이제야 얼굴을 대면한 첫째 혈육이 포옹으로 죽는 건 안 된다. 한재가 부랴부랴 비켜섰다. 꿀을 찾은 곰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했다.



“미국에서 온 거야?”

“어, 어.”

“들어가자, 형아. 나 오늘 형아 본다고 학교도 일찍 끝내구 왔어.”



 막내가 활짝 웃었다. 덥석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다른 한손으로는 지민을 끌고 들어갔다. 뒷모습이 꿀단지를 끌어안고 춤추는 곰처럼 신이 났다.





 지민은 어색하게 집을 구경했다. 월세로 2년마다 옮겨 다니며 산다는 집은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벽엔 빼곡하게 가족사진이 걸려있었다. 첫째가 졸업가운을 입은 사진, 막내의 돌잔치 사진. 그리고 그 가운데 막 걸음마를 뗀 오동통한 아기의 사진도 걸려있었다. 이거 형이에요. 한재가 다가와 히히 웃으며 아이 귀여워, 하고 지민의 아기 사진을 쓰다듬었다. 웃어야 하나, 건방지다고 해야 하나. 지민은 멋쩍게 미소 지었다. 형은 너가 더 귀여워. 그 말에 반달가슴곰같이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한재는 수줍게 손가락을 베베 꼬았다. 진짜? 지민이 형밖에 없다, 난.



“마셔, 형.”

“고마워. 되게 달다.”

“이게 내가 예전에 말했던 초콜릿 차! 맛있지?”

“응, 진짜.”



 한재가 뿌듯하게 웃었다. 지민은 한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사진을 주고받긴 했지만 실물은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 얼굴과 목소리는 앳되어도 덩치만 놓고 본다면 지민을 훌쩍 웃돌았다. 내 키는 유전자 탓이 아니었구나, 우연한 깨달음을 얻은 지민이 연신 실실 웃고 있는 한재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랑 아빠는?”

“오늘은 일찍 오신대. 형 온다고 해서. 누나랑 형도 일찍 온다고 했어.”

“그래?”

“형 미국에서는 어떻게 살았어? 안 졸려? 지금 시간이면 원래 잘 시간 아니야?”



 긴장 때문에 잠이 도무지 안 오거든. 민윤기와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직구로 날아왔다면 초콜릿 차를 엎고 캐리어 속으로 꾸겨져 들어갔을 터였다. 지민은 진심 대신 하하 웃으며 돌려 말했다. 한재랑 말하는데 어떻게 잠이 와. 한재는 천진난만하게 팔짝팔짝 뛰었다. 전혀 그 화제에는 관심이 없는 듯.



“내가 집 소개해줄게!”



 일단 좀, 안심해도 될 거 같다.





***






 외울 만큼이나 짧은데도 윤기는 지민의 메시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저 잠시 한국 다녀올게요! 근처 센트럴파크라도 간다는 듯 통보하고 휙 떠나버렸다. 레이첼과 진은 심오한 표정으로 문자를 들여다보는 윤기를 보고 추측했다. 새로 뽑은 비서가 얼마나 언짢으면 저런 표정을…. 지민의 후임으로 들어온 신입비서가 일을 못하긴 하지만. 상황을 보니 얼마 안 가 또 한 명이 갈릴 거 같다.


 한번 비행중이라는 안내메시지로 전화를 차단당했던 윤기는 참을성을 가지고 전화만 노려보았다. 북아메리카와 아시아를 붙여버리는 과학기술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전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왜 간 거야.”



 윤기는 얕게 타박했다. 하루 종일 그리운 목소리는 목소리고, 문자 한 통으로 떠나버린다는 말을 봤을 땐 심장이 좀 철렁했다. 더군다나 문자 한 통을 끝으로 떠나버릴 만큼 원래 지민이 무신경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 놀랐어요? 지민은 금방 오려고 했다는 사족을 붙이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어, 그냥 뭐 가족들 얼굴 좀 보려구요.]



 윤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가족들 얼굴을 보고 싶어서 갔다는데. 출근할 때마다 무작정 나가지 말라 짖는 강아지 위치까지 전락할 순 없으니, 오늘 하루 종일 전화 앞에서 쌓은 불안감은 조용히 숨기기로 했다.



“얼마나 있을 거야.”

[그냥, 한 열흘? 일주일 정도 있을 거 같아요.]



 예민한 미간이 구겨진다. 막 마음이 연결된 상대와 하루아침 떨어지는 것도 탐탁지 않은데, 열흘이나 연락도 잘 되지 않은 곳에서 생이별을 하고 있어야하는 판이라니. 흔히들 이런 싱숭생숭한 마음을 서운함이라 부른다. 말이 없는 윤기의 불편한 심사를 눈치 챈 건지 지민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나 없는 뉴욕은 좀 춥죠?]

“잘 아네. 히말라야보다 더 추워.”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그 정도야. 내일 신문 자세히 봐. 1면에 내가 얼음동상으로 실릴 테니까.”

[내일 뉴욕 날씨는요, 13도 정도고 하늘은 맑대요.]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 투정 좀 부렸더니 바로 날씨 안내나 한다.



“뭐 어떡하라고. 옷이라도 꽉 껴입으라고?”



 지민은 히히 웃으며 맞아요, 하고 속을 더 긁었다. 널 어떻게 이기냐. 그래 네가 그러라면 그래야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한 발작 물러난 윤기는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굴렸다. 보고 싶다고 쪽쪽거리는 걸로는 모자란데. 혼자 급작스럽게 덜렁 버려지니 유독 침대가 추웠다. 은근슬쩍 폰섹스라도 속삭여보려던 그 음험한 마음을 누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통화 건너편에서 쩌렁거리는 음성이 윤기의 귀에도 들렸다. 지민이 형, 나와서 아침밥 먹어! 윤기는 탄식했다. 아 망했군.



[다음에 내가 전화할게요. 아 근데, 잠깐만요.]



 왜. 윤기가 차분하게 기다렸으나 지민은 막상 붙잡아놓고 이렇다 할 말을 꺼내놓지 않았다.



[…어, 그냥, 아니에요.]

“뭔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자요!]



 쪽! 수상한 기미를 팍팍 풍기더니 마지막은 제법 깜찍한 입술소리였다. 허, 윤기는 황당하게 연결이 끊긴 전화를 바라보면서도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마냥 헤벌쭉 웃으면서 좋아하기에는 영 방금 전 뜸들인 목소리가 걸린단 말이지. 윤기는 방금 통화로 확신했다. 덜렁 문자 하나만 던져놓고 간 어떤 이유가 있다. 자신이 모르는.








 정국은 기쁜 사원모집성공소식을 호석에게 알렸다. 자다 일어나 받은 호석은 단박에 뭐! 하더니 팔짝팔짝 뛰며 같이 좋아했다. 야 대박이다, 대박. 나도 이제 퇴사한다. 너 한국 좀 빨리 와라. 지민씨도 소개해주고.



[그럼 이제 다 모였어?]

“네 이제 여섯 명이에요. 개발쪽도 구했고, 경영쪽도 다 구했고.”

[언제 다 얼굴 대면해? 다 같이 회사 출근하는 첫날 보는 거냐?]

“그 전에 한번 만나면 좋을 거 같은, 잠시만요. 전화가 와서. 다음에 또 걸게요.”

[오케이 좋았어, 나는 사표 쓰러간다.]



 신난 호석의 타자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정국은 부재중으로 남겨진 연락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는 번호다. 과제를 추가로 알려주는 동기라도 되는 건가 싶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들린 건.



[전정국 본인입니까?]



 정국은 다시금 번호를 확인했다. 아, 바로 탄식하며 미간을 구겼다. 그다지 호감 없는 형의 애인과 통화를 하고 싶지는 않다. 지민이 전화번호를 줬을 리는 없고. 뻔하다. 정국은 부하직원 인권보장과 더불어 개인정보 보호의식도 없는 형의 애인과 더더욱 통화를 하고 싶지 않아졌다. 바쁘신 어거스트 회장님께서 미천한 취업준비생한테는 무슨 볼일이람. 차단 버튼을 누르려다 그만 뒀다. 대체 무슨 일로 자신에게까지 전화한 건지 궁금하긴 하다.



“왜요? 무슨 볼일인데요?”



 그들의 통화에 가벼운 안부를 묻거나, 다른 화제를 섞는 친절한 대화의 기술은 없었다.



[박지민 한국 왜 갔는지 알아?]

“형 한국 갔어요!?”



 일주일전만 해도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같이 피자 잘랐는데? 지민이 연락도 없이 떠났다는 섭섭함이 밀려오길 잠깐, 정국은 의문을 제기했다. 지민의 귀국사진과 가족들의 주소까지 다 얻을 수 있으면서 꾸역꾸역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 이유는 뭘까. 윤기의 입장에서 귀찮을 터였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박지민이 몰래 알아보는 거 싫어해.]



 순간적으로 정국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없다고 확신했던 양심이 민윤기의 가슴 속에 조금은 자리잡고 있나 보다. 남의 개인정보는 하찮게 여기는 태도가 괘씸하긴 하지만. 말 하나하나 신경 써줄 정도로 세심하게 관심 갖는 거 보면. 정국은 짧은 칭찬을 던졌다.



“…당신 좀 괜찮은 쓰레기네요.”

[앞으로 박지민 휴가나 많이 내놔.]



 왜 박지민 휴가를 민윤기가 찾는지 모르겠다. 정국은 픽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 웃기시네. 자기는 언제 줬던 것처럼. 정정한다. 역시 민윤기는 아무리 봐도 양심이 없다.







***







 한 사람 한 사람 좁은 빌라로 들어올 때마다 지민은 출석 찍듯 현관까지 마중 나가 인사했다. 지민을 보고 쩡 굳었던 둘째와 셋째는 곧 모두 막내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반가워 어쩔 줄 모르고 날뛰며 지민을 붙잡고 숨이 졸릴 정도로 격한 포옹을 했다. 서로 비슷한 인상의 네 명이 얼싸안고 좋아하는 모습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박수를 치는 햄스터들 같았다. 형 어떻게 나랑 똑같아, 오빠 백 미터 밖에 있어도 내 오빠인지 알아보겠다. 박지민과 박지민 복사본들의 대화 속에 다행히도 지민이 예측한 어색함은 없었다.


 유독 그날이 생각난다. 처음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타던 날. 부모님은 제 등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지민아, 엄마아빠가 미안해. 꼭 다시 널 데려올게. 늘 대단하던 부모님의 눈물에 조금 당황했다. 엄마아빠 뚝! 지민이 괜찮으니까 데리러 와, 울지마! 마중 나온 고모할머니의 손을 잡고 비행장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해서 돌아보게 됐다. 그땐 몰랐지. 그 이별이 장차 20년이 넘는 이별이 될 줄은.


 지민은 머리가 크면 클수록 집안의 사정을 이해했다. 사업부도로 급작스럽게 떠안은 빚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월급 차압도 모자라 담보로 잡힌 집은 언제라도 사라질 위기였고, 신용불랑자까지 떨어진 위치로는 새로운 일자리도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아주 어린 둘째와 셋째도 다른 친척집에 맡겨졌으니, 지민은 첫째인 자신이 투정을 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박혀있었다.


 미국생활도 비슷했다. 사랑은 늘 충분했지만 강박관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거절 못하는 착하디착한 박지민의 탄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면 고모할머니가 슬퍼하실 거야. 걱정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잘해야 돼. 안 그래도 혼자 키워주시느라 힘든데. 그런 몇 가지 생각을 밑바탕으로.



“형 영어 잘해?”

“거기서는 살고 싶으면 해야 돼.”

“끝장난다. 나 형한테 영어과외 배워야겠다.”

“오빠는 한국어부터나 잘해, 좀.”



 한국어는 나도 좀 다시 배워야 돼. 지민이 웃으면서 나 한국어 그래도 많이 잘한다, 하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할 때, 다시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지민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중년을 넘어가는 나이의 남성과 여성이 서있었다. 사진으로만 만나본 그들은 지민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키는 더 작았고, 등은 조금 굽어있었으며, 주름이 많았다.


 동생들은 괜찮았는데. 그 얼굴을 본 순간 지민은 무언가가 울컥거리며 속 안에서 차올랐다. 미국에서 눈물을 흘리던 날 중 왜 자신이 보내진 거냐 탓했던 어린 과거조차 미안했다. 다녀오셨냐고 평범하게 인사하고 싶었는데. 씩씩하게 잘 다녀왔다고 가장 먼저 말하고 안아드리고 싶었는데. 열 살짜리 꼬맹이도 아니고 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저 건강하게 다녀왔어요, 보고 싶었어요. 존재하는 수많은 인사말을 아무거나 꺼내려고 목구멍을 쥐어짜던 도중.



“너무 잘 왔어, 내 새끼.”



 여성이 먼저 눈물을 흘리며 지민을 끌어안았다. 동시에 지민의 눈에서도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아니 당신 왜 울고 그래. 지민이까지 같이 울, 흑, 잖아. 지켜보던 남성이 어느덧 훌쩍거리며 같이 끌어안았다. 우리 아들 많이 보고 싶었다.










 서울의 좋은 점은 멀리까지 차를 끌고 나가지 않아도 주변에 편의점이 있다는 거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웃으며 말하고 후드티를 주워 입고 대충 나온 지민은 편의점 밖 파란색의 파라솔 플라스틱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주물주물 쭈쭈바를 주무르며 찰떡같은 입술에 꾹 붙이고 쪽쪽 빨았다. 입술에 닿았다 뗄 때마다 젤리처럼 통통한 입술이 입구에 달라붙었다가 반죽같이 쭉 늘어나며 떨어진다. 초등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초코맛 아이스크림과 안 어울리게 지민의 표정은 술자리에나 어울릴 법하게 심각했다. 흡사 솜사탕을 뜯어먹으며 삼강오륜을 공부하는 랫서팬더 같았다.


 걱정은 괜한 기우였다. 지민은 바쁘다며 미루고 미뤘던 한국 귀환을 왜 이제야 했나 후회했다.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데.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함은 그간의 불안을 다 녹여버릴 만큼 좋았다.


 지민은 미칠 노릇이었다. 왜 민윤기와 관련한 말만 하려면 접착제라도 붙인 듯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가. 이름만 꺼내려면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턱턱 막혔다. 민…달팽이! 민…박집! 민…물고기! 민…. 온갖 민으로 시작하는 사물과 동물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사태를 겪고 나서 지민은 좌절했다. 다행히 가족들이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지 관련된 화제가 단 한번도 꺼내진 적은 없지만.


 정말 솔직한데. 마음은 확실한데.



“…….”



 엄마 나 이 사람이 좋아요.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해요. 좋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사랑인줄도 모르고 내가 좋대요. 늘 솔직하게 내가 항상 좋대요. 그래서 내가 다치는 게 너무 싫대요. 차라리 자기가 괴로운 게 낫다고 해요. 너무너무 착하고 예뻐요. 그 사람을 춥고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아요. 힘들어하면 옆에서 끌어안아주고 싶어요.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매일같이 사랑하고 싶어요. 


 지민은 눈을 꽉 감았다. 넌 할 수 있어, 말할 수 있어…! 차분하게 차근차근 하는 거야. 이건 민윤기한테도 미안한 거잖아. 그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진 않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심호흡을 했다. 혼자만의 숙제라고 세뇌를 걸며 눈을 뜨려는데.



“너 아이스크림 흘리겠다.”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귓가로 푹 꽂혔다. 지민이 눈을 번쩍 떴다. 편의점에서 흘러나오는 전등에 의존해 보이는 얼굴. 지민은 이곳이 뉴욕인가 잠시 의심했다. 편의점 벽에 붙은 광고와 제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껍질도 전부 한국어였다. 편의점이 아이스크림에 마약을 넣어서 파는 게 아닌 이상 이건 현실이 확실했다.



“미, 미, 민윤기!?”

“오 참신하네. 예전에는 놀라도 미스터 윤, 미스터 윤 꼬박꼬박 챙겨 부르면서 놀라더니.”



 분명 오늘 오전에 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뉴욕이었는데? 놀라 벌떡 일어난 지민의 손에서 쭈쭈바가 툭 떨어졌다. 벌어진 입이 도통 다물리지 않는다. 윤기가 말한다. 바보 같은 표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여기는 병원 가까워? 눈 좀 넣어. 튀어나와.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비행기지 그럼 뭐야.”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걸 물어봤겠냐. 늘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잠시 잊고 있었다. 아 맞다. 세계 일주를 하루 만에 할 수 있는 위치에 앉은 사람인데. 지민은 레이첼과 진의 고생을 쉽게 예측하며 뒷말을 삼켰다. 떨어진 쭈쭈바를 후다닥 줍고 뛰어 온 지민이 윤기의 등을 떠밀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갑자기 오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럼 다시 가?”

“…내일 스케줄 있어요?”

“나 너 보고 싶어서 온 건데.”

“…….”

“이렇게 쫓겨나면 진짜 얼음동상 된다고.”



 제일 상처받은 심장부터 멎어서. 아 아파. 나름 봐달라고 과장되게 눈가를 찡그리면서 연기 아닌 연기를 보인다. 단 한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걸 알면, 레이첼과 진이 감격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을 터였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뉴욕에서 서울까지. 지민은 어이가 없어 입만 뻐끔거리다 결국 픽 눈을 접으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도 세상에서 한명 뿐이었다.



“형 연기 되게 못한다.”

“한국어 어색해서 그래. 몇 년 만에 쓰는 건데.”

“거짓말. 처음부터 잘만했으면서.”

“아 그건 섹스를 잘한 거지. 그때도 별로 못했어. 네가 정신없어서 착각한 거야.”

“여, 여기서 그런 말 대놓고 하면 잡혀가거든요!?”

“누가 날.”



 사람은 감당할 수 있는 일 이상의 감정을 겪으면 가장 친숙한 모국어를 쓴다고 한다. 지민이 처음 마주하는 쾌감과 통증에 도리질을 치며 저도 모르게 한국어를 내뱉었고, 윤기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지민에 맞춰 언어를 바꿨다. 그러니 저건 거짓말이다. 같이 급하게 정신없이 뒹굴던 와중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렇게 능숙하게 쓰면서. 따지고 싶었지만 지민은 달아오른 귓가로 윤기의 어깨를 파닥거리며 쳤다. 혹 누가 들었을까 주변을 황급히 두리번거리며.



“으이씨, 여기 공공장소거든요! 주택가!”

“여긴 방음수준이 고작 그 정도야? 유감이네.”



 윤기는 유들유들하게 맞받아쳤다. 그러더니 작정한 건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덧붙인다. 일단 뉴욕에 있는 집부터 빨리 합치는 게 좋겠어. 거기는 방음 좋아. 지민은 졌다는 듯 화제를 바꾸는 쪽을 선택했다.



“잘 호텔은 있어요?”

“그거 질문이야?”

“…질문 취소할게요.”

“그럼 내가 할게.”



 지민이 순하게 끄덕였다. 윤기는 능글맞게 짓고 있던 미소를 없애고 진지한 눈을 했다. 이 질문이 진짜 목적인 듯.



“나한테 말 못한 거 있어?”



 지민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쩡 굳어버렸다. 실컷 사랑한다고 다 해놓고 아직까지 가족들에겐 입 벙끗 못했다는 걸 알면. 진실을 말하는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윤기에게 존재를 부정한다는 의미로 들릴까 걱정됐다. 목구멍에 말이 걸려 잘 나오지 않는다. 그게요, 가족들한테 꼭 말할 건데요, 절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구요. 지민이 회초리를 만난 어린아이처럼 눈을 피했다. 곤란한 침묵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져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네 손 차갑다.”



 윤기가 지민의 손을 고쳐 잡았다. 아이스크림 그만 버려. 윤기는 지민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떼어내고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 방음 안 좋잖아. 다른 데로 가.







 차는 도심외각 빌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종류였다. 지민은 기묘한 죄책감으로 머뭇거리며 따라오면서도 차를 보고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나 했다. 진이랑 레이첼이 진짜 많이 고생 했겠구나…. 윤기와 나란히 뒷좌석에 앉은 지민은 부랴부랴 만들 변명을 생각했다. 글쎄 사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기억이 잘 안 나지 뭐예요. 한국! 그냥 오면 좋죠, 하하! 먼저 아무렇지 않은 척 작업을 개시하려는데, 윤기가 한발 먼저 빨랐다.



“손 줘봐.”

“손은 왜요?”

“만지게.”



 심각한 게 아닌가…? 지민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손을 가져가는 윤기를 방치했다. 윤기는 손가락 사이사이 엮어 깍지를 끼더니 짧은 평가를 했다.



“진짜 작네.”



 아니 지금 뭐하려고 온 거예요. 황당해진 지민이 나서려는데, 윤기가 먼저 담담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들어.”

“…….”

“열심히 너한테 잘 보이려고 아직도 노력하고 있긴 한데 쉽진 않아.”

“…….”

“집착도 계속 하고 있고, 니가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 다 신경 쓰이고. 떠난다고 하는 순간 둘이 아름답게 죽는 게 제일 나은 결말로 만들 수도 있어.”

“…너무 살벌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생각하지도 않는데 왜 자꾸 떠난다고 해요.”



 죽이느니 살리느니. 지민이 입술을 붕어처럼 오므리며 쭉 뺐다. 아 좀 더 들어봐. 윤기가 집중하라는 듯 손에 힘을 꽉 한 번 주고 풀었다.



“너한테 좋든 나쁘든 모든 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

“그러니까 떠난다는 거 빼곤 넌 나한테 무슨 짓이든 다 해도 된다는 거야.”


 

 윤기 손에 잡힌 하얀 손이 힘을 준다. 윤기는 아프다며 푸는 일 없이 같이 힘을 주어 맞잡았다.



“니가 정말 좋아.”



 한국까지 쫓아와서 한다는 말이 괜찮냐는 거다. 사랑한다고 정확하게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이 만큼이나 대단하게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지민은 시큰한 어떤 것이 속에서 팍 터졌다. 그 감정은 울컥 눈물로 올라오더니,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알아서 혼자 흘러내렸다. 이런 사람을 두고 어떻게 고민이나 하고 있던 거야. 뚜욱, 뚜욱 눈물이 맺혀 떨어지는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다. 윤기가 말했다.



“왜 울어. 괜찮다고 해주는 건데.”

“나도 안 울고 싶은데, 눈물이 자꾸, 아, 왜 나지?”

“내가 더 좋아졌나보지.”



 어떡하지. 민윤기는 농담인데 난 진짜로 그렇게 된 거 같은데. 더 좋아지고, 더 사랑하고, 더.


 지민은 윤기에게 붙잡힌 손을 꼬물꼬물 빼냈다. 민윤기가 너무 예뻐보여 참을 수가 없다. 뭐해, 하고 묻기도 전에 손은 윤기의 볼을 잡더니 입술을 꾹 붙여왔다. 윤기는 조금 멈칫하다가, 반대로 더 달려들어 혀를 섞었다. 많이 고민하고 있는 거 같아서 위로 좀 해주려고 했더니만. 제 발로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굴러 들어오는데 굳이 거절해야하는 이유는 없지. 간지러운 숨을 한참이나 공유하다가, 잠깐 떨어진 사이 윤기가 말했다. 



“이제 키스 잘하네.”

“그건 처음에 말했잖아요.”



 열기로 발그레하게 볼을 물들인 지민은 대담했다.



“일 빨리 배운다고….”



 아 맙소사. 윤기는 이성이 끊기는 기분이었다. 좁은 차 안에서 밀고 다시 입술을 겹치고 난리가 났다. 으응, 자연스럽게 등이 넘어가 지민의 뒤통수가 창문에 닿았다. 셔츠 아래로 단박에 윤기의 손이 내려와 끌러 내리며 자세 좀 바꾸려는 찰나, 좁은 공간을 어쩌지 못하고 지민의 허리가 꺾였다.



“악! 허리!”



 아파, 아파! 윤기는 미간을 찡그렸다. 못 버텨? 못 버텨요. 이건 진짜 못 한다. 여기는 안 돼요. 윤기가 아쉬움에 손은 빼지 못하고, 몸만 떼어냈다. 그리고는 얼굴만 찌푸리다 심각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캠핑카로 끌고 올게.”



 운 얼굴로도 웃음이 크게 터져 지민은 윤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생로랑 수트가 젖어가는 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야. 웃지마. 윤기는 대답하며 지민의 등을 손으로 토닥거려주었다. 지민이 윤기의 등을 두들겨주었던 때처럼. 들썩이는 지민의 어깨가 멈춘다. 고개를 든다. 둘은 빈틈없는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지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심어린 한 문장뿐이 없었다.


 내가 진짜진짜 좋아해요.











 든든한 지원군의 응원도 받고 지민은 마침내 자리를 마련했다. 거창하다는 표현까지는 할 수 없는, 고작 자기 전 안방으로 발걸음을 옮긴 게 전부지만. 지민은 어정쩡하게 부모님의 침대에 앉아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수분크림을 바르던 여성은 지민을 보고 반가운 안색으로 환영했다. 우리 아들, 왜. 엄마랑 잘까? 오늘 아빠 야근인데. 호호 웃으며 다정하게 반기는 그녀에게 지민은 어설프게 웃으며 잠깐 시간이 괜찮냐 물었다. 물론이지, 우리 지민이랑 같이 대화하려면 없는 시간도 만들지. 지민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뗐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응?”

“그러니까요.”



 그녀도 진지한 지민의 눈을 보고 경청의 준비를 했다. 잠깐 시선을 숙인 지민은 머지않아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와 눈을 곧게 마주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있어요.”



 말했다, 말해버렸어! 저지르니 이제 답변만 기다리면 된다. 잠깐의 침묵도 억겁같이 느껴진다. 지민이 침을 꼴깍 삼켰다.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이내 사르르 웃었다.



“난 또. 우리 아들이 불편하다고 하는 줄 알고.”

“…예?”

“그 이야기 언제 꺼내주나 많이 고민했단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화장대 옆에 놓인 폰을 흔들었다.



“아들 사진 잘 나왔던데?”

“보, 보셨어요!?”



 지민이 폰 화면에 뜬 파파라치 기사를 보고 기함했다. 언제 찍힌 건지 근처 마트를 가는 사진이다. 지민의 머릿속으로 그간의 기사들이 영화필름 돌 듯 회전하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남자정부라는 이상한 기사 타이틀부터 짧게 입맞춤하던 사진까지. 동공이 지진난 듯 흔들렸다. 지민이 버벅거리며 말했다.



“근데 왜, 왜 말 안 하셨어요…?”



 자신 같으면 보자마자 신문에 난 건 무슨 일이냐고 야단을 피웠을 텐데. 혼돈에 빠져 핑글핑글 방황하는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그녀는 다정하게 웃으며 지민이 앉은 옆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가볍게 푹 꺼졌다.



“네가 그렇게 고민하는데 쉽게 말을 꺼낼 수는 없잖니.”

“…….”

“엄마는 조금 부럽더라. 그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우리 아들한테 이렇게 사랑을 몽땅 받나 싶어서. 엄마가 못 준 역할을 그 사람이 가져간 거 같아서 질투도 약간 나고. 그래도 참 보기 좋아서 좋았어.”



 지민은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누구나 알고 있던 거다. 기기를 잘 못 다뤄도 꼭 어거스트 기사는 찾아보는 부모님이나, 꼬박꼬박 좋은 풍경 사진이나 괜찮은 소식이 있으면 전화를 거는 둘째나, 지민과 관련한 소식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수집하는 셋째나, 형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막내나. 알고도 친절히 기다렸을 뿐이다. 살짝 멍해진 얼굴이 귀여워 짧게 웃은 그녀는 다정하게 지민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지민아, 우리 아들.”

“…….”

“엄마는 늘 네 편이야.”

“…….”

“힘들면 불평해도 되고, 싫으면 싫다고 해. 부담스러우면 부담스럽다고 하고. 네가 뭘 해도 괜찮아.”



 이 대단한 사랑을 어떻게 의심했을까. 아무 대가없이 무조건적으로 퍼부어지는 사랑을 잊고 있었다. 긴장이 순식간에 풀려버린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응어리 진 어떤 것까지도 같이 매듭이 탁 풀렸다.



“널 사랑한단다.”



 그 말이 신호탄이 되어 지민은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공항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울던 그 여섯 살의 박지민처럼. 이렇게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꺽꺽거리며 우는 지민을 그녀는 꼬마아이 다루듯 끌어안았다. 지민보다 덩치가 작아진 그녀의 품은 여전히 넓고 따뜻했다.



“오늘은 진짜 엄마랑 자자.”



 우리 아가 320개월이라서 이렇게 우는 거지? 막대사탕이라도 물려줘야 하나. 장난스럽게 엉덩이를 토닥인다. 지민은 끄흡거리며 한참이나 그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냈다. 엄마 사랑해요. 보고 싶었어요.


 이제야 진짜 집에 왔다.










 지민은 가족 누구보다 일찍 문을 열고 나왔다. 윤기는 퉁퉁 붓다 못해 찌그러든 지민의 눈을 보고 한 마디 툭 뱉었다.



“네 눈 안 보여.”

“저두 알거든요.”



 지민도 아침 거울을 보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모습을 과연 민윤기에게 보여도 정이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 더 심하게 운 이유가 따로 있긴 하지만 지민은 괜히 억울해 틱틱거렸다. 어제 형이 울려놨잖아요. 윤기는 놀리지 말라며 밀어내는 지민을 붙잡고 흥미를 보이며 미소지었다. 그러더니 신기하다는 듯 꾹 말랑한 볼을 잡아당기고 놓는다.



비꼬는 거 아니고 귀엽다는 뜻이야.



 윤기가 연이어 말했다.



“미국은 언제와?”

“한 일주일쯤 더 있다 갈 거 같아요.”

“너무 길다고 생각 안 해?”

“글쎄요. 별로? 전화해요.”

“넌 너무 무신경해.”

“그거 형 입에서 나오면 진짜 이상한 말, 아 말 잘했다. 왜 뭐 심부름 시키면 정확한 이름을 안 알려줘요? 그거 얼마나 사람 엿 먹이는 건지 알긴 알아요?”

“내가? 언제?”

“이씨, 또 연기하네.”



 윤기는 능청을 떨었다. 연기 아니고 진심이야. 내가 그렇게 괴롭혔어? 지민은 콧잔등을 씰룩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한 대 치고 싶다. 그 기미를 알았는지 윤기가 나름 애교랍시고 은근히 지민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이제 나 곧 가잖아. 지민이 어휴, 하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능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 일에는 프로다. 지민은 주먹을 뻗는 대신 주머니에 넣어놓은 물건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거 받아요.”

“이게 뭔데.”



 하얀 봉투였다. 길고 네모난 봉투는 지민이 한번 내밀었던, 사직서가 담겨있던 봉투와 형태는 똑같았다.



“별건 아니고 퇴사기념 마지막 감상문이에요.”



 그냥 비행기 타고 오다가 심심해서 써봤어요. 지민은 봉투를 열려는 윤기의 손을 답삭 부여잡고 막았다.



“지금 안돼요!”

“왜?”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 꼭 뉴욕에 도착해서 스케줄 끝나면 읽어요. 알았죠?”



 막으니까 더 보고 싶다. 윤기는 지민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며 봉투의 윗부분을 깠다. 아 까지 말라니까요! 지민이 팩 뺏으며 뒤로 감춘다. 미간을 찡그린 윤기가 말했다.



“왜. 궁금해.”

“가서 읽겠다고 약속해요.”

“…아아 알겠어.”



 지민은 다짐의 다짐을 받고 윤기에게 봉투를 다시 내밀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딱히 마음에 드는 조건은 아니지만 윤기는 참았다. 비행준비는 끝났고, 사랑스러운 연인의 실물을 볼 수 있는 시간은 10분 이내로 남아있었다. 사실 지금도 늦장을 부리고 있는 중이라, 초조하게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깔려있었다.



“이제 빨리 가요.”



 지민이 툭툭 윤기의 어깨를 쳤다. 그러나 윤기는 발걸음을 떼긴커녕 그 자세 그대로 지민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아주 강력한 눈빛으로. 지민은 슬쩍 눈빛을 피했다. 저 눈빛이 나오면 다음 행위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윤기의 손을 한번 꽉 잡고 놓으며 말했다.



“비행기에서 술 마시지 말고 조심히 가요.”

“그런 거 말고.”

“음…가서 회의 잘 하구….”

“또.”

“일 한다고 많이 무리하지 말아요.”

“…어.”



 체념한 윤기가 등을 돌린 그때, 지민의 윤기의 손목을 붙잡아 다시 돌렸다. 쪽 입술이 달짝지근하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사랑해!”



 연이어 열두시 땡 친 신데렐라처럼 후다닥 도망간다. 참나…. 윤기는 황망하게 서서 멀어지는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참새도 아니고 쪽쪽거리고만 도망가. 쫑쫑 뛰어가는 폼이 참새랑 많이 닮긴 해도 그렇지. 그런데 어째 성에 안 차는 뽀뽀 하나 받았는데 실소가 픽픽 새는지 모르겠다. 저 멀리서부터 부랴부랴 다시 수행원들이 윤기에게 달려왔다.



“미스터 윤, 진짜 출발하셔야 합니다.”



 윤기는 떨어지기 싫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 벌써 니가 보고 싶다.







***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을 환영합니다.”



 매력적인 웃음을 머금고 연설을 하고 있는 윤기를 보며 레이첼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윤기가 이 스케줄마저 취소하면 그대로 짐을 싸서 어거스트를 나갈 예정이었다. 그래도 앞가림은 할 줄 안다고 딱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하긴 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홀 안에서 상황을 더 자세하게 지켜보고 있는 진과 눈으로 대화했다. 문제 없어요, 레이첼. 좋아요 맡길게요. 조금 쉴 생각으로 휴게실에서 등을 기댄 찰나, 요 근래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런데 그거 진짜예요?”



 넌 눈치도 없니? 좀 쉬자. 레이첼은 턱끝까지 차오는 말을 삼키고 답했다. 뭐가요. 지민의 후임으로 들어온 신입비서는 빅뉴스를 기대하는 어린양의 자세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우리 회장님 이야기요. 비서랑 아직까지도 사귀고 있어요? 요새는 통 말이 없어서.”

“글쎄요. 직접 물어보던가요.”



 그럼 잘리겠지만. 레이첼은 피곤한 눈으로 그녀가 이 화제를 피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어린양의 기대는 너무 높고 높아서, 장차 20분의 민윤기 애인 탐구시간이 펼쳐졌다.



“둘은 무슨 데이트를 할까요? 호화 요트에서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하루를 보내는 걸까요? 연인한테만 다정한 사람이라니, 너무 멋진 거 같아요. 아아 저런 남자와 연애하는 기분은 어떨까요? 사진 보니까 제 선임도 잘생겼던데. 어거스트를 조금 더 일찍 들어오지 못한 게 한이에요.”



 왜 안 자르지? 민윤기가 정말 너무 착해진 것일까? 슬슬 레이첼이 지민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홀의 문이 열렸다. 아 물론 그렇죠. 다음에 제가 식사를 한 번 사야겠습니다. 다른 정재계 주요인물들과 반들반들한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윤기는 유독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레이첼을 보자마자 손을 쑥 내밀었다. 아, 레이첼은 금세 윤기가 오자마자 제게 맡긴 하얀 봉투를 생각해냈다. 제 목숨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차는 밖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윤기는 레이첼의 말은 흘려들으며 하얀 봉투에 온 신경을 쏟았다. 비행기에 홀로 남겨진 순간부터, 오직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


 이 하얀 종이가 뭐라고 비행기에서부터 꽤나 고민했다. 진심으로 살 집을 고를 때보다 더. 성격같아서는 백 번도 더 열어버렸을 종이를 지민의 말을 지키기 위해 꾸역꾸역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박지민이 씨씨티비를 설치한 것도 아니고, 그 조금 어긴다고 지민이 크게 실망하진 않을 테지만, 어쩐지 꼭 그 약속을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윤기는 다소 조급한 손놀림으로 하얀 봉투를 열어젖혔다. 단정하게 접힌 종이가 튀어나왔다. 꾹꾹 눌러쓴 깔끔한 글씨체는, 글씨체조차 지민을 쏙 빼닮아있었다.






아스팔트 정글

제작년도: 미개봉

감독: 브릭 베넷

특이사항: 재촬영

줄거리: 연기가 꿈인 로딘슨 메이안(뷔)는 오디션에 수없이 많이 낙방하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날 차로 래리 웰터(뷔)를 치게 된다. 남자의 얼굴은 놀랍게도 로딘슨과 똑같았으나 사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뉴욕의 소문난 부자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로딘슨이 부유한 래리의 삶을 연기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뷔의 최신작품! 이 하나만으로도 극찬할 이유가 생긴다. 뷔의 연기는 늘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뷔의 작품을 보면 모두 감탄하지만 특히 이번 아스팔트 정글은 감탄할 이유가 많다. 왜냐하면 1인 2역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인물에 따라 휙휙 바뀌는 표정은 현장에서도 정말 많이 감탄했다. 음…로렌과 뷔의 조합도 정말 완벽하지만 재촬영이 확정되어있으니 어떤 말로 설명은 못하겠어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 계속 할래요.


마지막 감상문이라고 하니까 조금 이상한 기분인 거 같아요. 지금은 밖에 구름이 엄청 많아요. 여기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에요. 사실 조금 걱정돼요. 엄청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이거든요. 분명 만나면 행복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이상한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문자 한통만 남겨놓고 가서 미안해요. 그래도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엔 내가 가족들한테 형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아 민망하다….


예전에 우리 언제 처음 반했냐고 이야기를 했었잖아요. 다시 한 번 생각해봤는데 나는 정말 언제인지 잘 모르겠어요. 관심은 많았는데…아니 이게 꼭 좋아한다는 건 아니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외로워보여서 같이 있어주고 싶고 막…음 설명 못하겠다. 그냥 형 방에 있는 가족사진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또 좋아한 건 나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 같아요. 언제부터 왜 이렇게 많이 빠졌을까요. 참 신기해요, 그쵸?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에요.


아 그런데 아스팔트 정글 혹시 내가 생각한 게 맞아요? 로딘슨이 형 입장인 거? 형은 대역 같은 거 아니에요. 원래 민윤기는 아무것도 가진 거 없고 볼품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그러면 진짜 나 또 화난다. 아스팔트 정글 개봉하면 같이 보러가요. 뷔 나오는 영화는 열 번씩 봤으니까 보기 싫어도 열 번 같이 봐줘야 돼요.


언제부터 형이랑 같이 있는 미래를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하긴 한데 모든 시간이 행복하고 예쁠 거 같아요. 나는 진짜 형을 형 생각보다 많이 사랑해요. 어떻게 형한테 이 마음을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고민을 열심히 해봤는데 그냥 앞으로 많이많이 말해주려구요. 대단하게 말하지는 못해도 매일매일 자주 말하면 조금은 형이 느끼지 않을까요? 아닌가? 모르겠으니까 앞으로 들어보면서 판단해 봐요. 그리고 나도 많이 듣고 싶으니까 많이많이 사랑한다고 해줘요.


아 마무리를 뭐라고 해야 될지 잘 모르겠네…음 그냥 이만 줄일게요.

늘 보고 싶어요. 사랑할게요.

PS. 비행기 절대 바로 돌려서 오지마세요.









 레이첼은 궁금했다. 무슨 내용이 담겨있길래 저런 감격 어린 표정을 짓는 걸까. 흡사 구원이라도 받은 양 하얀 얼굴 곳곳 벅찬 감정이 담겨있었다. 다음 스케줄이 예정되어있지만, 그녀는 눈치 있게 윤기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종이를 붙들고 있던 윤기가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따뜻하게 물들었던 방금 전 표정과 달리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는 꽤 평이했다.



“비행기 띄워. 한국으로.”



 신입비서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방금 도착하셨는데요?”

“두 번씩 말해야만 알아듣는 병이라도 있나? 아니면 못 띄워? 네가 아시아까지 구명보트로 노 저어서 가고 싶은 거 아니면 어떻게든 띄워.”



 주, 준비하겠습니다. 신입비서가 울며 뛰어간다. 상황을 바라보던 레이첼이 짙은 한숨을 쉬고 오늘은 야근이라는 말을 남기기 위해 진을 찾아 나섰다.


 윤기는 차에 탑승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운전기사에게 비행장을 언급하고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렸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살랑이며 윤기의 검은 앞머리를 훑었다. 뾰족한 어거스트 타워에 꽂힌 태양이 환하게 빛났다. 빌딩숲으로 가득한 이곳의 공기가 결코 좋을 리 없는데도 그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 뱉었다. 어떻게 이 마음을 사랑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지민이 선물한, 알싸하게 가슴팍 안에서 맴도는 간지러운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평생을 겪어도 질릴 수 없는 감정.


 다시 한 번 정글같이 험난한 나의 세상이 비에 젖고 눈에 파묻혀도 괜찮다. 비에 젖은 땅은 단단하게 굳을 것이며, 눈은 녹아 흩어질 것이다. 이제 무섭지 않다. 눈비를 피하게 해줄, 서로를 감싸줄 따뜻한 공간이 생겼다. 나는 너를. 너는 또 다시 나를. 그렇게 우리가.


 영원히 외롭지 않을 우리의 성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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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정글 완결입니다!


소장본 완결을 쓸 때도 심장이 울렁거리고 참 이상했는데 웹으로 완결을 올리는 순간도 심장이 울렁거리고 이상하네요.

아스팔트 정글은 제게 참 특별한 글이에요. 아스팔트 정글을 쓰는 동안 느낀 감정들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