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Sam smith - Make It To Me>
맨해튼 펜트하우스는 썰렁했다. 온기가 일절 느껴지지 않는 그곳은 잘 꾸며진 모델하우스 같았다. 하우스저택 시절 지민이 사다놓은 액자들이 벽에 걸려있었으며, 바닥과 가구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지민이 가진 일말의 기대를 부시듯 펜트하우스의 모든 조명이 꺼져있었다. 그럼에도 지민은 어딘가에 윤기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념 하에 쥐 잡듯이 펜트하우스를 활보했다. 이렇게 넓으니까 사람 한 명 안 보일 수도 있는 거잖아. 미스터 윤, 여기 있어요? 아니면 여기 있나? 침실과 욕실, 서재, 심지어 개인영사관까지 모두 뒤진 지민은 헥헥거리며 카우치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진짜 민윤기가 없다.
“…….”
지민은 황당함에서 발전된 2단계의 감정변화를 느꼈다. 의구심. 진과 전화할 때는 급작스러운 통보에 얼이 빠져 눈치 못 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차분하게 상황을 늘어놓으면 알 수 있다. 보고 싶어서 왔다고, 목소리만 들어도 좋다고 고백할 때는 언제고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연락을 끊고 부서까지 옮긴다? 고양이가 봐도 수상하다고 의심할 상황이다. 마지막 헤어질 때도 어딘가 불안하긴 했지.
탐정처럼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뜬 지민은 고민을 이어나갔다. 질렸다면 그는 직구로 말했을 거다. 이제 니가 싫어. 이딴 유치한 짓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레이첼이나 진을 시켜 처분 통보, 그러니까 부서이동을 명령하는 짓은 안할 거다. 그간의 정이 돈독하게 쌓인 상사부하직원의 관계로써 주는 마지막 특별한 혜택이다, 하고 태평하게 정의하기에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상사부하직원 사이에서 너무 멀리 떠내려 왔다.
그래. 다 정리하면 이 상황은 민윤기가 자신을 억지로 밀어내려는 것만 같은.
지민은 확신했다.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그런데 이렇게 민윤기 입장을 일방적으로 결정만 하면 뭐하냐고. 정확히 무슨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당장 민윤기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지민은 어쩐지 초조해지는 기분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부서이동은 그렇다 치고 기자회견은 멀쩡한 얼굴로 나오는 걸까? 기자회견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는 그런 멍청한 소리는 아니겠지.
설마. 만약 진짜 그거라면…. 지민이 시몬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트레일러에서 훔친 사진을 떠올린 순간, 지이잉 초인종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억! 지민은 소스라치게 놀라 심장을 부여잡았다.
“뭐, 뭐야….”
새로 옮긴 이 곳은 언론에도 아직 퍼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어느 누구도 집주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는 누르지 않을 거다. FBI인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며 지민은 침을 꿀꺽 삼키고 인터폰을 확인했다. 작은 화면 안에 가까이 붙은 얼굴은.
"안에 있는 거 다 알거든? 빨리 열어어."
뷔였다. 지민이 입을 떡 벌렸다. 뷔가 여기는 대체 왜? 뷔가 중얼거린다. 뭐야, 진짜 없나. 머리를 긁적거리는 뷔를 보면서 지민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거봐! 있었지! 그게 대체 무슨 말….”
뛰어 들어온 뷔와 지민이 마주쳤다. 응? 뷔의 눈빛이 당황으로 흔들린다. 뷔와 지민은 서로를 마주보며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집주인 없는 응접실에 나란히 두 사람이 앉았다. 손님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뭐 마실 거…아 제가 여기 집주인은 아니라 못 드리겠네요.”
“응 괜찮아. 어차피 민윤기가 있었어도 아무것도 안 줬을 거야.”
음료는커녕 아예 출입 자체를 못했겠지. 뷔는 고민했다. 박지민이 왜 여기 있는 걸까? 지민 역시 마찬가지로 고민하고 있었다. 뷔가 여기는 왜 찾아온 걸까? 아스팔트 정글에 출연한 배우이니만큼 몸을 사리고 있어야 맞다. 지민이 먼저 물었다.
“뷔 뭔가 알고 있는 거죠?”
“아니이?”
티 난다. 너무 티 난다. 거짓말이다.
“…….”
“…….”
뷔의 스케줄은 이랬다. 그는 끊어놓은 유럽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윤기의 기자회견 소식을 들었다. 뭐라고? 어안이 벙벙해 멍하니 있는 사이 시간도 제대로 안 보냐는 매니저에게 이끌려 비행기를 탔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이탈리아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에 착륙한 뒤였다. 엔딩장면만 바꾸면 내가 할 일은 끝난다더니! 케일론의 뻔뻔한 연기에 분노로 머리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공항 땅을 밟자마자 미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거스트 타워로 쳐들어갔고, 거기서 동물의 피로 범벅이 된 지민의 사진을 발견했다. 뷔는 조용히 사라진 윤기의 변덕을 이해했다. 아 너 인질 잡혔구나.
“뷔, 설명해주세요.”
“…….”
“제발요.”
지민이 간절하게 뷔의 옷자락을 잡아왔다. 뷔는 머리를 거칠게 털고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설픈 거짓말이나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도움을 원하는 친구를 앞에 두고 내박치는 것도 싫고. 이대로 혼자 다 떠안으려는 민윤기도 마음에 안 들고. 뷔가 말했다.
“그럼 네가 선택해.”
“…어떤 걸요?”
“하나는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
“다른 거는 지금 그대로, 가만히 있는 거야.”
“…….”
“어떻게 할래?”
답이 필요한 질문인가? 민윤기를 찾기 위해서라면 지민은 가시밭길쯤 백 번도 더 지나갈 수 있었다. 가시밭길뿐이랴. 눈 덮인 설산도 늪지대도 헤쳐 나갈 수 있다. 애초 라스베가스 호텔에서 이미 한번 말했지 않은가. 지켜주겠다고. 지민은 눈을 두어 차례 깜빡거리고는 망설임 없이 골랐다.
“이제부터 제가 뭐하면 돼요?”
“…역시 하나마나였지? 질문?”
“네.”
너네 진짜 서로 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서로 저만큼이나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뷔가 말했다.
“내가 준 카메라, 거기 파일 쓰레기통 뒤져봐.”
네가 한 거면 민윤기도 할 말 없겠지 뭐.
***
케일론이 뭐? 성폭행? 성희롱? 퍽이나! 이 기사나 보고 말하게! 편집장이 명패를 시몬이 선 뒷문을 향해 집어던졌다. 쾅, 화려하게 박살이 난 명패는 시몬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자네가 그 기사 조사한지 벌써 몇 년인지 알긴 하나? 기껏 믿어줬더니! 지난 번 자네가 쓴 케일론의 두 얼굴 추측성 기사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신뢰성을 잃어먹었는지 알아? 자네 해고일세!
편집장으로부터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은 시몬은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책상을 정리했다. 이제 뭐 해먹고 사나…. 펜대가 결국 이렇게 꺾일 줄은 몰랐다. 타임지에서 어거스트 광고가 끊겼다는 이유로 잘렸을 땐 이렇게까지 막막하지 않았다. 시몬은 뉴스 화면을 꽉 채운 케일론의 얼굴을 응시했다.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앵커의 목소리와 골든 글로브에서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케일론의 장면이 매치되어 나온다. 하긴 자신이 봐도 그의 천사 같은 외모와 무한정한 선행을 보면 헷갈리는데. 10년 전 걸려온 고발전화 한 통을 되새기지 않는다면 속아넘어갔을 것이다.
도와주세요. 제보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저는 켈링턴 아크스쿨을 다녀요. 선생님이 저를 강간하려고 했어요. 간신히 도망쳤는데…그 선생님이 누구냐면….
전화는 그렇게 뚝 끊겼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제 이름이 기사에 실리나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더 이 문제에 엮여있고 싶지 않아요. 시몬은 후회했다. 그때 더 사건을 물고 늘어졌어야 하는 건데. 익명의 목소리로 온 전화는 그 뒤로 다시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한 달 즈음 뒤 자살사건 속보가 뉴스를 뒤덮었다.
거의 10년을 쫓아왔는데. 허망함과 억울함이 그의 안에서 섞였다. 그래도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 원…. 이만 놓아주어야 할 때인가 보다. 혹 다시 시작한다 해도 상당한 체력이 필요할 거 같다. 시몬이 체념하며 짐이 담긴 박스를 들어올렸다.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
[시몬, 중요한 소식이 있어요.]
시몬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친숙하지는 않지만, 분명 어디서 한 번 들어본 듯한. 아 자신이 집요하게 쫓아다녔던 비서다. 조금 놀랐다. 기자회견을 개최한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어거스트 쪽에선 이미 모든 이야기가 끝나있으리라. 지민? 이렇게 전화를 받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어거스트라면 아쉽지만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사기꾼에게 모두 속아 넘어갔으니…하하 편집장한테도 까여서 지금 짐 싸고 있습니다.”
[아뇨, 다시 짐 풀어요.]
“예?”
[나한테 증거가 있어요.]
꿈에서 천사가 전화를 걸었나보다. 시몬이 버벅거리며 되물었다. 뭐, 뭐라고요?
[자세한 설명은 만나서 해줄게요. 지금 좀, 급하니까 빨리 와요.]
시몬은 던지듯 박스를 내려놓고 지민이 언급한 장소를 받아 적었다. 마지막으로 지민이 덧붙였다.
[승진할 준비해요.]
***
지민은 시몬과 헤어지자마자 택시기사를 재촉했다. 기사님! 제가 진짜 급한데 좀만 더 빨리 가주시면 안 될까요? 저쪽, 저기 신호 어기셔도 벌금 제가 대신 낼게요! 범법 발언까지 들먹이는 지민을 기사는 별 희한한 사람 보겠다는 듯 쳐다보면서도 속도를 올렸다. 지민은 집히는 지폐를 아무렇게나 내밀고 기자회견이 예정된 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넓은 홀이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단언컨대 윤기의 취임식과 비슷한 수준으로 몰려들었다. 중요한 언론매체는 물론이요, 영국방송, 심지어는 아시아에서 유명한 매체까지 찾아와있었다. 번개같은 플래쉬를 터뜨리는 그들은 거침없이 물어뜯는 피라냐떼와 비슷했다. 그러나 이번은 예외였다. 방송사마다 어떤 질문을 던질까 메모를 적는 대신 서로 심각한 대화가 오갔다. 회장 전체가 웅성거렸다.
“뉴욕 글로브? 어디야, 여긴. 이게 진짜야? 케일론 베닌이라고? 영상 조작 아냐?”
“케일론 위치소재 병원에서 확인돼? 그쪽으로 일단 사람 하나 보내.”
“당장 기자회견은 어떻게 되는 거…아!”
“아, 죄송합니다!”
지민은 어깨를 부딪친 기자에게 사과하고 다시금 뛰었다. 무슨 기자회견 하나 하는데 이렇게 넓어? 운동장만한 홀을 뛰어다니며 지민은 새로운 감정을 하나 또 맞이했다. 황당함과 의구심에 이은 마지막 감정은 바로 분노였다. 처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화가 나 본 적이 있던가. 어찌나 화가 나는지 어거스트의 엘리베이터도 맨손으로 때려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윤기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모든 걸 혼자 결정하고 통보한다. 이제 와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자고 하면 누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쉽게 납득하는데. 화를 연료 삼아 지민은 뛰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윤기는 느리게 수트 재킷단추를 채웠다. 승부욕이 많은 편이 아니다. 무언가 중요하게 걸린 대결이 아니면 게임 자체의 승패여부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언젠가 박지민과 갔던 라스베가스의 도박판이 그랬다. 내가 과연 박지민을 믿어도 되는가, 새로운 관계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가는 건 괜찮은가, 생각하느라 게임에는 통 집중을 못했다. 마지막에 안 되겠는지 끼어드는 지민을 보고나서야 이길 생각이 조금이나마 들었다. 때문에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몰린 기자회견을 앞두고도 그는 다른 생각을 했다.
지민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주기로 마음먹었지만 윤기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 힘들었어 니가 좀 위로해줘. 니가 끌어안아주는 거 좋아. 어리광 같은 문자를 보내면 다정하게 답장을 해줄 거 같고. 전화로 보고 싶다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면 같이 보고 싶다고 꼭 대답해줄 거 같고. 아마 혼자 집에 틀어박혀 추운 공기와 마주하면 그땐 알겠지. 윤기는 기자회견이 끝나면 내릴 첫 번째 명령을 정했다. 아스피린과 수면유도제의 양을 늘려 산처럼 쌓아놓고 죽은 듯 자야겠다.
어서 빨리 결별기사가 떠야 네 일상이 평온해질 텐데. 유리 구두가 벗겨진 신데렐라. 21세기 로맨스의 결말. 이런 저질스러운 타이틀이 마지막이라는 게, 윤기는 끝까지 자신이 박지민에게 해악이란 자조 어린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기자회견의 주인공이 쏟아지는 셔터음과 플래쉬 사이로 나갈 준비를 마친 찰나, 레이첼이 다급히 대기실로 들어왔다. 펌프스힐을 신고도 얼마나 빨리 달려온 건지 언제나 차분하던 금발 머리카락이 약간 흐트러져있었다.
“미스터 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뭐야.”
“이 기사를.”
레이첼이 아이패드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윤기는 적극적이지 않은 자세로 화면을 스쳐보다, 내용을 확인한 직후 레이첼의 손에서 아이패드를 뺏어들었다. 드물게 윤기의 눈이 경악으로 점점 커졌다. 이름 한번 들어보지 못한 소형 신문사에서 발행된 기사. 레이첼이 말했다.
“어떤 컨택도 없었습니다만, 대체 어떤 경로로 영상을 얻어 기사를 작성한 건지.”
“…….”
“어쨌든 케일론 베닌이 터뜨린 사건은 자연스럽게 묻힐 듯싶습니다.”
“…….”
“현재 장내도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이첼이 물었다. 윤기는 오랜만에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기분이었다. 계획이 틀어지면, 대체 누가.
“미스터 윤.”
채근하는 레이첼의 목소리에 간신히 현실로 복귀했다. 어지럼증이 이는 머리를 굴려 비상사태에 대한 최소한의 대비를 해야만 했다.
“기자회견은 취소해. 변명은 알아서 만들고.”
“또 다른 점은.”
“다른 입장표명은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네.”
“차는?”
“뒤쪽으로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윤기는 대기실을 나와 뒷문을 통과해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잘 빠진 검은 차가 그 아래 대기하고 있었다. 경호원이 차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기 위해 윤기가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윤기는 마저 안으로 탑승하지 못했다. 저 멀리서부터 요란한 음성을 질러대며 어떤 사람이 돌진한 탓이었다. 레이첼이 음성이 들리는 쪽을 바라보고 경악으로 입을 떡 벌렸다.
“잠깐, 잠깐! 야!”
붉은 천을 보고 무식하게 달린 투우처럼 뛰어와 차체에 무릎을 쾅 박은 지민이 헉헉거렸다.
“하씨, 폐 터지겠네.”
레이첼의 안색이 단박에 하얗게 질렸다. 현재 자리에 있는 인원은 여섯이다. 반말을 지껄이며 달려온 당사자와 경호원 셋, 민윤기, 그리고 자신. 지민이 부른 저 편한 호칭을 가진 사람은 여섯 중 누구일까. 레이첼은 차라리 경호원 중 누군가가 지민과 막역한 사이이길 바랐다. 민윤기만 아니어야 한다, 어거스트 회장만 아니면 된다. 주문처럼 외운 레이첼이 지민이 뒷말을 삭제해주길 잠깐 신께 빌었으나, 아무래도 믿는 신이 없어서 효력은 없는 듯 했다. 지민은 숨을 크게 들썩거리며 왁 외쳤다.
“너! 민윤기! 왜 연락 안 해!”
신이시여…. 레이첼이 탄식했다. 경호원들은 서로만 쳐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갑자기 나타나 회장에게 반말을 까고 따지는 사람. 불쑥 나타난 미친 사람을 때려눕히고 회장을 보호하기에는 서로를 마주보는 미친 사람과 회장의 분위기가 묘했다. 윤기는 못 박힌 것처럼 선 자세 그대로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가다듬지도 못한 지민은 윤기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왜, 보고만 있냐! 잘랐는데, 헉, 나타나서 유령 같냐!?”
“지민 대체 여긴 어떻게…!”
마침내 기겁하며 레이첼이 나섰다. 그러나 바로 다음 레이첼의 말을 자르고 윤기가 말했다.
“레이첼.”
“…네.”
“따라오지마.”
“…….”
“타.”
저 말이 권유하는 대상은 단 한명 뿐이다. 뚫어져라 지민을 쳐다보던 윤기가 탑승했다. 지민 역시 지지않고 노려보고 차문을 당겨 열었다.
머지않아 차량은 두 명을 삼키고 매끄럽게 출발했다. 레이첼은 아려오는 이마를 짚었다. 둘이 갑자기 휑하니 사라지면 남은 일처리는 어떡하라고? 수많은 일거리를 떠올리며 그녀는 우선 황당하게 같이 버려진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등장한 사람과 요란을 떨며 등장한 사람은 급박했던 1분 전과 달리 침묵을 유지했다. 좌석과 운전석을 차단하는 막 탓에 기어변속 소리조차 없었다. 회사로 가지, 처음 윤기가 말한 순간을 빼고는 서로를 바라보는 숨 막히는 시선만 존재했다. 씩씩거리며 찾아왔던 지민은 차차 다듬어지는 숨소리만큼 이성이 깨끗하게 돌아왔다. 하얀 얼굴에 자리한 이목구비를 발견한 순간 멱살을 잡아야겠다는 마음 대신 다른 마음도 조금 비집고 올라왔다. 저대로 기자회견 올라가면 동정표 진짜 많이 받았겠네. 푹 꺼진 두 눈은 퀭했고 안색은 파리했다. 윤기의 목울대가 꿀렁 울렸다. 천천히 입술이 열린다.
“니가 어떻게 여기 있어.”
“그쪽 보려고요.”
지민은 뚱하니 대답했다. 그 귀한 얼굴 실물로 만나려니까 너무 힘드네요, 빈정거리고 싶은 뒷말은 참을성을 발휘해 우겨넣었다. 윤기는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을 뿐 아무 말이 없다. 기싸움 같은 눈맞춤을 먼저 피한 건 윤기였다. 그는 시선을 돌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매정하게 연락까지 끊은 주제에 퍽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차 불러줄게. 내려서 타고 가. 집 앞에 내려줄 거야.”
집 앞에 내려? 지민은 다시금 차오르는 열로 머릿속이 뜨뜻해졌다. 민윤기의 나쁜 점은 바로 이거다. 착각하게 만드는 것. 사실 누구보다 제일 멀리 있으면서 겉으로는 가까이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이 연기에 속아서 마지막에도 허망하게 차를 떠나보냈고, 연락한다는 말도 믿고 꼬박꼬박 기다렸다. 이대로 또 속으면 어거스트 타워를 처들어가 시위까지 벌이지 않는 한 절대 다시 못 만나겠지. 지민이 코웃음을 쳤다.
“가만히 있을 거 같냐고 하더니. 허세 같은 건 왜 부려요? 덕분에 기자한테 제보도 해보고 경찰에 신고해서 영웅시민도 되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네가 한 거야?”
“그럼 누가 해요.”
윤기는 일순 계산하던 사고를 멈췄다. 어떤 방향으로 이 상황을 무탈하게 넘어가야 할지 머리를 굴려야 하는데, 나서서 너를 구한 게 나라고 말하는 지민의 눈을 마주보고 멍청히 바라보기만 했다. 일부러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어렵게 꼬아놓아도 길을 다 헤집고 나와서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지민이 말했다.
“왜 부서 바꿨어요?”
“…….”
“아니 뭐 그래. 내가 잘라 달라고는 했지. 그런데 연락 한 마디 없이 쌩 바꾸는 건 이상하잖아.”
윤기는 평소처럼 별 일 아닌 듯 능청스럽게 넘기는 연기도 하지 못했다. 그냥, 너 원래 가고 싶어 했잖아. 과부하에 걸린 전자제품마냥 버벅거리면서 어찌 할 생각이 안 난다. 입을 열었다간 솔직하게 다 쏟아낼 것만 같았다. 나 때문에 니가 힘들어지잖아. 내가 널 망칠까봐 무서워서 그랬어.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자기 기분 좋을 때만 와서 건드리는 곰인형?”
“…….”
“혼자 그렇게 다 정하고 통보하면 속이 편해? 휘둘리는 거 보면 재밌어?”
지민은 윤기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만히 눈은 마주보면서 돌아오는 답은 없다. 끝까지 말을 안할 생각인가 보다. 결국 연락이 안 된 짧은 날들 동안 쌓인 감정이 지민의 안에서 폭발했다.
“그럼!”
“…….”
“내가 이대로 가도 괜찮아요?”
“…….”
“진짜 가라고 하면 캘리포니아 갈 거예요. 가서 열심히 연구해서 인정도 받고 연봉도 엄청나게 많이 받을 만큼 승진할 거예요. 좋아하는 일 하면서 운전면허도 열심히 배울 거고, 야자수랑 셀카도 찍을 거고 골든게이트에 드라이브도 하러 갈 거고 맛있는 밥집도 많이 찾아다닐 거예요. 진짜 행복하게 계속 살다가 총 책임자 돼서 대형 프로젝트 맡을 때쯤에 이사갈라구요. 어거스트 일렉트릭에서 그만큼 일한 경력 들고 한국 가면 아무데서나 다 환영하면서 오라고 할 테니까.”
“…….”
“다른 계획도 말해줄까요? 휴가 때면 첫휴가로는 정국이랑 못 갔던 라스베가스 여행 다시 갈 거예요. 기념품도 많이 살 거고 헬기 타고 보는 그랜드 캐니언이 그렇게 예쁘대요. 가서 롤러코스터도 타볼거구요. 룰렛도 돌려볼래요. 그렇게 여행 끝나고 다녀오면 다시 일 열심히 하고 또 휴가 받으면 그땐 한국 가보려고요. 경복궁이랑 창덕궁이 엄청 좋대요. 한복 입고 가서 사진 찍을 거예요.”
“…….”
“그리고 지금 가면 그쪽 싹 깔끔하게 잊을 거예요. 첫직장 다녔는데 변태 상사가 꼬시겠다고 난리 친 거로 기억하고 맨날맨날 욕할 거예요.”
“…….”
“가?”
제발이라는 말만 없을 뿐, 애걸이나 다름없다. 잡아달라고 대놓고 말했다. 또박또박 늘어놓은 지민은 윤기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마침내 오는 답은 또 침묵. 지민은 깔끔하게 손을 탁 털었다. 저랑 뜻이 맞지 않아 유감이네요. 면접 첫날 면접에서 윤기가 지민을 떨어뜨릴 때처럼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자세였다. 지민은 통보했다.
“잘 있어요. 미스터 윤.”
“…….”
“첫직장을 이렇게 그만두네요. 부서이동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어거스트의 번영을 빕니다.”
빠르게 쏘아낸 지민은 운전석과 연결되는 버튼을 눌렀다. 여기 차 세워주세요, 내리려고 하는데요.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지민은 버튼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윤기가 지민의 반대쪽 손목을 잡은 탓이었다.
지민이 끝까지도 무덤덤하다고 생각했던 윤기의 눈동자는 언제부터인지 감정으로 흠뻑 물들여져있었다. 약간의 절박함, 약간의 억울함. 그런 것들이 뒤숭숭하게 섞여있었다. 윤기가 말했다.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내가 어떻게….”
“…….”
“너한테 힘들어지자고 부탁해.”
한 단어마다 설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눈밭을 헤집고 찾아와 준 사람은 처음인데. 내 인생에서 찾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너인데. 그걸 어떻게 내가 괴롭혀. 내가 어떻게 망쳐. 윤기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져있었다. 시야에 안 보일 때는 몰라도 대놓고 보고 있는 상태에서 지민을 보내야 하는 건 신종고문이 따로 없었다. 원래도 변덕이 심해서 그런가. 알량한 다짐은 지민이 떠나간다고 내뱉은 한 마디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지민은 왈칵 속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진작 그렇게 말하면 됐지. 늘 확실하게 관계를 단단하게 잡는 건 지민의 몫이었다. 눈이 퍼붓던 그날도 등을 돌리려는 윤기를 붙잡아 세운 건 지민이었고, 애매모호한 관계의 정의를 계속 탐구한 것도 지민이었으며, 처음으로 외로워 보이는 윤기에게 코트를 덮어주며 다가온 것도 지민이었다.
아직도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떨리는 눈을 유지하고 있는 윤기를 향해 말했다.
“힘들어도 되니까 온 거야.”
“…….”
“힘들어도 같이 있고 싶어서 온 거야.”
“…….”
“나는 너 힘든 거 혼자 못 본단 말이야.”
아니었으면 진작 사표내고 도망갔겠지. 처음부터 구겨져 자던 민윤기한테 관심 가질 일도 없었다. 지민을 잡은 윤기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눈빛은 구원, 감격 그런 단어가 어울리게 일렁였다. 윤기는 연이어 손목에 힘을 주어 지민을 끌어당겼다.
헉, 그대로 기운 지민은 윤기의 허벅지를 위를 잡았다. 어깨에 윤기가 얼굴을 묻는다. 닿은 셔츠부분이 조금 축축하게 젖어간다고 느껴질 때쯤, 지민은 윤기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토닥거렸다.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린다. 윤기 스스로 못났다고 단정 지어놓은 내면이 지민의 앞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한없이 여리고 약했다.
“니가 진짜 갔으면 죽었을 거야.”
“…….”
“숨도 못 쉬었을 거야.”
“…….”
“…가지마.”
자기가 보내려고 했으면서. 안 가, 안 가. 지민은 대답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묻고 있길 잠시, 윤기가 고개를 뗀다. 붉어진 눈가.
“외롭고 힘들었어.”
쪽, 지민은 윤기가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을 쪼듯 붙였다 뗐다. 알고 있어. 그래서 너한테 관심이 갔어.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거 같은 사람이 춥고 외로워해서, 간절하게 원하는 하나가 애정뿐이라는 게 신기하기도 했어. 이제는 니가 외롭고 힘들지 않으면 좋겠어.
“너마저 잃을까 무서웠어.”
쪽. 나도 니가 떠날까봐 무서웠어. 내가 많이 줬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진짜 많이 받았나봐. 벌써 너를 닮았어. 너처럼 솔직하게 보고 싶다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만 기억나.
“니가 좋아.”
쪽.
“나랑 같이 계속 있어줘.”
윤기가 물 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태 지민이 마주한 윤기의 모습 중 가장 솔직했다. 지민의 추측은 맞았다. 아프고 힘들다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목소리를 통해 밖으로 외친 건 처음이었다. 고통을 호소해도 들어줄 사람은 없었으며, 호적이 바뀔 때마다 윤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력하게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수많은 이름들을 갈아치우며 그 자리에 서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그의 곁을 머물렀다가, 냉정하게 떠났다.
이 고백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밀려나온 최후의 구조신호다. 더는 혼자 남아있고 싶지 않다는 신호.
지민은 그 눈을 곧게 마주보았다. 울음기가 비치는 얼굴을 마주한 채,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착하다. 예뻐.”
이렇게 완전히 다 말하니까 얼마나 좋아. 앞으로도 이렇게 꼭꼭 말해야 돼. 지민은 윤기와 마주보면서 운전석 스피커와 연결된 버튼을 눌렀다.
“펜트하우스로 가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윤기가 지민의 입술을 물었다. 이번 입맞춤을 결코 얕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