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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44

by 토페 posted Sep 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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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Ricky Nelson - Lonesome Town>










“진짜 중요한 일이라니까요!?”

“그래 꼬마야 우리도 밥 먹는 거 진짜 중요해. 이 짓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 아니겠니. 조금만 기다려라.”

“그럼 먹으면서 하면 되잖아요.”



 경찰이 피곤한 듯 하아, 한숨을 쉬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찾아와서 난동을 피우는 소년은 성가시고 골치 아픈 존재였다. 안 그래도 마약밀거래현장을 적발했다는 전화의 내용을 다시 머릿속에 정리하기도 바빴다. 경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왜 뭐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시체라도 나오니?”

“…어떻게 아셨어요?”

“오 그럼 더 기다리렴. 피자 먹으면서 빨간 거 보면 헛구역질 나와.”



 저기 앉아서 기다려. 아니면 이런 장난 대신 가서 농구라도 하던지. 아니면 가줄래? 안 그래도 진짜 바쁘거든, 꼬마야. 파리 쫓듯 성의 없이 대답한 경찰은 피곤한 인상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레이스, 어제 들어온 사건 말인데. 현장 인원보충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뷔는 인상을 구기며 씩씩거렸다.



“누구는 일 없는 줄 알아요? 제 손길을 기다리는 샌드위치들이 얼마나 많은….”



 전화가 온다. 파트였다. 뷔는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뷔, 말 한마디 없이 어디간 거니? 앗 파트, 미안해요. 지금 바로 갈게요. 부랴부랴 떠나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면서 경찰은 혀를 내둘렀다. 경찰이 꿈인가. 이런 힘든 직업을 왜 가지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는 피자를 입에 쑤셔 넣으면서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네, 폴리스입니다.


 요즘 뉴욕은 정말 문제가 많다.










 별 소득 없이 샌드위치 가게로 돌아온 뷔는 쏟아지는 주문거리에 휩쓸렸다. 네, 닦아드릴게요. 주문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샌드위치를 만드는 기계인지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일했다. 결국 뷔는 붐비는 시간이 끝나자마자 테이블에 뻗어버리고 말았다. 좀비마냥 푹 쓰러진 뷔를 보고 파트는 호호 웃으며 휴식을 허가했다. 아녜요, 또 일 할래요. 말만 하고 몸은 안 움직인다. 그 사이 뷔의 바로 뒤 테이블로 누군가 착석했다.



“여기는 베이컨 샌드위치가 맛있어. 양파 샌드위치도 괜찮을걸.”



 양파 샌드위치는 시키지마. 내 눈이 매워.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뻗어있는 그때, 뷔의 귓가로 뒷좌석 테이블의 대화가 꽂혀 들어왔다.



“제임스가 대신 무전 받는다고 했잖아. 천천히 앉아서 먹고 가자.”

“나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사람이 내 뜻대로 안 죽냔 말이지. 자살을 어떻게 막아? 하 차라리 내가 죽고 싶다.”

“자살은 안 돼. 마약도 안 되고. 죽으려면 자연사 하자, 친구.”

“도움 안 되는 위로 진짜 고맙다.”



 경찰 한 명이 샌드위치를 입에 물며 말했다.



“그런데 그거, 진짜 자살이야? 아트스쿨? 배역 뺏겼다고 목 매달은 거?”



 뷔가 팍 고개를 처들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NYPD 마크가 새겨진 경찰 유니폼.



“그런 소식은 어디서 듣고 온 거야.”

“뉴욕경찰하면서 의심 한번 안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너도 마약사건만 하루에 세 개씩 맡아봐.”



 주방에서 카메라를 꺼내오는 시간은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무시당한 카메라를 보여준다면 신고가 될 테지만, 뷔는 어쩐지 영 석연찮은 느낌이 들어 다시금 피곤한 척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부검 결과 나왔지 않아? 타살 맞지?”

“…마약탐지견보다 네가 더 날카로운 거 같다.”

“뭐 어떻대?”



 경찰이 목소리 크기를 한 톤 낮추었다.



“강간 흔적도 보이고, 목이 졸린 흔적도 보여.”

“그럴 줄 알았지.”

”그리고 좀 의외인 게, 임신을 하고 있더라고.”

“…그건 내 예상보다 더 끔찍한데?”

“뭐…불행인지 다행인지 워낙 초기라 본인도 모르고 있었던 거 같긴 해.”

“부모는 알아?”

“내가 신기한 부분이 그쪽이야.”



 경찰이 기가 막힌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부검 결과를 듣자마자 표정이 싹 굳더라고. 정말 임신이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더니 그냥 자살이라고 기록해달래. 조사도 하지 말고 언론에도 발표하지 말라하고. 소문나고 싶지 않대.”

“허,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 죽었는데.”

“듣자니 아비가 어디 종교단체에서 신부 같은 역할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명예가 그렇게 중요한 모양이지. 사탄 같은 새끼들.”



 듣던 경찰이 불쌍하다며 혀를 쯧쯧 찼다. 가끔 보면 마약사건이 더 단순한 거 같다니까. 정보를 말하던 경찰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죽은 애만 불쌍한 줄 알아. 남은 애도 불쌍하지.”

“누구?”

“누구긴 누구야. 어거스트 아가씨지. 엘리 하트만. 학생들 증언 모아보니까 난리도 아니야.” 

“피해자 친구들? 왜.”

“이미 헛소문 쫙 났지. 어거스트에서 돈을 써서 배역을 뺏은 게 분명하다고…그 배역 문제로 피해자랑 어거스트 아가씨랑 다툼도 좀 있었던 거 같은데. 어쨌든 각자 말이 다 달라서 정확한 건 몰라도 하트만이 지금 학교에서 험한 취급받고 있는 건 분명하지.”

“불쌍하네….”

“그래서 지금 골치가 많이 아프, 아 무전 왔다.”

“뭐? 벌써? 나 아직 반절밖에 못 먹었는데?”

“난 반도 못 먹었어. 나와 빨리! 어떤 미친 새끼가 마약하고 건물에서 떨어진다고 쇼하고 있대.”



 경찰들이 분주하게 뛰어나간다. 뷔는 경찰들이 나가고 천천히 일어났다.



“뷔, 이것 좀 도와줄래?”

“…….”

“뷔?”



 넋을 빼고 있는 뷔를 파트가 의아하다는 듯 불렀다. 왜 그러니? 머지않아 정신을 차린 뷔가 아, 했다. 별일 아니에요. 뭐 도와드리면 돼요?










 뉴욕으로 온지 1년. 뷔는 켈링턴 아트스쿨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학비는 역시나 뷔의 상상을 초월했다. 하루아침 백만 개의 샌드위치를 판다면 모를까, 어마어마한 액수는 아예 돈을 빌려볼까, 하는 의욕까지도 상실하게 만들었다. 뉴욕은 생각보다 더 무서운 동네였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동으로 다시금 범죄율이 오르고 있다는 시카고보다 무서운 것 같았다.

 

 모처럼 집에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들아 집이 사라진단다. 혹시 돌아올 거면 이 주소로 오렴. 뷔는 종종 길거리에서 ‘철거반대’ 팻말을 들고 돌아다니던 동네 주민들을 기억해냈다. 주에서 실시하는 도시변경정책에 따라 집을 허물고 주택가로 다시 짓는다는 소식이 뒤따라왔다. 휴, 소년은 나이답지 않게 찌든 한숨을 내쉬며 샌드위치에 소스를 뿌렸다. 여기고 저기고 돈이 중요하긴 진짜 중요하구나. 나중에 샌드위치 가게를 열어볼까. 그러면 언젠가는 샌드위치 다큐멘터리에 샌드위치 마스터로 출연도 할 수 있겠고. 나는 예쁘고 잘생겼으니까 영화를 출연시켜주지 않을까?

 

 뷔는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음악을 틀었다. 길거리 샌드위치 가게보다는 고급 레스토랑에나 어울릴 재즈 선율이 흘렀다. 색소폰을 따라 뷔가 흥얼거리고 있는 사이, 파트가 틀어놓았던 티비로 뉴스속보가 흘러나왔다.

 


[…어거스트 로빈츠 하트만 회장의 딸 엘리 하트만양이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로빈츠 하트만 회장은 당분간 모든 스케줄을 정정….]


 

 머스타드 소스를 뿌리던 손이 느려진다. 데스크에 앉은 여성앵커는 일련의 사태를 조리있게 설명했다. 뷰잉은 비공식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며, 어린 나이에 사망한 엘리 하트만을 향한 추모의 행사가 SNS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침 주방 안쪽에서 나온 파트가 화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뷔를 눈치 채고 말했다.

 


“안타깝구나. 어린 나이에…어휴, 부모는 그 심정이 참….”

“…….”

“그런데 켈링턴 아트스쿨이면…지나가다가 한번쯤 얼굴을 봤을 수도 있겠구나. 예전엔 매일 그쪽으로 나가지 않니?

“…….”

“뷔? 얘야?”

“…아뇨, 보진 못했어요. 포스터로는 봤는데.”



 뷔는 샌드위치를 포장까지 완료해 자로 잰 듯 딱 반으로 잘랐다. 다음 소식입니다. 뉴스는 엘리 하트만과 관련한 몇 가지 소식을 알린 다음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뷔는 금발소녀의 사진이 사라질 때까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보통 우연이 쌓이고 쌓이면 운명이라 칭한다. 뷔는 엘리 하트만의 사망소식을 본 순간 어떤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왠지 아무도 원하지 않는, 모두가 묻히길 바라는 사실을 어거스트의 누군가에게는 알려야 할 것만 같은 느낌. 정의감이라는 과분한 호칭이 어울리는 무거운 마음가짐과 책임감은 아니고, 그냥 어째서인지 꼭 한번 어거스트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봐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었다. 복잡하게 정의하는 대신 뷔는 그것을 운명이라 칭했다.

 

 뷔는 밤낮없이 켈링턴 아트스쿨을 찾아가 얼쩡거렸다. 한 해에 학생 중 두 명이 사망하니 수군거리는 건 경찰들도 마찬가지라서, 도넛을 먹고 떠드는 대화에 조금 귀를 기울이니 초상권이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의 신상정보쯤이야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엘리 하트만이 묻힌 묘지, 이제야 한풀 꺾인 기자들의 취재열기 그런 것들이 해당했다. 걸려도 같은 학교 학생으로서 눈물을 훌쩍거렸더니 믿고 넘어갔다. 진짜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데 왜 아무도 영화를 찍자고 안 할까.


 대통령의 후손이 묻혀있다던 묘지는 한가로운 산책로 같았다. 로빈츠 하트만이 찍어 나르는 순간부터 고소장을 날린다는 발언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뉴욕이 가장 예쁜 날씨인 6월의 찬란한 빛이 묘비들 위로 떨어졌다. 엘리 하트만이 이쪽쯤이었다고 했는데.


 두리번거리며 찾은 순간, 뷔는 경호원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검은 재킷과, 검은 바지. 검은 구두를 신은 소년은 묘비를 응시하며 가만히 서있었다. 따사로운 6월의 햇빛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뷔는 소년이 꼭 햇빛으로 샤워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피부가 유달리 하얀 색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표정은 비를 맞고 있는 것만큼이나 눅눅했다. 소년의 머리 위로만 햇빛 대신 폭우가 쏟아지는 것만 같다.


 멀리서 구경하던 뷔를 소년이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뷔가 그늘 밖으로 나와 어색하게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넌 누구야.”

“나는 어…켈링턴 아트스쿨….”


 

 입학을 했는데, 안 했기도 하고…학교에서는 내가 좋다는데 나는 좀 그렇고…아니 나도 학교를 좋아하긴 하거든? 아무리 조합해도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내뱉은 뷔는 감흥 없는 소년의 표정을 확인했다. 미세한 움직임 하나 없는 게 딱히 열심히 듣는 거 같지는 않다. 뷔는 얼버무렸다. 그냥 거기랑 조금 관련이 있어. 그러다 가만 생각해보니 웃겼다. 왜 나만 심문 당하는 거지?



“넌 그럼 왜 여기 있는데?”

“가족이니까.”


 

 엘리 하트만은 백인인데…. 생각했으나 뷔는 곧 의심 없이 수긍했다.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묘비를 바라보는 소년의 애틋한 표정을 본다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뷔는 제멋대로 소년을 운명으로 낙점했다. 바로 지금이 말할 순간인 거다.



“그럼 하나 좀 놀랄 이야기해도 돼?”



 긍정인지 부정인지 말없이 본다.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 뷔가 말했다.



“지금 뉴스에 나오는 거, 그거 자살 아니야. 어떤 사람이 죽여서 나무에 목 매달아놓은 거야.”

“…….”

“그러니까, 어! 맞아! 살인! 그거야.”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봤으니까.”


 

 소년이 뷔의 얼굴을 빤히 응시한다. 햇빛이 두 사람의 공간을 잔잔히 채웠다. 너무 놀라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 추측한 뷔가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소년은 작은 반응도 없이 매몰차게 등을 돌린다. 허? 뷔는 어이가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분명 들었으면서. 얼굴은 샌드위치 빵 플랫 브래드처럼 생긴 주제에 단호하긴 엄청 단호했다.

 


“잠깐, 잠깐, 잠깐! 왜 그냥 가는 거야! 야! 무시하지 마!”

 


 계속 간다. 와 듣는 척도 안 해. 성가시다며 내쫓았어도 상대는 해준 경찰보다 더 무심했다. 에이씨, 뷔가 꽥 외쳤다.

 


“야! 증거도 있거든?”


 

 증거영상 있어! 뚝 발걸음을 멈춘다. 소년이 고개만 돌려 뷔를 바라보았다. 뷔는 간신히 얻은 기회를 날리지 않기 위해 힘을 다해 변호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내가 매일같이 그 학교에서 몰래 연기를…아니 아무튼! 증거 있어.”


 

 불법출입을 하다가 얼떨결에 찍었다, 하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들어도 큰 표정변화 없는 소년이 말했다.



“그걸 말해주는 이유가 뭔데.”

“…글쎄?”



 뷔는 딱히 마땅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순하게 그냥, 정말 그냥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거액의 돈을 요구할 마음도, 억울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마음도 없었다. 그러게. 왜 말해주지. 뷔는 선뜻 답하지 못하고 볼을 긁적거렸다.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만난 게 운명이니까, 하고 혼자 느낀 감정을 말한다면 평범한 눈에 경멸이 찰 거 같다.



“…….”

“…….”



 뷔를 빤히 바라보던 소년은 그 어떤 말도 없이 등을 돌렸다. 찰박거리는 햇빛을 발로 차며 걸어나갔다. 뷔는 애써 소년을 붙잡진 않았다. 쪼끄만 게 무시는 진짜 잘하네. 입맛을 쩝 다셨다. 아무래도 운명이라는 제 직감이 틀린 거 같다.

 

 

 







 뷔는 시카고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파트와 포옹을 하고 짐을 쌌다. 올 때는 옷가지와 리볼버가 짐의 전부였고, 갈 때도 마찬가지로 간소하게 옷가지와 카메라가 전부였다.

 


“잘 있어요, 파트! 그동안 고마웠어요.”

“다음에 오면 꼭 들려는 거 잊지 말고.”


 

 네, 좋아요. 또 일 도와드리러 올게요! 입으로는 7일 근무도 해드리겠다 말하면서도 뷔는 다른 생각을 했다. 뉴욕으로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화려해서 좋아했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던 도시인데. 과연 또 올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마 브로드웨이의 무대를 누비는 배우가 아닌 건물 밖 노숙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뷔는 샌드위치 가게를 나와 높은 빌딩숲을 올려다보았다. 그 속에는 뾰족한 어거스트 타워의 끝도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집 주소가 어디였더라. 뒤적거리며 고향의 주소를 적어놓은 종이를 꺼낸 순간, 뷔는 주머니에서 오는 진동을 느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뷔 학생 맞나요?]

“제가 뷔인데요.”

[켈링턴 아트스쿨입니다. 학생, 왜 오늘 학교를 오지 않았죠?]

“학교요?”

 


 뷔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는 학비를 낸 적이 없는데요?”

[학비는 납부가 완료되어있는데요.]

“제가요?”


 

 누가 냈지? 파트? 아니다. 방금 전까지 눈물의 포옹을 했으니 그럴 리는 없다. 아니면 엄마아빠인가? 집이 사라졌다고 했는데. 말도 안 된다. 명문학교가 전산상의 오류로 학비가 채워진 것도 아닐 터였다. 여러 가지 이유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집히는 게 없는 뷔는 오히려 되물었다. 누가 학비를 납부했죠? 전화를 건 안내원은 다소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거스트에서 장학금으로 추가지원 받으셨는데, 모르고 계셨나요?]

“진짜요!? 왜요? 왜지?"


 

 안내원은 침묵했다. 왜 해줬는지 아세요? 누가 해줬어요? 어거스트 누가요? 참다 못한 안내원이 큼, 헛기침을 하고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면 입학을 원하지 않는 건가요?]

“아니요! 저 거기 진짜 가고 싶었어요! 지금 갈게요! 아 그런데 지금 가면 지각이에요?”








***








 천사들의 잃어버린 도시, 로스앤젤레스 서쪽의 호화로운 저택단지는 늘 햇빛이 찬란했다. 다운타운의 산타모니카 해변은 빛이 아름다웠고, 뻥 뚫린 도로 위로 야자수가 푸른 이파리를 자랑했다. 시카고 빈민촌에 살던 소년은 하이틴 스타를 거쳐 비벌리힐즈의 저택을 당당히 차지한 헐리우드 스타로 성장했다. 옥상 썬베드에 누운 뷔는 글라스에 담긴 블루레모네이드의 얼음을 와작 씹었다.



[어거스트의 새로운 시도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윌리? 영화사업에 어거스트까지 뛰어든다면.]



 이달의 영화소식을 알려주는 티비쇼를 보며 계속 홀짝거렸다. 뷔에게 어거스트라는 이름은 가까우면서도 가깝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소년이 동양인 입양아라는 사실을 찾긴 했으나, 그 뒤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알아보려고 노력은 했다. 스카이 가든의 주인공으로 발탁되기 전까지 아무리 많은 C를 성적표에 받아와도 장학금은 받았으니까. 그러나 대뜸 하트만 가문의 대저택으로 처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편지를 보내는 것도 이상하니 마땅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뷔는 브라운관 속 민트색 머리의 새로운 어거스트 회장을 보며 처음 만난 감회를 되새겼다. 여전히 성질은 똑같네.



“뷔 여기 있어?”



 뷔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쳐다보며 선글라스를 내렸다. 매니저다. 어디 있으면 있다고 말 좀 해줘라. 얕게 타박하며 매니저는 대본을 내밀었다.



“이거 한 번 봐봐.”

“이게 뭔데.” 

“작업하자고 들어온 대본이지. 제목이 아스팔트 정글이야.”

“어디서 만드는 건데?”

“어거스트.”

 


 뷔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라고? 



“슈가 스튜디오라고 새로 뭐 하나 만든다고 하던데. 내가 볼 때 괜찮은데, 한 번 읽어….”

“한다고 해.”

“…내 안목을 그렇게 믿는 건 좋지만 한번은 읽어보고 결정하자.”

 


 뷔는 대본을 낚아채고 촤르르 훑었다. 매니저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뷔의 수락여부 기준은 획일됐다. 제작사가 얼마나 크든 워너브라더스든, 디즈니든, 이름 처음 듣는 소형제작사든 무조건적으로 스토리를 최우선 취급했다. 하고 싶은 역할이 아니면 연기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해. 이미 돈 받았어.”

“뭐!? 언제? 이제 하다하다 몰래 계약까지 하냐?”

“아니야. 계약서는 작성 안 했어.”

“뭔 말을 하는 거야…돈을 받았는데 계약을 안 했다는 게. 아무튼, 멋대로 계약한 건 아니라는 거지?”

 


 뷔, 응? 우리 진정한 마음의 대화를 해보자. 안 한 거지? 그치? 대답 좀 해줘 제발. 매니저가 불안해하든 말든 뷔는 대본을 착 닫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일단 뉴욕으로 갈래.









***









 여기 위에 약속이 잡혀있는데요.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꽁꽁 포장한 뷔는 안내데스크에 없는 거짓말을 지어냈다. 어거스트 회장은 생각보다 단기간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릴 땐 몰래 찾아간 묘지에서 우연히도 만나더니, 매니저가 알아본 결과 약속을 잡으려면 스케줄이 밀려있어서 일주일은 기다려야 한단다. 뭐? 난 뉴욕 도착했는데? 뷔는 황당해하며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묻는 매니저의 전화를 끊었다. 계획이란 게 있나. 무작정 어거스트 타워로 돌진했다. 그냥 바로 찾아가지 뭐. 이미 어거스트의 회장은 뷔에게 친구였다. 그것도 어릴 적 친구.



“그 전에 마스크 좀 벗어주시겠어요?”



 직원이 요구했다. 어거스트의 보안은 생각보다 철저했다. 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조금 드러냈다.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약속, 되어있어요.”



 인기의 좋은 점이 있다. 바로 얼굴이 명함이 된다는 거다. 특히나 그 인기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명함의 가치가 높다. 어머, 안내데스크의 직원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입을 손으로 가리더니 순순히 길을 터주었다. 저쪽 엘리베이터 이용해서 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생글생글 웃은 뷔는 다시 마스크를 올려 쓰고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이미 그 앞에는 사람 좋은 인상의 젊은 남자가 서있었다.



“레이첼 저 방금 로비 밟았는데…구찌랑, 차는 어떤 거요? 네? 아 안 알려주셨다구요…네…또 커피도요? 세 개면 되는 건가요? 네, 다녀올게요.”



 울면서 웃는 이상한 표정의 남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주문처럼 빠르게 한 문장을 되풀이했다. 지민아 사표는 안 돼, 사표는 안 돼. 입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사표야. 절대 그런 엄한 생각하지 말자. 사표는 안 돼. 뷔는 밖으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이내 관심을 껐다.


 거의 10년 만에 보는 얼굴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번 만난 사이에 잘 지냈냐는 것도 웃기고, 그때 장학금을 대준 게 너 맞냐고 물어보기는 좀 많이 늦은 거 같고. 어거스트는 잘 챙기고 있냐고도 좀 그렇지. 역시 포옹?


 띵, 엘리베이터는 뷔를 어거스트의 최상층으로 데려다 주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리니 의아한 시선이 달라붙는다. 금발의 여성이 말했다.



“…누구시죠?”

“약속 하려고 했는데 시간 오래 걸린다고 해서 그냥 바로 왔어요.”



 상쾌하게 말하며 뷔는 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정체를 확인한 여성은 안내데스크의 직원과 달리 감흥 없는 어조로 말했다. 안내데스크 직원을 바꿔야겠다 생각하며.



“사전에 약속이 되어있지 않는다면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다음에 약속을 잡고 다시 방문해주시겠어요? 뷔.”

“이번 한번만 봐주면 안….”

“뭔데 불러도 반응이 없어.”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섬세한 미간을 신경질적으로 모으고 나타난 남자의 머리카락은 민트색이었다. 윤기와 뷔의 시선이 마주친다. 윤기는 연신 짜증을 이어 부리는 대신 뷔를 빤히 마주 쳐다보았다. 뷔 또한 윤기를 가만 바라본다. 어거스트 회장과 헐리우드 배우의 관계성을 어떻게 추측하면 좋을까. 눈치 있게 둘을 세밀히 관찰하던 레이첼이 말했다.



“오후 스케줄은 어떻게 할까요?”

“…취소해.”



 그제야 뷔가 반갑게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손을 짤랑짤랑 흔들며 저었다.



“안녕.”







***







 뷔는 어거스트 회장의 집무실을 드나드는 일에 꽤나 익숙해졌다. 윤기가 아무리 까칠하게 반응해도 처음의 방식을 고수했다. 안녕! 나 왔다. 누가 아무나 막 들이라고 했지? 넌 약속을 잡는 매너라고는 몰라? 왜. 우리가 전화가 필요한 사이는 아니잖아. 헤헤 웃는 뷔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빛내던 윤기는 곧 포기했다. 임원들을 구워삶아먹는 이런 눈빛은 헐리우드 배우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뷔의 앞으로 대본을 툭 밀었다.



“감독한테 이걸로 바꿔서 진행하자고 해.”

“이게 뭔데?”

“원래 시나리오.”



 뷔는 책을 받아 종이를 팔랑팔랑 넘겼다. 몇 번이나 본 시나리오는 통째로 외워버렸다 자부할 수 있었다.



“똑같아 보이는데. 뭐가 달라?”

“엔딩.”



 뷔는 촤르르 마지막 페이지까지 빠르게 넘겼다. 처음 시나리오의 아스팔트 정글은 범행을 들킨 댄이 감옥에 갇히며 끝이 난다. 원래 시나리오의 엔딩은 한결 간결했다. 짧고 간략한 문장을 눈에 담은 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댄,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골똘히 윤기의 의도를 고민해본 뷔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언젠가 봤던 고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재연하던 다큐멘터리도 떠오른다.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동물을 쳐서 죽인 자는 배상을 하고, 사람을 쳐서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런 내레이션이 흐르며 돌로 사람을 찍어 죽이는 화면이 나왔었다. 사람의 내장을 뽑는 장면이 충격적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뷔가 말했다.



“엿 먹이려는 거야?”

“아.”



 애매하게 대답한 윤기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똑같이 목 매달아 죽이고 싶어서? 이유는 몰라도 여러 가지 추측하던 뷔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냥 이걸로 끝이야? 결국 영화 하나 더 찍고 끝나는 거잖아. 진짜로 죽는 거도 아니고.”

“끝이라고는 안 했는데.”

“그럼?”



 윤기가 말했다. 어조는 평범했다.



“사람들은 꽤 정의심이 많지.”

“…….”

“그리고 남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어. 큰 이벤트가 필요해. 모두가 주목할만한.”



 뷔는 공감했다. 본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뉴욕에 홀로 돌아다닌 소년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네가 볼 땐 어떤 쪽에 더 관심 가질 거 같아.”

“…….”

“그냥 유명한 배우가 살인했다고 공개됐을 때?”

“……..”

“아니면 자기가 죽인 방식대로 죽는 살인자의 영상이 같이 공개됐을 때?”



 단순한 영화의 한 장면은 그날의 진실이 합쳐진 순간 훌륭한 고발영상으로 변한다. 뷔는 눈치챘다. 어거스트에서 뜬금없이 영화사업을 확장한다고 선언한 이유를, 휴식 중이라 시나리오는 모두 받지 않는다는 자신을 부른 이유를, 기존 사업 자체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어거스트 회장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무른 이유를. 영화는 처음부터 그 짧은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거다. 10년이 넘도록 둘만 알고 있던 4분짜리 영상을 위한 2시간인 셈이다.



“그럼 그날 영상은 언제 풀어?”



 그러나 윤기는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는지 문서를 뒤척거렸다. 아니 왜 대답 잘하다가 또 자기 심심하면 무시해. 뷔가 졸랐다.



“그럼 대충 영화 개봉일이라고 생각한다. 어? 대답 안 해?”



 아 몰라. 꿍얼거린 뷔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으나 어차피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자신은 체스판에 올려진 말이었다. 감독한테 말하라는 거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