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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36

by 토페 posted Feb 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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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SOFI TUKKER - Hey Lion>









 요즘 어거스트에 희귀한 광경이 생겼다. 번뜩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낸 지민이 막 집무실에서 나온 진의 서류를 빼앗아들고 활짝 웃었다. 남의 일거리를 뺏는 일거리 사냥꾼이 최근 지민의 부업으로 급부상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을 줘야 할 인물이 일은 다른 곳에 처박아놓고 주질 않으니까.



“레이첼이랑 진은 쉬세요, 제가 다 할 테니까요!”

“그…괜찮겠어요? 무리하지 말아요.”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지민은 그날도 새벽 두시가 넘도록 진의 업무를 도맡아했다. 상류층 인간들의 사교 관계는 뭐 그렇게 복잡한지 작든 크든 경사가 생기면 선물과 편지를 보낸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면서 챙기긴 끔찍하게 잘 챙겼다. 박지민 인생에서 교육부 국장한테 편지 쓰는 게 싫어서 우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 하얀 창에 어거스트라는 단어를 쓴 때 노트북이 배터리 경고창을 깜빡거린다. 정신까지 같이 깜빡거리는 거 같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한 지민은 저도 모르게 한 글자씩 써내려갔다.


[사 직 서….]


 퇴직사유. 상사의 권력남용. 홀린 듯 여섯 줄을 적고서 지민은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엎어졌다. 연애사업이 활발해졌다. 반대로 인과응보인지 직장생활이 좀 어두워졌다. 좀, 아니 많이 심각해졌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윤기는 권력남용을 밥 먹듯 했다. 시킬 일도 없으면서 집무실로 부르는 건 물론이요, 버젓이 존재하는 장관과의 식사약속을 깨버리고 지민과 레스토랑을 갔다. 신데렐라도 왕궁에서 이렇게 살면 왕자가 아닌 백성들이 단두대에 목을 매달아 놓을 거다.


 특히나 지난번 점심식사는 가관이었다. 정신없이 끌려간 지민이 뒤늦게 이건 아니에요, 레이첼이 힘들 거예요 하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윤기가 정한 배려의 대상은 지민 하나였다. 너 아니면 신경 쓸 거 없는데. 까칠하게 치미는 말 대신 영리한 윤기는 지민이 약한 쪽을 공략했다. 다음부턴 안 이럴게. 이미 다섯 번째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되풀이했다. 개미도 안속을 거짓말에 속는 인간이 누가 있냐 하겠지만, 유일하게 껌뻑 속아 넘어가는 성인이 한명 있었다. 다음부터는 스케줄 취소하시면 안 돼요, 진짜 약속해요. 간이라도 빼줄 듯 약한 눈빛으로 호소하면 속수무책으로 홀려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거다.



"…하아.”



 법전처럼 정직한 인생을 살아온 지민은 누리는 모든 혜택이 싫었다. 정당히 받은 휴가는 좋지만 외근의 탈을 쓴 데이트로 날려먹는 시간은 싫다. 커피를 사는 일마저 진에게 떠넘기기 싫다. 혼자만 쏙 빠져 한 시간이나 점심을 먹는 것도 싫고, 퇴근시간에 윤기의 기사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것도 싫다. 몸 좀 편하자고 마음이 괴로울 순 없다. 스스로 세운 철칙은 무조건 지켜져야만 한다.


 벌떡 일어난 지민 모니터 앞에 앉아 전투적으로 타자를 써내려갔다.







***








 들어와. 지민은 준비한 서류를 정중하게 내밀었다. 지민이 들어온 순간 싸인을 휘갈기던 펜을 내려놓은 윤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왜 니가 해.”

“빨리 끝내면 좋잖아요.”



 윤기는 영 흥미 없는 얼굴로 서류를 훌렁훌렁 넘겨보았다. 지민은 뚱하니 생각했다. 한 글자도 안 읽는 건 너무하잖아. 건성으로 서류를 넘기며 윤기가 아니나 다를까 다른 화제로 말을 넘겼다.



“오후 스케줄 취소하고 같이 나가.”

“외근이에요?”

“아니.”

“…그러면요?”

“설명이 필요해?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이야.”

“…….”

“뭐 어떤 거든 의도는 건전하지 않지.”



 입을 틀어막기엔 안타깝게도 감시카메라가 돌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다. 입 아프게 반박하는 지난날은 지났다. 지민은 수트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려 하얀 봉투를 꺼냈다. 여기 이거. 윤기는 지민이 양손으로 내민 곱게 접힌 편지봉투를 받아 들었다.



“뭐야, 이건. 마음 가득 담은 편지?”



 가득 담긴 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모든 진심을 쏟아 타자를 쳤다. 지민은 별다른 설명 없이 끄덕거리며 종이를 가리켰다. 네 뭐…열어보세요. 찬찬한 손놀림으로 윤기가 종이를 꺼냈다. 굵은 효과를 넣고 폰트 사이즈 30이 넘어가는 제목이 드러났다. 은근히 기대로 들썩거리던 윤기의 입꼬리가 떨어진다.



“…편지치고는 너무 딱딱한데? 장난이라면 재미없어.”

“설마 사직서로 장난을 치겠어요.”

“오늘부로 그만둔다고?”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 거 잘하네. 아직도 떠나고 싶어서 발이 근질거려? 실망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낸 윤기는 곧 심드렁한 자세로 턱을 괸 채 사직서를 책상 위에 떨어뜨렸다. 팔랑거리는 종이가 다시 책상에 반듯하게 올라올 확률이 사표를 받아들여줄 윤기의 의지보다 강했을 터였다. 내가 아무리 너한테 잘 보이려고 갖은 노력은 다 하고 있지만 말이야.



“이건 못 들어줘.”

“왜요?”

“이유가 필요해? 안하고 싶으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지민이 먹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반박했다. 너무 불합리적이잖아요. 이런 건 말도 안 돼요. 계약서에 사표 거절은 명시되어있지 않거든요? 윤기가 흔쾌히 잘 가라며 받아줄 거란 기대는 없었지만 적어도 업무상 곤란하다는 대답정도는 해줄 줄 알았다. 윤기는 들은 척도 안했다.



“싫어.”

“싫은 이유를 알려주세요.”

“오, 이제 질문도 막하고 따지는 거야?”



 지민이 움찔했다. 맞먹으려는 생각은 없지만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다.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와서 왜 사표 수리 안 하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광경이 상사와 부하직원간의 도리는 벗어나긴 했지만, 사실상 먼저 그 도리를 깬 건 윤기였다.



“그, 그러면 일거리를 제대로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무슨 그런 목적으로 미스터 윤이랑 만나려는 것도 아니구….”



 말꼬리를 길게 늘린 지민은 갓 쪄낸 찐빵처럼 땡땡하게 입술이 불어있었다. 윤기는 제일 좋은 좌석에서 지민을 관람했다. 대본이라도 짜왔나. 하루에도 열 번씩 보고 싶은 얼굴을 제 손으로 떼어놓는 미친 짓은 꿈에서도 할 리가 없는데, 저런 말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움직였다. 윤기가 긴 한숨을 쉬었다.



“너 이제 내가 제일 만만하지?”

“설마요.”



 만만했으면 벌써 멱살 잡고 너 왜 이따위로 행동하냐고 물었을 거다. 윤기가 느리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니가 이겼어.



“앞으로 현장보고 해.”

“정말요!?”

“그만 나가. 마음 바뀌기 전에.”



 인상이 확 펴진 지민이 활짝 웃으며 끄덕거렸다. 감사합니다! 먹이 가득 찾은 펭귄처럼 쫑쫑거리며 나간다. 헤죽 웃는 모습이 나쁘진 않지만 묘하게 아쉽다. 윤기가 입맛을 쩝 다신 찰나, 빠져나가던 지민이 문 앞에서 멈칫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고는 윤기와 눈을 마주치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어, 미스터 윤.



“뭐야.”

“그…주말에 시간되시면요.”

“…….”

“데이트 하나 하실래요?”



 이처럼 어설픈 고백이 또 있을까. 몇 번이나 입술을 겹친 사이라 해도 지민은 쑥스러워 미칠 거 같았다. 민망하고 부끄럽다. 발아래서부터 머리끝까지 털이 쭈뼛 선다. 그러면서도 도망가는 일 없이 윤기의 답을 기다렸다. 민윤기는 이런 기분을 어떻게 버틴 거지. 얼굴이 활활 타버릴 거 같은 지민을 빤히 바라보던 윤기가 책상을 톡톡 쳤다.



“그거 대답 모르고 물은 거 아니잖아.”

“…음….”

“그런데 일단 너 빨리 나가.”

“네?”



 데이트 승낙 후 나가라는 건 무슨 조합일까. 지민이 다소 순진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윤기가 카우치를 턱짓한다.



“5분 뒤 저기 눕혀져도 괜찮으면 계속 있어도 되고.”



 지민의 동공이 현란하게 춤을 췄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또 불러주세요!”



 바람보다 빠르게 지민이 사라졌다. 그 와중에 착실한 예의는 잊지 않는다. 윤기는 인터폰을 눌러 한 마디 더 남기려다 관뒀다. 필요한 거 넌데. 그런 말을 했다간 기껏 얻은 기회를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대신 그는 레이첼을 불렀다.



“주말에 오페라 예약해놓은 거 취소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집 하나만 구해놔.”



 아무래도 이사를 가야겠다. 신의 눈까지도 가릴, 뛰어난 보안과 고요함을 자랑하는 부르주아 저택거리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곳에선 가장 중요한 것을 구할 수 없다. 레이첼이 말했다.



“위치라도 어디로 할까요?”



 윤기는 의자를 돌려 창을 마주봤다. 화려한 맨해튼 길거리가 발아래 깔려있었다. 벌써 박지민은 작은 기적을 만들었다. 추호도 그 사실을 모르는 당사자는 비서실에서 몰래 ‘데이트 장소 10선’ 따위를 검색하고 있었지만.



“퀸스랑 가깝게.”



 박지민이 조건이라면 시끄러운 맨해튼도 참아줄만 할 거다.







***








 촬영은 뉴욕의 어느 빌딩에서 이루어졌다. 영화 하나를 위해 직접 인수하고 인테리어와 구조까지 설계했다고 한다. 어거스트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어요. 인사하는 스태프의 설명을 들으며 지민은 멋쩍게 웃었다. 얼마가 들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돈을 몽땅 퍼붓는 건 알겠다. 휘황찬란한 어거스트 로비보다는 덜 화려한 건물의 로비를 지나 48층에 내렸다. 북적거리는 장비 틈으로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민은 안내를 담당한 스태프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대주주 댄은 래리가 가짜라는 걸 알아요. 사실을 알고 도와주는 척 하고 있지만 회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죠. 스태프는 눈을 반짝거리며 동의를 구했다.



“케일론이 악역이라니, 흥미롭지 않아요?”



 천사가 연기하는 악역이잖아요. 지민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정한 수트를 입은 케일론은 청렴하고 선량한 자선사업가 같았다. 주름진 눈가조차 정말 선했다. 뷔가 불안한 듯 말했다.



“댄, 아무래도 이 일은 하지 않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뷔의 말허리를 케일론이 단호하게 잘랐다.



“고작 비서가 이런 사업상의 복잡한 일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뷔가 도로 말을 삼켰다. 그러나 곧 차분히 반박했다. 그렇긴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않아요. 케일론이 골치 아프다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잘 들어요. 연기를 하는 건 맞지만 여기가 무대는 아닙니다. 도와주려는 내 노력을 이렇게 무시하는 건 좋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 당신이 여기까지 버틸 수 있는 건 누구 때문인 거 같습니까? 방금, 그래 아까 회의할 때 앉아있는 사람들이 전부 관객처럼 보이나요? 그래서 이러는 겁니까?”

“…….”

“진짜가 되려면 진짜같이 굴어야죠.”



 뷔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수그러진 기세에 케일론이 한풀 너그러운 목소리로 얼렀다.



“아니면 혹시 나를 못 믿는 건가요?”

“아뇨….”

“웰터 컴퍼니가 얼마나 내 자식 같은 회사인데. 처음 래리가 회사를 만든다고 했을 때부터 얼마나 응원하고 잘 되길 바랐는지 몰라요. 이 회사는, 여기 로딘슨 네가 밟고 있는 이 건물은 나랑 래리가 같이 올려놓은 거라고.”

“…….”

“알겠죠, 로딘슨?”



 이름을 듣자 뷔의 눈동자는 위태로운 난간에 선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케일론이 다정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어깨를 약하게 주물렀다.



“그럼 다음 회의 때 만납시다, 래리. 걱정은 버리셔도 됩니다.”



 카메라는 멀어지는 케일론의 등을 바라보는 뷔의 얼굴을 찍었다. 컷! 만족한 감독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조금 쉬고 갑시다. 뷔와 케일론이 다시 만나 웃으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감격에 찬 스태프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완벽한 배우 조합 아니에요? 촬영장 분위기가 이렇게 좋은 건 처음 봤어요. 1차 예고편 반응도 엄청나잖아요. 이런 촬영에 같이 임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그쵸, 그쵸? 케일론 대단하지 않아요? 지민은 도로표지판보다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케일론 팬이구나. 질 수 없어서 조곤조곤 힘을 주어 대답했다. 예고편에서 뷔가 정말 잘 나왔더라구요. 딱 두 컷이었는데도 완전히 다른 인물인 걸 알겠더라고요. 헐리우드에서 가장 연기 잘하는 배우예요. 스태프가 지민을 휙 돌아본다. 그러더니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맞아요, 그렇긴 하죠. 근데 케일론이 나온 컷도 딱 한 컷이었는데도 완벽했죠.”

“차로 치고 놀란 뷔의 표정이 대단했죠.”

“웃다가 정색하는 케일론 표정도요.”

“래리로 연기할 때 발음까지 변하는 거 봤어요? 엄청나죠.”

“케일론은…!”



 무언가 이상했는지 스태프가 말을 멈췄다. 숨을 돌리는 그 틈으로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어디 해보자는 건가? 그러나 싸움은 거기가 끝이었다. 지민을 발견한 뷔가 팔랑팔랑 달려와 뛰어들 듯 안겼다.



“지미인!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뷔, 잠깐, 헉!”



 휘청거린 지민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과장 조금 보태 볼까지 축축해지면 홀리한테 습격 받았을 때와 똑같다.



“아 미안미안.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너무 반가워서.”

“네? 다시 못 봐요? 왜요? 뷔 촬영 계속 하는 거 아니에요?”

“나 말고. 너가 못 올까봐.”

“제가요?”



 저는 뷔 따라 목성까지도 갈 수 있는데요? 뷔는 끌어안은 팔을 풀고 음, 하더니 활짝 웃었다. 있어, 그냥.



“아 내 트레일러 갈래?”

“트레일러요?”

“가서 게임하자.”

“저 게임 못하는데.”

“못하면 더 좋지. 내가 이기잖아.”

“…….”

“트레일러 하얀 색이니까 먼저 가 있어. 나 감독님이랑 대화 금방 하고 갈게.”



 알았지? 뷔는 시원한 미소를 뿌리며 손을 흔들고 감독 쪽으로 날아갔다. 지민은 뒷목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이번 현장보고서에는 게임 결과를 써야하나. 나 진짜 용케 안 잘리는구나. 아니지 이건 민윤기가 일을 시킬 생각이 없으니까…. 아직 사표를 찢진 말아야겠다.








 뷔의 설명을 따라 트레일러가 주차되어 있는 길거리로 내려갔다. 지민은 뷔의 설명은 상기시켰다. 하얀색이야! 그리고 물끄러미 두 대의 커다란 트레일러를 바라보았다.



“…….”



 다 하얀 색인데요? 트레일러는 형태만 조금 달랐다. 코팅이 되어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는다. 왜 다들 설명을 해주다 끊는 걸까. 한숨을 푹 내쉰 지민은 단순하게 생각하며 가까운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주인이 다르면 돌아 나오면 될 거다.



“…계세요?”



 모델링된 집처럼 깨끗한 트레일러는 고요했다. 주인을 의미하는 흔한 액자나 포스터도 없었다. 지민은 고민에 빠졌다. 만약 케일론의 트레일러라면 아주 껄끄러운 상황이 연출될 터였다. 소심하게 계단 근처만 서성이던 지민은 한 발작 안으로 더 들어갔다. 트레일러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근처정도만.



“어?”



 때마침 테이블 위로 뒤집어진 사진이 어질러져있었다. 장식이라기에는 조금…. 그래도 보면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자연스럽게 시선이 사로잡힌 지민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폴라로이드로 찍은 듯했다. 돌려 앞면을 보려는 그 순간, 트레일러 반대쪽 끝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캐스팅은 그렇게 바꿔줘요.”



 케일론이다. 헉, 지민은 사진을 들고 있는 제 손을 내려 보았다. 왜 하필 지금. 이쪽으로 오려는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상황은 종종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발을 동동 구르던 지민은 순간적으로 가까운 문을 열고 숨어들었다. 세면대와 샤워부스가 있는 화장실이었다.


 지민은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이마를 짚었다. 이러면 더 도둑 같잖아. 어젯밤 감상문을 써서 낸 영화 나 홀로 집에 도둑들이 떠올랐다. 나가야겠다. 침을 꿀꺽 삼킨 지민이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들어왔다는 거짓말이라도 준비하며 손잡이를 잡은 순간이었다.



“예고편 반응이 좋으면 더 좋죠. 화려하게 망할 테니까.”



 지민이 우뚝 굳었다. 손잡이를 잡은 그대로였다. 예고편을 들먹거리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아 감독한테 약을 퍼먹여서라도 막을 테니까. 알잖아요? 헐리우드가 어떤 곳인지. 개봉일 잡혀도 엎어지는 영화가 몇 개인데. 마약 스캔들 하나만 터뜨려줘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어있어요. 아스팔트 정글이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쪽은 작품이나 완벽하게 준비하면 됩니다. 작업 끝나고 바로 촬영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캐스팅은 바꾸고, 또….”



 잠시 말소리가 멈췄다. 급격히 흘려 들어온 정보는 지민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잠시만 끊겠습니다.”



 여유롭게 통화하던 아까와 달리 조금 굳은 목소리였다. 숨 막히는 정적. 끊겼던 발소리가 다시 났다. 점차 커진다. 지민은 직감했다.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다. 쿵쿵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발소리가 멈췄다. 지민은 손잡이를 놓고 숨이라도 새어나갈까 입까지 틀어막았다.


 손잡이의 각도가 점차 꺾인다. 달칵, 소리가 났다. 등허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케일론?”

“…아 감독님, 오셨군요.”



 스르르 다시 문이 닫힌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네. 이런 방향으로 연기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도란도란 말소리와 함께 멀어진다. 긴장이 탁 풀린 지민은 세면대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타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뽑힐 듯 뛰었다.


 지민은 열부터 백까지 놓고 이해도를 따지자면 마이너스라 대답할 수 있었다. 핑 머리가 돈다. 비서로 취업해서 신데렐라 주인공이 되더니 이번에는 007 영화의 FBI 요원이 됐다. 기가 막혔다. 얼결에 탄 트레일러에서 수상한 거래현장 목격. 현장보고서에 쓸 걸 달라고 빌긴 했지만 이 정도로 빌진 않았다. 지민은 심호흡을 몇 번 내뱉었다. 자, 정리해보자.


 방금 배우가 다른 영화사와 은밀한 거래를 했다.

 나는 민윤기가 대놓고 도장을 찍어놓은 감시꾼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배우의 트레일러 안에 있다.


 지민은 빠른 결론을 맺었다. 들키면 죽는다. 도망가야 한다. 아직 죽고 싶진 않다. 민윤기랑 갈 데이트 코스도 다 못 짰다. 영화처럼 천장을 뚫어야 하나. 아니면 작은 짐승이나 넘어 다닐 화장실 창문을 깨야하나. 살 많이 빼놓을걸. Shit, 잘 하지 않는 욕을 짓씹은 지민이 달달 떨며 손톱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잔뜩 구겨진 사진을 발견했다.



“…….”



 고작 이거 하나 때문에. 이미 되돌려 놓을 수 없게 구겨졌다. 팬들에게 주는 선물정도 되겠거니 했다. 현장을 목격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목숨을 잃게 생겼으니 울어야할지. 지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용히 사진을 폈다.



“…….”



 사진을 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살색,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은 여성, 하얀 액체. 그리고 여성의 몸에 마카로 크게 쓰인 글씨. 케일론. 지민은 순간 비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혀를 깨물뻔 했다. 욱, 역겨운 토기가 치밀어 올라왔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단 생각조차 잊었다. 몇 초도 채 보지 못했다. 사진을 다시 구겼다.



“케일론과 작업하고 나면 다른 배우와는 작업 못한다는 게 사실이군요, 하하.”

“과분한 칭찬이군요.”

“천사는 겸손하기까지 합니까? 전 너무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작가와 한번 상의해봐야 할 거 같은데.”

“다행입니다. 배웅해드리죠.”



 도란도란 다정한 대화에 착한 웃음소리가 곁들여져있었다. 발소리가 난다. 문이 닫혔다. 기다리기를 잠깐. 세면대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지민은 허겁지겁 구르듯 트레일러를 빠져나왔다. 손이 계속해서 덜덜 떨렸다. 재킷 주머니에서 꺼내려는 폰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저, 전화를. 아니 그 전에.


 레이첼? 아니면 진? 민윤기? 누구한테. 지민은 일 년치 욕을 오늘 전부 다 썼다고 생각했다. 케일론이 머지않아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지민을 조여 왔다. 어디에서 좀비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재난영화의 주인공처럼 두리번거린 끝에, 반대편 주차되어있는 하얀 트레일러가 눈에 들어왔다. 주저 없이 뛰었다.






***






 감독을 구워삶은 케일론은 뻐근한 고개를 돌리며 스트레칭했다. 어차피 예상한 결과다. 이미 소심하고 줏대 없이 흔들리는 감독의 성격은 헐리우드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작가에게 연락하는 감독까지 확인하고 다시 트레일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비슷해 보이는 트레일러 두 대. 제 것이 아닌 트레일러는 문이 꽉 닫혀있다. 입을 네모모양으로 웃는 배우. 나름 연기는 잘 맞추지만 어차피 곧 상관없는 일이 된다. 무엇을 믿고 새로 생긴, 그것도 적이 가득한 신생 영화사의 작품을 선택한 건지. 망할 작품을 고른 안목이 불쌍할 뿐이었다.


 케일론은 트레일러에 올라타자마자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누구도 오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이상한데. 통화를 받으면서 문 닫히는 소리를 분명 들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케일론은 영 석연찮은 기분을 느끼며 문을 닫았다. 하필 씨씨티비가 망가져 있었다. 감독이 올 예정이라 문을 열어놨었고, 기본적으로 배우의 트레일러를 무식하게 기어들어올 사람은 없다 생각했다.


 케일론은 커피를 타 취미를 담아놓은 은밀한 상자로 향했다. 전화를 받느라 끊겼고 감독이 오느라 밀어 넣어놓았던 사진들을 다시 꺼냈다. 피자집에서 눈이 맞은 여자가 시작이었다. 그 뒤로는 연기를 가르친 학생도 섞여있고, 신인배우도 섞여있었고, 팬도 섞여있었으며, 데뷔작의 여성 스태프까지 있었다. 반질하고 선한 얼굴은 어떤 수작을 걸어도 다들 순하게 넘어왔다. 중간에 사진기와 마카를 꺼내들면 거부를 하긴 하지만.


 우아하게 잔을 기울이며 수집품을 뒤적거렸다. 전시된 거장의 예술작품이라도 관람하듯. 도로시, 에이미, 마리티아스. 사진을 통해 하나하나 그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겼다.



“…….”



 처음부터 사진을 다시 셌다. 하나, 둘, 셋…열여섯. 



“…아아.”



 한 장이 빈다. 케일론은 고개를 한껏 젖히고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평온은 깨졌다. 화려하게 날아간 컵이 귀 째는 소리를 내고 산산조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