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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18

by 토페 posted May 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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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Galantis - Peanut Butter Jelly>









 뉴욕이 세계의 중심에 서있는 도시라면, 캘리포니아는 자유의 중심에 서있는 도시다. 다양한 인종이 한데 뒤섞여 인사를 나누고 웃음을 보낸다. 편견 없이 탁 트인 시선만큼이나 서쪽 도시는 자체만으로도 천국의 풍경을 자랑했다. 연중 따사로운 햇살이 푸른 야자수 위로 쏟아져 내리고 넓은 파도가 그 아래로 하얗게 철썩거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붓으로 찍어 그린 푸른 청명한 하늘이 말갛게 빛났다. 해가 떨어지면 보랏빛 하늘이 펼쳐지는 저녁 풍경은 셔터만 누르면 누구든 기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많은 배가 오가며 자리잡은 서부의 항구도시는 자유로운 낭만의 꿈을 떠안고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벗어나고 싶지 않은 꿈 같은 도시. 누구나 꿈꾸는 로망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다.



"와아…."



 호텔에 도착해 짐을 푼 지민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창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리셉션을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을 쏟아 부어 개조한 호텔은 황홀한 뷰를 자랑했다. 태평양은 햇빛 가루를 품고 반짝거렸고, 시선을 조금만 더 위로 움직이면 하늘과 딱 달라붙은 수평선이 보인다. 내 방이 이정도인데 스위트룸은 더 엄청나겠지. 하긴 집 한 채 사는 가격이 하룻밤에 증발하는데. 지민은 스위트룸으로 안내를 받아 올라간 윤기를 조금 부러워했다. 하룻밤에 7천만달라가 넘어가는 호텔은 영국 왕세자 부부를 비롯해 유명인들에 한해서만 스위트룸을 내주기로 유명했다. 빌 게이츠, 조르지오 아르마니, 엘리자베스 여왕이 누웠다던 그 침대에 이번엔 민윤기가 다녀가는 것이다.


 지민은 머지않아 주어진 풍경에 만족해 헤실헤실 웃었다. 내 주제에 이게 어디야. 이 맛에 민윤기 비서 노리는 사람이 뉴욕을 차고 넘친다는 거구나. 그간 구박하고 부려먹은 윤기에게 새삼 애정이 퐁퐁 솟았다. 역시 마냥 나쁜 놈은 아니라니까. 정의로운 나쁜 놈은 괜찮아. 침대까지 뛰어들어 푹신함 탐사를 마치고 원목의자에 앉아 솟구친 입꼬리를 가다듬었다. 폰을 확인했다.



"……."



 부재중전화 41통. 온통 전정국으로 도배된 전화목록을 확인한 지민은 전용기에서 내리자마자 걸겠다는 다짐과 다르게 머뭇거렸다. 정국이가 지금은 어쩐지 민윤기처럼 변해있을 거 같은데. 좀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 전화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으로 폰을 닫으려 해도 지은 죄가 있어 마음이 불안하다. 정국아 형이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진짜 사랑하는데 여행은 내가 좀, 그래, 어? 일단 사랑해. 온갖 아부를 뒤적이며 지민이 정국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이었다. 폰이 붕 울렸다.



"까, 깜짝…! 어…? 레이첼?"



 지민은 능숙하게 단련된 경보센서가 머릿속에서 징징 울리는 걸 감지했다. 등골이 쎄했다. 에이, 그래도 이렇게 비행기 내리자마자? 정말 설마. 진짜 설마.



"여보…."

[지민, 미스터 윤이 호텔 지배인과의 조찬 시간을 앞당겼어요. 당장 리셉션 관련 서류가 필요해요. 아까 운전기사가 실수로 전용기에 놓고 왔던 캐리어, 그 캐리어에 서류가 있어요. 지금부터 약 20분 뒤에 조찬 들어가시니까 지민이 마중 나가서 서류만 먼저 받아서 가져와요. 난 지금부터 리셉션 회장을 확인해야 하니 부탁 할게요.]



 가혹하고 가혹한 운명이다. 아…내 인생….급격한 인생의 회의감을 느끼며 지민은 문을 열고 뛰었다.











 내가 앞으로 또 민윤기 좋다는 소리하면 태평양에 뛰어든다. 지민은 20분안에 그 지점까지 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운전기사의 말에 결국 오토바이를 불러 뒷자리에 매달려 도로를 질주했다. 탁 트인 도로 옆으로 세워진 야자수를 볼 겨를도 없이 바람이 숭숭 얼굴을 때리는 탓에 눈물이 찔끔찔끔 흘렀다. 오죽하면 호텔로 돌아와 오토바이 운전기사가 당황하며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냐 물었다. 마라톤 경주의 마지막처럼 스퍼트를 내 서류를 레이첼에게 넘기고 호텔 식당으로 내려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죽어가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수고했어요. 지민이 딱 맞춰 도착한 덕분에 살 수 있었어요."



 다가온 레이첼이 지민이 앉아있는 식탁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지민은 흐느적거리며 허리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하아 다행이…웁!"

"여기 물 좀 마셔요."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네, 한결 나아요. 레이첼은 일 잘 마치셨어요…?"

"아니라 대답하면 오늘 리셉션은 끝장 아닌가요? 어거스트가 망했으면 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나까지 실직자로 만들진 말아줘요."



 지민은 움찔하며 레이첼을 마주보았다. 인형같이 푸른 눈은 진지하다. 당황하며 무슨 말을 던져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거릴 즈음, 레이첼이 표정 하나 까딱 안하고 말했다.



"농담이에요."

"…레이첼 혹시 유머 미스터 윤한테 배웠어요?"

"그런 저주 같은 소리 할 정신 있으면 괜찮나 봐요. 시킬 거 있으면 시켜요."



 레이첼은 어깨를 으쓱하며 메뉴판을 손짓했다. 지민은 오늘 처음 넘기는 식사에 다소 밝아진 표정으로 메뉴판을 짚어 나갔다.



"저는 그럼 스테이크랑 치즈 샐러…."

"오늘 리셉션에서 체하지 않으려면 가볍게 먹어요. 안 그러면 다시 다 위로 넘어올 테니까."

"프렌치 토스트로 하나요…."



 리셉션이 대체 뭐길래. 지민은 걱정으로 속이 벌써부터 불편했다. 그냥 레이첼처럼 굶을까. 대단하디 대단한 리셉션엔 아마 민윤기 같은 사람들이 바다 모래 자갈처럼 흥건할 것이다. 지민은 불안감을 떨치듯 부러 쾌활하게 입을 뗐다.



"레이첼, 레이첼도 노하우 있지 않아요? 긴급상황 같은 거 일어날 때요.”

“예를 들면요?”

“미스터 윤한테 혼날 때 같은 거요! 진 선배님은 잠깐 뇌를 꺼놓으면 된다고 하셨는데."

"진이 그런 걸 알려줬어요?"

"네!"



 지민이 해맑게 존경심을 뽐냈다. 레이첼은 한심하게 시선을 던지며 지적했다.



"뇌를 끄기 전에 혼나지 않을 생각부터 하는 건 어때요?"

"…음…그건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그런데 두 사람, 아까 전용기에서 무슨 이야기했어요? 자료 덮고도 꽤 오래 있던데."



 레이첼이 스치듯 물었다. 어조는 가벼워도 메뉴판을 훑어보고 있는 지민을 보는 눈은 혹시 일어날 비상사태를 대비하는 안전요원 못지 않게 예민했다.



"아 그거요. 별 이야기는 없었어요. 좀 실수로 졸아서…창문 열고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하시던 걸요. 다시 그래서 빠뜨린 부분 읽어드리구요."



 지민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주문을 넣었다. 레이첼은 다리를 꼬고 생각에 잠겼다.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하는 거면 미친놈 아니냐, 하는 일방적인 사람의 반응을 젖히고 레이첼이 포인트를 찍은 부분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하는 쪽이었다. 민윤기가 아무 문제없이 말 한 마디 던지는 걸로 끝냈다. 심지어 옆에서 대놓고 졸면서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고 있던 부하직원을 두고.


 레이첼은 과거를 되짚었다. 예전 지민의 자리를 다녀간 무수한 인물 중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길어진 회의를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덕분에 윤기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내가 뽑은 게 동상인 줄은 몰랐군. 매정하게 빈정거린 윤기는 그날로 해고 통지서를 선물해주었다. 그런 사람이 평범하게 한 소리만 뱉고 넘어갔다?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돌연 약속장소에 나타나 헤집어 놓은 것도, 터무니 없는 이유를 갖다 붙여 지민을 런칭파티에 데려온 것도. 하나같이 수상한 것들 투성이다.



"다른 대화는 더 없었어요?"

"네 전용기에선 그게 전부였어요."

"다른 때는요?"

"다른 때…어…."



 프렌치토스트를 자르던 지민이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돌연 눈동자를 급히 데굴데굴 굴렸다. 간단한 거라도 좋아요. 레이첼이 한번 더 쿡 찌르자 지민은 쭈뼛대며 우물우물 레이첼이 원하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 특별한 건 아니고, 아 진짜 별 거 아니긴 한데. 그러니까 말이죠. 엄청 단순하긴 한데 미스터 윤이 치, 칭찬을 한번 받았었어요."

"칭찬?"

"네, 정말 대단한 거 아니구요. 이게 그러니깐요. 칭찬이긴 한데 칭찬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니 그냥 좀 꿈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점점 표정이 복잡하게 물든다. 칭찬인데, 제가 볼 때 그건 분명 칭찬이 아니거든요? 프렌치토스트를 자르던 칼은 애먼 접시만 콕콕 찔렀다. 레이첼은 어렵지 않게 직감했다. 역시 무언가가, 있다. 레이첼은 구태여 끝까지 들출 생각이 없었다. 한가지 확신만 있으면 충분했다. 어거스트의 주인이 새로 들어온 막내비서에게 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니면 기대라고 칭하거나. 레이첼이 고장 난 로봇처럼 버벅거리고 있는 지민의 상태를 끊어냈다.



"지민은 어때요?"

"뭔가 맛간 대화였…네?"

"보스에 관해서요."



 미스터 윤이요? 잠깐 눈을 깜빡거린다. 지민은 새삼스럽다는 듯 단순하고 시원하게 말했다.



"그야 돈 주시는 분이죠."



 그 단어만큼 윤기를 깔끔하게 정의할 수 있는 건 없다. 추가 수식어를 달자면 까칠한 워커홀릭에, 비위 맞추기 힘들고, 매번 무지막지한 일더미를 안겨주는 제멋대로 상사. 1차원적인 정의는 그게 전부였다.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듯 착착 대답하는 지민을 보고 레이첼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생각한 게 맞다면 어쩐지 윤기가 조금 불쌍한 것도 같았다.



"그거 말곤 없어요?"

"어…."

"사람으로서요.”



 사람. 예상 밖 단어에 명치를 푹 찔린 지민은 뜨끔하며 프렌치토스트를 자르던 칼날을 멈췄다. 티가 났나? 내가 민윤기 가끔 불쌍하게 쳐다본 거? 그럴 리가 없는데. 윤기를 안쓰럽게 생각한 건 맞지만 적어도 셋이 모인 장소에서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지민은 저절로 레이첼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서로를 평등한 선에 세워놓고 봤을 때 민윤기. 무표정한 예쁜 얼굴은 윤기에게 자주 느끼던 감상을 말한다 해서 이곳저곳에 소문을 낼 것 같지도, 너 따위가 뭐라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냐 말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까…좀."

"좀?"

"…외로워 보여요."



 레이첼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지민은 뒤늦게야 부랴부랴 헙, 하고 말을 덧붙였다.



“아! 이게 절대! 절대 나쁜 뜻은 아니구요! 저는 그 미스터 윤이….”

“알아요. 무슨 말인지.”

“…아 진짜 이상하죠? 제가 봐도 그런 생각하는 거 자체가 주제넘다는 거 아는데, 그냥 막,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프다는 말도 쉽게 뱉지 않던 새벽. 넓은 방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작은 액자. 눈치가 둔하다는 평을 자주 듣는데, 신기하게도 윤기가 외롭다는 증거는 쏙쏙 잘만 낚아챈다. 해봤자 주 단위로 바뀌는 애인들. 신물 날 정도로 돈으로 사고 파는 관계에 익숙해진 윤기는 여태 지민이 아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을 가진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는데, 유독 그 외로움이 윤기에 한해선 우주만큼 넓어 보인다.


 때문에 마냥 윤기가 힘든 일거리를 던져주며 괴롭혀도 신경이 쓰인다. 예전처럼 민윤기 이름 세 글자만 들으면 이를 박박 갈지도 못하겠다. 만약 다른 괜찮은 직장에서 연락이 와도 드디어 이 지옥에서 벗어난다 룰루랄라 냉큼 벗어나진 않을 거 같다. 아마 뉴스에서 보거나, 어디서 보면 한번쯤은 생각하겠지. 지민은 이내 신경이 쓰인다는 말을 돌려 표현했다.



"그래서 그냥 미스터 윤이 나중에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액자도 그런 거 말고 어마어마하게 큰 걸로 새로 걸어놓고. 딸랑이 같은 건 흔들어줄 성격이 안 되는 거 같지만 아기 신발 선물도 해보고. 지민이 순하기 짝이 없는 미소로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술술 뒷말을 얹었다.



"만약 결혼하시면 리셉션도 이 정도인데 결혼식은 더 대단하지 않을까요? 일단 결혼을 엄청 늦게 하실 거 같긴 하지만요. 퇴직하면 미스터 윤 결혼식은 못 보겠죠? 설마 그때도 내가 샹들리에 고르고 있으려나…그거 안 되는데…."



 지민의 안색이 다시 허옇게 질려간다. 문란한 사생활이 아이덴티티인 윤기와 결혼은 어울리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또 다를지도 모른다. 제발 좋은 사람 만나면 좋겠다. 잔디 깎는 것도 안 시키고 속옷 심부름도 안 시키는 사람으로만. 그래, 역시 답은 퇴사뿐이야. 지민이 프렌치토스트를 다시 힘겹게 자르는데, 레이첼이 의미심장하게 입을 뗐다.



"아까 물었죠? 위급상황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 이야기를 왜 갑자기 지금. 레이첼은 우아하게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도망가요."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도망가는 거예요. 그거 알죠? 인생은 한번뿐인 거. 망치면 복구하기 힘들어요. 감당하지 못할 거 같으면 도망가요.”




 지민은 어어, 하며 눈을 줄기차게 깜빡거렸다. 이해 못했다는 뜻이다. 레이첼은 정리하듯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런칭파티 때 입을 옷 저녁까지 맞추고 돌아와요. 카드는 여기 있어요."



 지민은 레이첼이 남겨준 블랙카드를 받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띄웠다. 그런데 레이첼, 어떤 거에서 도망가야 돼요?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일거리는 아닐 테고. 혹시 리셉션에서 만나면 도망쳐야 할 사람들 목록이라도 있나. 깊게 생각하기도 전, 레이첼은 마지막 조언을 통보하며 일어났다. 리셉션 시작하기도 전에 미스터 윤한테 들어먹은 욕으로 위장 토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 걸요?










***











 리셉션 장소에서 다운타운까지는 꽤나 멀리 떨어져있었다. 야자수가 길게 이어진 해변도로를 차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은 분명 열 중 아홉의 로망일 것이다. 기분 좋게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 산들거리는 시원한 바람. 관광객이 없는 날 뻥 뚫린 도로는 영화촬영지로 손꼽힐 만큼 멋진 곳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민은 그 열명 중 한 명이었다. 달달달 운전대를 잡은 손이 떨렸다. 좋아, 앞으로 30분만 더 달리는 거야. 박지민, 넌 할 수 있어!


 10분정도 달렸을 즈음, 지민은 차를 멈춰야만 했다. 웬 차가 떡 하니 도로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뭐야."



 지민은 브레이크를 밟아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대각선으로 정차해 있는 차는 비매너도 그런 비매너가 없을 정도로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한껏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자세히 창문을 내다보자 차에 기대고 서있는 사람이 보인다. 주인인가 보다. 선글라스를 끼고 푸른 줄무늬가 시원하게 그려진 셔츠를 입은 남자는 언뜻 스쳐보아도 비율이 좋았다. 모델 촬영인가.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카메라 차나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빵-! 클락션이 넓게 울려퍼진다. 차에 삐딱하게 기대고 선 남자가 지민이 있는 차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선글라스를 슬쩍 내렸다가 다시 올린다. 지민은 남자가 차에 타 비켜주길 바랐지만, 남자는 다시 팔짱을 끼고 차에 몸을 기댔을 뿐이다.



“……?”



 클락션은 카메라 슛 사인이 아니라 비키라는 건데. 심지어 차에 기댄 포즈가 더 과해진다. 차 문에 팔 하나를 걸치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셔츠 윗단추를 하나 더 풀고, 언뜻 보면 세련된 자동차 광고의 한 폭이다. 도로 한복판에서 혼자 화보를 찍고 있는 남자를 보고 감탄보다 황당함이 앞섰다. 혹시 약이라도 한 건가. 최근 뉴스에서 약을 하고 차를 몰다 도로 한복판에 내려 무릎을 꿇고 기도를 1시간동안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봤다. 조심스럽게 추측하며 지민은 한껏 멋을 뽐내고 있는 남자를 향해 문을 열고 나갈지 말지 고민했다. 지민이 선택한 최선은 클락션을 몇 번 더 울리는 것이었다. 남자는 들은 척도 안하고 포즈를 취했다. 이쯤오니 무섭다.



“아무리 캘리포니아가 자유라고는 해도 도로를 주차장으로 쓸 순 없을 텐데….”



 지민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리셉션까지는 꽤 시간이 남는다. 다른 때라면 무조건 돌아갔겠지만 호텔까지 통하는 국도는 이 길뿐이다. 나 진짜 다치면 생명수당은 나오겠지. 지민은 혹시라도 약에 취한 남자가 주먹을 뻗을까 걱정하고 이를 악물며 차에서 내려 주춤주춤 남자 쪽을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남자가 잘생긴 미남이라는 건 멀리서 봐도 훤하다. 다섯발자국에서 차마 더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바위처럼 포즈를 취하던 남자가 몸을 틀었다. 움찔 지민은 발을 한 발자국 뒤로 물렸다. 튀, 튈까.



“드디어 낚았네. 아 어깨 저려. 왜 도로에 차가 5분동안 한 대도 안 지나가는 거야.”



 남자가 팔을 빙글빙글 스트레칭하듯 돌렸다. 치려는 건가 싶어 지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자는 예상외로 다른 평범한 말을 꺼내왔다.



“혼자야?”

“네, 네?”

“내가 원래 뒷좌석에 누구랑 같이 못 앉아서.”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웬 또라이인가, 생각하던 지민은 어쩐지 많이 낯익은 입술과 턱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서부 도시에 아는 사람 없는데 익숙하다. 도로 한복판에서 쇼를 벌이는 사람과 아는 사이일 리가 없다. 지민은 움찔하며 천천히 남자를 피해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입은 주장을 펼쳤다.



“저기요, 거기서 비켜주세요. 차 때문에 도로를 못 지나가고 있어요.”

“나도 차 때문에 도로 못 지나가고 있어요. 망가졌거든요.”



 바퀴가 터졌어. 남자는 차를 가리키며 난감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듣기 좋은 목소리도 귀에 익다. 지민은 그때서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인물 한 명을 찾아냈다. 아 잠깐. 그런데 그거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영화에서만 보던 얼굴인데.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지민보다 반뼘쯤 높은 위치에서 시원하게 입매를 올리며 웃었다. 윤기가 시킨 심부름들 덕분에 어지간히 명품을 구분할 수 있게 된 지민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은 하나라도 값싼 것이 없었다. 설마. 진짜, 설마. 웃는 채로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차 좀 빌려주면 안 될까?”



 싱긋 남자가 눈을 접었다. 맙소사. 지민은 아마 거기서 평생 써야할 행운을 다 써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니, 실제로 지민은 다리가 풀려 일시적으로 비틀거렸다. 커다란 손이 냉큼 튀어나와 지민의 손을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주었다.



“괜찮아?”



 자연스럽게 살려준 남자와 잡은 손 부분을 내려보고, 다시 얼굴을 보고. 지민은 얼이 빠져버렸다.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이렇게 따사롭고, 손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온도가 뜨끈한 걸 보면 꿈이 아닌 실제다. 내가 그렇다고 영화 화면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남자가 멍한 눈 앞에 손을 가져가 붕붕 흔들었다. 지민은 급하게 남자의 이름을 외쳤다.



"뷔, 뷔, 뷔!?"

"어, 나 알아? 잘 됐다."



 남자, 뷔가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보이며 또 웃었다.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도 있나요. 적어도 영화를 좀 본다고 하는 사람 사이에서 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말도 안돼. 나의 십대시절 우상. 데뷔작부터 대박행진을 터뜨리고 쓸어 담은 상만 열손가락을 펴도 모자라다. 십대 후반에 데뷔해 이십대 중반에 벌써 손 꼽히는 비싼 몸값을 가진 배우로 성장한 뷔는 걸어다니는 대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달달 떨리던 진동이 이번에는 심장으로 옮겨갔다. 화면 안에서랑 똑같아. 아니야, 더 잘생겼어. 신이시여. 진짜 뷔야. 지민은 팬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지, 지, 지, 진짜 잘생기셨어요…!”

“아 고마워.”



 큰일났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아. 잠깐 하얗게 변했던 머릿속으로 급격히 온갖 생각이 들어찼다. 팬이에요, 그 영화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스카이 가든 사랑해요, 무엇보다 진짜 너무 잘생기셨어요. 홀린 듯 멍하니 빠진 눈동자를 보고 뷔는 사근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대화가 좀 쉬워지겠다. 지금 말이야. 내가 차가 고장났거든?”

“그랬구나….”



 지민은 약을 한 미친놈이라는 말을 냉큼 취소시켰다. 그런 딱한 사정이.



“이거 좀 빌릴게.”



 뷔가 자연스럽게 지민이 손에 들고 있던 차키를 받아갔다. 넋이 빠진 지민은 열쇠를 가져가는 장면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사진 찍어서 소장하고 싶다…너무 잘생겼어. 뷔는 매력적인 웃음을 유지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타고 일주일 이내로 돌려줄게.”

“네…네?”



 순순히 대답하던 지민은 귀를 스쳐지나간 말을 의심했다. 탄다고? 내 차를? 아니, 정확히는 어거스트 차를? 뷔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볼일 끝났다는 듯 말했다.



“고마워. 그럼 이만 다음에 보자.”

“자, 잠시만요! 차는, 그게 제 꺼가 아니라서…!”



 순간 말을 끊고 벨소리가 울렸다. 민윤기 전용으로 설정해놓은 벨소리다. 가출했던 정신이 냉큼 귀환했다. 벨소리가 여섯번 울리기 전에 받아야 한다. 지민이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뷔는 차로 걸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경계하듯 도로 저 멀리를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여보세요.”

[어디야.]

“지금요? 101번 국도이긴 한데….”

[옷을 디자인이라도 해? 아니면 뉴욕까지 날아가서 가져와? 이번 리셉션의 주인공은 너였나보군.]

“어…그런데 리셉션까지는 꽤 시간 남은 거 같은데.”



 지민은 아까 확인한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뷔는 리셉션이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도로를 보던 시선을 틀어 지민을 쳐다보았다.



[나도 알아. 오자마자 내 방으로 올라와.]

“그럼 한 20분은 걸릴 거 같습니다.”

[15분 줄게. 날아서라도 와.]



 전화가 무자비하게 끊긴다. 뷔를 보고 감상에 젖었던 정신은 금세 현실로 복귀해, 지민은 후다닥 뷔에게 달려가 다시 열쇠를 조심스레 양손으로 빼냈다.



“죄송해요. 제가 급하게 가봐야 할 일이 생겨서요. 차는 같이 밀까요?”

“아까 전화에서 말한 거, 리셉션. 그거 혹시 어거스트?”

“네, 근데 제가 지금 바빠서 가….”

“방금 혹시 민윤기?”

“네? 네….”



 윤기의 이름을 함부로 막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라 지민은 살짝 당황했다. 거기다 발음도 꽤나 정확하다. 뷔는 매가 먹이라도 낚아챈 것처럼 눈을 빛냈다.



“그럼 너가 설마 그 비서야? 최근 굴러들어와서 개고생하고 있다는?”

“…네?”

“레이첼이 그러던데. 한 명 더 뽑은 게 몇 달이나 버티고 있다고. 와, 궁금했어. 너였구나. 생긴 거랑 다르게 독한 거에 잘 버티나 봐?”



 뷔는 당장이라도 빨리 떠나려는 사람의 태도를 버리고 흥미롭다는 듯 지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윤기를 오래 알아온 듯한 태도를 비춘다. 술 안 필요해? 민윤기랑 일하려면 술 많이 필요할 텐데. 뷔가 씨익 웃으면서 지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우연히도 목적지가 같네. 가자. 좀 급해, 내가. 곧 올 거 같거든. 아 연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뷔가 지민을 재촉하며 차문을 연 순간이었다. 저 도로 멀리서부터 웅장한 엔진소리가 들린다. 시선은 순식간에 차로 몰렸다. 카레이싱이라도 하듯 거친 속도로 내달린 차는 매끄럽게 고장난 뷔의 차 앞에서 멈추었다. 뷔가 나직하게 웃는 표정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에이, 좆됐네. 눈치는 쓸모없이 빨라.”



 표정이 너무나도 상큼해서 지민은 제 귀를 의심했다. 모처럼만에 따돌린 건데. 낭만을 노래할 거 같은 어조로 친절하게 욕을 한번 더 내뱉은 뷔는 이내 지민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뗐다. 뒤늦게 들어온 차에서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흑인이 나오고 있었다. 뷔는 지민의 귓가쪽으로 고개를 숙여 짧게 속삭였다.



“몇 시간 뒤에 보자.”

“네?”

“리셉션 말이야. 기대할게.”



 윙크를 날린 뷔는 활기차게 손을 흔들더니, 걸음을 옮겼다. 박수도 짝짝 치고, 양팔을 넓게 벌린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아아 역시 나 챙겨주는 건 매니저밖에 없다니까. 기다렸어. 가자. 태풍처럼 몰아친 상황에 지민은 잠깐 또 다시 멍해지려는 정신을 되찾아왔다. 좋아하는 배우에게 차를 도난 당할 뻔 했다는 건 더 이상 머릿속에 없었다. 15분. 카레이서로 직업을 바꿀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