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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17

by 토페 posted Feb 1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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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Caro Emerald - Stuck>













 지민은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타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여행가는 모습 같잖아. 비록 캐리어에 여행용사진카메라 대신 윤기의 스케줄러가 들어있고, 11시의 라스베가스행 이코노미석 비행기가 아니라 아침 9시의 어거스트 전용기이고, 정국이 아닌 윤기가 동행인이지만 다른 지역으로 비행기 타고 가는 건 마찬가지다. 나도 같이 술 마실 걸. 쩝 입맛을 다신 지민은 평소와 똑같은 출근 풍경을 거쳐 사무실에 도착했다. 로비를 지나기 전 레이첼의 전화에 캐리어를 운전기사에게 맡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레이첼."

"생각보다 괜찮은 표정이네요. 진한테 연락 받았어요."



 레이첼이 깔끔한 인사를 보냈다. 검은 슬랙스에 하얀 블라우스를 매치하고 킬힐을 신은 그녀는 다른 때보다 가벼운 복장이었다. 1월의 선선한 캘리포니아에 딱 어울리는. 지민은 이만 떨어진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까짓, 휴가 일주일 사라지면 어때. 민윤기랑 얼굴 5일 더 보면 어때. 지민은 저주받은 직장의 운명에 순응했다.



"미스터 윤도 알고 계세요?"

"물론 아시겠죠."

"헉, 선배님 괜찮으실까요? 속도 안 좋으신데 아침부터 미스터 윤한테 욕 들으면…."



 몸도 안 좋은데 정신까지 공격받으면 큰일인데. 지민이 석진을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레이첼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을 거예요."

"아무래도 도착해서 안부전화라도 드려야겠어요."

"안 하는 게 좋을 걸요? 더 괴로워할 텐데."



 양심이. 뒷말은 삼킨 레이첼은 새벽에 석진으로부터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막내 비서를 제물로 이 휴가를 즐겨도 될까, 하는 깊은 죄책감이 담긴 문자였다. 피자가게에서 했던 예상과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지민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황금 같은 휴가를 놓으라고 하면 절대 놓지 못할 거 같다는 고해성사의 문자를 레이첼은 반만 읽고 닫아버렸다. 지민이 새삼 깨달았다는 듯 아! 했다.



"역시 레이첼은 현명해요. 전화벨이 또 울리면 일인 줄 알고 힘들어하실 게 뻔한데.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내일 전화 드려야겠어요. 몸이 안 좋을 땐 푹 쉬어야 해요."

"그러던가요."



 레이첼은 굳이 지민의 오해를 풀어주지 않았다. 어차피 가야 할 일. 기분이 나쁘게 가든, 좋게 가든 상관은 없지만 옆에 우울한 구름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피곤하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레이첼의 폰이 울렸다. 레이첼은 전화를 받고 예, 하고 끊더니 곧장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비행장으로 갈 거예요. 옷 챙겨요. 커피 사온 건 버려요."



 이럴 거면 처음부터 비행장으로 오라고 하면 좋았잖아.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며 힘겹게 사온 스타벅스 커피를 싱크대에 버렸다. 벌써부터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지민은 화면으로만 보던 호화 전용기를 실물로 보자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이별을 고한 라스베가스행 이코노미석에게 미안하게도 이 전용기를 보는 순간 나름 괜찮은 출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겉만 비행기 모양으로, 속은 좋은 호텔 룸과 다름 없었다. 비즈니스석보다 훨씬 좋은 의자는 물론, 비행기 안쪽에는 침실이 놓여있고, 이름 날리는 호텔의 수석요리사가 윤기의 개인요리사로 탑승한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바닥은 밟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쓰는 사람에 따라 맞춰진다는 전용기는 윤기의 스타일에 따라 단순하면서도 구석구석 화려한 멋이 돋보였다.

 윤기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 다리를 꼬고 좌석에 탑승했다. 레이첼마저 무덤덤한 반응으로 윤기와 조금 떨어진 좌석에 앉았다. 지민은 침을 꿀꺽 삼키고 상냥한 스튜어디스의 인사에 어설프게 웃어주었다. 내가 여태 밟은 땅 중에 가장 비싼 땅이 아닐까. 생각하며 지민은 당연히 레이첼의 옆자리를 제 자리로 여기고 다가갔다.



"지민, 잠시만요."



 레이첼이 멈추라는 손짓을 하며 지민에게 책처럼 보이는 파일을 내밀었다.



"리셉션에 오는 사람 리스트예요."

"전부다요? 되게 많이 오시네요."



 책을 받아 든 지민은 책 안을 작게 열고 들여다봤다. 얼추 사진과 옆에 쓰인 이름은 몇 백은 거뜬히 넘어 보인다. 근데 이걸 왜 제게…? 지민이 궁금할 사이도 없이 레이첼은 한권을 지민이 들고 있는 책 위에 올려주며 덧붙였다.



"네, 많이 오죠. 아마 지민이 여태 티비에서만 봤던 사람들이 현장에서 걸어 다니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여기 리셉션에 오는 모든 사람을 미스터 윤이 아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예요. 동양인이라는 점과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절대 하나라도 실수하면 안돼요. 일단 내가 다 외우긴 했지만 지민도 내일 밤 리셉션전까지 다 외워요. 주최자의 비서가 초대 손님을 모른다는 건 큰 실례니까요."

"이, 이걸 다요?"



 지민은 기겁했다. 책은 이름과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해당 인물의 굵직한 정보까지 같이 쓰여있었다. 현재 아내와는 별거 상태로 이혼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던가, 보유중인 호텔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했다던가, 투자한 기업에 부도가 나 망해버렸다던가. 두세 줄씩 곁들여져 있는 정보까지 포함한다면 어마어마한 양이다. 지민은 책을 안고 파리하게 질려버렸다. 분명 이건 밤샘이다. 아침 해랑 손을 흔들며 인사하게 될 거야. 하다하다 이제 암기초능력까지 발휘하라고 하는구나. 끔찍한 미래를 내다 본 지민이 쓰러지듯 앉으려고 하자 레이첼은 잠깐, 하고 또 한번 지민을 막았다.



"지민은 여기 말고 미스터 윤 옆에 앉아서 거기 책에 체크한 손님들 정보를 읽어줘요. 중요 인사들이라 그 사람들은 직접 알고 계시는 게 좋거든요."

"네? 읽어드려야 하나요? 책을 그냥 드리면…."

"요약본 아니면 안 읽으세요. 참고로 요약본은 진이 가지고 있는데, 지금 없잖아요?"



 아…선배님…. 지민은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윤기가 있는 자리를 쳐다보았다. 민트색 머리통이 조금 아래로 숙여져 있는 게 책을 읽는 모양이었다.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두 시간 동안 바로 옆에 숨막히는 침묵을 유지하며 붙어있어야 한다 생각하니 숨이 절로 턱턱 막혀왔다. 빨리 가라는 레이첼의 손짓에 지민은 깊은 심호흡을 하고 윤기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윤기는 옆에 느껴지는 인기척을 확인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스터 윤 여기 리스트 읽어드리겠습니다."



 윤기는 대꾸도 없이 책만 읽었다. 왜 말을 안해. 지민은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 다시 일러주었다.



"저…미스터 윤?"

"……."

"여기 읽어드리려고 하는데….읽을까요?"

"귀 안 막혔어. 읽는다며. 읽어."

"아 네. 읽어드리겠습니다. 먼저 인터루드 기업 오너 리차드 아이건입니다. 최근 둘째 부인이 출산을 했는데 딸이 태어났다고 해요. 첫번째 부인이 낳은 둘째아들이 최근 골칫거리라고 합니다.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며 약혼을 파기하겠다 선언했다 합니다. 다음으로는 최근 리튼 호텔을 인수한 오너…."



 지민은 윤기를 흘끔 살폈다. 윤기는 대화의 기본이 되는 리액션이라고는 하나도 보여주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거려 준다거나, 시선을 마주봐 준다거나, 중간중간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해준다 거나. 듣나 안 듣나 의심이 갈 정도로 건성인 태도를 유지하며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민은 의아했지만 윤기에게 듣고 있는 게 맞냐, 하고 집중력 없는 애한테 던지는 듯한 질문을 감히 말할 수 없어 글만 계속 읽었다. 그 순간, 윤기가 책을 탁 덮었다.



"다음은 헤르테이안 가문입…."

"너."

"네?"



 지민은 역시 듣지 않았던 것이라 여기며 말을 멈추었다. 윤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지민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일을 시키려고 저렇게 보는 거지. 긴장한 지민은 가물가물 기억을 뒤적거렸다. 저 시선을 언젠가 한번 받은 적이 있다. 손을 찔려가며 곰 인형을 만들 때다. 꿰매는 방법을 알려주며 손이 맞닿았을 때 저런 시선으로 보고있었다.



"무슨 다른 시키실 일이라도…?"



 말도 없이 쏟아지는 시선에 점점 민망해진 지민이 볼을 긁적거렸다. 윤기는 고개를 모로 작게 까딱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웃어봐."

"…네?"



 지민은 윤기가 지금 웃긴 농담을 보여주는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한치의 빈틈도 없는 표정은 무뚝뚝함의 정석이었다. 가서 내 커피 찾아와. 식당에 예약해 놔. 새로 사놓은 그림 찾아와. 그런 명령을 할 때와 똑같은 어조였다. 지민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요?"

"너 말고 누가 있는데."



 뒤에 레이첼도 있고, 옆에 스튜어디스도 있고, 기장도 있고 이 전용기에는 많은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지민은 반박하고 싶은 말을 넣고 당황으로 눈만 깜빡거렸다. 얼마나 이상한 명령을 시킬지 예상도 안 간다 매번 입버릇처럼 말하긴 했으나 이번 명령은 정말 이상했다. 내가 웃는게 이번 런칭파티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거지? 쏟아내고 싶은 질문이 많았으나 철칙 같은 한 가지 주의사항으로 지민은 참아냈다. 질문은 금기.



"갑자기 웃으라고 하시면 그게…."



 머뭇머뭇거리던 지민은 작게 구겨지는 윤기의 인상을 보고 말을 끊었다. 할게요, 하겠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좀 말이 되는 걸 주문 해야지. 퍽이나 이 분위기에서 웃음이 나오겠다. 지민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빳빳하게 굳어있는 입꼬리를 천천히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가는 억지로 당겨져 경련이 온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억지로 짓는 힘겨운 웃음이 떠있을 것이다. 윤기는 그런 지민을 보고 인상을 더 확 구겼다. 꼭 못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됐어. 웃지 말고 다시 읽어."



 지민은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윤기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지가 시켜놓고선. 내가 웃고 싶어서 웃은 거야? 재수없기로는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다. 지민은 윤기 모르게 눈을 흘기고 다시 초대손님리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전과 달리 삐친 감정이 담겨 불퉁거림이 묻어나왔다. 그마저도 티가 나지 않고 말투 끝은 동그랬다.



"마지막으로 아트리오 픽쳐스의 루벤 찰스입니다. 재작년부터 아트리오 픽쳐스의 수익 성적이 저조해요. 작년에는 타임지에서 뽑은 워스트 무비에 영화를 두건이나 뽑혔다고 합니다. 더 정보 필요하신 분 있으시면 다시 한번 설명해드릴까요?"

"필요 없어."

"네."



 대화는 끝났다. 윤기는 다시 책을 피고 시선을 박았다. 지민은 설명을 끝내도 초대손님리스트를 내려놓지 못했다. 지금부터 바쁘게 외우지 않으면 한시간도 자지 못할 것이다. 왜 밤을 새는 건 취직하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지.

 미션을 완수한 지민은 조심스레 윤기의 상태를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편안한 레이첼의 옆자리로 옮겨가고 싶었으나, 어쩐지 머뭇거려진다. 그래도 비서들 식사하는 자리까지 와준 사람인데. 물론 서늘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오히려 분위기를 망가뜨려 놓았지만. 한낱 변덕일지 몰라도 지민은 그것이 나름대로 윤기가 보인 관심이라 느껴졌다. 성격이 워낙 까칠해서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운 사람이기도 하잖아. 지민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윤기처럼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솔솔 감겼다. 서서히 보고 있는 글씨가 어두워진다. 어제 레이첼은 일찍 들어갔지만 석진과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갔다. 심지어 새벽 아침 일찍 일어나 캐리어를 다시 쌌으니 잔 시간은 세 시간이 채 되지 못한다. 하필 전용기의 조용한 공기는 긴장을 완화시키고 잠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아 졸면 안되는데. 졸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검은 머리통이 작게 흔들거렸다.



"졸려?"

"네, 네?!"



 졸다 파드득 놀라 깬 지민이 냉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요!"

"그럼 지금 옆에서 춤이라도 춘 건가?"



 머쓱해진 지민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정정했다.



"조, 조금 졸려요."

"잠 깨는 방법 알려줄까?"

"네? 잠을요? 어떻게 하면요?"



 깨는 방법이 필요하긴 했다. 이 무지막지한 양의 초대손님리스트를 외우려면 한 시가 아깝다. 기대에 찬 눈망울을 받은 윤기가 무심히 툭 말했다.



"창문 열어줄 테니까 뛰어내려."



 개자식아…그건 영원히 자는 거잖아…. 지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배려? 관심? 따뜻함? 민윤기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단어를 또 떠올린 머리통은 학습이 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지민은 답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아 그런데 진짜 졸리네. 천하의 민윤기가 옆에 있는데도 졸리다. 학교를 다닐 때에도 부족한 잠 탓에 고생을 하긴 했었다. 이놈의 비행기는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왜 도착을 안 하는 거야. 지민은 잠을 깨기 위해 혀를 깨물거나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누르다 결국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 윤기가 지민이 앉은 자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미, 미, 미스터 윤!?"



 윤기를 모델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라 일컫던 향수냄새가 가까이 났다. 놀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동시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윤기의 섬세한 이마에 줄이 그어진다. 윤기는 혀를 쯧 차고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지민을 보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귀 멀게 하려고 작정했어? 이러고도 근무시간에 잠 자는 걸 허락 해주길 바라는 거야?"



 진심으로 놀랐다. 지민은 펄떡이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놀란 신경을 진정시켰다. 윤기와 최고로 가까이 붙은 순간이라고 해봐야 코트를 입기 편하게 뒤에서 들고 있을 때였다. 죄, 죄송합니다. 입에 붙은 사과를 건네며 지민이 버벅거리고 있는 동안, 윤기는 손으로 리스트가 담긴 검은 파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깼으면 다시 읽어. 캐서리나 트린 부분."

"아…."

"그 멍청한 표정은 아직도 졸리다는 건가? 뛰어내릴 준비 다 했어? 끈 줘?"

"아뇨. 다 깼어요. 쌩쌩해요. 하나도 안 졸려요. 캐트리나 트린…."

"캐서리나 트린."

"캐, 캐서리나…아 여기."



 지민은 빠르게 리스트를 펴 정보를 읽었다. 책을 달라고 하면 되지 왜 사람 놀라게 가까이 다가오고 그러는 거야. 윤기가 지시한 사람들의 정보를 다시 말한 지민은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요약본 아니면 안 본다고 하지 않았나. 손길이 자연스럽게 느려지자 윤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빈정거렸다.



"오 대놓고 자는 거에 이어서 딴 생각까지 하는 거야? 패기 좋네. 내 책이나 챙겨."



 윤기는 지민에게 책을 던지듯 건넸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친절하게 소식을 알렸다. 10분뒤에 비행기가 캘리포니아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










 정국은 약 35번의 통화를 걸다 폰을 내려놓았다. 전화가 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솟는데, 고객이 비행기 탑승 중이라는 문구는 짜증을 더욱 부추겼다. 아침에 일어나 폰을 확인하자 쏟아져 있는 문자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침잠이 많은 정국은 부스스한 눈으로 확인버튼을 누르자마자 들고 있던 물컵을 놓치고 말았다.



「정국아 나 여행 못 가게 됐어TT」



 불행을 알리는 하나의 문자를 시작으로 몇 개의 문자가 간략적으로 상황을 알렸다. 어쩌다 보니 출장에 내가 가게 됐어. 그런데 도저히 빠질 수 있는 출장이 아니야. 진짜 미안해. 내가 도착해서 시간 날 때 전화 할게. 정국은 예약을 잡아놓은 비행기를 취소시키고 황당함을 서서히 분노로 바꿨다.



"하 참나…."



 그 새끼가 분명하다. 그 민트색 미친놈. 정국은 가면을 쓰고 매너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던 윤기를 떠올리고 이를 뿌득 갈았다. 이 싸이코새끼는 매일 밤 쉽게 살해당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고민하나. 5일이 넘는 출장을 비행기 타기 약 6시간전에 통보해주는 직장이 그 어디 있단 말인가. 박지민이 순해 빠진 성격이라 그렇지, 자신이었다면 진작에 뻔뻔한 면상을 한대 갈기고 때려치웠을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데 당사자는 오죽하랴.



"…그러게 왜 그딴 곳으로 들어가서."



 박지민이니까 버티는 거지. 박지민은 미련스럽게 착하다. 정확히 세상이 부르는 '착하면 지는 거다'에 속하는 부류였다. 대학 때부터 그러더니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서도 일관됐다.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고 어려운 부탁이 들어와도 거절하지 못하는 건.


 정국은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친근하게 다가와 이것저것 챙겨주고 다정하게 말을 붙이는 지민이 이상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렇게 대해? 왜 나한테 잘해줘? 낯을 가리는 성격을 가진 정국은 속으로 지민과 거리를 두었다. 학교에 동양인은 흔하지 않은 편이라 지민과 어울리기는 했다. 적당히 밥을 같이 먹고, 이야기하고, 평범한 선후배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다 정국이 진심으로 지민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연 것은, 성실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지민이 강의를 무단으로 빠진 날이었다.


 정국은 의아해하며 지민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전화는 연락이 되지 않고 아무도 지민의 집을 아는 사람이 없어 제법 고생을 했다. 평소에는 박지민한테 과제를 도와달라 하고, 하기 힘든 부탁들을 시키더니 이런 때가 되니 말로만 걱정을 하고 선뜻 노력은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적당히 착한 박지민을 이용한 사람들이 보인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정국은 자신도 비슷한 처지였지만, 가장 가깝게 붙어 다닌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어떤 찝찝함을 느끼고 교수에게까지 찾아가 주소를 알아냈다.


 퀸스에 있는 아담한 집으로 들어가고 보인 것은 컴컴한 방과 서럽게 훌쩍거리는 울음소리였다. 서럽게 눈물을 짜내던 지민은 정국을 보고 놀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셨어. 토끼눈을 하고 말하던 박지민이 조금 짠해 보였던가. 불쌍했던 거 같다. 정국은 지민의 눈물이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외로움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것같이 밝은 모습을 보이던 지민이 처량맞게 방 구석에 앉아 울고 있는 건 하나의 사진처럼 찍혀 정국의 뇌리에 남았다. 한 조각 엿본 외로움이 발길을 붙잡아 결국 장례식까지 가 지민의 곁에 서있었다.


 그때부터 그랬다. 흔히 길가에 버려진 새끼강아지나 새끼고양이를 보면 드는 마음이 박지민을 보면 들었다. 놔두면 이대로 죽을 거 같고, 챙기지 않으면 찝찝하고. 따지자면 가장 아픈 새끼손가락같은 존재였다. 귀찮지만 챙겨줘야 할 거 같은 형. 가끔은 형인지도 헷갈린다. 정국은 드문드문 어떤 누군가가 지민을 데려가 보살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하고, 박지민과 똑같이 한없이 다정하고, 누가 보아도 괜찮다는 말이 절로 나올 사람이 그 자리에 어울린다 판단했다.

 그런데 이딴 싸이코한테 괴롭힘이나 당하고 있고. 정국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다시 한번 36번째 통화를 시도할 때, 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케이 사장님. 접니다, 부하직원. 제가 방금 영업여행이 취소됐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말이에요. 사장님한테.]



 정국의 영어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쾌활했다. 국제전화의 발신지는 한국이었다.



"호석이 형."

[야 자식아, 대체 언제 신입사원 소개시켜주는 거냐? 이러다 회사에 너랑 나밖에 사원이 없겠다, 없겠어. 창업하는 회사라고 해도, 어? 적어도 사람이 다섯은 있어야 할 거 아냐. 나 어서 다니고 있는 회사 팀장 얼굴에 사표 좀 던져보자.]

"그게 좀…문제가 생겼어요."

[왜?]

"그 사람 다니고 있는 회사 사장이 빼돌렸어요."



 호석이 꽥 음성을 터뜨렸다.



[야! 그걸 놓치면 어떡해! 그래도 가서 잡아야지! 네가 빼가려는 거 알고 벌써 선수 치는 거 아냐? 실제로 아낀다고도 했다며.]

"…아 진짜 아나? 지난번에도 말하려고 할 때 방해하더니 이번에도 그러네."



 정국은 다시 올라오는 뜨끈한 분노에 이마를 짚었다. 저번 레스토랑도, 이번 여행도 모두 민윤기로 인해 실패했다. 그 또라이새끼. 정국은 입안 살을 씹으며 초조해했다. 너무 뜸 들였나. 지민이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는 성격임을 알고 있었고, 탓에 제대로 된 자리를 만들어 설명하고 싶었다. 미국에서의 삶을 다 청산하고 한국으로 가서, 성공할지 말지 모르는 신생회사에서 같이 일을 해달라는 건 도박판에 강제로 참석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호석이 심각하게 말을 걸어왔다.



[너 이러다 부모님한테 손 벌려야 하는 거 아니냐?]

"아직까지도 아버지는 의대 가라고 성화인데 뭘 기대해요."

[아직도 그러시냐? 하긴…병원장 아들이 의사 말고 사업하겠다고 인연 끊고 뛰쳐나갔으니…나 같아도 눈 돌아가는 소리긴 하다. 네 어머니는? 여전하시고? 네 편 아니셔?]

"똑같죠 뭐. 생활비만 주시고 아버지 말 따라서 한국으로 오라 하고. 형 그만 기대 끊어요. 회사 망하라고 압력을 넣으면 넣었지 절대 도와줄 일은 없을 거예요."



 대학까지 해외로 도피한 정국은 일주일마다 한번씩 걸려오는 전화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한국에 와서 의대로 가면 카드 끊은 것도 풀어주고 용서해주마. 근엄하게 명령하는 수화 건너편에 마찬가지로 정색하고 답하면 전화는 끊긴다. 아버지가 청진기를 내려놓으시는 건 어떨까요. 지루한 전화는 정국이 졸업을 4개월 앞둔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왔다. 정국은 결코 이 싸움에서 질 생각이 없었다. 하루 종일 소독약 냄새 맡으면서 하얀 벽만 보면 머리가 돌아버릴 거 같은데 뭐 어쩌란 거야.



"아무튼 다음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말할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오냐. 그럼 이만 형은 끊는다. 내일 회사 가려면 오늘 내 목숨은 여기까지다.]



 좆 같은 회사. 푸념 같은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그러게. 좆 같은 박지민 회사."



 백 번도 공감하며 정국은 지민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 잠시 쉬고 시리얼을 꺼냈다. 질리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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