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슈짐] 아스팔트정글 14

by 토페 posted Jan 03,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BGM Waldeck - Why Did We Fire The Gun>









 뉴욕의 밤은 낮보다 밝다. 불꽃을 뿌린 듯 화려한 도시는 죽는 법이 없다. 특히나 부유한 자에게라면 뉴욕은 관대한 도시였다. 뉴욕에서 손 꼽히는 부를 가진 탕아. 동양인으로 거대한 행운을 거머쥔 자, 윤기는 머리끝까지 술에 취한 채 쓰러지듯 잠들었다 일어나 아침을 맞았다. 침대 옆자리는 나체의 여인이 누워있었다. 술을 얼마나 마셨더라. 숫자는 기억나지 않아도 머리는 울렁거렸다. 윤기는 인상을 쓰며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은 담배부터 입에 물었다. 하얀 연기를 내뿜다 윤기는 문득 시선을 던진 협탁 위에서 평소와 다른 위화감을 찾아냈다.

 늘 엎어놓았던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



 입에 담배를 문 채 액자를 바라보던 윤기는 어제 지민에게 서류를 가져다 놓으라 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제법 잘하나 했더니 또 실수를 뿌리고 다닌다. 저를 무서워하는 지민이 목숨을 내걸고 일부러 건드렸을 리는 없을 터고, 분명 우연찮은 사정으로 세워놨을 것이다. 윤기는 어리버리하게 돌아다녔을 얼굴을 쉽게 떠올리곤 긴 담배연기를 내쉬었다. 겁이 없는 건지, 어리숙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조심성이 없는 건지.

 윤기는 한참이나 오랜만에 마주한 사진을 들여다봤다. 하얀 피부의 하트만 가와 어울리지 않는 동양인 꼬마가 한 프레임 안에 있는 사진은 과거를 두들겼다.


 아주 처음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열려있는 녹색 대문이었다. 군데군데 까진 사자모양의 손잡이를 밀고 들어가면 이끼가 서린 작은 마당이 나오고, 그 왼쪽으로 돌아가면 빨간색 대야와 찬물만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고, 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면 방이 하나 딸린 집이 있었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생물학적 부모의 마지막 말은 기이할 정도로 선명히 남아있다. 윤기야, 엄마 잠깐 아빠랑 어디 다녀올테니까 여기 있어. 혼잡한 역 안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다. 쭈구려 앉아 한참이나 기다려도 부모는 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기다리던 윤기는 경비라 불리는 사람의 손을 잡고 고아원이라는 곳으로 갔다. 인원초과라 난감해하는 고아원의 사정에 따라 한 이불에서 세 명씩 잤고, 그 찬 바닥에 누워 천장을 봤을 때서야 버려졌음을 깨달았다.

 

 두 번째로 만난 부모는 인상 좋은 배불뚝이 남성과 필리핀에서 왔다는 여성이었다. 처음은 행복했다. 한 밥그릇으로 고아원 동생들과 밥을 나누어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았고, 좁아터진 이불에서 자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이 좋았다. 이름은 김윤기로 변했다. 김윤기로 일년을 살았을 때 즈음, 윤기는 사람이 두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웃는 인상이 선한 남자는 술을 마신 밤마다 험한 욕과 함께 여자와 자신을 두들겨 팼다. 인사불성이 되어 주먹을 휘둘렀고 아침이 되면 미안하다며 엉엉 울었다. 얼굴에 짙은 멍자국을 달고 살던 나날이 이어졌고, 차라리 고아원 생활이 낫다 생각할 무렵, 여자가 도망을 갔다.

 윤기는 여자가 도망가기 전날 밤 베개 커버에서 숨겨놓았던 돈을 빼던 장면을 목격했으나 같이 도망가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내 나라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손을 꼭 붙들며 울먹거리는 여자에게 건네야 할 말은 몰라도, 하면 안 될 것 같은 말이 입에 맴돌았다. 나는 당신의 가족이 아닌가요? 우리는 처음부터 가족이 아니었나요? 잠자코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다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남자는 여자가 떠난 사실을 안 뒤 술을 마시는 날이 늘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주먹을 휘둘러 윤기를 상처 입혔다. 그러다 잘못 맞았는지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왔고, 병원 의사들이 기관에 신고해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것이 김윤기로 지낸 날의 마지막이었다.


 고아원으로 돌아와 만난 것은 파란 눈의 부부였다. 필리핀에서 왔던 여자 덕분에 영어를 몇 마디 할 줄 알았던 윤기는 그들과 함께 비행기를 탔다. 알레이 부부는 신혼부부였다. 따스한 웃음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윤기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과거를 안타까워해주었으며, 자신들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이라 안심시켰다. 하지만 행복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릭 알레이가 퇴근하던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픔에 잠긴 리사 알레이 부인은 혼자서는 윤기를 키울 수 없다며 보호소로 다시 돌려보냈다.

 

낯선 땅에서 윤기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세 번째 만남이 찾아왔다. 린다 부부는 윤기를 잘 돌봐주었다. 친절히 영어를 알려줬으며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났을 즈음 브라이언 린다 양부가 도박에 빠져들면서부터 이야기는 다르게 변했다. 빚은 산처럼 쌓여갔고, 집까지 판 브라이언 양부에 참다 못한 린다 부인은 이혼을 선언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윤기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브라이언 린다 양부는 돈을 줄 수 없다 강력히 주장했고, 린다 부인은 이미 두 명의 친자식을 돌봐야 하는 상태에서 입양아인 윤기까지는 돌볼 여력이 없다 했다. 윤기는 2년만에 보호소로 다시 돌아왔다.

 

 세 번이나 파양 당한 아이는 아이 자체에게 문제가 있다 생각되어지기 마련이다. 더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 여길 무렵, 보호소 구석에 앉아있는 윤기에게 부모님과 함께 온 금발의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당시 14살 윤기의 눈에 꿀 같은 금발을 늘어뜨린 초록색 눈동자의 소녀는 천사였다. 안녕, 나랑 우리 집으로 갈래? 그 소녀가 바로 로빈츠 하트만의 외동딸, 엘리 하트만이었다.

 기억 속에서나 사진 속에서나 소녀는 아름다웠다. 내 꿈은 연기자야. 말하며 빛나는 소녀의 초록색 눈동자는 별보다 반짝거렸다. 하트만 가의 보석인 아름답고 우아한 소녀가 언제까지고 찬란할 것 같았다. 김윤기. 헤슬 알레이. 블레멘 린다. 거쳐온 세가지 이름을 준 가정과는 다른 결말을 맞을 줄 알았다. 윤기는 소녀의 마지막인 웃으며 울던, 기괴하게 일그러졌던 표정이 떠오르자 기억하기 싫은 추억을 접었다.

 담배연기를 허공에 뱉은 윤기는 다시 사진을 협탁 위에 엎어놨다. 그리고 서류 틈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을 빼내었다.



"노팅힐이라…."



 지민이 써내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감상문은 코미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춰져 있었다.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고 중반을 읽어내리던 윤기는 어이없어 픽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감상문은 엉망이었다. 어느 장면이 웃겼다는 둥, 현재 영화 촬영지였던 장소는 얼마만큼의 수익을 벌어들인다는 둥, 마지막에는 줄리아 로버츠가 예쁘고, 휴 그랜트가 잘생겼다는 말이 전부다.



"아침부터 뭘 보는데 그렇게 웃어?"

"보고서."

"자기 나랑 사귈 때도 그렇게 안 웃었잖아. 일이 그렇게 좋아?"



 나른히 기지개를 핀 여성이 궁금한지 갸웃거리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성은 맨몸을 보인다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윤기는 감상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말해. 오늘은 곧장 나가줬음 좋겠거든."

"뭐야. 오늘따라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나 방금 일어났다구."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그런 배려를 챙겨야 할 사이인가? 티아."

"아아 어련하시겠어."



 티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룻밤을 보낸 상대치고 차가운 대꾸에도 여자는 상처받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 목적에 의해 만난다. 윤기는 질척거리고 걸리적거리지 않는 하룻밤 상대가 필요하고, 여자는 윤기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원했다. 셈이 빠른 성격인 티아는 윤기와 헤어진 후에도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나름 깔끔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의하자면 언제든 서로의 필요가 멀어지면 떨어질 수 있는 소비적인 관계였다. 이번엔 뭐가 좋을까. 가지고 싶었던 럭셔리 요트를 생각하며 티아가 의외라는 듯 윤기에게 물었다.



"그런데 요즘 왜 신문에 안 나와?"

"경제면에는 맨날 나와."

"나는 그런 쪽 안 읽어. 연예면 말이야. 자기 옆자리가 공석이라는 게 안 믿기는데."



 윤기의 옆자리는 매력적이다. 헤어지기 전까지 물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자리는 왕비와도 같은 자리였다. 윤기는 속이 뻔히 보이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여자들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오는 사람 중에서도 그런 수준과 어울리며 원하는 것을 받고 간단하게 내쳤다.



"뭐 내가 이제 매력이 없나 보지."



 대충 대꾸하며 윤기가 담배를 이불 시트에 아무렇게나 비벼 껐다. 티아가 허,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자기한테 접근하려는 모델만 몇인 줄 알아? 아메리카가 침몰한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겠다. 누구 진짜 마음 가는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궁금하네. 그 행운의 레이디가."

"……."

"아 미안. 너무 프라이빗 했지? 자기는 이런 거 묻는 거 싫어했으니까."



 티아는 점점 굳어가는 윤기의 표정을 보며 대화를 끊었다. 대신 속옷을 챙기며 태연하게 다른 말을 꺼냈다.



"나 일주일 뒤에 결혼해. 자기처럼 돈이 많지는 않지만 나름 괜찮은 거 같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사랑해주거든."



 윤기가 성의 없이 박수를 두어 번 쳤다. 오 그래? 축하해. 오늘이 보는 마지막이네. 이별치고는 지나치게 담백한 인사였다. 얼굴도 보지 않고 서류만 쳐다보며 말한다. 티아는 역시 마지막까지 윤기가 글러먹은 인간이라 생각하며 짧게 손을 흔들었다.



"자기는 너무 얄밉단 말이지. 잘 지내라고 빌진 않을게. 자기가 나 찼으니까."



 혼자 남은 윤기는 마지막 줄까지 읽은 감상문을 협탁 서랍에 넣었다. 마음 가는 사람. 그건 모르겠고, 최근 가끔씩 느끼는 미묘한 순간들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득과 실을 따져 철저히 계산된 행동만 추구하던 윤기는 요즘 자신의 몇몇 행동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박지민을 본 순간 충동적으로 끼어들어 방해한 짓은 지금 떠올려봐도 멍청한 짓이었다. 불쾌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던 박지민의 일행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누군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잡은 약속을 깼다면 둘도 없는 망신을 주며 거절했을 것이다. 탓에 감히 자신을 향해 싸움을 걸어오는 건방진 태도를 무르게 넘어갔다. 윤기의 인생에서 몇 베풀어본 적 없는 큰 아량이었다.

 레스토랑만이 아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죽을 듯 기침하던 것도 외면하지 못했다. 바이러스를 옮길 셈이냐며 빈정거리는 대신 약을 쥐어줬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박지민이 목 끝까지 덮어줬던 코트는 아직까지도 제 옷장에 값비싼 제 옷들과 섞여 걸려있다. 갖가지 명품 브랜드들 사이에 섞여있는 코트는 아침마다 옷장에서 마주한다. 정확히 따지자면 굳이 과거로 돌아갈 필요도 없이 지금만 해도 그렇다. 건방지게 제 물건을 건드렸는데도 괴팍한 성격을 드러내며 내쫓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런 감상을 느끼고 있는 것조차 윤기는 황당했다. 단순히 업무적으로 필요한 것뿐이었다.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면서 많아진 일을 처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엉성하게라도 내린 명령들을 성공시켜 오는 것이 나름대로 볼만하긴 했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도 쫄쫄 뒤를 쫓아오는 게 웃겼다. 완전히 만족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지민은 까다로운 윤기가 봐도 괜찮은 부하직원이었다. 사무실에도 모나지 않게 어울렸고, 시킨 일은 다 해결해왔으니까.

 윤기는 그 불합리한 순간들이 단순히 괜찮은 부하직원에게 느끼는 것 치곤 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쓸데없는 명령까지 내려버렸다. 박지민의 시간을 허비하게 해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과 박지민이 어울릴 시간을 줄인다 해서 내가 얻는 건 뭐지? 무서워하면서도 감기가 걸린다 뒤에서 챙기고, 손이 다친다 다정하게 걱정을 해준다. 박지민이 제게 보이는 다정함이 싫진 않다.  착하고 순한 박지민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다정하게 군다. 석진과 장난치며 웃거나, 레스토랑에서 만난 후배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따스함이 묻어난다.


 나는 널 데리고 뭘 하고 싶은 거지? 어떤 걸 너한테서 받아내고 싶은 거지? 이 구역질 나는 외로움에서 구원해주길?


 알 수 없는 일이다. 윤기는 자신이 느끼는 이 물음들을 지민이 알아챘을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이름이 불리는 게 행복한지 눈을 휘어 접으며 웃는다거나, 여전히 몸을 사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돌연 당당해지는 모습을 볼 때 모르는 게 분명하다. 아니, 어떻게 알겠는가. 윤기 본인조차 모르는데.

 윤기는 곧 지민에 관한 생각을 털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생각이 많다. 일을 하려면 머리를 차게 식혀야 할 필요가 있다.















----


이번편은 좀 짧습니당ㅠ.ㅠ 담편은 빨리 가져올게요